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검신-1429-1438화 (1,377/1,615)

촤라락

복희가 한번 부채를 접었다 폈을 때였다.

슈웅!

다음 순간 우리는 탁록의 박쥐 동굴 바로 앞에 와 있었다. 나는 복희의 힘으로 순간이동 하자 살짝 감탄해서 말했다.

"대단하군요. 이건 신술입니까?"

"신술을 쓸 수도 있었겠지만, 그냥 신의 힘을 썼네. 백 배는 간편하거든."

"자네도 원래는 비등이라는 걸 쓰지 않았나? 그런 마도구들은 원래 [옛 지배자]의 힘을 부러워하고 갈망하여 모방한 것들이야. 차이점이 있다면 신은 아무런 제약도 저주도 받지 않고 이런 능력을 쓸 수 있으나 필멸자들의 마도구는 온갖 제약을 걸어 스스로에게 파멸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렇게 중얼거린 복희가 힐끔 나를 바라보았다.

"그럼 이제 봉황을 만나 어떤 얘기를 했는지 들어볼까."

나는 복희에게 봉황과 만나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상세히 말해주었다. 물론 봉황이 발설금지의 제약을 걸어놓은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어차피 내가 말하려 해도 할 수 없도록 되어 있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가호 얘기를 듣고 난 복희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확실히 재밌는 가호겠군."

"무적을 깨는 가호라고 하였는데 어떤 능력일까요?"

"짐작 가는 건 있네만 단 한 번밖에 쓸 수 없다고 하니 섣불리 시험 할 수 없겠군. 그렇다면 해결방법은 뻔하지."

"무엇입니까?"

"자네가 맞닥뜨린 상대가 무적이라고 생각될 때 쓰면 되네. 봉황도 그걸 염두에 두고 자네에게 단서를 한 마디 건네준 거지."

"흠……."

애매모호하다.

‘엄청 센 놈이 나타나면 그때 쓰면 되는 건가?'

어찌 됐든 황제를 상대할 때 쓰려고 아껴놓은 능력이라고 했으니 황제 본체가 나타났을 때 쓰면 되지 않을까? 나는 대충 그렇게 생각을 정리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복희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굳이 물어보지는 않겠지만 자네는 그 외에도 봉황과 여러가지 얘기를 했으리라 짐작되는군."

"아! 죄책감 안 느껴도 되네. 저 신중한 봉황의 성격으로 볼 때 자네에게 발설금지의 계약을 걸어놓고 얘기했을 건 뻔하니까. 가호에 따로 제약을 안 붙인 건 비장의 무기를 써야 하니 나한테 조언이라도 들으라는 얘기겠지."

정말 귀신같이 다 눈치챘구나……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게 뭐가 있나? 아무리 내가 조언을 해준다 해도 결국 모든 걸 결정하는 건 자네일세. 그리고 겨우 발설금지의 계약으로 봉황의 정보를 알아냈다면 자네가 무조건 이득일걸세."

복희는 근처의 바위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이로써 사대신수를 다 한 번씩 만나보고 가호도 다 받았군. 나와 자네의 계약 중에서 선신의 가호를 주겠다는 조항은 이로써 모두 이행했다네. 그리고 신력을 다루는 법을 지도해준다는 것도 이행했지?"

"아…… 그렇습니다."

복희는 턱을 괸 채로 부채로 자신의 머리를 톡 하고 건드렸다.

"그럼 이제 신술을 전수해주는 것 만 남았군. 그런데 신술을 전수하고자 한다면 이 탁록에서는 안 될 일이네."

"어째서입니까?"

"아무리 신농이 나와 친하다지만 여기는 신농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영지일세. 이곳에서 내가 창조한 신술을 수련하면 신농은 불쾌할 수밖에 없네. 여기를 떠나서 다른 장소에서 수련해야겠지."

"좋습니다. 바로 천계 곤륜산으로 가지요!"

굳이 이 탁록에 남아 있을 이유도 없고 바로 천계 곤륜산으로 가서 신술이나 수행해야지!

내가 주먹을 불끈쥐자 복희가 무슨 말을 하냐는 얼굴로 쳐다보며 말했다.

"자네 깜박했나? 지금 곤륜산에 가면 바로 서왕모와 맞닥뜨리게 될 텐데."

"아!!"

그러고 보니 곤륜산 내에 서왕모의 궁전이 있었지!

내가 그제서야 알아채자 복희가 말했다.

"안 그래도 내가 여와를 따로 만나서 지금 서왕모의 궁에서 소녀가 왜 있는지, 그리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봐야 할 참일세.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니 사실 지금 자네한테 신술을 가르쳐주기도 마땅찮네."

"그럼……."

"나는 우선 여와를 만나러 가겠네. 자네는 그동안에 전륜성왕이 내놓은 의뢰를 수행하는 게 좋을 듯하네."

"전륜성왕의 의뢰요?"

복희는 고개를 끄덕하고는 말했다.

"사대신수의 가호를 모두 받았으니 이제 힘은 충분하겠지. 만일의 경우에라도 당하지는 않을 터이니 우선 할 것부터 해두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아, 깜박할 뻔했군. 이걸 받게."

복희가 품속에서 뭔가 기이한 나무 패(佩)를 꺼내서 내게 던져주었다. 팔괘가 양각되어 있는 그 기묘한 나무패를 내가 받아들자 복희는 말했다.

"내 권위를 상징하는 팔괘신패일세. 그걸 보여주면 천계의 모든 존재가 자네를 공격하지 않을 걸세. 문지기나 결계도 자동으로 열릴 테니 나중에 천계에 찾아올 때 사용하게나."

귀찮은 일을 피하게 하려고 배려해 준 듯했다. 나는 감사를 표했다.

"고맙습니다."

"그럼 다음에 또 보지."

우우웅!!

복희는 말이 끝나자마자 사라졌다. 나는 복희가 너무 깔끔하게 가버려서 허탈할 정도였는데, 그건 복희가 어쩌면 나와 계속 다닐 거라는 기대감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복희 말대로 지금 곤륜산의 상황을 알아보는 건 무척 중요한 일이니 붙잡을 수도 없었다.

그러자 내 옆에 있던 흑웅이 말했다.

[주인. 이제 동방삭(東方朔)을 찾으러 가야 할 듯하구려.]

"그렇겠지."

전륜성왕이 줬던 의뢰는 바로 소녀의 행방을 알아내고 동방삭을 잡아 오는 것!

그중에서 소녀의 행방은 이미 알아낸 듯했고 이젠 동방삭을 잡아야 하는데, 동방삭의 위치가 저 남미대륙이라는 걸 유소에게 들은 후였다.

남미대륙에서 동방삭만 잡아가면 전륜성왕에게서 칠보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유소한테 한 번 더 들러서 동방삭의 정확한 위치를 듣고 나서 출발하자."

[…… 주인. 그럴 때가 아니오.]

"응?"

[주인에게는 더 급한 일이 남아 있음을 잊었소?]

이어진 흑웅의 무거운 말투에 나 또한 얼굴이 굳어지고 말았다.

[사대신수 기린이 준 번개의 가호가 너무 강력해서 지금도 실시간으로 신력이 소모되고 있소. 이 가호의 힘을 해갈(解渴)할 방법부터 찾아야 동방삭을 찾으러 갈 수 있을 것이오.]

"……!!"

[주인에게 내색은 안 했지만 지금은 억지로 힘으로 누르는 중이니 신력의 소모가 은근히 심각하오. 이대로 가면 결국 신력은 고갈되고 주인은 주인대로 번개의 힘에 타죽고 말 것이오.]

맞다! 그랬지!

기린이 준 세성의 정령의 가호가 너무 강력해서 내 몸이 터져 나가기도 했는데 그걸 억지로 흑웅이 신력으로 누르는 중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건 정상적인 방법이 아니었기에 해결책을 찾아야만 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사실 지금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소. 세성은 목성(木星)이라고도 불리는 거대한 별이며 목요의 힘의 원천지. 그곳에 거하는 번개의 정령은 지구의 번개와 차원이 다른 힘을 갖고 있소. 최소한 수백 배에서 수 천 배 이상의 뇌력(電力)…… 이 정도 힘이면 아마 신술이나 인간계의 봉인술로도 이걸 묶어둘 방법이 딱히 없기에 복희도 별다른 조언을 못한 것이 분명하오.]

"끄응……."

흑웅도 별다른 답이 없다는 대꾸에 나는 골치 아픔을 느꼈다. 이런 문제는 도대체 어떻게 해결해야 한다는 말인가?

바로 그 때였다.

"본녀는 해결방법이 보이는구나."

우리 곁에 있던 화룡진인이 불쑥 입을 열었다. 나와 흑웅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하자, 화룡진인이 말했다.

"무척 간단한 것 같은데 말이다."

"해결방법이 있단 말이오? 그게 무엇이오?"

"후훗. 왜 굳이 봉인을 한다는 말 이냐? 아깝게시리."

내가 간절하게 되묻자 화룡진인이 씩 웃으며 말했다.

"넘치는 힘은 그냥 전부 펑펑 써 버리면 될 게 아닌가."

넘치는 힘을 펑펑 써 버리자고?

생각보다 무척 단순한 해결법이었다.

나는 그 단순한 해결법이 통할런지 몰랐기에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그게 되는 건가?"

"세성의 가호가 지금 그대의 몸 속에서 웅혼한 기운을 주체하지 못하고 날뛰려 하는 게 문제이니 그 기운을 외부로 방출해서 원 없이 날뛰게 해주면 되는 거겠지. 어찌 되었든 그 가호에 속한 힘도 무한은 아닐 테니 쓰다 보면 없어져서 부담도 덜해지지 않겠는가?"

"흐음……."

나는 힐끔 흑웅을 보았다. 그러자 흑웅이 말했다.

[화룡진인의 해결법은 나도 생각해 보았으니 문제점이 있소.]

"어떤 문제점인데?"

[목성의 번개이니 이 힘은 지구의 번개와 차원이 다르오. 자칫했다가는 엄청난 파괴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에 주인의 신중한 결단이 필요하오.]

"어느 정도로 강하길래……."

[주인. 시험삼아 지금 제어하고 있는 뇌력의 1푼에 속하는 힘을 주인의 팔으로 보내겠소. 이걸 그대로 하늘을 향해 방출해 보시오.]

쿠구구구구!!

잠시 후 나는 내 팔에 어마어마한 뇌전이 모이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번개의 힘이 어찌나 강력한지 내 팔 주위에 뇌운(雷雲)이 감돌았고 내 전신의 뇌령지기가 이 뇌전에 비교하면 마치 희미하게 꺼진 장작불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빠지직!!

"이, 이게 1푼이라고?"

나는 생각보다 너무 강력한 뇌전의 힘에 당황했지만 흑웅은 내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외쳤다.

[정신차리고 하늘로 방출하시오!!]

"흐압!!"

꽈르릉!!

다음 순간 - 천지가 새하얗게 물 들었다. 내 팔을 통해서 쏘아진 한 줄기의 뇌전이 잠시 후 빛의 기둥으로 뒤바뀌더니 천지사해의 시야를 빛으로 가득 채운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서 이 뇌전의 기운은 그대로 천공의 기류를 뚫어 버리고 아득한 우주를 향해 뻗어 나가는 게 느껴졌는데, 문제는 이 힘이 천공으로 올라갈수록 마치 고깔마냥 그 범위를 넓혀 버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쿠구구구구!!

이렇게나 힘을 방출했는데 도저히 힘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나는 무려 반 식경이 넘는 시간동안 계속 방출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고, 한 식경이 다 되어갈 때에야 방출이 끝나서 뇌전의 힘을 거둘 수가 있었다.

"헉, 헉!!"

온몸이 저릿저릿하다. 목이 마르고 손발이 후들거린다. 순식간에 체력을 바닥치게 할 정도로 뇌전의 기운이 강렬했던 탓이었다. 내가 쓰러질락말락 하는 걸 지켜보고 있던 흑웅이 말했다.

[주인은 호법사자급의 내공을 휘둘러도 거의 지치지 않는 체력과 통제력의 소유자. 그런 주인이 이 정도로 지친다는 것에서 규모가 다른 힘이란 걸 실감했을 것이오.]

"그렇…… 군…… 이건…… 차원이 다른 가호야."

나는 아직도 뇌전이 파직거리는 내 손을 쳐다보며 전율했다. 방금 전까지는 그냥 대단하다는 막연한 감상 밖에 없었다면 지금은 이 뇌전이 실제로 지니고 있는 힘이 어느 정도인지 체감했기 때문이다. 흑웅이 말을 이었다.

[방금 그 가호를 조금이라도 땅으로 향했다면 대륙이 날아갔을지도 모르오. 목성의 대자연은 지구보다 수천 배나 광대하며, 그 광대한 목성에서 모인 뇌령의 힘은 사실 어마어마한 것. 여태껏 주인이 받아왔던 가호중에서 단순히 물리적인 힘만으로는 손가락에 꼽힐 것이오.]

"음…… 손쉽게 처리할 수 없다는 건 알겠다. 하지만 방금 전 1푼의 힘을 소모했다면 이런 식으로 99번 만 더 하면 되는 게 아니냐?"

[기린의 가호이기에 그 정도의 힘을 소모한 건 얼마 지나지 않아 보충되오. 이런 식으로는 99번이 아니라 오백 번을 해도 절반도 소모하기 힘들 것이오.]

"……."

미쳤군…….

내가 이 가호의 어마어마함에 혀를 내두르고 있을 때 흑웅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렇다고 이 가호의 1할 이상을 끌어올리면 아무리 내가 신력으로 보호해도 주인의 신체에 피해가 올 수밖에 없소. 왜냐하면 내부에서부터 뿜어져나오는 힘이기 때문. 아무리 생각해도 방출으로 이걸 다 소모하는 건 무모한 짓이오.]

그러자 화룡진인이 듣고 있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후후, 과연 신의 힘을 지닌 정령답지만…… 그렇기에 사고방식이 유연하지 못하구나."

[뭣이? 다른 방법이 있단 말이오?]

"그렇게 단순무식하게 방출할 필요가 어디있는가? 안 쓰는걸 굳이 버려야만 하느냐? 안 쓰는 물건이라 하면 남한테 나눠줄 수도 있지 않겠느냐."

[……!!]

흑웅이 뭔가를 깨달은 듯 흠칫하자 화룡진인이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백웅이여. 그 세성의 가호가 계속 힘을 소모해도 회복할 수 있는 이유는 사실 그대의 상단전(上丹田)에 지금 세성의 정령이 그대로 소환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린이 무식하게 억겁의 세월동안 세성의 대기를 떠돌던 번개의 정령을 잡아와서 그 본체를 그대의 머릿속에 집어넣은 거나 다름없지."

"번개의 정령이 소환되어 있다고……."

"그렇다면 답은 간단하다. 번개의 정령과 직접 소통하여 그 자에게 동의를 구하는 것이다. 이대로는 그 자의 힘을 곧이곧대로 쓸 수가 없으니, 안 쓰는 힘을 타인에게 나누어 주도록 허락해 달라고."

"으음!!"

"수십 개로 분할을 해서 근처의 다른 동료들에게 나누어주면 그대가 충분히 남은 힘을 다스릴 수도 있겠지."

그런 게 되나?!

뜻밖의 해결방법을 듣자 내가 놀라서 눈을 크게 떴고, 흑웅이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가호의 형태로 상단전에 틀어박혀 있는 정령은 아무리 나라도 대화를 걸 수가 없소. 그래서 생각지도 않았던 방법인데 그 자와 소통할 방법이 있기라도 하오? 사실상 벽에 새겨져 있는 벽화에 말을 거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단 말이오.]

"그대의 능력은 백웅이 받은 적 있던 가호를 복사하는 거라고 하지 않았는가? 나는 그 가호가 얼마나 되는지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그중에서 무형의 존재를 유형화시키는 가호가 있다면 한 번 써봄직하겠군. 없으면 뭐 다른 방법을 쓰면 되지 않겠나."

응?!

나는 화룡진인의 말을 듣고 있다가 퍼뜩 떠올라서 흑웅에게 외쳤다.

"흑웅!! 옥황상제의 가호!"

[……!!]

흑웅도 무슨 말인지 알아챈 듯했다. 그러고는 내 미간을 향해 손을 뻗으며 말했다.

[성라회천(星羅回天) 재귀발현(再歸發現)…… 옥황상제의 권능을 사용하나니, 세성의 뇌혼이여, 형상을 갖출지어다!!]

파지지직!!

다음 순간, 눈앞에 새파란 빛과 함께 뇌운과 함께 빛으로 이루어진 인영(人影)이 떠올랐다. 엄청난 뇌광을 실시간으로 뿜어내고 있어서 도저히 육안으로 제대로 보기가 힘들 었지만, 그 정체는 명백히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육체를 갖고 나타난 존재가 자신의 뇌전을 서서히 줄이며 영언으로 말했다.

[나는 세성에 거하는 뇌혼(雷魂)…… 사대신수 기린이 나를 가호로 만들었을진대 그대들은 굳이 내 본질을 드러내었구나! 용건이 무엇인가?]

"됐다!!"

나는 뛸듯이 기뻐서 소리를 쳤다.

옥황상제의 가호!!

그것은 무형의 혼에게 육체를 부여하는 능력이었는데 별다른 인과율이나 술력소모가 필요 없다는 장점이 있었다. 28번째 삶에서 얻었던 이 능력은 그 이후로 별로 쓸 일이 없어서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화룡진인이 했던 말에서 연상이 되자마자 흑웅에게 써 보라고 주문한 것이다. 그리고 옥황상제의 가호는 가호로 변해 있는 정령조차도 다시 육신을 부여해서 현계시킬 수 있다는 걸 눈 앞에서 확인한 듯했다.

'아차!’

동시에 나는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에 힐끔 화룡진인을 바라보았다. 화룡진인은 내가 자신을 쳐다보자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러느냐?"

"내가 옥황상제의 권능을 쓰는 이유는 어…… 그게 사실……."

천계 지배자의 능력을 쓰는 게 의심을 사는 게 아닐까? 나는 또 실수했다는 생각에 불안초조해졌지만 화룡진인은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옥황상제라고 하는 강력한 신적 존재가 있나보지? 뭔지는 몰라도 내 눈치는 안 봐도 된다."

"……? 옥황상제 모르오?"

"처음 듣는군."

뭐지? 이 시대에는 옥황상제가 없는 것인가?

'하긴 탁록대전의 시대에는 없을 수도 있겠군……’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눈앞에 나타난 세성의 뇌정령에게 말을 걸었다.

"번개의 정령이여! 부탁이 있다!"

[말하라.]

"네 힘이 너무 막대해서 내가 다 제어하기 힘들다! 힘을 완벽히 제어하게 도와줄 수 있냐?"

힘을 나누는 것도 좋지만 이왕이면 본인의 도움으로 완전히 제어하는 게 더 좋겠지!

내가 그런 기대를 걸고 부탁했지만 번개의 정령은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지금 그대에게 연결되어 있는 건 세성 본성(本星)의 힘 그자체. 지금조차도 엄청나게 제어되어서 그대에게 흘러들어오고 있는 힘이니 더 이상의 제어는 불가능하다.]

"젠장... 그러면 이 힘을 나누어서 다른 놈들한테 나눠줘도 되겠지?"

[가능한 일이다.]

"좋아. 동의했군. 그럼 당장……."

내가 쾌재를 부르고 있을 때 뇌정령이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정말 쓸데없이 타인에게 힘을 나눌 생각인가?]

"뭐?"

[몇 분할을 할지는 모르지만 세성의 광대한 힘은 아무리 나누어도 보통 필멸자는 감당할 수 없다. 불멸자조차도 쉽지 않으리라. 그리고 그런 것보다 그대에게는 더 좋은 방법이 있는 것 같은데.]

"더 좋은 방법이라고?"

내가 반문하자 뇌정령이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대가 갖고 있는 강대한 뇌전의 신…… 그 신에게 내 기운을 바치면 된다. 그대가 필요한 만큼만 남겨놓고 바친다면 가장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으리라 본다.]

"……."

나는 뇌정령의 말이 무슨 뜻인지 단박에 이해할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옆에 있던 흑웅이 나직이 말했다.

[뇌신기(雷神器) 바즈라…… 그 안에 존재하는 뇌신 인드라에게 뇌전의 기운을 공양하라는 말이군.]

[그렇다. 그 존재는 나보다 훨씬 상위의 존재…… 아니, 나 따위는 비교도 되지 않는 최상위 신격인 것 같구나. 그 자에게 공양을 하여 이득을 얻을지어다.]

[……]

[공양을 할 수 있도록 그대들이 기운을 분할할 권리를 주도록 하지.]

[음. 주인이여.]

흑웅이 내게 눈짓을 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았으니 이만 돌아가 봐."

후웅

잠시 후 뇌정령이 다시 가호로 변해서 사라졌고 장내는 침묵에 휩싸였다.

하지만 나는 내가 할 일이 워낙 명확해졌기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뇌신기 바즈라에게 번개의 힘을 공양한다고?'

어찌보면 무척 단순한 방법. 그러나 나는 그 방법을 여태 생각지도 않았다.

그 이유도 단순했다.

'바즈라의 본체인 뇌신 인드라…… 그 새끼는 여태껏 몇 번이나 내 뒤통수를 쳤다. 그리고 날 죽이려 했어. 얼마 전에도 외우주에서 망량을 조종해서 날 죽일뻔하지 않았는가?'

아무리 뇌신 인드라에게 공양하는게 이득이라도 이런 걸 섣불리 결정 할 수는 없다. 공양한다는 건 거대한 제물과 인과율을 신에게 바친다는 건데, 당연히 공양을 받은 신은 그만큼 강력해지게 된다. 자칫했다가는 인드라의 제약이 풀려서 더 쉽게 내 뒤통수를 치게 하는 꼴이 될 수도 있다!

흑웅이 말을 아끼는 것도 당연히 흑웅은 내 기억과 경험, 감정을 공유하는 존재이기에 내가 인드라를 얼마나 적대시하는지, 그리고 놈한테 어떻게 뒤통수를 맞았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흑웅은 약간 내 눈치를 보는 기색이었다.

화룡진인이 어리둥절해했다.

"왜 그러는가? 번개의 신기가 있다고 했는데 당장 공양하지 않고."

"그게…… 그 신기가 내 뒤통수를 쳐서 죽이려는 놈이오."

"그렇군. 하지만 그렇다고 주는 공양을 안받을 것 같진 않은데."

"안 좋은 감정이 쌓여 있나 보군."

"쉽사리 믿을 수 없는…… 아니 죽일 수 있다면 죽이고 싶은 놈이오."

"그런가."

화룡진인은 뭔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그러더니 말했다.

"하는 김에 그대를 죽이고 싶은 이유를 물어보는 건 어떤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었기에 나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뭣? 그런 질문에 대답해 주겠소?"

"안 해보면 모를 일이지. 만일 그 신격이 그렇게 높은 위계라면 아무 이유도 없이 뒤통수를 치는 자는 아닐 거야. 원한이 있다면 이유를 알아보고 해결하는 게 좋지 않겠는가?"

"……."

"싫다면 그냥 공양은 포기하고 힘을 나눠주는 쪽으로 진행하게."

그러자 나는 오기가 생겨서 화룡진인에게 말했다.

"…… 알겠습니다. 뇌신기 바즈라에게 공양을 하겠습니다."

화룡진인의 말이 맞다. 지금 뇌신 인드라가 나한테 왜 그렇게 화를 내는지 사실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는 것이다. 이 기회에 공양을 해서 이유라도 알고 미움을 받는 게 차라리 마음은 편할 것이다. 놈과 친해질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지만 적어도 그것만으로도 한 발짝 나갈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외우주의 망량을 이용해서 날 배신했고 또한 내 손으로 망량을 죽이게 만들었다는 생각 때문에 도저히 웃으면서 대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빌어먹을. 할 말은 해야겠어.'

우우우우!!

잠시 후 정신을 집중하자 나는 사대신기들의 공간으로 들어올 수가 있었다.

그리고 들어오자마자 나는 어둠 속에서 회전하는 륜(輪)을 향해서 외쳤다.

"이봐!! 나는 바즈라에게 내가 가진 세성의 가호를 공양하러 왔다!"

파앗

그러자 내 앞에는 물의 정령 바루나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바루나는 팔짱을 낀 채 말했다.

[인드라가 상대하기 싫다고 나가라는군.]

"……."

이런 개새끼가…… 나는 인드라 때문에 뒤통수 맞은 기억 때문에 화가 났는데 적반하장으로 나오니 기가 막혔다. 그러나 일단 화를 눌러 참으며 외쳤다.

"바즈라…... 아니 인드라!! 공양을 안 받는다고 해도 이리 나와봐라!! 이 개 같은 새끼야!!"

대답이 들려오지 않는다.

"뒤통수 치고 나서 부끄러우니 안나오는 거냐?"

나는 말하면서 더 열이 받았기에 한층 더 센 어조로 욕을 했다.

"고대에 황제랑 복희한테 개처발린 새끼가 찌질하게 외우주에서 인간이나 조종해서 남 뒤치기나 시키는 주제에!! 너 같은 새끼가 무슨 뇌신이고 정령신이란 말이냐!!"

파지지직!!

말이 끝나는 순간 갑자기 인드라가 뇌인(雷人)의 형상을 갖추고 내 코 앞에 나타났다. 그러고는 바로 손을 뻗어서 내 목을 덥썩 붙잡았다.

퍼억.

[말 다 했느냐? 감히 너 따위 놈이…... 전생자만 아니었으면 벌레 중의 벌레 같은 놈이 내게 욕을!!]

파지지직!!

인드라가 진정으로 분노해서는 내 목을 세게 졸랐지만 나는 번개 때문에 목살이 튀겨지는 것 같은 아픔 속에서도 놈을 마주 노려보며 말했다.

"주…… 죽여봐!! 못하지? 할 수 있었으면 진작 했겠지!! 못하니까 이딴 곳에서 궁상맞게 봉인이나 당한 거 아냐!!"

[……!!]

"개새끼야!! 너 때문에 내 손으로 또 망량을 죽였단 말이다!! 도대체 날 왜 이렇게 죽이려 드는 거냐고!!"

내가 악에 받쳐서 분노하자 인드라의 두 눈에 흉폭한 안광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다음 순간, 옆에서 지켜보던 바루나가 경악하면서 말했다.

[안 돼!! 인드라!!]

그와 동시에 인드라가 두 눈에 불을 켜면서 광폭하게 웃었다.

[크하하하하…… 영겁 같은 세월…… 56억 7천만년을 또 기다릴까 봐 여태껏 참았지만…… 그깟 세월 기다려주마.]

"어?"

[네놈을 죽이고 싶은 이유가 궁금 하느냐?]

인드라의 목소리가 서서히 낮아진다.

놈의 눈에 살기가 서서히 돋우어졌다.

[네가 사라져야 이 개 같은 유희가 끝나기 때문이다!!]

퍼억

그와 동시에 인드라의 손에서 번갯 불이 치솟으며 내 목이 떨어져 나갔다.

그것이 나의 30번째 죽음인 것 같았다.

***

째깍.

째깍.

아무것도 존재치 않는 어둠에 커다란 회중시계가 떠올라 있다…….

그 회중시계의 초침이 정각을 가리키는 순간, 오로지 탁자와 의자만이 존재하는 삭막한 방이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

나는 그 방의 의자에 어느 새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리고 내 맞은편에 앉아 있는 소녀가 나직이 말하는 게 들려왔다.

"백웅. [매듭]은 원래 이렇게 쓰는 거야."

너구리 인형을 안고 있는 소녀.

전뇌자였다.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목이 얼얼해.'

뇌신 인드라의 번개 때문에 목 위가 전부 한순간에 튀겨졌기 때문일까? 그 찰나의 고통은 고통의 수위 만으로는 그리 높지 않았지만, 사람 의 정신력을 한순간에 연소시키는 악랄한 경험이었다.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한동안 입을 헤 벌리면서 멍하니 있었고, 내가 정신을 차린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였다.

나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가 [매듭]이라고?"

전에 봤던 [매듭] 내부의 장소와 흡사하다. 내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여기저기를 둘러보자 전뇌자는 탁자 위에 웬 책을 올려두고 팔락거리며 책장을 넘겼다. 그러더니 말했다.

"백웅. 항아 때처럼 또 속을까봐 불안해?"

"……."

나는 침묵하다가 대꾸했다.

"아니라면 거짓말이지."

나는 항아가 꾸며낸 거짓말 때문에 [매듭] 속에 갇혀서 그대로 전생이 끝장나 버릴뻔한 적이 있다. 간신히 매듭 속의 제갈사가 나를 깨우쳐준 덕에 탈출할 수 있었지만 그건 아마 내 전생 중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이 었으리라. 그리고 지금조차도 [매듭]에 대해서 완벽히 신뢰할 수 없는 게 사실이다.

그러자 전뇌자가 여전히 시선을 책에 고정시킨 채 말했다.

"그 당시에 당신은 모든 음모를 극복하고 어떻게든 황제 공손헌원을 봉인된 상태로 몰아넣어서 29번째 삶으로 넘어가는데 성공했지. 그런데 그 당시에 다 풀리지 않은 의문이 있었을 거야."

"무슨 의문?"

"제갈사조차 풀지 못한 의문이었지."

이어진 전뇌자의 말에 나는 흠칫했다.

"어째서 [단말인 항아가 당신에게 [이름]까지 지어졌는데도 이름의 주인을 배신할 수 있었는가, 라는 의문."

"……!!"

"그건 사실 사법(邪法)을 연마하는 자들에게는 절대명제나 다름없는 것인데 그걸 의심할 수 있었던 제갈사는 천재가 틀림없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의심할 수 있는 존재가 어찌 천재가 아닐 수가 있을까?"

그렇게 말한 전뇌자는 탁자 위에 너구리 인형을 올렸다. 아무래도 인형을 들고 있는 채로 책을 들여다보기 힘들어서인 듯했다.

"그러나 의심은 했지만, 그는 그 당시에 정보가 부족하여 '왜' 그게 가능했는지는 알아낼 수 없었지. 어찌 됐든 그 시점에서 배신자인 항아를 때려죽이는 게 중요했기에 그냥 넘어갔었지만……."

전뇌자의 시선은 여전히 책 위를 훑고 있는 중이었다. 전뇌자는 그 상태로 말을 이었다.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어. 일개 강인공지능일 때는 몰랐지만 단말이 되면서 알게 되었지."

"저, 정말이냐?"

"응."

"그럼 말해줘. 어째서 그놈이 날 배신할 수 있었던 건지."

"……."

전뇌자는 내 말에 곧장 대답하지 않고 여전히 뭔가를 찾고 있는 중이 었다. 전뇌자의 시선이 책에서 한 순간도 떨어지지 않았기에 나는 호기심이 생겨서 말했다.

"야. 그 책은 뭐길래 아까부터 보고 있는 거냐?"

"이건 천암비서의 계약서야."

"……?!"

뭐, 뭐라고?! 내가 경악하자 전뇌자는 태연히 말을 이었다.

"찾았다. 여기에 있었네."

번쩍!

전뇌자의 말이 끝나는 순간 눈앞에 섬광이 일어나더니 이윽고 허공에 새파란 불빛으로 수놓인 무언가가 떠올랐다. 새파란 불빛으로 이루어진 '그것'은 마치 고대어처럼 보였는데 묘하게 갑골문(甲骨文)을 닮은 것 같았다.

신기한 것은 그 글자의 법칙이나 원리도 하나도 모르는데 나는 그 글자를 읽을 수 있었다. 나는 천천히 그 글자를 발음해 보았다.

"항아(恒娥)."

"맞아. 이건 당신에게 바쳐진 단말의 이름이야. 지금까지 계약서 상에서 항아의 이름을 찾고 있었어."

"왜 찾은 거지?"

"한 가지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야."

그렇게 말한 전뇌자가 조막만한 손을 뻗어서 그 이름에 손을 갖다대었다. 그러자 이름은 갑자기 전뇌자의 손 안으로 빨려들어가듯이 사라졌고, 전뇌자는 그 현상을 쳐다보더니 예상대로라는 듯 중얼거렸다.

"항아의 이름은 당신에게 귀속된 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

"이름이 귀속된 존재가 아니었으니까 배신도 할 수 있었던 거야. 당연한 거지."

뭐라고!!

나는 그 사실에 깜짝 놀라서 말했다.

"뭐라고!! 아니, 내가 그놈 이름 을…… 개, 개똥이로 짓긴 했지만 여하튼 그놈의 본질이 이름에 귀속되어 있다면서? 그러면 당연히 항아가 내게 귀속되는 거 아니냐!"

"보통은 그럴거야. 그러나 여기에는 천암비서의 계약이 따로 개입되어 있어."

"천암비서의 계약이?"

전뇌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단말]이 되는 존재는 당신에게 귀속될 수가 없게 되어 있어. 왜냐하면 [단말]은 지금 보다시피 천암비서의 계약서도 열람할 수 있으며 많은 권한을 갖고 있기 때문에, [단말]이 전생자를 직접 도울 경우 너무 불공정하다는 이유야. 단, 계약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 한에서는 도와줄 수 있게 되어 있지."

"……."

"지상세계였다면 개똥이, 혹은 월아의 이름이 귀속되는 순간 당신의 소유가 되는 게 맞아. 실제로도 월아로써 자각한 후 후예와 말싸움을 할 때까지는 당신에게 귀속되어 있었을 거야."

"뭐? 내 말을 하도 처듣지 않아서 날 죽이려고까지 했는데?"

"그건 [이름]의 강제력을 어떻게 쓰는지 몰랐던 당신 잘못이야. 조금만 주술의 역량이 있었으면 월아를 부려먹을 수 있었겠지."

"으음……."

나는 할 말이 없어서 머리를 벅벅긁었다.

"그러나 천암비서의 법칙은 지상의 그 어떤 계약보다 상위에 존재하니 항아는 사실 [단말]로 선택된 순간 부터 자유의지로 당신을 배신할 수 있었던 셈이지. 항아의 이름을 되돌려서 단말로 각성시킨 것 자체가 족쇄를 풀고 상위법칙에 따르도록 도와준 셈이야."

"…… 그런 건가?"

나는 전뇌자의 말이 어려웠지만 대충 이해가 되었다. 즉 항아는 [단말]이 되었기에 도리어 [이름]의 제 약을 벗어날 수 있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단지 그놈은 처음부터 내 뒤통수를 칠 마음이 있었기에 그런 사실을 내게 이야기하지 않고 교묘하게 준비를 해왔으리라.

내가 상황을 이해하고 있을 때 전뇌자가 말했다.

"내가 왜 항아 얘기를 굳이 다시 꺼냈는지 알겠어?"

"잘 모르겠는데."

"나 또한 마찬가지야. [단말]이기에 당신에게 귀속되지 않으며 항아와 마찬가지로 당신의 뒤통수를 칠 수 있어. 그걸 말하려고 한 거야."

나는 전뇌자의 말에 팔짱을 끼며 대꾸했다.

"언제는 그걸 몰랐나? 네가 하는 말만 보아도 나를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는 것 같은데."

"알아들었으면 됐어.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나를 믿든 믿지 않든 그건 온전히 당신 스스로의 선택이라는 거야."

"흐음……."

마냥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군. 믿을지 말지는 알아서 선택하고 나중에 원망하지 말라는 건가?

하지만 이렇게 신뢰를 가늠해야 하는 경험은 살면서 수십 수백 번도 넘게 해보았다. 나는 익숙했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았어. 어차피 여기까지 왔는데 뭘 더 이것저것 재겠냐? 여하튼 내가 죽어서 [매듭]으로 왔다는 건 맞지?"

"맞아."

"저번에 항아가 그러던데 [매듭]에서 한 번 되돌릴 때마다 액(厄)이 적층 된다는 건 사실이냐?"

"저번에 제갈사가 이미 말했었지. 그건 항아의 거짓말이라고, 그때 항아가 말했던 [매듭]의 법칙 중에서 맞는 건 거의 없다시피 해."

"역시 그렇군. 그러면 이제 날 다시 되살려줄 수 있는 거겠지?"

"……."

전뇌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그 침묵에 불안해져서 말했다.

"설마 되살아날 수 없는 거냐?"

"아니, 되살아날 수 있어."

"젠장. 괜히 사람 불안하게 하지마. 그럼 되살려주면 되지 뭐가 문제야?"

전뇌자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백웅. 당신은 이상함을 못 느낀거야?"

"뭘?"

"당신은 큰 굴레를 돌린 후 이미 1번 죽었었어. 그리고 죽자마자 전륜성왕의 방으로 이동해서 전륜성왕을 대면하게 되었지. 그런데 어째서 이번에는 그러지 않고 [매듭]으로 와 버린 건지."

"어…… 그건…… 왜 그런 거지?"

진짜 그건 왜 그런 건지 모르겠네?

내가 의아해하자 전뇌자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후우…… 솔직히 말할게. 원래라면 전륜성왕에게 가야겠지만 내가 당신을 일부러 빼돌린 거야."

"뭐? 왜 그런건데?"

전뇌자가 조그마한 손으로 검지와 중지 손가락을 들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어. 첫 번째로 뇌신 인드라의 공격은 존재를 송두리째 멸하는 권능이 담겨 있기 때문에 자칫 어설프게 되살아나면 당신은 되살아나자마자 또 번갯불에 튀겨지게 될 거야. 그걸 피해야만 했어."

나는 흠칫 놀랐다.

"어?! 부활했는데 또 튀길 수 있다고?! 그게 가능해?"

"그게 가능했기 때문에 뇌신 인드라를 모든 신격들이 두려워했던 거야. 전성기의 인드라는 다른 [옛 지배자]를 셀 수도 없이 계속 튀겨서 고통스럽게 죽게 만들기 일쑤였거든. 어쩌면 당신은 전륜성왕의 방 안에서 또 튀겨지고 튀겨지기를 반 복했을 수도 있지."

"……."

제기랄, 어이가 없네!

내가 황당해하고 있을 때 전뇌자가 말을 이었다.

"또 하나. 이번에 전륜성왕 앞으로 가면 전륜성왕은 당신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속박해서 자신의 부하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어. 전륜성왕 앞에 무방비로 나서기에 아직 당신의 힘이 너무나 부족해."

나는 이번에는 어리둥절해졌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전륜성왕이 내게 의뢰를 줘서 처리하라고 한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왜 난데없이 나를 무력으로 겁박한다는 거야."

"복희가 그랬지. 전륜성왕은 확실히 자신의 야심을 드러내었다고. 당신에게 의뢰를 준 것은 그저 당신이 어떤 능력과 내력을 가졌는지 확실히 시험해보기 위한 것일 뿐 딱히 소녀나 동방삭의 일이 전륜성왕에게 중요한 건 아니야."

이어진 전뇌자의 말은 내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전륜성왕은 당신이 미래에서 온 전생자라는 걸 알고 있어. 거기에 복희의 도움으로 사대신수의 가호까지 받았다는 걸 알게 된다면 당신을 다시 명계에서 탈출하게 도와줄까?? 더 이상 강해지기 전에 무조건 당신을 붙잡아서 자신의 것이 되게끔 만들거야."

"……!!"

"심지어 그는 자신이 미래에 황제의 손에 당해서 소멸한다는 것까지 알고 있어. 그 운명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뭐든 하겠지."

"…… 일리있는 얘기군."

나는 전뇌자의 말에 수긍할 수가 있었다. 내가 전생자라는 걸 알고 이용해먹으려던 자들은 부지기수였기에 전륜성왕이라고 그러지 말란 법은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전뇌자가 말했다.

"이번에 내가 생성한 이 [매듭]은 일종의 편법이야. 본디 [큰 굴레]를 돌린 과거의 세계에서는 쓸 수 없는 능력이지만, 당신이 저번에 바친 세계수의 핵이 커다란 제물이었기에 간신히 만들어낼 수가 있었어."

"그랬구만. 고맙다."

"하지만 다음번에 또 죽으면 이 매듭으로 올 수 있게 할 자신이 없어. 전성기 전륜성왕의 힘이 미치는 세계에서 인과율을 거스르는 건 너무 위험한 일이야."

그렇게 말한 전뇌자가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했다.

"알아듣겠어? 지금은 상당한 위기 상황이라고, 이런 편법을 쓸 수밖에 없을 정도로."

"알아들었어."

"그래서 나는 당신에게 여기서 수련하라고 제안하고 싶어. 강인공지능으로써 당신에게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인지 분석을 끝낸 결론이야."

나는 전뇌자의 말에 약간 놀랐다.

"수련하라고? 무슨 말이냐."

"말 그대로야. 흑웅도 입이 닳도록 말 했을 텐데…… 당신은 이 탁록대전의 시대를 헤쳐나가기엔 너무나 약한 존재야. 이번에는 인드라한테 괜히 덤비다가 죽었지만 인드라 말고도 당신을 죽일 수 있는 존재는 이 시대에 차고 넘쳐. 삼황오제 위계의 [지배자]나 휘하의 신격들이 떼거지로 덤비면 어쩔 도리가 없을거야."

"……."

전뇌자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그러나 지금 당신의 약함은 더 이상 신력이나 가호로 메꿀만한 게 아냐. 당신은 흑웅 이상의 정령을 만들어낼 수 없고, 만들어낸다면 그건 당신 스스로가 천지를 제패하는 신으로 승화하는 경우야. 문제는 그렇게 한다고 해도 전륜성왕을 이긴다. 는 보장은 없고."

"뭐 어쩌라는 거야……."

내가 퉁명스럽게 중얼거리자 전뇌자가 말했다.

"당신에겐 이제 외력(外力)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해. 언제까지 흑웅과 만상지투에만 의존할 생각이야? 그런 걸로는 절대 전륜성왕을 이길 수 없어. 아니, 이길 수 없더라도 최소한 그에게 붙잡히지 않고 자유롭게 탈출할 만한 힘이 필요할 거야."

"흠…… 뭘 수련해야 이길 수 있단 말이지?"

"그건 앞으로 당신이 생각해야 할 일."

전뇌자는 그렇게 말하고는 탁자 위에 올려져 있던 너구리 인형을 내게 쓰윽 밀었다. 내가 너구리 인형을 받아들자, 갑자기 장내의 풍경이 확 하고 바뀌었다.

우우웅

"여긴!!"

나는 이 익숙한 풍경에 당황했다. 그리고 의자와 탁자 이외에는 모든 것이 내가 알고 있던 청룡무관(靑龍 武館)이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익숙한 전각, 익숙한 무기진열대. 익숙한 연무장.

심지어 따뜻한 햇살 아래 불어오는 먼지 섞인 공기의 내음도 그 때와 똑같다.

내가 청룡무관의 전경을 둘러보고 있자 전뇌자가 말했다.

"항아가 거짓말했다는 건 사실이야. 원래 이 공간은 기도 의념도 쓸 수 없는 곳이지만, [단말]인 나는 당신이 지불한 대가에 따라서 그 법칙을 바꿀 수 있어. 지금은 세계수 의 핵을 제물로 소모하여 그 대가로 이 공간의 시간을 1만배 느리게 만들었지. 기와 의념을 포함해서 모든 능력을 쓸 수 있어."

1만배?!

나는 여태껏 듣지 못한 느린 시간 배속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는 반문했다.

"그럼 여기서 한도 끝도없이 수련 할 수 있다는 거냐?"

"아니. 체감시간으로 300년을 채우면 나가야 해. 말했듯이 [단말]은 중립이기에 당신에게 베풀어줄 수 있는 호의는 한계가 있어."

"……."

300년이라……

보통 사람이라면 생을 3번이나 다 할 시간이겠지만……

내가 복잡한 표정을 짓자 전뇌자는 싱긋 웃었다.

"당신의 재능을 생각하면 애매한 시간이겠지. 하지만 한 번 해봐. 지금까지 세계를 구한다는 핑계로 재능도 없는 주제에 수련할 시간도 없었잖아?"

스아아

전뇌자의 모습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전뇌자의 말이 장내에 떠돌자, 나는 내가 뭘 해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300년동안 지금까지 배웠던 걸 혼자서 갈무리해서 당신만의 새로운 무기를 찾아내."

전뇌자가 사라진 후 나는 수련장에서 맑은 하늘을 쳐다보았다.

"300년 수련이라."

그 말을 내 입으로 읊조리는 순간 제일 먼저 든 생각이 있었다.

'그걸로 될까?'

300년이라 하면 인간 무인(武人)을 기준으로 엄청나게 긴 세월이 맞다. 아무리 무예의 수련에 장구한 세월이 필요하다지만 보통 평범한 재능을 가진 자라도 20여 년 정도 하나의 무공을 파고들면 웬만한 경지에 오르게 마련이었고, 60여 년쯤 되면 보통 인간이 범접하기 힘든 수준에 이르게 된다. 물론 좋은 스승과 좋은 무공을 모두 얻었을 경우이긴 했지만 만일 100년 정도 어떤 무공을 진심으로 수련한다면 누구든 그 무공을 8성 이상 성취하는게 당연한 일이리라. 하물며 300년이라고 한다면 무공의 종사(宗師)가 되기에 충분하고도 남는 시간이다.

하지만 내 기준에서는 300년이란 시간이 한없이 애매하며, 또한 부족하게도 여겨졌다. 왜냐하면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난 재능이 없다. 지금까지는 보통 무림인 수준에서 말도 안 될 정도로 뛰어난 기연을 수십 번씩 중첩시키면서 간신히 절대지경까지 올라섰지만 사실 이 수준에서 뭘 더 해야 할지 모르겠다. 선검술이나 암야참 수련 등 해야 할 건 많지만 이것도 그냥 시키니까 하는 것일 뿐 진정으로 내가 어떤 길을 나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확신은 부족했다. 재능도 없는데 이렇게 막연한 상태라면 아무리 수백 년을 수련해도 뭔가 경지에 도달한다는 보장은 없을 것 이다.

둘째. 무공 외의 수련을 하고자 하면 더 재능이 없다. 신술수련도 사실 복희에게 얹혀갈 생각이었지 내가 신술을 수행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일반 술수재능도 바닥에 가까워서 중급술사조차 되기 힘든데 술법의 극한이라 할 수 있는 신술을 나 혼자서 무슨 수로 익힌단말인가? 물론 고대신선의 기억과 지식이 있기에 시도 정도는 해 볼 수 있겠지만 절대 제대로 익힐 수는 없으리라.

셋째. 설령 방향을 잡아서 열심히 수련한다고 한들 300년이란 시간으로 지금보다 더 나아질 수 있을 것인가? 이미 나는 지상에 존재하는 초능력이나 권능, 가호를 섭렵할 만큼 했다고 할 수 있었으나 지금부터 상대해야 할 적들은 [옛 지배자]나 고대신처럼 너무 빡센 상대라서 그 모든 기술들이 잡기술에 불과하게 되리라. 적들이 은하계조차 주름잡는 막강한 상대라는 걸 고려하면 300년은 도리어 모자란 감이 있다.

나는 이런 생각을 다음 순간 털어 버리며 고개를 크게 흔들었다.

"젠장. 괜히 시작부터 안 된다는 소리만 하고 있으면 될 것도 안 되지. 뭐라도 해야겠어!"

선검술? 신력수련? 암야참? 권능 연습?

뭐든 간에 일단 해보고 나서 생각 하자고!

하지만 나는 말은 그렇게 해 놓고 서 그 후 반 시진 내내 연무장에 드러누워서 맑은 청천(靑天)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어? 왜 이러지?'

평소라면 일분일초가 아까워서 당장에라도 칼을 들고 초식 연습이라도 하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 지금은 왜인지 몰라도 아무런 의욕이 나지 않아서 입과는 달리 몸이 움직이려 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누가 내게 저주를 걸었나 의심해보았지만 사실은 알고 있었다.

노력하고 싶지 않아.

그 마음이 지금 내 내면을 채우고 있다는 걸.

이상한 일이었다. 먹지도 자지도 않고 수련을 미친 듯이 하던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잘 해오다가 왜 갑자기 이렇게 된 것인가? 마치 마음속 깊은 곳의 심지가 시꺼멓게 타서 사라진 듯, 움직일만한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

움직여…… 움직여야 된다고.

재능도 없는 주제에 이렇게 태만하게 있어도 되는 거냐?

나는 내심 나 자신을 윽박질러보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나는 내 마음을 이기지 못해서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고 나 자신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차라리 저주나 권능이 라면 의지를 다해서 이겨내겠지만 이건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다 타 버린 장작처럼 나는 멀거니 누워있기만 했다.

시간이 흘러서 한 시진이 무상하게 흘렀다. 나는 그 시간 내내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푸른 하늘을 쳐다보기만 했다.

그렇게 또 하루가 흘렀다.

그렇게 또 하루가 흘렀다…….

잠을 자지도 않고 그냥 텅 비어있는 머릿속을 유지한 채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어느 순간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나 자신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래. 지쳤다…….'

맥이 풀려 버린 것이다.

나는 전뇌자의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당신의 재능을 생각하면 애매한 시간이겠지. 하지만 한 번 해봐. 지금까지 세계를 구한다는 핑계로 재 능도 없는 주제에 수련할 시간도 없었잖아?]

핑계.

그 말이 내 마음속의 상처를 후벼 판걸지도 모른다.

재능도 없으면서 수련할 시간도 없었기 때문에 그냥 뭐든 임시변통으로 때우면서 가능한 빠르게 효과를 낼 수 있는 수단을 찾아왔다. 그렇다보니 자연스럽게 무공보다는 술수, 술수보다는 권능을 향해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강해지긴 강해졌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내 마음속에는 늘 불안감이 내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과연 수련할 시간이 없다는 핑계가 사라지면 나는 제대로 수련해서 끝장을 볼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그 불안감이 현실이 되자 나는 더이상 핑곗거리가 없어졌다는 현실에 당황스러워서 정신력이 한순간에 연소되어 버린 것이다. 새로운 도전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이 한없이 펼쳐져 있는 막대한 수련량을 생각하니 너무 아득해져서 생긴 일이었다. 맨몸으로 태산의 절벽을 기어올라야 하는데 그럴 각오도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맞닥뜨리자 움츠러들어 버린 것이다.

"후우……."

나는 일어나서 한숨을 쉬며 연무장에 앉았다. 이곳에서는 낮과 밤이 지구처럼 반복되고 있었고 아무것도 현실과 다르게 느껴지지 않는다. 지금은 어느새 시간이 꽤 지나서 해 질 무렵이 되어 있었고 석양이 내리고 있었다. 나는 그 석양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냥 좀 쉬어볼까."

그러고 보니 이번 생을 처음 시작했을 때도 너무 지쳐서 그냥 쉬려고 했었다. 삶을 진행하다보니 여러모로 아직은 희망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힘을 내서 열심히 살았는데, 외우주에서 데이고 탁록의 시대까지 오다보니 정신이 어질어질할 지경이었다. 30번째 삶을 시작했을 때의 탈력감이 고스란히, 아니 몇 배가 되어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에 나는 도저히 검을 잡을 수가 없었다.

스윽

나는 일어나서 연무장에 있는 무기 진열대에서 하나하나 무기를 잡아서 살펴보았다. 무기진열대에는 늘 창, 극, 쌍극, 삼지창, 장봉 등 다양한 병기가 비치되어 있었고 나는 순서까지 다 외울 정도로 자주 본 것들 이었다. 삼절 이광은 장병기를 좋아 했기 때문에 기본 장창 외에도 다양한 무기를 다루는 법을 연습했던 것 이다.

나는 무기진열대에서 시선을 떼고 이번에는 무관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저벅…….

"기억하고 있는 그대로군."

석양이 새어 들어오는 창문이 비추 는 청룡무관의 실내는 내 기억과 한치도 다르지 않았다. 복도에 있는 사소한 흠이나 문풍지의 얼룩 하나 하나까지 전부 내 기억 그대로였다. 나는 사람 없는 청룡무관을 한동안 돌아보면서 감회에 젖었다.

털썩

나는 청룡무관주 이광이 늘 앉아서 차를 마시던 자리에 쓰러지듯이 앉았다. 이 자리는 석양이 비쳐오면 탁자 위에 석양이 드리워졌고 바깥 풍경을 보기도 좋았다. 나는 홀린 듯이 지고 있는 석양을 보며 침묵했고, 머지않아 시간이 지나서 완연한 밤이 되자 실내는 깜깜해졌다. 미래와 달리 청룡무관이 있는 명나라 시대에는 자동조명장치가 없기 때문이 었다.

나는 어둠 속에서 탁자에 머리를 박은 채 엎드려서 가만히 생각을 이 어 나갔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가고 있다가 불쑥 속내를 입 밖으로 털어놓고 말았다.

"이제 그만하면 안 되나?"

아무도 듣지 않기 때문에.

그렇기에 할 수 있는 말.

징징거리고 싶다.

포기하지 않겠다고 몇백 번은 외쳐 대었지만 그럼에도 현실의 벽이 너무나 두꺼웠고 내 능력의 한계도 계속해서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이 300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 자신의 한계를 보게 되면 너무 비참해져서 견딜 수 없을까봐 직시하는게 두려워진 것이다.

전생자로서 [기어오는 혼돈]을 물리치고 모든 사람들을 구해주고 싶은데.

사실 나 말고는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깨닫고 있지만.

그렇기에 내가 모든 이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결국 패배하게 될까 봐 두렵다.

내가 구원자이자 영웅일지도 모른다는 걸 알고 있지만 동시에 나는 아무런 재능도 없는 놈이라는 것도 다른 누구보다도 내가 제일 잘 안다. 몇 번이고 자존감을 도야시키면서, 강한 정신력으로 버텨왔지만 이젠 염증이 날 정도로 지쳐 버리고 말았다.

나는 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짓씹 으며 중얼거렸다.

"한 가지만 할 수는 없는 거냐고. 제기랄……."

신력을 수련하면서 뼈저리게 느꼈다. 신의 힘을 다루는 순간 그 수준은 완전히 차원이 달라져 버리고 만다. 단순히 적수로 대할 때는 느끼지 못했던 수준 차이를 내가 직접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볼 수 있게 되자 지금껏 쌓아왔던 무공이나 기술에 대한 회의감이 들기도 했다. 무공을 몇백 년 수련해봤자 신력 좀 많이 먹은 사도나 화신에게는 장난감 수준밖에 안 된다는 걸 여실히 깨달은 것이다. 흑웅을 각성시켜서 진짜 강대한 [옛 지배자] 수준을 목 전에 둔 지금, 내 권능과 무공의 수준 차이는 사실 하늘과 땅 차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전생하면서 얻은 정보에 따르면 단순히 마력이나 신력을 쌓아서 상위존재로 승화하는 건 무조건 오답(誤答)이다. 아무리 강대한 신력을 얻고 위격이 높아져도 결국 [기어오는 혼돈]에게는 미치지 못할 뿐더러,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성을 잃고 신으로 탈바꿈하면 마지막 순간에 크게 된통 당해 버리는 것 같다. 그래서 정상적이라면 무공에 집중하고 권능이나 가호의 비율을 줄이는 전략이 맞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구원자이자 전생자로서 다른 동료들이 죽거나 소멸당하는 걸 막아야만 한다. 그걸 위해서라면 빠르게 강한 힘을 얻어야 하는데, 도저히 무공만으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여태껏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보물과 권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재능도 없는 무공수련과는 멀어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최대한 암야참이나 선검술 등의 단서에 의존해서 일부러라도 무공에 열중했지만, 상황이 급해지면서 그마저도 잘 안 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거야?

전뇌자는 이런 내 자기모순을 해결 할 기회를 주었지만 도리어 그 기회를 받으면서 지금까지 내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모순을 감내해왔는지 직시해 버리고 말았다. 300년 갖고는 도저히 나만의 무기를 만들 수 없으리라는 절망감과 함께 그 시간 동안 무공만 파는 것보다 신력이나 권능 수련을 하는게 몇십 배는 더 강해질 거라는 허탈감이 공존한 것 이다. 하지만 무공을 완전히 놔 버리게 되면 결국 나는 잘못된 길을 가게 되어서 스스로 무너지고 말리라.

정답은 알고 있다.

300년동안 권능수련보다는 무공수련에 열중해서 절대지경을 뛰어넘은 경지로 가야 한다는 걸.

그러나 그 '올바른 답'을 택하게 되었을 때 겪게 될 절망감을 도저히 외면할 수 없었다.

무공수련을 300년 했는데 아무런 성과도 없으면?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고작 십여 년 동안 지옥수련을 했 는데도 별 성과가 없었을 때의 그 절망감을 이미 알고 있는 나로서는, 300년 했는데도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은 그 절망감을 버틸 자신이 없었다. 변명조차 못 하고 내 무인으로서의 자아가 무너질까 봐 지레 겁먹은 것이다.

그때였다.

"너무 힘들어 보이네. 말 상대를 해 줄까?"

"…… 전뇌자."

희미하게 고개를 들자, 탁자의 맞은편에 어느새 전뇌자가 앉아있었다. 전뇌자는 찻잔을 살며시 들어서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말했다.

"걱정 마. 이 공간에서 300년 동안 수련했던 기억이나 여기서 말했던 건 흑요석으로 전승되지 않을 테니까."

"……."

"당신이 힘들어서 징징댄 것도 그 냥 나만 알고 있을게."

나는 어이가 없어서 허탈하게 웃었다.

"후…… 왠지 항아가 말했던 것과 다를바 없어 보이는데."

"달라. 원래는 [매듭]의 기억도 혹 요석으로 전승되는 거지만, 내가 일부러 그 기억을 차단시키는 거니까."

"알 바 아니야."

나는 다시 탁자에 고개를 푹 박으며 말했다.

"이제 일일이 놀라고 정보를 캐어 묻는 것도 지쳤어. 아무 생각도 하 고 싶지 않으니까 저리 꺼져."

"……."

전뇌자는 침묵한 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밤의 정적이 실내를 감싸고 있을 때 문득 전뇌자가 정적을 깨는 한마디를 던졌다.

"난 이 공간에서 당신에게 대련상대나 스승을 소환시켜줄 수 없어. 수련공간을 제공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호의이기 때문에 거기까지 해주는 건 권한 밖이야."

"……."

"할 수 있다고 해도 지금은 안 하는 게 맞겠지만."

나는 전뇌자의 말에 의아한 생각이 들어서 슬며시 고개를 들어서 반문 했다.

"그건 무슨 뜻이지?"

"말 그대로야. 지금 당신한테는 스승이나 조언상대를 주는 게 더 해가 될거야."

나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비웃었다.

"웃기는군. 네가 뭔데 그런 판단을 하는 거냐."

"지금 상태만 봐도 알 수 있잖아."

"지금 상태?"

전뇌자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스승도 의견을 물을 상대도 사라진 채 현실에 부딪히니까 이제서야 본심이 나왔잖아. '의존할 상대'가 있었다면 당신이 이렇게 번 아웃 되지도 않았겠지. 그 대상은 늘 망량, 검마, 백련교주, 진소청 등 주변의 동료들이었지만 그들이 모두 사라진 지금에서야 본심을 말할 수 있게 된 거야."

"당신은 이번 생 초기에 이미 무기력증에 걸려 있었어. 단지 당신의 인생에서 동료와 사명감이 너무 중요했기에 억지로 그걸 잊고 힘을 냈지만 결국 다시 원상태로 되돌아온 거지. 내 말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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