나는 눈을 떴다. 그러고는 한숨을 쉬었다.
"휴. 다행히 또 죽지는 않은 건가?"
그러자 눈앞에서 한심스러워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리야? 당연히 죽었지."
"어?"
"전신이 폭발해서 죽었어."
나는 목소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기에는 안경을 낀 채 나를 한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는 소녀, 전뇌자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전뇌자는 어리둥절해하는 나에게 말했다.
"여긴 [매듭]이니까 당신을 명계에 보내지 않고 계속 영혼과 육체를 붙들고 있을 거야. 그래도 너무 빨리 죽었네."
"……."
나는 잠시후 정신을 차리고는 말했다.
"그, 그러니까 31번째 삶을 시작하진 않는다는 소리지?!"
"[매듭] 안에 있는 한은. 하지만 원래 세계로 돌아간다 해도 전륜성왕을 처리하지 않으면 어차피 죽기도 힘들걸……."
그렇게 대꾸한 전뇌자가 내게 너구리 인형을 던졌다.
"말 그대로 백골이 진토되도록 수련하겠네. 몇 번 죽나 한 번 지켜볼게."
* * *
번쩍
나는 너구리 인형을 받아든 순간 내가 다시 수련장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내가 누워 있던 자리에 흥건하게 피칠갑이 되어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
틀림없이 전뇌자가 날 부활시켜준 것 같다.
나는 내가 또다시 죽음을 겪었다는 사실에 어이가 없었다.
'수련하다가 죽을 줄이야…….'
사신지혼이 이렇게 위험한 수련일 줄은 몰랐다.
나는 당황스러웠지만 그래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차라리 잘 됐군."
죽음과 시간 낭비를 두려워하지 않고 계속 수련할 수 있다는 게 아닌가?
나는 이윽고 심수력을 다시 불러와서 내가 겪었던 괴현상을 말했고, 심수력은 내 이야기를 듣자 고민하다가 말했다.
"음…… 뭔 소리 하는지 모르겠군. 나는 사신지혼을 수십 년이나 수행 했는데 자네가 말한 현상은 한번도 못 겪었네. 다른 그릇이 있다는 건 호월한테도 듣지 못했어."
"호월도 모르는 일이란 말이오?"
"그래. 자네는 대체 어떤 수행을 하는 건가? 나도 한 번 직접 봐야 겠군."
나는 다시금 심수력 앞에서 수련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릇을 토신지혼으로 바꾸는 순간 심수력의 표정이 당황스러운 것으로 바뀌었다.
"아…… 아니 이건."
"뭔가 아는 게 있소?"
심수력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토신지혼이라고 했지? 수련하다가 뒈졌다는 그 쌍성의 기운에 살짝만, 접촉을 해 보게."
거 말 진짜 싸가지 없게 하네 패 버릴까?
나는 험한 생각을 억지로 멈추며 대꾸했다.
"알았소. 또 죽어도 양해하시오."
O O
나는 이번에는 쌍성의 그릇에 직접 부딪히지 않고 살짝 접촉만 했다. 그러자 쌍성의 기운이 내 몸을 빌어 서 발현하기 시작했고, 나는 또 죽을까 봐 급히 '이음새'를 통해서 쌍성의 기운을 미친 듯이 분할 했다. 그러나 8분할이나 했는데도 도무지 기운이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또다시 쌍성의 기운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끄으으읍!!"
내 눈알이 튀어나오며 핏줄이 서자 급히 심수력이 말했다.
"이봐! 단순히 기운을 나누지 말고 두 개의 기운을 나누어서 음양의 조 화를 만들어! 태극(太極)이다!"
태극?!
'…… 무쌍패!!'
나는 바로 무쌍패를 시전할 때의 감각을 이용해서 쌍성의 기운을 제어했다. 그러자 마치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미친 듯이 증폭되던 쌍성의 기운은 크게 가라앉았고, 나는 그제서야 숨을 좀 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폭주하는 쌍성의 그릇으로 옮겨담지는 못했지만, 기운을 제어 하는데는 성공한 것이다.
"후욱…… 후욱……."
"……."
"태…… 태극의 조화라니. 생각지도 못했어. 당신은 이 쌍성의 그릇이 뭔지 알고 있는 거요?"
"자네 백련교 교리 배우지 않았나?"
엉? 백련교 교리?
나는 뜻밖의 말에 어리둥절하다가 말했다.
"배웠지. 갑자기 그건 왜……."
"백련교에서는 명(明)과 암(暗)의 대비를 강조하지. 세상을 암흑이 가득 채우고 있는데 미륵불이 강림하게 되면 광명이 그 암흑을 몰아낸다고 하지 않는가? 그리고 그 과정을 설명할 때 가장 자주 쓰이는 비유가 바로 해와 달일세."
"……!!"
설마
나는 이어진 심수력의 말에 내가 전대미문의 경지에 발을 들였다는걸 알 수 있었다.
"자네는 일월(日 月)의 그릇을 발견 한 것이야."
일월의 그릇!
나는 심수력의 말을 이해하려고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아서 말했다.
"그런 게 어딨소? 사신지혼이 끝이어야 정상일 텐데 일월의 그릇이란 건 사신지혼을 창안한 호월조차 몰랐던 거 아니오?"
"호월도 모르고 나도 모르지. 그냥 지금 이 자리에서 생각나는 대로 말 해본 것뿐일세."
"이런 씨……."
"그런데 강대한 음양(陰陽)의 기운이 자네의 몸을 파괴하고 또한 쌍성으로 서로를 공전한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일월을 상징하네. 강력한 양의 기운은 태양(日)이고 강력한 음의 기운은 달(月)인 것이지. 강호에 일월의 원리를 추구하는 도가공력이 많았기에 나는 이렇게밖에 생각할 수가 없네."
"강력한 음양이라. 그건 화수(火水)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 않소?"
"불과 물의 속성은 자네가 이미 사신지혼으로 갖고 있지 않나? 방금 출현했던 쌍성은 기존속성에서 소화 할 수 없는 새로운 속성이니 그건 절대 아니지."
"으음.
그렇게 말한 심수력은 팔짱을 끼며 말을 이었다.
"혹시 일월의 기운을 습득하거나 수련한 적이 있지 않은가? 내가 볼 때는 자네가 여태껏 쌓아왔던 내력(來歷)이 사신지혼의 공능에 영향을 미친 게 아닌가 의심되는군."
"……."
일월의 기운…….
태양과 달의 기운이라면…….
나는 이윽고 생각나는 게 있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있소."
"역시 그랬군. 어떤 일월의 기운을 수련했는가?"
"자연지기가 아니라 신력(神方)이오. 과거 동영의 창세신인 아마테라스가 갖고 있던 태양신의 힘, 그리고 삼황오제 전욱이 갖고 있던 음신지력(陰神之方)을 얻은 바 있소."
"…… 창세신? 삼황오제? 거참 말 만 들어도 어마어마한 내력이군. 30 번씩 죽으면 별의별 일을 다 겪나 보군……."
심수력이 기가 질린 듯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허나 그건 신력이라서 그냥 획득만 했을 뿐 별도의 수련을 하지 않았소. 아니 신력이란 건 애당초 연습이나 노력이 필요한 힘이 아니고 통제력만 있으면 끝인 거라…… 그리고 신력이란 게 도리어 무공에 영향을 미친다는 게 가능한 일이오?"
"…… 잠깐 생각 좀 해 봅세."
심수력은 곰곰이 머리를 굴리는 듯 했다. 그렇게 한참을 생각하던 심수력이 불쑥 입을 열었다.
"안 될 것도 없지?"
"?!"
"애초에 자네 말대로라면 사신지혼은 신무(神武)의 힘을 받아들일 그릇. 뇌신의 힘을 받아야 하니 뇌신지혼이 필요한 것일세. 그러면 주체가 될 '힘'이 따로 있다면 그 힘에 맞춰서 자네의 그릇이 저절로 만들어질 가능성도 있잖나?"
"…… 음……."
나는 심수력이 말하려는 걸 필사적으로 이해하려 했다. 그리고 한참을 지나서야 말했다.
"그러니까 나한테 일월의 힘이 있 기 때문에 역으로 일월의 힘을 받아 들일 수 있는 그릇을 만들려고 내 내공이 알아서 움직였다 그 말이 되 는 거요?"
"그렇게 되겠군."
"…… 혹시 호월이 이런 현상에 대해 얘기 해준 적 있소?"
"없네. 그냥 전부 내 개인적인 생각일세. 허나 이거 말고 따로 설명 할 방법이 없는 것 같군. 어차피 호월이 만든 사신지혼의 운용도 '그릇'을 만들기 위해 창작한 것이고 다른 방법으로 '그릇'을 만들지 못 한다고는 장담할 수 없어."
내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 지만 심수력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른 고민을 하는 듯했다.
"근데 그렇다고 치면 도리어 토(士)의 성질이 설명이 되지 않는군. 자네 대지속성의 신력이나 무공을 수련한 적 있는가?"
"어…… 잠시만…… 음……."
나는 심수력의 말에 더듬거리다가 문득 생각나는 게 있어서 말했다.
"뇌룡일기공!! 뇌신류의 뇌룡일기 공 자체가 토(土)의 속성이오. 오행 에서 번개는 흙을 상징하기 때문이오."
"음?! 아 그렇군. 맞아. 나도 알고 있었는데 지금 생각났군…… 그러고 보니 뇌신류의 무공 전체가 토속성 이라고 볼 수도 있겠군."
하지만 심수력은 내 말에 납득 하는 듯하다가 도리어 고개를 갸웃했다.
"아냐…… 뇌신류의 공력은 오행(五行)의 토(土)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궤를 따르지 않지. 그래서 오행 의 흐름에 따라서만 움직이면 역작 용이 일어나기 일쑤지 않던가? 뇌신 류의 뇌속성은 단순히 토속성에 귀속된다고 볼 수가 없어!"
"그게 또 뭔 소리요? 나는 여태껏 토생금의 이치 덕분에 현천신공을 이용해서 내공을 쌓을 때 이득을 많 이 봤는데……."
"생각해보게. 오행의 속성대로라면 본디 뇌신류와 풍신류는 전부 토속 성에 속하게 되네. 허나 호월은 뇌신지혼과 풍신지혼을 만들었을지언정 토신지혼은 만들지 않았어. 왜냐 하면, 본교의 뇌수화풍은 오행과 비슷해 보이지만 그 원리를 완전히 따르지 않는 속성이기 때문일세."
"음!"
"중요한 것은 '힘'과 '그릇'이 아닌 가 싶군. 거기에 비춰서 생각해보면…… 토신지혼은 뇌신지혼과 별개 이며, 토신지혼을 자네가 발현했다면 따로 이유가 있을걸세!"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번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설마?'
토(土)에 속하는 신력이나 공력이 내게 따로 존재한다는 말인가?
뇌신류의 무공을 제외하고?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건 딱히 없었다. 여태껏 모았던 신력의 속성을 생각해봐도 토속성이라고 따로 말할 수 있는 게 없는 것이다.
'확실히 심수력의 말대로 이건 수수께끼로군.'
내가 고민하고 있자 심수력이 말했다.
"아무튼 수련하다 죽을 정도라니 열심이로군. 너무 열심히 하면 오래 갈 수 없으니 쉬엄쉬엄하게."
"알아서 하겠소. 당신은 수련을 잘 하고 있소?"
"호월한테서 평소 지도받던 게 있 으니 나도 할 건 하고 있네."
심수력은 훗 하고 웃더니 한마디를 남기고는 사라졌다.
"나중에 또 한 판 붙어 봅세."
슈웅
나는 심수력이 사라진 공간에서 다시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고민했다.
'도대체 새로운 사신지혼의 파생이 생겨나는 이유는 뭘까?'
산행을 하고 있는데 정해진 산책로 대로 따라가지 않는 샛길이 여기저 기 생겨나 있는 기분이다. 무시하고 정로(正路)를 따라가면 무난하게 사신지혼을 발동할 수 있지만, 그 샛 길이 워낙 떳떳하게 나 있고 정비가 되어 있어서 혹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저걸 사로(邪路)라고 단정 짓기에는 너무 자연스럽게 드러난 운용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샛길을 도대체 누가 언제 어떻게 왜 만든 것이란 말인가?
이 사신지혼에는 또 다른 비밀이 있는 것인가?
나는 의혹을 머릿속에서 한동안 곱씹다가 이를 꽉 깨물었다.
"흥. 그렇다 해도 지금은 원래 하 던 것부터 익숙하게 하는게 맞지."
우우웅
나는 다시 뇌신지혼부터 시작해서 수혼화를 거치며 수십 번씩 차례를 돌리는 수련을 계속했다. 이번에는 딱히 샛길로 가지 않고 정해진 사신지혼의 융통(融通)에만 신경을 썼 고, 체력과 의념을 소모하기를 반복 했다.
'쌍성일월(雙星日月)의 변화를 뚫기에는지금 내 사신지혼의 숙련도가 너무 부족해.'
아까 죽어보고 깨달은 사실이다. 일월의 변화를 뚫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힘이나 기술이 필요한데, 이제 갓 사신지혼에 입문한 숙련도 로는 넘볼 수가 없는 그릇이다. 토 속성으로 변화시키는 건 무난히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사신지혼이 아닌 다른 것에 섣불리 손을 뻗었다가 어떤 부작용이 생길지 장담할 수가 없다.
'일단은 사신지혼의 변화를 실전에서 쓸 수 있을 수준으로 익숙히 만들어야 한다!'
열다섯 호흡이나 있어야 변화시킬 수 있는 이 느려터진 변환속도를 최소한 한두 호흡만에 발동시킬 수 있을 정도로 빠르게 해야만 지금 나를 둘러싼 수수께끼를 헤쳐나갈 힘을 가질 수 있으리라.
풀썩
"헉…… 헉…… 휴식……."
신력을 쓰지 않고 그저 순수회복력 만으로 이 수련에 임한다.
시간이 좀 더 들겠지만 그래도 내 가 순수한 무(武)에 집중하는 감각 이 더 중요하다.
체력의 회복은 금방 되었지만, 정신력과 의념이 소모된 것은 금방 회복되지가 않았기에 나는 꽤 많은 시간을 회복에 소모해야 했다.
나는 그렇게 전력을 다해서 집중하며 수련과 회복을 반복했고, 체내시계는 진작 고장 났다고 생각할 만큼 서슴없이 시간이 흘러가는 게 느껴 졌다. 이렇게 무의미하게 시간을 반 복수련으로 보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사신지혼을 반복수련했다.
스스스
'…… 이제야 열 호흡 정도로 줄인건가?'
전신이 녹초가 될 정도로 사신지혼의 수련을 반복하기를 수백 번이 넘 었을 때 - 그제서야 나는 다섯 호흡가량을 줄일 수가 있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미 시간이 최소 수십 일 정도는 흐른 것 같았다. 나는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한 호흡만에 바꿀 수 있을 때까지 반복연습을 반복 하고 또 반복했다.
계속 반복한다.
이제 좀 감이 생기려 하면 또 사신지혼의 운용이 복잡해서 헷갈리고 막히기를 반복하지만, 그래도 계속한다.
내 머리가 딸려서 쉽사리 익히지 못하면 대신에 내 몸이 외워줄 것이라고 기대하기 때문이다.
우우우 -
우우우우
'젠장…… 아직도…… 느려…….'
나는 3천여 번을 훌쩍 넘었다고 생각했을 즈음에 간신히 속도를 서너 호흡까지 줄일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때쯤 저만치에서 수염이 약간 자란 심수력이 성큼성큼 걸어와서 말했다.
"이봐. 3년 동안 다른 곳을 여행하다가 왔는데 수련은 좀 어때? 사람이 없고 자연물만 가득한 세상이라서 여행하긴 좋더군."
나는 조금 당황해서 반문했다.
"…… 3년? 벌써 그만큼 시간이 지났소?"
그러자 심수력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설마 3년 내내 먹지도 자지도 않고 그 자리에 가부좌 틀고 앉아서 사신지혼만 계속 수련한 거냐?"
"그렇소……."
"제정신이 아니군…… 그래서 성취는?"
"보시오."
후우우웅!!
내가 빠르게 사신지혼의 뇌신지혼 부터 시작해서 수혼화, 염혼화, 풍혼 화를 거쳐다시 뇌혼으로 되돌아오 는 걸 시전했다. 그 속도를 보던 심수력이 말했다.
"이제 조금만 더 하면 실전에서 써먹을 속도는 되겠군. 근데 가히 수 천 번은 그 짓을 했을 건데 아직도 느려…… 얼마나 재능이 없는 건가?"
"맨날 듣던 소리요."
"흐흠. 먹지도 자지도 않고 3년이라면 정상적으로 살면서 수련했다면 최소 20년은 지나야 지금의 성취에 이르렀겠군. 하긴 뭐 무한에 가까운 시간이 있다면야 재능 부족 정도야……."
"그러는 당신은 이 수련세계를 여행하면서 수련을 하긴 했소?"
"산수를 구경하면서 할 건 다했지. 금강권(金鋼拳)의 성취도 좀 늘었고."
심수력이 내 앞에 털썩 앉더니 말 을 이었다.
"보아하니 전에 말했던 일월의 그릇이나 토의 그릇에는 아예 도전을 안 한 모양이군. 두려워서 그런가?"
"어차피 죽어도 부활할 건데 뭐가 두렵겠소? 기초가 충분치 않아 하나 마나 실패하는게 더 싫어서 기초를 쌓았을 뿐이오. 내가 원하는 사신지혼의 변환속도가 되면 그때 도전할 생각이오."
"좋은 자세로군. 헌데 무공 수련경력이 수백 년이나 되는 자가 여전히 초심(初心)이라니……."
"……."
"어쩌면 그게 둔재의 장점일지도 모르겠군."
나는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헛소리하지 말고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빨리하시오. 나는 지금도 사신지혼을 수련하고 싶어서 죽겠으니까."
심수력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사실 토의 그릇에 대해서 해답을 찾은 것 같거든. 절벽의 동굴에서 면벽수련 하면서 문득 생각이 나더라고."
나는 심수력의 말에 눈이 번쩍 뜨 였다.
"정말이오?!"
"그래. 하지만 괜히 내가 먼저 알려주는 게 네 깨달음에 방해가 되지 않을지 걱정되는군."
"……."
나는 그 말에 깊이 고민했다. 그러고는 평상시와 다른 대답을 했다.
"좋소. 그럼 안 알려줘도 되오."
"그러지."
평소라면 냉큼 심수력의 정보를 알려달라 했을 것이다. 하루라도 빨리 높은 성취를 이루어져 낮은 재능을 극복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내 의지로 타인이 전해주는 정보를 거부한 것이다.
'왠지 저 정도는 굳이 남의 도움을 구하지 않아도 내 힘으로 얻을 수 있을 것 같아.'
수련속도가 느린 것보다 더 두려운 것은 타성(情性)이다. 남의 도움에 의존해서 어떻게 무(武)의 극한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장삼봉이나 여동빈이 남한테 가르 침을 의존하는 건 도저히 상상도 되 지 않았다.
내가 그들과 같은 수준으로 올라가 기 위해서는 일단 내 마음가짐부터 바꿔야 하리라.
심수력이 말했다.
"청룡무관에 머물고 있을 테니 뭔 일 생기면 말해주게."
"그러시든가."
나는 돌아온 심수력이 청룡무관에서 묵든 말든 다시 사신지혼의 수련을 반복했다. 남이 뭐라 하건 내가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으니 그냥 하는 것뿐이다. 누가 쳐다보기 때문에 하는게 아니라 순수하게 나 자신의 발전을 위해 노력한다는 이 감각은 언제 느껴도 좋았다.
'신기하군. 어떻게 보면 장삼봉 밑에서 무쌍패를 깨닫기 위해 무아지 경으로 몇 년간 태극권만 하던 때랑 다르지 않으나…….'
그때와 달리 나는 지금 즐거웠다. 혹독한 수련의 결과 얻게 되는 결과 물이 천지차이가 났으며 어쩌면 이대로 시간 낭비일지도 모르는데 그냥 수련에 몰두하는 것 자체가 재밌게 느껴졌다.
이런 감각은 정말 오랜만이 아닌가?
'그래. 그때처럼 마음을 비우자.'
나는 어느 순간 무쌍패를 수련할 때처럼 무념무심(無念無心)에 진입 해서 무아지경으로 사신지혼의 수련만을 계속하게 되었다. 어느새 숫자를 헤아리는 것도 그만두었으며 그 저 사신지혼의 운용에만 모든 것을 걸고 반복하고 있었다.
쿠구구구
언젠가부터 나는 내면에서 굉음(安音)이 울리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내가 배가 고파서 나는 소리이거나 내장이 요란하게 떨리는 게 아니었고 말 그대로 심음(心音)이 뇌를 향해 정면으로 꽂히는 소리였다. 다만 그 굉음은 거슬리거나 내 머릿속을 번잡하게 하지 않았고 도리어 굉음 이 울리는 동안에는 더욱 마음이 가라앉아서 한없이 수련에만 집중할 수가 있었다.
이 소리는 뭘까?
나는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는 무엇인가?
쏴아아 —
폭포소리.
폭포소리가 들린다…….
[삶에 지친 자여…….]
머릿속에 알 수 없는 구결(日決)이 흐른다. 나는 처음에는 이게 내가 외우고 있던 수백 종의 무공중에서 하나의 구결이 아닌가 싶었지만, 이 내 구결이 마치 시냇물처럼 천천히 머릿속을 흐르면서 그게 아니라는걸 알 수 있었다.
구결과 함께 나는 어느새 폭포 앞에 서 있었다.
폭포에는 누군가가 막다른 바위에 홀로 서 있었고, 그는 염주를 달각 거리며 한 알씩 움직이며 조용히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빛조차 없는 새벽의 폭포 -
그 폭포의 비경(秘境) 속에서 그는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
서서히 지평선 너머에서 해가 떠오를 때.
일출(日 出)과 함께 그는 폭포 아래 로 뛰어내렸다.
[세수(洗隨)하여 위대한 마음의 수련에 입멸(入滅)하노라…….]
쩌엉 - !!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굉음(安音)이 멎었고 나는 마치 홀린 듯 이 멍한 눈으로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마치 범종(楚鐘)이 울리는 듯한 마 지막 환청이 계속 뇌를 뒤흔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내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을 때 외부세계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이봐!! 지금 뭐 하는 거야!! 정신 차려!]
심수력의 목소리였다.
나는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빠르게 황홀경 상태에서 현실으로 되돌아왔고, 다음 순간 깜짝 놀랐다.
"!!"
웅웅웅
나는 어느새 허공에 반쯤 떠올라 있었고 내 사신지혼은 뇌신지혼(雷神之魂)의 형상을 한 채 막대 형상을 을곧게 유지하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그 상태에서 내 주변에는 3개 의 원구(圓球)가 떠올라 있었으며 마치 내 주변을 돌듯이 회전하는 중 이 아닌가?
원구는 제각각 염혼(炎魂), 수혼(水魂), 풍혼(風魂)이 틀림없어 보였다.
'내, 내가 어떻게 이걸 하고 있는 거지?'
아니다.
이성적으로는 바로 정의 내릴 수 없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다.
내 '몸'이 이미 사신지혼을 뿌리 깊게 기억하고 있어서, 수만 번의 시도 끝에 사신지혼의 흐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외웠다는 사실을.
그러나 몸이 외운 것은 결코 머리로 이해할 수 없다. 타인에게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것이다.
마치 장인이 어떻게 도자기를 빚는지 그 결(缺)을 타인에게 말해줄 수 없는 것과 같다.
어처구니없는 모순이지만 그것 또 한 무(武)이다.
츠즈즈즈 -
동시에 나는 뇌광(雷光)과 함께 엄청난 번개의 파장이 내 몸에서 뿜어 져 나가는 걸 알 수 있었다.
'즙(汗)을 짜는 것 같구나!!'
나는 이게 무슨 현상인지 대번에 알 수가 있었다.
세성의 가호!
목성에 몰아치던 어마어마한 번개의 힘이 마치 즙을 쥐어짜듯이 내 상단전에서 그대로 방출이 되고 있는 중이었다. 틀림없이 사신지혼의 과도한 소모를 이기지 못하고 세성의 힘이 뇌신지혼을 통해서 바깥으로 힘을 뿜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방출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나는 줄곧 내 머리를 아프게 했던 두통이 가라앉고 점차 몸이 가뿐해지는 것 을 느꼈다.
'…… 그래서 막대 모양이었구나.'
사신지혼의 힘을 발현하는 형태가 원구가 아닌 막대의 형태인 이유.
그것은 의념천주와 가장 닮은 형태 가 되어서 강렬한 힘을 퍼내기 쉽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 모든 것이 안배인 것이 틀림없었다.
파칭!!
어느 순간 나는 내 전신에 흐르던 모든 힘이 소진되면서 사신지혼의 전개가 사라지는 걸 알 수 있었다. 한차례 쓸데없는 괴력을 뿜어내자 전신에서 비 오듯이 땀이 쏟아지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사신지혼이 끝나자마 자 땅에 떨어져 버렸다.
풀썩
내가 쓰러져 있자 심수력은 믿기지 가 않는다는 듯 말했다.
"…… 백웅. 자네는 둔재인가 천재 인가? 헷갈리는군."
"……."
"마지막으로 얘기한 지 9년이 또 지났다는 건 알고 있나? 자네는 그 시간 내내 사신지혼 수련만 했다네."
나는 그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9년이고 90년이고 알 게 뭐란 말 인가.
"그게 뭐가 중요하오?"
한참 후 나는 비틀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길을 찾았는데."
비로소 길을 찾았다.
나는 그렇게 확신한다.
"……."
내 말에 심수력이 입을 열었다.
"우선…… 자네의 누더기짝이 된 옷이나 좀 어떻게 해보게. 정말 십 수 년의 시간 동안 한 자리에 죽치고 앉아서 수련만 할 줄은 몰랐군."
"흠."
슈욱
나는 신력을 발휘해서 넝마조각에 가까워져 있던 더러운 옷을 다시 깨끗한 새 옷으로 만들었다. 나는 심수력을 쳐다보며 말했다.
"나는 또다시 내가 찾아간 길을 가려고 하오. 당신은 그 시간동안 뭔가 얻었소?"
심수력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내공이 더 늘어났고 금강권식(金鋼奉式)의 약점을 찾아서 개량했지. 전보다 한꺼풀 벗긴 했네만."
"다행이오."
"그래도 길을 찾은 자네에 비할 바 는 되지 않는 것 같군……."
뭔가 감탄하고 있던 심수력은 갑자 기 주먹을 내게 슥 하고 들이밀더니 말했다.
"새로운 길로 들어서기 전에 한 번 더 대련이나 해보겠나?"
"좋소."
나는 가타부타 따지지 않고 심수력의 대련요청을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심수력 만한 절대지경의 무인이 싸워보고 싶어서 손이 근질거릴 정도로 지금의 내 성취가 뛰어나다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동안 수련했던 사신지혼의 공능을 얼마나 발휘할 수 있을지가 궁금해졌다.
"간다!"
금강천지쇄(金鋼天地碎)!
대결이 시작되자마자 심수력은 갑자기 자신의 최강기술을 날려왔다. 그의 좌권(左奉)에 맺힌 금빛 기운이 마치 맹호처럼 강맹하게 울부짖으며 나를 향해 덮쳐오자 나는 내심 감탄했다.
'대단한 의념이군. 그리고 전보다 더욱 헛점이 사라졌다…….'
심수력도 십수 년간 놀고 있지만 않았던 모양인지 전에 싸워봤던 금강천지쇄에 비해 훨씬 강력하다. 예전처럼 삼보절기로만 피하다가는 분명히 천과 지를 잇고 나서 인으로 피할 때 약점을 노출할 게 뻔했다.
'회피만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수 준의 기술. 그렇다면 천지인의 방위에서 마지막 변화를 회피가 아닌 방어로 전환해야 한다.'
삼보절기(三步絶技)
환유권(人換流奉)
타당
천(天)과 지(地)의 두 걸음이 이어진 후 마지막 인(人)의 변화에서 나는 외팔을 들어서 뇌운유권(雷雲流 奉)을 펼쳤다. 뇌운강권과 뇌운유권은 뇌신권을 익히기 전 뇌신류의 기본권공이었지만, 초식의 숙련도에 있어서는 뇌신권에 뒤지지 않았다. 만력(萬方)을 흘려내는 버드나무와 같이 나는 힘에 거스르지 않으며 유권을 펼쳐서 금강천지쇄의 기술을 받아내었다.
쩌정
내 장저(掌低)와 심수력의 권압(奉壓)이 충돌하는 순간 거대한 힘이 비틀리면서 균열을 만들어내었다. 하지만 나는 장저에서 퍼져나오는 따가운 고통에 침음성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역시!! 상대가 안 돼.'
콰앙!!
나는 그대로 뒤로 날려가서 삼 장 을 튕기듯이 회전한 후 땅에 내려앉 았다.
뚝…… 뚝…….
내 팔은 피칠갑이 되어 있었고 팔 여기저기에서 찢긴 상처가 나 있었다. 그리고 찢긴 상처 사이로 선혈이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누가 봐도 나의 열패(쏘敗)였지만 정작 나와의 대결에서 우위를 점한 심수력은 신통치 않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 피륙의 상처로 그치고 근골(筋骨)을 완벽히 지켰군. 겨우 그 정도 권법실력으로 가능한 일인가?"
나는 그의 말에 훗 하고 웃었다.
"얕본 것처럼 되어서 미안하군. 하지만 한번 시험해보고 싶었소."
방금전의 대결은 사실 내가 일방적으로 박살이 나야 정상이었다. 상대는 권법 하나로 무림의 초절정고수에 오르고 그 이후로도 호월의 지도 아래 절대지경까지 권술을 연마 한, 권법의 일대종사(一代宗師)! 더욱이 같은 사대무류였기에 뇌신류 권법도 알만큼 알고 있었고 생소함의 우위조차 없는 상태였기에, 심수력의 극성에 달한 금강천지쇄를 상대로 고작 뇌운유권으로 맞서면 내 전신이 개박살 났어야 하는 것이다. 같은 절대지경이었기에 내공의 격차조차 그 숙련도 차이를 메꿔주긴 힘 들었다.
검법이나 창술이라면 몰라도 나는 권법에 깊은 수련을 쌓지 않았기에, 심수력이 볼 때 내 권법실력은 마치 어린아이가 걸음마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으리라.
그런데도 나는 방금전 삼보절기를 이용해서 뇌운유권만으로 가벼운 상처만 남기고 그의 최대절기를 흘려 내는데 성공한 것이다!
심수력은 예리한 눈빛으로 말했다.
"역시 자네가 사신지혼을 깨달으며 얻은 건 그 묘용뿐만이 아니야. 자네 내부에 떠돌고 있던 정리되지 않던 깨달음 일부가 내면화된 것으로 보이는군."
"그런 것 같소. 평소에는 극강의 고수를 상대로 삼보절기를 회피로밖에 쓸 수 없었는데 지금은 왠지 다르게도 쓸 수 있을 것 같았소."
"훗. 극강의 고수는 무슨…… 자네 같은 자가 그런 말을 하면 내 얼굴이 부끄러워지네."
헛웃음을 흘리던 심수력이 그 자리 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자네는 여태껏 쌓아온 걸 소화시키는 중인 것 같군. 그동안 어떤 생각을 했는지나 들어보세."
"그러지."
나는 심수력에게 방금전 내가 겪었던 현상과 지금까지 수련을 하면서 느낀 온갖 감정을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한참 동안 조용히 듣고 있던 심수력이 불쑥 입을 열었다.
"방금전 모습을 드러냈다는 그 깨달음의 환영…… 자네는 거기에 대해 짚이는 게 있는 걸로 보이는군."
"있소."
"그것 또한 자네가 모아온 신공비급(神功秘級) 중 하나인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마도 역근세수경(易筋洗隨經)이 아닐까 싶소."
틀림없다.
세수를 언급한 데다가 그 염주를 든 불자가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그 광경은 - [현대인의 마음 수련 역 근세수경]에 나왔던 그 장면 그 자체였던 것이다.
혹시나 싶어서 몇 번이나 보았던 구절이었기에 헷갈릴 수가 없었다.
"……!!"
그러자 심수력은 흠칫하며 경악했다.
"역근세수경!! 혜가 님의 그 엄청난 절기를 말하는 것인가!"
"혜가를 아시오?"
"당연히 알고 있네. 직접 뵙지는 못하였지만 혜가의 제자 도신(道信)이 호월과 역근세수경을 써서 겨루는 걸 보았다네. 도신이 대결 후 자기 입으로 역근세수경을 썼다고 했지."
"……?!"
뭐라고?!
도신과 호월이 겨룬 적 있다고?!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에 나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리고 말했다.
"좀 더 자세히 말해주시오. 제 2대 소림사 주지인 도신이 역근세수경의 힘을 쓸 수 있는 건 나도 알고 있었지만, 그가 호월과 겨룬 적이 있단말이오?"
"그렇네."
"처음 듣는 이야기군…… 당신을 포함한 4명의 수행제자들은 그걸 직접 보았단말이오?"
"그래. 사실 그걸 봤다고 해야 하는지는 모르겠네만."
"무슨 소리요?"
심수력은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들의 대결은 너무 형이상학적이 었네. 심공(心功)이 시공간을 변화 시키면서 우리 같은 고수들조차 그 대결의 전개를 알아볼 수가 없었지. 확실한 건 그대로 두면 모순(才看) 이 되었을걸세."
"모순이라…… 무슨 뜻이오?"
"호월은 도신의 방어를 뚫지 못했고 그렇다고 도신 또한 호월을 쓰러 뜨릴 방법이 있는 게 아니었네. 창 과 방패처럼 보였지."
"……."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심수력에게 말했다.
"혹시 호월이광룡파천황을 써서 싸웠소?"
"당연히 그랬네. 그것도 처음부터."
"으음!!"
"하지만 이상한건 도신에게서는 의념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네. 그 대결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아무런 무공도 없는 일개 스님이라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우리는 더더욱 소 림사 무공이 신비하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초무린의 증언과 같구려……."
초무린 또한 도신의 무공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나는 심수력의 말에서 이상함을 느끼면서 생각했다.
'역근세수경은 도대체 무엇이길래 익힌 자가 신역(神域)에 도달하되 아무런 무공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걸까?'
어쩌면 장삼봉이나 여동빈의 무공보다 더욱 신비한 게 역근세수경일지도 몰랐다.
'무엇보다 어째서 500년 후에 아무의미 없는 텍스트 파일로 수백만 개 씩 나돌던 역근세수경이…… 이제 와서 내게 깨달음의 단서를 준 거지?'
나는 한참 고민에 빠져 있다가 심수력에게 말했다.
"당신에게 역근세수경의 내용을 들려주겠소. 혹시 당신도 깨달음을 얻을지 시험해보시오."
"오! 그거 좋지."
나는 심수력에게 역근세수경의 내용을 좔좔 이야기해주었다. 그러나 심수력은 끝까지 다 듣고 나서 머리를 긁적였다.
"이게 무슨 무공비급인가? 그냥 수련자가 고민하다가 절벽에서 뛰어내리고 삽질하는 신세한탄이지 않은가."
"그렇소. 심지어 500년 후의 미래에서는 불법공유로 나도는 평범한 텍스트 파일이었소. 그래서 나도 이게 당연히 가짜일거라 생각했는데…… 내게 비쳐 보였던 그 환영은 틀림없이 이 내용이었소."
"그렇구만.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심수력이 나와 같이 고민해주다가 입을 열었다.
"…… '마음의 수련'이란게 중요한 게 아닐까?"
"마음의 수련? 그거야 무인으로써 늘 하고 있는 것인데……."
"아니야. 역근세수경에서 줄곧 강조하는 가장 중대한 내용이 바로 그것일세. 그렇다면 자네는 수련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역근세수경이 발동할 수 있는 조건을 충족시킨 게 아니겠나."
"으음……."
그렇게 따지면 내 마음의 기질이 변화했기 때문에 역근세수경이 비로소 나타날 수 있었다는 소리인 건 가?
하지만 그런 식으로 발동하는 무공 이란 게 어떻게 존재할 수가 있는 거지?
기(氣)와 내공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런 무공을 구현화할 수가 없다.
'설혹 의념이라 하더라도 불가능 해…….'
내가 당황하고 있을 때 심수력이 말했다.
"역근세수경 얘기는 이쯤 하지. 어차피 자네가 수련하며 다시 찾아내야 할 일이니까. 그것보다 이제 사신지혼으로 가야 할 길을 찾은 것 같은데 내게 살짝 알려줄 수 있겠나?"
"그야 물론…… 나는 이제 사신지혼으로 방금전과 같은 수련을 반복 할 것이오."
그러자 심수력은 의외라는 듯 말했다.
"일월의 그릇이나 토의 그릇에 도전하지 않고 말인가?"
"그렇소. 왠지 그것들은 내가 정로(正路)를 더욱 착실히 밟으면 저절로 갈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고 있소."
"그냥 자네의 감각인 거지?"
"맞소."
"세상에서 자네보다 사신지혼을 열심히 수련한 자는 없을 테니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심수력은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나도 자네와의 대결에서 얻은게있으니 한 10년 후에 봅세나."
"그러지."
나는 심수력이다시 청룡무관에 들어가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우우웅 -
다시 사신지혼의 변환을 시도하자 나는 이제 한 호흡만에 사신지혼의 형질을 바꿀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제야 심수력과 같은 속도로 변환이 가능해졌군.'
이 정도는 되어야 실전에서 사신지혼을 써먹을 수 있는 것이다. 미친 듯이 수련만 해서 십수 년이 걸렸으니, 아마 실제로는 오십 년 이상 수행해도 이 경지에 도달할까 말까였으리라.
'…… 십 년으로는 턱도 없었군. 심수력은 쉽다는 듯 말했지만 역시 이것도 백련교의 비전절기라서 어려 운 거였잖아…….'
나는 내 생각보다 훨씬 사신지혼이 어려웠다는 생각에 헛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어쨌든 경지에 오르고 나면 아무 상관 없는 것이었기에 나는 내 길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여기서 호흡을 더 빨리하는 수련을 하면 어떨까?'
나는 곰곰이 생각해보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왠지 이제 변환의 속도는 중요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실전에서의 한 호흡도 보통 인간의 감각으로는 찰나였기에 이 정도면 충분하다. 진짜 중요한 것은 내가 얻은 이 묘경(妙境)을 좀 더 확실히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나는 눈을 반개한 채 빠르게 내 몸을 뇌혼화시켰고, 뇌신지혼의 상태에서 내 주변에 3개의 구체를 만들어내었다.
'역시 난 이제 사신지혼의 새로운 경지에 접어들었다. 나 자신을 축으로 하여 3개의 그릇을 따로 운용하는 감각을 알게 된 거다.'
잘은 모르겠지만 미친 듯이 반복하다보니 그 감각을 운 좋게 손에 넣은게 아닐까? 나는 필설로 형용 할 수 없는 감각에 기분이 묘해졌지만 동시에 내가 뭘 해야 하는지 알고는 정신을 집중했다.
수혼화(水魂化)
쩌정
그러자 내 몸에 곧추선 의념천주의 기운이 감응하면서 내가 끌어낸 뇌신지혼의 기운이 수신지혼으로 바뀌 었다. 그러나 나는 그와 동시에 내 주위를 회전하는 3개의 구를 보고는 내심 한숨을 쉬었다.
'역시…….'
3개 다 수혼으로 변해 버렸다.
'힘과 기술이다 필요한 영역이 찾아왔다.'
중앙에 막대기처럼 결집한 거령(巨靈)의 변화와 함께 내 주위를 도는 3개의 사신지혼의 성질을 개별적으로 유지시키는 것.
아마 이걸 해낼 수가 있어야 나는 다음 경지로 진입할 수 있으리라.
이걸 해서 내 무공이 무엇이 향상 되는가?
그건 잘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하는 것뿐, 이걸 해서 내 무공이 훨씬 더 진화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재밌으면 그만이야.'
감이 온다.
중앙의 사신지혼을 변화시키면서 다른 사신지혼을 유지시키는 경지 -
이 경지에 도달했을 때 나는 비로 소 일월지혼(日月之魂)에 도전할 수 있으리라고.
나는 그리고 미친 듯이 수련을 계속했다. 사신지혼을 끌어내어 탈력 할 때까지 형질을 변화시키기를 시도하고, 그러다가 힘이다 빠지면 기절하듯 쓰러져서 하늘을 보는 시간이 반복되었다. 이전의 수련보다 훨씬 빠르게 기력이 소모되었지만 나는 어느 순간 체력과 의념 회복이 훨씬 더 빨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만히 있어도 내면에서 힘이 차 오른다. 이건…….'
상단전(上丹田)?
상단전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힘이 회복을 시켜주는 것 같았다. 나는 두세 배는 빨라진 회복속도에 영문을 모르고 있다가 대략 수천 번을 넘었을 때야 겨우 알 수가 있었다.
"아! 머리가 안 아프니까……."
틀림없다.
세성의 가호를 충분히 소화했고, 그 소화된 뇌령의 기운이 내게 새로운 회복력을 가져다주고 있는 것이다.
회복력이 한층 강해진 후 수련은 한층 빨라졌다. 원래도 먹고 자는 과정 없이 수련에만 매진하고 있었는데 체력과 기력을 회복하는 주기가 더 빨라진 덕이었다.
하지만 빨라지면 빨라질수록 나는 내면에서 심마(心魔)가 치솟아 오르는 것 같았다.
'도무지 모르겠군.'
우웅
나는 화신지혼에서 풍신지혼으로 바꾸는 와중에 인상을 찌푸렸다. 또 다시 내 주위를 도는 3개의 소구가 한꺼번에 풍혼(風魂)으로 바뀌어 버렸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작은 그릇의 형질만 따로 유지할 수 있을까?"
이미 이 문제에 직면한 후 사신지혼의 회전을 수백 번은 거듭한 것 같다. 그러나 숙련도가 높아짐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야 작은 그릇의 형질을 유지 시킬 수 있을지 감이 안 온다.
과거 심수력의 말이 맞았다.
[두 가지 이유일세. 기술과 힘이 모두 부족하기 때문이지.]
[비유하자면 마치 네 개의 손발을 다 따로 움직이면서 각자 다른 초식을 펼치는 느낌이지. 자네에게 전승 해줬던 사신지혼 변환요결 한 권을 통째로 심화시켜서 또 심화시킨 걸 순식간에 해내야 하는데 그것만으로도 신기(神技)나 다름없는 감각이 필요하지. 그래서 큰 화령을 변화시 키면 나머지 작은 변화를 다 화령의 변화에 귀속시킬 수밖에 없어.]
그 당시에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왜냐하면 사신지혼을 실전에 쓸 정도로 수련하는 것만으로도 벅찼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 그가 '네 개의 손발을 따로 움직이며 다른 초식을 펼치는' 신기(神技)가 필요하다는 게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었다.
투웅
내 내면에서 수혼(水魂)의 그릇을 만드는 요결이 튕긴다. 나는 그 튕긴 반탄력으로 다른 그릇을 회전시 키기 위해 경맥에 의념을 흘려보내 [길]을 만든다. 그리고 정해진 길에 따라 사신지혼이 형성되지만, 그 미묘한 순간에 나는 반탄력을 계속 제어할 수 없었다.
'…… 이건 한 손으로는 서예를 하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바늘로 구슬 을 꿰는 거나 다름없다.'
미묘한 순간이라고 표현했지만, 찰나라 해도 부족할 만한 시간에 무려 수십 개나 되는 경맥의 흐름이 얽힌다. 나는 그 흐름 속에서 최적의 한 순간을 찾아서 또한 반탄력을 유지 하듯 힘의 제어까지 완벽하게 해야 한다. 하나의 구(球)만 유지하는 것 만으로도 이렇게 힘든데, 3개나 되는 소구의 형질을 제어하는 건 말 그대로 신기라 할 수밖에 없다. 나는 내공수련만 수백 년의 경력이 있는데도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의 난이도다.
도저히 단순반복만으로는 답이 나 오지 않을 것 같다. 그야말로 선명 하게 재능 부족을 느끼는 국면에 접 어든 것이다. 나는 이 벽을 느끼자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후우…… 도대체 이 벽을 몇 번째 만나는 건지 모르겠구나.'
재능의 벽을 느낀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아니, 살면서 접했던 거의 모든 무공이 내게 재능의 벽을 느끼게 했다. 단지 전생이라고 하는 막대한 기연을 이용해서 뛰어난 스승의 도움으로 돌파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던 것이다. 지금처럼 나 혼 자 힘으로 벽을 뚫을 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절망적인 기분이 들곤 했다.
그러나 절망 또한 감정의 일부에 불과하다. 하도 많이 절망을 느끼다보면 그건 상수(常數)이자 상리(常理)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게다가 지금 이 순간도 나보다 더 개 같은 상황에서 노력할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 인간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이제 와서 재능의 벽에 절망하기에 는 너무 멀리 와 버린 것 같았다.
더이상 섣불리 남한테 답을 구해 서는 안 된다. 더욱 개 같은 재능부족 때문에 절망하는 한이 있어도 이번에는 그냥 나 혼자 힘으로 벽에 부딪혀야만 한다. 언제까지 스승이 내 앞길을 선도해줄 수는 없는 것이다.
'몰라! 모르니까 일단 또 반복하겠다!!'
쿠우우우
나는 머리를 비우고 일단 최대한 사신지혼을 많이 돌리는데만 집중 했다. 기절하듯이 체력과 의념을 모두 소모했다가 다시 깨어나서 또 수련하기를 얼마나 반복했을까? 나는 또다시 생각을 잊고 노력에만 전념 하게 되었고 나를 둘러싼 자연환경 이 일출과 일몰만을 반복하는 듯했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나는 어느새 사신지혼의 호흡이 좀 더 짧아졌음을 느꼈다. 눈곱만큼이지만 진보한 것이다. 나는 그 사실에 못내 기뻐서 씨익 웃었다.
"흐흐."
아 모르겠다. 이렇게 된 거 수련진도가 아무려면 어떤가? 매일 노력해서 뭔가 얻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티끌만 한 소성(小成)만으로도 나는 만족할 수 있다.
도대체 얼마 만에 이런 재미를 느껴보는 것일까?
'그러고 보니 심수력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군. 청룡무관에서 또 나간 건가?'
나는 잠시 청룡무관 내부로 들어가서 안을 살폈다. 그러자 탁자 위에 하나의 서찰이 쓰여 있는 게 보였다. 심수력이 적어놓은게 분명해 보였다.
[백웅. 이 세계는 인간만 존재하지 않을 뿐 현실의 세계와 완벽히 같은 물리적 배경인 듯하네. 그 말인 즉슨 원한다면 대륙과 바다를 넘어 미리 다른 장소에 가볼 수 있다는 뜻 이겠지. 나는 그 사실을 알았기에 내 나름대로 세상을 둘러보러 가겠네. 다시 만날 때는 내가 알게 된 것을 알려주도록 하겠네.]
음?
나는 심수력의 서찰에 고개를 갸웃 했다.
'이게 무슨 뜻이지?'
즉 현실의 지구와 같은 공간이니까 세계여행을 하러 가겠다는 소리인가?
근데 지금 이 세계를 둘러봤자 뭐가 좋다는 거지?
나는 이미 30번이나 전생하면서 세상 여기저기를 다 둘러보았기에 심수력의 말이 의아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더이상의 관심을 가지기엔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였기에 그의 서찰을 탁자 위에 놓았다.
"뭐, 나중에 다시 얘기하면 되겠지…… 음?"
이제 보니 서찰 뒤편에 뭐가 더 적혀 있잖아?
나는 뒤편에 적힌 내용을 읽어보았다.
[추신. 혹시 내가 오랫동안 돌아오지 못할까 봐 내가 아는 권장법의 기초를 안쪽 방의 서책에 기록해두었네. 만일 권법에 호기심이 생기면 자네의 기초를 쌓도록 하게.]
"권법의 기초라?"
나는 호기심이 생겨서 안쪽 방으로 향했다. 안쪽 방이라는 건 당연히 청룡무관에서 청룡 이광이 평소에 쓰던 안방을 뜻하는 것이었다. 나는 안방의 책상 위에 떡하니 놓여 있는 두 권의 서책을 집어 들고 앉아서 읽어보았다.
그리고 두 시진 내내 읽다가 중얼 거렸다.
"말 그대로 기초로군. 하지만 이 자체로 절학(絶學)인가……."
나는 금강권왕 심수력의 독문절기인 금강권이 적혀 있나 싶었지만, 전혀 아니었다. 금강권 이전에 권법가가 갖춰야 할 기초적인 체력수련 법, 주먹을 쥐는 법, 발차기를 하는 법 등이 수록되어 있었다. 사실 이런 건 내가 뇌신류의 권법을 할 때도 대개 수련했던 기초 중의 기초였기에 별 감흥이 없었다.
그러나 이걸 절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는 기초를 어떻게 닦아야 권법의 정수(精髓)를 터득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심수력만의 독자적인 해석(解銀)이 첨부되어 있기 때문이 었다. 단순한 기법 한두 개에 불과했지만 어떻게 내공을 이어서 의념 을 발휘하는지 기록되어 있다.
'평범한 무인은 이 기초가 왜 대단 한지 모른다. 하지만 절대지경이라 서 알 수가 있다.'
말 그대로 지금의 내게 가장 필요한 권법서!
온갖 권법의 고급수법이나 초식을 많이 알고 있지만 정작 그런 초식을 왜 써야 하는지 모르는 나 같은 자에게 가장 걸맞는 요결이었다.
나는 심수력에게 마음을 읽혔다는 생각이 들자 약간 민망했다.
'내가 권법을 수련하고 싶다는 욕심이 읽힌 것 같군. 그래서 절대지경인 내게 가장 필요한 요결을 정리 해서 따로 한 권의 비급을 만들어준 것이다.'
이렇게까지 해줬다면 수련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몇 년이 지났는지 모르지만, 어차피 사신지혼의 수련이 답보 상태라면 기분을 전환할 겸 색다른 경험을 해보는 것도 좋으 리라. 무엇보다도 절대지경 고수이 자 권법의 일대종사인 심수력이 열 심히 쓴 비급이라면 그 자체로 무림 의 보물이나 다름없다.
나는 바로 심수력의 권술요령을 들고 나가서 연무장에서 한 번 익혀보기 시작했다.
'십이퇴법(十三圈法). 이거부터 다시 해 볼까?'
십이퇴법이란 바로 발차기를 하는 방법이었다. 각법(脚法)이라고도 부르는 이 수법은 사실 거리의 삼류 불한당들도 익힐 수 있을 정도로 간단했고 기본적으로는 상단, 중단, 하단 차기가 있었다. 그리고 상중하단 의 3대 퇴법은 인간이라면 누구든 알고 있었기에 거기에서 다른 차기 수법이 분화되어서 다양한 발차기 무술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십이 퇴법에 있어서 극한에 이른 자는 아 마도 남만 최강의 권법고수인 진국 준일 것이다.
'다시'라고 표현한 이유는 사실 이 십이퇴법은 뇌신류 권법인 뇌운강권과 뇌운유권을 수련할 때 다 배웠던 것이기 때문이다. 상중하단 차기부터 시작해서 돌려차기, 앞차기, 뒷차기, 꺾어차기, 밀어차기, 올려차기, 이단차기, 날아차기 같은 사소한 퇴법 하나하나를 전부 배웠었다. 사실 십이퇴법을 모르면 뇌운강권과 유권 의 초식 자체를 전개할 수 없으므로 당연히 배운 것이다. 뿐만 아니라 무당권법과 칠대절학을 익히면서 은근히 많이 연습했기에 십이퇴법에 있어서는 당연히 자신 있다.
말하자면 무림 최고수 수준에 올라서 기초 중의 기초를 다시 들여다보 는 셈!
갓 입문한 무림제자나 하는 수련을 새삼 하는 기분이 들었다.
투두둥
가볍게 발차기를 몇 번 했을 뿐인 데도 공기가 크게 울리면서 음속보다 더욱 빠른 발차기가 저절로 나간다. 엄청난 내공을 실어서 찼기 때 문이다. 이정도만 해도 발차기 한 방에 건물을 가라앉힐 수 있을 텐데, 여기에 의념까지 실으면 산을 동강 낼 정도로 강력한 발차기가 가능할 것이다.
나는 기본 발차기를 좀 연습해보다가 권술요령을 보면서 턱을 쓰다듬었다.
"호오…… 기본기만 연환해 보라고?"
앞차기에 진각을 밟고 옆차기 후 반탄력으로 뒤돌려차기?
투쾅
시키는 대로 해 보니 뜻밖에도 강 맹한 발차기가 나갔다. 이것 자체로 강력한 각법 초식이었기에 나는 꽤 쓸 만하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주억 거렸는데 심수력이 써놓은 주석에 눈길이 갔다.
[모든 무술이 그러하지만, 권법은 결국 손과 발을 쓰는 법이다. 기본 기가 모여 응용기를 이루고 초식이 라 불리기에 기본기가 강력할수록 무예의 위력은 저절로 강해진다. 그 리고 권법의 기본기는 또한 자신의 몸을 얼마나 완벽하게 활용하느냐도 중요하다.]
"……."
나는 마치 홀린 듯이 그의 권술요령을 읽어나갔다.
'다 아는 얘긴데…… 다 수련해본 건데…… 왜 자꾸 눈이 가는 걸까?'
모르는 얘기는 하나도 없다. 다 뻔한 얘기뿐이고 권법수련할 때 다 해본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한 줄 한 줄 정성들여서 읽었고 한 글자 한 글자 머릿속에서 되새기며 읽었다.
정신없이 집중력을 발휘해서 읽기 를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어느새 한 줄의 해석을 읽을 때마다 하나의 응용을 직접 펼쳤고 그 십이퇴법을 머릿속에서 복기(復模)했다. 내가 한 번의 발차기를 할 때도 어떻게 차야 하는지, 근육이 어떻게 움직이 는지가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움직이 고 있었다.
신기하다. 왜 이렇게 기본을 수련 하는게 재밌는 것일까?
나는 어느새 십이퇴법에 이어 권장 법의 이십사수(三十四手)를 다시 수련하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먹고 자는 걸 잊은 채 무아지경으로 몰입했기에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것만으로 적어도 몇 년의 시간은 지난 것 같았다.
터엉!!
진각을 밟으며 장저(掌底)를 강하게 앞으로 떨치며 일 장(一掌).
심수력의 권술요령에는 적혀 있지 않은 초식이었지만 나는 몸이 자연 스럽게 그 투로(«路)를 만들어가는 것을 익혔다. 나는 생경한 투로를 펼친 후 그대로 굳어서 무언가를 한 참 동안 생각했고, 이윽고 그 자리에 털썩 앉으며 중얼거렸다.
"그렇군."
나는 몇 년의 시간이 지나서야 내가 홀린 듯 권술의 요령에 빠져든 이유를 알아챌 수 있었다.
"이 또한 묘예(妙藝)의 역(域)이로 구나."
이청운이 내게 주입하듯이 가르쳤던 묘예의 역. 그것은 특정한 무공이 아니라 여러 가지 초식과 전개방식을 결합하는 법이었고 주로 검술과 창술에 편중되어 있었다. 나는 그 경험을 바탕으로 온갖 무공의 이해도를 높이면서 부족한 숙련도를 보충해왔는데, 오늘에서야 내가 뭘 잘못 알고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무한의 무공에 무한의 가짓수가 존재한다.
검술에 묘예의 역이 있다면 마찬가지로 권법에도 묘예의 역이 스며있는 것.
지금 심수력이 내게 준 권술의 요령은 바로 그의 일대종사로서의 이해(理解)가 스며있는 권법의 묘예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특별 한 무공이 없고 기본기뿐인데도 마치 이청운에게서 묘예의 역을 수련 받을 때와 마찬가지의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이리라.
'심수력은 정말 대단한 고수구나.'
그는 진정으로 권법의 일대종사라 할 만한 인물이었다. 운 나쁘게 호월의 시대에 태어나서 그렇지 다른 시대였다면 틀림없이 무림을 제패했 을지도 모르는 권법의 기린아이자 천재! 그에게서 묘예를 전승받은 것 은 내 행운이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때였다.
원(圓)!
어째서인지 내 머릿속에는 하나의 원이 떠올라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 원을 보면서 지금까지 배웠던 것들이 스며들듯이 흡수되는 걸 느꼈고, 그 원이야말로 이치 그 자체라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이…… 이건 깨달음?'
잘 설명할 수는 없지만, 저 원의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기도?!
여동빈이 계속 원을 그리라고 했던 이유는 설마?
'어! 알 것 같은데! 알 것 같은데!!!'
알 것 같은데 이런 씨발!! 아니 왜 여기서 못 나아가는 거지?!
뭔가 부족한 건가?!
…….
모르겠다!
털썩
나는 그 돈오의 순간에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고 주저앉고 말았다. 발을 동동 구르며 초조해 한 것도 소용없는 것이다.
"헉,…… 으으으…… 제기랄……."
주르르륵
나는 억울해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 물리적으로 너무 아파서 흘렸던 눈물과 달리 마음속에서 치밀어오르는 분노와 억울함을 도저히 숨길 수 가 없었다. 방금전 분명히 깨달음의 순간이었지만 뭔가가 부족해서 원의 진짜 의미를 깨닫지 못한 것이다.
나는 그 순간 내가 왜 깨닫지 못 했는지를 알아차렸다.
'점수(潮修)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돈오라고 하는 깨달음의 순간은 언제가 되었든 찾아오게 되어 있지만 바로 그 순간에 쌓여 있던 점수의 노력치가 부족하면 이런 식으로 깨 달음을 놓쳐 버리는 것이다. 이런 경험은 흔하지는 않았지만 내 기분 을 비참하게 만들기는 처음이었다.
하지만 비참함과 동시에 내 마음속에는 오기가 치솟아 올랐다. 왜냐하면 이 짧은 절망의 순간 동안에 또 다른 사실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공간에 온 뒤로 내가 쌓은 수양은 불철주야 용맹정진하기를 수십 년의 세월이 넘었다.
이만한 점수의 수련치로도 부족할 정도의 돈오라면…… 도대체 어느 정도의 위력을 갖고 있는 것인가?
거대한 점수가 동반될수록 더욱 거 대한 깨달음이 찾아온다는 걸 알고 있는 나로서는 기대할 수밖에 없다.
'여동빈이 늘 원을 강조한 이유가 있었구나!!'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