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복희가 여기 왜 나타난단 말인가?!
나는 극도로 당황했지만, 다행히도 이 자리에는 흑웅이 함께 있었다. 흑웅의 힘이 있다면 만일의 경우에도 복희가 공격해도 살아남을 수는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자 빠르게 마음이 안정되었다. 그리고 나를 한동안 주시하던 복희가 흑웅쪽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말했다.
"이건 신인지 정령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군. 우주의 섭리가 너 같은 존재를 쉽사리 허용치 않을텐데 근원이 무엇인가?"
설마 한눈에 흑웅의 본질을 통찰했다는 건가?!
내가 흠칫하자 흑웅이 팔짱을 낀 채 되레 느긋한 목소리로 여유를 보였다.
[내 근원을 궁금해 하실 게 있소? 질문은 이쪽이 먼저 했으니 찾아온 용건부터 말씀해주시오.]
"용건이라면 간단하지. 전륜성왕(轉輪聖王)의 대전사(對戰士)로 나섰던 자들이 어떤 자들인지 얼굴이라도 보러 내방했다네."
[……]
흑웅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올 것이 왔다는 난감함이 그대로 느껴 졌다. 나 또한 복희가 찾아온 이유 를 알게 되자 큰일 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명계에서의 싸움이 이렇게 빨리 소문이 났다는 말인가?'
아니 그것보다 유소 그놈은 당연히 복희가 찾아올 것도 알고 있었을 텐데 뭐라고 한마디 언질이라도 해주지 않았단말인가! 복희가 올 걸 알고 있었다면 미리 피하거나 대처할 방법이라도 생각했을 텐데!
내가 속으로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흑웅이 말했다.
[누구에게 듣고 이 자리에 왔는지 궁금해지는군. 설마 염제 신농이 발설했소?]
그러자 흑웅의 반문에 복희가 눈에 이채를 띄었다.
"호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이 탁록은 염제 신농의 가호 아래 있는 대지. 신농의 이목을 피해서는 아무리 당신이라도 몰래 접근할 수 가 없으며 내부의 정보를 얻을 수 없소. 하물며 질서의 용신인 당신과 죽음의 지배자 전륜성왕이 친한 사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구려]
"일리있는 추론이야. 제법 머리가 좋군."
복희는 훗 하고 웃더니 말을 이었다.
"그 말대로일세. 얼마 전 그대들의 싸움이 수많은 차원계에 진동을 울렸고 격 있는 자들은 위맹한 전투의 파동에 반응했지. 허나 명계의 일을 쉽사리 들여다보지는 못했고, 나는 그 일에 신농이 얽힌 걸 알고 그와 교섭하여 그대들의 정보를 받아낸 거라네."
[전륜성왕과 친하지 않다는 건 부정하지 않는구려]
"그자는 보통의 신격과 완전히 근원이다른 존재. 본래는 혼돈의 편에서 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지. 전륜성왕과 친한 자는 위대한 [아버지]의 회귀를 갈망하는 광신도뿐."
그렇게 대꾸한 복희가 문득 자신이 들고 있던 부채를 내 쪽으로 향하며 말했다.
"백웅이여. 그대는 흑웅의 주인일터. 그러나 [옛 지배자]조차 저렇게 어마어마한 정령을 거느리는 건 불가능에 가까울진대 그대는 인간이구나. 도대체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려줄 수 있겠느냐?"
"……!!"
"하는 김에 어째서 내 모습을 하고 있는지도."
올게 왔나.
'미래에서 왔다고 대답하면 대체 어떻게 일이 꼬일지 짐작도 가지 않 는다!!'
이미 이 세계에서 유소와 전륜성왕 정도는 내가 미래에서 왔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복희한테 까지 알려줘도 되는 것일까? 일이 어떤 식으로 꼬일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으므로 망설여질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왜 이렇게 생각이 꼬이지?
유소 그놈은 대체 무슨 속셈이야? 미래를 내다본다면 이 상황이 올지 알고 있었을 텐데, 내가 복희에게 진실을 말해도 상관없다는 건가? 다른 예지자처럼 자기 뜻대로 미래를 통제하려는 욕망이 없다는 뜻인가?
'짜증 난다…….'
나는 그렇게 복잡한 고민을 하다가 문득 복희의 말에 엉뚱한 대답을 해 버리고 말았다.
"모든 것을 예지할 수 있다면 자신이 뭘 할지 그 행동 또한 정해져 있다는 뜻이오?"
"으음?"
"아…… 그, 그게."
나는 엉겁결에 허둥지둥 대며 손을 휘저었지만 이미 말을 해 버린 후였다. 그러자 복희는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예지능력자의 모순을 내게 묻다니 재밌군. 그 질문에 대답해준다면 그대도 자신의 정체를 알려주겠는가?"
"…… 생각해보겠소."
"마지막으로 읽어낸 가장 먼 미래가 어떤 미래에 도달했느냐에 따라 다른것이라고 생각하네. 그 미래가 희망이라면 예언자는 자신이 할 행동을 바꾸지 않을 것이며 절망이라면 행동을 무조건 바꾸겠지."
"내 말은 그게 아니라 미래를 계속 읽는다면 자기가 할 행동이 정해져 있다는 건데 그럼 마치 꼭두각시처럼……."
"후후후후!! 아주 순진한 생각을 하고 있군."
"네?"
나도 모르게 존댓말로 반문을 하자 복희가 피식 웃었다.
"예언자가 자신의 예언에 갇혀 버리는 걸 걱정하는 모양인데 예언자들은 그렇게 순진하지 않아. 방금 말했듯 자신이 읽어낸 가장 먼 미래가 희망이나 절망이냐에 따라 예언자는 자신의 행동을 바꿀 수가 있지. 또한 미래란 아주 찰나지간에도 선택지가 분화하여 억만가지로 나뉠 수 있는 것이니, 그 영악한 자들이 그 사실을 모르겠나?"
"만일 자네 주변에 그런 예지능력자가 있고 자신의 운명에 속박된 것 처럼 보인다면, 그렇게 보이게끔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일세. 속박된 것 처럼 벗어나지 않는 게 자신에게 최대이득이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는 것뿐이야. 자기자신조차 운명의 장기말로 쓰는 게 불쌍하다고 여긴다면 그렇겠지만, 보통은 그럴 기회조차 없으니 가련하게 여겨야 할지는 의문이로군."
나는 복희의 말에 머리가 어지러워 지는 걸 느꼈다.
"어, 어렵군."
"흐음. 나는 자네가 어떤 상황에 있는지 대충 짐작이 갈 것 같다만……."
복희는 뭐가 재밌는지 싱글싱글 웃 고 있었다. 그러더니 흑웅을 쳐다보며 말했다.
"이렇게 하는 건 어떤가? 방금전 신력을 수련하는 것 같던데 내가 그대들에게 도움을 주지. 그 대신에 그대들의 내력을 내게 알려주는 걸세."
흑웅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신력은 그대가 없어도 수련할 수 있소. 그리고 주인의 의사가 중요하니 내 멋대로 결정할 수 있을 리도 없소.]
"네 주인은 예지자의 모순에 스스로 갇혀 버린 것 같군. 저 상태로는 자신에게 득이 될지 실이 될지 판단치 못하고 어떤 선택이든 후회를 남 길 걸세. 그대가 충신이라면 주군을 도와주는 게 낫지 않은가?"
[…….]
"그리고 처음부터 내게 교섭을 할 생각이었던 모양인데 충분히 관용있 게 받아주지. 그대들 정도라면 나와 교섭을 할 자격이 있으니."
[…… 못 당하겠군. 과연 지혜의 용신인가…….]
한탄하듯 중얼거리던 흑웅이 내게 말했다.
[주인. 유소의 일은 머리에서 잊어 버리시오. 어차피 그자는 최후의 선택이다가올 때까지는 방관자일 뿐이오.]
"헉!! 인마, 왜 그걸 말해!!"
나는 깜짝 놀라서 흑웅에게 외쳤다. 유소의 존재 또한 극비나 다름 없을 텐데 복희 앞에서 말해도 되는
것인가? 그러자 흑웅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유소는 주인을 걱정치 않는데 왜 주인이 그놈을 걱정한다는 말이오?]
"너……."
[방금전 복희가 주인에게 조언을 해준 것이오. 주인은 남을 의식하지 않고 늘 스스로만을 위해서 움직여야 하오. 그런데 이 자리에 있지도 않은 예언자인 유소의 존재 때문에 자기의 선택을 머뭇거리고 속박하게 되지. 그것 자체가 유소에게 말려들어가는 셈이니 그자의 예언능력따윈 신경 쓰지 말고 당당해지시오.]
"그놈은 모든 걸 예언하잖아. 그걸 신경 쓰지 말라고?"
[예언능력만으로 치면 황제 공손헌원이 몇백 배는 더 강력하겠지. 허나 그런 공손헌원조차 이 시대에 패주(扇主)로 올라서기 쉽지 않을 텐데 주인은 그럴만한 잠재력이 있지 않소?]
"……."
[결국 유소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 하오. 예언능력이 강력하더라도 그 자체로 힘이 되진 못하기 때문이오. 또한 주인은 그걸 이미 알고 있을 것이오. 그러니 예언자의 속박에서 벗어나시오.]
"그렇군!!"
나는 흑웅의 조언에 머리를 한 대 맞은 느낌이 들었다.
'유소의 예언능력을 알게 된 후에 너무 말려들어 간 것 같다.'
생각해보면 유소가 어떻게 예언을 하든 간에 나는 마지막에 그 예언을 뒤집을 수 있지 않을까? 유소는 내가 [큰 굴레]를 넘어왔다는 걸 나와 대면하기 전까지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고, 나 자신이 유소의 예언능력에 변수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유소가 언뜻 내 미래를 다 읽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 선택권은 내게 있다는 소리이리라!
좋아! 앞으로는 유소의 예언 따위 신경끄고 진행하겠어!
나는 흑웅의 말에 마음을 다잡은 후 복희에게 고개를 돌렸다.
"좋소! 하지만 우리의 개인정보는 무척 비싸기 때문에 거래를 해야겠소!"
"그거 좋지. 뭐가 필요한가?"
그 순간 내 머릿속에 뭔가가 스쳐 지나갔다.
'이 능력은 혹시 이렇게 쓰는 거 아닐까?'
그리고 나는 그 생각대로 곧장 한 손을 들어서 움켜잡는 자세를 취했다.
"상업의 귀갑이여!"
파앗!
갑자기 내 손 위에 귀갑이 떠오르자 복희가 꽤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호오, 그것은?"
나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지금부터 용신 복희와 거래를 하려 하니 정당한 거래인지 판단해줘!"
[알겠습니다. 상호동의했음을 확인 했습니다.]
위이잉
다음 순간 갑자기 나와 복희를 둘러싼 이공간(異空間)이 생겨났다. 그 이공간은 언뜻 아무것도 없는 것 처럼 보였지만 나와 복희 사이에 커다란 탁자와 의자가 있었고 마치 앉으라는 것처럼 보였다. 나와 복희가 각자 의자에 앉자 귀갑의 소리가 장 내에 울려 퍼졌다.
[공정거래 바랍니다.]
그 소리를 들은 복희가 재밌다는 듯 쿡쿡 웃었다.
"재밌는 능력이야. 상업(商業) 그 자체를 능력으로 만들어 버릴 줄은 몰랐군. 이 시대에 존재하지 않는 상업의 개념을 사용하는 것도 특이해."
"복희여. 당신이 아무리 언변이 탁월해도 여기선 안 통할 겁니다."
아마 이 권능을 써서 만든 공간에서 거래를 한다면 내게 바가지를 씌 우려는 놈에게 벌을 주게 되어있으 리라.
"그렇겠지. 그럼 어디 나부터 제시 해볼까."
촤악
복희는 앉아서 부채를 펼치며 말했다.
"백웅과 흑웅의 내역을 모두 아는 대신에 이쪽에서는 신력의 수련에 도움을 주고 신술을 전수해줄 것이며 질서의 신성들을 소개시켜서 가호를 받게 해 주겠다. 어떠냐?"
"헉!"
뭐, 뭐라구?
신력수련에 신술에 가호까지?!
굉장히 빠방한 조건이었기에 내가 깜짝 놀랐고 이윽고 상업의 귀갑이 허공에서 목소리를 울려 퍼졌다.
[대가는 타당합니다. 교섭에 응할 지를 선택해 주십시오.]
"그야 당연히……."
내가 승낙하려는 순간 옆에 있던 흑웅이 내 어깨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잠깐!]
내가 흑웅을 뒤돌아보자 흑웅이 말했다.
[주인의 비밀은 굉장히 가치 있으니 여기서 받아들이는 건 납득 할 수 없다! 좀 더 대가가 필요하다.]
그러자 귀갑의 목소리가 울렸다.
[상호동의가 있다면 조건을 변경 가능합니다.]
응?
뜻밖의 소리에 내가 고개를 갸우뚱 하자 복희가 왠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군. 이러니저러니 해도 시전 자에게 이득이 되는 권능인건가? 상대는 바가지를 씌울 수 없어도 본인은 바가지를 씌울 수 있는 거군."
"헉…… 아니, 그럴 의도는 없었는데……."
"후후후. 이렇게 재밌는 건 제자들을 가르칠 때 이래로 오랜만이군."
왠지 즐거워하던 복희가 말을 이었다.
"내가 직접 더 제시해도 조건이 쉽사리 맞지 않을 확률이 크군. 정 그러면 그쪽에서 하나 더 추가로 제시 해보지 그러나?"
[노련하군…….]
흑웅은 침음성을 흘린 후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주인. 나는 바가지를 씌운 게 아니오. 충분히 더 받아낼 수 있으니 주인이 스스로 생각해서 제시해 주시오.]
"흠."
흑웅이 완전히 내 편인 건 확실한 것 같다. 흑웅의 조언에 나는 한참이나 생각하다가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라서 말했다.
"…… 내게 태음지계(太陰之界)와 태양지계(太陽之界)에 들어갈 수 있는 출입권을 주시오."
흠칫!!
"뭣!"
그 순간 복희의 얼굴에서 평정심이 크게 사라진 것을 볼 수 있었다. 언제나 여유롭게 자신의 마음을 냉철하게 유지하던 복희의 얼굴이 저렇게 되는 걸 보는 일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복희는 한참을 침묵하며 고민했다. 그러더니 말했다.
"…… 바가지로군. 태음지계와 태양지계에 대해서는 오로지 나와 여와만이 알고 있을 터인데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이냐?"
"그건 여와의……."
내가 뭐라고 말하려 할 때 내 어 깨를 잡고 있던 흑웅이 꽉 하고 내 어깨를 세게 잡았다. 나는 흑웅이 말없이 제지하는 걸 느끼자 찔끔했다.
'아! 외우주의 달기가 말해줬다고 하면 큰일 나겠군.'
뭣보다 이 시대에 달기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다. 어설프게 대답해 주는 것보다는 숨기는 게 더 나은 것이다. 나는 엉겁결에 말을 얼버무렸다.
"…… 행적을 조사하다보니 어쩌 다보니 알게 된 것이오."
복희는 전에 없이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그래? 유소라는 놈이 뭔가 했나 보군."
"아, 아니 그게……."
"알았네. 계속 해 보게."
"……."
나는 복희의 목소리에서 약간 냉엄 한 분노 같은게 느껴지자 당황스러 웠다. 내 눈치로 볼 때 복희는 잠정적으로 유소를 범인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그리고 저 복희가 분노까지 하는 일은 별로 본 적이 없었기에 나는 후폭풍이 두려워졌다.
하지만 뭐 유소의 일이 내 일도 아니었기에 나는 곧 신경을 끄고는 말했다.
"나는 당신들이 거기에 남겨둔 힘을 얻고 싶소. 그러니 출입권을 주었으면 하오."
"황당하군. 그걸 외인(外人)이 얻을 수 있을 리가 없을 뿐더러 거기에 가겠다는 건 허공록의 의지에 정면으로 반하겠다는 소리와 진배없다."
"어차피 지상으로 내려온 당신들이 쓰지도 못하는 힘이 아니오? 허공록 어쩌고 하는 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출입권만 허해 주시오."
"흐음……."
복희는 굉장히 고민하는 듯했다. 그러더니 말했다.
"둘 다 줄 수는 없다. 내가 줄 수 있는 건 태양지계(太陽之界)의 출입권뿐이다."
"어째서요?"
"단순히 내 힘을 봉인한 게 태양지계이기 때문이지. 자기 곳간의 자물쇠를 갖고 있는 건 당연하지 않은 가? 내 혈육인 여와의 곳간에 있는 자물쇠는 여와의 열쇠로만 열 수 있 으니 여와에게 허락을 구하게."
"음!! 알겠소."
"후우, 알겠다니…… 그걸 풀면 어떤 재앙이 닥칠지 알긴 하는가."
"잘 모르겠지만 당신들이 그 힘까 지 얻으면 설령 황제 공손헌원이라도 이길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소."
"그것까지 알고 있다니 얘기가 빠르겠군. 이왕 말한 김에 한 가지 비밀을 더 이야기해 주지."
"응?"
이어진 복희의 말에 나는 흠칫 굳어 버리고 말았다.
"태양지계와 태음지계의 힘 중 어떤 것이라도 획득하게 되면 그대는 위대한 [옛 지배자]의 왕(王)에게 방문을 받게 될 것이다."
[옛 지배자]의 왕?!
나는 그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어봤 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윽고 기억 의 편린에서 빠르게 끄집어낼 수 있었다.
'달마가 내게 말해줬다!'
외우주로 가서 달마의 진공가향을 도우던 바로 그때!
천암의 제단을 보여주던 당시에 달 마가 내게 했던 말이 기억난 것이다.
[진공가향을 진행할 방법은 단 하 나 뿐이다. 우주의 지혜(知»), 허공 의 연대기…… [옛 지배자]의 진정 한 왕(王). 그 위대한 외신(外神)의 힘을 빌리는 방법 뿐.]
[그렇다…… 허공록은 우주에서 가 장 지혜로운 외신(外神)…… 가장 지혜롭다고 일컬어지는 이유는 그 존재만이 우주에서 유일하게 전지(全知)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백웅이여, 전지(全知)와 전능(全能)은 어떻게 다른가?]
[그렇다…… [아버지]는 왕이라고 할 수도 없는 존재…… 전 우주가 그 분의 화신일수도 있기에 왕이라 는 표현은 이치에 맞지 않아…… 그저 끓어오르는 혼돈일 뿐…… 허나 허공록은 우주의 창생사멸에 관여하 시는 유일한 전지자이기에 왕의 칭 호를 지니고 만유(萬有)를 영도하시 는 것…….]
…….
나는 달마가 말해줬던 내용을 내 머릿속에서 정리하고는 복희에게 말했다.
"…… [옛 지배자]의 왕, 전지자(全知者)이자 허공록(虛空錄)이라는 가장 위대한 존재가 나를 찾아온다 그 말이오?"
내가 반문하자 복희가 부채를 촥 하고 접으며 대꾸했다.
"역시 알건 다 알고 있군. 자네 말대로 바로 그 존재…… 외신(外神)중에서도 가장 정점에 가깝다 일컬 어지는 존재가 그대를 찾게 된다는 말이네."
"……!!"
외신이자 [옛 지배자]의 왕이며 전 우주의 제 2인자가 나를 찾아온다고!!
나는 비현실적인 사건의 규모에 내심 전율하고 말았다. 달기에게서 태양지계와 태음지계의 존재를 들었을 때는 그저 기연 하나 더 주워먹으러 갈 생각이었는데 설마 우주 최강의 전지자이자 허공록과 대면해야 할 줄이야?!
"어, 어째서 방문하는 것이오?"
"흐음. 설마 그걸 물어볼 줄은 몰랐는데……."
내 질문을 들은 복희가 마치 못된 친구를 보는 듯한 표정으로 씁쓸하게 웃었다.
"당연한 게 아닌가? 허공록이라 부르는 그 존재가 우리 남매를 신좌에서 내보낼 때 어째서 그 힘을 굳이 봉인했겠는가."
"그건 모르오. 당신들이 너무 강력 하면 인과율에 위배되기 때문이오?"
복희는 내 말에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허공록이 균형강박증 환 자라고 생각하나? 그는 그렇게 하찮은 균형에 신경 쓰지 않아."
"……."
"필멸자들은 흔히 모든 힘이 균형 을 이루고 있다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아. 불균형과 혼돈 그 자체가 이세계의 진짜 모습…… 소설이나 만화에 나올법하게 힘의 구도가 적균(適均)하게 짜여 있는 게 더 모순이 겠지. '힘' 그 자체에는 아무런 의지가 존재치 않으니, 인과율을 건드리는 건 힘보다는 다른 요소라 할 수 있네."
그렇게 중얼거린 복희가 말을 이었다.
"우리의 힘이 신좌에 봉인된 이유…… 우리는 결국 신좌에 회귀(回 歸)하게 되어 있기 때문일세."
"회귀?"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복희가 말했다.
"이 우주는 언제가 되었든 멸망하게 되어 있지. 대개 수만년 후 허공록이 강림하여 종언을 고하는 그 순간을 멸망의 순간이라 생각하는 것 같지만 아닐수도 있고…… 그렇다면 멸망한 이후의 세계가 어찌되는지 혹시 알고 있는가?"
"……?"
나는 그 말이야말로 이해를 할 수 없었기에 복희에게 말했다.
"아니 멸망이라는 건 무(無)로 되돌아간다는 말이 아니오? 무란 아무 것도 없는 것일진대 그 이후의 세계가 어찌 존재할 수 있겠소."
"자넨 지금 '되돌아간다'는 표현을 썼네. 그것은 무(無)야말로 무한(無限)이며 물질 이전의 진정한 실체라는 걸 무의식적으로 깨닫고 있다는 뜻이지. 그러나 허무는 공(空)이 아닐지니 모든 것이 멸한 자리에도 단 하나 남는 게 존재하지."
"그게 무엇이오?"
"'끈'일세."
복희는 고개를 끄덕인 후 말했다.
"생멸(生滅)이 끝나는 그 순간, 우주홍황(字*洪荒)이 단 하나의 끈에 모여들게 되지. 그 끈은 시작도 끝 도 없으며 모든 것을 압축해놓은 존재…… 그리고 그 끈을 조종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바로 허공록일 세."
"……?"
"나와 누이가지니고 있던 신좌의 자리는 그 끈의 힘을 보조하여 새로 운 창생에 쓰이게끔 되어 있지. 왜냐하면 그것이 새로운 시작이 되는 근원이기 때문이며, 전지자는 우리 의 기록을 사용해서 언젠가 전능자(全能)에 도달하려고 하는 것이네. 그렇기에 자네가 태양지계나 태음지계, 어느 쪽을 개방하든 간에 그분 께 주시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 신좌에 손을 댄 자는 우주의 멸망과 재탄생에 관여하게 되니까."
아 씨발 뭔 소리지…….
씨발 뭐가 뭔지 모르겠다…….
"마치 더위 먹은 듯한 표정이군. 왜 그러는가?"
"음……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소만……."
"……."
나와 복희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그리고 그 침묵을 지켜보고 있던 흑웅이 길게 탄식을 하며 말했다.
[아아…… 복희여. 나의 주인은 그대의 생각보다 신화의 비밀을 많이 알고 있으나 조예가 깊지는 않소. 깊은 신화적 이해가 필요한 이야기에 굳이 맞장구치길 바라지는 말아 주시오.]
"흐음, 흥미롭군. 애초에 이해가 깊지 않으면 그만한 진실에 접근할 수 도 없을 터인데…… 말 그대로 모순이 아닌가? 후후."
되려 흥미롭다는 듯 나를 쳐다보는 복희였다. 나는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손을 홰홰 내저으며 말을 꺼냈다.
"아무튼 허공록한테 방문을 받게 된다고 칩시다. 그러면 나는 그 외신한테 당해서 죽게 되는 것이오?"
"그렇지는 않을걸세. 그분은 인격 신(人格神)이 결코 아니니까. 생물체의 이해를 아득히 초월한 신중의 신에 가장 가까운 존재이며 [아버지] 다음가는 초월자. 고작 그런 일로 자네를 소멸시키거나 하진 않지만……."
복희가 빙긋 웃었다.
"나라면 그런 위대한 존재에게 주시당하는 일은 하지 않겠네. 정말 죽느니만 못할 수도 있지."
"……."
소름이 돋는다. 웬만한 협박보다 더 싸늘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는 속으로 쫄아 버린 걸 들키지 않으려고 애써서 큰 소리로 말했다.
"흥! 그건 내가 알아서 하겠소. 아 무튼 간에 출입권을 주시오!"
죽이되든 밥이되든 일단 받아놓는 게 낫다!
안 쓰더라도 나중에 교환권으로 재 활용이라도 할 수 있겠지!
"뭐?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정녕 특이하군."
"내 맘이오."
"허어, 그럼 줄 수밖에."
복희는 약간 기가 질린 듯 고개를 젓고는 손가락을 튕겼다.
치지징!
마치 전기가 울리는 듯한 소리가 귓전에 울렸다. 내 몸에 뭔가가 표 시되지 않았는지 살펴봤지만 별다른
외견의 차이가 없었고 복희가 눈을 감으며 말했다.
"태양지계의 출입권을 그대에게 줬다."
"…… 준 거 맞소?"
"허튼소리는 하지 않는다. 신좌의 입구에 도달하면 저절로 열리게 될 것이다."
"으음……."
뭔가 미심쩍은데…….
내가 끙끙대고 있자 옆에 있던 흑웅이 말했다.
[태양지계에 어떻게 가는지 그 위치가 어딘지도 알려줘야 하지 않소?]
"그 질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그대들이 태양지계가 뭔지 모른다는 뜻이군."
[부정하지 않겠소. 허나 출입권을 줬다면 거기까지도 알려줬으면 좋겠소.]
달각
어느 새 커피잔을 소환해서 커피를 우아하게 마시던 복희가 향을 음미하다가 말했다.
"간단한 얘기야. 우리는 신좌에 그 힘을 남겨두었고 태양지계도 신좌에 있어. 그러니까 신좌(神座)까지만 가면 저절로 열린단 소리지."
[신좌? 신좌는 어떻게 하면 갈 수 있단 말이오.]
"허공록에게 찾아가는 길의 이정표를 따라가다보면 중간에 있겠지. 그것까진 나도 모르겠으니 알아서 하게."
[……흐음.]
흑웅이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다가 내게 말했다.
[주인. 나머지는 나중에 천우진과 얘기해야 할 것 같소.]
나는 뜬금없이 천우진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놀랐다.
"천우진? 왜?"
[아마 주인의 동료 중에서는 오로지 그만이 태양지계로 향하는 길을 열어줄 수 있으리라 생각되오.]
"……? 음, 그런가. 알았어."
나는 흑웅의 말에 대충 납득했다. 그리고 다시 복희를 쳐다보자 그는 느긋하게 말했다.
"나는 들어달라는 부탁을 들어준 것 같군. 그렇다면 공정거래를 위해서 그쪽도 내게 내놓을 정보가 있겠지?"
"앗……."
"그대들의 정확한 내력을 내게 알려줘야 할 걸세.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나라도 곱게 참아넘기지는 못 할 걸세."
으윽…… 결국 이 순간이 온 건가!
나는 흑웅에게 의견을 묻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이내 집어치웠다. 아까부터 유소한테 흔들리지 않기로 마음먹었는데 또 흑웅한테 의존하게 되면 결국 나 자신의 의지로 결정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상황을 냉정하게 판단한 후 입을 열 었다.
"나는 흑요석의 술법을 써서 기억을 전송할 수 있소. 다만 그 술법을 쓰면 선지자의 일족에게 기억이 누설될 가능성이 있지. 그걸 납득 한다면 그 술수로 내 기억을 전송해드 리겠소."
나일라토프와의 대화에서 깨닫게 된 사실이었다. 일개 필멸자 수준에서는 거의 신경 쓰지 않지만, 선지자의 일족이 쓰는 전송술법으로 옮겨 다니는 기억은 그들이 비밀스럽게 보관하는 모종의 장소에 자동으로 보관되게 되어 있다.
선지자의 일족이 평소에 그걸 열람 할 수는 없는 모양이지만 나일라토프 정도 되는 강대한 존재들은 신경 쓸 만한 사실인 것 같아서 복희에게 얘기한 것이다. 나일라토프는 정보 누설이 신경 쓰여서 받아들이지 않았으니 복희의 의사도 물어봐야 했다.
"호오…… 그 술법은 들은 적 있지. 마도왕의 일족이 자랑하는 술수인지라 전 우주에 유명한 기술인데 자네가 습득하고 있었나?"
"……."
"하긴 그들이 따로 기억을 저장해 두는 통로가 있겠지만 내게 큰 의미 는 없지. 어디 기억을 전송해보게."
나는 조심스레 말했다.
"흑요석이 필요하오만 혹시 이 근처에 흑요석이 있을지……."
"흑요석 같은건 저 남쪽 대지에 가야 캘 수 있을 것이고 여긴 비교적 북단이기에 이 일대에 흑요석은 없을 걸세."
"으음. 흑요석이 없으면 그냥 말로……."
내가 아쉬운대로 말로 지금까지의 기억을 설명하려 하자 복희가 손을 내밀어서 제지했다.
"아니. 자네 정도의 실력이면 술수를 시전할 때 그런 매질 하나하나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지. 자네는 명색이 신력을 지닌 자가 아닌가?"
"네?"
나도 모르게 존댓말로 반문하자, 복희가 씨익 웃었다.
"흑웅. 자네라면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눈치챘겠지?"
흑웅은 팔짱을 끼며 걱정스럽게 대꾸했다.
[흐음…… 그렇소…… 헌데 바로 오늘 신력수련을 시작했는데 과연 주인이 할 수 있을지…….]
"시도해서 나쁠 건 없지. 내가 옆에서 도와줄 테니 한 번 주군을 이 끌어보게나."
[알았소.]
잠시후 흑웅이 나를 일으켜세우더 니 말했다.
[주인. 방금전처럼 흑요석을 생각 해보시오.]
나는 쌍장을 뻗은 상태로 그 말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신력으로 흑요석을 창조하라는 말 이냐?"
[그렇소. 방금전 사과나무를 만들어냈을 때의 그 감각으로 흑요석을 만들어 보시오. 사과나무보다 훨씬 자주 접하고 생생하게 다뤘던 것이니 훨씬 쉬울것이라 생각하오.]
"좋았어!"
안 그래도 내 재능이 창조와 소환이라고 했으니 이 정도는 가뿐할 것 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는 방금전 사과나무를 만들었을 때의 감각을 떠올리며 정신을 집중했다.
'흑요석 나와라…… 흑요석…… 흑요석 나와라…….'
그리고 한참이나 시간이 지났지만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거 왜 안 나와?"
[주인. 아무래도 주인의 숙련도가 낮아서 아직 마음을 공허하게 비우지 못하기에 신력으로 창조를 자유 자재로 할 수 없는 것 같구려.]
"이런 제길! 내 속성이 창조랑 소환인 거 맞아?! 내가 돌덩어리 하나 만들어낼 수가 없다고…… 평소에 그렇게 자주 보고 만졌던 건데!!"
[자주 봤으니까 더 안 되는 걸지도 모르오. 현실감이 강하기에 상상력 에는 도리어 제약이 걸리는 원리일 지도.]
내가 황당해하자 옆에서 보고 있던 복희가 말했다.
"신력으로 뭔가를 창조하는 건 가장 어려운 분야에 속하지. 몇천 년을 수련해서 겨우 터득하는 신격도 많으니 당장 하루아침에 안 된다고 힘들어할 필요 없네."
"몇천 년?! 그렇게 어렵소?!"
"당연히 어렵네. 새로운 물질을 창 조한다는 것은 거기에 얽힌 우주의 인과율이 새로이 재설정된다는 것. 그 재설정의 난이도, 우주법칙의 저 항력을 뚫고 현물화하는 당위성을 신력으로 때우는 것이니 어려울 수 밖에."
"으음."
"되레 아까 사과나무를 소환했다는 게 대단할 지경이군……."
그렇게 중얼거린 복희가 힐끔 장내 에 있던 탁자를 쳐다보더니 말했다.
"창조가 힘들다면 이 권능을 응용 해보는 게 어떤가?"
"어떻게 말이오?"
"하나하나 다 물어보면 재미가 없지. 자네가 아까 이걸 상업의 권능 이라고 밝혔으니까 든 생각일세."
"아하!! 귀갑이여!"
나는 그 순간 무슨 말인지 깨닫고는 바로 귀갑을 불러내었다. 귀갑이 내 손 위에 떠오르자 나는 곧장 외쳤다.
"기억전송을 할 수 있는 흑요석을 사고 싶어! 얼마냐!"
[흑요석은 1점에 50000 마두입니다.]
"…… 비싸네?! 설마 채굴해서 팔 면 그만큼 마두가 나오는 거냐?"
[자연흑요석을 매각하실 경우 1점 에 300 마두입니다]
"……."
으음…… 흑요석으로 기억전송 한 번 하겠다고 5만 마두나 소모해야 한다니…….
'젠장. 여기서 나가면 꼭 흑요석 광산 찾아가야겠다.'
하지만 그래도 일단은 복희와의 계 약을 이행하는게 중요했으므로 나는 일단 흑요석을 구입했다. 그리고 흑요석에 기억을 담아서 복희에게 전송하려 했는데, 바로 그 때 옆에 있던 흑웅이 말했다.
[주인. 어쩌면 그 흑요석을 강화할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오.]
"응?"
[아…… 그냥 그렇단 것이오. 지금 당장은 그럴 필요까진 없겠소.]
"알았어. 나중에 말해줘."
우우웅!!
나는 복희에게 기억을 전송해 주었다.
'흐흐. 천하의 복희가 내 기억을 받으면 어떤 반응일지 기대가 되는 걸…….'
나는 사실 지금까지 흑요석으로 사람들이 기억을 받을 때마다 제각기 다른 반응이란 걸 알고 있었고 그 하나하나를 보는 게 나름대로 전생 하면서 느끼는 재미였다. 그리고 이제 천하의 삼황 복희에게 기억을 전 송할 때가 되었으니 그의 표정이 어 떻게 바뀔지가 궁금해진 것이다.
그러나 뭔가가 이상했다.
파지직!
파지지직!!
복희는 가만히 있는데 왜인지 흑요석만 빛나고 있었다. 그냥 빛나는 게 아니라 새파란 뇌전(雷電)을 뿜어내며 벼락을 마구 분출하는 중이 었다. 복희는 아직 손을 떼고 있지 않았지만 복희 또한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모르는 듯한 표정으로 보였다.
"왜 이러는 거지?"
"저, 저도 잘……."
이상하다?! 기억전송의 술법을 쓰 면서 이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내가 당혹해하고 있을 때 복희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졌다.
"잠깐…… 이건……."
"무슨 일인 겁니까?"
"……."
잠시후, 복희가 크게 당혹한 표정 을 지으며 말했다.
"상황이 많이 꼬인 것 같군……."
그리고 곧이어 눈앞에 커다란 차원문이 하나 열리더니 그 안에서 누군가가 성큼성큼 걸어 나오는 게 보였다.
[으으으…… 용신 복희여!!]
잠시후 그 '누군가'가 분노를 간신히 억누르며 외치는게 들렸다.
[무슨 짓을 했소? 아무리…… 신좌의 대신(大神)이라지만 이런 폭거를 하다니!]
"……."
어디서 들어본 목소리 같은데? 설마…….
'아냐. 생긴 게 완전히 다른데?'
그럴 리가 없어.
그놈은 저렇게 생긴 외계인이 아니란 말이야.
그자가 안광을 시퍼렇게 빛내며 복 희에게 노갈성을 터뜨리는 게 보였다.
[방금 쓴 술법 때문에 우리 별이 폭발해 버렸단말이오!!]
그자의 노갈에 복희가 잠시 침묵하 더니 그를 진정시키듯 차분하게 하는 말이 들려왔다.
"진정하게. 나도 무슨 일인지 알아 보는 중일세."
[그대가 당사자가 아니오?]
"진정하라 말하였네."
이어진 말에 나는 가슴 한편이 덜 컹하는 걸 느꼈다.
"위대한 종족의 마도왕(魔道王)이여."
……?!
내가 경악을 참지 못하고 뜨악한 표정을 짓자 옆에 있던 흑웅이 내게 영언으로 말했다.
[주인…….]
마, 말하지 마.
내가 나쁜 놈 되는 것 같잖아.
그러나 내 간절한 염원에도 흑웅이 약간 힘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자는 선지자 같소만…….]
선지자가 틀림없다.
겉모습은 다르지만 마도왕이라고 불리며 흑요석 때문에 복희 앞에 나타날 만한 인물은 전 우주에 그놈밖에 없는 것이다.
불행 중 다행인 건 이 시대에 선 지자와 나는 일면식도 없다는 사실 이었고, 나는 그걸 깨달은 순간 마 음먹었다.
'내 탓 아니야!'
무조건 잡아뗀다!
그렇게 마음먹었을 때 복희와 옥신각신하고 있던 마도왕, 선지자가 또 다시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라도 말해 보시오!]
"흐음, 진정하게. 내가 처음부터 설명해 주지."
[…….]
복희가 연속해서 진정하라는 말을 하자 선지자도 이번에는 노화를 약간 눌러 참은 듯 내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약간의 살기가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저자는 누구지? 설마 저자와 뭔가 술수를 시전하다가 우리 종족을 공격한 것인가?]
"저자는 나의 객(客)일세. 이름은 밝힐 수 없지만 중요한 손님이지."
[인간 따위가 용신 복희의 손님이 라는 말이오?]
믿겨지지 않는다는 듯 선지자가 반 문하자 복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자네도 나도 장구한 세월을 살아 왔지. 어떤 일이든 있을 수 있지 않 은가?"
[……좋소. 저 손님과 무슨 짓을 했기에 우리에게 업화(業禍)가 미쳤는지를 지금부터 설명해 주시오.]
"그 전에 묻지. 자네의 별이 폭발한 이유를 파악하고 있는가?"
[그걸 당신에게 말해야 할 이유는 없소만.]
복희가 마치 걸려들었다는 듯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럼, 나도 우리가 무엇을 했는지 말할 이유가 없네. 자네가 원인과 결과를 숨긴 채 우리에게 어찌 덮어 씌울지 모르니."
[미친 소리를 하는군. 당신들이 여기서 기억을 전송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소. 그리고 그 파장이 우리 별에 미친 것 또한 파악하였는데 발뺌을 하겠단말이오?]
"이미 우리가 뭘 했는지 알고 있군. 그런데 왜 또 물어보는가? 역시 우리에게 덮어씌우려는 의도로밖에 보이지 않는군."
[끄응……!!]
복희가 느긋한 얼굴로 궤변을 늘어 놓으며 선지자에게 말꼬리를 잡았지만, 선지자는 그걸 알면서도 어찌할 지 모르는 기색이었다. 복희의 말은 내가 봐도 억지스러웠기에 어째서 선지자가 공박할 수 없는지 몰라 의아해하자 흑웅이 내 마음속으로 말을 해 왔다.
[주인, 선지자라 해도 감히 복희의 면전에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는 위치는 아닌 것이오. 항의 정도는 할 수 있으나, 정면에서 용신의 심기를 거스르면 아무리 마도왕 선지자도 감당이 안 되는 거지.]
'음…… 아무리 그래도 복희가 더 윗급이라는 건가.'
[당연한 것이오. 복희가 자신의 권위를 이용해 선지자를 누르려 하는 모양이니 잘만 하면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소.]
오호…… 그런 건가?
그러자 선지자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자세한 원인은 파악 중이지만 아무래도 왕실(王室)이 터진 것 같소. 왕실이 터지면서 거기에서 에너지를 끌어 쓰고 있던 본성(本星)의 내핵이 터졌소.]
"호오, 그래? 어떤 에너지지?"
[인근의 별에서 공급하던 에너지요.]
"어디 거짓인지 아닌지 알아볼까."
[헉! 잠깐…….]
다음 순간 복희가 부채를 촥 펼치면서 술법을 시전했다.
신술(神術)
은하개람안(銀河槪覽眼)
위잉!!
기묘한 소리와 함께 알 수 없는 우주 공간의 환영이 전면부에 떠올랐다. 복희가 아무 감정 없는 눈으로 그 환영을 서서히 들여다보자, 갑자기 선지자가 마음이 급해진 듯 외쳤다.
[거짓을 말해서 미안하오!! 우리가 왕실에서 끌어쓰던 힘은 아카샤 에너지(虛空之方)라고 하오.]
그 말에 복희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내게 말 안 하려는 이유가 있었군. 설마 외신 허공록에게 그대들의 기억을 조공하면서 그 대가로 종족의 번영을 얻고 있었다니! 명색이 은하의 지배자 중 하나일진대 그런 행위가 허용될 듯싶은가?"
[우리가 그렇게 잘못한 건 없소. 어차피 그분은 전지자(全知者)이니 우리가 하는게 공양의식에 속하지 않으며 그저 소꿉놀이일 뿐. 그분께서도 초월자이시니 전능자이신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공양 그 자체가 의미 없지 않소?]
촤악!
복희는 선지자의 변명에 부채를 접어 그를 겨누면서 말했다. 약간의 분노가 담겨 있는 말투였다.
"궤변을 늘어놓는구나. 네가 아카 샤 에너지라고 칭하는 그 힘은 반물 질 따위보다 몇억배는 더 강력하며 위험한 권능이다. 신좌에서나 쓸 수 있는 절대적인 힘이지. 너희가 그걸 끌어써서 허공의 권위를 현세(現世)에 체재하게끔 만드는 것 자체가 결국 전지자를 이 세계에 소환할 빌미가 되지 않는가?"
[……]
"정녕 무서운 놈들이구나. 도대체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허공의 권능을 몰래 써 온 것이냐? 역대 필멸자의 문명 중에서 너희가 가장 위험 할지도 모른다. 설마 아직도 내게 숨기고 있는 음모가 있는 게 아니냐?"
선지자는 움찔했다.
[그런 건 없소.]
"모를 일이지."
[아무튼 나는 당신이 요구한대로 우리 종족의 극비 사항을 공개했소. 이제 당신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려 줘야만 할 것이오!]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복희가 입을 열었다.
"사실 너희의 기억전송술법을 내가 제자와 함께 연구 중이던 차였다. 그러나 술법의 연구가 잘 진전되지 않아서 저 손님의 도움을 받아 흑요석을 매질로 하여 너희의 술수를 흉내 내어 봤지. 그런데 너희에게 피해가 갈 줄이야."
됐다!
복희가 비난의 화살을 자기한테 돌려 주었다!
'확실히 이 자리에서 우리를 보호 해주려 하는구나!'
복희의 거짓말에 선지자는 의심하지 못한 채 당황했다.
[으음! 당신이 우리의 술법을 연구 했다고?]
"그렇다. 너희의 기억전송술은 꽤 쓸 만한 듯했기에 인간에게 열화판을 만들어서 전수해 볼까 싶었지."
[……납득이 가지 않소. 뭘 하려 했는지는 알겠소만, 겨우 그 정도 소규모 전송 때문에 왕실이 폭파당했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당신들은 '무엇'을 전송했던 것이오?]
"알려 줄까?"
[알려 주시오.]
복희는 능글맞은 표정을 지었다.
"그럼, 그 대신에 앞으로 허공록의 힘을 끌어쓰지 않겠다고 약속해라."
[뭐라고! 어디까지 적반하장을 할 셈이오!]
"적반하장 같은가? 너희는 그게 떳떳한 행위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신좌에서 탄생한 내 입장에서는 당장 이라도 세계를 멸망시킬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다. 별과 고향을 잃어버린 너희 종족을 내가 공격하면 어찌될 것 같은가."
[……!!]
"하나 나도 내 잘못이 있으니 약속만 하면 너희의 사특한 행위를 봐주겠다. 약속하기 싫으면 우리가 뭘 전송했는지 알아 내는건 포기해라. 너의 선택에 맡기도록 하겠다."
[크으으윽…….]
사실상 복희가 무력으로 겁박하는 셈이었지만 선지자는 이만 부득부득 갈 뿐 복희에게 감히 대들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시대의 복희는 우주에서 손꼽히는 반열에 있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결국 선지자는 한참 후에 힘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약속…… 하겠소…… 그 대신에 한 가지 자비를 더 베풀어 주길 바라오.]
선지자의 선택에 복희는 의외인 듯 눈을 크게 떴다.
"흐음, 뜻밖이군…… 어떤 자비를 바라느냐?"
[우리는 별이 폭발했을 때 육체를 잃었으나 비술(秘術)으로 급히 정신을 임시 몸으로 갈아 끼웠소. 이제 우리가 갈아탈 종족을 새로이 정하는 과정이 남았는데, 우리는 지구로 가고 싶소.]
"……."
[우리가 지구에 가서 사는 걸 허락해 주시오.]
"인간으로 갈아타는 건 안 된다."
[당연한 말이오. 우리도 그렇게 하등한 종족까지는 되고 싶지 않으니 이 별에 와 있는 외계인 중 하나를 선택하려 하오.]
"흐음…… 그 정도라면야 좋다."
[감사하오.]
선지자가 꾸벅 고개를 숙이자 복희가 내 쪽을 바라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백웅, 최대한 숨기고 싶었으나 어쩔 도리가 없구나. 그에게는 진상을 이야기하겠다."
복희는 선지자가 진실을 외면하는 길을 택하도록 유도했지만 선지자가 피해를 감수하고 진실을 택해 버린 것이다. 질서의 용신으로서는 더 이상 선지자를 기만할 수가 없었다.
"음…… 어쩔 수 없죠."
복희가 최선을 다했다는 걸 알고 있고 사실 우리 쪽이 가해자라서 더 이상 몰아붙이기도 뭣했다. 선지자와 일이 더 꼬이면 어찌될지 상상만 해도 갑갑했지만 이 자리에서는 이게 최선인 것이다.
잠시 후 복희가 말했다.
"이쪽은 백웅이다. 백웅과 함께 흑요석의 기억전송술을 연구하다가 백웅의 기억을 내게 전송하려 했지. 그런데 난데없이 너희 별이 터진 것 이다."
[뭐……? 저 인간의 기억을 전송한 것뿐이란 말이오?!]
선지자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경악하자 복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의가 아니었다는 걸 이젠 알겠지. 되레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우리가 알고 싶을 정도다."
[……잠깐만.]
선지자가 성큼성큼 걸어서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스윽 시선을 내 쪽으로 집중하더니 말했다.
[어째서…… 내 표식을 갖고 있는 거지? 그 표식은 내가 태어나서 한 번도 쓴 적이 없는 표식이거늘.]
표식?
'아!'
선지자가 나를 전생자로 알아보려고 새겨 놓은 각인! 내 눈에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 각인은 내 전생을 넘어서도 유지되고 있었다. 물론 선지자도 주의 깊게 보지 않는 이상 이 각인을 쉽게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때때로 놈이 표식을 알아보면 내가 전생자라는 걸 눈치채곤 했던 것이다.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선지자는 혼란에 휩싸여서 말했다.
[말도 안 돼…… 그건 허공록에게 받은 술법이지만 절대 쓸 일이 없다고 생각했던 술법…… 한데 그걸 처음 보는 자가.]
"……!!"
그 때 선지자가 아니라 복희가 뭔가를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빠르게 뭔가 생각하다가 말했다.
"이봐, 지구에 와서 너희 문명을 복구하면 다시 왕실을 만들 수 있는가?"
[음…… 최소 5천 년 정도는 걸릴 것 같소.]
"내가 도와주면 기간을 단축시킬 수 있겠지."
[그야 물론…… 그렇다면야 오백 년 이내에 가능할 거요.]
"그럼 이렇게 하지. 너희가 지구에 오는 걸 허락하는 정도를 넘어서서 너희를 전폭적으로 지지해 주겠다. 그 대신에 너희 종족은 우리 진영에 들어오도록 해라."
[……]
"대신 왕실을 만들어라. 최대한 빨리."
[알았소.]
선지자는 원독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복희…… 아무리 도와준다 하여도 이번 일은 잊지 아니하겠소.]
파앗!
잠시 후 선지자의 모습이 이 공간에서 사라졌다. 나는 선지자가 별 탈 없이 물러서자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십년감수했네....’
방금 전에 뭔가 꼬일 뻔했지만 잘 무마된 듯한 느낌이다. 아마 복희가 없었으면 이렇게 원만하게 처리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안도하는 것도 잠시, 눈앞의 복희가 불쑥 꺼낸 말에 나는 크게 당황했다.
"백웅, 자네가 전생자였군."
"쿨럭!!"
나는 나도 모르게 헛기침을 했다. 그러고는 당황해서 말했다.
"무, 무슨 말씀이신지……."
"속이려 할 필요 없네. 어차피 기억전송술을 썼을때 이미 각오했을 텐데 뭘 새삼스레 그러는가?"
"……."
"하나 정상적인 전생은 아닌 것 같군. 설마 [큰 굴레]를 되돌려서 과거로 왔다든가 한 것인가? 아마 그렇겠군."
"그, 그렇게 생각하시는 이유는……."
"일부러 타 문명에서 발달해 있는 과학의 문물을 자네에게 보여주고 언급해 보았네. 그리고 자네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하는 미묘한 반응을 관찰했지. 익숙한 기색이 역력했기에 자네가 결코 이 시대의 인간이 아니라는 걸 알아챘고, 그렇다면 먼 미래에서 왔다는 걸 추측 가능했지."
"……."
"하나 단순히 생각하면 전생자가 오랜 세월 생존하면서 스스로 문명의 발전을 겪고 난 후 전생할 수도 있는 것…… 그래서 확신은 가지 않았지만 방금 전 마도왕이 표식 얘기를 하니 확실해지더군. 한 적도 없는 표식이 인과율을 무시하고 박혀 있다는 건 시간의 범위가 모순된다는 것일세. 황제 공손헌원의 예지력을 맘대로 벗어날 수 있을리도 만무하니, 자네는 어떤 방식이든 미래에서 과거로 넘어온 거야."
나는 기가 질려서 한숨을 푹 쉬었다.
"……다 맞습니다. 대단하시군요."
정말 대단하다. 어차피 기억을 주려고는 했지만 정황 증거만으로 단숨에 여기까지 유추해 내다니? 복희의 지능에 감탄하고 있을 때 복희가 말했다.
"그리고 나는 방금 전 또 한 가지 사실을 알아챘네. 자네는 이 시대에서 흑요석으로 기억전송을 할 수 없어."
"……네?!"
뜻밖의 소리에 나가 깜짝 놀라자 복희가 말을 이었다.
"자네의 기억을 전송하는 것만으로 위대한 종족의 왕실을 터뜨렸다는 것은 인과율에 위배되는 행위라는 뜻이지. 다른 곳도 아니고 허공록과 직접 연결된 은밀한 아카이브에 그 인과율의 모순이 닿자마자 폭발을 일으킨 건 당연한 일이야. 아마 왕실을 재건하더라도 똑같은 일이 벌어질 것일세."
"하, 하지만 제 시대에는 그런 적이 없습니다만."
"자네가 [큰 굴레]를 넘어서 과거로 온 게 사실이라면 그럴 수밖에. [큰 굴레]를 넘는 일 자체가 모든 인과를 위배하는 상황이고, [작은 굴레]를 돌리는 것과 달리 자네가 행하는 모든 행위가 우주를 바꾸는 것이네. 재수정할 방법도 없지. 하물며 기억처럼 선명한 행위는 크나큰 물리적 모순을 초래할 것이네."
"……."
나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복희에게 말했다.
"복희 님, 하지만 저는 이미 제가 전생자라는 사실을 전륜성왕에게 들켰습니다. 전륜성왕은 그런 인과율의 위반사항에서 어떻게 멀쩡할 수 있는 것입니까?"
내 말에 복희가 깜짝 놀랐다.
"뭐라고? 그 일을 자세히 말해 보게."
나는 내가 혼돈의 재능을 받으려다가 죽어서 전륜성왕의 방에 가게 되었고 거기서 기억을 읽혔다는 사실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복희가 손을 뻗어서 내 머리 위에 대어 보더니 말했다.
"과연. 나도 자네의 기억을 읽을 수 없어. 그렇다는 건 전륜성왕은 그 방 안에서는 외신에 가까운 힘을 지닌다는 것인가?"
"네?! 그 정도입니까?"
"자신의 차원에 있으면 신의 힘이 강력해지는 건 우주의 기본 원리지. 허나 전륜성왕은 그 정도가 심해서 그 안에서만큼은 무적인가 보군. 다만 그 대신에 본디 자신이 갖고 있던 우주의 [죽음]을 다루던 능력을 어느 정도 잃어버린 건가…….’
그렇게 중얼거리던 복희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그것만으론 납득할 수 없군. 그걸로는 자네의 기억방어를 뚫은 것만 설명이 될 뿐 인과율의 역풍은 설명되지 않아. 그렇다는건……."
"그렇다는 건?"
"전륜성왕은 자네의 기억을 읽음으 로써 이미 손해를 본 것일세. 어떤식으로든 힘이나 권능을 일부 잃어버렸겠지. 그러나 그걸 감수하고서라도 자네를 계속 끌어들이려 했으니...."
복희의 눈이 투명하게 나를 향했다.
"자네에겐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단 거야.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전륜성왕은 자네를 이용해서 이 세계의 패권을 잡겠다는 의지가 있군."
"……."
그럴 수도 있겠다. 전륜성왕이 내게 약간의 집착을 보이는 게 강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는 복희의 말에 납득하다가 또 한 가지 의문이 생겨서 말했다.
"복희 님은 그걸 눈치채셨는데 어째서 선지자에게 왕실을 재건하도록 호의를 베푸신 겁니까?"
"자네를 위해서지."
"네?"
"흑요석의 술법을 다시 사용하면 똑같은 일이 벌어질 테지만 그걸 근본적으로 막는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다고 생각했네."
이어진 복희의 말에 나는 정신이 멍해지는 걸 느꼈다.
"자네가 허공록에 접속해서 허락을 구하는 거야."
무, 무슨 말이지?
나는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아서 복희에게 질문했다.
"허공록에 접속하다니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허공록이 뭔지 알고 있지 않은가? 의미 그대로일세."
"역사이자 기록이고 가장 위대한 존재…… 가장 지혜로운 외신이라는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전 우주의 기억이 담긴 창고 같은 거라는 사실도요. 하지만 외신에게 접속을 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흐음. 의외로 겉핥기만 알고 있고 본질까지는 알지 못하는군. 일반적으로는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복희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방금 자네는 전 우주의 기억이 담긴 창고라고 표현했지. 그러면 그 창고의 문을 여는 자는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하는가?"
"네? 어…… 전 우주의 기억을 볼 수 있겠지요."
"그래. 단순히 얘기해서 허공록에 접속한다는 건 그런 거야. 전 우주의 지혜와 기억을 열람해서,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알 수 있게 된다는 거지. 자네가 흑요석으로 기억을 전송할 수 있게 되려면 그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말일세."
"으음……."
내가 아리송해서 고개를 갸우뚱하자 옆에 있던 흑웅이 마저 설명했다.
[주인. 천우진이 과거 도달했던 경지가 바로 그것이오. 그렇기에 나는 주인에게 천우진과 얘기해야 한다고 말했던 것이오.]
"어?"
[그는 허공록에 도달했었소. 즉, 한낱 인간이라 하더라도 허공록에 접속할 만한 경지에 오르게 되면 삼황오제 이상의 힘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지.]
"아!! 그, 그렇군!!"
나는 흑웅의 말에 그제야 허공록에 도달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난이도를 깨닫고는 더욱 당황해서 말했다.
"잠깐, 그 말대로라면 술법에 있어서 신의 경지에 도달해야 한다는 거랑 마찬가지잖아!!"
천우진이 망량선사의 도움을 받아 허공록에 도달했으나 그건 망량선사의 사도가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 이 시대에 망량선사가 있는지조차 확실치 않은데다, 내 술법 재능은 천우진에 비교하기 민망한 수준이었다. 천우진은 중화 역사상 최고의 술법천재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었기에 아무리 망량선사의 도움을 받는다 해도 최소한 술법경지가 천우진 수준이 되어야 한다는 건 나라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자 복희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것참 흥미롭군. 나의 제자도 아닌 인간이 혼자 힘으로 허공록에 도달한 예가 있단 말인가?"
"아, 그게…… 이 시대 사람은 아닙니다. 미래에 나타날 재수 없는 놈이죠."
"그렇군. 역시 인간은 흥미로워."
"본론으로 돌아가서, 그 허공록에 접속하게 되면 흑요석을 쓸 수 있게 되는 게 확실합니까?"
내 질문에 복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다. 비인격(非人格)의 신이 시기에 허공록은 도달하는 자를 차별하지 않아. 신이 [작은 굴레]로 세계를 재조정하는 것처럼 허공록의 법칙도 바꿔쓰는 게 가능하다. 다만 허공록이 그 대가로 무엇을 요구할 지는 모르겠지만……"
"으음…… 솔직히 저는 술법 재능이 거의 없습니다만, 어떻게 해야 허공록에 접속할 수 있단 말입니까? 술법 경지를 올리는 것 이외의 방법이 없을까요?"
내가 간절하게 복희에게 말하자 복희가 도리어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글쎄. 자네가 말하는 게 전제를 벗어나서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군. 술법 경지가 나오는 이유가 뭐지?"
"전제를 벗어나다니요?"
"술법은 내가 심심해서 만들어낸 능력체계야. 내 제자들이 쓰는 신술과 보패가 강력하다 하더라도 [옛 지배자]를 뛰어넘긴 힘들지. 헌데 나조차도 허공록에 접속하는 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사안일진대 한낱 인간이 내 술법을 수련해서 허공록에 도달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한 일 인걸."
복희는 자신의 어깨를 으쓱했다.
"내 생각이지만, 그 천우진이라는 인간은 술법을 신의 경지로 연마했기 때문에 허공록에 도달한 게 아니야. 그걸 기초로 삼아서 또 다른 영역을 개척해나간 게 틀림없고, 그런 경지는 술법의 창조자인 나로서도 상상해본 적이 없군. 술법을 제패한 후의 경지라…… 적어도 인간에게 허용된 수준은 아닐 텐데 말이지."
"……."
…… 그 때의 천우진 생각보다 더 대단한 놈이었잖아?!
'술법 경지로 허공록에 도달하는 건 포기해야겠군……’
나는 기가 질려서 말을 더듬거렸다.
"그, 그렇군요. 그럼 다른 방법이 없겠습니까?"
"물론 있네."
복희의 말이 이어졌다.
"허공(虛空), 혹은 경계(境界)에 이어질 수 있는 강력한 매개체. 그리고 엄청나게 강대한 마도사. 그리고 위대한 공양물이 필요하지. 전례 없는 일이겠지만 최소 조건은 아마 그럴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