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수력은 뇌신지혼을 보고 놀란 마음을 추스르고는 말했다.
"아무튼 좋네. 본디 사신지혼을 익힐 때 각 유파의 '그릇'을 만드는 게 어려운 거지만 자네는 차고 넘칠 정도로 만들어 놓았군. 어쩌면 호월 보다 더……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변환(變換)의 비법(秘法)만 터득하면 되겠어."
"변환의 비법! 그걸 배우면 타 무류의 속성을 맘대로 쓸 수 있는 것 이오?"
"그런 셈이지. 헌데 사신지혼을 쓸 때 방금 자네의 뇌신지혼처럼 '그릇'을 다루지는 않아."
"……이름만 같고 방법이 다르다는 건 알겠소."
아마 심수력의 뇌신지혼과 후대 이청운의 뇌신지혼은 '그릇'을 다룬다는 점에서만 같을 뿐 전혀 다른 무공일 것이다. 내 말에 심수력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우선 사신지혼의 요결부터 전수하지. 꽤 기니까 이걸 외우는 것도 시간이 걸릴걸세."
심수력은 사신지혼의 요결을 처음 부터 끝까지 내게 말해주었다. 역시 이건 별개의 무공이라서 요결도 따로 존재하는 것이다.
'확실히 양이 많군. 비급으로 만들어도 한 권 정도는 너끈히 채우겠어.'
나는 한 번에 듣고 다 외울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동안 기억력 하나 는 자신 있을 정도로 발달시켜왔기에 한 20번 정도 들으니 다 외웠다고 자신할 수가 있었다. 나는 그 후 로도 두 시진 내내 계속 외우기만 반복하다가 심수력에게 말했다.
"다 외운 것 같소."
"사실 내용이 좀 더 있네. 방금 외운 것의 2배 정도만 더 외우면 될 걸세."
뭐가 그렇게 많아?
"뭐, 그리 중요한 건 아니고 사신지혼을 통제하는 세부요령 같은 거지. 뼈대만 잘 익혀놓고 재능있는 자라면 굳이 이것까지 들을 필요는 없을걸세."
나는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시간이 300년이나 있는데 뭐하러 가려듣겠소? 하는 김에 다 말해 주시오."
재능있는 놈이라면 외울 필요 없겠지만 난 재능이 없으니까 외워야만 할 것이다.
재능이 없으면 외우기라도 잘해야 한다. 그게 지금까지 내가 무공을 배워온 방법이었다.
나는 그 후로 약 십 주야 밤낮을 계속 심수력에게 사신지혼의 비급을 전해 듣고 외우고 또 외웠다. 암기 력이 좋다고 해도 양이 많으면 앞부 분을 까먹을 수도 있기 때문에 머릿 속에 아예 박아 넣으려고 미친 듯이 외운 것이다.
심수력은 내게 요결전승을 끝내자 말했다.
"음…… 자네 말마따나 무재(武才)나 요령이 좋은 편이 아니군. 생각보다 사신지혼을 배우는 게 오래 걸 릴 수도 있겠어."
"늘 겪었던 일이오. 효율 같은 건 생각지 않기로 했으니 신경 쓰지 말고 전수나 계속해 주시오."
"알았네. 그럼 요결의 첫 부분대로 나를 따라서 진기를 움직여보게."
나는 심수력이 말해주는 혈도(穴道)를 따라서 진기를 도인(導引)하 면서 기공을 발휘했다. 심수력의 말대로 하자 이윽고 체내에 있던 내공이 빠르게 움직이더니 마치 화살처럼 변해서 촉이 날카로워지는 게 느껴졌다.
"이 화살 같은 기운은?"
"호오. 화살의 형태로 뭉치는데도 최소 석 달이 걸리는데 역시 '그릇'이 이미 되어 있어서 바로 그 단계로 넘어갔군."
감탄하듯 중얼거리던 심수력이 말 을 이었다.
"그 날카로운 기운을 심장 근처에 맴돌게 한 채로 뇌령을 끌어내 보게."
파직!!
"좋아. 뇌령을 끌어낸 상태로 그대로 날카로운 기운을 내가 말해주는 순서대로 경맥(經脈)에 부딪혀."
투두두둥 -
심수력이 시킨 대로 하자 나는 갑자기 몸 외부로 방출되던 뇌령의 기운이 크게 잦아들어서 쇠약하게 보일 정도로 쪼그라드는 걸 알 수 있었다.
"헛! 뇌령이 줄어들다니……."
"화살 같은 기운을 체내의 경맥에 부딪혀서 선천기공을 격발시킴으로 써 사대령(四大靈)의 기운을 응축시키는 거지. 그리고 응축된 상태에서 다음 36자의 구결을 따라서 진기를 움직여보게."
후와아악 - !!
"……화령(火靈)이!!"
놀라운 일이었다. 전신에 흐르던 번개의 기운이 갑작스럽게 화염의 기운으로 변하더니 전신에 장중하게 흐르는 것이다! 그것도 단순히 기본 지공(基本之功)만 변환시켰던 기존의 수법과는 달리 강렬한 내공 속성 전체가 뒤바뀐 느낌이었기에 충분히 응용기나 필살기의 성질도 변화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심수력은 씩 웃으며 말했다.
"사신지혼의 나머지 구결도 다 이런 식일세. 뇌령에서 화령으로 바꾸는 수법, 화령에서 수령으로 바꾸는 수법 등등…… 한 번 바꾸고 나면 그 '그릇'을 이용해 어떤 무공을 펼치는지는 본인의 자유야."
"그래서 양이 많은 거구려."
"바로 그거지. 특별한 깨달음이 필요한 무공은 아니지만 하나라도 틀린 부분이 있으면 주화입마에 걸려 버리거든. 그래서 각각의 수법이다 운용하는 맥류(脈流)가 다르기에 싹 다 외워야 하는게 골치 아프지만, 좀 쓰다보면 몸이 알아서 외울걸세. 숙련되면 변환속도도 빨라질 거 고."
"무슨 말인지 알겠소."
무예의 기술을 수천수만 번씩 연습 하다보면 굉장히 복잡한 구결도 자연스럽게 몸 그 자체가 외우는 때가 찾아온다. 아마 사신지혼 또한 그런류의 기술인 게 분명했다. 마치 복잡한 악기의 현에 실려 있는 음, 그리고 악보를 외우는 것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그냥 시전 방법만 외우는 거라면 재능이 많이 필요하지 않아. 하긴 단순한 속성변환기술이니 이 이상 어려운 것도 언어도단이겠지.'
어림잡아 십여 년 정도면 확실히 내 것으로 만들 자신이 있었다. 내가 내심 자신 있어 할 때 심수력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리고 이게 중요한 건데, 사신지혼을 연속으로 쓰면 힘의 소모가 가중(加重)된다."
"가중 된다고? 그게 무슨 뜻이오?"
"알기 쉽게 설명해주지."
우웅
심수력은 자기 손바닥을 펴서 전에 보여줬던 것처럼 화령을 중심으로 뇌령, 수령, 풍령이 소구(小球)처럼 도는 수법을 시전했다.
"언뜻 복잡해 보이지만 이것도 자네에게 전수했던 사신지혼의 응용일 뿐이야. 화령에서 일부분을 떼어서 3개를 각각 성질변환을 시킨 후 공전시키는걸세. 헌데 이 형태에서 중앙에 있는 가장 큰 화령의 성질을 변환시키면 어떻게 될 것 같나?"
나는 심수력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음…… 뭐 화령이 뇌령이나 수령, 풍령으로 변하겠지."
"그래. 그건 달라지지 않아. 하지만 이걸 잘 보게."
파지직!
잠시후 심수력이 중앙의 화령을 뇌령으로 뒤바꾸었다. 그러자 갑자
기 화령 주위를 돌던 3개의 령(靈) 이 거의 동시에 뇌령으로 함께 변해 버리는 게 아닌가?
"헉! 왜 조그만 거 3개가 전부 뇌령이 되는 거요?"
"두 가지 이유일세. 기술과 힘이 모두 부족하기 때문이지."
심수력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우선 기술. 지금 내 역량으로 이 정도 응용은 충분하지만 큰 성질변화를 하면서 거기에 귀속된 작은 성질까지 유지하는 건 너무 어려워서 할 수 없네. 비유하자면 마치 네 개의 손발을 다 따로 움직이면서 각자 다른 초식을 펼치는 느낌이지. 자네 에게 전승해줬던 사신지혼 변환요결 한 권을 통째로 심화시켜서 또 심화 시킨 걸 순식간에 해내야 하는데 그 것만으로도 신기(神技)나 다름없는 감각이 필요하지. 그래서 큰 화령을 변화시키면 나머지 작은 변화를 다 화령의 변화에 귀속시킬 수밖에 없어."
"흐음."
"그리고 힘. 설령 천부적인 감각이 있는 천재라서 전자의 기술조건을 만족시켰다 해도 이렇게 제각기 다른 변화를 한 단계 거칠 때마다 엄청난 내공과 기력이 소모되네. 사신지혼은 어디까지나 '그릇' 사이를 옮겨 다니기 용이하게 만들기 위해 만들어진 기술인데, 변화가 중첩될 수록 그걸 넘어서기 위해서는 더 큰 힘이 필요하네."
"얼마나 큰 힘이 필요한 거요?"
"얼마나…… 그건 개인차가 있어서 뭐라 말을 할 수 없지만, 마치 종이를 무한히 접을 수는 없다는 원리라고 말할 수 있네. 어느 순간부터 어마어마한 힘이 필요하잖은가?"
"아…… 그런 거군."
나는 심수력의 말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두세 번 정도는 실전에서 성질 변화를 써먹을 수 있지만, 과도하게 사신지혼을 쓰려 하면 힘이 많이 소모된다 그 소리구려."
"그렇네. 연속으로 펼칠 때는 무조건 그 법칙이 적용되지. 그래서 실전에서 사신지혼을 쓸 때 상대의 허를 노리기 위해서 몇 호흡을 견주다 가 쓰는 편일세. 그나마도 한두 번?"
심수력은 팔짱을 끼며 말을 이었다.
"설명은 이 정도면 되겠군. 이제부터는 실제 응용법을 가르쳐주지."
나는 그로부터 석 달 내내 심수력에게서 사신지혼을 응용하는 법을 배웠다. 나는 당연히 뇌령을 위주로 다른 속성으로 변화시키는 법을 수련했고, 심수력은 비급을 알기 쉽게 설명해주면서 내가 수련하는 걸 도와주었다.
석 달이 지나자 심수력이 말했다.
"아직도 실전에 써먹을 수준이 못 되는군. 성질 변화를 시킬 수 있지만, 너무 느려."
"으음……."
심수력의 말대로였다. 나는 이제 사신지혼의 요결을 이용해서 뇌령을 다른 속성으로 변화시킬 수 있게 되었지만, 문제는 그 시간이 호흡으로 칠 때 열다섯 호흡이나 필요하다는 점이었다. 실전에서는 아예 쓸 수 없을 정도였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요결대로 빨리하려고 하면 무조건 전개가 꼬이니까 천천히 바꿀 수밖에 없소."
"그게 재능이 없다는 것일세."
"……."
왜 갑자기 처맞은 기분이 드는 거지?
"그래도 이런 건 그나마 재능을 덜 타는 분야이니 수만 번씩 계속 연습 하다보면 차츰 빨라져서 언젠가는 써먹을 수 있을걸세."
"거 참 칭찬을 하는 건지 욕을 하는 건지 하나만 하시오."
내가 툴툴대자 심수력이 말했다.
"아무튼, 자네 혼자서 사신지혼을 수련할 수 있을 만큼은 전승해줬네. 이젠 자네가 날 좀 도와주면 좋겠 군."
"저번에도 그 얘기를 하던데 내가 뭘 도와줄 수 있단말이오? 이 공간에서 탈출하고 싶다면 전뇌자에게 부탁해서 어떻게든 해보도록 하겠소."
그러자 심수력은 손을 내저었다.
"아니. 나도 수련을 하고 싶으니 그럴 필요는 없네. 내가 도와달라는 건 다른 거야."
나는 의외의 말에 심수력을 쳐다보았다.
"당신도 300년간 수련을 하겠다고?"
"수련하면 강해지지 않겠는가? 무인으로서 굳이 이런 기회를 마다할 이유는 없네."
"흠…… 수련하면서 당신을 도와줄 게 따로 있는 건가."
내가 중얼거리자 심수력이 말했다.
"자네가 말했었지. 나한테 진룡(眞龍)의 힘이라는 게 있다고."
"그렇소. 삼황 복희가 진룡의 힘 때문에 폭주하는 당신을 제압해주었지만, 굉장히 강맹한 힘이었소. 우주를 누비는 진정한 용족의 힘이라서 무척 드문 것이라고도 했지."
심수력은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하다 가 운을 띄웠다.
"사실 그 힘에 대해 짐작이 가는 게 있긴 하네."
나는 그의 대답에 눈을 둥그렇게 떴다.
"짐작 가는 게 있다고? 그게 무엇 이오."
"그건…… 아마 호월(虎月) 교주의 힘일 것일세."
"..!!"
호월교주가 진룡의 힘을 갖고 있었다고?
나는 그 말에 짐작 가는 게 있어 서 외쳤다.
"광룡파천황!! 그 힘이 설마 진룡의 힘이었다는 말이오?"
"호월은 그렇게 말했네."
"호월 교주가…… 당신은 도대체 호월과 어떤 관계요?"
심수력이 과거를 회상하는 듯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우리 넷은 본디 백련교에서 최고 의 지위를 갖고 있었지만 호월의 행보를 수행하면서 모든 과거의 이력과 무명(武名)을 버린 채 그를 따라 나섰지. 우리는 호월이야말로 일천 년 내 무림 최강자가 틀림없다 생각했으며 앞으로 천 년 이내에도 그를 넘어설 자가 없으리라 여겼기 때문이야. 그의 무공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면 충분히 감수할 수 있는 일이 었네."
"최고의 지위? 하지만 나는 심수력 당신의 이름 같은 건 전생하면서 들어본 적이……."
그러자 심수력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후후…… 자네 전생하면서 혹시 팔대고수(八大高手)라고 들어보았나?"
"팔대고수?"
나는 기억을 꼼꼼하게 되짚어보다가 문득 그 단어를 알아채고는 급히 반문했다.
"팔대고수라면…… 호월의 시대에 무림 최강자로 손꼽혔던 8인의 절세 고수잖소."
"……."
"그리고 그들 중 3명은 각자 뇌신 류의 초대종사 초무린처럼 화신류, 풍신류, 수신류의 종사가 되었다고 알고 있소. 당신이 그들 중 한 명이 라는 것이오?"
"아무래도 대충은 알고 있지만, 자 세히는 모르는 것 같군. 하긴 전생 자한테 나 같은게 뭐가 중요하겠나……."
심수력은 한숨을 쉬었다.
"내가 바로 팔대고수 중 한 명이자 본디 금강권왕(金鋼奉王)이라 불리던 심수력이다. 나는 혼자 힘으로 장강(長江)의 무림을 제패하고 오천 명이 넘는 무림세력을 이끌고 있었지."
"으음!"
나는 그의 말이 허풍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감탄했다.
'강호에서 꽤 이름을 날리던 자였군!'
오천 명의 세력이라면 웬만한 대문파로는 어림도 없을 정도다. 고대라는 걸 감안하면 정말 대단한 세력을 꾸리고 있었으리라. 아마 수십 개 이상의 문파를 그의 발아래 복속시킨 게 분명하리라.
"성(城) 다섯 개를 공격하여 거점으로 만들기도 했었다. 그때가 내 인생에서 제일 잘나가던 시절이었는데……."
옛날이 그립다는 듯 중얼거리던 심수력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천하제패를 외치며 백련교 주인 광룡신군(狂龍神君) 호월에게 도전했다가 삼 초식만에 패배하고 그의 수하가 되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당대의 팔대고수 모두가 호월에게 패배해서 백련교의 수하가 된 것이다."
나는 심수력의 말에 퍼뜩 생각나는 게 있어서 말했다.
"그러면 팔대고수 중에서 3명은 각자 사대무류의 종사로 낙점받았고 나머지 4명은 이름을 남기지 않고 호월의 직계제자가 되기를 청했다는 말이오?"
심수력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것이다. 그 3명은 사실 우 리 시대에 삼천존자(三天尊者)이라 고 불리며 나머지와는 수준이 달랐 으니 어쩔 수 없지. 한 명은 정파의 최강자였고 다른 한 명은 사파의 최 강자, 나머지 한 명은 정사지간의 괴인이었다."
"호오. 그러면 그 삼천존자는 호월 을 상대로 꽤 버텼겠구려."
"아니. 그들은 십여 초식을 버텼다. 호월이 그들을 죽이려 했다면 더 빨리 끝났겠지. 어차피 상대도 안 되었어."
"……."
"팔대고수끼리 실력 차는 있었지만 호월을 상대로는 전부 애송이였을 뿐이지."
허무한 듯 중얼거리던 심수력이 말을 이었다.
"더 웃긴 건 원래 삼천존자보다 훨씬 뒤처지던 내 무공이 호월의 제자가 된 후에는 그들을 여유롭게 상대 할 정도로 늘었다는 거다. 그는 정말…… 천외천(天外天)이었지. 그래서 강호의 명성을 버리는데 한 점의 후회도 없었다."
"그랬구려……."
"삼천존자는 호월의 가르침을 조금만 받은 채 사대무류의 종사가 되어 자파의 무공과 세력을 발전시키는데 힘쓰는 역할이었고 우리는 그냥 순수하게 강함을 추구하여 호월의 친위대이자 제자가 된 것이다. 호월과의 관계는 그렇게 알면 된다."
나는 듣다가 이상함을 느끼고 말했다.
"잠깐. 팔대고수면 여덟 명인데 3명이 종사가 되고 4명은 직속제자가 되었다면 나머지 1명은 어디 갔소?"
"신녀 아유타의 제자가 되었다."
"아."
"그는 원래 술법계였으니 호월이 알맞다고 생각해서 아유타의 제자가 되게 했지."
나는 그제서야 과거의 의문 중 하 나가 풀리는 걸 느꼈다.
'그래서 그랬던 거군.'
과거에 이청운이 말해줬던 게 기억 났다.
[백련교의 초조(初祖) 달마는 강대 한 불법(佛法)의 힘을 다스리는 괴승('怪僧)이었다 전해지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추종자들을 모아서 은 밀히 백련교를 만들었는데, 그 초창 기의 백 년 정도는 완전히 공백일 세.]
[그 부분의 역사만 마치 의도적으로 사라진 것처럼 실전되었네. 그래서 내가 알고 있는 건 되레 사대무류가 확실히 정립된 이후의 역사뿐 일세.]
실전된 백여 년의 역사.
그건 바로 진공가향에 실패한 달마의 유지를 이어받은 호월교주가 백련교를 중흥시켜 무림의 패자(朝者)로 일어서게 만든 후, 새로운 사대 무류를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친위대나 사대무류 종사가 된 팔대고수의 정체는 숨겨야 했을 것이다. 만일 그들의 정체가 세상에 알려지면 나처럼 초혼술(招魂術)을 쓰는 자나 신적인 존재가 그들의 영혼을 불러서 백련교의 비밀을 캐려 했을 테니까.
이런 사소한 부분까지 호월의 안배가 미쳐 있었단말인가?
내가 내심 감탄하고 있을 때 심수력의 말이 이어졌다.
"호월의 제자가 되어서 무공을 배우는 중 우리는 간절히 호월의 광룡 파천황을 배우기를 원했다. 왜냐하면, 호월은 사람과 싸울 때 광룡파천황을 쓴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응? 그게 무슨 말이오?"
"팔대고수를 십 초 내에 패배시킬 때 한 번도 안 썼다는 소리다. 그러나 호월은 자기 입으로 광룡파천황을 쓰면 평소보다 수십 배 강해진다고 했지. 실제로 호월이 광룡파천황 을 쓰면 용이든 괴물이든 다 한방에 누웠다. 누구든 광룡파천황에 군침을 흘리지 않겠나."
"……."
광룡파천황을 쓰면 힘 조절을 못 하고 다 죽여 버릴까 봐 안 썼던 거구나…… 쓸 필요도 없을 정도로 인간 무인과는 실력 차가 많이 나기 도 했으리라.
"하지만 호월은 광룡파천황만은 누구에게도 가르치지 않았다. 심지어 수제자 초무린한테도…… 우린 그 이유를 계속 궁금해했지만 호월은 우리가 그를 수행한 지 십여 년이 넘자 그제서야 이유를 가르쳐 주었지."
"이유가 무엇이오?"
심수력은 하늘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달마의 도움으로 저주받은 광룡의 힘을 얻은 것뿐이라 하더군. 반대로 그는 광룡의 힘을 억누르기 위해 본 신의 무공을 필사적으로 발전시켰 고, 살아남기 위해 수행한 거였어. 나중에 무공과 광룡의 힘이 균형을 이루자 목숨의 위협은 사라졌지만, 그는 여전히 광룡을 통제할 자신이 없다고 했다."
"……!!"
"우리를 수행 제자로 둔 이유도 그 거였지. 만일 광룡의 힘을 제어하지 못하고 폭주하면 목숨을 걸고 자신을 막으라는 거였어."
나는 뜻밖의 진실에 멍해졌다. 굳이 과거를 삭제한 네 명의 무명제자를 두어서 수행하게 한 이유가 그것 이었단말인가?
나는 약간 당황해서 말했다.
"다…… 달마가 호월에게 광룡의 힘을 전수했다고? 처음 듣는군."
심수력이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그래. 아마 네가 말한 진룡의 힘 이란 바로 그 광룡의 힘을 말하는 것이다."
"으음."
"하지만 말했듯이 나는 기억이 없다. 호월이 백두산에 갈 때 곁에서 수행한 기억까진 있지만, 그 이후의 일은 몰라."
어두운 표정을 지은 심수력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 이곳에서 힘을 합쳐서 무공을 절차탁마하자. 너와 내가 서로의 무공을 증진시키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다."
"무공을? 당신 또한 광룡의 힘이 내면에 잠재되어 있다면 그걸 다스려야 할 텐데 그럴 여유가 있소?"
"그러니까 무공을 익히는 것이다.
호월도 무공을 익혀 그 수양이 깊어지자 저절로 광룡을 다스릴 수 있었다고 했으니까. 나 또한 그를 따라 할 수밖에. 무공에는 그런 효능이 있는 것 같다."
"아하. 이해했소."
"그리고 왠지 무공의 수준을 높이 면 내 머릿속에 끼어 있는 안개 같은 걸 날려 버릴 수 있을 것 같다."
"기억도 되찾을 수 있단말이군."
나는 심수력이 하는 말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확실히 손해될 건 없는데…….'
나는 약간 걱정되어서 말했다.
"미안하지만 나는 내 스스로의 수 행만으로도 바빠서 당신을 가르쳐주 기 힘들지도 모르오. 그건 양해해 주시오."
기껏 나만의 시간을 가지나 했는데 남을 가르쳐준다고 내 시간을 많이 뺏기는 건 사절이었다.
꿈틀
그러자 심수력이 약간 열 받았는지 노한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가르쳐 줘? 내가 그렇게 하급으로 보이느냐?"
나는 약간 당황해서 말을 제대로 고르지 못했다.
"아니, 호월에게 그렇게 심하게 졌으면 지금의 내 상대가 되기에 는……"
"보자보자하니 전생자랍시고 무척 오만하구나. 아니, 뇌신류라서 그런가?"
심수력은 불끈하고 주먹을 세게 쥐 며 권법 자세를 취하고는 말했다.
"시간도 많은데 자신 있으면 한 판 겨뤄보자."
그러자 나는 갑자기 호승심이 생겼다.
안 그래도 이 정체불명의 화신류 고수와 한판 싸워보고픈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호오. 난 자신 있는데."
스으으으
나와 심수력 사이에 삼 장의 거리 가 벌어지고 나는 그대로 창을 들어서 자세를 잡았다. 란나찰만으로도
그의 공격을 어느 정도 대응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 었다.
'이번 싸움에서 신력이나 권능은 쓰지 말자!'
그걸 쓰면 심수력이 진룡의 힘이라 도 다시 각성하지 않는 한 내가 무조건 이길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식 으로 이겨봤자 무인으로써 이겼다고는 할 수 없고 허무할 뿐이다. 심수력의 말대로 순수하게 무학을 겨루 는 것만이 이 대결에서 내가 이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일 것이기에, 승 패와 관련없이 무공만으로 싸우기로
마음먹었다.
그러자 심수력은 가타부타 말을 하 지 않고 그대로 신형을 쏘아서 내게 공격해 왔다.
쐐액
'궁신탄영(弓身彈影)!저 전설의 경공을 쓸 줄이야…….
고대무림에서는 종종 썼다지만 어느 순간 실전되었다는 전설의 경공술! 몸을 마치 활처럼 튕겨서 날아 오는 저 경공술은 특유의 진기운용 법이 있었고 기존의 신법을 강화시키는 신묘한 위력을 갖고 있다는 전 설이 있었다. 여동빈 같은 전설의 신선이나 쓰는 경공술을 쓰는 걸로 봐서 심수력 또한 고대의 절세고수 인건 틀림없어 보였다.
'여기!'
타앙 하는 소리와 함께 내 란(權)의 절초가 심수력의 권강(奉푸)을 튕겨내었다. 굉장히 빠르긴 했지만 하도 고수를 많이 상대해봤기에 이 정도면 충분히 상대할 만한 속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대로 연속동작으로 뇌령팔식의 회전초식을 발휘했고, 마치 사방을 휩쓰는 듯한 호선이 종횡무진으로 그려졌다.
이제 심수력이 내 반격을 피하면 그대로 흐름을 읽어서 빈틈으로 찰(札) 한 방을 꽂아 넣을 수 있을 것 같다. 절대지경인 내 눈에는 그게 가능한 흐름이 보이고 있었다. 심수력의 움직임이 내 상정하에 있는 이상 그 정도 예측하는 건 일도 아닌 것이다.
'길면 오십 초 이내에 결판을 낼 수 있겠…… 어?'
쿠구구
하지만 심수력은 내 예상과 달리 내 창강(槍푸)을 전혀 피하지 않았다. 그는 그 자리에 굳건히 버티고 서서는 마치 기세를 모으듯 주먹을 옆구리에 대고 고개를 숙이는 자세를 취한 것이다! 저대로라면 그대로 창강에 전신이 썰려 나갈 게 뻔했다.
미친…… 죽고 싶어서 환장했나?!
하지만 내 우려와는 달리 마치 크게 강철을 두드리는 듯한 기음과 함께 심수력의 몸에 닿인 강기가 모조리 튕겨 져나갔다!
따다다당!
"……!!"
나는 그 막강한 방어력을 보자 깜짝 놀랐다.
"아니?!"
어떻게 맨몸으로 강기를?! 호신강기를 쓰지도 않았는데!
그것도 내 진신내공을 실어서 날린 강기였다는 걸 생각하면 심수력의 방어력은 상상이상이었다. 적어도 내가 사는 명나라 시대에는 절대지경 외에는 그 누구도 심수력에게 상처를 입히지 못할 것이다! 강력한 대요괴 같은 것도 아닌데 어찌 인간의 피륙(皮肉)으로 저런 방어력이 가능하단말인가.
내가 놀라자 심수력이 중얼거렸다.
"강기일식(푸氣一息)의 경지를 넘어서면 호신강기를 원으로 펼쳐낸다 알려져 있지만, 그건 내공방어의 극 한. 외공과 내공의 진정한 조합이란 바로 이 금강지체(金鋼之體)를 말하는 것이다."
"금강지체?! 들어본 적 없……."
"무림의 하급무공인 금강신공을 나 혼자 대성한 후 극한을 넘어서서 도달한 나만의 경지니까."
심수력의 눈이 번득였다.
"나, 금강권왕은 우습게 봐도 되지만 호월의 제자는 우습게 보지 마라!"
쩌정
그 순간 마치 시간이 멈추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그때까지 잠잠하기 그지없던 심수력의 기운이 마치 물감이 번져 나오듯이 극히 빠르게 강맹해 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기운이 강맹해 지면서 심수력의 전신에는 백광이 일렁이기 시작했는데 그 백광 한가운데에서 그의 정수리를 통해 천공으로 뻗어 있는 하나의 기둥을 보자 나는 눈을 크게 부릅떴다.
'……!!'
그리고 바로 다음 찰나 - 심수력 의 진신절기가 펼쳐졌다.
금강천지쇄(金鋼天地碎)!
소용돌이가 의념의 기운으로 왜곡 되면서 마치 중앙으로 모여드는 듯 한 거대한 태풍을 만드는 것 같았
다. 빠져나갈 수 없을 정도의 중압 감이 느껴졌고 마치 맨몸으로 심해 에 잠수해 있는 것처럼 운신이 여의 치 않았다. 그리고 전신의 압력이 가중되는 사이에 황금빛의 주먹이 의형강기(意形뚜氣)의 형세로 내 명 치를 관통하려 했다.
'무시무시한 기세!!'
나는 이를 악물고 내 의념천주와 내공을 돋우어 그 강대한 압력을 한 순간에 떨쳐 버렸다. 힘을 떨쳐낸 여파가 금강권왕 심수력에게 전달되었는지 그의 표정이 묘하게 변하는게 보였다.
퍼버벙
나는 압력을 떨쳐낸 직후 삼보절기를 써서 심수력의 절기를 회피할 수 있었다. 그나마도 삼보절기가 사기적인 위력을 지니고 있어서 망정이지 다른 방법으로는 피할 방법이 아예 보이지 않았다.
'정면으로 막아도 되긴 했겠지만.'
정면에서 격돌했다가는 이미 준비된 상태에서 들어온 금강천지쇄에 손해를 볼 게 뻔했기에 부딪힐 수도 없었다. 금강천지쇄를 막긴 해도 계속 내가 기세에서 밀리게 되면 후수(後手)만 두게 되어 손해가 연속되기에 피하는게 제일 좋은 전략인 것이다.
파슛 하는 소리와 함께 내 머리카락이 터져서 흩날렸다. 나는 산발이 된 머리카락에 신경 쓰지도 못하고 계속 심수력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심수력은 감탄한 듯 말했다.
"그걸 막는 것도 아니고 피하는 놈은 호월 말고는 본 적이 없군. 그 엄청난 보법은 사대무류의 것이 아닌 것 같은데 뭐지?"
"무당파 장삼봉의 삼보절기요. 물론 장삼봉은 당신보다 후대의 고수요……."
나는 그렇게 대꾸하면서 고개를 꾸벅 숙였다.
"미안하오. 내가 섣불리 당신을 얕보았소."
"……."
심수력이 말없이 나를 쳐다보자 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금강권왕 심수력. 당신은 절대지경의 고수였구려."
방금전 심수력이 발현한 것은 바로 의념천주!!
의심할 여지 없는 절대지경의 증표!
그는 깨어난 후 지금까지 계속해서 자신의 무공수준을 감추고 있었던 것이리라.
'젠장. 좀 의심해 볼걸.'
원래부터 강호에 명성이 드높은 팔대고수였을 때부터 그는 초절정고수 였을 것이다. 그 상태에서 역대최강의 무인 중 하나인 호월의 가르침을 몇십년동안 받았다면 평범한 수준일 리가 없는 것이다. 그것도 호월이 유사시에 자신을 죽이게 하려고 키우던 무명제자였다면 더더욱!
그러자 심수력은 의외라는 듯 전투 자세를 풀며 내게 말했다.
"희한하군. 뇌신류의 종사라면 여기서 사과할 게 아니라 계속 싸우려 하지 않나?"
"원래라면 그러겠지만 방금전 당신도 일부러 화난 척하면서 나와 겨루려 했잖소. 하지만 나는 시간이 많으니 당신과 분노를 갖고 겨루고 싶지 않소."
괜히 분노를 갖고 싸우다가 무공 외의 권능을 꺼내 들어서 엉망이 될까 봐 겁이 나는 게 솔직한 심정이 었다. 내 마음수양이 부족하다는 걸 알기 때문에 더욱 조심하게 되는 것이다.
"……아무래도 단단히 각오를 하고 수련을 하고 싶은가 보군. 그 마음 가짐, 잘 알아들었네."
그렇다.
심수력은 방금전 일부러 화난 척 하며 나와 싸운 것이다. 내가 무례 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사실 그의 성격상 충분히 참을 수 있었던 것이다. 연기를 멈춘 심수력은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이거야 원. 초무린도 여기서 멈추진 않을 텐데 자넨 정말 특이하구만."
"초무린을 아시오?"
"서로 통성명 정도는 했지. 물론 그는 오만하기에 딱히 우리를 기억 하려 들지는 않았지만."
"……."
나는 침묵하다가 말했다.
"설마 해서 하는 말이지만 당신 말고 다른 3명의 수행인들도 전부 절대지경이었소?"
"그렇네. 모두 과거를 버리고 호월 밑에서만 용맹정진한 덕분에 그 경지에 오를 수 있었지. 백두산에 진입했을 때는 우리 모두가 절대지경에 올라있었네."
나는 안 좋은 예감이 들어서 얼굴 이 굳어졌다.
"……그렇다는 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군."
심수력의 눈이 착 가라앉았다.
"자네 생각대로야. 백두산에 있던 의문의 존재는 호월과 절대지경 4명을 상대로 습격을 성공시킬 정도로 강력한 존재였다는 거겠지. 그리고 자네는 언젠가 그 자와 싸워야 할 것이고."
"이 얘기는 여기까지 하세. 전에 말했듯 내 기억은 온전치 않고, 쓸 데없는 생각을 해봤자 수련에 방해만 되니까."
"맞는 말이오. 그럼 수련을 해 봅 시다."
"흠. 어디 보자……."
심수력은 얘기가 덜 정리되었다는 듯 주변을 둘러보다가 눈앞에 있던 청룡무관의 폐허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수련을 시작하기 전에 청룡무관 좀 고쳐놓게."
"응? 여태껏 폐허에서 잘만 수련하다가 갑자기 왜……."
"왜긴 왜인가? 황야나 평지에서만 싸우는 게 아니잖나. 좁은 건물이나 복도에서 싸울 때도 무공을 쓸 텐데 그것 또한 수련이 되겠지."
"음, 그렇구려."
심수력이 쑥스러운 듯 말했다.
"뭐 좀 사람처럼 지내보고 싶은 마음도 크다네. 백날 흙먼지 마시면서 폐허에서 구르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네."
"……."
내가 너무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 것뿐이고 역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걸 좋아하는게 당연한 거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심수력의 말대로 손을 뻗어서 신력을 발휘해 보았다.
'청룡무관, 만들어져라.'
스스스스스
잠시후 바닥에 있던 흙무더기 속 에서 벽돌과 목재 등이 중력을 거슬러 움직이더니 천천히 원래의 모습 으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오오. 대단하군."
옆에 있던 심수력이 찬탄성을 내었다.
'복희의 말대로군. 이 신력이란 힘 은 딱히 연습이나 노력이 필요없어…….'
신력을 운용하는 건 마치 활을 쏘는 것과 같다. 목표를 정해놓고 '의지'라는 이름의 활시위를 당겨서 튕기기만 하면 화살은 알아서 날아가는 것이고 화살이 잘 날아가라고 열심히 노력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두려워진다.
'역시 신력은 가능하면 수련 기간 동안 안 쓰는 게 낫겠어…….'
신력은 위험하다.
이 편리함과 강력함에 다시 길들여 지면 도저히 불편한 무공수련을 할 생각이 들지 않을 것이다. 수련환경을 만드는 것 외에는 되도록이면 쓰지 말자.
청룡무관이 원래대로 복구되자 심수력이 말했다.
"나는 내 나름대로 수련할 게 있으니 자네도 알아서 수련하게. 막히는 게 있으면 서로 도웁세."
"알겠소."
"아, 청룡무관에 따뜻한 물과 욕조도 마련하게."
"……."
나는 푹 쉬러 청룡무관으로 들어가는 심수력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나는 이제부터 뭘 수련해야 하지?'
이제 사신지혼도 배웠고 무혼을 향한 길이 확실히 기틀이 잡혔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여태껏 배워만 놓고 제대로 익힌 게 하나도 없어서 뭘 해야 할지 막막했다. 너무 할 게 많아서 도리어 뭘 할지 갈팡 질팡하는 상태가 된 것이다.
선검술로 원 그리는 건 질린다.
그렇다고 창술을 계속 수련하는 건 왠지 흥이 깨졌다.
숙련도 쌓는다고 온갖 잡 무공을 바닥부터 수련하는 것도 왠지 별로다.
나는 그 자리에 앉아서 고민하기 시작했는데 바로 그때였다.
빠지직!
"크…… 크으윽!!"
갑자기 뒷골이 땡기면서 관자놀이 가 타들어가는 듯한 냄새가 났다. 나는 극렬한 고통을 가까스로 참았는데 다행히도 단발성이라서 견딜만 했다. 나는 급히 거울을 신력으로 만들어서 내 관자놀이를 살폈는데, 마치 번개에 그을린 듯한 자국이 생겨 있었다. 나는 그 자국을 보자마자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아!! 설마…… 세성의 가호가 넘치는 현상이 아직도 해결 안 된 건가?!'
신력을 소모하면서 뇌력을 막는 힘이 약해져서 번개의 기운이 밖으로 흘러나왔고, 그대로 내 몸을 상처입힌 게 틀림없었다.
죽었으니까 그 현상도 유야무야 해결된 줄 알았는데 해결 안 된 거였어?!
'뭐지? 죽었는데 왜 모든 게 그대로 이어지는 듯한…….'
나는 혼란스러웠지만 동시에 지금 내가 해야 할 숙제가 눈앞에 비로소 들이밀어 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몸에 잠재되어 있는 목성(木星)의 어마어마한 뇌력 - 지구의 번개보 다 수천 배나 강대한 그 힘을 통제 해야 한다는 숙제가!
화룡진인은 이 기운을 마구 탕진하 라고 했는데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음…… 잠깐…… 기운을 탕진? 어 쩌면……."
그때였다.
나는 머릿속에서 뭔가가 이어지는 느낌에 골똘히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잠시후 내 손바닥을 탁하 고 치면서 외쳤다.
"……사신지혼이구나!!"
뜻밖의 답을 찾은 것 같았다.
우웅
나는 전신에 구궁파천뢰의 기운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경맥을 따라 거대한 뇌력의 구슬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점차 전신에 긴장감이 확 감돌면서 등줄기가 축축해지는 걸 느꼈다.
'끄윽. 역시…….'
이 긴장감의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구궁파천뢰를 시전할 때 전신의 경맥을 유동하는 뇌령(雷靈)의 힘이 본디 내가 감당할 정도였는데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뇌령이 흐르는 초반에는 멀쩡하게 움직이다가 갈수록 뇌령의 크기가 증대되고, 겨우 소주천(小周天)을 한 번쯤 돌릴 때쯤에는 원래 크기의 세 배 이상으로 커져 있다. 마치 좁은 구멍에 억지로 거대한 걸 밀어 넣게 되는 꼴이 되기 때문에, 나는 이정도 되면 내 경맥은 물론이고 육체가 산산조각이 날까 봐 저절로 긴장하게 된다.
뇌령이 이렇게 거대해지는 이유도 알고 있다.
'세성의 가호……!!'
아직 해결되지 않은 세성의 가호 때문에 일어나는 형상이다. 목성에 몰아치는 어마어마한 번개의 힘이 통째로 쑤셔박혀 있고 내가 진신내공을 끌어낼 때마다 내가 본래가진 뇌령에 그 힘을 증폭시키는 것이다. 문제는 이 증폭된 힘조차도 그저 세성의 뇌력이 저절로 흔적을 흘리는 수준에 불과하며, 그 진짜배기 힘은 지금 내 뇌령의 통제력으로는 절대로 감당할 수 없다. 구궁파천뢰의 수련이 극성(極成)에 도달해도 이룰까 말까 한 경지일 것이다.
지금은 신력을 소모하면서 통제하고 있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활화산 같은 번개의 힘.
이걸 통제하려면 무분별한 소모가 필요하다.
'그리고…… 무분별한 소모라면 바로 사신지혼!'
구궁파천뢰의 심결(心決)에 따라 나는 전신을 회전하던 뇌령의 흐름을 잠시 느리게 만들고, 그 뇌령의 힘이 전신에 뻗쳐나가게끔 했다.
파지지직……!!
전신에서 새파란 번개가 튀면서 마치 번개로 둘러싸인 듯한 형상이 되었지만 이건 뇌신지혼 상태가 아니다. 그저 뇌령의 잠력이 외부로 마구 방출되고 있을 뿐이다. 나는 그 상태에서 그대로 구궁파천뢰의 심결을 운용하면서 내 전신에 흐르는 뇌령을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쿠구구구…….
장중한 소리가 귓전에 울려 퍼지며 내 몸에 흐르는 뇌령이 통째로 구(球)의 형태로 바뀌는 게 느껴진다. 지금은 구체의 형태이지만 점차 내 의지력이 강해지면서 갈수록 막대기 둥(柱)의 형태가 되어갈 것이다. 나는 그 와중에 서서히 뇌령의 내면을 관조했고, 이윽고 '이음새'를 발견할 수 있었다.
'…… 이설표가 말했던 게 바로 이거군.'
구궁파천뢰를 이설표에게서 배우면서 들은 것.
그것은 바로 구궁파천뢰의 뇌령은 수련이 심화 될수록 서로 비틀어서 떼낼 수 있는 '이음새'가 발생한다는 사실이었다.
그 이음새는 수련자들이 보통 뇌령의 근간에 약점이 생긴 거라고 여기고 당황할 수도 있지만, 이설표의 말로는 원래부터 구궁파천뢰의 설계에서 안배된 내용이라고 들은 적이 있었다.
어째서 굳이 이런 이음새가 만들어 지는 걸까?
나는 당시에는 그 의문을 파악하지 못하고 그냥 수련만 했지만, 지금은 왠지 알 것만 같았다.
의념천주(意念天柱)
강고한 의지의 기둥이 세워지면서 마치 뇌령으로 만들어진 구궁파천뢰 의 기둥과 흡사하게 합쳐지는 것 같다. 나는 의지의 기둥을 뇌령과 합일시키듯 갖다 대면서 서서히 의지의 힘으로 '이음새'에 손을 뻗었다.
그리고 '이음새'에 손이 닿는 순간, 내 머릿속에는 무공의 요결이 엄청난 속도로 화살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 요결의 이름은 이혼대법(移魂大法)이다.
"……!!"
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대로 '이음새'에 의념천주의 힘으로 두 손을 갖다 대듯이 좌우로 비틀어서 열었다. 그러자 그와 동시에 뇌령은 마치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말끔 하게 두 조각으로 분리가 되었고, 나는 나누어진 이음새를 각각 손에 잡고 다시 몸 외부에서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웅웅웅
두 개의 흐름이 서로 완전히 반대되는 방향으로 회전을 시작한다. 두 개의 흐름은 마치 거울처럼 서로를 들여다보며 양극(兩極)을 형성했고, 나는 양극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며 이제야 힘을 좀 통솔할 만한 여유가 생겼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성공했다.'
이건 깨달음이 아니다.
원래부터 존재했던 구궁파천뢰의 성질을 이제야 알아차린 것뿐.
'뇌령의 혼(魂)과 백(晩)을 분리하는데 성공했다!'
이혼대법을 근간으로 한 구궁파천뢰 - 그것은 처음부터 번개의 영을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다루어 그 혼과 백을 분리시킬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뇌혼(雷魂)과 뇌백(雷晩)이 한차례 분리된 상태에서 힘이 분산되어 회전을 가속시키자 아까보다 한결 뇌령을 다루기 쉬워진다. 당연한 말이지만 힘을 절반으로 나누면서 통제력은 2배 이상 오른 것이다. 지금처럼 뇌령이 너무 강해서 통제하기 힘들 때는 이렇게 좋은 기술이 없다!
설마 싶지만, 구궁파천뢰를 누대에 걸쳐 완성 시켜왔던 뇌신류 고수들은 지금 나 같은 상황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걸 가정한 건 아니었을까?
'좋아. 원래 힘이 너무 강해서 압축시키기 쉽지 않았지만 지금이라면…….'
그리고 통솔이 쉬워진 틈에 나는 두 개의 회전을 이용해서 점차 내 의념천주와 함께 뇌령의 구를 막대형상으로 압축시키기 시작했고, 완전히 막대처럼 굳어졌을 때에서야 나는 눈을 반개하면서 새로운 요결을 시전했다.
사신지혼(四神之魂)
염혼화(炎魂化)
화르르륵!!
잠시후 열다섯 번의 호흡이 지났을 때 전신에서 방출되던 강렬한 뇌령이 빠르게 불꽃의 영인 염령(炎靈)으로 바뀌었다. 나는 그 와중에 염령 또한 두 개의 흐름으로 나뉘었으며, 두 개의 뇌령이 두 개의 염령으로 동시에 바뀌었음을 알 수 있었다.
'으음…… 심수력의 말대로군.'
큰 변화에 작은 변화도 뒤따라갈 수밖에 없다.
혹시나 염령 하나 뇌령 하나인 방식으로 작은 변화를 남길 수 있을지 시험해봤지만 역시나 내 기술으로는 부족하다. 힘은 딸리는 것 같지 않으나 이 사신지혼의 변화를 자유자재로 다루려면 천재적인 감각이 필요한 것 같다.
염혼화로 인해 기운이 안정되었을때 나는 생각했다.
'여전히 두 개의 흐름이다. 그렇다면 뇌령과 뇌백은 염령과 염백으로 바뀐 것인가?'
…….
혹시 이걸 또다시 나눌 수 있을까?
하지만 나눌 수 있다고 해도 나누는 것에 어떤 이득이 있을까?
'모르겠어. 일부러 쉽게 나누라고 이음새를 만든 것 같은데…… 지금이야 특수한 상황이라서 이음새로 혼백을 쉽게 절개하면 좋지만 본디 기운을 나눌수록 약해지기 때문에 실전성이 없다. 두 개가 아니라 4개 나 8개로도 나눌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대체 왜 나눠야 하지?'
혼백이 늘어나면 뭐가 좋은 거란 말인가?
나는 무공에 대해서 고민하다가 이윽고 원래 하려고 했던 주제로 되돌아와서 이번에는 다시 기운을 집중해서 막대 형태를 유지시키며 사신지혼의 구결을 입으로 암송했다.
'심수력은 구 형태보다 막대 형태
가 훨씬 성질을 변화시키기 쉽다고 했다. 확실히 그 말대로군.'
구 형태에서는 힘이 방만하게 흩어지지만, 막대의 형태에서는 훨씬 더 기운을 유형화시키기 쉽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그렇다.
이윽고 나는 사신지혼의 요결을 시전하며 눈에서 빛을 토했다.
사신지혼(四神之魂)
혼화(水魂化)!
츠즈즈즈
그러자 전신에 휘돌던 염령이 이번에는 수령(水8)으로 변화하였다. 나는 그와 동시에 전신에서 내공이 쭉 빠져나가면서 기력이 크게 줄어들고 의념에도 탄력이 사라진 걸 느꼈다.
나는 힘이 빠지는데도 생각대로였기에 기분이 좋아져서 씩 웃었다.
"다음은 풍혼화(風魂化)로 간다. 이렇게 반복하면 되겠지."
내게 잠재되어있는 어마어마한 목성의 번개.
그 번개의 잠력을 이용해서 사신지혼을 연속으로 시전하여 뇌수화풍(雷水火風)의 변화를 무한히 반복한다. 그런 식으로 모조리 끌어내어서 소모한다.
그 와중에 구궁파천뢰의 성취는 점차 늘어날 것이고 힘의 통제력도 늘어날 게 분명한 것이다.
나는 계속해서 사신지혼을 이용해서 전신의 뇌령을 다른 성질로 바꾸기를 반복했다. 기질을 바꿀 때마다 내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자연지기가 불꽃, 수기, 바람, 뇌전 등으로 바뀌 었고 그때마다 힘의 파장이 넘실거리며 외부로 방출되었다.
그렇게 반복하기를 몇 번이었을까? 나는 스무 번 정도 사신지혼을 썼을 때 갑자기 감당할 수 없는 피로감이 몰려오는 걸 느꼈다.
'으음…… 이게 한계인가?'
이건 십만 번 수련을 할 때나 느꼈던 피로감과 유사하다. 체력적으로 좀 더 버틸 수는 있겠지만 이제부터 슬슬 힘들어질 거라는 걸 직감한 나는 그쯤에서 사신지혼의 전개 를 멈추었다. 수련을 할 때 한 번에 모든 걸 불태워 고갈시키기보다는 잠시 멈추고 스스로를 되짚는 게 좋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후우우
내 주변 십여 장의 공간은 완전히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사신지혼으로 뇌수화풍 4개의 속성을 바꾸면서 저절로 주변에 자연지기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와 동시에 내 뇌령이 얼마나 줄어들었는지를 알아보았다.
'확실히 줄어들긴 했다. 하지만…….'
굳이 비유하자면 지름이 오십여 장 정도 되는 호수에서 사람 하나 들어 갈만한 욕조 물을 몇 번 정도 퍼낸 수준이라고 해야 할까?
원래라면 이정도만 소모했어도 보통 무인의 기준으로는 어마어마한 내공을 소모했을 테지만 뇌령의 양이 워낙 막대해서 앞날이 깜깜한 것 같았다. 물론 퍼낸 양이 절대량으로 칠 때 적지는 않기에 이대로 반복하면 언젠가 뇌령을 다 소모할 수는 있으리라.
'그래도 이걸 하고 나니까 아까처럼 뇌령이 넘쳐서 머리가 아픈 게 사라졌군…….'
앞으로도 계속 하다보면 뇌령의 부작용을 줄여나갈 수 있으리라. 나는 일단 수련의 방향성을 잡은 것에 안도감을 느끼면서 동시에 의아함을 느꼈다.
'이상하군. 어째서 사신지혼의 기 운이 4개가 아니라 더 있는 것 같지?'
본디 4개의 기운을 순서대로 전환하며 수련할 생각이었는데 방금전 연속으로 돌리다 보니 다른 방향으로도 기운을 전환할 수 있다는 걸 느꼈다. 일단 정해진 수련을 하는데에만 집중했기에 그걸 시도하진 않았지만 그건 틀림없이 뇌수화풍과 다른 성질인 것 같았다.
사신지혼은 4개의 그릇에 옮겨 담는 것일 텐데 어째서 '또 다른' 그릇이 있는 걸까?
한번 시도해보고 싶었지만 자칫했다가는 주화입마에 걸릴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일단 뇌령을 최대한 퍼내서 내 상태부터 안정시키고 난 다음에 시도해볼 만한 모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후…… 너무 졸리군. 일단 좀 자볼까."
나는 그대로 쓰러져서 기절하듯이 자버리고 말았다. 본디 무한에 가까운 체력을 갖고 있는 나였지만 방금전에는 의념과 진원진기을 밑바닥까지 소모했기에 어쩔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
부웅 부웅
잤다가 일어났을 때는 어느새 심수력이 내 근처에서 권법을 수련하는 중이었다. 심수력은 권풍(奉風)을 일으키며 격렬하게 초식을 전개하다가 내가 일어난 걸 보자 말을 걸어 왔다.
"일어났군, 백웅."
"뭔가 할 말이 있는 거요?"
심수력도 독립적인 성격으로 보이는데 굳이 내가 자는 곳 근처에서 수련했다면 틀림없이 할 말이 있는 것이리라. 그러자 심수력은 씩 웃으며 말했다.
"그게 말일세. 먹을 것 좀 만들어 주게."
"…… 응?"
"속세의 음식이 갑자기 그리워지는군. 심마(心魔)에 걸릴 것 같으니 후딱 만들어주게나."
"흠…… 알았소."
우웅
'음식 나와라!'
나는 신력을 써서 내가 알고 있는 요리를 만들어내었다. 그리고 떡하니 차려진 밥상 위의 요리를 보자 심수력은 바로 닭다리를 집어들며 말했다.
"닭고기도 좋지. 자네는 닭을 좋아하나 보군."
"내가 제일 좋아하는게 닭이오."
그럼 좀 먹겠네."
쩝쩝쩝
나는 무심하게 심수력이 밥을 먹는걸 쳐다보았다. 열심히 닭다리를 뜯고 있던 심수력을 보던 나는 입을 열었다.
"이 공간에서는 딱히 배고픔도 느껴지지 않고 생리활동도 하지 않는데 굳이 음식을 먹는구려."
"흐음…… 뭐 안 될거 있나? 먹는 건 사람의 근본적인 욕구야. 안 먹어도 된다고 해서 맛있는 게 맛없어지는 건 아니지. 내 기억에 맛있는 걸 먹어 본 지가 너무 오래되서 갑자기 땡겼을 뿐이네."
"……."
"내가 볼 때는 자네가 더이상해. 아무리 내공이 극치에 이르러서 음식과 수면에서 자유로워졌다고는 해도 식욕에 너무 둔감해진 것 같군. 이 맛있는 계퇴(鷄뺴)를 보고도 입맛이 당기지 않는가?"
"음…… 그럴 수도 있겠군."
나는 수면이나 휴식, 섭식이 거의 필요 없었기에 체감상으로 최소 수십 년 동안 별다른 식욕을 느끼지 않았다. 어찌 보면 웬만한 도사보다 더 신선처럼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보니 어느새 식욕에 둔감해졌다는 심수력의 지적은 맞는 말처럼 느껴졌다.
"호월도 그랬지. 그 또한 마치 인간의 욕구에서 초탈한 듯한 존재였어. 자네를 보면 호월이 생각나는군."
"그렇소? 아마 호월이든 나든 인간이 아닌 대적(大敵)을 상대하기에 어쩔 수 없는 것이오."
"어쩔 수 없다? 그건 핑계라고 생각하네."
나는 심수력의 말에 눈썹을 꿈틀거렸다.
"핑계? 무슨 소리요."
"수십 년간 곁에서 호월을 보면서 생각하던 건데 자네한테 말하게 되었군."
심수력은 닭다리 하나를 손에 든 채 피식 웃었다.
"말 그대로일세. 자네도 호월도 이미 인간이라고 보기는 힘든 존재가 되어 버렸지. 단순히 육체의 본질뿐 만이 아니라 그대들의 성격이나 오 욕칠정(五慾七情)이 전부 비인간(非 人間)의 영역으로 가고 있어. 헌데 비인간이 되어 버린 자네가 인간을 구원한다면, 그건 신(神)이 인간을 구원하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는 가?"
"……."
"자네는 무(武)를 추구하며 인간스러움을 포기하지 않겠다 했지만, 지금으로써는 별다를 게 없어 보이는군. 그러느니 차라리 속 시원하게 최강의 신이 되려고 노력하는게 더 낫지 않겠는가."
나는 머리를 한 대 맞은 느낌에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잠시후 정신을 차리고는 씹어뱉듯이 말했다.
"내가 인간이라고 생각하면 나는 인간이오.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오."
"굳이 기분을 나쁘게 하려는 생각은 아니었는데 말이지."
심수력은 마지막 닭다리를 쪽 빨아먹더니 말을 이었다.
"비꼬는 게 아냐. 단지 그대들을 보고 있자니 무인으로서는 좀 황당 한 거지."
"뭐가 황당하오?"
"솔직히 무술을 수련하는 자들은 외계의 신이나 마물들이랑 싸우려고 무공을 연마하는게 아니야. 그냥 무공을 익히면 쎄지고 인간세상에서 내 욕구를 채울만한 힘이 생기니까 연마하는 거지. 그런데 자네나 호월 같은 비인간적으로 강력한 존재들이 이미 신이나 다를 바 없으면서 굳이 무공으로 세상을 구원하겠다고 포부를 세우는 걸 보면……."
팅
심수력이 닭다리를 튕겨서 바닥으로 떨궜다.
"개똥 같아."
나는 심수력의 비웃음에 약간 화가 났다.
"잘난체하는구려. 지금까지 내가 30번이나 죽었다 살아나며 어떤 대참극을 봐왔는지도 모르면서."
"물론 자네들이 훌륭한 위인이라는 건 알아. 수많은 인간들을 구하려는 그 심성이 위대하다는 것도 알겠어. 헌데 누가 구해달라고 하긴 했나? 무공을 익혀서 신을 쓰러뜨리는 게 어째서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하는 건지 전혀 모르겠단말일세."
"……."
"무술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불어넣는 게 아닌가 싶군."
나는 심수력의 말을 듣고 한참 동안 곰곰이 생각했다. 여태껏 수십 번은 해왔던 이야기였고 단지 신과 인간의 격차에 대해 다른 관점이 제시된 것뿐이다. 그러나 나는 심수력 의 이야기가 지금까지와는 좀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지금까지 알고 있었으면서도 외면했던 이야기를 비로소 직시한 느낌마저 들었다.
나는 툭 내뱉듯 말했다.
"결국 호월한테는 무서워서 속내를 털어놓지 못했고 나는 만만하니까 속마음을 털어놓은 거구려."
심수력이 실쭉 웃었다.
"들켰군…… 흐흐."
"걱정 마시오. 바깥이었다면 당신 같은 소리를 하면 개소리한다고 드라큘라처럼 한대 패줬겠지만, 지금은 나도 어느 정도 당신 말에 공감이 가니까."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말했다.
"당신하고 입씨름할 시간이 없소. 난 사신지혼이 재밌으니까 좀 더 연마해야겠소."
"아, 그거 말인데."
"또 할 말이 있소?"
이어진 심수력의 말에 나는 흠칫했다.
"그 신통방통한 신력이란 걸로 자 네 스스로의 체력과 내공을 회복하면 안 되나? 그러면 굳이 휴식시간 을 가질 필요 없이 더 빨리 회복할 수 있을 건데."
"……!!"
"닭다리의 보답으로 한마디 해주는 걸세."
어, 그렇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나는 깜짝 놀랐지만 동시에 머리 한편에 드는 생각이 있어서 고개를 저었다.
"음…… 무공수련을 하면서 신력과 권능은 가능하면 쓰지 않기로 마음 먹었소. 시간이 걸려도 내 자연적인 힘으로 회복하겠소."
"……? 또 개똥 같은 소리를……."
"개똥 같은 소리라니? 당신은 개똥 을 정말 좋아하는구려."
"그럼 소똥이라고 할까? 소똥아!"
"아니 그건……."
내가 황당해하자 심수력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말했다.
"있는 걸 쓰는 게 뭐가 문제란 말인가? 호월도 광룡파천황이 순수한 무공은 아닌데도 쓰고 다녔네. 또한 내 시대에 술법사나 주술사도 횡행 했지만, 그것 또한 나름대로의 실력으로 받아들여졌어. 자기가 가진 힘을 수련에 도움 되려고 좀 쓰는 게 뭐가 문제인가."
"내가 가진 신력은 너무 강대하오. 조금씩 쓰기 시작하면 무공보다 훨씬 편리해서 결국 신력에만 의존하게 될까 봐 그렇소."
"거 참 답답하군. 굳이 그걸 따로 나눠야 하는가?"
"무슨 말이오?"
심수력이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신력을 쓰는 무공은 없단말인가? 없으면 자네가 하나 만들면 되잖은가."
"……."
"뇌신류 종사라면서."
나는 기가 막혔다. 그러고는 한숨을 쉬었다.
"엿 같은 소리 관두고 꺼지시오."
"알았네. 아무튼 신력 안 쓸거면 내 생활편의에 적극적으로 써주시게."
파앗
심수력은 이내 경공술을 발휘해서 머나먼 산중으로 향했고, 나는 머리 를 긁적였다.
"참나…… 어이없는 인간이군."
나는 심수력 같은 유형의 인간은 간만에 보는 것 같았다. 진지하게 나한테 조언을 주던 동료들과 달리 그냥 입이 달려 있으니까 아무 말이 나 하는 것 같았다. 재밌긴 했지만, 지금은 정신만 산만해져서 도움이 안 될 것 같았기에 나는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내 할 일만 하겠다!"
고오오오
나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빠르게 체력과 정신력을 회복했다. 신력으로 즉시 회복하는 것보다는 느리겠지만 이렇게 해도 길지 않은 시간 내에 몸을 회복할 수 있다. 그리고 몸이 회복되자 즉시 사신지혼의 변환을 시작했다.
기이이잉 —
나는 사신지혼으로 뇌령을 수령으로 바꾸면서 생각했다.
'원형으로 흩어진 기운이 막대 형태로 굳어지는 속도가 점차 빨라지는구나.'
산만한 기운이 집중력을 가지게 되는 건 좋은 현상이다. 아마 사신지혼의 전개속도에도 영향을 주는 게 분명하다.
그런데 어째서 하필이면 막대의 모양일까?
나는 그것만은 알 수 없어서 의구심을 품으며 계속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