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무혼(武魂)의 조건은 그래서 존재 했던 건가?"
왠지 알 것 같다. 검무를 최상의 경지까지 익혀 절대지경에 올랐어도 무예 그 자체의 위력은 도달할 수 있는 한계가 있다. 단순히 위력만이라면 창술이 더욱 강할 것이다. 그러나 창술의 극한에 도달한 고수라 해도 자기가 모르는 약점이 존재하게 된다. 권법 또한 마찬가지다.
창권검 셋 모두를 익혀서 극한에 이르라고 하는 터무니없는 조건 -그 조건이 존재한 이유…….
세 극한이 모일 때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는 또 다른 절대적인 기술이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무혼이란 바로 그 기술을 칭하는 것일 수도 있다.
"……?"
나는 이대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퉁치기엔 뭔가 애매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냐하면 지금 내가 생각한 게 뭔가 논리적으로 모순이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어…… 뭔가 이상한데…… 틀린 게 아니라 뭔가 부족한 게 있는 것 같은…….'
세 극한이 모였을 때 모습을 드러내는 게 존재한다는 깨달음은 틀리지 않았다. 근데 뭔가 이상하다. 그냥 그런 기술이 있다고 넘어가기에는 발에 돌이 걸려서 넘어질 것 같은 모순점이 있다.
나는 머리가 좋지 않아서 그게 뭔 지 몰라서 한참을 끙끙거렸지만, 잠시후 어디서 모순이 발생했는지 눈치챌 수 있었다.
"무혼은 뇌신지혼이랑 별 관계 없지 않나……?"
역대 뇌신류 고수들이 단 한 명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점.
나는 그 모순점을 처음으로 직시해 버린 듯했다.
"어…… 뭐지 이거……."
나는 고개를 크게 흔들었다.
아니, 관계있나? 어쨌든 뇌신지혼을 익혀야 무혼을 쓸 수 있는 거 같긴 한데…….
근데 난 왜 저 2개가 관계없어 보이지?
어차피 무혼을 익혀야 한다면 뇌신지혼을 익혀야 하지 않나? 어? 아닌가?
머리가 나빠서 저게 왜 관계없는지는 쉽게 설명이 안 된다. 머릿속으로 정리가 안 된다. 그런데 절대지경으로서의 감각은 저렇게 말하고 있어서 혼란스러웠다.
나는 그날 하루 종일 앉아서 끙끙 거리다가 한참 후에야 머릿속을 정리하고는 힘차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음! 씨발…… 모르겠구나!!"
모르는 걸 안다고 할 순 없지!
나 자신을 속이지는 않겠다!
나는 내가 모른다는 걸 일단 인정 하고는 다시금 창을 들었다. 그러고는 아무 이유 없이 창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즐겁다.'
창을 휘둘러서 딱히 더 강해진 건 아니다. 새로운 무기의 단서를 찾은 것도 아니다. 깨달음이 있었다지만 그렇다고 뭐 새로운 경지의 단서가 되지도 않았다. 지금 창을 휘두르는 것도 뭔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그냥 창 휘두르면 몸이 풀리니까 아무 생각 없이 휘두를 뿐이다.
즉, 나는 지금 허송세월을 하고 있다.
부웅 부웅!
그렇게 며칠의 시간이 계속 흘러가고 있었지만 나는 아무 생각 없이 한 달을 더 보내었고, 또 한 달을 더 보내었다. 역시나 내 경지가 더 오를 것처럼 보이지 않았고 이 휘두르기는 별 의미가 없었다.
원래라면 이러고 있을 시간에 내 부족한 기술 숙련도를 생각하며 전생하면서 익혔던 수많은 고급기술을 연마할 생각에 머리가 아팠을 것 이다. 근데 지금은 그런 걱정을 하기 싫었고 그냥 마음 가는 대로 내 속이 풀릴 때까지 휘두르기만 반복 했는데, 그게 이상하게 내 마음에 쌓여 있던 앙금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그런 식으로 석 달 내내 별생각 없이 창만 계속 휘두르고 있을 때 나는 내가 왜 이러는지를 알 수가 있었다.
나는 지는 석양을 보며 땀을 쓱 닦으며 웃었다.
"즐겁구만."
경지를 올리기 위해서가 아닌.
숙련도를 올리기 위해서가 아닌.
간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닌.
이 온전한 시간 낭비가 너무 즐겁다.
나는 창을 휘두르면서 생각했다.
'난 사실 창술이 그렇게 싫지는 않았다.'
이광 밑에서 창술을 익힌 덕에 이삼류 하급무사 수준에서 그래도 수준 있는 명가의 무인 수준으로 격상했을 때 얼마나 기뻤던가? 평생 하급 표사로 굴러왔던 내게 있어서 체계적인 무공을 손에 넣어 수련할 수 있다는 건 그 자체로 엄청난 기연이 었다. 일신우일신(日新乂日新)하듯 점차 내 무예의 기틀이 잡히고 뛰어난 고급기술을 배울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대로 성장했다면 딱히 검술과 창술을 가 릴 일도 없었으리라. 어쩌다보니 검술로 빠지게 되긴 했지만 나는 창술이 싫은게 아니었다.
나는 무아지경으로 창을 휘두른 지 석 달이 넘어 반년째가 되어갈 때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난 사실 창도 열심히 수련해 보고 싶었다는 사실을.
'그렇지만…… 나는 그동안 나 자 신의 진실된 마음과 마주하지 못했다.'
나는 창을 뻗어내다가 다시 수발하 며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창술을 수련하는 이상 그를 절대 넘어설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이거다. 바로 이게 진짜 이유다.
정면으로 드러낸 적은 없지만 무의 식중에 하고 있었던 생각이다.
'청룡무관은 내게 최초의 기연이었 지만 동시에 절망이기도 했다.'
그래…… 마치 이제 갓 무학의 재미를 느끼고 걸음마를 하기 시작했는데 눈앞에서 태산을 맞닥뜨린 격 이었다.
"진소청……."
나는 생각할수록 정신이 혼미해져서 몇 번이고 그 이름을 곱씹었다.
진소청과 압도적인 재능의 차이가 있기에, 그와 동종(同種)의 무기술을 익힐 경우 너무 비교될거란 생각을 했던 것이다. 동종의 무예인 뇌신류를 익혔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나게 비교되고 열등감을 느꼈는데, 무기까지 같은 종류면 도저히 헤쳐나갈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검을 선택한 건지도 모른다.
진소청은 검을 주력으로 하지 않으니까, 그가 파지 않는 새로운 분야 를 개척하다보면 진소청을 따라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한 것이다. 또한 내가 검술 하나만큼은 진소청보다 잘 한다는 자부심을 갖고 싶었던 것이다.
물경 인생 수백 년 만에 깨달은 내 진실된 마음을 직시하게 되자 나는 그냥 헛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젠장…… 어차피 똑같은 건데…… 하하."
검을 수련해서 진소청이 도달하지 못한 뇌신류 검술의 절대지경에도 달했다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
진소청 또한 창술로 절대지경에 도 달하고 나면 검술은 어떻게든 부차적으로 익히게 될 뿐이다. 결과적으로 쓸데없는 짓일 뿐이었다.
그저 객관적인 재능 차이를 외면하려고 하는 나 자신의 현실도피에 불과했을 따름이다.
또한 나는 내가 무아지경으로 창을 휘두르는 또 다른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
'지금까지 내 열등감을 이유로 외 면해왔던 창술의 재미를 다시 느끼고 싶다.'
검술은 재밌다.
하지만 창술수련도 재밌다.
단지 지금까지 내 적성에 맞게 최적화시켜서 효율적으로 강해지려면 검술을 수련하는게 맞았고 선택과 집중을 했을 뿐.
이젠 효율을 버리고 싶다.
인과율을 쌓는 선검술의 원을 어거지로 깨닫겠다고 파고드는 것보다 내 손에 편하고 익숙한 창술수련이나 들입다 하고 싶다는 속마음을 드러낸 것이다!
파파팟
나는 경쾌하게 란나찰을 펼치며 악을 질렀다.
"씨발!! 원(圓)이고 지랄이고 몰라!!"
막고 쳐내고 찌른다!
이것보다 더 알아듣기 쉽고 손맛이 좋은 무리(武理)가 어디 있단말이 냐!
아무리 생각해도 여동빈의 무공은 나와 잘 맞지 않는다. 엄청난 위력과 장중한 기세 때문에 그의 무공을 늘 동경하고 부러워했지만 정작 내가 익히기엔 잘 맞지 않는 것이다. 그의 무공을 몇 번 따라 했을 때 많이 느꼈던 사실이다.
'여동빈의 검공(劍功)은 무형(無形)이다! 도저히 나 같은 둔재가 따라 할 수 있는 게 아냐. 설령 천재라 해도 여동빈의 삶의 철학을 내면화 시킬 수 없다면 그 진짜 위력을 낼수가 없어!'
초식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무형이라는 건 그의 검이 늘 심어검(心御 劍)이나 다름없는 성향을 지닌다는 것이다. 즉, 절대지경에서 의념으로 구현화하는 초월적 현상에 가장 가깝게 다가간 무형신공(無形神功)인데, 이건 사실 같은 도가계열의 장삼봉조차 따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동빈의 검은 귀면상조차 억제하는 그의 절대적인 정신력과 박대정심한 심성에서 나타나기에 여동빈 본인이 아닌 이상 그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불가천세(不可千世)의 유일한 절대신공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차라리 천재의 무공은 다른 천재의 도움을 받아서 갈고닦을 수 있었지만 여동빈의 검은 30여 번의 전생 동안 연구할 엄두조차 못 냈던 이유이다.
하물며 생전의 여동빈의 경지에서 더 나아가서 인과율을 쌓는 선검술의 원이라니!
나는 말 그대로 걷지도 못하는데 하늘을 날아서 우주로 가려는 수련을 한 거나 마찬가지다.
그래도 워낙 많이 원을 그렸기에 아주 조금 깨달은 건 있었지만 또다시 그 짓거리를 하려니 1000년이 지나도 아무것도 못 깨달을 것 같고 속만 답답했기에 걍 버리기로 한 것 이다.
"으아아아아아!!"
콰과광
진각을 밟으며 호쾌하게 창섬을 내 지르자 전면에 있던 청룡무관이 개 박살이 났다. 기와가 폭풍에 휘날리고 중앙에 구멍이 뻥 뚫린 걸 보니 기분이 무척 흡족해졌다. 전생하면 서 이런 개차반 같은 짓을 해본 적 이 없었기에 대리만족을 느낄 수가 있었다.
"다 부숴 버리겠다!!"
콰과과과광
나는 창을 서너 번 휘둘러서 드넓은 청룡무관을 아예 흔적조차 없는 폐허로 만들어 버렸다.
그래! 난 이광한테 갈굼당해서 맨 날 처맞을 때부터 이렇게 하고 싶었어!
이광 멱살 잡고 강냉이 털어 버린 후 청룡무관 날려 버리고 싶었다고!!
난 원래 그러고도 남을 놈이었어!
근데…….
"진소청만 아니었어도!!"
진소청과 원수지는 게 너무 큰 손해라서 못했을 뿐이다!!
아 열 받네!!
"이광 이 개새끼야!! 넌 진소청한 테 백번 절해라!! 진소청 아니었으면 니 아구창을 씨발!!"
풀썩
나는 빽 하고 소리를 지른 후 그만 몸에서 힘이 쭉 빠져서 뒤로 벌러덩 누워 버렸다. 실제로 체력이 빠진 건 아니었지만 갑자기 정신력이 확 줄어들어 버린 것이다.
역시 그렇다.
내가 이번 생에 아직 이광과 은원을 해결한 게 아니다. 그냥 참고 있었을 뿐 악감정은 여전히 쌓여 있다.
어떻게 그걸 몇 번 갈궜다고 다 풀어 버릴 수 있겠는가?
하다못해 해동밀천주도 몇 번이고 가서 괴롭혀줬는데 이광한테 쌓인 원한은 도저히 쉽게 해결 못 한다.
…….
하늘이 푸르다.
나는 여기서나마 응어리진 걸 풀었다는 생각에 한동안 붕 뜬 기분이 들어서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난 권법은 별로 수련 안 해 봤구만.'
뇌신류 무혼의 조건.
그것은 창권검을 모두 극한으로 익 힌 후 다시 잊어버리고 극한의 경지 로 익히는 작업이 필요하다.
나는지금 검에 있어서는 최고경지에 도달해 있으니 이제 권을 익히는게 맞을 것이다. 창의 최고경지라 할 수 있는 육합을 모으는 기경(奇境)이라는 건 사실 역대무인 중에서 진소청밖에 도달한 자가 없었고 내가 자력으로 스승 없이 도달할 정도로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러므로 아직 숙련도가 높지 않은 권법을 익혀 서 절대지경에 상응하는 숙련도를 만드는 게 좋을 것이다.
나는 드러누운 채 중얼거렸다.
"장삼봉의 칠대절학으로 권법 자체는 익숙해. 하지만 뇌신류 권법은 별로 많이 익히지 않았군……"
사실 내 권법 숙련도는 뇌신류보다는 무당파에 가까울 것이다. 칠대절학에 권법이 많이 포함되어 있어서 은근히 많이 수련한 데다 무당파의 명룡자에게 많은 가르침을 받은 덕에 무당파 내인(內人)이나 배울 수 있는 내공심법이나 진기운용법도 많이 알고 있다.
반면에 뇌신류의 권법은 사실 뇌운강권과 유권을 거쳐 뇌신권 단계까지만 수련하고 그 이후로는 솔직히 별로 파고들지 않았다. 뇌신류 권법이 그렇게 유명한 것도 아니었고 떡하니 장삼봉의 칠대절학이라는 상위 호환이 존재하는데다가 강력한 뇌신류의 권법종사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매력이 없으니 내가 뇌신류 권법을 소홀히 한 건 당연하리라.
'물론 뇌신류 권법의 상승무공인 뇌령인이나 명왕수는 뇌신류 장로들을 통해 익히긴 했지만…… 이것도 그냥 강력한 상위 절기일 뿐 권법의 극한을 상징하진 않는다.'
뇌령인이나 명왕수가 뇌신검무나 창술의 육합에 비교되기엔 너무 손색이 있다.
뇌령인을 익힌 적월이 전성기에 강호에서 날뛰고 다녔다지만 그는 어쨌든 절대지경도 아니고 그냥 좀 센 초절정고수일 뿐이다. 이청운한테 한두 방 맞고 뻗는 자의 무공을 어찌 뇌신류 극한에 비교할 수 있을까?
나는 여기까지 생각하다보니 궁금증이 생겼다.
'그러고 보니 진소청이 말했었지. 무혼의 진짜조건은 창권검(槍奉劍) 세 분야 뿐만이 아니라신법, 잡기(雜技)까지 다섯 분야가 필요하다고…… 나는 다섯 분야에서 어디까지 도달해 있지?'
검술은 극한에 도달해 있다고 볼 수 있다. 뇌신검무의 알맹이를 불러오는 게 맘대로 안 될 뿐.
창술은 달인의 경지다. 그러나 극한은 절대 아니다.
권법은 수련사범 수준은 넘겠지만 달인은 아닐 것이다. 무당파 권법을 더 잘한다.
신법은 극한에 도달해 있다. 멸혼보를 터득했으니까.
나는 마지막 잡기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뇌신류 잡기는 귀혼일파의 기술인데 나는 귀혼일파의 무공과 술법을 수십가지 넘게 배웠고 암기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 이건 다 겉핥기만 해놨고 딱히 숙련도있게 익힌 게 하나도 없다.'
그냥 뇌신류 종사로 인정받고자 겸사겸사 성진과 귀혼일파 고수들에게 전승받은 것일 뿐 정말로 수련시간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일단 기초만 암기해놓고 나중에 시간날 때 수련하자는 차원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다섯 가지 분야 중에서 사실상 가장 숙련도가 없는 건 아마 잡기부 문일 것이다.
근데 뭔가 이상하다.
'진소청은 뭐하러 이렇게 약해빠졌고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뇌신류 잡기, 귀혼일파의 기술을 나한테 무혼의 조건이라고 말했던 것이지?'
귀혼일파의 진짜 주인이자 달마의 제자인 성진조차도 1천여 년 이상 살아온 대술법사인 것 치고는 사실 그리 강하지 않았다. 물론 일반적인 무림 기준에서는 성진의 힘만으로 구대문파나 오대세가따위는 하루아침에 쓸어 버릴 수 있겠지만, 아무튼 어둠의 세력까지 다 합쳐서 계산할 때는 성진의 힘이 그렇게 강한 편이 아닌 것이다. 성진의 실력은 굳이 따지자면 호법사자 한두 명 정도라고 할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성진이 만들어낸 귀혼일 파의 하위기술들 또한 사실 그리 강하지 않다. 말 그대로 잡기라고 칭하는 이유가 있다.
그러나 진소청은 이 잡기 또한 극한으로 익혀야 무혼을 볼 수 있다고 말한 바가 있었다.
왜일까?
'진소청은 뭔가 확신을 갖고 말한 거 같았는데…….'
진소청이 그 시점에 귀혼일파의 무공이나 술법을 잘 알고 있었을 리는 만무하다. 도리어 직접 귀혼일파에게 전승받은 내가 그보다 잘 알 것 이다. 그런데도 진소청이 딱 잘라서 귀혼일파의 힘이 필요하다고 말한 이유가 대체 무엇일지 궁금해졌다.
나는 시험 삼아서 내가 알고 있는 귀혼일파의 무공을 몇 개 기억나는 대로 펼쳐보았다.
그럭저럭 강호에서는 훌륭하다고 할 수준이었지만 역시 환술이나 눈속임이 많아서 무공 자체로는 그렇게 세다고 할 수 없었다. 단적으로 홍길동 같은 환술계 무공의 대가에 비하면 조잡하기 그지없다고까지 할 수 있다.
'이걸 왜 굳이 극한까지 익혀야 돼?'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이유가 없다. 권법보다도 더 열심히 익힐 이유가 느껴지지 않는다. 어차피 익혀 봐야 최대치가 성진 수준일 건데 뭐 하러 익혀야 한단말인가?
진소청…… 대체 뭘 보고 그런 말 을 했던 거지?
나는 처음으로 진소청의 안목에 의심을 품으면서 중얼거렸다.
"흠…… 그럼 나는 5가지 조건 중 에 2개를 이룬 건가? 나머지 3개의 극한이 뭔지를 아는 게 중요할지도 모르겠군."
창술의 극한은 이미 알고 있지만, 권법과 잡기의 극한은 뭔지 모른다.
나는 현재 상황을 머리에 정리하자 순간 의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 권법의 극한…… 있지 않았나?'
내 기억으로 무척이나 강력한 권법 의 대가가 있었던 것 같은데?
다음 순간, 나는 머릿속에 둔중한 타격을 받은 듯한 느낌을 받으며 소리 질렀다.
"아!! 맞다!"
권법의 최강자가 있지 않은가.
바로 백련교의 제 2대 교주인 호월!!
그가 펼치는 광룡파천황은 일대 다수로 팔부신중의 합공을 패퇴시킬 정도로 강력했으니 어찌 그걸 권법의 극한이라 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호월의 절대지경인 광룡파천황을 익히면 뇌신류 권법의 극한에 도달 할 수 있는 건가!!"
나는 단서를 찾아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지만, 이윽고 또다시 이상하다는 걸 깨닫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잠깐…… 호월은 사대무류가 생기기 전에 무공을 익혔던 거잖아. 그럼 그의 권법을 뇌신류 권법이라고 할 수 있는 건가?"
애초에 초대 뇌신류 종사인 초무린 부터가 호월의 제자이다. 뇌신류 초 대종사의 스승이라면 딱히 뇌신류를 익혔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헷갈리는 기억을 좀 더 정확 하게 살핀 후에 중얼거렸다.
"음. 호월이 사대무류의 기초를 직접 창안하고 사대무류의 초대종사에게 그걸 전해줬으니 맞다고 볼 수도 있는데…… 하지만 정작 초무린은 광룡파천황을 익히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왜 초무린은 광룡파천황을 안 익혔을까?
초무린 본신의 무공보다 몇십 배는 강력한 절대무공인데 어째서?
나는 그걸 딱히 생각해 본 적이 없었으나 이제는 좀 궁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무린은 그토록 강함을 갈구하던 천재였는데 광룡파천황을 배우지 않은 이유가 뭘까?
'호월이 안 가르쳐줬으면 못 배웠겠지만…… 어…… 근데 그렇다면 호월은 왜 광룡파천황을 초무린한테 전수하지 않은 거지?'
나는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결국 답은 하나밖에 없는 듯했다.
호월은 광룡파천황을 전수할 수 없는 이유가 존재했고, 또한 일부러 뇌신류에 광룡파천황을 주려 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광룡파천황은 뇌신류의 권법이 아닌 것이다.
그러고 보니 광룡파천황은 내가 보아왔던 절대지경 무공중에서도 손 에 꼽힐 정도로 강력했는데 그 근원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달마의 제자였던 호월이 어느 순간 익혔다고만 할 뿐 그의 사제인 성진조차 광룡파천황을 언제 어떻게 익혔는지는 전혀 모른다.
"……."
광룡파천황 이건 대체 뭐 하는 무공이야?
"이게 될려나?"
나는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문득 뭔 가가 생각이 나서 품속을 뒤적거렸다.
덜걱
내 손에 목갑이 들렸다. 역시 죽었 음에도 내가 갖고 있던 소지품이 이 공간에 그대로 딸려 들어온 것이다. 나는 목갑 안을 슬쩍 들여다보았고, 안에 여전히 내가 갖고 있던 석화된 보물들과 이광, 이환웅 등이 있는 게 보였다. 나는 그중에서 최근에 들어온 생소한 존재를 발견했고 그 대로 그를 끄집어내었다.
후웅
잠시후 내 앞에는 혼절한 사내가 엎어져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여전히 혼절해 있는 상태였고 나는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과거 복희의 말을 생각해냈다.
"정양하려면 칠 주야는 필요하댔지? 꺼내놓고 칠주야만 기다리면 되겠군."
목갑 내부는 시간이 천천히 흐르니까 꺼내놔야 그의 혼절을 풀 수 있 을 것이다.
심수력.
그는 저번에 혼절하기 전에 호월의 호법을 섰던 얘기를 했으므로, 그의 기억을 잘 더듬으면 호월의 단서를
얻고 내게 도움이 될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덤으로 그가 사대무류의 무공을 익힌 것도 같았기에 그것에 관해서도 물어볼 생각이었다.
"칠 주야동안 뇌신류 권법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한번 들여다볼까."
그것만 해도 칠 주야는 금방 지나 가겠지?
나는 얼추 해야 할 일을 정리한 후 생각했다.
'아직 일 년도 안 지났으니까 시간은 넉넉해. 하고 싶은 거나 마음껏 해 보자.'
그동안 배워만 놓고 한 번도 익히지 않은 것들을 재미 삼아 익혀볼 것이다!
파파파팟
나는 쉬지 않고 여태껏 배웠던 모든 뇌신류 권법을 다 처음부터 끝까지 펼치며 다듬었다.
'음…… 역시 난 재능이 별로 없군.'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권법도 재능 이 없다.
뇌신권, 뇌령인, 명왕수.
사실상 이 세 가지 기술이 뇌신류 권법 중에서 가장 자주 쓰이고 잘 아는 무공이었는데 뇌신권은 하도 자주 쓰고 연습도 많이 해서 숙련도가 높았다. 그런데 뇌령인과 명왕수는 종종 써먹긴 했어도 상당히 어려운 무공들이라서 사실 요체(要體)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단지 내 내공이 워낙 높아서 대충 갈겨도 큰 위력을 발휘했을 뿐 사실 이 두 무공의 성취는 오성(五成) 수준에 불과하리라.
이걸 확실히 깨닫게 되자 나는 내 권법 재능도 둔재에서 범재 사이에 불과하다는 걸 새삼 인식하게 되었다.
'뇌령인과 명왕수도 제대로 파고들면 십 년은 우습게 잡아먹겠는데…….'
근데 이제 와서 뇌령인의 성취가 더 높아져도 위력은 전혀 차이가 없을 것 같다. 어차피 섬도 날려 버릴 출력이 나오는 이유는 내공빨이었기 때문이다.
효율을 생각해보니 정말로 이제 와서 권법을 또 파는 게 바보짓처럼 느껴진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흥. 효율은 그만 따질거다.'
그것보다는 배운 걸 제대로 수련도 못 해보고 썩히는 게 더 아까우니까!
파파파팟
그렇게 순식간에 칠 주야가 흘렀고, 어느 순간 나는 사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건 뇌신류(雷神流)인가?"
나는 고개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어느 순간 폐허 속에서 정신을 차린 심수력이 멀뚱히 나를 쳐다보며 앉아 있었다.
나는 펼치던 초식을 멈추며 대꾸했다.
"그렇소. 역시 당신은 백련교 사람이 맞구려."
"저번에 자신을 화신류의 심수력이라고 했지. 그럼 당신은 화신류의 무공을 익힌 것이오?"
심수력은 그 자리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채 침묵했다. 그러더니 말했다.
"기억이 혼란스럽지만 두 가지는 확실하다네."
"두 가지?"
"한 가지는 내가 호월을 따라서 백두산에 갔다는 사실이고……."
이어진 심수력의 말에, 그가 가진 내력이 보통이 아니라는 걸 다시금 알 수 있었다.
"또 한 가지는 내가 화신류 말고 뇌신류도 익혔다는 사실일세."
"…… 정말이오?"
"그렇네. 어디 한 번 받아보게나."
슈슉
다음 순간 심수력의 몸이 꺼지듯 사라지더니 내 정면으로 짓쳐들어오며 그의 수도(手刀)가 그대로 내 목을 베어왔다.
'빠르다!!'
웬만한 초절정고수보다 더 빠르다고 느껴질 정도! 다만 절대지경의 감지력으로 알아채지 못할 정도의 기습은 아니었기에 나는 빠르게 창대를 들어 방어초식을 전개했고 그 의 공격을 쳐내었다. 그러나 수도는 한 차례 따당 하는 소리와 함께 튕겨 나가자마자 갑자기 그 기세를 몇 배나 강화하는 듯했다.
화르륵
화신류(火神流)
무극용왕참(無極龍王所)
심수력의 수도에 이글거리는 의념이 화룡(火龍)의 기세를 머금자 나는 그게 화신류의 비전절기인 무극 용왕참이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화신류 최강의 위력을 지닌 비기! 저걸 좀 더 진화개량시키면 십이무극용왕참이 되는데 그 위력은 어마어마했다.
'하지만 아무리 무극용왕참이라도 지금의 내가 못 받아낼 정도는 아니지!'
나는 칠대절학을 써서 흘려내든 아니면 무량단으로 받아치든 어떤 식으로든 응수할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무극용왕참이 날아오는 순간을 잡아내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바로 그 때였다.
치지징
갑자기 무극용왕참의 용머리 부분 이 화염에서 번개로 뒤바뀌는 게 아닌가?
"……?!"
꽈릉
심수력이 장풍(掌風)의 자세를 취하며 화룡에서 뇌룡(雷龍)으로 변한 무극용왕참의 기운을 내쏘자 마치 번개 그 자체나 다름없는 속도로 내게로 날아왔다. 날아왔다고 표현하기도 그런 게 그냥 번개의 속도라서 쭉 하고 밀리듯이 공간을 격하고 내게 적중된 것이다.
'아차! 당황해서 한 박자를 놓쳤어…….'
아무리 번개의 속도라도 절대지경 의 감지력이면 받아낼 수 있는데 당황한 탓에 상대의 공격을 허용해 버린 것이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전신에 호신강기를 올려서 막아내었는데 그래도 번개의 기운 탓에 감전은 어쩔 수 없을 것 같았기에 각오할 때 였다.
찌리링
"……?"
"허어. 설마 뇌룡을 그대로 흡수해 버리다니!!"
도리어 놀란 것은 공격을 날린 심수력이었다. 왜냐하면 내 호신강기 를 그대로 불태워 버릴 기세던 무극 용왕참의 기운이 그대로 내 몸에 흡 수된 것이다! 엄청난 뇌기였는데도 흔적 하나 없이 내 몸에 스며드는 걸 보자 심수력은 기가 막힌 지 혀 를 내두르며 말했다.
"흐으, 역시 범상치 않군. 설마 이미 갖고 있는 뇌령지기가 나보다 강할 줄이야."
"……."
"나는 이래 봬도 금뢰사자(金雷獅子)의 힘을 갖고 있는데 나보다 뇌령이 강한 인간이 있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네."
나는 그 말을 듣자 방금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었다. 세성의 정령이 불어넣은 뇌전의 기운이 너무 강력해서 뇌속성 공격은 모조리 흡수해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굳이 그걸 설명해줄 상황이 아니라고 느끼고는 심수력에게 말했다.
"저기, 그것보다 방금전 화신류의 무극용왕참을 번개의 기운으로 바꿨는데 도대체 어떻게……."
"응? 이 기술을 모르는 건가?"
도리어 심수력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호월이 분명히 사신지혼(四神之魂)의 비급을 백련교에 남겼다고 했었는데."
사신지혼!
나는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왜냐하면 그 단어는 내가 한백령과 황제 공손헌원에게서 직접 들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사신지혼(四神之魂)이 곧 부활할 테니!]
500년 후의 세계에서 뒤를 이어 백련교주가 된 한백령은 사신지혼이라는 수법을 쓸 수 있었다. 그녀는 어찌 된 일인지 사대신기를 어떻게 해야 회복시키는지 알고 있었으며 사대신기의 '판'을 회전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적이 있었다. 그리고 사대신기의 '그릇'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또한 한백령의 유지를 이어 황제와의 결전에서 나는 두 개의 사신지혼을 써서 일검일창을 이용해 황제를 무공으로 패퇴시킨 적이 있었다. 다만 이건 한백령의 넋이 내 몸을 움직였다고 할 수 있었으므로 명확히 어떤 기술인지는 알지 못했다.
[사신지혼(四神之魂)…… 나조차도 그것만은 읽지 못했던 건가…….]
그러나 황제는 마치 사신지혼이라는 기술을 자신의 예지력으로 읽지 못한 것처럼 말한 바가 있었다.
'그래서 그 이후로 사신지혼이라는게 줄곧 신경이 쓰였지만…… 알아 볼 방법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백령은 최종전투에서 워낙 순식간에 나타났다가 사라졌기에 내게 사신지혼이 뭔지를 제대로 설명해주지 못했다. 속 시원 하게 얘기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 못한 게 아쉬웠다. 다만 그 시대에 모든 것이 천마 사공린과 그 배후에 있는 황제에게 통제당하고 있었으니 섣불리 내게 마지막 역전 의 한 수가 될 수 있는 사신지혼을 미리 얘기해주지 못한 건 어찌 보면 당연할지도 몰랐다.
전생한 명나라 시대의 백련교주도 사신지혼의 정체를 모를 게 뻔하니 그동안 사신지혼에 대해서 알아내는 건 포기하고 있었는데, 설마 뜻밖에 심수력이 사신지혼을 언급하다니!!
나는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며 침착 하게 심수력에게 말했다.
"나도 사신지혼을 들은 바가 있소. 그게 비급으로 전승되는 기술이었다
는 말이오?"
내 질문에 심수력은 어깨를 으쓱하 며 대답했다.
"나는 호월에게 직접 배웠지만 호월은 후인들을 위해서 비급을 만들어서 백련교에 남기고 왔다고 한 바가 있었지. 후인들이 호월의 도움을 받지는 못할 테니 당연한 일이었을 거야."
"호월에게 직접 배웠다고?"
"그래. 나를 포함해 그를 수행하던 네 명은 모두 호월의 직계제자나 다 름없었지. 단, 제자라기엔 원래 관계는 달랐지만……."
그렇게 뇌까리던 심수력은 하늘을 쳐다보며 말했다.
"자네가 범상치 않다는 건 알고 있네. 사신지혼의 정체를 알고 호기심도 있는 걸 보니 아마 조금은 익히고 있기도 한 거 아닌가? 다만그 와 별개로 사신지혼의 비급은 후대에 유실(遺失)된 모양이군."
"……그 말대로요."
"자네의 얼굴에 호기심이 맹렬해 보이는군. 사신지혼을 내게서 배우고 싶나?"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가르쳐 주시오."
"가르쳐주고 싶지만, 자네도 내게 줘야 할 게 있는걸."
"원하는게 있소?"
심수력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여기는 어디이고 자네는 누구이고 대체 어떤 상황인지를 일목요연하게 설명해주게. 사실 그걸 하나도 모르겠군."
"아……."
하긴 그럴 것이다. 내가 신력으로 얼떨결에 인간을 창조하다가 심수력을 본의 아니게 불러낸 셈이 되었으니 그가 지금 상황을 알 도리가 없 으리라. 심지어 탁록시대에서 죽어서 천암비서의 [매듭] 내부로 와 버렸으니 이건 정말로 말해주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
나는 침착하게 말했다.
"조금 얘기가 길어질 텐데 거기 앉아서 들어보시오. 그리고 터무니없다고 생각해도 그냥 납득하는게 좋을 거요."
"기대되는걸. 얼마나 기오막측하길래……."
나는 심수력에게 내 과거사는 물론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를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약 한 식경에 걸쳐서 간략한 설명이 끝나자 심수력은 황당한 표정으로 입을 쩍 벌렸다.
"……저, 전생? [큰 굴레]를 돌려서 과거에 왔다? 30번 죽었다 살았고 지금은 힘을 쌓으려고 300년 동안 닫힌 세계에서 수련 중이고 그 와중에 날 꺼내보았다? 그걸 지금 나더러 믿으라는 건가?"
"이런 얘기를 일부러 당신 하나 속이려고 꾸며낼 수 있다 생각하오?"
파지지직!!
나는 말을 끝내면서 곧장 구궁파천뢰의 기운을 끌어내서 운용했다. 전신에 어마어마한 뇌류가 몰아치자 심수력은 꽤 놀란 듯했으며 나는 구궁파천뢰의 기운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이게 방금 말했던 구궁파천뢰요. 미래에서 얻어낸 무공이지. 이런 건 아마 본 적이 없는 무공일 거요."
"음……."
"그리고……와라, 아그니!"
파앗
사대신기 아그니가 내 손에 잡히자 심수력의 눈이 크게 동요하는 듯했다. 나는 쐐기를 박듯 말했다.
"보다시피 사대신기가 내 것이오. 이걸로 설명이다 됐지 않소?"
"……진짜 아그니로군. 설마 다른 사대신기도 갖고 있나?"
나는 바즈라 빼고 다 꺼내서 한 번씩 보여주었다. 심수력이 멍한 표 정을 짓자 나는 사대신기를 다시 돌려보내며 말했다.
"인드라 때문에 죽어 버렸기 때문에 지금 바즈라를 꺼내려 하면 또 뇌신이 날 죽이려고 할 거요. 그래서 못 보여주는걸 양해해 주시오."
"믿기지 않는 일이 눈앞에서 벌어 졌군. 설마 석년의 호월만큼이나 대단한 기인(奇人)이 눈앞에 있을 줄이야……."
이젠 감탄을 하던 심수력이 말했다.
"좋네. 자네의 말은 다 믿겠네. 그래서 자네가 이 세상에서 300년을 수련하고 나면 다시 탁록의 시대로 되돌아간다 이 말이군?"
"아마 그럴 것이오."
"……300년 동안 사신지혼을 터득 하는 건 어렵지 않을 거야. 나도 자네에게 가르쳐줄 이유를 확실히 알 게 되었으니까."
심수력은 자신의 감정을 정리하듯 연무장에 풀썩 앉아서 눈을 반개한 채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나한테도 도움을 좀 줬으면 좋겠군."
"사신지혼을 가르쳐주는 대가요?"
"대가라고 하기도 뭣하군. 사실 나는 지금 기억이 사라져 있어."
"기억이 사라졌다고?"
내가 반문하자 심수력은 고개를 끄 덕였다.
"자네 말대로라면 자네도 날 어떻게 소환한 건지는 모르는 모양인데, 내 마지막 기억은 호월과 함께 백두산에 진입해서 마도사축을 발견하고 나서 산신령을 만났을 때까지일세. 그 이후는 내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어."
"흠. 사실 나도 그게 궁금하군."
나는 팔짱을 끼며 심수력에게 말했다.
"당신은 호월과 무슨 관계이고 어째서 호월과 함께 백두산에 간 거요? 그리고 백두산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거요?"
"다 대답해주고 싶지만 일단 비밀로 해두지."
나는 심수력의 대답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비미일? 뭔 소리 하는 거요? 나 는 내 얘기를 다 해준 것 같은데."
"난 아직 자네가 어떤 인물인지 전혀 모르겠어. 그래서 사신지혼을 익히는 걸 보고 나서 판단하고 싶군."
"내가 사신지혼을 익히는 게 당신이랑 뭔 상관이란 말이오?"
"내가 볼 때 자네는 잡생각이 많아 보여서 말일세."
심수력은 약간 심술궂은 얼굴로 씩 웃더니 말했다.
"자네 자신의 말에 따르면 안 그래도 재능이 없는데 수련에 집중할 기회도 없어서 300년을 부여받은 거 아닌가? 내가 괜히 많은 걸 가르쳐 주면 재능도 없는데 머릿속이 복잡 해서 아무 집중이 안 될걸? 전생자라서 온갖 걸 기억해야 하니까."
"……."
"폐관수련을 할 때는 본디 아무 생각 않고 수련에만 집중하는게 낫 지. 300년이라면 하나를 이뤄낸 후 에 다른 것에 도전해도 늦지 않을 시간이잖은가?"
일리 있는 얘기다. 사신지혼부터 확실히 익혀보고 나서 심수력 얘기를 들어도 늦지 않다.
'꽤 경륜 있는 무림인이었던 모양 이군…….'
심수력의 속내가 깊다는 걸 알게 된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군. 그럼 사신지혼을 좀 가르쳐 주시오."
"가르쳐준다기도 뭣한 게 내가 알고 있는 사신지혼은 그저 사신(四神)의 혼에 깃들어있는 속성을 다른 속성으로 바꾸는 것뿐일세. 자, 보게 나."
우웅
심수력이 손 위에 화령지기(火靈之氣)를 구의 형태로 만들어서 둥둥 띄웠다.
"이렇게 바꾸는 거지."
파지직 -
다음 순간 화령지기의 새빨간 구체 는 갑자기 뇌구(雷球)로 바뀌었다. 나는 그걸 보자 단박에 알아차릴 수 가 있었다.
"뇌령지기로 바꾼 거군."
"맞아."
"하지만 그 정도는 사대무류 고수들이 다 할 수 있는 거요. 기초는 공유하고 있으니 기본적인 기질을 타 무류의 기운으로 바꾸어서 위장 할 수 있지. 허나 당신은 강력한 무극용왕참이란 기술의 성질을 통째로 바꾸어 버렸는데, 그건 내가 알고 있는 사대무류 고수 중에서 누구도 할 수 없는 거요."
내 말에 심수력은 실실 웃었다.
"흐흐. 아마 그건 뇌수화풍(雷水火 風)을 자연지기(自然之氣)로만 다루어서 생긴 한계일세. 역시비급이 실전된 게 맞군."
"무슨 소리요? 자연지기가 아니란 건가?"
"자연지기라는 건 뇌수화풍의 표면적인 속성만 다루는 거야. 실제로는 '그릇'을 통째로 바꾸는 기술이 따로 있지."
후웅 -
"이렇게."
다음 순간 심수력의 손 위에 있던 뇌령의 기운이 풍령(風靈)으로, 그리고 풍령이다시 수령(水靈)으로 바뀌었다. 거기까지는 나도 할 수 있는 거였지만 이윽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위이잉
"……!!"
이윽고 중앙에 화령이 뭉친 채 나머지 3개의 기운이 소구(小球)처럼 변해서 화령의 구를 원운동으로 따르는 게 아닌가? 나는 저런 걸 죽었다 깨어나도 할 수 없었기에 당황해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어, 어떻게 한 거지?"
명대의 백련교주도 저런 건 못할 거야!
"뇌수화풍을 자연지기로만 다루면 '이걸' 못하지. 왜냐하면 자연지기는 오행(五行)의 충돌이 있어서 상극과 상생의 흐름에 휘말려서 기운을 한꺼번에 다룰 수가 없어. 비급이 실전되었다면 당연한 일……."
꾸욱 하고 심수력이 손을 말아쥐자 모든 기운이 소멸되었다. 심수력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백련교 뇌수화풍의 본질은 오행에 속박당하지 않아. 설령 세계를 이루는 오행의 법칙이 끊기더라도 여전히 작동할 수 있는 힘일세. 그게 가능한 건 바로 '그릇'을 통째 로 움직이기 때문이고, 그걸 움직이는 방법을 호월은 사신지혼이라고 칭했네."
"흠!! 호월이 창안한 무공이란 말 이오?"
"맞네."
"설마 그릇이라는 건…… 뇌신지혼
(雷神之魂)을 이야기하는 거요?"
"호오, 역시 뇌신지혼을 알고 있군."
"알다 뿐이겠소? 쓸 수도 있소. 하하하."
"……?"
내가 뿌듯해하자 심수력은 뭔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그걸 쓰는 게 딱히 자랑은 아닌 거 같은데……."
"뭐라고! 어디 한 번 보겠소?"
나는 뇌신류의 궁극기술인 뇌신지혼이 폄하 받은 듯한 느낌에 약간 속이 상했다. 그래서 구궁파천뢰의 기운을 끌어서 극대화시키면서 힘을 정천(正天)에 모으며 생각했다.
'진짜 뇌신지혼처럼 맘대로 쓰지는 못하지만…… 진소청의 가면을 썼을 때의 그 감각을 이용하면 한순간 정도는.'
구궁파천뢰의 뇌기를 빌려서 짧은 순간 발현할 수 있어!
황제와의 대결에서도 썼는데 이제 와서 이 정도를 못 할까!
우오오오 -
구궁이 연환 하면서 강대한 기운이 휘몰아치기 시작한다. 나는 그 기운을 천천히 일백 이흑으로 모으며 몸 안에서 뇌구를 돌리려고 했는데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어? 히, 힘이 왜 이렇게 쎄?'
두쿵
삼벽(三署), 사록(四綠)을 넘어서 오황(五黃)까지 전개되었을 때 나는 평소에 대하던 구궁파천뢰의 흐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지금까지 구궁파천뢰를 시전할 때 딱 내 몸뚱이만 한 바퀴를 바닥에 둘둘 굴리는 감각이었다면, 지금은 그 바퀴가 마치 집채만큼 커져서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안 잡 히는 기분!
'너무 크다?! 뭐야 이거!!'
이럴 리가 없는데?! 이미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어!!
하지만 여기서 펼치다가 멈추면 도리어 내가 죽는 것이었기에 나는 이 를 악물고 전력을 다해서 오황의 흐름을 몸 안에서 회전시켰다. 그리고 회전시킴과 동시에 전신이 찢기는 듯한 반발력을 느꼈고 피부 한 점 한 점이 칼로 떼이는 듯한 고통에 나는 비명을 내질렀다.
"꾸에에엑!!"
온갖 고통을 다 참았지만. 이, 이건 좀 심해!!
나는 비명을 내지르면서도 어떻게 든 거대한 뇌전의 바퀴를 굴린 것 같았고 이윽고 내 노력에 감응해서 구궁파천뢰가 뇌신지혼의 형태를 구현하는게 느껴졌다.
쿠콰콰콰
내 전신이 뇌전과 동화(同化)된 게 느껴진다. 마치 이청운이 쓸 때와 같은 현상이었고 나는 고통 때문에 의식이 혼미한 와중에도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보, 보시오. 이게 바로 뇌신지혼…… 번개의 속도로 움직일 수가 있소!]
"……?!"
[흐럅!]
번쩍!
다음 순간 나는 말 그대로 번개의 속도로 움직여서 연무장을 단숨에 수백 바퀴나 돌 수 있었다. 내가 그걸 끝내고 제자리로 돌아오자 구궁 파천뢰로 끌어낸 뇌신지혼은 풀렸고, 나는 헉헉대면서 그 자리에 꿇어앉아서 기침을 토했다.
"크헥! 쿨럭…… 헉…… 헉…… 봐, 봤소? 이게 대단치 않단 말이오…… 후엑."
아, 젠장…… 멋 좀 부리려 했는데 잘 안 되네!!
역시 뇌신지혼의 요결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구궁파천뢰의 힘을 빌려서 억지로 하면 힘들어!!
내가 속으로 기력이 빠져 있을 때 심수력이 멍하니 있다가 떨리는 목 소리로 말했다.
"뭐…… 뭐야…… 번개의 속도로 움직인다고? 미쳤구만!"
"미쳤다고? 뇌신지혼이 원래 그런 거 아니오?"
심수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뇌신지혼은 그냥 뇌정(雷精)의 '그릇'을 의념으로 만든 후 다른 사신지혼의 그릇과 감응해서 힘을 움직이는 거뿐인데 자네는지금 뭘 한거지?"
"……?"
"그건 내가 아는 뇌신지혼이 아닐세."
이어진 심수력의 말에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호월의 뇌신지혼은 자네처럼 번개의 속도로 움직이는 기술 같은게 아예 없었단말이야."
"……?!"
"애초에 발전시킨다고 그딴 식이 될거란 생각조차 하지 않았네."
뭐, 뭐시라?
나는 어이가 없어서 눈만 껌벅이고 있다가 그의 말에서 뭔가를 알아차렸다.
'설마…….'
생각해보니까 뇌신지혼과 화신지혼만 명확한 기술로 존재할 뿐 풍신지혼이나 수신지혼 같은 건 아예 존재 하지도 않았다. 풍신류나 수신류 고수들은 처음부터 그딴 걸 만들 생각도 하지 않은 것이다.
그나마도 확실히 무공의 형태로 다 듬은 건 이청운의 뇌신지혼뿐이었고 화신지혼은 그런 이청운에 대항하기 위해 한백령이 임의로 천령단의 힘을 소모하는 방식으로 만든 변칙기술일 뿐. 한백령이 제대로 화신지혼을 극성의 기술로 다듬은 건 교주의 직계후계자가 되고 절대지경에 이르러 500년의 시간이 지난 이후였다.
순간 내 머릿속에 이청운과의 대화가 스쳐 지나갔다.
[그러면 한 가지 묻지. 어째서 뇌신류는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지 않고 인간의 무예를 뛰어넘은 궁극의 무혼을 추구하게 된 거라고 생각하나? 풍신류나 화신류처럼 적당한 선에서 최종오의를 마련하면 무의 흐름이 안정될 텐데 말일세.]
[오대 전의 사조는 뇌신류를 연마 하여 의념지경을 넘어서려 했지. 허나 벽이 느껴져서 고민하던 중에 사조의 앞에 무신이라는 존재가 나타 났다고 하네. 무신은 초월무예의 길을 제시하며 사조에게 무혼(武魂)이라는 경지가 있다는 걸 알려줬지. 그 이후부터 뇌신류 종사들은 무혼을 이루기 위하여 부단한 노력을 하게 된 것일세.]
그 당시에는 이청운의 말을 깊게 생각지 않았다.
어차피 어떤 방식이든 뇌신의 '그릇'을 만든다는 사실은 같지 않은 가?
하지만 이제 보니 그 말은 굉장히 심오한 의미가 있었으리라.
"……."
그렇다.
명나라 시대 뇌신류의 뇌신지혼은 초대종사 호월이 창안한 그 뇌신지 혼과 뿌리가 다르다.
도리어 신기의 그릇이 된다는 목적 이 부차적인 기능에 불과하게 된 셈 이다.
그렇다는 건 설마…….
나는 머릿속에서 아찔한 생각을 하고 말았다.
그건 뇌신류 종사로서의 직감이나 다름없었다.
무혼(武魂).
이것은 처음부터 사대신기와 아무 상관 없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