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귀는 차분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당신에게는 아직 다가오지 않았으나 거대한 액운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언젠가는 필히 마주칠 대흉(大凶)이지요. 그러나 그 액운에 맞먹는 것이 바로 그 홍균도인의 가면이니, 액으로 액을 물리치는 것이 바로 액막이 의식이 될 것입니다."
"그게 되는 거요?"
"흉운(凶運)은 질서있게 차례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너도나도 한시 바삐 당신을 없애고 싶어서 난리를 치는 도중에 시간이 연장되는 효과…… 그리고 자기들끼리 공멸하는 효과…… 바로 그것을 노리는 것이지요."
"으음."
옆에 있던 복희가 말을 거들었다.
"홍균도인의 가면이 봉인되어있지 않았다면 절대 안 될 일이겠지. 가면을 쓰는 순간 백웅 너는 바로 홍균도인에게 잡아먹힐 테니까. 하지만 봉인이 되었기에 엄청나게 약화되어 있고, 내가 추가로 가면의 힘을 제어하면 가면은 그저 대흉을 유혹하는 매개체가 될 뿐 너를 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두 개의 액이 마주쳤을 때 쌍소멸(雙消滅)하도록 유도하는 것이지."
"음…… 여하튼 그 대흉을 물리치면 좋은 거지요?"
"지금도 자네는 위험한 지경인데 그 대흉을 만나서 살아남을 순 있겠나?"
"……."
"이것 자체가 가호라고 치도록 하지."
아 젠장. 그렇게 되나……
나는 투덜거리면서 이윽고 홍균도인의 가면을 들었다. 그리고 떫은 얼굴로 쳐다보다가 서서히 내 얼굴에 갖다대서 썼다.
덜걱
가면이 씌워지는 그 순간, 복희와 영귀의 전신에서 신력이 솟구치는 게 보였다. 그리고 홍균도인의 가면이 나를 잡아먹으려 하는 혼돈의 마력을 뻗치고 있었지만 두 명의 신격이 나를 보호하는 장벽을 쳐주는 듯 했다.
우드득
하지만 전신의 근골이 우그러지는 듯한 격통! 나는 고통을 간신히 참았지만, 너무 아픈건 어쩔 수가 없었다.
'젠장, 언제 끝나!!’
그리고 내가 너무 아파서 소리를 지를락 말락하는 바로 그때였다. 영귀의 외침이 귀에 새겨졌다.
"대흉이여, 모습을 드러내거라!!"
파앗.
그 순간 내 눈앞에 뭔가가 떠올랐다.
그 '무언가'는 실체가 아닌 환영으로 보였지만 마치 지금 가면에 반응하는 듯 전신을 꿈틀거리며 나와 마찬가지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무언가’가 내 쪽을 향해 살의어린 안광(眼光)을 방출하는 게 보였다.
"……!!"
삿갓무사?!
슈칵
바로 그때 내 가슴팍을 한 줄기 검섬(劍殲)이 질러내듯이 훑었다. 나는 호신강기조차 발휘하지 못하고 베인 후에야 그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고, 다음 순간 갈비뼈와 함께 상반신이 통째로 베인 걸 알아차렸다.
비틀
나는 몸을 휘청거렸지만 도리어 근성으로 버티며 도리어 일검을 날렸다.
‘이 새끼야! 맨날 당하기만 할 줄 알고!’
무량단(無量)!
까앙!!
상대와 나의 검이 허공에서 부딪힌다. 고작 환영에 불과한 존재와 직접 검을 부딪힌다는 게 믿을 수가 없었지만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으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삿갓의 무사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여전히 안개에 흐려진 것처럼 보이지 않았지만, 놈의 증오 어린 눈길만큼은 잊을 수가 없었다.
삿갓무사가 더듬더듬 입을 여는 게 보였다.
[나도…… 넘을 것…… 이다!!]
파앗!!
다음 순간 삿갓무사의 환영이 사라졌다.
내가 진이 빠져서 털썩하고 주저앉자 잠시 후 복희가 손을 털며 말했다.
"잘 해결됐군. 가면의 액운을 제 대흉이 받았으니 한동안 간섭하지 못할 걸세."
"그, 그렇습니까?"
"가장 큰 성과는 그 가면의 독기가 많이 빠졌다는 거지. 보게나."
나는 힐끔 홍균도인의 가면을 내려 다보았다. 봉인된 중인데도 거대한 어둠을 방출하고 있던 가면이 이제는 마치 순한 양처럼 조용해져 있었다. 확실히 이 정도라면 나중에 봉인이 풀려도 제어하기 쉬울지도 몰랐다.
그러나 나는 그 순간 한 가지 불안감이 스쳐 지나갔다.
"……."
홍균도인의 가면이 품고 있는 독기로도 삿갓무사 놈을 완전히 제거할 수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액막이 의식이 끝난 후 영귀가 말했다.
"확실히 당신의 액운이 많이 사라 졌습니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그러면 복희 님은 이걸로 찾아오신 용건이 끝나신 겁니까?"
그러자 옆에 있던 복희가 싱긋 웃었다.
"백웅의 액땜을 해준 걸 가호라고 치기로 했으니 그렇게 되겠군. 헌데 개인적으론 아직 할 말이 남아 있다네."
"그럴 것 같았습니다. 말씀하십시오."
"백웅을 보니 어떤가? 이세계를 뒤엎을 잠재력을 지닌 자라고 생각지 않는가?"
"……."
영귀는 뚫어져라 내 쪽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오오!!
영귀는 날 인정한 건가?!
내가 내심 기분이 좋아서 히죽거릴 때 복희의 말이 이어졌다.
"백웅의 자세한 내력은 말해줄 수 없네. 허나 점술사인 자네조차 그 한계를 측량할 수 없는 자라면 충분히 황제에게 도달할 비수가 되리라는 걸 알고 있을 터. 백웅의 성장을 믿고 우리 측에 합류해보지 않겠는가?"
"음……."
영귀는 침음성을 흘리며 한참 생각하는 듯했다. 그러더니 말했다.
"잠깐 점을 쳐 보겠습니다. 복채는 아까 말했던 정향의 인과율에서 추가로 차감하겠습니다."
"무엇에 대한 점인가?"
"백웅과 관련된 이 세계의 운명에 대한 점입니다."
"이미 숱하게 쳐본 것일 듯 한데."
"아닙니다. 점술사라고 해서 아무 때나 점을 치는 건 아니지요. 그것도 거대한 대명(大命)에 자주 점을 칠수록 정확도는 떨어지게 되니, 여태까지는 점괘를 자제하고 있었습니다. 자칫하다가는 각오도 없이 절망적인 미래만을 볼 수 있으니까요."
"…… 일리 있는 소리군. 그럼 지금은 운명을 볼 각오가 되었단 건가?"
복희의 반문에 영귀가 서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백웅이 세계를 바꾸는 존재라는 걸 믿고 이 세계의 운명을 점치도록 하겠습니다."
이윽고 익숙한 산통(算常)이 눈앞에 나타났고 영귀는 그 산통을 한 손에 쥔 후 하늘을 향해 촥 하고 던졌다.
촤르륵
이윽고 산통 안에 있던 막대기들이 사방으로 흩어졌고 영귀는 그 막대기가 떨어진 형상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유심히 관찰하는 건 영귀만이 아니었고 복희 또한 관찰하고 있었는데, 복희가 침음성을 흘렸다.
"무척이나 혼란스럽구나. 괘수(卦數)를 창조한 게 본좌일진데 나조차도 읽어낼 수 없는 점괘가 있다니!"
"……!!"
나는 그 말에 내심 놀랐다. 아닌 게 아니라 눈앞의 복희는 선천팔괘의 창조자이며 술법의 창조자! 모든 괘수의 원천이라 할 수 있는 최대의 현자조차도 영귀의 점괘를 읽는데, 실패했다는 소리였다.
잠시 후 영귀가 막대기를 주워서 모으며 말했다.
"제 점괘로는……... 백웅은 머지않아 큰 선택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선택 이후의 점괘는 전혀 읽히지 않습니다."
"어떤 선택인가?"
"예정된 존재를 이어지게 할 것인가…… 아니면 정명(定命)에 반항하여 새로운 시대를 개척할 것인가 입니다."
"무척 의미심장하군……."
"……."
영귀가 약간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이상한 건, 이건 이미 정해진 결과라서 바꿀 수 없는데도 바꿀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순(矛盾)은 점술로 해석할 수 없습니다."
"바꿀 수 없는 걸 바꿀 수 있다?"
"그렇습니다. 제 해석으로 볼 때 이런 경우는 하나 뿐입니다."
영귀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운명의 주체인 백웅 자체가 모순된 존재라는 거죠. 모순된 자만이 모순을 풀 수 있습니다."
"흐음, 그럴 수도."
복희는 왠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듯했다. 그러고는 영귀에게 말했다.
"그래서 어쩔텐가? 우리 편에 서겠 는가?"
"기린(麒隣)이 귀하의 편에 서겠다면 저도 그리 하겠습니다."
"기린?"
"응룡과 기린을 설득한다면 모든 사대신수를 설득한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니까요."
"흐흠, 그런 얘기로군. 알겠네."
복희는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확 하고 돌렸다.
"백웅. 이제 가 봅세. 영귀와의 얘기는 끝났네."
"……."
"왜 그러나?"
나는 머뭇거리다가 복희에게 말했다.
"복희 님. 지금 간다는 건…… 설마 기린한테 간다 이 말씀이십니까?"
"그렇네만."
"어, 저기, 그게……."
나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기린은 나를 죽이고 싶어한다고!!’
그도 그럴것이 28회차 때 날 죽이려고 하는 기린 때문에 [매듭]까지 맺게 되고 별의 별일이 다 있었기 때문이다! 난데없이 왜 기린이 날 죽이려 하는지 그때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살의는 진짜였기에 모의전투까지 해보면서까지 살아남으려 악을 썼었다. 그래서 만일 이 시대의 기린이 나를 적대한다면 정말 성가신 일이 아닐 수가 없었기에 직접 만나는 건 꺼려지는 일이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흑웅이 말했다.
[주인. 겁먹을 필요 없소. 나만 해도 기린에게서 주인을 지켜낼 자신이 있고, 무엇보다도 복희가 대동하지 않소? 기린이 아무리 날고기는 신수라 해도 주인을 해할 순 없을 것이오.]
"그, 그럴까."
[황제 공손헌원도 쓰러뜨리려 하는 주인이 기린 따위에게 겁먹는 건 언어도단이오.]
"누가 겁먹었따고 그래! 그냥 마음의 준비를 좀 한 거지."
나는 툴툴거리면서 복희에게 말했다.
"갑시다!"
파앗
잠시 후 나는 또다시 신비한 장소로 와 있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자 광대한 어둠과 성광(星光)이 비치는 걸 알아채고는 중얼거렸다.
"여긴 우주(宇宙)로군요."
"그렇네. 허나 자네가 알고 있는 물리적 세계의 우주가 아니지."
"그 말씀은?"
"보게. 걸을 수 있지 않은가. 그리 고 숨도 막히지 않지."
저벅 저벅
그 말대로 복희는 앞서서 우주 한 복판을 태연히 걷고 있었고 마치 보이지 않는 땅이 있는 것 같았다. 또한 우주에는 원래 공기가 없었는데 여기서는 자연스럽게 숨쉴 수 있었고, 또한 그 공기에는 청령한 기운이 스며 있었다.
"그렇군요."
마찬가지로 나도 걸을 수 있었기에 신기해하며 그를 뒤따라갔다. 앞서서 걷고 있던 복희가 말을 이었다.
"여긴 오행(五行)의 중앙(中央)이야. 이 별이 태초에 생겨날 때 생겨난 태초의 계약이 있었으니, 그 계약에 따라 탄생한 기린은 저절로 중앙의 위치를 자신의 차원계로 배정 받았지. 물질적 법칙이 하나도 통하지 않는 개념적 차원계일세."
"오행의 중앙……."
"기린은 여기에 수십억년간 살고 있었지."
도가의 술법 공부를 할 때 들어본 것 같다. 기린이 사는 차원계를 후세사람들이 전해 듣고 그렇게 묘사했던 것이 틀림없다.
"나도 여기 직접 와보는 건 오랜만이군. 기린은 낯선 방문자를 달가워 하지 않으니 일전에 찾아왔을 때도 기린의 뇌전에 따끔했었다네."
콰과광!!
복희의 말이 끝나는 순간 복희의 전신에 어마어마한 뇌전(雷電)이 떨어져서 그의 전신을 지져 버렸다.
"……!!"
뭐야?!
어마어마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뇌전이었다. 너무 찰나지간이라 반응조차 하기 힘들었고 심지어 그 뇌전의 근처에 있던 나는 급히 호신강기를 전개했는데도 갈기갈기 찢겨 나가 버렸다. 저절로 흑웅이 내게 방어막을 만들어준 모양이었지만 그럼에도 후폭풍 때문에 뒤로 날려가 버린 것이다.
지상에서 대라신선이 쓰는 최강의 뇌전술법이라도 저 위력의 백분지일도 따라가지 못하리라!
후두둑……
그 어마어마한 뇌전을 맞은 복희는 멀쩡했다. 복희는 어느새 신술 선천팔괘를 소환해서 뇌전을 방어한 상태였던 것이다. 다만 완전히 피해를 무효화시키지 못한 모양인지 복희의 머리 끝이 살짝 번개 때문에 뻗쳐 있었고 복희는 자신의 머리를 다듬으며 훗하고 웃었다.
"이런 식으로 화를 내곤 한다네."
[화가 안 나게 생겼소?]
우웅
갑자기 차원의 어딘가에서 우웅하는 소리와 함께 신수가 출현했다. 나는 우리에게서 십여 장 떨어진 곳 에 나타난 그 신수를 보자마자 정체를 알아챌 수 있었다.
'기린!!’
과거에 영귀가 변신한 기린과 죽을 힘을 다해 싸웠으니 기린을 모를 수 가 없다! 내가 반사적으로 검에 손을 갖다대고 있을 때 기린이 영언으로 말했다.
[용신 복희여! 무슨 일로 찾아왔는지 모르지만 예전에 이미 나는 어떠한 일에도 관여하지 않겠다 말했을 것이오.]
"그랬지."
[절대중립을 유지하고 간섭받지 않는 대신 내 힘을 일부 쪼개어서 굳이 그대에게 주기까지 했지. 당신은 그걸 이용해서 천계에서 새로운 영수(靈獸)를 창조했다고 들었는데, 그걸로는 모자라단 말인가?]
마치 치를 떠는 듯한 목소리!
명백히 복희를 싫어하는 듯했지만 복희는 그걸 아랑곳하지 않고 대꾸했다.
"기린이여, 알고 있는가? 그 영수의 이름은 바로 사불상(四不像)일세. 봉황을 제외한 삼대신수의 능력을 조금씩 다 갖고 있기에 천계 최고의 영수가 되었다네. 너무 강하면 인과율에 걸리니까 힘을 조금 봉인시키긴 했지만."
"어?!"
사, 사불상이라고?!
'그 녀석이랑 몇 번이나 마주쳤는데!’
나는 뜻밖의 이름이 나오자 놀라서 복희를 쳐다보았다. 설마 그 사불상 놈의 근원에 사대신수 기린이 관여하고 있었다니!
기린은 그 말을 듣자 코웃음을 치는 듯했다.
[후, 내가 알 바 아니군. 그때 대가까지 교환하며 중립을 약속받았는데 이런 식으로 약속을 헌신짝처럼 저버릴 정도로 용신이 비굴할 줄은 몰랐소!]
무척 적의가 어린 목소리였다. 나는 그걸 보자마자 기린이 나한테만 떽떽거리는 게 아니라 모두를 싫어하는 놈이라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그 누구에게도 관여하고 싶지 않은 절대중립을 원하는 신수인 것이다.
그러자 복희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난 약속을 어기지 않았어. 중립을 보장해주겠다 했을 뿐이지 이 차원계에 다시 오지 않겠다는 약속은 그 때 안했을 텐데?"
[궤변이군. 여기 들어온 것만으로 이미 중립을 훼손한 것이오.]
"그건 자네 생각이야. 약속하지 않은 건 그 누구도 정의를 논할 수 없네."
[…… 빨리 용건이나 말하고 꺼지시오. 어차피 난 당신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겠지만.]
기린의 말에 가시가 돋쳐 있는 걸 보니 정상적으로는 절대 교섭을 진행하지 못할 것 같았다. 복희는 훗 하고 웃더니 기린에게 말했다.
"기린. 나는 그대의 사명이 뭔지 알고 있다네."
[……]
"전에도 내게 얘기하지 않아서 눈치 못 챘으리라 생각했겠지만 그럴리가 없지. 내가 바로 창세신의 적자(嫡子)이니 신좌에 내려왔을 때부 터 그대의 역할은 유추하고 있었어. 허나 밝히고 싶지 않아 하는 듯하여 굳이 말 안했을 뿐."
[내 역할이 뭔지 알고 있다고?]
"자네가 이 차원계를 고집하며 두문불출하여 세상에 나가지 않는 이유. 그건 바로 이 오행의 중앙이야 말로 반고(盤古)의 힘이 세계로 통하는 관문이기 때문이 아닌가."
[……]
"이 차원계가 파괴된다면 이 세계에 존재하는 질서의 법칙이 크게 힘을 잃어버리고 혼돈에 오염되겠지."
기린은 침묵했다. 그러더니 말했다.
[맞소. 나는 태초의 계약에 따라 반고의 힘이 이 세계에 공급되는 걸 끊기지 않게끔 지키고 있는 수문장! 복희 당신은 반고의 적자임에도 그런 내 임무를 방해하겠단 말이오?]
뜻밖의 이야기였다.
'이곳이 창세신 반고의 힘이 통하는 통로라고?'
그리고 기린이 그 통로를 지키는 수문장이라니 정말 처음 듣는 얘기 였다. 생각지 못했던 초고대의 비사에 내가 내심 놀라고 있을 때 복희는 부채를 촤르륵 펴면서 입을 열었다.
"사실 그땐 이해가 가지 않았어. 자네가 질서의 중심을 지키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단순히 수문장일 뿐이라면 문에 출입하는 것만으로 이렇게 예민하게 굴 이유가 없거든. 그것도 반고의 적자인 내 앞에 서 말이야."
[무슨 말이 하고 싶소?]
"그때 이후로 생각을 많이 해봤는데, 자네가 이토록 예민하게 구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어. 통로 이상으로 중요한 뭔가를 지키고 있는 거야. 그리고 내가 알기로 그런 건 단 하나 뿐일세."
흠칫!
기린이 동요할 때 복희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반고가 세계를 창조할 때 사용했던 도끼가 바로 여기에 있는 거겠지?"
복희의 질문에 기린은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불쑥 말했다.
[그건 반고의 의지를 잇고자 물어 보는 것이오?]
복희는 훗 하고 웃었다.
"시답잖은 소리군. 내가 살아가고 이 우주에서 활동하는 것 자체가 반고의 의지일세. 혼돈에 오염되지 않은 자들이 질서의 세계를 살아가는 생(生) 또한 반고의 의지가 아닌가? 그는 혼돈의 대극(對極)이니 혼돈에 반대되는 모든 활동이 반고의 의지인 걸세. 반고가 특정한 인격체인 것도 아닌데 그딴 질문이 무슨 의미가 있나."
[반고가 인격체가 아니라지만 그에게는 분명한 별개의 의지가 있소. 당신도 그가 우주를 짊어지며 새겼던 각오가 무엇인지 알 것이오.]
"……."
[그 의지를 잇지 않는다면, 설령 그대가 반고의 적자라 해도 아무런 대답도 해줄 수 없소.]
복희는 이해가 가지 않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상한데서 감성적이군. 앞서 말했듯 반고에게 의지는 있으나 인격은 없다. 너는 네가 원하는 창세신 반고의 염(念)을 네 방식대로 해석 했을 뿐이니, 네 요구는 지극히 자의적인 것이다.
[뭐라 말해도 상관없소. 나는 이곳을 지키는 업(業)이 있으니 이것만은 양보할 수 없소.]
"똥고집은……."
하아, 하고 복희가 한숨을 쉬었다. 복희도 눈앞의 기린이 이상할 정도로 완고해서 기가 질린 모양이었다. 그는 잠시 후 입을 열었다.
"내가 신좌에 올라서 우주를 주름 잡는 외신(外神)이라도 쓰러뜨려 주길 바라는 모양이군. 그걸 약속한다면 반고의 최후의 유물인 도끼를 내어주겠다. 그런 의도인가? 미안하지만 나는 그럴 생각은 없네."
그러자 기린은 정곡을 찔린 듯 흠칫하더니 말했다.
[…… 당신은 충분한 자격이 있는 걸로 알고 있소. 황제가 [무언가] 대단한 의식에 도전하고 있다는 건 눈치채지 않았소? 당신이 또한 그의 경쟁자가 된다면 어쩌면.]
"과연. 이런 구석에 있어도 알건 다 안다는 소리인가……... 허나 내 대답은 달라지지 않아."
[어째서요?]
복희는 단호하게 대꾸했다.
"멍청한 짓이기 때문이지."
[?!]
기린이 놀란 듯하자 복희가 말을 이었다.
"외신이란 존재들은 위대하지만 대개 방관자에 불과해. 그마저도 관측이 세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에 직접 간섭하는 게 너무 어렵지. 무엇보다도 신좌에서 느꼈던 바로는, 그들조차도 위대한 춤사위의 일부에 지나지 않아."
[……]
기린이 궁금한 듯 침묵하다가 복희에게 질문했다.
[당신은 신좌에 있을 때의 기억이 남아 있소?]
"어렴풋이는. 그러나 마치 안개에 낀 것처럼 흐릿하고 명확하지 않아. 그래…… 비유하자면 백일몽(白日夢) 같은 느낌이지."
[백일몽이라.]
"그 백일몽 속에서 외신들은 끊임없는 춤을 추고 있었다. 실로 장엄하되 불경(不敬)한…… 그들은 그것 만이 삶의 이유인 걸로 보였지."
복희는 나직이 말을 이었다.
"그런 외신이 되기 위하여 모든 삶을 쏟아붓는다? 그건 어리석어. 나는 신좌를 떠나 이 세상에 내려온 걸 후회하지 않아."
[나는 복희, 당신이 이해가 가지 않소. 그 외신의 절대적인 힘이 필요 없다는 말이오?]
"굴레를 벗어난다 하여 또 다른 굴레가 없으리라는 보장이 어디 있지? 힘이란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니 나는 무한한 쳇바퀴 속에서 혼돈의 약육강식을 갈음하는 자가 되고 싶지 않군."
[……]
"이해 못 해도 상관없네. 어차피 내 혈육인 여와조차 내 생각을 다 이해해주는 건 아니니까."
기린은 곤란하다는 듯 잠시 침음성을 흘리고는 말했다.
[…… 좋소. 당신의 생각대로 이 공간에 반고의 도끼가 존재하오. 그러나 당신이 그런 생각인 이상 나는 그 유물을 당신에게 줄 생각이 없소.]
"이제야 얘기가 좀 진전되는군. 나는 처음부터 있다는 사실만 확인하면 되는 거였네."
기린이 부정적인 말을 했음에도 되레 복희는 기분이 좋아진 듯 싱긋 웃고는 내 쪽을 쳐다보며 말했다.
"백웅. 내가 실체를 드러낼 테니 훔치게."
응?
난데없는 말에 내가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복희가 갑자기 자신의 권능을 모아서 양손 위에 빛의 구체를 떠올렸다.
쿠오오오오!!
그 빛의 구체에 점차 강한 힘이 응축되는 게 느껴졌고, 옆에서 쳐다보던 흑웅이 놀라워했다.
[저게 복희의 진력(眞力)!]
기린은 복희가 뭘 하려는지 깨달은 듯 깜짝 놀라서는 버럭 호통을 쳤다.
[복희!! 그만두시오!]
번쩍 - !!
다음 순간, 복희가 모아놓은 빛의 힘이 터져 나오더니 사방이 빛으로 가득 차 버렸다. 광성이 가득하던 어둠의 우주가 온통 빛으로 물들어 버린 것처럼 환하게 변한 것이다! 어둠이 가득하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듯, 빛이 너무 많아서 도리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나는 뜬금없이 일어난 갑작스러운 사태에 어찌할 줄 몰라서 당황하고 있었는데, 바로 그때 뭔가가 느껴졌다.
'어!!’
무척이나 꽉 막혀 있는 듯한, 절대적인 밀도(密度)를 지닌 '뭔가'가 공간 저편에 있었다. 바닥에 꽂혀 있는 듯한 그것은 틀림없이 근접병기인 도끼의 형태를 띠고 있었고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 윤곽이 빛을 따라서 점점이 이어지고 있었다.
복희의 말이 이거였구나!
나는 그 순간 아무 생각도 하지않고 공간 저편으로 뛰쳐나갔다.
[이놈!]
그런 내 기척을 뒤늦게 감지한 듯 기린의 뇌전이 내 등짝을 향해 날아왔다.
쿠콰쾅!!
‘끄윽!!’
말 그대로 광속인 데다 그 위력도 어마어마했다. 정면에서 상대했더라도 도저히 피할 방법은 없었으리라!!
뇌구(球)가 한번 내 등짝을 친 것뿐인것 같은데 옆구리 살이 도려내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나마도 흑웅이 방어막을 전개한 덕에 그 정도 피해로 끝난 것이지, 방어막 없이 맞았다면 아마 전신이 분해 당했으리라.
파밧
나는 이를 악물고는 다시 한번 크게 뛰었다. 그리고 내 팔의 범위까지 도끼가 닿았을 때, 나는 망설임 없이 초수를 전개했다.
만상지투(萬象之倫)!
덥썩, 하는 소리와 함께 도끼의 손잡이가 내 손에 붙잡혔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도끼를 내 쪽으로 끌어당겼는데 그 순간 환청 같은 게 내 머릿속에 들려왔다.
[…… 네가…… 아니다!!]
화르륵!!
"끄악!!"
그 순간 내 팔이 불에 타는 것 같았다. 외팔이였는데 남은 한쪽 팔까지 불에 타면 어떻게 해야 할지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아득해졌고, 나는 그만 도끼를 손에서 놓아버릴 뻔했다.
'이, 이 불꽃은 뭐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건 거신족이 지닌 불꽃이 아니고 아마테라스의 불꽃과도 완전히 다르다. 완전히 다른 차원의 힘! 그렇기에 흑웅이 내 몸을 신력으로 보호하고 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내 팔을 통 째로 태워 버릴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부상을 입자 복희가 내게 외쳤다.
"내게 던져라!"
"받으십쇼!"
휘리릭!
나는 망설임 없이 복희에게 도끼를 집어 던졌고, 복희는 그대로 팔을 들어 올려서 도끼날부터 손으로 잡았다.
파악
"헉! 괜찮으신…… 어라."
도끼 손잡이가 아니라 날을 붙잡아서 복희의 손이 잘리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복희의 몸에는 전혀 피해가 없었다. 되레 복희는 여유롭게 도끼를 잡아서는 붕붕 휘둘러보기까지 했다.
"나한테 무기는 필요 없다 생각했는데 이건 꽤 쓸 만하겠군."
나는 급히 복희에게 말했다.
"기, 기린이 화난 것 같은데요!"
쿠구구구…….
아닌 게 아니라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던 기린이 어느새 원래 크기에서 무려 수십 배나 거대해져 있었다. 또한 기린의 눈에는 청광(靑光)이 번쩍거리고 있었고 흑웅조차 움찔할 정도로 강대한 뇌전의 기운이 구름처럼 퍼져서 기린의 전신을 둘러싸고 있었다. 나는 그런 기린의 신력을 느끼자마자 직감했다.
'맙소사... 저번에 영귀가 기린으로 변신했던 건 어린애 장난이 아닌가?!’
그때도 막강하긴 했지만 지금 분노한 기린의 힘은 상상을 뛰어넘고 있었다. 흑웅이 내 배후에 꼭 붙어서 전력으로 신력의 힘을 전개하고 있었지만, 기세에서 눌리는 걸 피하지 못할 정도였다. 인간이라면 절대지경이고 뭐고 기린 근처에 일렁이는 뇌전에 스치기만 해도 전신이 소멸당하고 말리라.
심지어 아직도 힘이 강해지고 있는 중이었다. 인간은커녕 대라신선 수준에서도 감히 상대하겠다는 말을 꺼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흑웅이 중얼거렸다.
[응룡과 기린이 삼황오제에 버금간다는 건 괜한 소리가 아니었군…… 게다가 여긴 기린의 차원이니 그 이 상일 수도 있겠소.]
'젠장!! 복희가 뭔 대책이 있으니까 저질러보자고 한 거겠지?!'
[나도 모르겠소.]
‘……’
그러자 도끼를 들고 있던 복희가 태연히 말했다.
"기린이여. 그렇게도 혼돈을 타도 하길 원한다면 내 자격을 시험할 생각하지 말고 그대가 직접 세상으로 나오는 게 좋을 것이다. 나는 내 스스로를 믿기에 그대가 쓰지도 않을 반고의 도끼를 취하는 노력까지 하지 않았는가?"
[궤변이구나…... 복희!! 너와 저 좀도둑놈 모두 가만두지 않겠다!!]
쿠구구구 - !!
격렬하게 분노한 기린이 양 뿔이 거대한 뇌전의 기력을 모으는 게 보였다. 그 뇌전은 잠시 후 빛의 기둥을 만들어내며 복희에게로 쏘아져 나갔다.
[그 잘난 신술로 어디 막아 보아라!!]
쿠콰콰쾅!!
어마어마한 섬광과 함께 공간 전체가 폭발한 듯했다. 나와 흑웅은 그 폭발의 여파 때문에 그대로 휘날려서 뒤로 날아가 버렸고 순간적인 파괴력이 어느 정도인지 직감하고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씨발! 이, 이거 아무리 흑웅이라도 정면으로 맞으면……’
[그렇소. 내 방어력으로는 아무래도 못 막을 거요. 별을 날려 버릴만한 공격이란 말이 딱 어울리는구려.]
'야 이거 큰일 난 거 아냐?!'
[…… 자기 차원에 있는 사대신수니까 지금의 나보다는 강할 수밖에…… 허나 다행이구려.]
이어진 흑웅의 말에 나는 적지 않게 안심되는 걸 느꼈다.
[복희는 막아냈소.]
그 말대로였다. 기린의 공격에 정면으로 맞선 복희는 몸에 상처 하나 없이 기린의 공격을 버텨낸 것이다! 뇌전으로 인한 연기가 걷히고 나자 복희는 자신의 한쪽 손에 들려 있는 도끼를 붕붕 휘두르더니 말했다.
"당연히 신술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자네의 전력을 다한 뇌전을 막을 수 없지. 나라도 그런 오만은 부리지 못해. 하지만 이 도끼로 일원(一元) 의 힘을 끌어내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네."
일원?
처음 듣는 힘의 개념에 내가 어리 둥절할 때 기린은 경탄한 듯 말했다.
[…… 그 도끼의 힘을 끌어낼 수 있단 말인가.]
"자네 입으로 내가 반고의 적자라 하지 않았는가? 처음부터 이 도끼를 쓸 수 있는 건 나나 여와밖에 없지."
[……]
복희는 도끼를 자기 등 위에 얹으며 말했다.
"성질 그만 부리게. 어쨌든 내가 황제를 타도하고 세상을 더 좋게 만들면 될 일이 아니겠나? 이 도끼는 내가 가져가지."
[후우……]
잠시 후 기린은 거대화한 몸뚱이를 다시 원래대로 되돌렸다. 그러고는 나직이 말했다.
[그냥 내 말에 동의하기만 하면 줬을 건데 굳이 훔쳐가는 식으로 상황을 만들다니.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이오?]
복희가 어깨를 으쓱했다.
"싫은 건 싫은 거야. 우리 중 누구도 우주의 진리를 감히 알고 있다 할 수 없는데 내게 약속을 받으려는 것도 가당치 않지. 자네가 무슨 자격으로?"
[난 이 세상의 미래가 걱정될 뿐이오.]
"아까도 말했지만 이런 데 처박혀서 절대중립을 주장하는 주제에 당치도 않은 오지랖은 하지 말게나. 하려거든 나처럼 끝까지 나서든지."
[……]
기린이 할 말이 없는 듯 침묵하자 복희는 그의 눈치도 보지 않는 듯 또다시 말했다.
"또 하나. 이번 일로 삐져서 황제 편에 서지 않았으면 좋겠네. 자네는 그런 짓을 하지 않으리라 생각되긴 하지만."
[그런 짓은 하지 않소.]
"아주 좋군. 그럼 마지막으로 하나 부탁해도 되겠나?"
그러자 기린은 기가 막힌다는 듯 외쳤다.
[부탁?! 이런 난장판을 쳐놓고 감히 그럴 염치가 있다니!]
"저기 백웅에게 가호 하나 주게나. 그것만 들어주면 우린 바로 여기서 나가주지."
[미친 소리 하지 마시오. 내가 저딴 인간에게 가호를 줄 거라 생각하시오!]
"그래?"
이어진 복희의 말에 기린은 얼이 빠진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안 주면 여기서 안 나갈 건데 나랑 계속 놀고 싶다면 그렇게 해보게나."
[!!]
복희는 빙긋 웃었다.
"우리 편이 되라고 강권하는 것도 아닌데 이 정도 조건이면 완전 거저먹기군. 나 같으면 그냥 백웅한테 가호 한 번 주고 불청객을 쫓아내는 현명한 선택을 할 거라 생각되네."
기린은 기가 막혀 했다.
[당신…… 용신 맞소? 이렇게 막 나갈 줄은 몰랐소!]
"아까도 말했지만, 자네의 기준으로 날 재지 말게. 자네 눈에 잘 보이는 것과 세상을 구하는 건 완전히 다른 얘기니까."
[크으으윽!!]
기린은 극도로 분노한 듯 몸을 크게 떨었다. 공간 전체가 기린의 분노 때문에 번개로 가득 찼고, 나는 번개의 파장 때문에 전신이 아려올 지경이 되었다. 내가 신력을 갖고 있지 않았다면 예전에 분위기만으로 사망했으리라.
한참 후 기린이 내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도둑놈이여.]
기린은 마치 씹어뱉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번개의 적성을 최대치로 올려주마.]
번개의 적성?!
나는 그 말을 듣자 기린에게 반문했다.
"번개에도 적성이 있습니까?"
[……]
기린은 나를 찬찬히 들여다보듯 심유한 눈빛으로 관조했다. 그리고 한참 후 말했다.
[이제 보니 네놈 자체가 강력한 번개의 영(靈)을 오랫동안 수련했구나. 그래서 내 공격에 내성을 갖고 버텨낸 것이로구나.]
"아……."
[인간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군.]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내가 그동안 수련했던 뇌신류의 무공이 생각났다. 막대한 천년설삼의 기운을 받아들이면서 꾸준히 힘을 강화시켰던 뇌령(雷靈)! 종래에는 그 뇌령이 500년 후 대웅제국 천재들의 힘으로 만들어진 구궁파천뢰에 의해서 강대한 뇌령을 몸 안에서 회전시키게 된 것이다. 세상에 나보다 더 강력한 번개의 힘을 보유한 자는 몇 되지 않으리라.
기린은 마치 깔보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허나 그 정도는 우주의 신에 비하면 하찮은 것이다. 내가 너에게 가호를 내린다면 그 어설픈 번개의 힘은 다른 차원에 진입하게 되리라.]
"오오오오!!"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흥분해서 주먹을 불끈 쥐고 외쳤다.
"다, 당장 그 가호를 주십쇼! 저한테 엄청 필요한 거 같습니다!"
기린의 뇌전은 내가 가진 뇌령과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났다. 태양과 반딧불 수준의 차이가 분명했고 당장 구궁파천뢰만으로는 흑웅이 다스리는 신력의 속성 중 하나에도 아득히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뇌전의 가호를 받게 된다면 그 힘이 크게 증폭 되어서 내 모든 무공과 신력이 진일보할 수도 있다!
그러자 기린이 뿔을 스윽 들이밀며 말했다.
[그냥 내 가호를 밀어 넣으면 네놈은 전신의 피가 다 타 버리고 말 것이다. 번개의 힘을 최대한 활성시키거라.]
"아…… 네!"
나는 기린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 채고는 곧장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전신의 기가 마구 요동치면서 내 의념천주에 반응하기 시작했고, 나는 이윽고 구결에 따라서 진기를 증폭시키기 시작했다.
구궁파천뢰(九宮破天雷)!
치지지징! 치지징!!
몸 안에서 뇌구가 마구 날뛰면서 이동하는 게 느껴진다. 이 속도가 빨라지면 빨라질수록 구궁파천뢰의 위력도 극대화되는 것이다. 또한 뇌기가 활성화될수록 뇌령의 힘이 외부에 강하게 표출되니 이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었다.
내 뇌기가 구궁파천뢰로 강력하게 증폭되기 시작하자 기린이 또다시 말했다.
[거기 뒤의 정령이여. 신력의 방어막을 거두어라.]
[……]
[신력이 막으면 방해되어 힘을 제대로 전달하기 힘들다.]
[알았소.]
흑웅이 휙 하고 손을 짓는 게 보였다. 아무래도 흑웅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내게 방어막을 쳐주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긴 기린을 완전히 믿을 수 없으니 당연한 거겠지 만 그래도 나는 흑웅에게 내심 고마움을 느꼈다.
신력의 방어막도 해제되자 그제야 기린이 강하게 땅을 박찼다.
[죽어…… 아니 가호를 받아라!!]
기린님, 방금 이상한 말을 하신 거 같은데?!
푸욱!!
다음 순간 기린의 뿔이 내 심장 부분을 관통했다. 그러나 물리적 관통이 아니었으며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고, 마치 영체가 실체를 투과하는 것처럼 뿔이 주욱 늘어나서 등 뒤쪽까지 뻗어 있었다. 그리고 뿔을 내 심장에 꽂은 기린의 눈이 번쩍거리며 청광으로 빛났다.
[나 기린의 이름으로 명한다…… 천상(天上)의 뇌령(雷靈)이여, 오행(五行)의 순력(純力)이여, 이 인간에게 강림하거라!]
파지지직!!
다음 순간 뇌령의 구가 순식간에 몇 배나 되는 크기로 팽창하는 게 느껴졌고, 본디 몸의 기혈을 따라 회전하던 뇌령은 길을 막아 버릴 정도로 거대해져서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전신이 뇌기로 꽉꽉 차 버린 느낌 때문에 내가 비틀거렸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고 마치 금방이라도 터져 버릴 풍선이 팽창하는 것처럼 거기서 또다시 몇 배나 커지는 게 느껴진 것이다!
"크억…… 크…… 아아아악!!"
나는 비명을 질렀다. 혈맥의 말단에서부터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 때문에 정신이 아득해졌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언제 이 막대한 뇌령이 몸 안에서 터질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약간의 공포마저 느껴졌다.
'세…… 세상에…… 내 내공으로 감당이 불가능한 뇌기라니!!’
천년설삼을 몇 번이나 먹었고 호법사자와도 장기전이 아니면 별 차이 안 날 정도의 내공을 지닌 게 바로 나였다. 그 막대한 내공을 바탕으로 구궁파천뢰의 패도적인 뇌기 또한 무척 쉽게 안정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내공의 힘으로도 다스려지기는커녕 전신이 부풀어 오를 정도의 압도적인 뇌력이라니! 여태 내가 다스려왔던 뇌기의 몇십몇 백 배를 뛰어넘는 게 틀림없었다.
주륵!
입에서 저절로 선혈이 흘렀다. 내장이 찢어지면서 생긴 울혈인 것이다. 내가 비틀거리고 있을 때 기린이 서서히 자신의 뿔을 내 심장에서 뽑아내며 말했다.
[네가 얻은 것은 태양계(太陽界) 세성(歲星)을 감싸는 뇌전의 영! 인간계의 뇌전 따위와는 차원을 달리 하느니라!]
퍼엉!
다음 순간 내 한쪽 눈깔이 뇌기를 이기지 못하고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앞으로 튕겨나왔다. 기린은 자기 발 밑을 데구르르 구르고 있는 내 눈알 을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최상위령의 정수를 뽑아 네게 강림시켰으니 이제 너는 더없이 강력한 뇌전의 가호를 얻게 되었다!]
"내…… 내 눈알……."
[내게 바치는 거냐? 성의가 가상하구나.]
퍼억.
기린은 그대로 발굽으로 내 눈알을 밟아서 터뜨려 버렸다.
"……."
내가 멍청히 서 있자 옆에 있던 복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누가 인간에 관심 없는 고대신 아니랄까 봐 우악스럽군. 임시처치를 해주겠네, 백웅."
신술(神術)
선천팔괘(先天八卦)
우웅 -
다음 순간 내 전신을 팔괘형상이 둘러쌌고, 나는 급격히 내 몸을 폭발시킬 것처럼 날뛰던 뇌전의 힘이 한순간에 쑤욱 가라앉는 걸 느꼈다. 뿐만 아니라 눈에서 느껴지던 격통 또한 씻은듯이 사라졌기에 나는 크게 기뻐서 복희에게 외쳤다.
"가, 감사합니다!"
"임시처치일 뿐일세. 팔괘가 자네를 대신해서 뇌기의 균형을 잡아준거지만 그 술법은 영구적으로 유지되지 않아. 그걸 다스릴 방법은 자네 스스로의 힘으로 얻어내야 해."
"네? 그 말은 ……."
"오행의 원리에 따라 금극목(金克木)이 되겠군. 금기(金氣)를 증대시켜 균형을 맞추거나 그것도 아니면 뇌전의 속성을 분해하여 원하는 대로 신술로 분산시키던가…… 그런데 어느 쪽이든 꽤 힘들어 보이는군."
"……."
"확실히 지금 자네 역량에서는 감당 못할 수준의 가호야. 가호라기보다는 정령강림에 가깝군. 어찌 처리할지 기대하겠네."
"기대라니요?! 그냥 계속 선천팔괘를 걸어주시면……."
"적합하지 않은 상황에 신술을 내 마음대로 남발하면 나도 인과율이 소모된다네. 나는 지금 자네와 약속했던 대가를 치르는 중인데 계속 자네에게 술법을 걸어준다면 자네가 내게 내놓아야 할 대가가 역으로 생기게 될 텐데 괜찮나? 뭐, 나야 나쁜 일이 아니니까 승낙하겠네만."
"어……’
나는 복희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그 말대로라면 선천팔괘로 임시봉합을 계속 할 수 있지만 복희에게 계속 목줄이 잡혀서 끌려가게 되고 내가 가진 걸 내놔야만 한다는 소리가 아닌가? 아무리 복희가 내게 있어서 아군이라 해도 그렇게까지 종속적인 관계가 과연 맞는것인지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었다.
‘이, 이런 제길…… 가호 괜히 받았나?'
내가 멍하니 서 있을 때 옆에 있던 흑웅이 말했다.
[주인. 걱정 마시오. 복희의 말은 그저 주인이 갖고 있는 내공과 의념 만으로 세성의 뇌기를 버틸 때의 이야기요. 지금까지는 뇌기가 흡수되도록 지켜봤지만 이제부터는 내가 신력으로 주인을 보호하겠소.]
파앗!
흑웅이 내 어깨에 손을 올리자 더욱더 상태가 나아지는 게 느껴졌다. 고통은 완전히 멎었고 심지어 출혈도 멎은 것이다. 내가 한결 홀가분해져서 밝은 표정이 되자 흑웅이 손을 까닥거렸다.
[눈도 쓸데없이 훼손되어 있을 필요는 없지.]
쉬익!
"……!!"
다음 순간 내 눈이 원상복귀되어 있었다. 내가 놀라서 흑웅을 바라보자, 흑웅이 태연하게 말했다.
[별거 아니오, 주인. 외팔이는 그렇다 쳐도 외눈깔은 좀 그렇지 않소?]
"너, 방금 어떻게……."
그러자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복희가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신력을 발현하여 [작은 굴레]를 돌렸는가. 하긴 네 위격이라면 충분히 할 만 하지."
[알아보셨구려.]
복희는 힐끔 옆에 있던 기린을 쳐다보았다.
"기린, 자네한테 바친 공양물이 아니니까 또 굴레를 수정하지 말게."
[흐음.]
기린은 언짢은 듯 침음성을 흘렸다. 아무래도 복희가 따로 말을 안 했으면 저놈도 [작은 굴레]를 돌려서 눈깔을 받아가려 했던 모양이었다.
"헌데 언제까지 신력을 대신 소모해서 버틸 수 있겠나? 우주급 상위령의 뇌기를 버티는 만큼 신력이 계속 소모될 터인데."
[충분히 감당할만하오. 그 전에 주인과 함께 방법을 찾아보겠소.]
"충신이로군. 부러울 정도야."
복희는 훗하고 웃고는 기린에게 말했다.
"이만 가보겠네. 뭔 일 있으면 다시 찾아오지."
[오지 마시오!]
파앗 - !!
잠시 후 나는 복희의 차원이동술법을 따라 기린이 있던 오행의 중앙을 빠져나왔다. 빠져나온 곳은 이제 완연히 밤이 되어 버린 해안가였다. 나는 해안가를 둘러보며 말했다.
"여긴 아까 영귀의……."
"그렇네. 섬처럼 생긴, 영귀의 등딱 지위일세."
"영귀와 또 얘기하실 게 있습니까?"
"당연히 그래서 온 게 아니겠나."
나는 복희의 대답에 의아해했다.
"지금 사대신수 중 셋을 만났잖습니까? 그럼 마지막으로 봉황(鳳凰)을 만나러 가시지 않는 겁니까?"
"……?"
복희는 도리어 내 말에 어리둥절해 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더니 잠시 후 뭔가를 깨달은 듯 피식 웃고는 말했다.
"흠…… 그렇군. 자네가 과거사를 얘기할 때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는 데, 자네는 봉황이 뭔지 여태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군."
"네? 봉황이 왜요?"
"하긴 봉황 같은 건 그 실체를 알기 어려울거야. 아무리 전생자라도……."
그렇게 중얼거린 복희가 잠시 후 크게 소리를 쳤다.
"영귀, 나오게! 할 말이 있네."
스윽
그러자 회색 머리칼의 청년으로 변신한 영귀가 해안가 저편에서 걸어왔다. 우리 앞에 선 영귀가 눈에 이채를 띄며 말했다.
"교섭이 실패하게 되나 소성(小成)을 얻게 된다는 점괘를 봤는데, 소성이 아니라 대성(大成)을 얻으신 듯하군요."
영귀의 시선은 복희의 손에 들려 있는 반고의 도끼를 향해 있었다. 복희는 씩 웃으며 말했다.
"소성이 맞네. 이 도끼 하나로 모든 판도를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말이야."
"그건 아마 반고의 유산일 터…… 충분히 가능할 것입니다."
"황제는 이런 유물 하나로 쓰러뜨리지 못해. 그라면 언젠가 반고 본체도 쓰러뜨릴지도 모르지."
그렇게 대꾸한 복희가 말했다.
"아무튼 자네가 점괘를 보았다면 나도 예측을 해 보지. 자네는 지금 내 편이 되고 싶어서 내 부름에 응한 것이라 생각하는데 맞는가?"
"후후…… 예측이 아니라 지혜겠지요. 그 말이 맞습니다."
"기린을 끌어들여야 한편이 되겠다 했을 텐데 그 약속을 어겨주니 기쁜 마음을 감출 수 없네."
복희가 짓궂게 말했지만 영귀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끌어들이진 못했어도 기린에게서 그만큼 얻어낼 역량이라면 충분히 황제를 타도할 힘을 가지고 계신다고 봅니다. 또한 반고의 증명을 얻었으니, 저는 당신을 진정한 반고의 후계자로 인정할 수 있습니다."
"유연해. 그래도 자네는 기린보다는 낫군."
흡족한 듯 중얼거린 복희가 말을 이었다.
"영귀. 사실 자네를 찾아온 건 굳이 영입하기 위해서만은 아닐세. 봉황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어서야."
"그럴 것 같았습니다. 그는 대화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니까요."
대화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고?
내가 고개를 갸웃하고 있을 때 복희가 말했다.
"봉황을 영입하려는 생각은 하지도 않네. 그러나 하기에 따라서는 그를 황제와 싸울 때 결전병기로 투입할 수 있겠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복희님이라 하더라도 봉황을 섣불리 대하면 화(禍)를 입게 될 것입니다. 그는 나머지 삼대신수인 우리와 처음부터 다른 존재니까요."
"나도 알고 있네. 그래서 자네에게서 부담 없이 그를 소환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싶어서 온 것이지."
"……."
영귀는 침묵하며 고민했다. 그러고는 말했다.
"소환은 불가합니다. 그를 굳이 만나려 하거든 경계(境界)에 가셔야 할 겁니다."
복희는 영귀의 말에 흠칫 놀란 것 같았다.
"생각지도 못했네. 그렇게 먼 곳에 있었단 말인가?"
말했듯이 다른 신수들과 근원이 다른 존재입니다. 그는 물질계는커녕 이 세상 대부분의 차원에 연(緣) 이 거의 없습니다."
"…… 굉장하군. 어쩌면 그는 생각보다 더 대단한 존재일수도 있겠네."
복희는 진심으로 감탄한 듯했다.
그리고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흑웅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이해가 가지 않는군. 봉황이 뭐길래 대화도 할 수 없고 세계의 저편에 혼자 웅크리고 있다는 말이오? 그리고 삼황인 복희 당신을 비롯하여 삼대신수들이 외경(畏敬)하는 이유도 알 수가 없소.]
"흠, 그런가? 굳이 말하자면 봉황이 아주 먼 옛날에 딱 한 번 모습을 드러낸 적이 있었기 때문일세. 아마 수억 년 전 일일 거야."
[그런 적이 있었소?]
"그래. 딱 그 한 번의 출현만으로 봉황은 사대신수이자 사대신수 중 최강으로 인정받았고, 자네들이 삼황오제라 지칭하는 우리들 신왕(神王)들도 그 사실을 모두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네."
[이유가 무엇이오?]
이어진 말에 나와 흑웅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수억 년 전, 출현하자마자 단 한 번의 날갯짓으로 이 성계(星界)에 난무하던 [지배자]들을 수십 마리 이상 태워 버렸기 때문일세."
[옛 지배자] 여럿을 순식간에 불태우다니.
봉황이 그렇게 강했다고?!
[음!!]
나는 물론이고 흑웅도 꽤 놀란 기색이 보였다. 복희는 우리의 반응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 당시 태양계에 와 있던 많은 지배자들은 그 위격(位格)을 보고 다들 우주 어디에선가 엄청나게 강한 존재가 찾아왔다고 여겼고, 그 구천현녀, 그리고 온갖 질서의 영수들에게 내려앉는 순간…… 그들은 훨씬 강해져 버렸네."
"……!!"
봉황의 깃털?!
"이 우주가 넓고 수많은 은하계와 항성계가 있으나 이 지구의 삼대신수는 어딜 가도 [지배자]의 위격으로 대우받을 수 있는 최상위 존재들 일세. 그리고 이 조그마한 암석형 행성따위에 이만큼 강력한 정령들이 몰려 있는 건 우주적으로 전례 없는 일인 것이지."
그렇게 말하던 복희가 문득 우스운 듯 피식 웃었다.
"정말이지…… 진정한 의미에서 신수왕(神獸王)이라 불릴 수 있는 건 아마 봉황이 아닐까 싶을 정도야. 본디 혼돈의 신들은 정령들보다 압도적으로 강했는데 설마 힘 싸움의 축으로 인정할 정도로 정령들을 강하게 만들어 버리다니."
"……."
전혀 알지 못했던 사실이다. 그 말에 흑웅이 곰곰이 생각하다가 옆에 있던 영귀에게 질문했다.
[영귀여. 복희의 말이 정녕 사실이오?]
"네, 맞습니다. 사실 이 지구의 현재 질서는 봉황이 만들어낸 것과 다름이 없지요. 우리 정령들의 힘이 약했다면 진작 혼돈의 신들이 생명 따위 신경 쓰지 않고 별을 파괴시켜 버렸을지도 모르는데 그나마 문명이 이어져 오고 있는 건 그 덕분입니다."
[흠…… 그렇게나 강력한 축복이 있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소.]
"사실 저는 이게 축복이 아니라는 생각을 합니다."
[무슨 말이오?]
스스스 -
영귀는 서서히 신력을 끌어내더니 자신의 몸 주변에 주황색 기운을 흘려내었다. 급격히 강해진 영귀의 기운을 보자 그가 역시 신적 존재라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힘을 방출하고 있던 영귀가 말했다.
"지금 저는 봉황의 깃털 덕에 강해져 있음에도 그 존재를 인지할 수도 찾을 수도 없습니다. 억겁에 가까운 세월동안 온갖 술수로 시도해봤음에도 불가능했지요. 그리고 내린 결론은 두 가지입니다."
영귀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축복을 내린 게 아니라 봉황이 자신의 진신내력(眞身內力)을 직접 떼어 우리에게 불어넣은 것이며, 또한 직접 자신의 힘을 나눠줬음에도 그 힘이 너무 상위차원에 존재하기에 우리들 신수는 그 힘의 근원을 인지 조차 할 수 없다는 겁니다."
영귀의 말에 복희가 화답하듯 부채를 촥 펼쳤다.
"후자는 모르겠지만 전자는 나 또한 그리 생각하네. 축복만으로는 상위존재를 더 강화시키는데 한계가 있어. 본디 봉황은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지만 자기 힘의 일부를 직접 떼어서 신수들에게 나눠준 거 겠지."
그 말에 흑웅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왜 그리해야 한단 말이오? 혹시 봉황에게 그 행동의 이유를 물어본 자가 있소?]
"없네. 말했듯이 봉황은 그 한 번의 행사 이후 완전히 은거해서 자취를 감추었기 때문일세. 억년의 시간 동안 다시 출현하지 않을까. 다들 기대했지만, 그는 정말로 종말까지 얼마 남지 않은 지금까지도 나오지 않았어."
[그런 봉황이 지금 '경계'라는 장소에 있다는 거군.]
"바로 그렇네."
생각보다 봉황에 대해 많은 정보를 얻은 것 같았다. 나는 옆에서 듣다가 이해가 안 되어서 흥분해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봉황은 천계의 영수 중 하나였고 또 율주는 봉황을……."
뻐끔뻐끔.
그 순간 알 수 없는 힘 때문에 내 말문이 막혀 버린 것 같았다. 내가 뒤를 돌아보자 흑웅이 조용히 하라는 듯 자신의 입 위에 손가락을 갖다 대고 있었다. 나는 흑웅이 내가 쓸데없는 말을 하기 전에 자제시킨 걸 알아채고 바로 입을 다물게 되었다. 확실히 이런 자리에서 율주 얘기를 해봐야 좋을 게 없는 것이다.
흑웅의 심어가 들려왔다.
[주인. 미래의 일과 어째서 모순이 발생하는지는 앞으로 우리가 직접 알아내야 하오. 아무리 복희와 영귀가 우호적이라 해도 그들에게 섣불리 누설했다가 어떤 파장이 일어날 지 모르니 어느 정도는 감추시오.]
[알았어.]
복희는 방금 전 내 말을 들은척만 척하며 영귀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아무튼, 좋네. 그럼 자네는 어떻게 해서 봉황이 소환 불가능하며 '경계’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나?"
"봉황은 종종 우리 신수들에게 현몽(現夢)하기 때문입니다."
"현몽? 그대들 신수들은 딱히 수면을 취하지 않을 텐데."
"봉황이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 종종 우리를 잠들게 하여 꿈속에서 만납니다."
"호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