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갑이 소환되자 나는 바로 질문했다.
"이광의 저주를 해제하고 싶다. 다만 대가가 부족하니 대납을 하고 싶은데 가능한가?"
그러자 잠시후 귀갑 위에 글자가 떠올랐다.
[대납에 필요한 신뢰도가 부족합니다. 신뢰도를 더 쌓아 주십시오.]
"어?! 신뢰도라니? 그건 어떻게 쌓 는거냐?"
우웅
귀갑 위에 웬 사각형의 표가 떠올랐다. 마치 위계등급을 설정한 듯한 그 표에는 마두의 단위와 함께 명칭이 적혀 있었다.
1급 전신(錢神)
2급 천하대상(天下大商)
3급 전귀(錢鬼)
4급 대상인(大商人)
5급 상좌(商座)
6급 상상(上商)
7급 중상(中商)
8급 하상(下商)
9급 하하상(下下商)
10급 천상(賤商)
슈슈슉
귀갑의 설명이 이어졌다.
[돈을 투자하여 상인의 위계를 올리고 귀갑의 신뢰도를 해금(解禁)해 주십시오. 신뢰도가 쌓이면 '대납'을 하실 수 있습니다.]
"…… 단골고객이 되어야 외상을 해주는 느낌이구만."
[현재 귀하는 10급 상인인 천상(賤商)입니다. 9급인 하하상(下下商)이 되셔야 대납이 가능합니다.]
"흐음."
나는 그제서야 이 창힐의 권능인 상업(商業)이 어떤 능력인지 감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권능을 사용하는 자는 상인(商人)처럼 생각해야 해.'
말 그대로 인간의 상행위를 구현한 초상능력!
상도(商道)에 따라 능력이 발동하고, 조건이 맞을 경우 좋은 거래를 해서 계약자가 더 좋은 대가를 따내는 특수한 능력인 것이다. 내가 능력의 원리를 인지하고는 귀갑에게 물었다.
"이 능력의 전 사용자는 창힐이었 는데 창힐은 몇급까지 갔었냐?"
당연히 1급이겠지?
그러나 내 예상과는 달리 귀갑은 뜻밖의 대답을 했다.
[4급인 대상인(大商人) 단계에서 승급을 멈추었습니다.]
"뭐?! 자기가 창조한 능력인데 자기가 1급까지 가지 않았다고?"
[그렇습니다.]
이렇게 이상한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자기가 만든 능력인데 최상의 단계까지 발전시키지 않다니!
내가 놀라워하자 옆에 있던 건달파가 말했다.
"어차피 이 능력은 창힐이 제물을 모으고 빠르게 강해지기 위해 창조한 능력입니다. 황제 공손헌원의 신임을 얻어 신격이 된 다음부터는 굳이 이런 초상능력을 발전시킬 필요를 느끼지 못했겠지요."
"음…… 그런가……."
"허나 달리 말하자면 주군께서는 창힐조차도 도달하지 못한 단계에 가실 수 있단 뜻이겠지요."
그렇게 중얼거린 건달파가 말을 이 었다.
"아무튼 그렇다면 이번엔 대출(貸出)이 되는지 물어봐 주십시오."
"대출! 돈을 빌리자고?!"
"짧은 시간에 자본을 늘리기 위해서는 필수적입니다."
"그거나 대납이나 같은 거 아니냐?"
건달파가 단호하게 말했다.
"다릅니다. 중요한 거니 꼭 물어보십시오."
나는 하는 수 없이 건달파의 말대로 귀갑에게 질문했다.
"대출은 몇등급이 되어야 할 수 있지?"
[대출은 10급인지금도 하실 수 있습니다. 단, 대출한도가 있습니다.]
"얼마인데?"
[신뢰도가 없기에 최대 5만 마두이며 이자는 1일 7할입니다.]
"……."
무척 짜다. 게다가 이자가 하루에 7할이라는 건 뭔가 문제가 있는게 아닐까?
"대출을 못 갚으면 어떻게 되는데?"
[부족한 만큼 채무자의 모든 것을 빼앗아갑니다. 영혼까지도.]
"……."
이러니저러니 해도 마도계열의 능력이군…….
옆에서 귀갑과의 대화를 보고 있던 건달파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10급인 천상 단계에서 는 신뢰도도 없고 대출조차도 악덕 고리대금업자 수준인 모양이군요."
"등급을 올려야 하나보군. 쳇, 이러면 이젠 별수 없잖아. 나가서 마물 사냥을 해서 마두나 쌓자구……."
"으흠…… 도움이 못 되어서 죄송 합니다."
건달파가 민망해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이 능력에 대해서 파악한 것만으로도 이득이지."
지금 당장은 외상이나 대출을 할 수 없지만 왠지 능력의 급수를 올릴 때마다 더 많은 능력이 생길 거라는 직감이 든다. 그리고 이 능력을 활용한 창힐이 어떻게 삼황오제에 준하는 신으로 승천한 건지 알 것만 같았다.
우웅
나와 건달파가 밖으로 나오자 다시 울창한 숲으로 나와 있었다. 유망은 보이지 않았지만 보나마나 거신족의 강대한 신력으로 우리를 감시하고 있을 게 뻔했다. 나는 건달파에게 말했다.
"마력을 감지해서 근처에 강한 마물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 줘."
"존명."
타닷!
나는 건달파와 함께 숲을 가로질러서 마물이 있는 곳으로 갔다. 숲을 약 오 리 정도 뛰었을 때 건달파가 옆에서 나무 사이를 뛰다가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주군. 아무래도 이 숲은 기문둔갑(奇門遺甲)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째서 이 시대에 기문둔갑이……."
"기문둔갑?"
"눈치채지 못하셨습니까?"
건달파가 잠시 아름드리 나무의 가지 위에 멈춰 서서는 말했다.
"이 숲의 모든 것이 방향을 혼란케 하고 시공간을 접어서 왜곡시키고 있습니다."
"흠! 전혀 몰랐군…… 어떻게 안 거지?"
"무림인으로 활동해온 세월이 수백 여 년이 넘는지라……."
"아……."
맞다. 건달파는 본래 상고시대의 인물이었는데 무림인으로도 걸선이나 다른 신분을 이용해서 수백 년을 살아왔던 것이다. 세상에서 건달파 보다 무림경험이 많은 존재는 찾아 보기 힘들 것이리라.
건달파가 한 방위를 뚫어져라 바라 보더니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목적은 숲의 중앙에 도달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 같습니다."
"중앙에 뭔가 있는 건가?"
"아마 그럴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지금 가려는 마물 퇴치장소로 가는 것도 기문둔갑에 방해받겠나?"
"아닙니다. 중앙으로 가지 못하게 할 뿐 다른 모든 것을 숲 밖으로 튕겨내는 구조군요."
"그럼 우리와 직접 상관은 없다는 거군……."
"그렇습니다."
나는 짚이는 게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지금은 무시하자. 어차피 나중에 가게 될지도 몰라."
"존명."
타닷
약간을 더 움직이자 마침내 숲의 외곽 쪽으로 나와서 커다란 산과 벌판이 맞닿아 있는 장소가 보였다. 그리고 너른 벌판을 보자마자 나는 뜻밖의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경악했다.
"어…… 어?!"
키이이이!!
키기긱!!
수십 마리의 괴이한 음영(陰影)이 흐르며 때로는 여우, 개, 혹은 고양이나 호랑이 등의 각종 동물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러다가도 난데없이 인간의 사자(死者)와 같은 모습으로 마구 분신을 해대었다.
키이이이 - !!
천공을 메우듯 그 존재감을 과시하는 악령(惡靈)들은 기이한 귀곡성을 울려 퍼지며 마구 날아다니고 있었다. 언뜻 망령처럼 보였지만 그 흉험한 기운은 결코 보통이 아니었고 나는 분명히 저 존재들을 본 적이 있었다.
아니, 꽤 자주 마주쳤다.
놀란 것은 건달파도 마찬가지인지 그도 눈을 크게 흡뜨고 허공을 보고 있었다. 건달파는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만귀전(萬鬼殿)의 소신격(小神格)들이!!"
하나하나가 대라신선에 맞먹는 만귀전의 강력한 귀신들이 떼거지로 출현한 것이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후 - 우우웁!!"
누군가가 거세게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의 진원지를 쳐다보니 그곳에는 절벽 위에 웬 건장한 사내가 양팔을 벌린 채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사내는 계속해서 숨을 들이쉬었고 이윽고 사내를 중심으로 대기가 크게 일그러지는 게 보였다.
쿠구구구구
[끼이이이익 !!]
[크아아아아. 그만둬 ]
하늘을 날아다니던 만귀전의 소신격들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사내가 숨을 들이쉬면서 생겨나는 기묘한 와류(溫流)에 그들의 몸뚱이가 끌려들어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투둥!
투확
그들은 저항하려는 듯 이윽고 강력한 주술의 언령을 내뱉어서 사내를 공격했으나 전혀 통하지 않는지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고, 사내는 잠시후 더욱 크게 한 번 숨을 들이 쉬었다.
슈우우웁!!
마치 실처럼 가늘게 변해서 사내의 입 속으로 만귀전의 귀신들이 빨려 들어갔다. 귀신들은 이윽고 마지막 한 마리까지 빨아먹혀서 더이상 공중에 날아다니지 못했다. 사내는 꿀꺽 하고 목울대를 한 번 움직이더니 잠시후 크게 트름을 내뱉었다.
꺼 - 억!!
"……."
지금 내가 뭘 본 거지?
난데없는 상황에 내가 굳어 있자 절벽 위에 있던 사내가 힐끔 나와 건달파 쪽을 보더니 말했다.
"식사 중이니까 저리 가라!"
사내의 생김새는 말 그대로 야만인이라는 표현이 어울렸다. 우락부락한 장골의 체격에 전신에는 두꺼운 근육이 가득 붙어 있었으며 중요 부위만 가리고 있는 바지인지 뭔지 모를 옷을 입고 있었다. 또한 네모지게 각지고 다부진 얼굴은 굳이 얘기 하자면 야성적인 외모였다.
특이한 점이라면 사내의 눈은 은안(銀眼)이었다. 검은 머리카락에 은색 눈동자는 절대 흔한 게 아니었으며 자연적으로는 나올 수 없는 색깔이었기에 나는 특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사내에게 외쳤다.
"걱정마시오! 우린 마물을 잡으러 왔소. 당신처럼 만귀전의 귀신을 잡아먹으러 온 건 아니오!"
경험상 의문의 존재가 나타났다면 굳이 싸우려 들기보다는 마찰을 피하는게 낫다. 내가 대답하자 사내는 묵묵히 우리 쪽을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마물이라고? 네 바로 옆에 있는 그 늙은이 또한 마물이 아니냐!"
"!!"
나는 약간 당황해서 옆에 있던 건달파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지금 걸선의 인간모습으로 변신해 있는 건달파를 아무리 보아도 마력이 흘러 나오지 않았다.
'팔부신중이 인화(人化)하는 변신술은 완벽해. 수천 년씩이나 술법을 연마한 놈들인데 당연하지. 자기자신이 일부러 마력을 흘리지 않는 한 나도 눈치채기 힘들 정도로 마력을 잘 숨겼는데?'
단지 힐끔 본 것만으로 건달파의 본질을 파악했다는 말인가? 그 정도로 정확한 파악은 고명한 대라신선이라 해도 불가능한 경지였다. 집중해서 쓰는 화안금정이나 전국옥새로 발동하는 전시안정도가 아니면 그럴 수는 없다.
나는 혹시나 해서 사내에게 대꾸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우린 인간이오."
은안의 사내는 코웃음 치며 나를 비웃는 듯했다.
"흥! 인간이라고? 네놈은 모르겠다만 옆에 있는 놈은 강력한 마력을 숨기고 변신해 있는 상급마물이구나. 정말 인간이라면 네 옆에 있는 놈을 잡아먹어도 끼어들지 말아라."
스스스
"흐으으……."
은안의 사내가 갑자기 합장을 하더니 다시 한번 숨을 크게 들이쉬기 시작하는게 보였다. 마치 방금전 만귀전의 소귀신들을 흡입하던 때와 같은 수법 같았다.
그러자 건달파는 약간 다급해진 기색으로 내게 말했다.
"위, 위험합니다. 저자를 멈춰주십시오."
"어떻게?"
"주군의 선택에 맡기겠습니다."
건달파 또한 저 은안의 사내가 심상치 않은 걸 느낀 것 같았다. 사실 강력한 마왕 중 하나인 건달파가 인간을 보고 일견에 움츠러들 이유는 없지만 건달파는 저 사내가 고강한 존재라고 직감한 모양이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저 자를 공격해서 술수의 시전을 멈추던가 아니면 말로 설득하는 거군.'
딱 봐도 마물에 강렬한 적의를 가진 자라서 임시로 둘러대었는데 그게 악수로 작용한 듯싶었다. 나는 싸울까 말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싸우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며 그에게 외쳤다.
"멈추시오! 멈춘다면 당신에게 보물을 주겠소."
그냥 멈추라고 하면 멈출 리가 없다. 당연히 이득을 제시해야 멈추는 게 교섭의 기본일 것이리라.
멈칫
그러자 은안의 사내가 호흡을 들이 쉬던 행동을 멈추었다. 그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여전히 합장을 유지한 채 이쪽을 보았다.
"보물이라고? 뜬금없이 무슨 소리냐."
"거짓말을 해서 미안하오. 다만 우리는 거신족 전사 유망의 부탁을 받아서 마물을 퇴치하러 돌아다니고 있었을 뿐이오. 이 마족(魔族)과는 잠시 의뢰를 위해 함께 다니는 관계이고 마물을 탐지하는 역할을 맡고 있으니 봐 주시오."
"……."
"당신과 굳이 싸우고 싶지 않소. 전투를 피할 수 있다면 내가 가진 보물쯤은 넘겨드리리다."
은안의 사내는 뭔가를 깊게 생각하는 듯했다. 그러더니 내게 말했다.
"유망이 너희에게 마물퇴치를 맡겼단 말인가?"
응?
유망을 아는 건가?
"그렇소."
"이름이 뭐냐?"
"나는 백웅, 이쪽은 건달파요."
"잠깐 기다려라. 확인해 보겠……."
쿠구궁!!
그때 갑작스럽게 저만치 지평선 너머에서 땅거죽이 뒤집히며 큰 지진이 일어났다. 상당히 큰 지진이라서 내 발밑이 덜컹덜컹거리고 육안으로 대지가 갈라지는 게 보였다. 그리고 갈라진 땅 너머에서 시퍼런 촉수 덩어리가 튀어나오는 게 보였고 그건 틀림없이 새로운 적인 것 같았다.
우오오!
그와 동시에 머나먼 천공에서도 용명(龍鳴)이 터져 나오는 게 들렸다. 그리고 시꺼먼 비늘을 가진 용들이 홰를 치며 날아다니는 게 보였다. 차원문을 열고 나타난 흑룡(黑龍)들 또한 상당한 힘을 가진 것 같았다.
갑자기 괴물들이 대거 등장하자 은안의 사내가 골치 아픈 듯 눈을 찡그렸다.
"오늘 혼돈의 존재들이 작정하고 탁록에 쳐들어오는구나. 너희가 정말 저놈들과 관계가 없다고?"
"저놈들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소. 당신이야말로 저 괴물들이 뭔지 아시오?"
"……."
은안의 사내가 침묵하다가 말했다.
"일단 저놈들을 물리쳐라. 그럼 일단 너희 말을 믿어주마."
"좋소."
저 괴물들도 만만치 않은 존재들이지만 왠지 눈앞의 은안사내보다는 훨씬 무난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힘의 강약에 민감한 건달파가 저 사내를 두려워하는 건 이유가 있으리라.
나는 옆에 있던 건달파에게 말했다.
"촉수와 흑룡. 어느 쪽이 쉬울까?"
건달파는 괴물들을 하나하나 살피 다가 말했다.
"흑룡이 낫겠습니다. 저 푸른 촉수는 무척 강합니다."
"좋아, 가자."
파앗
나는 건달파와 함께 왼쪽 하늘에서 날아오는 흑룡 수십 마리를 향해 날아갔다. 건달파는 한 차례 경공으로 하늘로 도약하더니 그대로 변신을 풀어서 마왕(魔王)의 본체를 드러내었다.
쿠구구구!!
건달파의 마력파장이 퍼져나가며 사방에 큰 압력이 생겨나고 현실의 법칙이 잠시 일그러지는 느낌이 들었다. 인간과 뱀이 합쳐진 듯한 사인이 바로 그의 진짜 모습!
육중한 건달파의 사인체(姓人體) 전체에서 마치 둥근 결계처럼 보이는 파장이 일렁이면서 고대의 범어(楚語)가 장중한 기세로 회전하는게 보였다.
나는 그런 건달파의 마력을 감지하며 내심 감탄했다.
'역시 팔부신중! [옛 지배자] 같은 괴물에겐 비교할 수는 없지만 강하긴 강하다. 아마수정석비의 조각을 흡수해서 원래보다 더 강해져 있겠지. 지금 상황에서는 든든한 아군이구나.'
그런데 저런 건달파조차 쪼그라드는 유망과 저 은안 사내는 뭐 하는 놈들일까? 나는 왠지 고대의탁록이 장난 아닌 마경(魔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옆에서 날개를 펴고 날아가던 건달파가 영언(靈言)으로 내게 말했다.
[용의 약점은 목 아래에 거꾸로 붙 어 있는 역린(逆鱗)입니다. 저놈들을 통으로 베어내려면 방어력이 높아 단단할 테니 거기를 노리십시오.]
"알았어!"
퉁!
나는 천상제의 경공으로 허공을 한차례 박차고는 전방으로 쇄도했다. 그리고 제일 앞에 있던 흑룡을 향해 그냥 전력을 다해서 뇌령인(雷靈印)을 방출하려다가 멈칫했다.
'구궁파천뢰…….'
얼마 전 이광에게서 배운 삼재(三 才)의 공정(丁程)!
구궁파천뢰를 더욱 효율적이고 강하게 만드는 그 요령을 수련했었기에 나는지금이 바로 그 수련성과를 보일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진기를 응축해서 장력을 뿜는 것은 개나 소나 다 하는 것이지만, 이런 실전 속에서 배운 바를 실천하게 되면 훨씬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한 나는 몸속에서 뇌혼(雷魂)을 공명시켜 구궁파천뢰를 발동시켰다.
치리링!
'여섯 개!'
원래 아홉 개의 뇌혼을 꿰어서 공명하는 방식에서 한 걸음 나아가서 최대한 공명하는 뇌혼의 갯수를 줄여서 효율을 추구하고 더 빠르고 강한 뇌혼연계를 가능하게 하는 삼재의 공정! 진소청이 알아낸 이 방식은 최대 3개까지 공명의 갯수를 줄일 수 있었지만 나는 아직 수련도가 부족해서 최대 5개까지가 한계였다. 그나마도 지금은 집중이 잘 안 되어서 6개에서 그친 모양이었다.
그러나 삼재의 공정 자체는 성공했다. 나는 평소보다 뇌혼이 빠르게 공명하면서 전신에 번개의 기운이 이글거리는 것을 느꼈고, 그 증폭된 뇌령지기를 이용해서 장심(掌心)에 공력을 모았다.
'여기서 방출하지 않고 한 번 뇌명을 섞어준다!'
일백(一白) 뇌령인(雷靈印)
이흑(三黑) 뇌명(雷鳴)
치치치칭!!
가득 모였는데도 발사되지 않고 뇌명의 기운으로 한 차례 더 응축된 뇌령인의 빛이 크게 쪼그라들었다. 나는 이게 뇌령지기가 압축되는 현상이라는 걸 알고 있었고, 실전에서 제대로 써 보는 건 처음이었다. 뇌령지기가 크게 날뛰기 시작하는게 느껴지자, 나는 다시 한번 뇌령인의 요결을 시전하며 장심에 크게 힘을 모았다.
쿠구구구 -
응축된 뇌령지기가 중첩되며 원형의 기운으로 더욱 압축된다. 나는 한계까지 뇌령지기가 모이자 그대로 전력을 다해 손을 앞으로 뻗었다.
삼벽(三署) 특뇌령인(特雷靈印)!!
내가 장심에 모은 둥근 기운이 마치 거대한 빛의 기둥처럼 변해서 앞으로 뿜어져 나갔고, 그건 틀림없이 평소에 내가 펼치던 전력 뇌령인과는 다른 형상이었다. 그리고 그 빛의 기둥은 흑룡 무리의 한가운데를 스치고 지나갔다.
퍼어어엉!!
[끄에에엑!!]
[크아악!!]
다음 순간 뇌령인의 빛의 기둥이 사방으로 확산되더니 흑룡무리를 집어삼켰고, 범위 내에 있던 흑룡들 중 열다섯 마리가 비명을 지르며 날개와 몸이 불타기 시작했다. 놈들은 허우적거리다가 땅으로 떨어지기 시작했고, 근처에서 날아오던 다른 흑룡들이 놀라서 그 자리에 멈추고 말 았다.
옆에서 내 일격을 보던 건달파가 경탄한 듯 말했다.
[과연 주군!! 용의 역린을 노리는 것 같은 쪼잔한 공격은 하지 않고 힘으로 찍어누르겠단 말씀이십니까!!]
"……."
음 아니…… 그냥 시험 삼아서 수련할 겸 한 방 날려 보고 나서 역린을 공략할 셈이었는데 특뇌령인이 너무 셌던 거 뿐인데…….
내가 뻘쭘해서 입을 닫고 있자 건달파가 자신의 쌍장을 가슴 앞에 모으며 말했다.
[그 패도(廟道)에 이 건달파도 호응하겠습니다.]
오오오오 -
비나쉬 일족 비전(秘傳)
멸망의 춤(कयामत का नृत्य)
건달파의 쌍장 사이에서 유리구슬이 격렬하게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그리고 유리구슬에서 무수한 숫자의 새까만 나비들이 소환되더니 앞으로 마치 구름떼처럼 날아가는 게 보였다. 나비 떼가 얼마나 많은지 순식간에 흑룡들이 있는 지역을 뒤덮어 버렸고, 흑룡들은 검은 나비들을 화염의 숨결로 없애 버리려 했지만, 너무 많아서 떨쳐내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퍼버벅
[크어어억]
나비들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군체(群體)가 되어 흑룡들의 날개를 찢어 버리고 먹어치웠다. 흑룡들은 대항조차 변변히 하지 못하고 뒤로 날아서 피하는 것밖에 할 수가 없는 듯했다. 나는 건달파의 강력한 술법에 깜짝 놀랐다.
"그건 뭐지?"
[혼돈의 차원에 사는 악마의 식인나비들을 소환하는 주문입니다. 십 년에 한 번 밖에 쓸수 없는 강력한 주문이니 효과는 확실할 것입니다.]
"으음!"
틀림없이 대라신선의 보패로도 흉내내기 힘든 어마어마한 술법!
마왕의 이름값을 할 만한 위용이었다.
이런 놈과 적이 되어서 싸우면 꽤 골치 아플 게 틀림없다. 물론 나는 천인과 일대일로 싸워서 해치운 적 있었지만 싸움은 상성이란 게 있는지라 이렇게 다양한 주문을 구사한 건달파를 상대로는 나도 방심할 수 없는 것이다.
흑룡들은 나와 건달파에게 크게 한 방씩 당하자 숫자의 절반이 줄어들었고, 남은 놈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갈팡질팡하는 듯했다. 그러더니 흑룡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커다란 흑룡이 우리 앞으로 날아와서 말했다.
[너희는 누구냐? 우리가 촉룡(燭龍)의 신(神)을 모신다는 걸 알고 싸움을 거는 것이냐!]
"!!"
촉룡신!
복희를 따라 이 세계로 들어온 다른 세계의 [옛 지배자]! 우주의 귀고(鬼姑)에서 탄생했다고 하는 그 존재는 미래에 텅텅 비어 있는 명계에서 인간의 영혼을 잡아먹으며 지내는 걸로 알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촉룡신이 부하를 거느리고 심지어 지상에서 활발하게 움직이게 할 줄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군.'
이 시대에는 촉룡신도 지상에서 날뛰는 건가?
뜻밖에 아는 이름이 나오자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흑룡이여! 죽고싶지 않다면 이만 물러가는 게 좋을 것이다. 이 탁록에서 촉룡신의 권위는 통하지 않는다."
내 목적이 마물 퇴치이긴 하지만 왠지 저 흑룡들이 전력을 다해서 대항하면 무척 귀찮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신의 명을 받아서 움직이는 따까리들이라면 당연히 비장의 무기 한두 개는 갖고 있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어차피 용을 열 마리 이상 죽였다면 돈도 쏠쏠하게 벌었으리라.
그러자 흑룡의 우두머리는 크게 화난 듯 이를 갈았다.
[두고봐라…… 혼돈의 인간들이여! 아무리 염제의 가호를 받는다 한들, 언제까지 그 위세가 갈 순 없을 것 이다!]
슈아아악
흑룡들은 잔존병력을 이끌고 물러나 버렸다. 나는 그런 흑룡들을 보면서 실리를 챙겼다고 생각하면서 어리둥절한 생각이 들었다.
"혼돈의 인간?"
무슨 말이지?
그때 건달파가 내게 말했다.
[주군. 저쪽 싸움도 거의 결판이 난 것 같습니다.]
건달파의 말에 나는 안력을 돋우어 먼 곳에서 은안의 사내가 싸우는 장면을 보았다. 그리고 어느새 땅거죽을 뒤집고 거대한 구근(球根)을 드러낸 채 덩굴줄기처럼 일대의 벌판을 어둠으로 뒤덮은 촉수괴물의 모습에 놀랐다.
끼오오오
촉수는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였고 굼실대는 촉수에 맺혀 있는 혼돈이 흔들릴 때마다 어둠의 포자가 대지에 내려앉았다. 내려앉은 포자는 또다시 촉수를 뿌리부터 빠르게 생장시키는 듯했다.
"저건 뭐지?"
[역시 그랬군요.]
건달파가 팔짱을 끼며 대답했다.
[저건 머나먼 성좌에서 온 혼돈의 하급신입니다.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먼 성계(星界)에서 소환된 존재라서 이 세계의 법칙에서 많이 벗어나 있지요.]
"하급신?! [옛 지배자]라는 소리냐."
[아닙니다. 굳이 비교하자면…… 전에 말씀해주신 할치올레이푸라 라는 존재와 가까울 것입니다.]
"음! 그랬던 거군."
나는 건달파의 말에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수백만, 아니 수억 광년 바깥의 엄청난 거리에서 찾아온 이계의 성좌! 본디 자신의 차원계에서는 신이라 불릴만한 힘을 갖추고 있으며 [옛 지배자]들과 합의에 의해 사도가 되기도 하는 강력한 혼돈의 존재가 이 자리에 소환된 것이다.
'아마 저 괴물도 할치올레이푸라처럼 강대한 사도가 될 수 있겠지.'
나는 건달파가 촉수괴물과의 전투를 피하고 흑룡과 싸우자고 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흑룡은 아무리 강해 보여도 결국 필멸자의 종족이지만, 저 촉수괴물은 틀림없이 신력(神方)을 지닌 반투명한 영체(靈體) 이자 하급신이다. 격이 다른 상대라는 걸 한눈에 알아본 건달파가 좀 더 쉬운 상대를 고르는데 성공한 것이다.
'괴물이 너무 커서 은안의 사내가 보이지 않는군…….'
이미 산을 뒤덮을 크기로 자라난 촉수괴물이었기에 고작 인간의 크기 는 잘 보이지도 않았고 그나마도 촉수줄기에 가려져 있었다. 상황을 알 수 없어서 내가 주시하고 있을 때 건달파가 깜짝 놀랐다.
[저, 저건!]
슈와아악 -
갑작스럽게 육안으로 보일 정도로 촉수덩어리들이 어떤 한 점에 빨려들어가기 시작했다. 빨려들어가는 속도는 너무나 빨라서 고작 숨 몇 번 쉴 동안에 촉수는 절반 이상 빨아 먹혔다.
쿠우우우 - !!
촉수가 저항하려는 듯 갑자기 현란한 마법의 문양을 소환했고 동시에 눈이 아릴 정도의 섬광을 연속으로 터뜨렸다. 저 섬광의 효과가 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공간이 통째로 녹으면서 대지가 푹 꺼지는 걸 보니 저기에 있으면 뼈도 못 추린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쿠구궁
투웅!
백여 장에 이르는 거대한 대지의 구멍이 생겨나며 급속히 성장한 촉수 줄기가 마치 허공으로 뻗듯이 튕겨 나왔다. 그러나 번들거리는 눈이 박혀 있는 그 촉수 줄기는 마치 크게 당혹한 듯 허우적거렸고 이윽고 단말마를 내질렀다.
[@*%&&*@&[email protected]% ]
슈르르륵 -
잠시후 거대촉수가 통째로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빨려들어가기 시작했는데, 이번에는 방금전과는 달리 여러 개의 균열이 생겨서 촉수를 잡아 찢듯이 당기고 있었다. 그 흡인력에 저항하려는 듯 거대촉수가 계속해서 강대한 마력을 써서 마법진을 소환했지만, 역부족인 듯, 잠시후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흑혈(黑血) 이 천공에 터져 나왔다.
푸슈슈
잠시후 핏줄기마저도 허공에서 빨 려들어 갔고 마치 다리를 쥐어뜯긴 문어처럼 바들거리던 촉수괴물이 소리를 내질렀다.
[*@&%@%* - !!]
슈슈슉…….
그것이 촉수괴물의 최후였다. 허공의 균열에 모조리 흡수당한 촉수괴물은 이젠 아예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 잔해조차도 가루가 되어서 흩어지는 게 보였다.
"가보자."
[존명.]
나와 건달파는 전투가 끝난 장소에 날아서 착지했고 거대한 구멍 앞에 섰다. 그리고 잠시후 뻥 뚫려 있는 대지의 구멍에서 은안의 사내가 날아서 빠져나오는 게 보였다.
'하늘을 날 수 있군…….'
타닷
우리 앞에 착지한 은안의 사내는 상처 하나 없었으며 옷도 찢어지지 않았다. 그 대신 뭔가를 질겅질겅 씹고 있었다.
퉷
살덩어리 같은 것을 뱉은 은안의 사내가 험상궂은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용을 물리치는 걸 봤다. 이상한 기술을 쓰는 놈이군."
우우우
은안의 사내가 양팔을 늘어뜨리자 심상치 않은 기운이 흘러나왔다. 그게 살의인지 뭔지 몰라서 나는 나도 모르게 경계했지만 일단 검은 뽑지 않았다. 그러고는 대꾸했다.
"내가 볼 때는 당신의 기술이야말로 이상하오. 설마 혼돈의 괴물을 잡아먹을 수 있는 거요?"
은안의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게 바로 나의 능력이다. 너는 손에서 번개광선을 뿜어내는 능력을 타고났나 보구나."
"?"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이건 능력이 아니라 무공이오. 이 름은 뇌령인(雷靈印)이라고 하는 장공(掌功)이고, 누구나 수련해서 익힐 수 있는 무술이지."
"무공? 무술?"
"당신은 무공이 뭔지 모르시오?"
그러자 은안의 사내는 뜻밖에 상당히 당황해하며 말했다.
"그, 그게 뭔지 잘 모르겠군…… 능력은 모두 타고나는 게 아니냐? 수련해서 다른 능력을 더 익힐 수 있다는 말인가?"
"음…… 그렇소."
"그거 참 대단하군. 남의 능력을 복사하는 놈은 있는데 설마 익힐 수 있을 줄이야……."
"……."
너무 고대로 와서 무공이 존재하지 않는 건가? 그런데 그걸 감안 하더라도 눈앞의 사내가 보이는 반응은 뭔가 이질적이었다.
은안의 사내가 말했다.
"혼돈의 괴물과 같이 싸워주었으니 일단 너희 말을 믿어보겠다. 이름이 백웅과 건달파라고 했던가."
"그렇소."
"나한테 보물을 주겠다는 약속은 지키겠지?"
이놈봐라?
그냥 전투를 피하려고 했던 말인데 자기 이득은 확실하게 챙기네?
'뭔가 순진한 녀석 같은 냄새가 나는군.'
나는 왠지 웃음이 피식 나는 걸 느꼈지만 애써 참고는 은안의 사내에게 말했다.
"당연히 줄 거요. 단지 조건이 있소."
"뭐? 아까는 그냥 준다고 하지 않았나."
나는 은근슬쩍 미끼를 던져보았다.
"당신도 우리도 탁록의 외부에서 습격해오는 마물을 퇴치해야 하오. 힘을 합치면 더욱 좋을 거 같지 않소?"
"……."
"보물은 드리리다. 대신에 마물 퇴치를 할 때 우리를 도와주시오."
"음…… 실력은 꽤 좋은 거 같은데……."
뭔가 못마땅한 얼굴로 옆에 있던 건달파를 쳐다보며 고민하던 은안의 사내가 말을 이었다.
"네놈이 악마의 족속과 함께 다니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저런 놈 들은 다 죽여없애 버려야 한다!"
역시 마(魔)에 강한 반발감이 있군.
나는 예상했던 바였기에 한 번 물 러나는 척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허……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쩔 수 없군. 뜻이 안 맞으면 함께할 수 없으니 포기해야겠소."
"그래도 보물은 내놓고……."
"당연히 줄 거요. 근데 우리와 함께 싸워준다면 무공을 가르쳐줄 생각이었는데 아쉽게 되었소."
"!!"
흠칫하고 은안의 사내가 동요하는게 보였다. 그가 급히 말했다.
"무공이라고? 그걸 나도 배울 수 있는가?"
"당연히 배울 수 있소. 단전(丹田) 이 있고 운기조식을 할 수 있는 생명체라면 누구든지."
"내가 무공을 배우면 너처럼 손에서 번개광선을 쏠 수 있는 거겠지?"
당연히 나처럼 내공과 의념이 극치에 이르러서 내공만으로 천하를 평정할 정도가 되어야 하며 뇌신류 무 공을 달인의 경지로 익히고 구궁파천뢰의 요결도 습득해야 가능한 일 이지만, 나는 그런 사실은 쏙 빼놓고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당신도 할 수 있소."
"호오!! 하지만 번개광선 만으로는 조금……."
"또한 무공을 익히게 되면 기공으로 체력을 회복하고 남을 치료해줄 수도 있소. 위급할 때 도움이 될 것 이오."
"음…… 치료를 할 수 있다고?"
은안의 사내가 솔깃한지 말을 이었다.
"혹시 병도 낫게 할 수 있느냐?"
"그렇소."
"…… 좋아. 그럼 이렇게 하자."
"어떻게 말이오?"
"내가 너희와 함께 마물 퇴치를 해주겠다. 대신에 너희는 우리 마을에 가서 한 사람을 치료해줘야 하고, 또한 내게 무공을 가르쳐 줘야 하고, 보물도 줘야 한다."
"……."
"받아들이겠느냐?"
이거 순 날도둑놈이군…….
하지만 나는 나쁠 게 없다고 생각했기에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당연히 그러겠소."
어차피 무공을 가르쳐주거나 기공치료를 해주는 게 어려울 것도 없다. 그리고 보물은 적당히 목갑에 있는 걸 아무거나 석화해제해서 하나 넘겨주면 그만이다. 그 대가로 사도급으로 강한 동료를 얻는다면 수지맞는 것이다.
"으흠! 좋아……."
은안의 사내는 아닌 척해도 무척 기분이 좋은지 입이 귀에 걸려 있었다. 이렇게 속이 빤히 읽히는 상대는 처음이었기에 나는 속으로 킬킬 웃으면서 말을 걸었다.
"그럼 임시동료인 셈인데, 당신의 이름은 무엇이오?"
"내 이름?"
"그렇소. 계속 당신이라고만 부를 수도 없지 않소? 그리고 우리는 이 름을 밝혔는데 당신만 밝히지 않는 건 치사하오."
"나는 치사하지 않다! 나는 정정당 당하다!"
눈을 크게 부릅뜬 은안의 사내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내 이름은 위대한 신농의 후예인 열산(烈山)이다! 잘 알아둬라!"
열산? 어디서 들은 거 같기도 하고…….
하지만 잘 기억이 나지 않았기에 유명한 이름은 아닌 듯싶었다. 나는 나중에 생각해보기로 하고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소. 그럼 열산, 일단 당신네 마을로 가봅시다."
그러자 열산이 약간 당황해했다.
"우…… 우리 마을로?"
혹시나 해서 짚어봤는데 역시 그렇군.
'열산이 탁록을 지키려고 싸운다는건 인간족이 모여 사는 마을이 있다는 거야.'
유망도 인간족의 마을이 있다고 말 한 적이 있었기에 눈앞의 열산은 그 인간촌락의 일원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증명된 것이다. 나는 내색하지 않고 열산에게 말했다.
"아까 한 사람을 치료해달라 하지 않았소? 마물떼거리는 방금전 크게 소탕했으니 당분간 몰려오지 않을 거고, 일단 내가 가진 무공으로 그 사람을 치료할 수 있는지 알아보는 게 우선 아니겠소."
"오!! 그건 그렇지!"
"보물은 그다음에 드리리다."
"아주 좋아."
열산은 갑자기 함박웃음을 짓더니 휙 하고 고개를 돌렸다.
"따라와라! 우리 마을로 안내해 주마!"
투웅
열산은 한 번 땅을 박차더니 순식간에 지평선의 점이 될 정도로 빠르게 달려나갔다. 어마어마한 속도였기에 나는 열산의 뒷모습을 보고 당황했다.
"무공을 모르는데 어떻게 저런 신체능력이 가능한 거지? 말도 안 돼."
내가 봤을 때 방금전의 이동속도는 무림강호 최상위권 고수들이 전력을 다해 펼치는 경공술보다 몇 배는 빨랐다. 인외(人外)의 강력한 마수나 혼돈의 괴물과도 정면으로 싸울 정도의 신체능력이었다. 신체만으로도 대라신선에 맞먹을 수 있다고 할 수 있었기에 내가 당황하자 옆에 있던 건달파가 인간의 모습으로 변신하며 말했다.
"무공이란 미약한 인간들이 기(氣) 와 의념의 힘으로 강해지기 위해 선택한 수단입니다. 선천적으로 강력한 존재는 사실 무공을 익힐 필요가 없지요."
"그렇다면 열산은 설마……."
"우선 저자의 마을에 가봐야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건달파가 인간으로 변신한 이유를 알아챘다. 보나마나 열산뿐만 아니라 인간족들은 모두 마의 일족을 혐오하고 두려워할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가자.
타닷
나와 건달파가 열산의 뒤를 쫓아갔 지만, 거리가 거의 좁혀지지 않았다. 인간의 경공술만으로는 절대 따라잡을 수가 없는 속도였다. 물론 내가 멸혼보를 전력으로 쓰면 따라잡는 걸 넘어서 추월까지 할 수 있겠지만 이런 곳에서 그런 오기를 부릴 이유는 없었기에 얌전히 흔적을 따라갔다.
그렇게 울창한 숲으로 들어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어떤 커다란 촌락 앞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촌락에는 조잡하게 만들어진 나무문이 세워져 있었고 그 앞에 열산이 문지기마냥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그가 으스대듯이 말했다.
"우리 탁록촌(漆度村)에 온 걸 환영한다."
나는 힐끔 안에 있는 기감을 감지했는데 약 오십여 명이 사는 듯했다. 확실히 그리 크지 않은 촌인 듯 했다.
저벅
열산을 따라서 마을 안을 걸어가고 있자 시선이 느껴졌다. 서너 명 정도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들 또한 열산처럼 뭔가 심상치 않은 힘이 느껴지는 존재들이었다.
'범상한 인간이 아니군.'
내가 애써 그 시선을 무시하고 있자 열산이 호통을 질렀다.
"이놈들아! 외지인 신기하다고 쳐다보지 마!"
그러자 1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외모의 동녀(童女)가 고운 아미를 찌푸리며 열산에게 대들었다. 그냥 아름다운 것도 아니고 마치 조각한 듯 대단한 미모였기에 절로 시선이 갔다. 또한 신기하게도 그녀는 적발적안(赤髮赤眼)의 이질적인 외모를 갖고 있었다.
"열산 아저씨! 촌장님 계신 곳으로 대뜸 외지인을 데려가시면 어떡해요!"
"으윽. 상아(婦姚)……."
상아라고 불린 소녀는 화난 듯 말했다.
"외지인은 잠깐 세워두세요! 그리고 촌장님한테 먼저 말씀부터 드리세요."
"머릿속으로 말했다. 괜찮다고 했어."
"그런 게 어딨어요? 아무리 그래도 직접 얼굴보고 한번 말해야죠."
열산이 우물쭈물하자 나는 열산에게 말했다.
"저 아이의 말이 맞소. 우린 여기 가만히 있을 테니 갔다 오시오."
"알았다."
열산이 어디론가 향했고 잠시동안 나와 건달파는 마을 사람들의 구경 거리가 되었다. 그리고 수많은 시선이 우리에게 꽂히고 있을 때 아까 열산에게 따지고 든 상아라는 소녀가 우리를 노려보며 말했다.
"당신들 누구야? 왜 마족이 여기 온 거지?"
여긴 정말 호랑이굴 같다.
또다시 건달파의 정체가 바로 들킨 것이다.
어떻게 건달파를 알아보았는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자칫하다가는 다른 인간들에게 습격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 나는 침착하게 상아의 말에 대답했다.
"우린 적이 아니오. 그리고 옆에 있는 이 마족은 내게 충성을 맹세했으니 위험하지 않소."
상아의 표정이 약간 일그러졌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 마족이 인간에게 충성한다는 걸 믿으라고?"
그러자 버럭 소리를 지른 상아 옆에 있던 소년이 나무 밑에 편하게 앉은 채로 말했다.
"상아. 예민하게 굴지 마."
그 소년은 앞머리를 무척 길게 길러서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몸을 많이 단련했는지 멀쩡한 의복 을 입고 있는데도 전신에 근육이 약간 불거져 있었고 침착한 성격으로 보였다. 소년이 말을 이었다.
"열산 아저씨가 책임지고 데려왔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손님일 수도 있으니 가만히 있어."
"바보야! 마족이 갑자기 난동을 부리면 우리가 마족을 해치워도 그 전에 피해가 나온단말이야. 마을에서 쫓아내야 해."
"열산 아저씨야말로 마족에 대한 적대심이 가장 강한 사람이야. 그런 사람이 데려왔다는 건 일단 믿어봐야 한다고 생각해."
"……."
그리고 앞머리를 가린 소년이 우리 앞으로 오더니 작대기를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저는 청양(靑陽)이라 합니다. 손님들에게 무례해서 죄송합니다."
"괜찮소."
"다만 상아의 말에도 일리가 있으니, 잠시 당신들의 자유를 제약하겠습니다."
"응?"
키기기깅!!
그 순간 나와 건달파가 서 있던 자리에 크게 검은 기둥 같은 결계가 감싸는 게 보였다. 사각기둥의 결계에 갇힌 나는 약간 당황하며 바깥에 있는 청양에게 말했다.
"이거 너무하는군!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냐?"
"?!"
웅성웅성
그러자 도리어 청양이라는 소년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고 심지어 옆에 있던 상아나 다른 마을주민들도 놀라는 것 같았다. 상아가 자신의 입을 가리며 놀란 걸 숨기지 못했다.
"청양의 능력에 갇히고도 움직일 수 있어?"
응?
뭔가 반응이 이상한데?
나는 혹시나 싶어서 옆에 있던 건달파를 보았다. 그러자 나는 건달파가 말 그대로 시간이 멈춘 채로 굳어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건달파는 말 그대로 저항조차 못 하고 결계에 당해 버린 모양이었다.
"!!"
아무리 인간화를 했다고 해도 건달파는 마왕이다. 마왕의 인간형태를 순식간에 결계에 가둬서 봉인할 수 있는 능력이라니? 도사나 대라신선 조차도 이런 결계술은 꿈도 꾸지 못 할 정도의 어마어마한 위력이었다.
'아니…… 팔부신중 최고의 술법사인 천인이라 해도 술법으로 이런 짓은 못할 거야…….'
마왕이 인간화하더라도 본질적으로 보유한 마력으로 인해 항마력이 엄청나기 때문이다. 나는 청양의 능력 또한 열산에 못지않게 강력하다는 걸 깨닫고는 말했다.
"너희들과 싸우고 싶지 않다. 그러니까 필요 이상으로 우리를 경계하는 건 그만둬라. 여기 건달파 녀석이 너희에게 해를 입히게 되면 내 목숨으로 사죄하겠다!"
"……."
청양이라는 소년이 내 쪽을 계속 쳐다보다가 말했다.
"혹시 신(神)이십니까?"
신?
갑자기 무슨?
나는 청양의 물음에 어이가 없었지만 침착하게 말했다.
"신 아니야. 너희들과 같은 인간이다."
"믿기지 않는군요. 제 능력에 맞고도 멀쩡한 건 신밖에 없었습니다."
"어?! 진짜 신한테 능력을 써 봤다고?"
"죽을 뻔했지만요."
쓴웃음을 머금은 청양이 말을 이었다.
"알겠습니다. 능력을 해제할 테니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
따닥 하고 청양이 막대기로 바닥을 두들기자 나와 건달파를 덮고 있던 사각형의 기둥이 사라졌다. 그제야 건달파는 제정신이 들어온 것 같았고, 심지어 자기가 뭘 당했는지도 모르고 있던 모양이었다.
나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앞으로 그러지 마."
그때 열산이 저만치에서 날듯이 달려오며 말했다.
"촌장한테 허락 맡았다! 이제 따라와."
저벅 저벅
나와 건달파는 입을 다물고 열산을 따라갔다. 이 탁록촌이라는 곳이 범상치 않은 곳이라는 걸 피부로 느꼈기 때문이었다.
'어찌 인간이 이렇게 강한 능력을 갖고 있는 거지?'
열산도 그렇고 청양도 그렇고 대라신선조차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능력의 소유자였다.
뭔가 이상하다.
그 위화감이 잘 해결되지 않는다.
그리고 마을의 제일 안쪽으로 들어가자가장 큰 나무집이 보였고 그 안에 들어가자 한 아름다운 미녀가 짚방석 위에 앉아 있었다.
'아름답군…….'
뭐라 할 말이 없을 정도다. 방금전 봤던 상아라는 소녀도 절세미모의 소유자였지만 저 여인도 굉장하다. 내 표현력이 빈약해서 예쁜 걸 그저 예쁘다고밖에 할 수 없는 게 한탄스러울 정도였다. 굳이 비교하자면 상아는 마치 태양이 빛나는 것 같은 아름다움이었고 저 치렁치렁한 흑발의 여인은 달과 같은 미모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다른 점에 주목할 수 밖에 없었다. 그녀의 외모를 뒷받침 하는 아름다운 눈동자의 색깔이 바로 은색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은안(銀眼)……."
우리를 실내로 안내한 열산이 험상궂은 목소리로 말했다.
"촌장. 내가 말했던 게 이놈들이다."
그러자 은안의 미녀가 입을 열었다.
"신기한 사람들이군요. 당신들은 이유가 없어요."
이유가 없다고?
그 말에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촌장이라고 불린 은안의 미녀가 앉은 채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백웅, 잘 왔어요. 나는 이 탁록촌 의 촌장인 유소(有<)라고 합니다."
유소라고 하는 건가.
'음…… 이 이름도 어디서 들어봤던 거 같은데? 어디였더라…….'
나는 대충 상대방의 이름을 외우려고 노력하며 유소 촌장에게 말했다.
"유소 촌장. 혹시 병에 걸려 있다는 게 당신이오?"
내 질문에 유소 촌장이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요. 당신은 내 병을 고칠 수 없지만요."
"……."
"어쩔 수 없어요. 그렇게 정해져 있으니까요."
나는 황당해서 유소의 말에 반문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아직 당신의 병이 뭔지도 듣지 못했고 내가 무슨 수를 써서 병을 고칠지도 알지 못하잖소? 그런데 벌써 지레짐작하여 포기하는 건 너무나약한 소리 같구려."
"제 병의 이름은 바로 천기누설이랍니다. 그리고 무공(武功)의 기공치료(氣功治療)라는 걸로 제 병을 고치려던 당신은 제 인과에 휘말려서 죽을 운명이었습니다."
"?!"
"음…… 구궁파천뢰(九宮破天雷)라는 게 뭔가요? 그걸로 몸 안의 노폐물을 다 태우는 수법을 써서 지병이 낫고 건강해지긴 하지만 결국 다른 일로 인해 죽으니까 굳이 하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허억……."
이, 이게 무슨?!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구궁파천뢰를 어떻게 아는 거지?!
내가 경악해서 놀라고 있자 뒤에 있던 열산이 한숨을 쉬며 실내로 들어왔다.
"입만 열면 운명운명 하는구나. 네가 그 얘기를 할 때마다 내 속이 얼마나 타들어가는지 알기는 하느냐?"
그러자 유소는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미안해요, 오라버니. 하지만 전부 정해져 있는걸요."
오라버니?
나는 그 말에 놀라서 그들을 쳐다보았다.
"남매였소? 그러고 보니 눈동자 색깔이……."
"후후."
유소 촌장은 묘한 미소를 짓더니 말했다.
"그래도 신기하네요. 계속 변화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백웅 당신에게는 계속 기대를 하게 되는 저 자신을 미래에서 보게 되네요."
"그게 무슨 말이오?"
"눈치채셨겠지만 이 탁록촌은 특수한 재능을 지닌 사람들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재능은 태어날 때부터 발현되는 거라서 제어할 수가 없지만 강력하기 그지없죠."
유소의 말이 이어졌다.
"제 능력은 미래를 보는 것입니다. 그것도 지금 실시간으로 모든 인과율이 변동하는게 보이지요. 온갖 경우의 수가 느껴지네요."
"!!"
미래예지!
그거라면 유소의 말을 설명할 수 있었지만 나는 납득이 되지 않아서 말했다.
"말도 안 돼. 나도 미래예지능력이라면 많이 봐 왔소. 하지만 거의 모든 미래예지능력은 불완전했고 심지어 잘 맞지도 않았소. 딱 하나 완전한 미래예지능력이 있긴 했지만 그걸 사용하는 놈이 너무 강력해서 무의미했지……."
"……."
"그런데 당신은 마치 내가 할 일을 다 읽어낸 것처럼 말해 버리는군. 이런 건 본 적이 없소. 또한 강력한 미래예지는 신격의 간섭을 받아서 결국 틀어지게 되는 거요."
백우선의 미래예측으로도 방금 유소가 했던 것처럼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백우선은 이미 수집된 정보내에서 예측하기 때문이다. 유소처럼 알지도 못하는 걸 뜬금없이 겪은 것 마냥 줄줄 말해 버리는 건 내가 알고 있는 필멸자의 미래예지능력을 한참이나 벗어나 있었다.
"아주 잘 알고 계시네요. 그럼 설명이 편하겠어요."
유소가 말했다.
"제가 모든 걸 읽어낼 수 있는 이유는 지금 이 세상의 특성 때문이에요."
"특성?"
"제 예지능력이 아주 강력한 탓도 있지만, 지금 이 지상계에는 무수한 신(神)이 강림해 있어요. 무척 강력한 혼돈의 신성들이 여기저기서 충돌하는 중이고 사실 필멸자는 그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힘들죠. 그리고 그 때문에 신격들은 제 예지능력을 방해하기 힘들어요."
"응? 어째서 그렇소?"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신성들이 서로 싸우는 도중에 [작은 굴레]를 돌리면서 무수히 시공간을 편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작은 굴레]를 사용하는 빈도가 큰 만큼 그들은 필멸자의 운명 같은 소소한 영역에는 간섭하기 힘들어지죠. 왜냐하면 제가 염제 신농의 가호 아래 어디에도 간섭하지 않고 있기에 제게 간섭하면 자신들만 귀찮아지기 때문이에요."
"으음!!"
"역풍이 불 확률도 높고요."
신들이 미친 듯이 [작은 굴레]를 움직이며 날뛰는 중이라서 도리어 예지능력자는 덕을 보게 된다는 말 인가?
'그래서 신들의 전쟁이 사라지고 그 숫자가 줄어든 후세에는 예지능력자에게 신들이 간섭하기 쉬워지는 거군…….'
도리어 이런 야만적인 신대(神代)이기 때문에 덕을 보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내가 원리를 대충 이해하고 있을 때 유소가 말했다.
"백웅 당신이 나쁜 의도로 온 게 아니라는 건 이해했어요. 천여 개의 미래를 보았는데 당신은 우리 마을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계속 도우려 하는군요."
"그렇다니까……."
"다만 저는 당신의 도움을 정중히 사양하겠어요. 어차피 못 고치는 거니까요."
"아니 잠깐! 그건 아니지."
나는 손사래를 치며 말을 이었다.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는게 어딨소? 수많은 미래를 시도하다보면 결국 하나쯤은 당신을 치료할 수 있는 미래를 찾아낼 수 있는 게 아니오."
"백웅, 사실 그래서 고민중이에요. 당신이 모든 걸 뒤틀리게 하고 있거든요."
"모든 걸 뒤틀리게 한다고?"
유소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당신이 개입된 모든 미래는 둘 중 하나예요. 엉망진창이 되거나 아예 읽을 수가 없거나……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조만간 당신의 선택 때문에 이 세계의 미래가 바뀌게 되는데 거기서부터는 아예 당신의 미래를 읽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게 무슨 소리지?"
유소가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바라 보았다.
"당신은 아무런 이유가 없는 존재예요. 이 세상에 존재할 이유가 단 하나도 없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거라구요. 당신은 어째서 이런다고 생각하시나요?"
"그거야 나도 모르지……."
"아뇨, 당신은 알고 있어요."
"어떻게 그렇게 단정 지을 수 있지?"
"왜냐하면 이미 당신과 관련된 미래를 읽었을 때 당신 본인에게서 천기를 누설 받았거든요."
"!!"
"이미 미래를 읽어서 알고 있어요."
이어진 유소의 말에 나는 정체를 들켰다는 걸 직감했다.
"당신은 [큰 굴레]를 넘어서 과거로 온 존재라는 걸.
[큰 굴레]를 넘었다는 걸 들켰다!!
내가 그 사실에 놀라자 옆에서 듣던 열산이 나보다 더 놀랐다.
"누이! 그 말이 사실이냐?! 저놈이미래에서 왔다고!"
유소가 열산과 눈을 빤히 마주쳤다.
"아뇨. 전혀 그렇지 않아요."
"응? 방금전은……."
"그렇지 않아요."
휘청
"어어…… 머리가……."
풀썩!
갑자기 열산의 눈이 풀리더니 그 자리에 쓰러져서 혼절하고 말았다. 나는 그 모습을 보자 어찌 된 일인지 알아차렸다.
"정신조작능력인가?"
"그래요. 제가 가진 또 하나의 능력이죠. 오라버니는 방금전 당신들과 했던 얘기를 더이상 기억하지 못할 거예요."
미래예지능력에 정신조작까지 갖고 있는 자라면 정말 두렵기 짝이 없다. 그것도 열산의 실력을 생각해보면 사도급 악마를 가볍게 해치우는 강자였는데 그런 열산의 정신방어력을 마치 종잇장처럼 뚫어 버렸다는 소리가 아닌가?
'육체적으로 보통 인간일 뿐 정신능력은 이미 초월자 수준이야!!'
내가 경계하는 눈으로 유소를 보며 말했다.
"열산의 입만 막는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야. 신(神)의 지각능력은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에 우리가 했던 얘기는 다 들었을 거요."
"후후, 그럴 줄 알고 그것도 대비를 해놨습니다."
"어?"
"눈치 못챘겠지만 당신들이 이 집에 들어올 때 신조차 염탐할 수 없는 방음결계를 쳐놨어요. 마을사람 중 한 명의 능력입니다."
"……."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거든요."
나는 나도 모르게 입을 쩍 벌렸다. 생각보다 눈앞의 유소라는 존재가 철두철미하며 만만치 않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건달파도 느꼈는지, 건달파가 신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건달파도 원래 역사에서 수천 년 전부터 살아왔지만 이 탁록촌 사람들처럼 어마어마한 초상능력을 가진 무리는 본 적이 없소. 당신들은 도대체 정체가 무엇이오?"
"정체라…… 그건 우리 자신도 몰라요. 단지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능력이니까 마치 손발을 움직이듯이 쓰고 있을 뿐."
유소가 가볍게 말을 이었다.
"그래도 이 마을의 근원은 따로 있긴 해요. 수백 년 전에 마을의 선조 되시는 분께서 신농님의 가호를 얻어 이 땅에 정착했고, 그분은 곤륜 산(良寄山)에서 왔다고 들었어요."
나는 그 말에 흠칫했다.
"곤륜! 천계인가?"
"글쎄요. 천계라는 건 들어본 적도 없어요."
"……."
"그리고 곤륜에서 오신 선조는 한 명 뿐이었고 나머지는 안전한 땅이 있다는 소문에 탁록으로 몰려든 인간들이었어요."
"그랬군…… 아무튼 당신들이 가진 엄청난 능력의 근원은 모른다 그 소리요?"
"그런 셈이죠."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유소가 말했다.
"그나저나 신기하네요. [큰 굴레]는 절대 넘을 수 없는 거라고 신농 님에게서 들었는데 도대체 어떻게 넘은 거죠?"
"신농! 당신은 설마 신농과 만난적이 있소?"
"시공간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가끔 말을 걸어오세요. 신의 입장에서도 저 같은 예지능력자는 신경 쓰이니까 가끔 대화를 한답니다."
신농과 직접 대화를 해도 정신이 멀쩡하단말인가? 하긴 저 정도로 정신능력에 특화되어 있는 초능력자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나는 조심스레 말했다.
"신농에게도 내가 큰 굴레를 넘었다는 건 말해선 안 되오. 아니, 이미 당신이 알아챈 시점에서 다 틀려 먹었을지도 모르지만……."
유소는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걱정 말아요. 어차피 난 곧 죽을 목숨이니까 비밀이 누설되지 않을 거예요."
"…… 그런 말을 웃으면서 하지 말라고."
나는 복잡한 표정으로 유소를 보았다.
"대체 당신의 속셈이 뭐요? 내 비밀을 알았다는 걸 감출 수도 있었을 텐데 굳이 내게 다 설명해주는 이유가 뭐지?"
유소가 살짝 눈을 감으며 자신의 머리칼을 뒤로 쓸어넘겼다.
"어차피 전 죽어요. 당신이 돕든 돕지 않든 너무 강력한 예지력을 타고난 탓에 인과율 때문에 죽는 거죠. 저 같은 존재가 오래 살아 있으면 모두에게 해가 되기 때문인 거예요."
"그런 말도 안 되는……."
"사실은 태어나서 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