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의 재능] 각성!
그 말에 유망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 녀석, 아까 내 말을 뭘로 들었느냐? 여기서 재능을 각성시키려다가 실패하면 죽는다니까]
"하지만 제가 예측컨대 평범한 인간을 각성시킨 후 그 인간을 또다시 각성시킨 적은 없으실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음…… 그렇긴 하다만.]
유망이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내가 너희 인간들을 장난감처럼 갖고논다면 한번쯤 해보겠지만, 일단 재능각성에 성공한 인간은 절대 2번 도전하지 않더군. 그래서 나도 굳이 시키지는 않았다.]
"역시 그렇군요."
[뭐, 하고 싶다면야 도와주겠다만…….]
스윽
유망이 자신의 손을 들자 손에 발광(發光)하는 수십 개의 광체(光體) 가 흩날렸다. 저건 틀림없이 유망이 자신의 신력을 집중하는 현상이리라. 나는 유망의 신력이 굉장히 높은 수준이란 걸 본능적으로 감지할 수 있었다.
유망이 떨떠름한 눈으로 나를 바라 보며 말했다.
[시도해본 적은 없다만 무척 위험 할 건 확실하다. 이렇게까지 목숨의 위험을 무릅쓰려는 이유가 있느냐?]
"이유라고 한다면 있지요."
[더 강해지고 싶어서?]
"그것도 있지만…… 왠지 실패할 것 같지 않아서입니다."
[어째서? 근거라도 듣고 싶구나.]
"근거는……."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전 이미 상단전이 발달한 것 같으니까요."
[으음…… 뭔 소린지…….]
"아무튼 좋습니다. 언제라도 좋으니 시작해 주십시오."
그러자 유망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죽지 마라. 넌 꽤 재밌는 놈 같으니까.]
우우우우
유망이 손을 앞으로 내뻗자 광류(光流)가 한층 심상치 않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저 광류가 발사되어서 내 몸을 타격하면 그 순간 태극의 대가 반응해서 내 상단전을 자극시키는 식이리라.
원래라면 실패하면 바로 머리가 터져 죽는 이런 위험한 각성에 도전할 생각은 잘 하지 않으리라. 하지만 나는 나름대로 도전하는 이유가 있었다.
'이 [혼돈의 재능] 각성에서 가장 중요한 건 바로 상단전(上丹田)이야!'
원시천존도 내게 능력각성 원리를 설명해 줄 때 상단전을 가장 강조한 바 있었다. 아마테라스의 신력을 받아들일 때도 상단전을 통해서 받아 들인 바가 있었고 영적인 능력을 축적하고 받아들일 때마다 내 상단전은 강한 자극을 받고 튼튼해졌다. 보통 인간보다 훨씬 상단전이 발달해 있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게다가 유망의 설명대로라면 원시천존이 하던 것처럼 팔괘의 원리를 복잡하게 응용하는게 아니라 그냥 신력과 감응해서 각성시키는 방식이 기에 힘의 향상수준이 낮을 걸로 보였다. 즉 원래 쓰던 태극의 대보다 저급하게 열화(쏘化)되었기에, 반대로 위험성은 더 낮아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미 혼돈의 싹이 터 있는 상태에서 한 번 더 각성의 자극을 받는다면, 어쩌면 예전보다 더 굉장한 [혼돈의 재능]을 각성하지 않을까?
나는 내심 손을 불끈 쥐었다.
'내가 각성한 재능은 천암비서에 요순과 창힐의 삽화를 새긴 재능…… 아마도 놈들을 책 안에 봉인 하거나 소환하는 능력을 각성했던 걸 거야. 그때 그 재능을 각성한 덕에 창힐이 지닌 [상업의 권능]을 얻을 수 있었던 거지!'
한 번만 하더라도 이토록 압도적인 효과가 나오는데 두 번째 얻게 되는 재능은 얼마나 강력할까? 어차피 원래 시대로 돌아가게 되면 태극의 대 가 존재하지도 않는데 이건 기회라고 할 수 있었다.
나는 내심 음흉하게 웃었다.
'그래. 원시천존의 [부활의 재능]이나 신공표의 [만능술법재능] 같은 것만 얻으면…… 으흐흐…….'
혼돈의 재능은 일반 술법사들의 눈 으로 볼 때 이해가 안 갈 정도로 강력한 것들이 많았다. 그런 강력한 신화적 능력을 하나만 더 얻게 된다면 앞으로 내 여정이 훨씬 순탄해질 게 분명했다.
나는 호기롭게 외쳤다.
"준비되었습니다!"
[오냐! 남자답구나! 간다!]
번쩍 - !!
다음 순간 유망이 손에서 번갯불 같은 신력의 섬광이 일어났고 그 섬광이 내 가슴팍에 적중했다. 너무 순식간이라서 눈 깜박할 시간도 걸리지 않았고, 이윽고 발밑에 있던 대(臺)가 신력에 감응해서 덜덜덜 떨리는 게 느껴졌다.
쿠구구구…….
"와라! 혼돈의 재능이여!"
부부북
잠시후 나는 갑자기 전신의 혈맥이 크게 부풀어 오르는 걸 느꼈다. 나는 마치 주화입마 같은 현상에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다시 안정되는 걸 느끼고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휴, 뭐야. 별거 아니잖……."
그때 양옆의 관자놀이가 마치 누군 가가 쭉 늘리는 듯한 느낌과 함께 크게 부풀었다. 나는 내 안구마저 부풀어 오르는 걸 느끼며 몸을 버둥 거렸다.
"……!!"
어, 어?!
퍼어엉!!
다음 순간 정신이 아득해지며 내 몸이 뒤늦게 쓰러지는 걸 알 수 있었다. 피분수를 솟구치며 머리통이 터졌으니 당연히 몸이 멀쩡할 리 없었다. 내가 영체상태가 된 채로 멍청하니 내 죽은 몸뚱이를 내려다보고 있을 때 내 영체를 발견한 유망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이, 이 녀석…… 그렇게 자신만만 하게 말해놓고……]
억, 그게 말입니다…….
키기기기 -
뭐라고 말을 하려 할 때 갑자기 귓가에 귀곡성이 스치고 지나갔고, 눈앞에 어두운 문 같은게 소환되었다.
[명계(臭界)에서 널 부르는구나.]
덥썩
앗, 너흰 뭐냐?!
갑자기 내 양옆에서 마두(馬頭)를 한 명계의 옥졸 두 명이 나타나서 근육질 팔으로 내게 강하게 팔짱을 꼈다. 내가 멍하니 있을 때 옥졸들 이 내 영혼을 붙잡고 바로 어둠의 문 속으로 뛰어들었다.
후우우웅!!
잠시 동안 어둠의 공간을 날아가다 가 나는 어느새 알 수 없는 거대한 궁전 같은 곳에 나타나 있었다. 그 리고 내 몸에는 어느새 오랏줄이 꽁 꽁 묶여서 무릎 꿇려 있었고, 내 앞 에는 음산한 기운을 뿜어내는 존재 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사자(死者)여…… 이름은…… 백 웅…… 죽어서 명계에 온 것을 환영 한다…….]
양옆에서 있는 저승의 옥졸과 명 판관들이 그 순간 귀곡성을 토해내면서 음산한 분위기를 극대화 시켰다. 보통 사람이라면 모골이 송연해질 상황이었지만 나는 겁먹지 않았고 도리어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어? 어디서 들어본 목소리인데…….
그리고 나는 고개를 들어서 눈앞에 있는 존재가 누구인지 확인하고는 깜짝 놀랐다.
[여…… 염라대왕!!]
죽어서 그런지 목소리도 육성이 아니라 영체의 소리로 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내 목소리가 분명히 들렸는지 염라대왕이 삼안(三眼)을 번쩍 뜨며 나를 노려보았다.
[마치 날 알고 있는 것 같구나…….]
지옥시왕(地獄十王)의 제 오왕(五王)이자 그중 가장 강력하다고 일컬어지는 존재!
죽음의 기운이 물결치는 삼안의 괴인을 어떻게 잊을 수 있는가!
'28번째 삶에서는 전륜성왕의 힘을 얻을 때 니가 내 부하였다고!'
하지만 지금은 [큰 굴레]의 과거인데다 아예 회차가 달랐기에 상대가 나를 알고 있을 확률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설마 명계에서 현직으로 일하고 있는 염라대왕을 만나게 될 줄은 몰라서 기가 막혔다.
나는 급히 말했다.
[어…… 그게…… 그러니까…… 나와라 생사부!!]
[……?]
염라대왕은 어리둥절하며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가소롭다는 듯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책을 들면서 웃었다.
[후후. 내 손에 들려 있는 이 생사부를 말하는 것인가 망자여…… 이 것은 본왕의 것이니 너 같은 망자의 손에 들어갈 리가 없]
슈욱!
털썩
갑작스럽게 코앞에서 염라대왕의 손에서 사라져서 내 무릎 앞에 떨어진 생사부였다. 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좋아! 소환 성공!]
[…….]
[…….]
어색한 침묵이 잠시 흘렀다.
그리고 염라대왕은 뚜벅뚜벅 걸어 오더니 생사부를 주워서 저만치 먼곳으로 갔다. 약 삼십 장 정도 떨어 졌을 때 갑자기 염라대왕이 준엄하게 외쳤다.
[죄인은 들으라! 생전에 네가 범한 죄를 심판할지니……]
[나와라 생사부!]
슈욱 - 털썩
[아…… 아니!]
내 앞에 생사부가 다시 떨어지자 염라대왕은 크게 당황한 듯했다. 나는 간절한 눈으로 염라대왕에게 말했다.
[염라대왕! 나 좀 되살려줘! 한 번 만 부탁할 게 제발!]
[이놈!! 죽은 자가 되살아나게 할 정도로 명부가 만만해 보이느냐.]
이런 제길! 좋은 말로 해서는 안 되는 건가?
나는 버럭 외쳤다.
[자꾸 그러면 생사부를 저 멀리 우주 저편에 던져 버릴 테다!!]
[뭣이!]
[못할 거 같냐! 이판사판인데 못할 거 같냐고!]
[……!!]
나는 오라에 묶인 채 땅에 몸을 비비적거리며 간절히 부탁했다.
[아 실수로 죽었다니까〜!! 딱 한 번만! 한 번만 살려주라 응!!]
[…….]
꿈틀꿈틀 거리는 게 내가 생각해도 조금 추하긴 하지만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니다!
[한 번만〜!!]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마치 벌레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보던 염라대왕이 갑자기 누군가와 대화를 하기 시작하는 듯했다.
[그러합니까…… 성왕(聖王)이시여…… 과연…… 우주의 인과율이…… 이곳은 잠시 스쳐 지나가는…….]
[누구랑 얘기하는 거냐?]
[알겠사옵니다. 위대하신 분의 뜻대로…….]
꾸벅하며 보이지 않는 허공에 인사하던 염라대왕이 갑자기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마치 벌레 씹은 듯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망자여! 인간에게 정당한 죽음을 내리고 명계로 인도하는게 과연 너희를 욕되게 하려 그러는 줄 아느냐? [옛 지배자]들이 너희의 영혼을 무도한 고문으로 다스리는 걸 피하게 하려는 자비로운 성왕의 은혜이거늘…… 참으로 괘씸한 놈이로다!]
[아 나도 알아! 그러니까 한 번만 살려주……]
염라대왕은 한숨을 쉬었다.
[후우…… 살려주마. 대신 그 전에 너는 만나야 할 분이 있다.]
[어?]
[절대 실례를 범하지 말도록 하라.]
슈슈슉
다음 순간, 염라대왕이 손을 까딱하자 나는 완전히 이질적인 장소에 앉아 있었다. 염라대왕의 재판정은 온데간데없고 마치 아늑한 저택의 내부에 들어온 것만 같았다.
'염라대왕도 어느새 보이지 않는군.'
여기는 굉장히 거대하고 넓은 공간 이었으며 마치 궁전을 연상케 했다.
사방 곳곳에 보물이 쌓여 있었으며 화덕과 가마가 곳곳에서 불길소리를 내고 있다.
그러나 이곳 또한 무척 익숙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전륜성왕의 방인가……."
어라? 목소리가 나오네?
나는 뜻밖의 일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나는 영체 상태에서 옷도 똑바로 입고 있는 육체상태로 되돌아와 있었다. 내가 내 몸의 실체감을 느끼려고 피부를 꼬집어보고 있을 때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그대는 복희의 얼굴을 하고 있구나."
파앗
그 목소리와 함께 내 앞에는 여덟 명의 인간이 모습을 나타냈다. 커다란 옥좌에 한 사내가 앉아 있었고, 그를 위시해서 남녀노소 각양각색의 7인이 마치 그를 호위하듯이 둘러싸고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나는 옥좌에 앉은 사내를 보자 깜짝 놀랐다.
"워…… 원래 내 모습?!"
그랬다. 지금 옥좌에 앉은 자가 취 하고 있는 것은 바로 내 모습 -
태호 복희씨로 변신하지 않은 내 원래의 추한 얼굴인 것이다!
어떻게 저 모습으로 변신할 수 있는 거지?!
원래 내 모습인 [백웅]의 모습을 한 채 옥좌에 앉아 있던 자는 술잔을 기울여 한 모금을 꿀꺽 마시며 말했다.
"명경(具鏡)으로 비추면 존재의 본질을 볼 수가 있지. 그대가 인위적으로 연출한 육신의 모습이 어떻든 그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본디 그대의 얼굴은 인간의 기준 으로는 추괴(醜怪)한 모습이구나. 추함이 싫어서 복희가 만들어낸 극한의 미(美)를 따라 한 것이냐?"
상대의 질문에 나는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꼭 그런 건 아니오. 그냥 한번 쯤은 잘생긴 삶을 살아보고 싶었소."
"그런가……."
"…… 죽일 테면 죽이시오. 위대한 존재여."
나는 어느새 나도 모르게 체념하고 있었다. 상대가 누구인지 깨달아 버렸기 때문이었다. 방금전 염라대왕과는 달리 감히 지금의 내가 비빌 수도 없는 어마어마한 존재가 바로 눈앞에 존재하는 것이다.
타닥 타닥
그러나 백웅]의 모습을 한 그 존재는 여전히 천천히 술잔으로 목을 축이며 조용히 화톳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 동안 침묵하던 그 존재가 말했다.
"내가 그대가 아니듯, 그대도 내가 아니다."
그 존재의 시선이 서서히 나를 향했다.
그 시선에는 인간성 따위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 우주적인 죽음 그 자체의 향기가 흐르고 있었다. 전 우주의 죽음을 응축시킨 듯한 저 어마어마한 시선은 쳐다보는 순간 모든 생명체를 고갈시키고 소멸시킬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 나는 저 존재의 힘을 간접적으로 다뤄본 적이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그대는 본좌의 영혼…… 그 본질에 도달해 있구나."
죽음의 지배자, 전륜성왕(轉輪聖王)과 칠보(七寶)가 내 눈앞에 있었다.
나는 전륜성왕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28번째 삶에서 전륜성왕의 권능을 손에 넣었던 적이 있으니까!'
그것은 내 동료인 망량의 안배였다. 고대에 전륜성왕이 황제에게 패배하여 소멸하는 바람에 명계가 엉망이 되었고, 그 명계를 원상복구시켜야 황제에 대항할 힘이 생길 거라고 판단했던 망량이 500여 년에 걸쳐 내게 전륜성왕의 권능을 주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수많은 일이 있었지만 어쨌든 노력한 결과 나는 전륜성왕의 권능을 손에 넣고 전륜성왕의 신기(神器)라고 할 수 있는 칠보전륜(七寶轉輪)과 생사부(生死簿)의 권리, 삼안(三眼)의 능력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항아의 계략이었고 [꿈] 속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인 걸까? 꿈에서 깨어나서도 전륜성왕의 권능이 계승되긴 했지만 거의 발동되지 않았고 불완전해져 버렸다. 그 이후 2번의 생이 지났지만, 아직 도 그 이유를 알아내지 못했다.
다만 어찌 되었든 내가 염라대왕에게도 인정받을 정도로 강력한 전륜성왕의 권능을 사역한 적이 있는 건 사실이었다. 눈앞의 전륜성왕 또한 그 사실을 느꼈기 때문에 내 앞에 나타난 것이리라!
'이거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안 잡힌다. 눈앞의 전륜성왕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내가 전륜성왕의 능력을 얻게 된 경위를 설명한다 해도 [큰 굴레]를 넘었다는 얘기까지 해도 되는 걸까?
잠시후 전륜성왕이 여전히 [백웅] 의 모습을 한 채로 자신의 뒤에 있던 칠보(七寶) 중 한 명에게 말을 걸었다.
"은륜(銀輪)이여. 어찌 몸을 떨고 있느냐?"
자비로운 목소리였지만 은륜이라고 불린 은색 머리카락의 미녀가 흠칫 하고 몸을 떨었다. 그녀는 안경을 쓰고 있었으며 무척 지적인 외모였는데 전륜성왕의 말 한마디에 얼굴이 크게 붉어지더니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죄송하옵니다. 성왕이시여……."
"죄송할 것 없다. 백웅 또한 너희 칠보의 소유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나와 마찬가지로……."
"……."
"너희 칠보는 본디 [죽음]이라는 개념이었던 내가 최초로 인격(人格)을 형성하여 이 세계에 강림했을 때 만들어내었으니, 실로 본좌의 화신(化神)에 가까운 존재들. 그런 너희의 소유권을 내가 아닌 다른 자가 갖고 있다는 사실은…… 우주에 존재할 수 없는 법칙의 모순. 이는 실로 흥미롭군."
그러더니 전륜성왕이 힐끔 내 쪽을 쳐다보곤 말했다.
"백웅이여. 그대는 혹여 위대한 [아버지]의 뜻을 받아 이 세상에 강림한 사도인가?"
나는 그 말에 기겁을 하며 대답했다.
"그, 그럴 리가요!! 제가 어찌 그렇게 대단한 존재겠습니까."
전륜성왕이 희미한 미소를 띄었다.
"그런가? 내 죽음의 신으로서의 통찰력은 그게 정답이라 하고 있는데……."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면 남은 정답은 하나 뿐이겠군."
이어진 전륜성왕의 말은 더욱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대는 [큰 굴레]를 돌리는 존재 일 것이리라. 그렇지 않은가?"
"!!"
서, 설마 전륜성왕은 전생자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는 건가?!
나는 갑작스러운 전개에 잘 적응하 지 못하고 감정을 감추기도 당혹스러워졌다. 그러자 전륜성왕이 마치 내 마음을 읽은 듯 말했다.
"그렇다. 다 알고 말한 것이니 걱정할 필요 없다, 전생자 백웅."
"허억……."
내가 입을 벌리며 놀라자 전륜성왕 이 빈 술잔을 든 채 팔을 선선히 저으며 말했다.
"여기가 본좌의 방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을 터. 그대는 주인 없이 비어 있는 폐허를 보았겠지만 본디 여기는 본좌만의 이계(異界)이자 모차원(母次元)에 가까운 곳이다. 이 방의 바깥이라면 몰라도 이 장소에서는 [옛 지배자]라 하더라도 본좌에게 속마음을 숨길 순 없다."
"그, 그렇다면 처음부터 제 생각을 다 읽으신……."
"그렇다. 30번이나 죽다 살아난 인간을 보는 건 아무리 죽음의 신이라지만 처음 있는 일이구나. 심지어 그 인간이 한때 내 계승자가 되어 명계를 부활시키려고 했다는 사실도 흥미롭구나."
"!!"
이 공간에 들어온 순간 다 끝났던건가! 내가 했던 잡생각을 다 읽은거냐고!
다 들켰잖아!
내가 눈앞이 캄캄해져서 멍하니 있자 전륜성왕이 말했다.
"그 사실을 아는가? 본좌는 지금 고민하고 있다."
"무,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이어진 전륜성왕의 말은 뜻밖이었다.
"유소를 죽일지 말지를."
유소?!
나는 어리둥절해서 전륜성왕에게 말했다.
"갑자기 유소를 왜 죽이려 하십니까? 그녀는 그냥 예언밖에 못 하는……."
"백웅이여. 그대는 황제 공손헌원을 이미 겪어본 것 같구나. 그의 인과율 계산 능력은 최고의 예지능력이지만 단 하나의 제약이 있음을 이미 알고 있지 않으냐?"
그러자 나는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멍청한 나라지만 황제에게는 엄청나게 데여봤기 때문에 모를래야 모를 수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예언자가 직접 끼어드는 순간 인과율 계산이 무의미해진다는 제약……."
"그렇다. 달리 말하자면 모든 예언 능력은 [예언자의 개입]의 유무가 중요한 것이다. 예언하는 행위 자체가 미래에 영향을 끼칠 경우 인과(因果)가 혼란스러워지기에.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예언능력은 인과율에 맞춰 선을 넘지 않게 조정 되노라."
"그게 유소를 죽이는 것과 무슨 상관이란 말씀이십니까?"
"유소의 능력은 그 영역을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네게 일부러 겸손하게 이야기했지만 사실 그녀의 예지능력은 [예언자가 개입할 수 있는] 예지능력이다. 즉 예지를 하는 순간, 본좌 또한 그녀의 예지능력 속에 갇힌 셈이지."
"?!"
"유소는 아마 본좌와 그대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이 순간마저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알고 있다'는 사실은 본좌 또한 그녀의 예지 속 등장인물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이지."
나는 당황해서 말했다.
"그, 그런 게 가능합니까? 전륜성왕께서는 전 우주적으로 가장 강력한 신 중 한 분이신데……."
"복희가 쓸데없는 짓을 해 버렸지. 가련한 인간을 돌본다는 명목으로 [혼돈의 재능]이란 걸 인간에게 주었는데 그 재능이 너무 크게 성장한 것이다. 어쩌면 신조차도 위협할 정도로……."
전륜성왕의 말에서 나는 진심을 느꼈기에 약간 전율했다.
'그렇구나!! 태초의 인간…… [혼돈 의 재능]을 봉인당하지 않은 초기의 인간은 신조차 위협할 정도로 강한 초상능력을 갖고 있었던 거야!'
내가 어째서 유소에게 압박감을 느꼈는지 알 것만 같았다. 삼황에 준하는 전륜성왕마저도 살처분을 고민할 정도의 예지능력이라면 사실 지상계에 존재해서는 안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키깅
기묘한 소리와 함께 전륜성왕의 손 위에 나선형으로 회전하는 실덩어리가 소환되었다. 그 실덩어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전륜성왕이 말했다.
"백웅이여. 이것은 유소의 운명과 목숨을 상징하는 실이다."
전륜성왕이 바로 앞에 있던 화톳불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명계의 화염에 이걸 던져 버리는 순간 유소는 명계에도 오지 못하고 영원히 영혼째로 소멸당할 것이다."
"헉!"
"본좌는 인과율을 직접 볼 수 있다. 유소의 [관측] 자체가 본좌를 제약하고 있는 인과율의 흐름도 분명히 보이지. 그녀는 본디 신의 영역에 도전한 대가로 처벌받아야만 하리라."
전륜성왕은 수수께끼를 제출했다.
"허나 어떻게 생각하는가? 유소는 스스로 소멸당하는 길을 택하여 그대를 탁록촌에서 내보내어 본좌까지 오도록 유도했겠는가? 그녀는 미래를 읽었으니 그대를 내보내면 자신이 죽을 수 있다는 걸 알았을 것이다."
"그건……."
심오한 질문이었지만 나는 전륜성왕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었다.
전륜성왕이 말한 유소의 예지능력 수준이 사실이라면 나를 탁록촌에서 내보내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즉 그녀의 예지능력이 완벽한지 아닌지에 대한 물음이었다.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알고 있었음에도 보냈다면 본좌가 네 설득 때문에 자신을 죽이지 못하리라고 예측했다는 뜻이 되지 않는가? 본좌의 권위가 추락하는 일이니 더더욱 죽여야 하겠군."
"…… 마음대로 하십시오. 허나 그 녀석은 아무래도 상관없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상관없다?"
"네. 저도 사람을 많이 봐 와서 대충 느낌이 오는데……."
나는 진심을 담아서 말을 이었다.
"유소는 죽을 자리를 찾는 녀석이었습니다. 그런 녀석은 어떤식으로 죽는가에 집착하지도 않고 오래 살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저 지금 이 순간 자기가 즐길 수 있는지가 중요하죠."
"호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미래를 본다는 건 그런 거겠지요."
슈르륵
그러자 전륜성왕이 운명의 실을 거 두어들였다. 그러더니 피식 웃었다.
"마음에 드는 대답이었다."
"…… 네? 그냥 생각나는 대로 한 말인데……."
전륜성왕은 아무런 감정 없는 눈으로 화톳불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게 중요하지. 운명을 다루는 자는 죽음을 선악(善惡)으로 다루어서는 아니된다. 그저 죽음은 죽음일뿐…… 그대의 대답은 그 마음을 본좌에게 명경으로 비춰주었다."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역시 전생자란 본좌의 사상과 잘 맞는 존재로구나."
아무래도 전륜성왕은 정말로 유소를 죽일 생각은 없었던 것 같았다. 그저 나를 시험하기 위해 수수께끼를 낸 것뿐인 걸로 보였다.
나는 전륜성왕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전생자라는 걸 알고도 놀라지 않으시는군요. 설마 이미 알고 계셨던 겁니까?"
"신좌(神座)에 있었을 때부터 들어 본 적은 있지. [아버지]가 원하는 윤회(輪回)란 우리 혼돈의 자손들로만 이뤄질 수 없으며, 분명히 또 다른 운명의 수레바퀴가 존재할 것이라고."
"으음"
"전생자여. [큰 굴레]를 움직였다면 어찌하여 이 시대로 온 것인지 이유를 알 수 있겠는가?"
어? 그걸 왜 묻지?
내 생각을 다 읽는다면 물어볼 필요가 없을텐데?
'뭔가 이상한데…….'
설마 그냥 나를 떠보는 질문인건가? 하지만 그렇다기엔 허투루 떠볼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큰 굴레]에 대해서는 아무리 최상위신격이라도 대충 흘릴 수 있는 정보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답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나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솔직히 말하기로 했다.
"사실 어떻게 오는지 몰랐습니다. 그냥 강적을 피하다보니 [큰 굴레]를 돌리는 것만이 도망칠 방법이었을 뿐입니다. 앞으로 시간이 흘러 원래 시간이 돌아올 때까지 버틸 생각이었습니다."
"그런가."
"전륜성왕이시여. 살려달라고 떼를 써서 죄송합니다. 이번 생은 그냥 실패한 것으로 할 테니 그냥 죽여주 십시오."
나는 다 체념하고 전륜성왕에게 무릎을 꿇었다. 여기까지 왔으면 전륜성왕의 자비를 바라기도 구차한 것 이다. 내가 전륜성왕이라도 나 같은 놈을 살려두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전륜성왕은 무릎을 꿇은 나를 무시하고는 옆에 있던 건장한 무사(武士) 같은 텁석부리 장한에게 말했다.
"금륜(金輪).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구나."
금륜이라고 불린 장한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성왕이시여. 제 1지옥의 진광대왕(秦廣大王)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명계의 문 앞에서 염제 신농이 휘하의 거신족 군단을 끌고 농성 중이라 합니다."
엥?!
진짜?!
나는 갑작스러운 전개에 깜짝 놀랐다.
"흐음…… 신농인가……."
"진광대왕이 자신의 힘으로는 역부족이라 빠른 지원을 부탁한다고……."
"직접 얘기하겠다."
전륜성왕은 슥 하고 허공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그러자 명경이 그 앞에 소환되면서 마치 눈앞에 있는 것처럼 신농의 모습을 비춰주었다. 무려 자신의 본체를 드러내고 있던 염제 신농이 명경 너머에서 전륜성왕에게 으르렁거렸다.
[전륜성왕이여. 유소를 건드리지 말라.]
신농이 자신의 거대도끼와 무갑(武 甲)을 모두 장비하고 있는 걸 보면 진심으로 쳐들어온 게 분명했다.
"……."
전륜성왕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옆에서 그 상황을 보던 나는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세상에…… 천하의 염제 신농이 일개 예언자 하나 때문에 군단을 이끌고 명계로 쳐들어왔다고!'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이었기에 내가 놀라고 있자 전륜성왕은 아무런 감정없이 말했다.
"야망이 넘치는구나, 신농. 유소의 예지능력을 이용해서 앞으로 다가올 황제 공손헌원과의 싸움에서 우세를 점하고 싶다는 것인가."
뭐?
뜻밖의 말에 내가 눈을 둥그렇게 뜨자 신농이 순순히 인정하는 듯했다.
[그렇다, 전륜성왕. 어차피 우리 모두가 힘을 합쳐 황제와 싸워야 하니 네게도 해가 되는 일이 아니다. 그러니 죽음의 지배자다운 자비를 베풀라.]
"…… 후후."
전륜성왕은 여전히 감정 없는 미소를 짓고 있다가 말했다.
"소녀(素女)를 황제에게 뺏긴 게 어지간히도 분했나보구나."
소녀!
'들어본 적 있어…….'
내가 전생하면서 직접 맞닥뜨린 존재는 아니다. 그러나 그 존재는 고대의 삼황오제 신화는 물론이고 도가에서 종종 언급되었기에 나뿐만 아니라 역사를 공부한 모든 학자나 학인(學人)이라면 누구든지 알고 있었다.
그 존재는 황제 공손헌원에게 방중술 등 성의학에 관한 자문을 하였으며 초기 인간 문명을 설립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알려져 있었다. 방중술은 성합(性合)이라 음란한 상상을 하는 이들도 많았지만 망량이 내게 가르쳐줄 때 말하길, 소녀경의 방중술은 그 자체가 절세(絶 世)의 진기도인법(眞氣導引法)이었기에 오악(五括)의 도가문파들이 소녀경에서 파생된 호흡법을 지니고 있다고도 했다. 근본은 인간을 이롭게 하고 활인(活人)을 만들어내는 비기였다.
그 전설적인 소녀라는 기인(奇人)이 하필이면 전륜성왕과 신농이 맞부딪히는 자리에서 언급되다니?!
'아니 그것보다 소녀라는 존재가 실존했단말인가?'
하긴 기백 또한 기백천사라는 이름의 사도로 마주쳤으니 소녀가 등장해도 이상할 게 없긴 했지만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리고 내가 멍하니 있을 때 신농이 전륜성왕의 말에 대꾸했다.
[다 알고 있나 보군. 그 말대로 유소는 소녀에 맞먹는 재능의 소유자…… 황제는 틀림없이 소녀의 능력을 이용해 암수(暗手)를 부리려 할 텐데 거기에 대항하려면 유소가 필요하다.]
전륜성왕은 여전히 상하고저 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신농이여. 아무리 유소와 소녀의 능력이 대단해도 우리 같은 신성(神聖)에게 큰 위험을 끼치지는 못한다. 그대는 황제에 대항한다는 핑계로 황제와 같은 패도(朝道)를 걸으려 하는게 아닌가?]
[…….]
[부정하지 못하는군]
그러자 신농이 다소 불만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어쩌라는 말인가? 소녀가 합류한 황제의 진영이 전보다 더 강력한 건 사실이다. 아무런 대책도 없이 유소라는 패를 소멸시키는 악수를 두어서 뭐에 쓴다는 게냐.]
[굳이 용불용(用不用)을 따질 게 있는가? 황제가 이기든 그대가 이기든 결과적으로는 우리 모두가 [아버 지]의 품 안에 들어갈 뿐. 정해진 운명을 거슬러 리(利)를 취하려 함은 마치 필멸자의 발버둥과 같다.]
[후우…… 근원의 [죽음]에서 태어 났다 하여 마치 [아버지]라도 된 양 지껄이지 말아라. 의지를 가진 존재들이 최선을 다해서 살아감조차 부정하는 오만함은 더이상 받아들이지 않겠다.]
[그런가.]
뭔가 신농과 티격태격하던 전륜성왕이 잠시 뭔가를 생각하듯 옥좌에 턱을 괴었다. 그러더니 바로 옆에 있던 내게 말을 걸었다.
"백웅이여. 너는 저게 보이느냐?"
"예?"
뭐가 보이냐는 거지?
나는 명경 너머에 뭔가가 있나 싶어서 시력을 집중해서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신농과 거신군단 외에는 없었기에 나는 눈만 껌벅거렸다. 그러자 전륜성왕이 말했다.
"아무래도 힘을 너무 중구난방으로 쌓은 것 같구나. 원래 너 정도 역량 이라면 저놈쯤은 볼 수 있어야 할 텐데."
"저놈이라니요?"
스윽
그러자 전륜성왕이 자리에서 일어 나더니 무릎을 꿇고 있는 내 앞으로 걸어왔다. 그러고는 손가락을 내 이마에 톡 갖다대었다.
"이럴 때 한 번 전륜(轉輪)해주면 힘의 순수성을 정립할 수 있지."
쩌어엉!!
"……!!"
그 순간 내 상단전이 쪼개지는 듯한 어마어마한 파격(破格)이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수많은 무형의 힘이 사지(四枝)에서 회오리치며 피부를 찢어버리려 했고 나는 몸 전체가 소용돌이에 갈려 들어가는 듯한 압박에 비명을 터뜨렸다.
"으아아아악!!"
전륜성왕이 나를 공격한 것인가?!
쿨럭!
'젠장! 이번 생은 전륜성왕한테 죽는 건가!'
우우웅
하지만 잠시후 나는 전신이 가뿐하고 상쾌해짐을 깨달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선혈을 토하자마자 내 전신에서 새하얀 백광이 일어나서 차라리 성스럽기까지 한 힘의 파동 이 넘실거렸다. 내공을 전력으로 끌어올려도 생기지 않을 듯한 충만함에 나는 놀라고 말았다.
"헉! 이건……."
"힘의 흐름이 잠시 안정되었으니 정신을 집중해서 삼안(三眼)을 떠보아라."
"아…… 넵."
나는 전륜성왕이 내게 뭔가를 했다는 걸 알아채고는 곧장 그의 말대로 과거에 내가 습득했던 전륜성왕의 권능 중 하나인 삼안을 개방했다. 이마에 힘을 집중하고 삼안의 권능을 불러오자 잠시후 내게 또 하나 의 눈이 생겨났고, 이 삼안이야말로 명계에서 전륜성왕과 염라대왕만이 가진 최고의 권능 중 하나였다.
'그동안 삼안은 거의 쓸 수가 없었는데 갑자기 잘 되는구나.'
스아앗
잠시후 삼안을 통해서 신농과 거신군단이 있는 장소의 허공에 무언가가 보였다. 지금껏 투명화하고 있던 무언가였다는 걸 깨달은 나는 그걸 좀 더 자세히 살폈는데 이윽고 그게 무엇인지를 알아채고는 외쳤다.
"황제의 사도, 기백천사(皮伯天師)!!"
저 괴이한 모습은 잊을 수가 없다! 열 개나 되는 눈과 몇 쌍의 날개, 그리고 불길한 적색 견갑골은 그 자체로 우주적인 공포에 가까웠다. 황제의 사도이자 그 자체로 강력한 신격 중 하나인 놈이 등장한 것이다.
전륜성왕이 차분하게 말했다.
"저놈은 지금 은신에 전력을 다하 고 있어서 흥분해 있는 신농이 놈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은 기백천사의 눈을 통해 황제에게 모두 들어가고 있겠지."
"……!!"
"그러나 저놈이 아무리 뛰어난 은 신술을 발휘해도 삼안을 피할 수는 없다. 네 안의 신력을 한번 갈무리 해주었으니 삼안을 앞으로 잘 활용하도록 하거라."
"네, 넵."
나는 전륜성왕이 내게 호의를 베풀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다가 뭔가를 깨닫고는 말했다.
"설마 지금 유소를 죽이려는 척하시는 이유가……."
"그래. 황제가 다보고 있는데 본좌가 뻔히 유소를 신농의 손에 넘겨 준다면 유소는 몇 배나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다. 신농의 말대로 유소는 우리에게 비장의 패가 될 수 있으니 황제에게 신원이 노출되는 걸 피해야 하지."
"그럼 어떻게 하실 셈입니까?"
"신농과 말을 맞춰야지. 그리고 기백천사도 속여야 한다."
그렇게 중얼거린 전륜성왕이 나를 힐끔 바라보았다.
"그러니 네가 대전사(大戰士)로 나서줘야겠다."
"네?"
덥썩
전륜성왕이 갑자기 손으로 내 얼굴을 콱 붙잡았다.
"잘 해다오."
슈우웅!!
다음 순간, 나는 갑자기 전륜성왕의 방에서 명계의 성문(城門) 앞으로 이동되었다. 허허벌판과 같은 성문 앞에는 수많은 군세들이 진을 치고 있었고, 나는 그 군세의 한가운데에 신농의 거대한 본체가 나타나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
명계에 쳐들어온 신농의 거신군단 바로 앞으로 순간이동된 것이다!
나는 그 사실을 깨닫자 정신이 아득해져 버렸고, 주춤거리며 안색이 하얗게 질려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런 나를 보던 신농이 외쳤다.
[네놈은 누구냐!!]
그 외침에는 신농의 성난 살기(殺 氣)가 고스란히 담겨있어서, 그가 얼마나 열받아 있는지를 바로 알 수 있었다. 저렇게 열 받았기 때문에 몰래 숨어있는 기백천사를 눈치 채지 못한 것이리라. 그리고 내가 만일에 저 살기의 주인인 신농에게 공격받는다면 단 일격도 버티지 못 할 게 자명했다.
"어…… 그…… 그…… 그게……."
도대체 갑자기 왜 이런 상황이 된 거지?!
내가 충격과 공포 때문에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허공에서 전륜성왕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신농. 나는 명계의 대제(大帝)로서 섣불리 생사견명(生死堅明)의 원칙을 굽힐 수 없다. 그리고 유소를 양보하고 싶지 않은 마음은 그대 또한 마찬가지일 터. 그렇다 하여 황제에 대항하는 우리가 전력으로 싸우면 남 좋은 일만 시켜주는 일이다.]
[그래서?]
[서로의 대전사를 내보내어 일기토로 결판을 짓자. 이긴 측의 뜻대로 하는 것이다.]
그러자 신농이 껄껄 웃었다.
[후하하하!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아주 좋다만 설마 이 조그마한 인간이 너의 대전사인가?]
[그렇다. 그대는 그대 자신을 제외한 최강의 전사를 내보내거라]
[그렇다면 당연히 내 선택은 정해 져 있다.]
쿠웅…….
쿠웅!!
청동빛 갑옷과 뿔이 달린 투구를 쓰고 있는 거신이 서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의 피부는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한 손에는 거대한 도끼를 들고 있었는데 그 도끼에는 엄청난 신력이 깃들어있었다.
나는 그 존재를 보자마자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내가 익히 알고 있는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거, 거신왕(巨神王) 수인(燃人)……."
지금 나보고 저 괴물 같은 놈을 어떻게 상대하라는 거냐고!!
딱 봐도 나보다 수백 배는 더 강 한데!
내가 속으로 비명을 지르고 있을 때 전륜성왕이 무감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수인(燈人)은 안 된다. 독립된 의지를 갖고 있다지만 화신(化神)이니 사실상 신농 그대 자신이 아닌가?]
[흐음.]
[정 수인을 내보내겠다면 나도 염라대왕을 조력자로 붙이겠다.]
[그건 안 되지. 하긴 저 꼬맹이한테 수인은 과분하겠군. 돌아오거라.]
쿠웅....
수인이 아쉽다는 눈빛으로 자기 자리로 돌아오자 신농이 수인에게 말을 걸었다.
[거신왕이여. 그대를 제외한 최강의 전사를 그대가 골라보겠는가?]
[그러하다면 삼대(三大) 전사장(戰士將) 중에 하나를 고르는 게 맞을 듯 합니다.]
[그대의 선택에 맡기겠다.]
스윽
수인이 도열한 거신족 전사들을 가득 둘러보다가 그중에서 채찍을 들고 있는 거신의 장군에게 말했다.
[축융(祝融). 싸워보겠나?]
뭐, 축융?!
나는 그 말에 깜짝 놀라서 그 거신의 장군을 보았다. 그 말대로 그 자는 내가 알고 있는 축융의 모습과 거의 흡사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려(黎)가 지니고 있던 시꺼먼 마력이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순염(純炎)으로만 가득한 피부를 지니고 있다는 거였다.
'저게 바로 신화시대…… 배신하기 전의 축융인가!'
물론 이 시대의 축융은 나와 일면식도 원한 관계도 없다. 그렇다 해도 저놈은 심심할 때마다 적으로써 내 앞을 가로막았으므로 괜히 미운 놈이었기에 나는 살짝 축융을 노려 보았다.
축융이 수인에게 대답했다.
[너무 약해 보이는 인간이라 싸울 가치를 느끼지 못하겠습니다.]
[좋다.]
수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옆에 있던 자에게 말했다.
[형천(刑天). 싸워보겠는가?]
쿠우우우…….
형천이라고 불린 거신족의 전사장은 축융보다 몇 배나 거대한 덩치를 갖고 있었다. 특이한 점이라면 그는 머리가 없었으며 그저 자신의 쌍도끼를 들고 있는 근육만 푸들거리고 있었다. 딱 봐도 우악스럽기 그지없는 형천은 어디서 나는지 모르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 최강…… 고작해야 인간과…… 싸우는…… 수치…… 싫다…….]
[좋다.]
별수 없다는 듯 대꾸한 수인이 신농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삼대 전사장 중에 둘이 거절했으니, 이제 그 녀석밖에 없을 듯하옵니다.]
[흐음. 확실히 그 녀석이라면 상대를 가리지 않으니 괜찮겠구나.]
[불러오겠습니다.]
우웅
잠시후 차원문을 열고 누군가를 끌고 나타난 수인이었다. 뒷덜미를 잡힌 채 질질 끌려오다시피 한 그 거신은 어리둥절해하며 말했다.
[왕이시여. 일기토라고 하더니 왜 이런 상황이오? 설마 저 앞에 있는 조그마한 인간과 싸우라는 말이오?]
[그렇다. 싫으냐?]
[... 음, 뭐.]
거신이 흐느적거리며 자신의 창을 꼬나쥐며 대꾸했다.
[명이시라면 하겠소. 제 짬밥에 설마 이런 일을 시키실 줄은 몰랐소만…….]
[…….]
[축융, 형천! 너희도 시킨 건 그냥 닥치고 하란 말이다. 나한테 덤터기 씌우지 말고.]
거신이 투덜거리자 축융이 팔짱을 끼고 비웃듯이 말했다.
[늦게 온 놈이 잘못이지.]
[허어?]
비아냥을 들은 거신은 곱지 않은 눈으로 축융을 노려보았다.
[축융 넌 나중에 나한테 맞자.]
움찔
그러자 축융이 약간 당황한 듯했다. 그러고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가 여전히 네놈보다 약할 줄 아느냐?! 한두 번 이겼다고 기가 살아서…….]
[아, 그래 그래. 일단 임무부터 하고 나서 놀아주마.]
손을 휘적대며 거신은 천천히 걸어서 내 삼 장 밖에 섰다. 그리고 내가 얼굴에 쓴 가면을 보고서는 말했다.
[그 가면 때문에 본질을 전혀 알 수 없군. 하여간 네가 명계의 지배자인 전륜성왕을 대신해서 나온 대전사란 말이냐?]
어? 가면?
나는 나도 모르게 얼굴을 더듬었다. 그리고 내 얼굴에 새까만 가면이 씌워져 있음을 알아채고는 급히 말했다.
"……그렇소."
[ 그럼 한 판 붙기 전에 통성명이나 할까. 네 이름은?]
"……."
나는 어찌해야 할지 고민되었다. 그러나 이윽고 거짓말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본질을 볼 수 없다고 했고 내 정체도 모르는 거 같으니까…….'
아마도 방금전 전륜성왕이 씌워진 모종의 가면이 내 정체를 숨겨주는 역할을 하는 듯했다. 나는 가면의 효과를 믿고 거짓말을 했다.
"내 이름은…… 흑웅(黑態)이오!"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눈 앞의 존재는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존재니까.
[그래? 내가 아는 놈과 이름이 비슷하구만.]
후웅
거신의 장군이 내 쪽으로 창끝을 향하며 씨익 웃었다.
[내 이름은 유망(檢岡)이다]
유망이 이 자리에 나타나다니!
'탁록 일대를 경비하던 저 거신족 상위 전사가…… 거신족의 삼대 전사장이었단말인가!'
나는 사실 건달파에게서 전사장이 어떤 존재인지 제대로 듣지 못했다. 하지만 나도 눈치가 있었기에 신농과 수인의 대화에서 전사장이 어느 정도 위치인지 유추하는게 가능했다.
아마도 삼대 전사장이라는 건 거신족의 신인 신농과 그 화신이자 대왕(大王)인 수인을 제외한 모든 거신족 중에서 가장 출중한 전사이자 장군 세 명을 일컫는 말! 그중에서 저 축융은 미래에 배반해서 전욱의 만귀전 수하에 들어가게 되는데, 당당히 만귀전의 서열 2위를 차지하게 되는 놈이었다.
그 말인즉 거신족의 삼대 전사장 정도라면 삼황오제의 직속 심복 중에서 최강급이라고 해도 된다는 이야기이리라.
그리고 나는 축융의 강함을 잘 알고 있었기에 절로 긴장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지금 저들의 대화를 들어 보니 유망은 왠지 축융보다 강한 존재 같았기 때문이다. 실질적으로 상위 신격에 가까워 보였기에 나는 속으로 어이가 없었다.
'저…… 저 정도로 강력한 거신족이 고작 탁록이나 경비하고 있었다고?'
나는 당황스러웠지만 일단 침착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내 한쪽 팔이 없음을 상기하며 천천히 검을 들었다.
"싸우기 전에 물어보고 싶은게 있소, 유망."
전륜성왕이 씌워 준 이 칠흑의 가면은 목소리 또한 상대방에게 변조해서 들려주는 능력이 있는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유망이 당장에 날 백웅이라고 알아챘으리라. 아니나 다를까 유망은 별 의심 없이 대답했다.
[할 말이 많은 녀석처럼 생겼군. 그래 말해 봐라.]
"무기가 많구려. 당신의 주무기는 그중에 도대체 무엇이오?"
유망은 특이하게도 고대의 전사라서 그런지 장비하고 있는 무기가 한 두 개가 아니었다. 그는 우선 등에 활을 메고 있었으며, 허리춤에는 손도끼를 장비하고 있었고 다른 쪽에는 장도(長刀)를 빗겨 차고 있었다. 또한 지금 늘어뜨리며 잡고 있는 것은 바로 창(槍)이었다.
보이는 것만 무려 네 개!
중세 시대의 전사라면 차라리 갑옷을 단단히 챙겨입을 뿐 저렇게까지 잡다하게 많은 무기를 장비하는 일은 없었기에 나는 그의 주무기가 무엇인지 의문이 든 것이다.
[호오…….]
유망은 한 손으로 자신의 턱을 쓸 다가 말했다.
[이상한 소리를 하는구나. 전사라면 당연히 갖고 있는 무기는 다 쓸 줄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럼 당신은 활, 손도끼, 장도, 창 모두를 잘 다룰 수 있단말이오?"
[크하하하. 웃기는구나. 그 정도도 못 해서 어디서 전사라 할 수 있겠느냐.]
"모든 걸 다 익히면 하나에 있어서 극한에 이르지 못하지 않겠소?"
[흐음?]
내가 무림인으로서 지극히 당연한 의문을 제기하자 유망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리고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더니 씩 웃었다.
[오호라. 네 녀석은 그 '메아리(山鳴)'를 따르는 전사로구나]
응?
무슨 말이지?
뭔가 알고 있다는 듯한 유망의 말에서 나는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그냥 별생각 없이 무기의 숙련도로 시비를 걸어 봤을 뿐인데 유망이 마치 무(武)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듯한 반응을 보인 것이다.
그때 뒤에서 관전하고 있던 축융이 짜증 난다는 듯 외쳤다.
[유망! 그 벼룩만 한 놈과 언제까지 입씨름할 셈이냐? 이럴 바에야 내가 나가는 게 맞았겠구나!]
[에잉, 저 애송이 놈이……]
축융의 말에 마뜩잖은 듯 투덜거리 던 유망이 갑자기 몸을 홱 돌리며 손도끼를 축융에게로 투척했다.
구우우웅!
손도끼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날아갔지만 축융은 마치 그 손도끼 의 궤적에 붙잡혀서 움직이지 못하는 듯했다. 축융이 자신에게 날아온 손도끼의 일격에 약간 당황한 듯했으나 이윽고 자신의 손에 들려 있던 흑염(黑炎)의 채찍을 휘둘러서 손도끼를 쳐 내려 했다.
퍼버벅!
그러나 손도끼는 궤적을 막아서는 채찍을 모조리 토막 내어 버리며 이윽고 축융의 가슴팍 앞에까지 도달했고, 축융이 그와 동시에 어마어마한 양의 화염을 전신에서 토해 내며 눈에서 불을 뿜어내었다.
축융지염(祝融之炎)!
타당 하고 튕겨 나오는 소리와 함께 손도끼가 축융의 몸을 둘러싼 화염을 뚫지 못하고 도로 날아와서 유망의 손에 잡혔다. 그러나 축융은 그 일격을 막기 위해서 무려 다섯 걸음이나 뒤로 물러서 버렸고, 그것은 그들 사이의 실력 차를 말해 주고 있었다.
기습을 받은 축융이 분노와 경악을 담아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놈, 미쳤느냐!]
유망은 그런 축융을 비웃었다.
[미친 건 네놈이지, 애송이야. 위대한 신농님의 염원을 담아 명계와 한 판 붙는 일기토인데 뒤에서 아군을 욕하는게 과연 거신족 전사로서 올바른 행동이냐?]
[크윽……]
[나는 내 행동에 늘 책임을 진다. 아가리 닥치고 있어라.]
[유망……!!]
축융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지만 그에게 신농과 수인의 시선이 꽂히자 도리어 찔끔해서 아무 말도 못 하는 것 같았다. 신농과 수인은 유망의 말을 더 옳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유망이 되돌아온 자신의 손도끼를 내 쪽으로 겨누며 말했다.
[자, 보아라. 손도끼를 천하에서 나보다 잘 쓰는 사람은 없지 않겠느냐?]
"……."
나는 물끄러미 그의 손도끼를 보다가 말했다.
"그 손도끼 실력은 당신의 가공할 신력(神方)을 사용한 것이니 순수한 기예(技藝)이자 무(武)라고 할 수는 없지 않겠소?"
[흐하하, 그 얘기를 할 줄 알았다. 산명(山鳴)을 따르는 무사라면 으레 그런 얘기를 하곤 하더군.]
너털웃음을 터뜨린 유망이 말했다. 그러더니 약간의 살기를 담은 눈빛 으로 말을 이었다.
[하나 순수함이란 대체 무엇인가? 약해서 패배하더라도 신의 힘을 쓰지 않는다면 그게 순수한 건가? 순수한 강함만을 추구하는 건 어째서 너희 족속들이 이야기하는 무(武)라고 할 수 없는가.]
"그야 신력을 쓰면 물리 법칙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으니 반칙이잖소."
[목숨을 걸고 싸우는 생사결에서 반칙이 어디 있나? 되려 나는 그 순수성이란 게 의문이 가는군. 약해 도 순수하면 만족하는 거냐?]
"……."
[재미있구나. 명계의 지배자인 전륜성왕이 내놓은 대전사라면 당연히 염라대왕이거나 칠보(七寶)일 줄 알 았는데 너 같은 인간 무사라니…… 하지만 더이상 말로만 시간을 보내면 전사라고 할 수가 없다.]
유망이 손도끼를 다시 허리춤에 넣 고 이번에는 창을 양손으로 잡았다.
부웅!
창으로 정자세를 잡고 나를 겨눈 유망이 나직이 말했다.
[나는 오로지 강함만을 정의라고 본다. 네가 말하는 순수성 따윈 관심 없으니, 똑같이 전력으로 싸우는 게 좋을 것이다!]
나는 그게 유망의 최후통첩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아니, 되레 지금까지 말을 받아 준 게 신기한 것이리라. 이제 내가 뭘 하든 간에 곧 대결은 시작될 것이고 나는 유망에게 패배 할 것이다. 나는 도저히 유망을 이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고, 굳이 말하자면 사대신기를 쓰는 수밖에 없었는데 그래도 될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끓어오르는 불안 감과는 달리 겉으로는 침착하게 유망에게 말했다.
"알았소. 그럼 당신 말대로 전력을 다할 테니 약속해 주시오. 내가 이긴다면 당신이 말하는 산명(山鳴)이란 게 뭔지 알려 주시오!"
혹시 모르니까 이 정도 약속은 받아 놓자. 그러자 유망이 씩 웃으며 말했다.
[그럴 줄 알았다. 너희 족속들은 늘 정체도 모르는 그 존재를 갈구하고 있으니……]
"약속해 주시오."
[약속한다.]
우우웅
전장(戰場)의 공기가 낮게 깔린다. 나는 막상 유망의 앞에서자 머릿속이 더욱 차분해지고 손발이 마치 가볍게 변한 것을 느꼈다. 이렇게까지 집중력이 고여서 도야(陶治)하는 상태는 한두 번 겪은게 아니었지만, 이번에는 의식적으로 집중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게 큰 차이점이었다.
왜일까? 이렇게 차분해지는 이유…….
'객관적으로 볼 때 사대신기에 뭔가를 바쳐서 신기를 쓰지 않으면 절대 못 이기는 싸움이다…… 하지만…….'
건달파도 축융도 한 방에 날려 버리는 저 괴물 같은 전사를 상대로 공포심은 들지 않는다. 도리어 지금 내 혈관에 차갑게 서리면서 혈육(血肉)을 들끓게 하는 이 감정의 이름은 바로 호승심이었다.
호승심?
어째서 그런 마음이 드는 거지?
지금 내 실력과는 아예 차원이 다른 상대일 텐데?
나도 내 마음의 작용을 알지 못해서 어리둥절해하고 있을 때, 마치 기적처럼 조용하게 - 하지만 마치 필연(必緣)이었던 것처럼 상단전(上丹田)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뇌 속이 부글거리며 떨렸고 그 내면에 있는 형용할 수 없는 소우주(小宇宙)가 그 모습의 편린을 드러낸다.
스스스스…….
마치 짙은 안개가 낀 것과 같았던 소우주의 내부가 환하게 밝혀지며 내 심령(心靈)이 그 무한한 공간 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같은 착각이 들 었다. 나는 눈을 반개(半開)한 상태로 내게 일어나고 있는 이 기이한 변화에 적응하려 애썼지만 이윽고 적응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 수가 있었다.
'그렇구나…….'
시작되고 있다.
여태껏 계속 정상 궤도에 오르려고 애썼지만 그토록 애를 썼어도 되지 않는 것이 지금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틀림없이 전륜성왕이 내 신력을 안정화시켜 준 기연(奇緣)과 그동안의 노력 덕분이리라.
두웅-
첫 번째 원(圓)이 내면에서 휘돌아서 점(点)에서 점(点)으로 이어진다.
첫 번째 원이 형성되자 곧장 두 번째 원이 상하축(上下軸)을 걸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깔끔하게 이어졌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원(圓)이 크게 천지(天地)를 분단하는 듯한 환영과 함께, 나는 상단전에서 일어난 삼원(三圓)의 작용이 서서히 중단전(中丹田)으로 내려가는 걸 알 수가 있었다.
마음의 밭에서 일어난 그 모든 것은 의념(意念)일지니.
상상력의 세계가 현실을 변동시키노라.
알 수 없는 결구(決句)가 머릿속에
한바탕 메아리쳤다. 비슷한 글귀는 여러 번 들어 봤지만, 왠지 이 결구 자체는 현묘한 뜻을 지니고 있어서 내게 깨달음의 영역을 가져다주고 있었다.
투두둥!!
중단전을 통해서 쑤욱 내려간 거대한 힘은 이윽고 하단전까지 일맥관통(一脈貫通)했고 마치 내가 생사현관을 뚫었을 때와 같은 감각을 가져 다주었다. 이미 내 기혈은 모두 뚫려 있음에도 이런 느낌이 드는 것은 이번에는 영혈(靈穴)이 관통되어 영성이 한층 강해지고 있기 때문이리라.
고오오오-
잠시후 나는 내 머리 뒤편에 후광(後光)이 일어나며 내 정신에 오로지 고요한 삼원(三圓)이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제자리를 잡고 있다는 사실을 느꼈다. 내 상단전이 모든 준비를 마치자, 익숙한 목소리가 정신세계 저편에서 들려왔다.
어두운 흑무(黑露)에 뒤덮인 채 관포(官布)를 입고 있는 존재였다.
[다시 뵙소, 내 영혼의 주인이여. 머나먼 세월이 필요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결국 힘의 안정화를 이뤄 내셨구려.]
왔구나.
오랜만에 보니까 반갑다.
[주인이라면 지금 당장 그 힘을 사용해도 눈앞의 거신과 대등할 수 있을것이오. 최대한 힘을 빌려드리겠소.]
아니, 그렇지 않아.
신력이 모두 안정을 이룬 지금이라 면 알 수 있다.
지금으로서는 '이 힘'을 다루는데 있어서 나보다 네가 훨씬 강력하다는 사실을.
[그렇다면…….]
네게 맡기겠다.
지금은 이 힘을 다루는 법을 배워야 할 필요가 있으니 널 보고 배울 거야.
저 유망도 전력으로 싸우라 했으니 그게 예의겠지.
[알았소.]
서서히 흑무에 휩싸인 존재가 내게 다가오더니 삼원의 정점을 향해 연기처럼 빨려 들어가는 게 보였다. 그와 동시에 내 의식이 뒤편으로 날아가기 시작했고, 잠시 후 신력을 방출해서 어마어마한 영력을 전신에 휘감고 있던 내 몸이 서서히 힘을 거둬들이는 게 느껴졌다.
쿠궁…….
마치 약해진 것처럼 보였지만 그렇지 않았다. 전신에 한 차례 해방되었던 적생신력(積生神方)들이 통일성을 갖고 흡수되어 갈무리된 것이다. 이윽고 내 의식을 대신해서 몸을 차지한 어둠의 존재가 입을 열었다.
[나는 맹서(盟警)를 지키기 위해 이 자리에 왔노라.]
치지징!!
몸 안에서 꿈틀거리던 시커먼 기운이 마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