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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검신-1421-1428화 (1,376/1,615)

그거 신기하네? 왠지 기시감이 들어서 내가 흥미로워하고 있을 때 영귀의 말이 이어졌다.

"봉황은 늘 척박한 '경계'에서 움직이지 않고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외로움을 달래려 우리에게 종종 말을 걸어오지요. 우리는 그런 봉황에게 늘 감사를 표하고 힘내라고 응원해줍니다."

"우애가 깊군. 하긴 봉황이 사실상 그대들의 왕이나 다름없을 테니 말 일세. 그래서 봉황은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그건 모릅니다. 본인이 밝히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봉황은 우주가 끝장날 때까지 움직이지 않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있으니, 그 누구의 소환에도 응하지 않을 겁니다. 그가 가장 친밀하게 생각하는 우리 정령들마저도 직접 만나기 싫어서 꿈을 통해 만나고 있으니까요."

"그거참 재밌군. 자네의 말 덕에 봉황에 대해 한 가지 사실을 더 알게 되었네."

"무엇을 말입니까?"

복희의 눈이 순간 날카로워졌다.

"봉황은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야. 그는 거대한 [임무]를 갖고 이 세상에 출현한 게 분명해. 허나 그런 막강한 존재를 기껏 하수인으로 부릴 수 있는 자가 도대체 누구일지는 짐작도 가지 않는군…..."

"더더욱 봉황을 만나 봐야겠군. 얘기 잘 했네."

복희가 부채를 접고는 등을 돌렸다. 그러자 영귀가 다급하게 말했다.

"잠깐만! 설마 봉황을 만나러 직접 [경계]로 가실 생각입니까?"

"소환에 응하지 않는다면 이쪽에서 만나러 가는 수밖에 없지 않겠나?"

복희의 태연한 대꾸에 영귀는 진심으로 걱정스러워하는 듯했다.

"그만두시는 게 좋습니다. 설령 복희님의 힘이 봉황보다 강하다 하더라도…… [경계가 어떤 장소인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

"봉황은 왜인지는 모르지만 [경계]에 있는 동안 그 어떠한 제약도 받지 않습니다. 적어도 그 안에서는 외신이 아닌 이상 그 어떤 존재도 봉황을 상대로 이기기 힘들 게 뻔합니다."

"나는 그와 싸우러 가는 게 아닐세. 대화를 하러 가는 것이지."

"그 존재는 맹목적입니다. 도저히 설득도 대화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와의 대화도 그가 일방적으로 뇌까릴 뿐이지 상호작용이 거의 되지 않는데, 자칫하다가는 크게 당하실 겁니다."

영귀가 이렇게까지 걱정하다니!

영귀가 다른 존재들과는 달리 선할 뿐만 아니라 헛소리도 안한다는 걸 아는 나로서는 크게 걱정이 되었다. 영귀가 걱정한다면 기만하거나 속이려는 게 아니라 진짜 위험한 것이다. 그리고 복희가 만일 봉황에게 크게 당해서 부상을 입게 된다면 앞으로 내게도 먹구름이 드리워질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조심스레 복희에게 말했다.

"저, 저기 그냥 봉황한테 안 가면 안 되겠습니까? 사대신수의 가호를 다 안 받아도 되니까……."

"아니. 지금 당장 가보도록 하지. 미뤄봤자 달라질 게 없을 것 같군."

"네?! 아니 잠깐……."

슈우우욱!!

다음 순간, 우리는 다 같이 공간을 이동해서 어두운 천체(天體)가 가득한 별빛의 우주 한가운데에 와 있었다. 틀림없이 복희의 신술로 강제로 이동한 게 틀림없었다. 다행히 복희의 신술 덕에 호흡하는 건 문제가 없는 것 같았지만 나는 깜짝 놀라서 외쳤다.

"으아악! 오기 싫다니까요!!"

이러다가 복희가 죽거나 나까지 휘말려서 죽으면 어떡해!!

내가 끔찍한 상황을 상상하고는 소리를 지르자 복희가 차분하게 말했다.

"걱정 말게. 영귀가 [경계]에 대해서 겁을 주긴 했지만 사실 인세의 지옥 같은 건 절대 아니니까." "네?"

"백웅. 자네는 [경계]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가?"

나는 그 말에 곰곰이 생각하다가 대꾸했다.

"어디서 들어본 거 같은데…… 그…… 꿈과 현실의 경계를 말하는 거 아닙니까?"

진소청이 그렇게 말했던 것 같은데?

내가 얼렁뚱땅 대답했지만, 복희는 꽤 놀란 표정을 지으며 내 쪽을 돌아보았다.

"호오! 경계가 [꿈]과 관련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니 과연 대단하군. [옛 지배자]들도 그 사실을 모르는 경우가 많은데 훌륭해. 사실 그게 핵심이라네."

"어……."

얼떨결에 대답했는데 맞는 대답을 한 것 같다!

내가 내심 기뻐서 히죽 웃고 있자 복희가 차분히 말했다.

"본디 [경계]는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장소일세. 왜냐하면, 우주의 끝으로 가야 비로소 경계가 시작되기 때문이지."

"…… 무슨 말입니까?"

"이 주변을 둘러보게. 아주 살풍경 하지 않은가?"

복희의 말대로 암천(暗天)으로 가득 찬 이 우주는 마치 쳐다보다가 흑암에 내 눈이 집어 삼켜질 것처럼 시꺼맸다. 우주를 본 적이 많으나 이곳은 한층 어두웠고 또한 시꺼먼 어둠 속에 웬 둥그런 행성이 몇몇 윤곽을 이룬 채 떠 있는 게 보였다. 마치 광기가 어린 듯한 모습이었고 저 너머에 보는 말머리 모양의 성운(星雲) 때문에 더 괴기한 분위기가 흘렀다.

"음…… 보통 인간이라면 꽤 무서울 거 같습니다만…… 그래서 여기가 [경계]입니까?"

"아니. 태초우주의 흔적이 남아 있는 장소이지. 특이점이 폭발했던 허공(虛空)의 경계라고 불리는 장소일세."

"……?"

"예전엔 여기도 [경계]에 속했지만 이젠 일반우주에 가깝지."

어라…… 어디서 들어본 얘기인데?

내가 기시감 때문에 고개를 갸웃하고 있을 때 복희의 말이 이어졌다.

"물질적인 의미의 우주(宇宙)는 계속해서 넓어지고 있네. 빛보다 더 빠르게 넓어지고 있는 중이지. 허나 그와는 별개로 특이점이 폭발한 장소는 처음부터 아예 움직이지 않았고 넓어지고 있는 우주 바깥의 허공을 도인(導引)하고 있는 중일세. 종말(終末)에 이르렀을 때 그 응축된 힘이 전 우주에 뭔가 변화를 일으키게 될 것일세."

"……."

"허공(虛空)이 세계로 유입되는 경계. 그 사이에는 질서의 힘이 유역(流域)을 만들게 되고, 물리적인 이동수단으로는 더 이상 진입할 수 없는 차원의 경계를 형성한다. 이걸 뚫고 나가게 되면 외우주로 나가 버리던가 혹은…… 역으로 특이점에 진입하게 되지. 후자는 가능성이 거의 없는 일이니 생각지 않아도 좋아."

"……."

"다만 지금은 외우주로 나갈 게 아니니 '우주의 무덤'을 통과하지 않고 저 검은 구멍을 이용해서 진짜로 허공의 침습을 막고 있는 [경계]로 들어갈 것이네. '우주의 무덤’을 뚫으면 외우주가 등장할 테지만 개념적인 통로를 지나면 경계로 가는 식이지."

나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저기……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습니다만……."

"음, 쉽게 말하자면 저 눈앞에 있는 거대한 검은 구멍에 들어가면 [경계]에 들어간다는 소리일세."

"검은 구멍이라고 하신다면…… 설마 저거…… 말입니까?"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저만치 멀리에서 내 시야를 온통 사로잡고 있는 절망적으로 거대한 어둠의 구멍을 쳐다보았다. 별 따위는 코딱지처럼 여겨질 만한 저 거대한 구멍의 실제 크기는 아마 태양보다 몇억 배 클것만 같았다.

복희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바로 저걸 세. 저기를 뚫으면 [경계]에 진입해서 봉황을 만나러 갈 수 있을걸세!"

"……."

"경계에서 봉황을 찾아낼 방법은 내가 갖고 있으니 걱정 말게."

저건 블랙홀 아니냐고!!

저기 들어가면 다 죽잖아!!

대웅제국에서 들었던 과학지식 때문에 내가 내심 경악하고 있을 때, 옆에 있던 흑웅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복희여.]

"왜 그러는가?"

[저건 미래에 죽음의 구멍이라고 불리는 절대적인 중력의 집합체 같은데 저기에 맨몸으로 들어가도 좋을지 내 주인이 걱정하는 것 같구려.]

그러자 복희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무슨 소린가? 신력이나 쓰고 따라 오게."

[하긴 그렇겠구려.]

"그럼 가봅세!"

슈웅 - !!

복희가 한 줄기 별빛이 되듯 시꺼먼 거대 구멍 속으로 날아갔고, 흑웅이 나를 재촉했다.

[자. 갑시다.]

나는 그 모습을 멍청히 바라보다가 문득 옆에 있던 화룡진인을 떠올렸다.

"화, 화룡진인은 블랙홀 들어가도 괜찮겠냐고! 위험하잖아!"

화르륵!!

내 말에 화룡진인이 갑자기 화룡의 모습으로 변신하더니 앞서서 날아갔다.

[나 또한 물리법칙은 다 무시할 수 있으니 걱정 말라!]

후웅

화룡진인도 아무렇지도 않게 구멍 안으로 날아가자 나는 그만 멍해지고 말았다.

저거 분명히 엄청나게 위험한 거 아닌가?! 빛도 빠져나오지 못하는 장소잖아?!

내가 충격을 받아서 멍해져 있자 흑웅이 내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우리도 갑시다.]

츄와아악 - !!

"우악! 어……."

나는 눈 깜짝할 사이에 어둠이 걷히고 안개가 가득한 신비하고 광대한 장소에 도착하자 눈을 깜박였다. 여기는 우주라기보다는 마치 신연(神煙)이 가득한 장소와 같았고, 곳곳에 소리 없이 육중한 암석들이 떠 다니고 있었다.

이곳이 경계?

[정신 차리시오.]

내 옆에 서 있던 흑웅이 나직이 말을 걸어왔다.

[자기자신을 인간이라 생각하는 말든 신이라는 건 바로 이런 것이오. 하계의 법칙 따위 무의미하지.]

나는 흑웅의 말을 듣는 순간 뼈저리게 실감할 수 있었다.

‘그렇군……’

아예 차원이 다르다.

물리력은 차원이 달라지는 순간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그동안 신에게 덤벼드는 인간을 보는 신들의 경멸 어린 시선이 이해될 정도였다.

나일라토프 같은 경지가 아닌 이상, 과학이나 일반적인 법칙으로는 도저히 신에게 대적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흑웅이 말했다.

[그리고 아까 복희가 하던 말…… 분명 미래세계의 파우스트 박사가 했던 말이오.]

"응? 아!!"

나는 그 순간 알아챌 수 있었다. 분명 내가 금빛 회중시계, [히든 피스]의 비밀을 풀어서 알 수 없는 황무지로 이동했을 때 전신을 기계로 바꾼 파우스트 박사와 마주 쳤던 것이다! 그때 파우스트 박사가 했던 말이 아까 복희가 했던 얘기와 비슷 한 것이었다.

흑웅이 말을 이었다.

[파우스트 박사는 그 당시 외우주나 경계에 가려고 이 근처까지 온 게 아니었소. 그가 원했던 것은 세계를 연산해서 바로 이 장소에서 특이점의 출현을 다시금 관찰하려고 한 거였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복희도 우리에게 말하지 않은 게 있다는 말이오.]

흑웅은 끝모를 신연의 저편을 쳐다보며 팔짱을 꼈다.

[어쩌면 이 [경계]가 허공록 그 자체와 관계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둥실

나는 몸을 살짝 움직이자 마치 무중력상태처럼 몸이 떠오르는 걸 느꼈다.

'여기도 우주공간인 건가…… 어엇,’

꾸르르륵!!

그러나 둥실 하고 무게감이 사라진 것도 잠시, 갑자기 내 몸이 엄청난 속도로 밑을 향해 끌려 들어갔다. 마치 두 발에 커다란 쇠사슬이 묶여서 거인이 쇠사슬을 잡아당기는 듯한 착각이 느껴질 정도였다.

"으헉!!"

전신의 피부가 찢어질 듯 땡기는 가운데 흑웅의 외침이 귓전에 떠올랐다.

[법칙이여, 고정되어라!]

그 순간 끌려내려가던 몸뚱이가 그대로 멈추면서 하락이 끝났다. 나는 정신이 얼얼해질 정도로 급작스러운 상황변화에 당황스러웠지만 일단 냉정을 되찾은 후 흑웅에게 말했다.

"흑웅. 내가 끌려내려간 이유가 뭐지?"

[주인이여. 이 [경계]의 속성은 허차원(虛次元)이오.]

"허차원?"

[그렇소. 주인은 암천향에 출입하면서 한 번 허차원의 속성을 느껴본 적이 있을 터. 더 이상 허차원의 속성이 주인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일단 주인 근처의 법칙을 신력으로 고정시켰소.]

"…… 그렇군."

나는 흑웅의 설명에 이게 어찌 된 상황인지 알 수 있었다.

허차원!

그것은 과거 암천향에서 구천현녀와 신공표가 동시에 천교와 절교를 대표하는 최강술법인 시해지술과 영진포일술을 펼치자 차원이 찢겨져 나가면서 진입하게 된 특이한 장소였다. 그 허차원에서는 존재확률이 제멋대로 변동했기에 가만히 있던 구조물이 숨 몇 번 쉴 사이에 제멋대로 변해 버리곤 했었다.

그 당시에는 허차원에서 목숨의 위협을 받았으나 구천현녀의 도움으로 무사했었는데 이번에는 흑웅의 도움으로 허차원의 기괴한 법칙 변동에서 살아남은 모양이었다. 나는 상황을 이해하고는 흑웅에게 말했다.

"[경계]라는 건 거대한 허차원 덩어리라고 볼 수 있는 건가?"

[단순히 그렇게 말하긴 힘들 것이오. 공허(空虛)와 현실이 뒤섞이면서 생겨난 악몽(惡夢)이니, 이곳은 혼돈의 존재들조차 살아남기 힘든 장소……]

흑웅은 다소 떫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 경계에 오래 있는 건 나라고 해도 위험하오. 빨리 복희를 찾아서 합류하는 게 좋을 것 같소.]

"위험하다고! 신력으로 법칙을 고정해서 이제 괜찮지 않아?"

[주인이 암천향에서 겪었던 허차원과는 차원이 다른 장소요. 신력으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존재확률이 변동할 경우 뜻밖의 위험에 처할 수 있는 것이오. 공허에 침식되는 장소에서는 그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없으니.]

"!!"

[어서 움직입시다.]

나는 흑웅의 설명을 듣자 기가 막혔다. 복희가 하나도 위험하지 않다는 식으로 얘기했었는데 정말 위험한 곳인 것이다! 하지만 이미 따라와 버렸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고, 흑웅의 말대로 지금은 서둘러 용건을 보고 탈출하는 게 현실적인 방안이었다.

"복희는 어디 있지?"

[…… 저기에 표식이 있소.]

위잉 -

잘 보니 꽤 거리가 떨어진 장소에 새파랗게 빛나는 보석 같은 게 보였다. 좀 더 가까이 가서 그 보석을 살펴보니 사실 보석이 아니라 취옥(翠玉)의 빛을 내는 손바닥만한 물건이었고, 나는 그 보석을 손에 잡고 자세히 관찰하고서 그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용린(龍麟)이군."

[복희가 자기를 따라오라고 비늘을 뜯어서 남긴 것 같소. 자기의 비늘이라면 이 [경계]의 존재확률 변동에도 저항할 수 있을 테니까.]

"따라가자."

나는 흑웅과 함께 용린의 빛을 찾아서 앞으로 나아갔다. 용린은 가까운듯 먼듯 희미한 빛이 사라질 때쯤 다시 나타났기에 뒤따라가는 건 큰 문제가 없었다. 나는 용린을 따라가면서 흑웅에게 말했다.

"흑웅. 이곳은 신비한 안개가 잔뜩 끼어 있는데 이 안개가 뭔지 혹시 알아?"

[나도 모르오. 나는 주인의 힘과 경험에서 탄생한 존재이기에 주인이 겪어보지 않은 건 나 또한 알지 못하니.]

"흠, 그런가……."

[다만 이 안개의 속성이 혼돈(混池)이 아니란 건 확실하오.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이니 여기에 오래 있는 건 좋지 않을 듯하오.]

"알았어. 빨리 움직…… 어엇?!"

후오오오 - !!

바로 그 때 눈앞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생물체가 훅 하고 날아가자 나는 깜짝 놀랐다. 절대지경의 감지능력으로도 전혀 영문을 알 수 없는 출현을 보면 저놈은 시공간을 뒤틀어서 움직이는 게 틀림없었다. 마치 연어에 날개가 달린 것 같은, 아니 참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를 그 괴이한 물고기의 크기는 거대한 궁궐에 맞먹어 보였다.

"저건 또 뭐야!"

[이쪽에 적의는 없는 것 같소. 건드리지 맙시다.]

"음, 그래."

쿠지지직……

갑자기 그 물고기는 안개바닷속으로 몸을 던졌고, 마치 사라지듯이 부드럽게 잠수했다. 이 장소를 마치 물 속인 마냥 유영하는 모습이었고 나는 황당해서 중얼거렸다.

"수해에서도 별의별 괴물을 다 봤지만 저건 또 뭔지 모르겠군. 아니, 마력(魔力)이 느껴지지 않잖아."

내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건 바로 그 점이었다. 아오키가하라 수해에서 무수한 대요괴와 마물을 토벌하며 괴물상대하는 건 이골이 나 있었던 나였고, 나는 괴물의 강함은 표피에서 뿜어져나오는 분위기에 따라 달라진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강한 분위기는 괴물이 선천적으로 갖고 있는 마력의 양에 따라 달랐기에 비교적 쉽게 분간하는 게 가능했다.

그런데 방금 전 보았던 이 [경계]의 마물은 이상할 정도로 그런 마력이 존재치 않았다. 아예 무(無)라고 봐도 좋을 정도로 마력의 존재감이 없었기에 일반우주의 괴물과는 뭔가가 다른 것 같았다.

흑웅이 말했다.

[저 물고기가 지나간 자리에서 안개가 많이 걷혀서 복희의 표식이 더 잘보이게 됐구려.]

나는 흑웅의 말에 전방을 살폈는데 그 말대로 안개가 씻은듯이 사라져 있었다. 아까까지는 희미한 빛을 힘겹게 따라가던 중이었는데 그럴 필요도 없이 한 번에 표식이 열 개씩 공간에 늘어져 있는 게 보일 정도였다.

"어? 그러게……."

[저놈은 이 [경계]의 안개를 먹고 사는 놈이 아닐까 싶소. 갑시다.]

후웅

나는 한층 더 빠르게 복희의 표식을 따라 전진할 수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전진했을까? 반 시진 가까이 [경계]를 날아다니던 끝에 나는 마침내 복희를 발견할 수가 있었다.

"복희님!!"

"왔군, 백웅. 기다리고 있었네."

복희는 웬 커다란 행성처럼 생긴 둥그런 땅덩어리 위에 앉아 있었다.

나는 행성 위에 착지하면서 말했다.

"화룡진인이 보이지 않습니다만."

"그녀는 지금 수련중이라네."

"네?"

"신술에 흥미있어하더군. 그래서 몇 개의 술수를 가르쳐줬고 연습중일세."

나는 복희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쳐다보았다. 한참 떨어진 곳에서 웬 거대한 불꽃이 일렁이는 게 보였고 그건 틀림없이 화룡진인의 힘으로 보였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제가 이상할 정도로 늦었군요. 실력이 부족해서 죄송합니다."

"아닐세. 이 [경계]는 시공간이 뒤틀려서 어차피 시간의 흐름이 엇갈릴 수밖에 없는 장소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이곳에서 백 년쯤 기다릴 각오도 하고 있었네."

"헉! 그렇단 말입니까?"

"자네는 지금 들어온지 시간이 얼마쯤 지난 것 같은가?"

"대략 반 시진쯤……."

"나는 체감상 3백 일쯤 지났네. 화룡진인도 나와 거의 비슷할 테고."

나는 깜짝 놀랐다.

"!!"

"화룡진인의 술법수련도 그녀가 용맹정진한 끝에 꽤나 궤도에 올랐는데 자네 눈에는 자투리 시간을 활용하는 걸로 보였겠군."

복희가 자못 유쾌하게 말했지만 나는 당황해서 말했다.

"아…… 아니 시간의 흐름이 뒤틀렸다지만 왜 내게만 이런 식으로 적용됐다는 말입니까?"

"글쎄.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자네가 완전한 신이 아니라서일지도?"

"네?"

"나나 화룡진인은 확실히 신체(神體)를 갖고 있으나 자네는 아무리 강력한 신력을 갖고 있다지만 인간의 육체를 버리지 않고 있어. 그래서 자네에게는 시공간 간섭이 다른 밀도로 적용됐을 확률이 높겠군."

그러자 흑웅이 말했다.

[그럼 이상하군. 복희 당신의 말대로라면 시간의 흐름이 수천 배 이상 차이가 나는 건데 어째서 만나서 얘기를 하는 지금은 시간의 흐름이 같아졌단 말이오?]

"눈치채지 못했나? 이 [경계]에는 수많은 '거품'이 존재한다는 걸."

[거품?]

"[경계]는 운해(雲海)처럼 보이지만 사실 반투명한 거품의 구(球)가 무수히 떠 있는 장소야. 그리고 구 내에서만큼은 시간의 흐름이 일정한 경향이 있지. 제각기 크기도 지속시간도 다르지만 우리는 지금 같은 '거품' 내에 있기에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일세."

[…… 전혀 모르겠군. 거품의 구 같은건 보지도 못했소. 당신은 그 사실을 어떻게 눈치챘소?]

"[경계]에만 흐르고 있는 독특한 기운이 존재하지. 그걸 뭐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신좌(神座)에 있을 때부터 그 기운을 익숙하게 접해왔기에 미세한 경계의 틈도 눈치챌 수 있는 걸세."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한 복희는 힐끔 화룡진인이 있는 쪽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술법수련을 끝낼 때도 되었군."

잠시 후 일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화룡진인의 신형이 장내에 나타났다. 화룡진인은 나를 보자 반갑다는 듯 말했다.

"백웅이여, 간만에 보는구나!"

"으음…… 어떤 신술을 배우셨소?"

"태극용린(太極龍鱗)과 신룡후(神龍喉)를 배웠구나."

태극용린은 오제의 공격에서도 자기자신을 방어할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한 신술이었다. 다만 신룡후라는 술법은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복희가 비슷한 술수를 쓰는 걸 여러번 보아왔기에 놀라서 말했다.

"설마 복희님의 우주태룡후(宇宙太龍吼) 같은 것입니까?!"

오제조차도 차원 바깥으로 천여 년 간 추방할 수 있는 가공할 능력!

그걸 화룡진인이 배웠다면 정말 대단한 일이리라!

그러자 화룡진인은 훗 하고 웃으며 말했다.

"우주태룡후는 신술이 아니지 않은가? 그건 복희 님의 고유한 능력이고 신룡후는 그런 우주태룡후를 본떠서 만든 신술이다. 단지 신룡후를 배울 수 있는 건 같은 용족 뿐이니 복희 님께서 내게 가르쳐주셨노라!"

화룡진인의 말에 옆에서 복희가 거들었다.

"그래서 신룡후는 내 인간족 제자 중 누구도 배우지 못했지. 태상노군이나 원시천존도. 이 술수를 배운 건 화룡진인이 처음이다."

"아…..."

화룡진인은 주먹을 불끈 쥐며 씩씩하게 말했다.

"백웅! 앞으로 신술을 써서 네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알겠습니다."

왠지 화룡진인은 초고대나 미래나 전혀 성격이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았다.

‘뭐, 화룡진인이 내 편인데 더 강해져서 나쁠 건 없지……‘

내가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을 때 흑웅이 복희에게 말했다.

[복희여. 상황은 이해가 되었는데 그래서 봉황은 어떻게 찾아야 하오? 이 경계에 온 목적은 사대신수 봉황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었소.]

"봉황은 이미 찾아두었네. 자네들을 기다리고 있었을 뿐."

[어떤 식으로 찾았는지 알 수 있소?]

"방법이 궁금한가? 별거 아니야."

복희는 슬며시 경계의 안개 너머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거품'이 존재하지 않는 장소를 찾으면 그만이거든. 봉황이 이 [경계]의 모든 법칙에서 자유로운 존재라면 자기를 묶어두는 거품 같은 걸 용납하지 않을 테지."

[그렇군…… 이해했소. 그래서 지금 당장 찾아갈 것이오?]

복희가 흑웅의 말에 부채를 촥 펼쳤다.

"찾아가기 전에 물어보고 싶은 게 있군. 자네들은 봉황을 만나서 말하고 싶은 게 뭔가?"

[……]

"봉황은 다른 사대신수와는 완전히 다른 존재야. 그래서 다른 놈들을 상대할 때와는 달리 자네들 본인도 확실한 각오를 해둬야 할 듯하군. 어영부영 가호만 받고 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거든."

[무슨 말인지 알겠소.]

"백웅. 봉황을 만나서 정말로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 건가?"

스윽

그 질문에 흑웅의 시선이 내 쪽을 향했다. 틀림없이 저 눈빛은 내 대답을 원하는 게 틀림없었다. 나는 장내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자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봉황한테 하고 싶은 말?'

그런 거라면 정해져 있지!!

나는 고민하지도 않고 자신 있게 대답했다.

"있소!"

"좋아, 그럼 가볼까!"

복희는 바로 부채를 휘둘렀다.

쿠구구구!!

잠시 후 복희와 우리들이 밟고 있던 둥근 구 형태의 땅덩어리가 크게 진동하며 크게 팽창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수백 장 이상의 크기로 확대된 그 둥근 땅덩어리는 이윽고 큰 소리를 내며 빠르게 전방으로 날아가기 시작했고, 그 위에 서 있는 우리들은 신기하게도 바람이나 진동에 전혀 영향받지 않고 편안하게 서 있을 수가 있었다.

'이것도 복희의 신술인가?'

그렇게 구체를 타고 약 반 식경 정도를 계속 날아갔을 때였다. 나는 갑작스럽게 풍경이 변하자 놀라서 중얼거렸다.

"안개가 걷혔다."

천지 상하좌우가 모조리 안개로 뒤덮여 있던 몽환적인 풍경이 끝나고 마치 씻은 듯이 아무것도 없는 암흑이 눈앞에 펼쳐졌다.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어둠 속을 소리 없이 나아가는 건 그 나름 공포스러운 경험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저 멀리에서 빛으로 이루어진 덩어리 같은 게 나타나면서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바깥]아니라 [안]에서 온 자들이여…… 나는 너희를 만나고 싶지 않으니 돌아가거라.]

투우웅!!

그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마자 갑작스럽게 구체가 튕겨 나가는 소리와 함께 급격하게 어둠이 좁아지는 착각이 들더니 순식간에 주변이 안개에 둘러싸였다. 틀림없이 반탄력 때문에 어둠의 중심부로 진입하다가 안개지역으로 튕겨 나온 것이리라!

그러자 복희는 성가신 듯 말했다.

"이런. 신술이 통할 상대가 아닌데? 생각보다 더 강하잖아."

"네? 다시 이 구체를 움직여서 전진하면……."

"방금 건 경고야. 봉황은 우리를 단숨에 소멸시킬 수 있었지만, 일부러 공격하지 않고 내쫓은 거지. 그리고 다시 한번 진입할 경우, 내가 알고 있는 그 어떤 신술로도 막아낼 수 없다."

"!!"

삼황오제, 그리고 기린조차도 복희가 마음먹고 신술을 쓰면 그럭저럭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복희의 신술은 강력했다. 그런 복희가 신술로는 상대 못 한다고 인정할 정도라니?

나는 약간 당황해서 말했다.

"저, 저놈이 삼황오제 이상이란 말입니까?"

"아니. 그런 얘기가 아니라 놈은 이 경계의 힘을 마음대로 끌어 쓸 수 있다. 그리고 [경계]의 침식을 막는다고 힘의 일정 부분을 할애하는 우리와 달리 힘을 아낄 필요도 없어 보이는군. 영귀가 걱정한 게 이런 건가?"

"아!! 지형상 유리하다는 거군요."

"그것도 엄청나게. 바깥이면 몰라도 이 안에서는 내가 본체로 변해서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상대 못 할 거야."

"……."

그거 큰일 난 거 아닌가?!

내가 뻣뻣이 굳어있을 때 옆에 있던 화룡진인이 말했다.

"이대로 퇴각하는 게 좋을 것 같군. 방금 전 접근했을 때 저자의 강렬한 적의와 귀찮음을 느꼈으니, 자칫하다가는 큰 피해를 입을 수 있겠어."

"음……."

복희가 내 쪽을 보며 말했다.

"백웅. 놈과 일전을 불사하겠다면 다시 접근해보겠네. 나는 봉황과의 만남이 자네의 여정을 크게 단축시켜줄 거라 생각해서 여기에 온 거니까 어느 정도의 피해는 감수할 생각이네. 본체로 변신해서 싸우는 한이 있어도 봉황과 결판을 내 보겠어."

"복희 님!! 그렇게까지는."

"허나 물러나겠다면 그 의견 또한 존중하겠네. 자네는 어찌하겠나?"

"……."

나는 복희가 왜 저렇게 봉황에게 고집을 부리는지 몰랐는데, 이제보니 복희는 전생자인 내게 고급정보를 주기 위해서 각오를 한 모양이었다. 나는 그런 마음에 감사함을 느끼면서도 지금 느껴지는 분위기가 심상찮다는 걸 느꼈기에 망설일 수 밖에 없었다. 상대는 경고만 한 번 주고 그다음부터는 절대 봐주지 않고 조져 버리는 유형이라는 걸 나 또한 느꼈기 때문이었다.

‘틀림없어. 복희와 화룡진인 말대로 다시 들어가면 무조건 큰일 난다…... 저 봉황이란 놈은 앞뒤 안가리고 전투에 돌입할 거야.'

설마 본체로 변신한 복희가 봉황한테 지지는 않겠지만 정말 알 수 없는 일이다. 이 [경계]란 장소가 보통 장소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그냥 물러나는 게 현명한 건가?

‘…… 아. 그래!’

바로 그때 내 머릿속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결연한 각오를 하고는 복희에게 말했다.

"복희 님. 부탁이 있습니다."

"뭔가?"

이게 맞는 건지 고민하면서도 나는 내 생각을 망설임 없이 말했다.

"저를 강력한 신술으로 재워주십시오!!"

"?"

"잠을 자야겠습니다!"

복희도 놀랐는지 약간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잠시 후 뭔가를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확실히…... 이 중에 아직 육체가 필멸자인 그대만 시도해볼 수 있는 방법이긴 하겠군. 신이 인공적인 수면상태에 들어가 봤자 저놈은 호응하지 않을 테니. 그런데 그 방법은 정면대결보다 더 위험할 수도 있다네."

"……."

옆에 있던 흑웅이 거들었다.

[주인의 뜻은 알겠소. 허나 꿈속이면…… 내가 따라갈 수 있다는 보장을 할 수 없소.]

"괜찮아. 날 믿어."

[으음……]

나는 흑웅을 안심시킨 후 복희에게 외쳤다.

"상관없습니다. 한번 해보죠!"

"어디 해보게."

복희는 이윽고 부채를 내 쪽으로 겨누더니 술수를 시전했다.

신술(神術)

만년지몽(萬年之夢)

스르르…...

이윽고 강렬한 수면욕과 함께 나는 그대로 꼴까닥 잠들고 말았다.

***

[너는 누구냐?]

알 수 없는 공간.

나는 천천히 의식을 되찾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 보았는데, 나는 뜻밖의 사실을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오솔길!

오두막집이 있고 나무가 심어져 있고 한적하기까지 한 오솔길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당연히 이 오솔길의 풍경은 내가 수십 수백 번은 보아왔던 것이기에 나는 감개가 무량해서 주위를 돌아보았다.

’이럴 수가!!’

별 기대도 안 했는데 이렇게 될 줄이야?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내게 말을 걸어온 존재에게 대꾸했다.

"나는 백웅이다. 만나서 반갑다!"

[……]

오솔길의 맞은편에는 웬 거대한 빛을 내는 존재가 서 있었다. 한없이 아름다운 빛의 날개를 지니고 선아(線娥)한 윤곽이 예술적이기까지 한 그 존재는 얼핏 조류처럼 보였지만 동시에 볏이나 홰가 없어서 그런 지상의 동물과 차원을 달리하는 존재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그 존재’는 안광을 빛내어 나를 주시하며 말했다.

[백웅. 여기는 내가 본 적이 없는 장소이다. 너의 기억 속으로 나를 현몽(現夢)하게 만들었느냐?]

"어…… 사실 여긴 낙양에 있는 쪼끄만 마을인데…… 본적이 없겠지 그야……."

뭐지? 저놈이 내 기억을 읽어 들여서 현몽한 거 아니었나? 왜 내가 했다는 것처럼 말하는 거지?

나는 뭔가 이상한 느낌에 중얼거리다가 번뜩 정신을 차리고는 말했다.

"아! 어쨌든 만나줘서 고맙다. 영귀의 말을 듣고 ‘꿈’으로 들어오면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와줬구나."

잘 보니 내 곁에는 흑웅도 없었다. 흑웅은 이 ‘꿈’ 속으로 따라오지 못 한 모양이다.

[……]

상대는 침묵하다가 말했다.

[인과율(因果律)이 나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너와 나의 인과율이 맞닿은 장소는 바로 이 장소이다.]

"? 어, 그래……."

[영겁(永劫)을 떠도는 나와 인과율이 이어진 너라는 자에게 호기심이 생겼다.]

잠시 후 사대신수(四大神獸) 봉황(鳳凰)이 말을 이었다.

[백웅이여. 너 또한 허공록(虛空錄)의 의지를 따르는 것인가?]

허공록?!

나는 그 말에 열심히 머리를 굴려 보았다.

‘그 말은 저 봉황이란 놈은 허공록 의 부하라는 얘기인가?’

외신이자 전 우주의 서열 2위라고 하는 허공록의 부하라면 봉황의 강력한 힘도 설명이 가능했다. 외신의 부하라면 삼황오제가 경계할 만한 존재일 만도 한 것이다. 그런데 봉황이 허공록의 부하라고 치더라도 왜 나한테 허공록의 부하인지를 묻고 있는 걸까?

나는 고민하다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난 허공록과 관계없어. 만나본 적도 없고 그냥 얘기만 들었을 뿐이야. 단지 엄청 위대한 존재라는 것만 말고 있다."

그러자 봉황이 대꾸했다.

[거짓이다.]

"뭐?! 아냐! 사실인데……."

[네게 매체를 이용한 지식의 전송을 금지하는 금계가 적용되어 있는 게 보인다. 이 금기는 허공록이 직접 관여했다는 증거이다.]

"……?!"

뭐? 지식의 전송을 금지하는 금계?

나는 갑작스러운 봉황의 말에 당황했지만 이내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흑요석을 쓸 수 없는 제약!! 설마 놈은 그걸 보고 얘기한단 말인가?'

하지만 삼황오제조차 눈치챌 수 없던 제약이다. 아무리 대단한 존재라지만 어떻게 한눈에 보고 내게 그런 금계가 걸려 있다는 걸 알 수 있다는 말인가? 나는 머뭇거리며 봉황에게 말했다.

"확실히 그런 게 나도 모르게 걸려 있었어. 그렇지만 허공록을 본 적이 없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야!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이렇게 되어 있었다고."

[그걸 믿으라는 말이냐?]

"아니, 믿든 말든…… 애초에 넌 어떻게 그 사실을 알 수 있는 건데?"

내 질문에 봉황은 여전히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어조로 대답했다.

[허공록의 힘을 부여받은 자는 허공록의 행사(行事)를 감지할 수 있다. 너는 물론이고 혼돈의 존재들은 감지할 수 없겠지만 허공록의 권능을 다루는 자들은 네게 선명한 금계가 찍혀 있는 게 육안으로 보인다.]

"……!!"

[앞서 말했듯이 그 금계는 나 같은 하위존재가 찍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전 우주의 법칙을 바꿔쓰는 절대적인 금계! 오로지 허공록만이 걸 수 있는 제약이니, 네가 허공록과 관련이 없다는 건 거짓이다.]

무척이나 단정적인 말투라서 거슬렸지만 하는 말이 모두 조리에 맞았다. 나는 뭐라 할 말이 없어서 멍해 질 수밖에 없었다.

‘허공록이 직접 내게 금계를 건 거라고?'

허공록은 비인격신이라고 들었는데 설마 나를 따로 제어하려는 의지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지금은 혼란스러워하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되지 않았기에 나는 정신을 차리고서는 반론했다.

"허공록은 엄청 위대한 존재잖아? 그럼 내가 인지하지 못해도 제약정도는 걸 수 있겠지! 노예가 노예시장 주인 얼굴을 꼭 봐야만 낙인이 찍히는 건 아니니까!"

그러자 봉황은 의외로 순순히 인정했다.

[일리가 있군.]

"그치!"

이어진 봉황의 말에 나는 흠칫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 말은 거짓이다. 왜냐하면 그 계인(戒印)은 상호동의가 없으면 성립하지 않는 제약이기 때문이다.]

"엥? 그게 무슨 말이야?"

[이해하지 못했는가?]

나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한참을 고민했다. 그리고 전혀 모르겠어서 말했다.

"모르겠는데."

봉황은 무감정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설명을 시작했다.

[‘그건’ 일방적으로 허공록이 새길 수 있는 금계가 아니다. 너 스스로도 금제에 동의한다는 합의(合意)가 있기에 존재할 수 있는 금계이다. 비유하자면 너는 기억을 전송하는 일을 금지한다는 계약서를 들고 있는데 거기엔 네 도장이 이미 찍혀 있는 것이다.]

"……!!"

[네가 그 도장을 찍은 기억이 있든 없든, 도장이 찍혀 있는 이상 너는 허공록의 금계에 합의한 것이다. 그런 네가 허공록과 관련 없을 확률은 무(無)이다.]

"뭐, 뭣이…… 어째."

나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평소에 잘 하지 않던 말투마저 튀어나올 정도였다. 상대가 논리정연하게 반박하는데 그 내용이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기억전송을 금지하는 데 합의했다고? 허공록이랑?'

도대체 언제? 어떻게?

그런 기억 없다고!!

나는 너무 답답해서 버럭 소리쳤다.

"개소리하지 마!! 진짜 난 허공록 만난 적 없어!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존재랑 어떻게 합의한다는 소리냐고!!"

[네가 무슨 말을 하든 나는 그렇게 판단할 수밖에 없다. 너의 말에서 거짓말을 하는 감정은 읽히지 않지만 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일이 수립되었을 가능성은 존재하겠지.]

"…… 아니 이런 통닭같"

내가 욱해서 뭐라고 외치려 하는 순간이었다. 봉황은 아무렇지도 않게 내 말의 흐름을 끊으며 자기 말을 했다.

[네가 거짓을 말하는 그렇지 않든 네가 허공록과 연관이 있다는 가정 하에 논의를 시작하지. 네가 날 기만하고자 하는 건 내게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너와 나의 인과율이 이어져 있는 바로 이 상황이다.]

나는 말이 끊기자 입을 어물거리다가 간신히 냉정을 되찾았다. 그러고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젠장. 진짜 내가 너 만나면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한마디만 해도 되냐?"

[말하라.]

나는 의심 가득한 눈으로 봉황을 노려보며 말했다.

"너…… 망량선사 아니냐?"

너무 유사하다.

꿈의 세계에서 현몽해서 나와 만나는 것.

정체를 알 수 없는 위대하고 강력한 존재.

또한 싸가지 없다는 점까지 닮았다!!

틀림없다. 이 봉황 놈이 미래에 망량선사라는 이름으로 지상에 내려오는 것이리라!

그러자 봉황이 무감정하게 대꾸했다.

[아니다.]

"그래그래. 본인은 아니라 하겠지. 그런데 넌 나중에 망량선사라는 이름을 쓰게 될 거야!"

[그것은 예언인가?]

나는 검지손가락으로 봉황을 가리키며 버럭 외쳤다.

"예언이고 뭐고 니가 망량선사 맞잖아! 틀려?"

[……]

봉황은 당황하거나 이상하게 여기는 티도 내지 않고 무척이나 조용히 뭔가를 생각하는 것 같았다. 마치 고요한 물을 보는 듯,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아서 섬뜩하기까지 했다. 그러고는 말했다.

[내게 이름은 없다. 너는 내가 망량선사라는 이름을 쓰기를 바라는 것이냐?]

"뭐? 넌 지금 사대신수 봉황이잖아."

[그건 임무를 받고 갔던 행성계에서 지상의 존재들이 멋대로 내게 붙인 이름. 내 본질과는 아예 관계가 없다. 타인이 멋대로 붙이는 별칭은 내 본질에 영향을 끼칠 수 없으니, 나는 봉황이 아니다.]

나는 봉황의 태도에 호기심이 생겨서 질문했다.

"…… 그렇다 치자고, 그럼 봉황, 네 진짜 이름은 뭔데?"

[나의 이름은……]

봉황이 말을 잇는 순간이었다.

번쩍!

순간적으로 머릿속으로 어마어마한 양의 정보가 마치 홍수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겨우 대야만한 내 뇌 속에 일 리의 땅을 침수시킬 만한 물결이 미친 듯이 퍼부어지는 것 같았다. 그것은 마치 우주의 섭리를 형상화 시킨 듯한 공포스러운 물결이었다.

보통이라면 미쳐 버리면서 뇌까지 파괴되었을 만큼 어마어마한 일이었지만 그때 그 정보가 급격히 어디론가 빨려들어 가는 게 느껴졌다. 틀림없이 내 인격을 보호해주려는 방어장치였다.

비틀

[…… 이다.]

나는 현기증이 나는 걸 억지로 눌러 참고는 당황해서 말했다.

"씨발!! 이름만 들었는데 무슨……."

[이름은 존재의 증거. 인간인 네가 허공록의 의지를 받드는 내 이름을 듣고도 멀쩡한 게 더 신기하구나. 하위신조차 내 이름을 들으면 미쳐 버리는데.]

"…… 죽이려고 말한 거냐?!"

[물어보니까 대답해줬을 뿐이다.]

"……."

이 새끼 미친 거 아니야?!

무덤덤하게 저런 소리를 하는 걸 보니 정말 상종 못 할 놈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동시에 뭔가 망량선사와는 다른 느낌이 들었다. 비슷하지만 뭔가 근본적으로 다른 위화감 같은 게 느껴졌다.

봉황이 말을 이었다.

[가로되, 나는 망량선사가 아니다. 네가 말하는 봉황도 아니다. 나는 허공록의 의지를 받들 뿐이니 본론으로 되돌아가겠다.]

"아니 잠깐!! 그럼 하나만 더……."

[끈질기구나. 물어보아라.]

"혹시 [인간을 지켜라]라는 임무를 받은 적 없냐?"

그러자 봉황은 무슨 말을 하느냐는 듯 말했다.

[없노라.]

"?! 어? 진짜 없어?"

봉황이 처음으로 귀찮다는 감정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 이름에 걸고 없다.]

"……."

뭐…… 뭐지? 망량선사는 분명히 [인간을 지켜라]라는 본질의 속삭임을 들었다고 했는데? 봉황 이놈은 그런 얘기를 들은 적 없다는 말인가?

다 해결됐다 싶은데 수수께끼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기분이다. 내가 혼란해 하든 말든 봉황이 주변의 오솔길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 오솔길은 너와 나의 인과율이 이어져 있는 유일한 통로이자 풍경이다. 통상적으로는 바로 이 장소에 서 너와 내가 만났다고 유추할 수 있다.]

"그래! 네가 망량선사니까……."

[그러나 나는 너와 만난 적이 없다. 너도 나를 만난 게 처음이다. 이건 과거(過去)의 시제이므로, 유추하자면 우리는 미래(未來)에 이 오솔길에서 만날 운명인 것이다. 그러나 미래의 운명은 불확정성 때문에 직접적 인과율로 이어지지 못하므로, 이건 세계의 법칙과 모순된다.]

"……."

[그러므로 이 모순이 설명되기 위해서는 네가 미래에서 과거로 [큰 굴레]를 넘어왔다는 가정을 할 수밖에 없다. 미래에 이미 네가 나를 만난 상태로 과거로 온 것이다. 과거에 존재하는 나는 그 사실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헉!!

나는 봉황이 갑작스럽게 내 비밀을 밝혀내자 내심 당황했다. 하지만 일단은 시치미를 떼기로 했다.

"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네가 [큰 굴레]를 넘었다면 앞선 금계의 합의도 충분히 설명될 수 있다. 그 과정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엉?! 아, 아니."

뜻밖에 구미가 당기는 풀이가 나오자 엉겁결에 반응을 보여 버린 나는 당황했다. 굳이 봉황이 신적인 존재가 아니라도 이 정도로 낚였으면 당연히 눈치챘으리라! 태연하게 내 가면을 깨버린 봉황은 무감정하게 말 을 이었다.

[아무런 대가 없이 [큰 굴레]를 넘을 수는 없다. 그 법칙을 생각하면 너 자신이든 혹은 중개인이든 거대한 대가를 바쳤을 것이다. 그리고 대가를 바치면서 가치를 계산하는 과정에서 허공록이 네게 제약을 걸고자 했고 너는 거기에 동의한 것이다.]

"……!!"

[여기까지는 모두 가설일 뿐이다. 나는 내 추측이 사실이라고 믿으나 세상에 완전한 확률이란 존재치 않지. 그러나 이 사실을 완전하게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한다.]

"그…… 그게 뭔데?"

봉황의 눈이 빛났다.

[바로 이 [경계]를 벗어나 공허(空虛)의 영역으로 가는 것이다.]

"뭐?! 공허의 영역?"

[경계는 현실과 공허의 중간영역이다. 여기서 한걸음만 더 나아가면 진정한 공허만이 존재하는 장소가 등장하지. 그곳에 바로 나의 주인이신 허공록(虛空錄)이 존재하나니, 직접 가서 여쭤보면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

"헉!!"

나는 전혀 몰랐던 사실에 또다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 [경계]에서 더 밖으로 가면 바로 외신 허공록을 만날 수 있다고?!’

30번 죽었다. 깨어나면서도 전혀 몰랐던 사실!

하지만 나는 그 말에서 뭔가 이상한 점을 느끼고는 봉황에게 말했다.

"…… 원래 우주 바깥으로 나가면 외우주로 가는 게 아니었어? 공허의 영역이란 게 설마 외우주를 말하는 거야?"

[외우주로 나가는 건 우주의 물리적 경계를 돌파했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 경계는 물리적 방법으로는 진입할 수 없는 장소이며 개념적인 장소. 비유하자면 출구이자 문이 2개가 있고 서로 붙어 있지만, 그 출구 사이에는 벽이 존재하므로 전혀 다른 장소로 나가게 된다.]

"아하."

[관할영역도 다르지. 외우주로 가면 주시자를 만나게 되지만 경계를 벗어나면 허공록을 만나는 것이다.]

그런 거구나.

내가 봉황의 말을 이해하고 있을 때 봉황이 말했다.

[그러나 내 주인이신 허공록을 굳이 만나서 내 가설을 확인받을 순 없다. 어차피 나는 이 경계를 벗어나 공허의 영역으로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어? 왜 못 가는데?"

[허락받지 않은 자는 경계를 벗어 나는 순간 공허에 잡아먹혀 죽기 때문이다. 자격이 있는 자만이 이곳의 거품을 이용해 그분을 알현할 수 있다. 나는 아직 임무 중이기에 그분을 알현할 자격이 없다.]

나는 봉황이 말해주는 온갖 고급정보에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머리가 팽팽 도는 것을 느끼다가 정신이 없어서 말했다.

"이, 이봐! 나한테 이런 걸 미주알고주알 다 얘기해주는 이유가 뭐야? 그냥 같은 허공록의 부하라고 생각해서 그런 거냐?"

[그렇다. 그 가능성 이외에는 존재치 않는다. 너는 틀림없이 그 외에도 허공록과 다른 계약이 맺어져 있을 것이다.]

"헉……."

봉황은 무감정하게 말했다.

[너는 유일하게 날 도울 수 있는 아군이며 허공록의 세력이다. 정보를 공유할 테니 내 임무를 도와주기 바란다.]

이 새끼 진심인가?!

너무 확고한 봉황의 말에 나는 기가 막혀서 말했다.

"정보는 고마운데 진짜 아니라고!

난 정말로 허공록의 부하가 아니고 대면도 하지 않았어! 너 혼자서만 확신해놓고 남한테 부담줘서 어쩌 려는 거야."

[설령 그렇다 해도 네가 날 도와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임무를 성공하기 힘들다.]

"뭐라고? 무슨 임무인데?"

[날 도와주겠다고 약속하면 어떤 임무인지 말해주겠다. 단, 발설금지의 금계를 붙이겠다.]

"……."

지극히 사무적이고 기계적인 봉황의 말에 나는 정신이 혼미해지는 걸 느꼈다.

'이놈은 임무를 위해 살아가는 기계나 다름없군!!’

다른 의미로 골치 아픈 유형!

하지만 전생자로서 이 상황은 이용해먹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봉황의 임무가 무엇인지는 삼황오제조차 알지 못하는데 이 정보를 알고 있다면 엄청난 가치가 있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하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금계에 동의하겠어. 어떤 임무인지 말해줘."

[계약은 성립되었다.]

촤르륵

그 순간 몸에 무형의 쇠사슬 같은 게 둘러지는 게 느껴졌지만, 이윽고 그 불쾌한 기분이 사라졌다. 그리고 봉황이 입을 열었다.

[허공록께서 부여하신 나의 임무는 지구를 포함하여 그 항성계에 존재 하는 모든 [옛 지배자]와 마(魔)를 청소하여 무(無)로 되돌리는 것. 그렇게 하여 [계시]가 이뤄지는 날 그 누구도 [계시]를 듣지 못하게끔 하는 것이다.]

"……!!"

뭐, 뭐라고?!

[그러나 황제 공손헌원, 용신 복희, 전륜성왕……이 세 명의 존재는 전 우주적으로 강력한 자들이기에 쉽사리 그들을 물리치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이 다투다가 빈틈이 생길 때를 노려 일격을 가하기 위하여 이 [경계]에서 잔뜩 공허의 힘을 모아두고 있던 중이었노라.]

"그, 그런 거였나……."

[용신 복희가 이 밖에 와 있는 것도 알고 있다. 그와 싸워서 소멸시킬 수 있겠지만 그래 봤자 나머지 두 맹자(猛者)를 처리할 방법이 사라질 뿐이기에 가능하면 복희와는 싸우고 싶지 않다.]

"그랬군."

설마 봉황이 지구상 모든 [옛 지배자]의 소멸을 바라는 존재였다니!

나는 헛 하고 떠오르는 게 있어서 봉황에게 말했다.

"설마 삼대신수에게 네 힘을 나눠준 이유도 그것 때문이냐?"

[그렇다. 신수가 힘의 축이 되어 [옛 지배자]들을 억제하면 혼돈의 힘이 확장되는 속도가 느려지기 때문이다. 종말이 가까워질수록 혼돈의 존재들은 강력해지고 질서의 존재들은 약해지는 현상을 최대한 늦춰야 했다.]

"으음……."

[내게는 인과율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없기에 이 정도가 최선이었다.]

뭔가 염증 난다는 듯이 중얼거리던 봉황이 말을 이었다.

[백웅이여. 너는 틀림없이 허공록과의 계약에 묶인 존재이며 나의 아군이다. 그러므로 발설금지의 조건으로 추가계약을 제안한다.]

"…… 뭔데?"

이어진 봉황의 말에 나는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앞서 말했던 황제, 복희, 전륜성왕 셋 중 하나의 목을 가져와다오. 그렇게 한다면 이 경계를 넘어서 허공록이 계신 곳까지 갈 자격이 네게 부여될 것이다.]

봉황의 말에 나는 이게 뭔 소린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황제, 복희, 전륜성왕 중 하나의 목을 베라고?'

나는 난데없이 규모가 큰 의뢰가 들어오자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사실 그 제안에 대한 대답이 무척 쉽게 생각이 났다. 그래서 나는 봉황에게 대꾸했다.

"내가 왜?"

진짜 왜 해야 해?

게다가 복희의 말에 따르면 내가 언젠가 태양지계의 출입권을 써서 태양지계에 진입하여 그 힘을 얻게 된다면 내가 만나기 싫어도 허공록 쪽에서 찾아온다지 않는가?

지금까지 얻은 이런저런 정보 때문에 나는 허공록의 알현 자체를 큰 이득으로 생각하기 힘들었다. 그러자 봉황이 나를 무미건조한 시선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저 제안일 뿐이다. 허나 허공록을 알현하는 건 우주의 지배자들이 바라마지않는 특권이나 다름없는 것…… 내 제안이 난이도가 높다 해서 거절한다면 이해하겠지만 무척 좋은 기회임은 알아두어라.]

"그러니까 그 말을 모르겠다고. 허공록을 만나면 뭐가 좋은 건데?"

[……]

봉황은 나를 뚫어져라 쳐다 보았다. 그러고는 중얼거렸다.

[큰 굴레를 넘고 직접 허공록의 금계까지 새긴 자가, 허공록을 직접 알현하는 의미를 모른다고 할 셈인가?]

"모르니까 모른다고 하지…… 넌 왜 내가 다 아는 것처럼 말하냐."

[흐음……]

봉황이 뭔가 고민하다가 말했다.

[그 분을 직접 알현하게 되면 우주의 그 무엇이든 알고싶은 것을 한 가지 알 수 있게 되는데도 말인가?]

응?

나는 봉황의 설명에 고개를 갸웃하며 대꾸했다.

"정보를 겨우 하나 준다는 거냐? 외신 허공록 치고는 쪼잔하군."

그러자 봉황은 약간 당황한 듯했다.

[백웅이여. '무엇이든'의 의미를 모르는 것인가? 기만과 왜곡이 넘치는 이 세계에서 참된 진실이자 힘이 되는 지식을 무엇이든 하나를 반드시 얻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알고 싶은 것'의 범위는 네가 스스로 정할 수 있다. 형용할 수 없는 추상적인 것까지…… '모든 것’을.]

"……?"

[그건 전 우주에서 오로지 전지자 허공록만이 줄 수 있는 축복이다.]

그게 지식이고 정보라는 거 아냐?

뭐가 다르다고……

봉황이 답답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마도사들은 물론이고 신들조차 이 알현기회를 얻으려 부단히 노력하지만, 누구도 쉽게 얻지 못한 기회. 방금 말했던 세 존재들도 이 기회를 얻을 수 있다면 대부분의 소유물을 포기할 수 있으리라. 이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는가?]

나는 봉황의 말에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뭔 소린지 이해가 가지 않아서 고개를 강하게 끄덕이며 대답했다.

"전혀 모르겠군!! 난 정보 하나 얻자고 그런 미친 의뢰를 하고 싶진 않아. 그러니까 내가 네 부탁을 열심히 하지 않는다고 떽떽거리지 마라."

[진심인가?]

"그래!"

한참을 침묵하던 봉황이 말했다.

[…… 천하의 우자(愚者)인가 아니면 모든 것을 깨달아 미친 광인(狂人)인가. 어느 쪽이든 이 기회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니, 범상치 않은 자로군.]

"뭐 시간 나면 한번 생각은 해볼게! 어차피 황제나 전륜성왕은 때려 눕혀야 하니까."

[맘대로 하라. 그대에게 기대는 하지 않겠노라.]

"하핫."

봉황의 감정 없는 어조에 약간 복잡한 감정이 스며든 것 같았다. 나는 왜 그러는지는 몰랐지만, 저놈의 말투를 변하게 한 사실이 왠지 뿌듯해서 씨익 웃었다.

나는 문득 생각이 나서 말했다.

"근데 네 입으로 질서의 힘이 약해지는 걸 원하지 않는다면서? 근데 왜 복희를 죽이라고 하는 거냐."

[복희라는 강력한 대적자(對敵者)의 존재가 안 그래도 교활하고 신중한 황제 공손헌원을 더욱 집중하게 끔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본디 황제 공손헌원의 힘과 세력이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복희의 세력과 겨루어 이기기 위해 모든 역량을 집중하다 보니 우주적 시간으로는 짧은 시간에 빠르게 강성해져 버렸다.]

"강력한 적수가 없으면 황제가 더 강해지지 않는다는 거냐?"

[강한 적수 또한 일종의 인과율이다. 그 인과가 자기완결(自己完結)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운명적인 대적자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 로 막대한 인과율을 취득할 수도 있지. 물론 인과율을 받는 건 대적자 또한 마찬가지이기에, 강력해진 대적자에게 살해당할 위험이 커져 버린다. ]

순간 나는 왠지 기분 나쁜 기분이 들었다. 남 얘기가 아닌 것 같았는데 그걸 인식하고 싶지 않다는 모순적인 기분이었다. 내 인상이 약간 찌푸려졌을 때 봉황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서 일부러 그런 식으로 인과율을 쌓으려는 미친 존재는 우주에 존재치 않지만…… 복희는 본의 아니게 황제 공손헌원을 대상으로 그 인과율을 만들어내고 있다.]

"뭐!?"

나는 뜻밖의 얘기에 당황했지만 그렇게 대꾸한 봉황이 말을 이었다.

[본디…… 사지(四枝)를 뿌려두고 본래 힘을 잃어버린 공손헌원이 대적자의 인과율을 얻지 않았다면 내가 틈을 보아 그를 몰래 처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초기에는 가능성이 높은 일이었노라. 그러나 지금은 복희의 연합을 상대하기 위한 황제 휘하의 세력이 커져 버려서 상당히 힘든 일이 되어 버렸지.]

"……."

[복희가 이 대전(大戰)에서 승리한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허나 이렇게 판을 키워놓고 만일 지기라도 한다면…… 황제를 막을 자는 전 우주적으로 그 누구도 없게 되어 버릴 것이다.]

그래서 황제와의 대전이 더 판이 커지기 전에 대적자의 인과율을 제공하고 있는 복희를 제거하고 싶어 하는 것인가?

나는 대충 봉황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지만 동시에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이 녀석…… 황제 공손헌원과 사제(四帝)의 비밀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봉황의 방금 설명은 내가 28번째 생의 막바지에나 알 수 있었던 치명적인 신화의 비밀이었다. 사실 오제 중에서 황제 공손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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