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웅
외침이 끝남과 동시에 흑웅의 머리 뒤편에서 한층 강렬한 태양빛 후광이 일어났고, 그 후광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이글거리며 존재감을 형성했다. 후광의 기운이 강해지는 것을 본 유망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태양(太陽)의 권능인가?]
다음 순간, 흑웅의 배후에서 거대한 염광(炎光)이 일어나서 천지를 휩쓸었다.
번쩍 - !!
[핫!]
쩌엉!
유망이 기합을 내지르고는 곧장 어디선가 꺼낸 팔목 방패를 곧추세워 정면에서 흑웅이 방출한 태양빛을 막아내었다. 그리고 태양빛이 빗겨나가서 한차례 절벽을 스치자 태양 빛에 스친 모든 암벽이 그대로 어마어마한 열기 때문에 녹아 버렸다.
치리리링
어느새 흑웅의 등 뒤에 새하얀 빛을 내뿜는 날개 한 쌍이 만들어져 있었다. 방금전의 염광은 그저 날개를 만들어낼 때 생겨난 신력의 파장 때문에 생겨난 것이지 진짜 공격이 아니었던 것이다.
흑웅의 눈에서 새까만 기운이 넘실 거리기 시작했다.
[천조(天照) 광룡익(光龍翼).]
투쾅!
대지를 박찬 흑웅이 암창을 들고 다시 한번 돌격창의 태세로 유망을 찔러갔다. 유망은 흑웅의 돌격을 피하려다가 갑자기 마음을 바꿔먹었는지 팔목 방패를 들어서 단단히 버텨섰다.
흑웅의 돌격은 단순히 광룡익의 신력을 이용해서 속도를 강화시킨 돌격일 뿐이었다. 초식이라기에도 뭣한 단순한 기본기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일점돌파의 파괴력이 극한에 가까워졌기에 흑웅은 거침없이 공격한 것이다.
찰나지간에 굉음이 터져 나오며 다시 한번 계곡이 빛으로 뒤덮였다.
꾸콰콰콰쾅
이윽고 먼지가 흩어지며 드러난 결과는 놀라웠다.
'한방 먹였군!'
후두둑
유망의 팔목 방패가 완전히 깨어져 있었고 그의 팔목에는 자상(刺傷)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깊은 상처는 아니었으나 피가 줄줄 흐르는 것을 보면 분명히 유망에게 피해를 준 것이었다.
[오오오오오?!]
[유망님의 동두방패(銅頭防牌)가!!]
뒤편에 있던 거신족 전사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만큼 유망의 팔목 방패가 깨진 게 놀라운 일인 듯했다.
[…….]
유망은 자신의 깨진 방패 조각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더니 말했다.
[이상한 놈이군. 태양(太陽)의 권능을 쓰는 줄 알고 힘의 파장을 거기에 맞췄는데 막상 결정타는 태음(太陰)의 힘을 빌린다? 게다가 태양 쪽은 모르겠지만 태음의 힘은 무척 익숙한 기운이구나.]
[내 내력을 캐어서 무엇에 쓰려 하오?]
[뭐, 간만에 제대로 된 결투니까. 서로 목숨 걸고 싸우는 김에 이런저런 얘기도 해 보는 거지. 이런 게 전사의 낭만 아닌가?]
[전사의 낭만 같은 소리.]
후웅
유망이 너스레를 떨었지만, 흑웅은 단호한 태도로 다시금 암창을 유망 에게 겨누었다. 그러고는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대로 자세를 잡으시오. 당신에게 밝힐만한 얘기는 없소.]
[그런가…… 대충 짐작 가는 건 있지만.]
유망은 히죽 웃더니 말했다.
[나야말로 충고해주지. 나를 상대로 외팔이인 채 계속 싸우지 않는 게 좋을 거다.]
파밧
다음 순간, 마치 시간이 잘려나간듯 눈 깜짝할 사이에 유망의 자세가 변했다. 아까 활을 쏠 때도 느꼈지만, 아무래도 유망에게는 아무런 시간 소모 없이 즉시 자세를 바꿀 수 있는 신적 권능이 있는 듯했다. 거신족의 전사다운 권능이었다.
유망은 어느새 자신의 장도(長刀)를 살짝 높은 겨눔세의 자세로 들고 있었고, 그의 장도는 처음보다 상당히 길어져서 마치 양수검(兩手劍)에 필적할 정도로 도신(刀身)이 길어져 있었다.
'상단세에 가까운데 묘한 자세…… 정석 검술이 아니다. 그런데 저건?!'
아니…… 저건 도신이 길어진 게 아니다. 마치 진짜 칼날처럼 보였지만 저건 진짜 칼날이 아니다. 나는 그걸 보자마자 무엇인지 깨달았고, 흑웅 또한 마찬가지인지 유망의 도신을 보자마자 침음성을 흘렸다.
[도강(刀罡)…….]
[너희들은 이걸 그렇게 부르나?]
[…….]
흑웅은 침묵하다가 이윽고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아니군, 잘못 봤소. 무형강기(無形罡氣)를 인위적으로 유형화(有形化) 시켰구려.]
[그렇게 말하면 그런 거겠지. 너희의 무술이론은 잘 모른다.]
유망은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했지만, 그 상황을 지켜보던 나는 내면에서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맙소사…… 저건…… 도법(刀法)의 최고경지가 아닌가?!'
굳이 비교하자면 최상승 경지의 심어도(心御刀) 정도나 비견할 수 있다. 단순히 강기를 형성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무형의 강기를 제련하고, 거기서 더욱 나아가 실체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의념을 둘러 조정하는 경지! 의념에 있어서 최고 수준의 이해도가 없으면 아예 엄두조차 낼 수 없는 기술이었다. 적어도 대명시대의 초절정고수들 중엔 저 정도 수준의 도객(刀客) 자체가 없다시피했다.
내가 강호에서 활동하며 전생하는 동안 저 수준에 이른 고수는 딱 두 명밖에 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 두 명의 실력을 생각하면 유망의 실력 또한 유추가 가능했는데, 나는 내 생각이 괜한 기우이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설마…… 그럴 리가
대치 상태에서 유망의 도극(刀戰)이 천천히 흔들렸다. 마치 버드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듯 그 움직임이 선명하나 결을 잡기 힘든 움직임이었다. 저것이야말로 정중동(靜中動)의 요체를 담고 있었으며 한 치의 빈틈도 없었기에 흑웅은 섣불리 공격해 들어가지 못했다.
잔기술은 저 경계 태세 앞에서 통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방금처럼 힘을 앞세워 돌격하면 역공을 맞으리라.
흑웅은 난처한 상황이 뜻밖에 닥쳐오자 잠시 생각하더니 갑자기 기합을 내질렀다.
[이얍!!]
쿠르릉!
천둥이 울려 퍼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갑자기 흑웅의 어깻죽지에서 갑주로 만들어진 팔이 튀어나와서 유형화(有形化)되었다. 마치 갑옷팔이 돋아난 듯한 현상이었는데 흑웅은 약간 고통을 느낀 듯 움찔했다.
스윽
그리고 흑웅은 한 팔로 돌격창을 잡던 편수자세에서 벗어나 양팔로 암창을 굳게 잡고 뇌신류 창술의 정자세를 취했다. 그 모습을 보던 유망이 씨익 웃었다.
[충고를 받아들일 줄 아는 놈이군.]
[당신은 권능만으로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자가 아닌 듯싶소.]
[그래도 제법 아파 보여, 안 그런가?]
[……]
흑웅은 침묵했지만, 그 말이 아픈곳을 찌르고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방금전 신력을 이용해서 강제로 임시 팔을 창조해냈지만, 아직도 어깻죽지에는 원초의 혼돈이 감돌고 있기 때문에 이 팔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고통이 느껴지고 실시간으로 신력이 소모되고 있었다. 이 상태를 오래 유지할 수는 없었기에 흑웅은 단기전으로 결판을 내야만 했다.
정적.
그리고 찰(札).
소리소문없는 단 한 번의 찌르기가 광룡익의 기세를 더해서 발출 되었다. 그 속도는 아까 유망이 날린 화살에 비견할 만했고, 흑웅의 일격은 유망의 가슴팍에 틀어박혀 갑주를 반쯤 꿰뚫었다. 이제 막 살을 꿰뚫으려 하는 그 순간 유망의 도(刀)가 유유히 움직여서 흑웅의 머리를 정수리에서부터 쪼개려 했다.
까앙!
흑웅은 곧장 찰의 자세에서 창대를 잡고 공격을 흘리는 방어 연속동작으로 전환했고 그 덕에 동귀어진을 면할 수가 있었다. 사실 밀고 들어 갔으면 끝내 동귀어진이었겠지만 흑웅은 그걸 큰 손해라고 판단했던 것 이다. 그리고 그 판단이 맞았는지 흑웅이 창대로 무형도(無形刀)의 궤적을 비껴내는 순간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압력이 마치 태풍처럼 전신을 몰아쳤다.
구웅 - !!
콰앙!!
힘을 흘려냈는데도 흑웅이 서 있던 대지가 그대로 크게 붕괴하며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무저갱이 되어 버렸다. 역시 유망의 공격은 경세적인 위력을 담고 있었다!
타앙
어느새 한 번의 초수교환이 이뤄진 후 둘의 거리는 오십여 장 이상 벌어져 있었다. 뻥 하고 뚫린 대지에 끌려들어가지 않은 채 공기를 박차고 날개로 그대로 부상(浮上)한 흑웅은 이번에는 눈을 빛내며 재반격 을 시작했다.
천조음신류(天照陰神流)
암흑창(暗黑槍)
일섬(一鑛)!
과거 축융을 상대로 일격에 끝장냈던 일섬! 태양과 태음의 신력이 한데 뒤섞여서 나선(羅線)을 이루었고 나선이 창극의 한 점에 모여서 위력을 극대화시켰다.
'이런 원리였구나!'
과거에는 흑웅이 쓰는 기술이 도대체 어떻게 발현되는지조차 몰랐는데 신력이 안정되고 이해도가 높아진 지금은 어떻게 대결이 흘러가는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두 개의 상이한 신력이 서로 마주쳐서 만들어내는 파괴력은 일반적인 방어력으로는 절대 막을 수 없으리라.
흑웅이 암흑창 일섬을 쏘아내며 지근거리까지 돌격하려 할 때였다. 유망이 찰나지간에 씩 웃는 게 보였다.
[너무 순진하군. 거리를 줄 것 같나?]
퓨웅
서로의 거리가 십여 장 거리까지 좁혀졌을 때 갑작스레 유망이 손도끼를 투척했다. 흑웅과의 대결에서는 처음 쓰는 손도끼였지만 그 중압감은 장난이 아니었고, 손도끼는 여태껏 단 한번도 빗나간 적이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흑웅 또한 손도끼를 피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인지 암흑창 일섬의 궤도를 수정해 손도끼를 쳐내는 수밖에 없었다.
따당
손도끼가 암흑창의 창날에 걸려서 튕겨 나갔을 때 유망은 그대로 그 틈을 타서 더 뒤로 빠져 버렸고, 나는 그게 무척이나 노련한 전술이라는 걸 알아챘다. 왜냐하면 유망은 물러나자마자 다시 권능을 이용해 순식간에 자신의 자세를 재정비한후 활시위를 겨누고 있었기 때문이다.
투웅!
까앙
흑웅은 이번에는 직접 걷어내지 않고 광룡익을 써서 날개로 화살을 쳐내었지만, 화살의 위력 또한 어지간 한 필살기에 버금갔기에 이미 예봉(銳峰)은 꺾여 버린 상태였다. 흑웅이 짧게 탄식했다.
[으음.]
지켜보던 나는 유망이 무척 힘든 상대라는 걸 알아챌 수가 있었다.
'과거 축융은 암흑창 일섬을 정면으로 받아내려다가 내가중수법 일기침투(一氣浸透)에 당해서 쓰러졌다. 하지만 유망은 방심하지 않고 적의 강한 공격을 견제하면서 무조건 이득을 보면서 싸우려 하는구나!'
전투경험과 전투에 임하는 마음가짐 자체가 무척이나 차이가 났다. 유망의 순수한 신력이나 전투능력 자체도 축융보다 위일 텐데 그럼에도 방심하지 않는 것이다.
'손도끼는 중거리 견제, 활은 장거리 견제. 그리고 근접이나 중거리에서는 극한에 이른 도법과 창술을 자유자재로 전환하며 상대를 공략한다…… 무기가 여럿이기 때문에 상성을 타지 않는 건가. 심지어 무술의 이해도가 높기에 무공수법에도 잘 안 당해준다…….'
이런 제기랄! 도대체 어떻게 공략 해야 하는 거야?!
나는 말 그대로 차원이다른 상대가 나타났다는 걸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 흑웅에게 차례를 넘기지 않고 내가 대충 신력만 갖고 싸우려 했다가는 지금쯤 땅바닥에 누워 있었으리라.
[재미있군!]
쿠오오
하지만 흑웅은 투지를 잃지 않고 이번에는 삼안(三眼)을 개방하며 지옥의 기운을 끌어왔다. 보랏빛의 힘 이 순식간에 폭출했고 그 모습을 본 신농이 놀란 듯 말하는게 멀리에서 들려왔다.
[전륜성왕…… 설마 인간에게 그 힘을…….]
전륜성왕의 영력이 상단전에 끌어올려 지자, 명계에서야말로 최대의 위력을 발휘하는 삼안의 장점을 최대한 살릴 생각인지 흑웅은 잠시후 한쪽 손을 확 하고 끌어당기는 자세를 취하며 외쳤다.
[탈혼(奪魂)!]
쭈와악
[커헉?!]
유망은 의외의 일격에 당한 듯 비명 소리를 내질렀다. 유망의 육체에서 강제로 혼백이 시퍼렇게 분리되는 게 육안으로 보인 것이다! 유망은 끌어당겨 지는 자신의 영체를 억지로 붙잡은 채 당황해서 말했다.
[뭐…… 뭐야? 네 녀석 염라대왕이라도 되나? 어떻게 이정도의 죽음의 권능을…….]
쿠구구구
흑웅은 어느새 암창을 허공에 띄운채 양손을 합장하고 있었다. 삼안의 권능을 최대로 쓰기 위해 집중하는 것이다. 흑웅이 눈에서 귀기 어린 암자광(暗紫光)을 뿜어내며 말했다.
[당신과 무공으로 좀 더 싸워보고 싶으나 이건 져서는 안 되는 싸움인 듯싶소. 전력을 다하라 한 것은 당신이었으니 원망마시오!]
[크윽!!]
유망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흑웅에게 잠재된 신력은 무려 3속성이 넘었고, 그 속성이 서로 방해 없이 삼원의 궤적을 돌면서 힘을 증폭시키니 지옥에서 영혼을 강제로 불러들이는 탈혼의 권능이 전례 없는 위력을 보이는 것이었다. 아무리 거신족의 장군인 유망이라도 전력을 다한 흑웅의 힘에 쉽사리 저항할 수는 없었다.
[끄그극!!]
그러나 유망은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전신의 근육에서 핏줄이 돋아날 정도로 탈혼의 권능에 저항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포효하며 달려들었다.
[으아아아!!]
[……!!]
콰광!!
한순간 탈혼의 강제력을 벗어나서 유망의 일도(一刀)가 흑웅의 목을 쳤다. 흑웅은 미리 광룡익과 신력의 방어막으로 막아내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충격을 받고는 멀리 튕겨져나갔다.
뿌드득! 뿌득!
날아가는 와중에도 거력에 얻어맞았기 때문인지 계속 목뼈가 돌아가려 했지만, 흑웅이 강제로 육체를 조작해서 목숨을 붙여놓았다. 아마 신력이 없었으며 목뼈가 수백 회 회전을 해서 튕겨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나는 간접적으로 목에서 미친 듯이 아픈 고통이 느껴지자 속에서 비명을 질렀다.
'끄아아악!! 아파!!'
[…… 주인이시여! 무형도강에 얻어맞고 이정도면 싸게 먹혔소!]
흑웅이 애써 나를 달랬지만 다음 순간 내 몸뚱이는 절벽에 쾅 하고 처박혀 버리고 말았다.
쿠당탕
퍼버벅
나는 밀려오는 고통을 참아내면서 말했다.
'도대체 어떻게 삼안의 권능을 벗 어난 거야?'
[저자의 격이 너무 높기 때문이오. 절대 권능만으로는 끝낼 수 없는 상대요.]
'미친…… 고대에는 저런 괴물이 즐비했던 건가…….'
내가 기가 질려서 중얼거리고 있을 때였다.
꽈광!!
다시 한번 유망이 날아오더니 흑웅과 병기를 부딪혔다. 흑웅의 암창이 창대로 유망의 손도끼를 막아내자 유망은 다시 한번 손도끼를 휘둘렀고, 그 손도끼는 난데없이 거대화되어서 거부(巨浮)가 내 몸보다 더 거대할 지경이 되었다.
[흐음!]
흑웅은 그 손도끼에 어둠의 손을 갖다 대어 공수입백인(空手入白刀)을 시도했는데 그 기술은 나도 익히 알고 있는 무토도리(無刀取0)였다. 의념으로 상대의 거력을 흘려내어 반격을 꾀하려는 순간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시간이 멈춘다. 정말로 시간이 멈추는 건 아니고 마치 그렇게 착각되 는 듯한 이 공간 - 동급의 고수와 싸울 때 벌어지는 이 현상 속에서 유망의 도끼가 유려하게 궤적을 바꾸어서 하단에서 상단으로 올려치는 공격으로 뒤바뀌는 게 느껴졌다. 나는 이 현상이 뭔지 알고 있었기에 속에서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 이런 말도 안 되는!'
쩌적!
푸콰콱
흑웅의 가슴팍이 갈라지며 선혈이 치솟았다. 다행히 치명상까진 아니었지만 자칫했으면 뼈를 가를 정도의 일격이었다. 그러나 흑웅도 얌전히 당하지는 않는지 그대로 암창을 찔러서 유망의 허리를 찔렀고, 유망 또한 허리가 쭉 찢어지며 피분수가 치솟았다.
쾅
신력이 한차례 굉음을 내며 충돌했고 나와 유망은 약간 거리가 벌어졌다.
[크라라랍!!]
또다시 유망이 접근하여 도끼를 휘두르려 하자 이번에는 흑웅이 눈을 빛냈다.
[어딜!!]
두 번의 접근은 허용할 수 없었기에 흑웅의 눈에 가공할 천광(天光)이 서리기 시작했다. 그런 흑웅의 모습을 본 유망이 뭔가 위험하다는 걸 느꼈는지 재빨리 도끼를 방패처럼 들어서 자신의 전면을 막는 자세를 취했고, 이윽고 흑웅이 눈에서 어마어마한 광선을 발사했다.
쿠콰콰콰쾅!!
소호의 권능이 담긴 안광이 정면에서 유망을 강타했다. 유망은 안광을 거대도끼로 막아내려다가 뒤로 점점 밀렸고, 이윽고 버티지 못하고 눈알 광선을 흘려서 옆으로 쳐서 날려 버렸다.
[으그극!!]
화륵
그러나 눈알 광선에 담겨 있던 어마어마한 열량 때문인지 유망의 전면부가 마치 불에 살짝 그을린 것처럼 변해 버렸다. 유망이 안광의 여파 때문에 움직이지 못하고 있을 때 흑웅이 암창을 그대로 투척했고 유망은 암창을 도끼로 쳐내려다가 마음이 변한 듯 빠르게 땅을 굴러서 피했다.
슈웅
암창이 마치 의지를 가진 듯 살아서 이기어창(以氣御槍)처럼 배후에서 유망을 노리자 유망은 이번에는 활시위를 매겨서 빠르게 화살을 날렸고 허공에서 암창과 화살이 충돌하자 번쩍하는 염광이 일어나서 눈을 아프게 만들었다.
콰광!!
[엇? 제길…….]
콰앙
유망이 욕지기를 내뱉는 그 순간 접근해온 흑웅이 나한각(羅漢脚)을 갈겨서 유망의 목줄기를 그대로 날려 버렸다.
투웅!
하지만 충격이 그대로 전해지지 않았고 유망이 찰나지간에 자신의 팔을 끼워서 나한각을 막아내는 게 보였고, 나한각을 막아낸 유망이 일장의 거리를 날려간 후 착지하며 인상을 찡그렸다.
[이 자식. 복수냐?]
흑웅이 자신의 다리를 들어 올린채 건들거리며 말했다.
[서로 모가지에 한 방씩 주고받았군.]
[크큭.]
유망이 어이없다는 듯 픽 웃었다. 서로의 체력과 기력이 상당히 소모된 상태라 전신에 땀이 났고, 유망 또한 다소 지친 걸로 보였다.
유망이 난데없이 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하하!! 간만에 무척 재미있구나! 나와 이정도로 싸울 수 있는 인간전사가 있었다니 기쁘기 한량없다!!]
현재까지의 대결은 백중세.
흑웅은 그런 유망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말했다.
[이제 남은 건 서로 죽일 때까지 싸우는 것뿐이구려.]
[크크. 머뭇거리는 게 느껴지긴 했다. 이제 마음을 다잡았나?]
[그렇소.]
흑웅의 안광이 기이한 어둠을 뿜어 내며 번쩍였다.
[거신족이자 절대지경(絶對之境)이라면 양패구상할 각오를 해야지. 이제 전력을 다하겠소.]
유망이 히죽 웃었다.
[와라.]
재차 둘이 격돌하려던 바로 그때였다.
[멈춰라.]
신농의 준엄한 한마디와 함께 흑웅과 유망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어느새 신농의 거대한 본체가 저 높은 창공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그 시선만으로도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뿌드드득
흑웅이 억지로 움직이려고 해보는 듯했지만, 몸이 마치 아교에 달라붙은 것처럼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게 보였다. 흑웅은 자신의 몸에 작용하는 압력의 크기를 알아챈 듯 포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역시 삼황의 본체와는 격 차이가 크군.]
움직일 수 없는 건 유망 또한 마찬가지인 듯했다. 유망은 다소 불만스러운 듯한 얼굴로 신농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신농이시여! 이제 막 재밌어지려는데 어째 결투를 방해하시는 겁니까?]
[이대로 결투를 진행하면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대결은 그렇게까지 해야 할 일이 아니다.]
그렇게 대꾸한 신농이 흑웅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전륜성왕의 대전사여. 본좌의 질문에 대답하라.]
[답할 수 없는 건 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좋다.]
[말씀해 주십시오.]
곧 이어진 신농의 질문에 흑웅은 물론 나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본좌는 지금 전욱과 소호가 이 자리에 난입하려 하는 걸 억지로 막고 있다. 너는 설마 그들의 사도인가?]
신농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천공(天空)이 크게 흔들렸다.
쿠구구구!
그 진동을 느낀 흑웅이 중얼거렸다.
[오제(五帝)들이 차원계를 뚫고 들어오려 하는군]
흑웅의 말대로 아무래도 전욱과 소호가 이 자리에 개입하려 하는 건 명백해 보였다. 신농이 흑웅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본좌의 질문에 답하라.]
[…….]
흑웅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나는 전륜성왕의 명을 받고 이 결투에 나선 대전사! 아무리 큰 다툼을 피하고자 하더라도 전륜성왕의 명 없이 적수에게 본인의 비밀을 털어놓을 이유가 없소.]
[고지식하군.]
[고대부터 이어내려오는 결투의 정법(正法)에 따를 뿐이오.]
그러자 신농이 슥 하고 손가락으로 흑웅을 가리켰다.
[정녕 정법대로 하자면 네가 대전사로 나올 자격부터 의심해봐야겠지. 네가 만일 대적자인 황제 진영의 사도라 한다면 전륜성왕의 대전사로 나올 자격이 있는가?]
[그건 전륜성왕께서 판단하실 일이오.]
[네 주군에게 판단을 미루겠다고? 그 경우 전륜성왕 또한 황제의 끄나풀로 의심받을 터인데.]
[마음대로 말씀하시오. 나는 오로지 전륜성왕의 판단에 따르겠소.]
[…….]
신농이 마뜩치 않다는 듯 팔짱을 꼈고, 그런 신농 곁으로 와 있던 거신왕 수인이 신농에게 말했다.
[신농이시여. 염라대왕이 뵙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들라하라]
파앗
다음 순간 장내에 염라대왕과 9인의 대왕이 소환되었다. 총 열 명의 대왕을 본 신농이 말했다.
[지옥시왕(地獄十王)이 한 자리에 나왔느냐?]
그 말대로였다. 지옥을 관장하는 열 명의 대왕, 지옥시왕이 염라대왕을 필두로 하여 이 자리에 출현한 것이다. 역사상 전례없던 일이 분명 했기에 수인과 유망 또한 신기한 눈 으로 보는 게 느껴졌다. 이윽고 염라대왕이 공손히 예를 갖추며 말했다.
[소왕(小王)이 염신(炎神)을 알현 하옵니다.]
[염라대왕, 용건을 말해보아라.]
[전륜성왕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혹웅이 그들의 끄나풀이 아님을 전하라 하셨습니다. 또한 질서를 추구하는 자들에게 해가 되는 존재가 아님을 보증하셨습니다. 또한…….]
촤촤촹
다음 순간 지옥시왕이 일제히 왼손에 소검(小劍)을 소환하여 잡았다. 그러고는 자신들의 목에 시퍼런 소검의 날을 들이대며 말했다.
[이 약속이 거짓일 경우 우리 지옥 시왕이 이 목을 베어 영원히 소멸할 것을 약속드리오니!]
[……!!]
[사악한 암수(暗手)가 배후를 노리고 있사오니, 이 자리에서 은원(恩怨)을 접고 두 악랄한 제왕을 물리 치는데 협력할 것을 부탁하셨나이다.]
[으음!]
염라대왕의 말에 천하의 신농도 약간 놀란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내 신분을 보증하고자 천하의 전륜성왕이 자신의 이름을 걸었고, 그것도 모자라 자기 휘하의 지옥시왕 전원의 목숨을 걸었기 때문이다! 이 정도로 무게감 있는 약속은 천상천하에 거의 존재치 않았기에 신농은 방금전까지 열화(熱火)로 치솟던 감정을 잠시 억누른 것처럼 보였다.
옆에 있던 거신왕 수인이 그래도 불만스러운 듯 말했다.
[이상합니다. 전륜성왕 본인이 방금전처럼 주군께 직접 말을 하면 될 것인즉 어째서 수하를 시켜 이토록 중대한 약속을 한단말입니까?]
[…….]
[그리고 정작 중요한 유소의 생사에 대해선 아무런 약속도 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침묵하고 있던 신농이 잠시후 입 을 열었다.
[황제의 눈과 귀…… 과연 그럴 만하군.]
[네?]
무엇을 깨달은 것일까?
신농이 이윽고 신염(神炎)으로 불 타오르는 눈을 나에게 향하더니 말했다.
[그대는 실로 범상치 않은 존재인 듯하구나. 이것이 [큰 굴레]가 가져 온 필연이리라 믿을 터이니, 전륜성왕의 약속을 내가 믿도록 하겠다.]
[……!!]
[이 자리를 수습하는데 도움을 주지.]
웅성…….
신농의 말에 뒤에 모여 있던 거신족 군단들이 모두 놀란 듯했다. 축융이나 형천 같은 군단장 또한 놀라움을 숨길 수 없는 게 티가 난 듯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신농이 이토록 작정하고 대군을 몰고왔는데 이 정도로 자제할 수 있으리라고는 세상 누구도 생각지 못할 일이었기 때문이다.
흑웅은 포권을 하며 말했다.
[위대한 신왕(神王)의 자비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흠.]
신농은 흑웅의 감사에는 본체만체 하더니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나와 수인이 먼저 선공(先攻)할 터이니 너는 확실히 뒷마무리를 해라.]
후오오오!!
번쩍
갑자기 신농과 수인의 모습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백염으로 불타는 광대한 크기의 빛의 기둥이 남았다.
'어?! 뒷마무리?! 대체 무슨…… 너무 갑작스러워!!'
내면에서 그 상황을 관조하고 있던 나는 너무 빠른 상황전환 때문에 갈피를 잡을 수가 없어서 허둥댔다. 장면전환이나 신농의 생각이 하나도 읽히지 않아서 지금 무슨 상황이고 내가 뭘 해야 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자 흑웅이 내게 설명해주었다.
[주인이시여. 전륜성왕은 신농에게 넌지시 숨은 뜻을 전달한 것이오.]
[뭐?]
스윽
흑웅의 시선이 어두운 산맥의 한편 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여전히 기백천사가 숨어 있었으며, 삼안에 고스란히 내비치고 있었다. 흑웅의 말이 이어졌다.
[저 기백천사라는 존재가 몰래 감시하고 있다는 걸 전륜성왕이 암시 해주었고, 신농은 머리가 맑아져서 그 존재를 깨달은 것이오. 그러나 이 자리에는 지금 전욱과 소호가 강림하려 하는 상태이고, 그들을 무시한 채 기백천사만 잡는 건 아무리 신농과 거신족 군세가 강대하더라도 불가능하오.]
'아, 그렇다면…….'
[신농과 수인이 자리를 비워서 기백천사가 방심하고 있는 바로 지금…… 우리가 나서서 그를 습격해서 잡아 족쳐야 하오. 우리가 놈을 공격하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할 테 니까.]
'오호!'
[이 모든 것은 이 자리에서 주인의 존재를 황제의 이목에서 숨기려 하는 전륜성왕의 계략이오.]
뒷마무리라고 하는 건 그런 뜻이었나!
나는 그제야 상황이 어떤 흐름인지를 알아채고는 흑웅에게 말했다.
'그런데 기백천사의 힘도 거신족의 장군에 못지않을 텐데 도망 못 치게 단숨에 잡을 수 있을까?'
[그래서 지원군으로 저자들을 보낸 것이겠지.]
저벅 저벅
어느새 내 근처에는 염라대왕을 필두로 한 지옥시왕들이 걸어와 있었다. 나는 생전의 지옥시왕을 보게 되자 신기해서 눈을 끔벅거렸는데, 염라대왕은 내게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우리가 황제의 사도를 묶을 터이니 한방에 놈을 끝장내주시오.]
흑웅이 말한 게 이런 뜻이었구나!
'전륜성왕이 직접 움직이게 되면 신력의 흐름이 요동쳐서 기백천사가 다 알아채고 도망쳐 버리기 때문이야! 그래서 신농에게 약속을 하는 척 기백천사를 제압할 전력으로 지옥시왕을 보내준 거구나.'
전생하면서 내가 알게 된 지옥시왕의 능력은 무조건 대라신선을 초월 했다. 내가 살던 시대에는 모두 소멸당해 있었지만, 그들이 활동하던 시절에는 그들의 힘이 중신격(中神格)에 버금가거나 상회 했고, 특히 염라대왕의 능력이야 말할 것도 없이 빼어났다. 이들 모두의 도움을 받는다면 기백천사를 제압하는게 그리 힘든 일도 아니리라.
흑웅이 물끄러미 염라대왕을 보다가 말했다.
[미안하지만 지금 나는 기백천사쯤 되는 강대한 사도를 일격에 멸할 만한 힘이 없소. 방금전 유망과 싸우면서 힘을 상당히 소모했기 때문이오.]
[그 또한 성왕의 안배가 있으니 잠시 기다려보시오]
[설마…….]
[눈치챘나 보구려.]
우우우우우-
다음 순간, 흑웅의 몸을 둘러싸고 일곱 개의 보석(寶石)이 영롱한 빛을 띠며 소환되었다. 일곱 개의 보석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공중을 유영하며 회전했고, 그 움직임은 굉장히 정교했다. 나는 이 능력을 예전에 써본 적이 있었고, 흑웅 또한 당연히 이게 무엇인지 눈치챘으리라.
흑웅도 놀라서 말했다.
[칠보전륜(七寶轉輪)을 내게!]
치치치칭
보석이 울리는 듯한 소리를 내었고, 흑웅은 칠보 사이로 손을 뻗어서 잡는 동작을 취했다. 그러자 칠보는 잠시 후 유형화(有形化)되어서 커다란 보석빛 수레바퀴와 같은 형태로 변했다.
이것이 바로 칠보전륜.
전륜성왕의 독문병기(獨門兵器)이자 지옥 최강의 신병(神兵)!
[오…… 오오…….]
흑웅이 칠보전륜을 수레바퀴로 형상화시켜서 드는 것을 본 염라대왕이 놀라움을 숨기지 못했다.
[아무리 성왕께서 내려주셨다 하지만 어찌 그토록 칠보전륜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단말인가? 그건 나 조차도 불가능한 일…… 정녕 그대는 성왕과 같은 영혼의 파장을 지니고 있단말인가!]
[…….]
염라대왕이 놀랄 만도 했다. 사실 칠보전륜을 제대로 쓰려고 하면 명계의 지배자로서의 권위와 자격이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다. 염라대왕 입장에서는 전륜성왕의 화신이나 다름없는 자기조차 제대로 쓰지 못하는 칠보를 일개 인간이 맘대로 쓰는 게 도저히 이해가 안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과거 28번째 전생에서 명계의 지배자로서의 권능을 이미 얻은 적이 있었으며 칠보전륜도 비슈누와 싸울 때 사용해본 적 있었다. 그런 내가 칠보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닌 것이다.
흑웅이 칠보를 굳게 잡고는 말했다.
[갑시다.]
[…… 알겠소. 먼저 놈의 움직임을 봉하겠소.]
슈욱
염라대왕은 잠시후 감정을 추스리고는 갑자기 생사부를 소환했다. 그리고 생사부를 크게 펼치더니 한 자루의 판관필을 생사부의 전면을 향해 투척했다. 그와 동시에 염라대왕 주변에 있던 다른 아홉 대왕들 또한 판관필을 투척했다.
[지옥시왕의 모든 권능으로 명하노라!]
기백천사(技伯天師) 멸(滅)
파지지직!!
열 자루의 판관필이 꽂힌 생사부에서 거대한 언령(言靈)이 형상화되어 드러났고, 잠시후 머나먼 곳에서 기백천사의 모습이 드러나면서 그의 단말마가 계곡에 울려 퍼졌다.
[크아아아아!!]
가공할 뇌전(雷電)과 화염(火炎)이 쉴 새 없이 휘몰아치며 기백천사가 그 자리에서 발버둥 쳤다. 근처에 있던 거신족 전사들이 애꿎게 그 화염에 타죽기도 했으며 거신족 군단 은 난데없이 출현한 괴물 때문에 놀 란 듯했다.
[네놈…… 무엇…… 죽인…… 다!!]
투확
제일 먼저 반응한 거신족은 형천
(形天)이었다. 머리가 없는 거신족 장군인 형천은 그대로 자신의 거대 망치를 들고 도약해서 기백천사에게 날아갔고, 기백천사는 그런 형천이 달려들자 그대로 자신의 날개를 퍼 덕이며 권능을 시전했다.
어천일명(御天一命)
초시공왜곡(超時空丕曲)
일렁
갑자기 형천이 있던 시공간이 수백 조각으로 쪼개어지더니 형천의 몸이 세로로 반토막나서 차원 너머로 날아가 버렸다.
푸콱!!
[커학]
형천은 그야말로 전신에서 피분수를 뿌리며 괴로워했다.
'어 한방?! 진짜?!'
생각지도 못한 전개! 너무 난데없이 형천이 즉살(卽殺)당하는 걸 보자 나는 가슴이 덜컹했다.
'거신족 전사장이 저렇게 쉽게?!'
그동안 기백천사가 복희한테 얻어 맞는 모습만 봐서 쉽게 생각했었는데 복희가 얕볼 놈이 아니라고 했던건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삼황에 비해서야 하수이지만 황제의 심복이자 사도라는 것만으로도 웬만한 신격은 찜쪄먹을 정도로 강력한 놈이 었다!
[크오오오!!]
그러나 형천도 그리 만만히 당하지는 않았다. 몸통이 세로로 반쪼가리 났는데도 그는 끝까지 달려들면서 거대망치를 휘둘렀고, 기백천사가 그 망치를 자신의 날개로 막으려 했지만 엄청난 파열음과 함께 방어막 이 깨지면서 뒤로 튕겨 날아갔다.
꽈과과광!!
[크아아…… 죽을 거 같다…….]
기백천사가 상당한 피해를 입은 듯 휘청거릴 때 몸통이 두 쪽 난 형천이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자 저 멀리에서 유망이 날아오더니 혀를 찼다.
[에잉, 쯧쯧. 전사장 중에서 완력이제일 세면 뭐해? 작전이 하나도 없는데……]
[끄으으…… 유망…… 형님…….]
[저런 권능계열을 상대할 때는 먼저 주문부터 박살 내고 접근전을 해야지…… 형천 네가 그러니까 순수한 완력은 수인님보다 강한데도 백 날 구박만 받는 것이다.]
[끄으…… 형님…….]
[알았다, 알았어. 쯧쯔…… 이게 몇 번째냐?]
투웅
혀를 차던 유망이 조각난 차원계의 흐름으로 화살을 쏘자 잠시후 화살 끝에 꼬챙이 꿰듯 잘려나간 형천의 몸뚱이가 걸려서 회선(回旋)해왔다.
차원계에서 형천의 몸뚱이를 건져온 유망이 손바닥에 침을 퉤 하고 뱉더 니 단면에 처덕처덕 발랐고, 그대로 형천의 몸에 갖다 붙였다.
철썩!
[우오오…… 고맙……]
[별 말씀을.]
…….
너무 쉽게 두 쪽 난 몸뚱이가 붙는 걸 보니까 황당하기까지 하다. 거신족의 생명력이라는 건 대체 얼마나 대단한 거지?
내가 어이없어하고 있을 때 옆에 있던 염라대왕이 외쳤다.
[바로 지금이오! 놈이 가장 약화 되었을 때 해치워야 하오.]
[알았소.]
위잉 위잉 위잉
흑웅이 냉담하게 대답하고는 한 손에 들려 있는 칠보전륜에 신력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흑웅의 삼안(三 眼)이 개방하면서 전신에서 어마어마한 신력이 증폭되었고, 그것은 예전에 칠보전륜을 사용했을 때와는 명백히 차원이 다른 위력이었다.
[받아라!]
칠보의 일곱 보석에 모두 다른 색깔의 빛이 들어오는 그 순간 - 흑웅은 흑자색(黑紫色) 안광을 폭출하며 그대로 수레바퀴를 전방으로 투척했다. 칠보전륜은 영롱한 칠채(七 彩)를 뿜어내며 회전을 하기 시작했고, 눈 깜짝할 사이에 기백천사의 몸뚱이에 쐐기처럼 박혔다.
기백천사는 자신에게 칠보전륜이 박히자 깜짝 놀라서 경악했다.
[치…… 칠보전륜!! 전륜성왕이 오는 기척은 없었는데 도대체 언제 왔는가?!]
치지지직
기백천사의 육체가 그대로 녹아내리기 시작했고 놈의 영혼 또한 마찬가지로 녹아내리는 게 삼안으로 선명하게 보였다. 한 번 맞은 순간부터 그 누구도 저항하지 못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죽음의 무기- 그것이 바로 칠보전륜이다. 기백천사가 단말마를 내질렀다.
[크아아아아!! 전륜성왕이여!! 나를 죽인 게 그대라면 영겁토록 저주하리라!]
쉬아아악
다음 순간 기백천사가 그대로 녹아내려 소멸해 버리고 말았다. 아무리 부상을 입었다지만, 기백천사쯤 되는 존재를 일격에 소멸시키는 가공 할 위력을 지닌 칠보전륜은 지옥 최강의 무기라고 할 만했다.
후웅
그리고 칠보전륜은 그대로 회수되어 내 손으로 날아왔고, 흑웅은 한 손에 들려 있는 칠보전륜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신의 저주가 걸려 있지 않군. 하긴 기백천사를 죽인 건 바로 나이니 엉뚱한 자를 저주해봤자 인과율이 그 저주를 이뤄주지 않으리라.]
[해냈구려.]
기백천사를 해치웠을 때 어느새 생사부의 주술을 해제한 염라대왕이 이쪽으로 다가와 있었다. 염라대왕은 독촉하듯이 말했다.
[이제 성왕께 돌아갑시다. 이 자리에 더 있어서 좋을 게 없소.]
쿠르르르…….
흑웅은 잠시 말없이 천둥이 울려 퍼지는 머나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구름의 운해(雲海) 속에서 끊임없이 천둥번개가 치는 것은 틀림없이 네 명의 대신(大神)이 서로 권능을 겨루는 중이기 때문이리라.
흑웅이 입을 열었다.
[신농과 수인이 전욱과 소호를 상대로 싸우고 있는데 돕지 않아도 된단 말이오? 순수한 실력은 이쪽이 낫다고 하나 상대도 만만치 않으니 당연히 도와야 할 터.]
[정론이군. 허나 애초에 성왕과 신농께서 어째서 이렇게 번거로운 작전을 짰다고 생각하시오?]
염라대왕의 눈이 지옥의 기운을 머금은 채 일렁였다.
[바로 그대를 황제 세력의 이목에서 숨기기 위해서요. 당신이 신농을 도운답시고 저 싸움에 뛰어든다면 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지.]
[그걸 모르는 건 아니지만 나는 아직 납득이 되지 않았소.]
[뭐가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오?]
[전륜성왕의 의도대로 난데없이 전장에 뛰어들어 대전사로 싸우며 온갖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으나 결국 나 자신은 아무것도 약속받지 못하 였소. 전륜성왕이 또 어떤 식으로 나를 이용해먹을 지 모르는데 내가 어째서 순순히 그대들 뜻대로 따라야 하는 것이오?]
[…….]
흑웅이 팔짱을 끼며 오연한 말투로 말했다.
[성왕이 확실히 말해주었으면 하오. 나를 이용하여 자신의 흉계에 도구로 삼지 않겠다고.]
[이런 무엄한…….]
염라대왕이 분노를 머금고 이를 갈았다.
후오오오
그러자 염라대왕에 호응해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아홉 명의 지옥시왕들도 지옥의 기운을 뿜어내었고, 이윽고 이 일대는 자색빛의 영기로 물들어서 죽음이 창궐한 듯한 분위기가 되었다. 멀리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거신족들조차 죽음의 기운이 너무 강해서 감히 접근조차 하기 힘들어할 정도였다.
나는 기겁해서 흑웅에게 말했다.
'얌마! 미쳤냐! 명계에서 지옥시왕과 전륜성왕을 상대로 송곳니를 들이대면 어떡해!'
[주인. 의심스럽지 않소?]
'뭐가!'
이어진 흑웅의 말에 나는 흠칫 놀랐다.
[전륜성왕은 그 방에서 주인의 기억을 다 읽어낸 것처럼 행세했소. 그러나 어째서 그는 [큰 굴레]를 돌리는 방법을 몰라서 주인께 굳이 질문한 것이오?]
'그건…… 나도 모르겠네. 이상하긴 한데.'
확실히 이상하다. 정말로 그 방에서 내 기억을 모두 읽을 수 있었다면 굳이 [큰 굴레]를 돌리는 방법을 질문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큰 굴레]를 돌리는 방법 또한 내 기억 속에 있기 때문이다.
흑웅이 차분히 말했다.
[내가 볼 때 그 이유는 바로 천암비서(天暗秘書) 때문이오.]
'천암비서?'
[그렇소. [큰 굴레]를 돌리는 직접적인 방법은 천암비서 내에서 공유 되었소. 그리고 전륜성왕이 아무리 기억을 읽는 능력이 있어도 천암비서에서 있었던 일은 읽을 수 없는 거요. 그렇게밖에 해석할 수 없소.]
'……!!'
[그렇게 친다면 전륜성왕이 완전히 우리 목숨줄을 쥐고 있는 건 아닌 셈. 무조건 끌려가 줄 필요가 없소. 되레 이대로 끌려가서 알게 모르게 압박받아서 [큰 굴레]를 넘는 방법 을 말하게 되고, 천암비서의 존재를 들키게 되면 그게 더 위험하오.]
그런 건가?!
굉장히 일리 있는 추론이었기에 내가 내심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흑웅의 말이 이어졌다.
[전륜성왕은 결코 질서진영이 아니며 절대선(絶對善)도 아니오. 지금만 해도 삼황 진영과 임시로 동맹하고 있으나 근본적으로는 그들과 결을 달리하는 자요. 완전한 중립을 추구하는 자이기에 더욱 위험하오.]
'완전한 중립이라면 좋은게 아냐? 왜 위험한데?'
[중립이라 함은 결국 황제의 편도 삼황의 편도 아닐 수 있다는 것이오. 제 3세력으로서 평화를 주장할 수도 있지만…… 끝내 모두를 힘으로 억누르는 패도(扇道) 또한 추구 할 수 있다는 말. 전륜성왕에게 야심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소?]
'…….'
[우리를 황제 세력에 노출 시키지 않겠다는 걸 순수한 호의로만 해석해서는 안 되오. 우리 또한 유소나 소녀처럼 전륜성왕의 비밀병기로 소모품처럼 쓰일지도 모르오.]
'그렇군!!'
나는 흑웅의 생각이 무척 깊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너무 안일했음을 깨달았다.
'전륜성왕을 무턱대고 믿으면 안되는 거군!'
전생부터 인연이 있었던데다가 무척 친밀감을 보였기 때문에 나는 전륜성왕을 믿어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흑웅은 그것조차도 연막일 수 있다고 경계하면서 내게 나 자신만을 위한 전략을 짜도록 상기시켜 준 것이다. 나는 내심 흑웅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말했다.
'하지만 흑웅. 어찌 되었든 전륜성왕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현세에 육 체를 가지고 되살아날 수가 없어. 여기서 섣불리 끝까지 가면 좋지 않 아.'
[알고 있소. 지금은 서로 밀고 당기는 중이니 전륜성왕의 대답을 기다려봅시다.]
'흐음…… 혹시…… 그 방법을 쓰면?'
[왜 그러시오?]
그 순간 나는 뭔가 기묘한 방책이 떠올랐지만 바로 머릿속에 정리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냐. 일단 네 뜻대로 해 보자.'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긴장 어린 침묵이 흐르고 있을 때 갑자기 내 손에 들려 있던 칠보전륜이 강렬한 빛을 내며 수레바퀴 형태에서 다시 일곱 개의 보석으로 변화했다.
치리링!
그러고는 일곱 개의 보석이 아까 전륜성왕의 방에서 보았던 일곱 명의 남녀노소(男女老小)로 변화했다. 인간의 형태를 띤 칠보중에서 금빛 머리칼을 지닌 사내가 나직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나는 칠보전륜의 금륜(金輪). 전륜성왕의 말씀을 전달하겠소."
[말하시오.]
"그대가 정 성왕께 되돌아가지 않는다면 그것 또한 좋소. 성왕께서는 그대의 목숨을 살려서 현세로 돌려 보내주겠다 하셨소. 그에 필요한 인과율 또한 명계에서 감당할 것이오."
[…….]
저 옆에서 염라대왕이 화가 났는지 부들부들 떠는 게 보였다. 아무래도 나를 괘씸죄로 여기고 당장에라도 심판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으으…….'
염라대왕의 분노를 사는 미친 경험을 하게 되자 정신이 아찔했다. 내가 내면에서 눈치를 보고 있을 때 금륜이 말을 이었다.
"그러나 하나, 조건이 두 가지 있소."
[두 가지 조건이라고?]
"그렇소. 그 조건을 달성한다고 약속해야만 되살려주실 수 있다 하셨소."
[말 하시오.]
금륜이 황금빛의 안광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첫 번째. 현재 인간족 중에 최강의 초상능력자인 소녀(素女)의 소재를 찾으시오."
그 말을 듣자마자 흑웅이 비웃음을 흘렸다.
[황제 공손헌원의 손에 들어갔을 게 뻔한 소녀를 찾으라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시오.]
"충분히 가능하다 말씀하셨소. 유소의 운명을 건들지 않기로 신농과 약조했으니 그녀의 도움을 받는다면 될거라 하셨소."
[찾기만 하면 되는 거요? 데려오지 않아도 되는가?]
"그렇소."
전륜성왕이 그렇게 단언했다면 또 다른 얘기일 수가 있다. 유소의 예지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이미 알고 있었기에 충분히 찾을 만할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만신전 내로 들어간 것만 아니라면 지상계에서 찾을 수 있으리라.
[…… 흠, 두 번째 조건은?]
이어진 금륜의 말에 흑웅과 나는 약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삼천갑자(三千甲子) 동방삭(東方朔)을 명계로 데려오시오. 이게 아마 첫 번째 조건보다 어려울 것이오."
삼천갑자 동방삭!
나는 그 이름을 당연히 알고 있었다. 민간의 전설 중에 가장 널리 알려진 편이었고 심지어 내가 망량에게 글공부를 배우기 전부터 표사 시절부터 전해 듣던 이야기였다. 먼 옛날에 동방삭이란 인물이 살고 있었고 무려 삼천갑자나 되는 세월을 살아오고 있었는데 갑자기 저승사자의 꾀에 휘말려서 명계에 잡혀가게 된다는 전설을 모르는 이는 중토 대륙에 거의 없었으리라.
그 때문에 더 당황스럽다. 어째서 이렇게 중대한 자리에, 그것도 아직 인류문명이 성립하지도 않은 초고대에 동방삭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인가?
흑웅이 내게 내면으로 말했다.
[주인. 당황하지 마시오. 이곳은 [큰 굴레]의 과거,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신화시대의 전설은 진실과 달리 왜곡되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지 않소? 의문스러움은 이제부터 밝혀내면 그만이오.]
'그, 그래.'
[단지 조금 따져볼 필요는 있겠군.]
그렇게 중얼거린 흑웅이 금륜에게 말했다.
[황제의 손에 들어갔을 소녀를 찾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이유가 뭔지 듣고 싶군. 과하게 어려워 불가능한 일이라면 처음부터 우리를 농락하려고 과제를 내는 것이니 받아들일 수 가 없소.]
"간단한 이유요. 동방삭은 찾기는 어렵지 않으나 잡기가 어렵기 때문이오."
[무슨 뜻이지?]
"그자는 이치(理致)를 벗어난 능력을 사용하는 자. 그 어떤 포박술이나 주술로도 놈을 금제할 수 없었 소. 그래서 명계의 옥졸은 물론이고 명판관과 지옥시왕이 나섰는데도 동방삭을 지옥으로 압송하는게 불가능했소."
[……!!]
"하지만 당신은 거신족의 삼대 전 사장과 동수를 이룬 전대미문의 인간족 실력자. 당신이라면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기에 성왕께서 당신에게 동방삭을 체포하는 과업을 주신 것이오."
[…….]
잠시 생각하던 흑웅이 말했다.
[그렇다 해도 내가 받는 것 없이 일만 하는 느낌이 가시지를 않는군. 좀 더 대가가 있어야만 일을 할 수 있겠소.]
"건방지군.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되살아날 수 없을 터이고 이 명계에서 우리를 상대로 백만년동안 싸우 게 될 것이오. 선택권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 불공정한 선택을 강요받느니 명계를 상대로 싸우겠소!]
"으음."
흑웅의 단호한 태도에 금륜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금륜의옆에 있던 아름다운 외모의 은발여인, 은륜(銀輪)이 자신의 안경을 매만지며 말했다.
"성왕께서는 필멸자와 그릇이 다른 분. 때로 자신의 과업을 수행한 자에게 도가 넘을 정도의 후은(厚恩)을 베풀기로 유명하십니다. 당신이 이토록 모멸차게 성왕의 의뢰를 거절하는 건 그분의 명성에 먹칠을 하는 것입니다."
[그대들이 나의 명예를 존중치 않는데 당신들의 명예를 생각할 겨를이 있는가? 충분한 대화도 없이 불합리한 조건을 강요치 마시오.]
"후우…… 고집이 세군요."
은륜이 머리를 흔들 때였다.
갑자기 옆에서 분노를 표출하고 있던 염라대왕의 몸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고, 염라대왕의 입에서 다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영언이 아닌 인간 같은 목소리였다.
"백웅이여. 그렇다면 원하는 조건을 먼저 말하거라."
흑웅은 그 목소리를 듣자 흠칫하더니 말했다.
[전륜성왕이여. 염라대왕에게 강신 할 수 있소?]
염라대왕에게 강림한 전륜성왕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흑웅이여, 그렇다. 마치 신력이 결집된 화신(化神)과도 같은 그대가 백웅과 몸을 공유할 수 있는 것처럼, 나와 염라대왕은 본디 이런 관계이지……."
[…….]
역시 전륜성왕은 나와 흑웅의 관계를 단숨에 눈치챈 듯했다. 흑웅이 침묵하자 전륜성왕이 입을 열었다.
"역시 나를 불신하여 거절하고자 하는 명분으로 꺼낸 이야기였군. 자신의 주인인 백웅을 보호하고자 하는 그 마음이 갸륵하구나."
[내 속내를 다 알아챈 듯 말하지 마시오. 당신은 섣불리 믿기엔 너무 격이 높은 존재요.]
"좋다. 그러면 거래관계의 저울추 를 맞춰주지."
이어진 전륜성왕의 말에 흑웅이 적지않게 동요했다.
"이 과업을 다 훌륭히 끝마친다면 너희에게 칠보전륜을 주겠다. 이건 어떻겠느냐?"
[……!!]
"너희가 지금의 무력에 칠보전륜까지 갖추게 되면 천상의 신조차 두렵지 않을 것이다."
엄청나게 매력적인 조건!
확실히 방금전 흑웅은 명계 지옥 시왕의 도움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칠보전륜을 사용하여 가볍게 기백천사를 없앨 정도의 힘을 보인 바가 있었다. 만일 이 고대에 흑웅이 칠보전륜을 장비하게 되면 삼황오제조차 크게 두려운 존재까지는 아니게 될 것이리라.
흑웅은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조건이 있소.]
"무엇인가?"
[절대 전륜성왕 당신과 그 부하들은 백웅을 해쳐서는 안 되오. 이걸 약속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조건도 받아들일 수가 없소.]
"합리적인 조건이군. 약속하겠다."
[알았소. 당신이 제시한 두 가지 과업을 행하도록 하겠소.]
"그래."
슈욱!
전륜성왕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 없이 손을 휘둘렀고,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 고대의 양식으로 건축된 차원의 문이 만들어졌다. 보나마나 지상계로 되돌아가는 문이 틀림없었다.
부웅
"그럼 못된 침입자들을 쫓아내러 가볼까."
전륜성왕이 염라대왕의 몸을 움직여서 허공으로 떠올랐고 그를 뒤따라서 칠보들과 지옥구왕들이 함께 도약했다. 하늘 너머로 사라지던 전륜성왕의 목소리가 장내에 웅웅거리며 남았다.
[동방삭을 잡는 것까지는 크게 기대하지 않겠다. 첫 번째만 행하여도 어느 정도는 그대들의 편의를 봐 주지.]
파앗!
명계 대존재들의 기척이 사라지자 나는 흑웅에게 말을 걸었다.
'흑웅. 전륜성왕은 지금 설마…….'
[전욱과 소호를 쫓아내러 갔을 것이오. 전륜성왕과 신농, 수인 등의 힘이라면 그들을 격퇴하고도 남겠지.]
'그럼 이제 우리는 되돌아가기만 하면 되는 건가?'
[갑시다.]
우우웅!!
흑웅이 성큼 발을 옮기자 차원문이 작동했고 나와 흑웅의 몸이 현실세계로 이동해 있었다. 평범한 땅바닥을 밟자 여전히 어두운 숲속에 있었고, 아까 죽었던 호숫가는 아닌 듯했다.
'어디 보자. 숲의 북동쪽일까.'
나는 어느 정도 숲의 지리를 여기 저기 돌아다니면서 감을 잡았기에 여기가 어딘지 알 수 있었다. 나는 내 몸이 멀쩡히 되돌아온 걸 느끼며 신기하게 여겼다.
'이야. 팔은 원상복구되지 않았지만 나머지는 다 회복되었는데? 전륜성왕이 허락해주면 완전부활이 가능 하구나.'
[…….]
'이제 됐어, 흑웅. 나한테 몸을 돌려줘.'
[…… 주인, 그 전에 할 말이 있소.]
'응?'
내가 내면세계에서 고개를 갸우뚱 하자 갑자기 내가 있던 내면세계속으로 흑웅의 형상이 번쩍하고 떠올랐다. 흑웅은 여전히 어두운 암흑의 얼굴에 제관을 쓰고 관복을 입은 모습이었다.
흑웅은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주인. 다시 한번 힘을 정갈히 다듬어 대성의 경지에 오른 것을 축하드리오.]
"아. 그게…… 결국 전륜성왕이 내 신력을 다듬어줘서 가능한 거였나?"
[그렇소. 그가 전륜(轉輪)의 힘으로 내면의 신력덩어리들을 강하게 회전 시켜서 원심분리시키듯 층(層)을 명 확히 형성했고, 그 덕에 내가 부활 할 수 있었던 것이오.]
"으음!"
[이제 이전처럼 신력의 혼잡과 부족 때문에 내가 봉인될 일은 없을 것이오. 다만…….]
"다만?"
약간 말꼬리를 흐린 흑웅이 말을 이었다.
[전에도 말했듯, 내가 쓸 수 있는 고유권능은 성라회천(星羅回天)뿐. 사대신기 같은 능력은 내가 전혀 쓸 수가 없소.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위험한 상태요.]
"뭐? 위험한 상태라니……."
이어진 흑웅의 말에 나는 약간 충격을 받았다.
[나 정도의 실력으로는 이 탁록대전 시대에서 살아남지 못할 정도로 위험도 매우 크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는 주인이 스스로 힘을 갈고 닦아야만 하오.]
"…… 뭐라고?! 그 말은……."
[이번에는 상대가 유망 수준이었기에 괜찮았지만, 앞으로는 유망을 가볍게 죽일 정도로 강력한 존재들과 계속 부딪히게 될 것이오. 그럴 때 비장의 무기로 나를 현신시켜봐야 같이 죽기만 한다는 뜻이오.]
"……!!"
나는 너무 놀라서 입을 쩍하고 벌렸다.
설마 흑웅이 이렇게 자신없는 소리를 할 줄이야!
"그게 무슨 소리야? 유망도 삼황오제를 상대로 어느 정도 버틸 만큼 센 놈이었고 그런 유망과 대등하게 싸웠던 너라면 그만한 급이 된다는 소리잖아. 삼황오제의 본체를 정면으로 상대해도 약간은 싸워볼 수 있는 거 아니냐?"
[일대일로 잠시 버티다가 도망치는 수준이라면 그렇소. 하지만 한 가지 잊고 있는 사실이 있소.]
"뭘 잊고 있다는 거야."
흑웅이 우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 시대는 주인이 살던 대명시대와 완전히 다르오. 황제가 지배권을 확립하고 모든 삼황오제가 잠정적으로 은퇴하여 뒷방늙은이가 된 시대 가 아니오. 칠요의 계약으로 서로를 묶어서 제약한 시대가 아니오. 도리어 혼돈과 질서, 중립이 혼재되어 너도 나도 인과율을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전력을 다해서 싸우는 군웅할거(群雄割據)의 시대라는 뜻.]
""……."
[또한 삼황오제가 한 놈씩 덤비지 않고 여럿이 한꺼번에 덤벼서 때려 잡으려 할 경우도 있소. 대명시대에는 주인의 힘이 워낙 미약해서 그냥 귀엽게 봐줬지만, 이 시대엔 그럴 확률이 너무나 적소. 방금전의 싸움에서 만일 거신족 대군에게 한 번에 공격당했으면 어찌 됐겠소…….]
"미…… 미친…… 아무리 그래도…… 체면이 있는데 나처럼 약한 놈한테 그렇게 최선을 다할 리가……."
[있소. 모든 삼황오제는 복희를 제외하고는 명목상 위대한 고대의 신 일뿐 다들 혼돈에서 파생된 우주의 절대자이며 순수악의 기질을 머금고 있소. 이 시대는 비겁한 수를 쓰는 것도 서슴지 않는 시대요. 그나마 중립에 속하는 전륜성왕과 만난 게 운이 좋았지.]
"으음!"
[심지어 지금 이 중화대륙에는 삼황오제 외에도 그들과 대등하거나 맞먹는 외계(外界)의 악신도 다수 강림해 있지.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