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갈 수 없다고?!
나는 전뇌자의 말에 당혹하면서도 순간적으로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반박했다.
"그게 아니잖아! 28회차 때 항아가 천암비서의 단말이었을 때는 천암비서에 들어왔다가 나갔었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거기는 천암비서 내부가 아니었어."
"뭐?"
전뇌자는 차분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항아는 천녀(天女) 출신이지만 사실 그렇게 강하다고 할 수 없는 존재였지. 그런 그녀가 단말이 되었다고 해도 쓸 수 있는 권능에는 한계가 있었어. 그래서 천암비서에게 열람을 허락받은 정보와 권한이 크게 제약되어 있었던 거야."
"무슨 뜻이지?"
"항아가 당신을 [매듭]에서 교섭한답시고 끌어들였던, 그리고 [꿈]의 경계에서 싸웠던 그 공간은 천암비서의 심처(深處)가 아니었다는 소리야. 그녀가 갈 수 있는 곳은 딱 외곽까지였지."
……
나는 전뇌자의 말을 듣고 잠시동안 곰곰이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항아가 끌어들였던 그곳 은 천암비서의 '외곽'이었고, 지금 내가 있는 이 장소는 천암비서의 '심처', 즉 깊은 영역이란 말인가?"
"맞아. 제대로 이해했네."
"아니 이해는 했는데……."
나는 검을 집어넣고는 머리를 긁적 였다.
"그렇다면 천암비서의 심처로 굳이 끌어들인 이유가 뭐야? 항아처럼 외곽에 끌어들이면 안 되는 이유가 있었던 거냐?"
"외곽에서는 방금처럼 헤르메스에게 테트라그람마톤을 걸어서 없앤 후 당신만 살아남게 할 수 없으니까. 그곳은 외부의 권능을 차단하는게 한계가 있어서 세계수의 간섭을 피할 수 없어."
"아!!"
"오로지 이 심처에서만, 모든 권능을 차단하는게 가능하지."
그래서였구나.
나는 전뇌자의 말을 이해했지만 동시에 황당해서 말했다.
"잠깐…… 그렇다 쳐도 내가 더 손해 아냐?! 정말 이 천암비서의 심처에서 나갈 수가 없는 거라면 그냥 외곽에서 테트라그람마톤 쓰고 동귀어진해서 31번째 생을 시작하는게 훨씬 낫잖아!!"
"여기서 못 나가면 어떡하라는 말이냐고! 우주가 한 번 멸망할 때까지 기다리란 말이냐?!"
"……."
내가 버럭 하고 외치자 전뇌자가 한숨을 쉬었다.
"너무 빨리 포기하지 마. 다 방법이 있어서 당신을 여기로 데려온 거니까."
"방법?"
"그냥 빠른 재시작을 할 거라면 당신 말이 맞아. 하지만 그건 이번 삶을 중도포기 해 버리는 거잖아? 가능하면 당신을 살리면서 동시에 천암비서에서 탈출할 방법이 있긴해."
이제야 본론이 나왔군!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런 방법이 있으면 어서 말해줘. 뜸 들이는 건 별로니까."
내가 재촉하자 전뇌자는 지그시 나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 전에 하나 듣고 싶은게 있는데."
"뭔데?"
"전에 내가 질문했을 거야. 당신은 전생(轉生) 때문에 멸망한 세계까지 구할 방법이 있어?"
"으음……."
나는 침음성을 흘렸다. 갑자기 무거운 이야기가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전뇌자가 저걸 물어봤었지.'
전뇌자는 전생자라면 가능한 일이라고 하면서 그 방법을 내게 물어보았다.
마치 선문답마냥 심오한 화두였기에 나는 그 시점에선 나중에 생각해 보기로 하고 그 이후로는 거의 한번도 깊게 생각하지 않은 듯했다. 그래서 전뇌자가 갑자기 어려운 질문을 하니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저 질문은 굳이 이 상황에서 빠져나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해도 언젠가는 직시해야 하는 질문이다. 나는 잠시동안 깊게 생각해보았다.
전생 때문에 멸망한 세계까지 구할 방법이 있냐고?
'음……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방법이 있긴 한가?'
나는 턱을 만지작거리며 생각하다가 아무 생각이나 입밖으로 내뱉었다.
"[옥좌]에 도달해서 다 구해달라고 소원을 빌면 안 될까? 그 전능한 [아버지]라는 놈이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을 거 아냐."
그러자 전뇌자가 왠지 슬픈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건…… 아마 누군가가 이미 시도했을 거야. 일리 있는 대답이지만 정답은 아냐."
흠칫
"어?! 누가 이미 했다고?!"
내가 깜짝 놀라서 반문하자 전뇌자 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정확히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천암비서의 기록에는 그렇게 남아 있어. 전대(前代) 전생자가 이미 시도했던 일이야."
"!!"
"그래서 당신에게 질문하는 거야. 당신은 그자와 다른 대답을 내놓아야 하기 때문에."
"으음!!"
이거 생각보다 더 중대한 얘기였잖아?!
하지만 절대신에게 소원을 비는 것 말고는 딱히 좋은 생각이 안 떠오르는데…….
'에라 모르겠다.'
나는 끙끙대며 생각하다가 이번에도 아무말이나 해보기로 했다.
"그럼 저번 회차로 되돌아가서 바꾸겠어. 그러면 안 되냐?"
"!!"
그러자 전뇌자는 처음으로 매우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말했다.
"설마 그 대답을 할 줄은 몰랐어. 이 시점에서는 가장 정답에 가까울지도 모르는 대답을……."
"응? 정답이냐?"
"사실 이 질문에 정답은 없어. 정 답은 당신이 만들어나갈 수밖에 없지."
"그렇다 해도 나는 천암비서의 단말으로써 당신이 진심인지를 확인해야 해."
스윽
갑자기 전뇌자가 양팔을 내밀어서 자신이 꼭 안고 있던 너구리 인형을 내게 내밀었다. 내가 그 인형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전뇌자가 말했다.
"저번 회차로 돌아갈 순 없어. 하지만 당신이 원한다면 인과율을 소모해서 천암비서의 단말로써 딱 한 번 기적을 발휘할 수 있어."
"어떤 기적?"
이어진 전뇌자의 말에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큰 굴레]를 움직여서 진정한 과거로 되돌아갈 수가 있어."
"!!"
"당신의 뜻이 옳은 방향인지 알아볼 수 있음과 동시에, 이 천암비서의 심처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
뭐라고?!
나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얘기가 나왔기에 나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는 놀라서 외쳤다.
"그, 그게 가능하다고?! 모든 존재는 [작은 굴레]만 움직일 수 있고 [큰 굴레]를 움직일 수 있는 건 [아버지] 뿐이라고 했는데!"
"꼭 그런 건 아니야. 지금 당신만 하더라도 늘 [큰 굴레]를 돌리고 있잖아?"
"그건 그런데……."
"천암비서, 그리고 당신의 의지가 있다면 [큰 굴레]를 죽음이라는 트리거 없이 인위적으로 돌리는 건 가능한 일이야. 단, 이 방법으로는 우주의 시초를 절대로 뛰어넘을 수 없기에 어찌보면 [작은 굴레]를 돌리 는 것과 겉으로는 큰 차이가 없을 수도 있지. 하지만 [작은 굴레]와 달리 [큰 굴레]를 굴려서 과거로 가게 되면 그 어떤 신도 인지(認知)할 수 없어. 당신은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인식되겠지. 이건 엄청난 차이야."
나는 전뇌자의 말이 어려워서 끙끙 대었다.
"야 잠깐. 너무 말이 어려운데 쉽게 설명해 줄 수 있냐? 그래서 진정한 과거로 돌아간다는 걸 어떻게 한다는 소리야."
"당신이 이 너구리인형을 받으면 저절로 외우주를 탈출하게 될거야. 천암비서의 권능이기에 주시자의 허락조차 필요 없지."
전뇌자는 여전히 너구리인형을 내게로 양손으로 내민 채 말을 이었다.
"당신은 이번 30번째 삶의 '시간'을 고정시켜둔 채 [큰 굴레]를 이용해서 과거로 돌아가게 돼. 그리고 그 과거에서 시간을 보내게 되면 결국 '현재'에 도착하게 되어서 동료들을 만날 수가 있어."
"음!!"
"또한 과거에 있었던 일을 개변(改變)하여 당신에게 유리하게 바꿀 수가 있지. 진정한 의미의 시간여행이 될거야. 그리고 당신이 이 능력에 익숙해지면 나중에는 더 대단한 걸 할 수도 있고……."
나는 전뇌자의 말을 듣다가 석연치 않은게 있어서 말했다.
"그래. 과거로 간다 치고…… '언제'로 가야 하는 건데?"
"글쎄? 그건 나도 몰라."
"모른다고?"
"[큰 굴레]를 돌린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특권이야. 그래서 언제로 되돌아갈지 시기까지 정하지는 못해.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해야지."
"……."
"단, 바로 이 시간대에 [매듭]을 설 정해 줄게."
"매듭?"
"그래. 최소한의 지침이 될 수 있을 거야. 그게 [매듭]의 원래 쓰임새이기도 해."
"흐음……."
언제로 되돌아갈지 시기를 정하지 못한다는 것 - 그게 얼마나 위험한 얘기인지는 아무리 내 머리가 좋지 않더라도 쉽게 알 수 있었다. 재수 없으면 과거 여와 때문에 시공간 너머로 튕겨 나갔을 때처럼 수억 년 전 우주공간에 떨궈질 수도 있는 것이다.
과연 이 모험에 성공할 수 있을까?
나는 고민하다가 양옆에 있던 이광과 이환웅의 석상을 바라보았다.
"이 녀석들은 어쩌지? 천암비서에서 시간을 보내야 하나?"
"그럴 리가 없잖아. [큰 굴레]를 돌릴 때 당신과 함께 여기서 추방될거야."
"뭐?!"
"그게 저들을 위해서 더 좋아. 이런 극단적인 방법이 아니면 심처에서 탈출할 방법이 없는데 또 천암비서 안에 기어들어 올 셈이야?"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갑자기 귀찮은 일이 생긴 것 같아서 인상을 찌푸렸다.
"으음!! 그럼 과거로 간 순간 저 두 녀석의 석상을 보호해야 한다는건가?"
"그건 당신 마음이지."
"아, 그리고 과거로 가면 전뇌자 네가 나를 여태까지 처럼 도와주는거지?"
"아니…… 못해. 나는 과거에 존재 할 수 없어."
전뇌자가 슬며시 말을 덧붙였다.
"…… 당분간은."
과연 그런 거군.
나는 상황을 다 알아들은 듯했다. 그리고 고민했다.
'이번 30번째 삶은 별의별 일을 다 겪는군. 다른 삶도 파란만장하다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특히 더…….'
과연 내가 과거로 되돌아가서 잘 해낼 수 있을까?
하지만 이번엔 딱히 방법이 없는 것 같았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잘해보는 수밖에 없으리라!
나는 결심을 하고는 전뇌자에게 말했다.
"한 번 해보마! 까짓거 과거로 한번 가주지 뭐!!"
덥썩
나는 너구리 인형을 양손으로 붙잡아서 손에 쥐었다. 그러자 너구리 인형에서 서서히 황금빛이 일어나면서 눈앞에 있던 전뇌자의 전신도 함께 황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는게 보였다.
[백웅. 가기 전에 이건 봉인을 걸어둘게.]
슈슈슈
"홍균도인의 가면……."
내 품에 있던 홍균도인의 가면이 황금 빛무리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가면은 이윽고 쉴 새 없이 뿜어내던 혼돈의 기운이 사라지고 잠잠해졌다. 전뇌자가 말했다.
[그건 세계를 멸망시킬 정도로 위험한 물건이라서 어쩔 수가 없어. 다만 당신이 원한다면 봉인을 풀 수 있을 거야.]
"알았어."
[그럼 간다.]
전뇌자는 황금빛의 아지랑이로 변하면서 기이한 목소리를 내었다. 그 목소리는 마치 주문과 같아 보였다.
[천암비서…… 그 진실된 이름은 이 세계가 멸할 때 드러나는 무한의 혼돈이여…… 영겁의 심판관이여…… 세계가 생겨나기 전부터 존재했던 자여!! 나 그대의 단말로써 청하노니…… 백웅의 인과율을 소모 하여 [큰 굴레]를 돌리는 것을 허락 해 주소서…….]
스아아아아아아
[계약이 성립했다.]
서서히 사방의 풍경이 빛으로 물들면서 잦아드는 게 느껴졌다. 모든 소리가 멈춘 정적이 흐르며 내 몸이 마치 붕 뜨는 것만 같았다. 나는 붕 뜬 기분과 함께 잠시동안 의식이 사라지는 듯했다.
* * *
…….
알 수 없는 풍경이다. 그리고 나는 이게 내 현실이 아닌 누군가의 '기억'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는 채 이 풍경을 관찰하고 있었다. 내 정신의 실체는 존재하지 않은 채 그저 유령처럼 부유해서 인식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곳이 어디인지 알고 있다.
무척이나 익숙한, 화려한 건축물이 나열된 이 전경을 잊을 리가 없다.
수백 번이나 보았던 곳이다.
여기는 낙양(洛陽)이다.
쿠쿵
쿠르르르…….
돌이 굴러가며 육중한 소리를 내는 기음을 낸다. 거대한 석벽(石壁)이 낙양의 황궁 한가운데에 세워져 있었고, 그 석벽 앞에는 한 검은 옷을 입은 사내가 서 있었다. 직접 석벽의 문을 움직여서 공간을 닫은 그자가 중얼거렸다.
"드디어…… 외결계에 니알라토텝을 봉인했구나."
털썩하고 그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마치 모든 힘이 빠져 버린 듯 헉헉대던 그 사내는 믿기지 않는듯 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설마 또 하나의 가면이 있었을 줄은…… 그렇다면 니알라토텝의 진짜 정체는 역시 모든 마신들이 생각하는 것과 완전히 다른 것이겠구나.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우주의 진정한 비밀일지도……."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던 그 사내는 멍하니 앉아서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사내의 뒤에서 누군가가 나타나서 말을 걸었다.
"모든 과업을 완수했구나. 이제 뭘 할 셈인가?"
그 '누군가'는 어둠 속에 가려져서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단지 그자에게서 흘러나오는 막대한 마력은 그가 마신급의 존재라는 걸 확실히 말해주고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사내는 앉은 채로 대꾸했다.
"이제 이 봉인을 역사의 틈새에 새겨넣을 것이다. 이로써 다음 전생자는 나처럼 니알라토텝 때문에 극악한 길을 걷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상한 집착을 하는구나. 마황(魔皇)에 이른 자신의 악업을 후회하기라도 하는가?"
'누군가'가 조롱하자 검은 옷의 사내는 피식 웃었다.
"훗…… 시작부터 함정에 빠지도록 강요당한 것이다. 결코 공정할 수 없는 게임에서 나는 최선을 다해서 여기까지 올 수밖에 없었지."
"……."
"함정에 빠지지 않은 채 여기까지 올 수 있는 자가 필요하다……."
그렇게 중얼거린 사내가 서서히 일어섰다.
"진정한 마지막 승부는 다음 겁(劫)에 시작될 것이다. 두 개의 가면이 모여서 진정한 니알라토텝이 모습을 드러내는 바로 그때…… 우리는 모든 걸 끝낼 수 있으리라."
"좋다. 나는 다음 별이 모일 그때를 기다리겠다."
슈슉!
어둠 속의 누군가가 갑자기 모습을 감추었다. 완전히 존재마저도 이 시공간에서 지워진 듯 완벽하게 소멸된 것이다. 그 모습을 한동안 쳐다보던 검은 옷의 사내가 별빛이 가득 한 밤하늘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무신(武神)이여…… 그대는 다음번에도 끝내 아지랑이일 뿐일터……."
검은 옷의 사내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의미없는 희망으로 사람을 괴롭히지 말라."
* * *
번쩍!!
"으허헉!!"
나는 갑자기 황금빛이 번쩍거리면서 정신이 되돌아옴을 느꼈다. 나는 허우적대면서 그 자리에 멈춰 섰고, 잠시 후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오자 주위를 돌아보았다.
짹짹짹…….
끼룩! 끼룩!!
마치 생명력을 응축시켜놓은 듯한 수풀이 우거진 야생의 숲이었다. 나는 난데없이 숲에 나타나 있자 황당했지만, 어찌 되었든 우주공간에 튕겨 나가는 것보다는 나았으므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후우…… 이곳이 과거인가?"
근데 방금전에 보았던 '누군가'의 기억은 뭐지? 뭔가 의미심장하던데…….
아니 그것보다 내게 그런 기억이 보이는 이유가 대체 뭘까?
나는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이내 내 양옆에 두 개의 석상이 있는 걸 보자 잡념을 지웠다.
이광과 이환웅이었다.
그들의 석상을 보자 아까 내가 천암비서의 심처에서 겪었던게 환상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쳇. 이 녀석들어떻게 해야 하는거지?"
전뇌자의 말에 따르자면 이 녀석들은 천 년이 지나야 석상에서 풀려나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내 생각이지만, 그렇다고 천 년을 가만히 기다리는 건 바보짓이었고, 어떻게든 과거에서 빨리 풀려나게 할 방법을 찾아야 할 것 같았다.
스윽
나는 품속에 있던 목갑을 꺼내보았다. 그리고 목갑 안에 쑤욱 하고 손을 넣어봤는데, 뜻밖에도 목갑은 아주 잘 작동하는 듯했기에 나는 이광과 이환웅을 안에 냅다 집어넣었다.
"신기하군. 헤르메스가 죽어도 잘 작동하네. 왜지?"
나는 혼잣말을 하고는 이내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성좌에게서 가호를 받았기 때문이군.'
헤르메스가 없어졌어도 세 명의 성좌가 주었던 가호가 남아 있기에 그 가호를 이용해서 목갑의 기능이 보존되어있는 듯했다. 성좌들과 거래 했던게 영 쓸모없는 일은 아니었기에 나는 내심 기분이 좋아져서 싱긋 웃었다.
"자, 목갑도 맘대로 쓸 수 있고…… 문제는…… 여기가 어딘가 하는 거군."
그러면 일단 높은 곳으로 가봐야겠다!
타다닷!
나는 당장 경공술을 써서 높은 언덕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언덕 위로 올라가서 산 밑을 내려다보았는데 딱히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우웅
기감으로 기를 감지해봐도 역시 사람의 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야생동물들의 기가 느껴질 뿐이었다. 아직은 어떤 시대인지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기에 나는 좀 더 주변을 찾아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뭐 하는 시대지…….'
사사삭 사삭
나는 계속 기감을 확대하면서 숲을 걷고 또 걸었다. 그리고 숲의 막바지에 이르러 나갈 때가 되자, 숲 너머에 무언가가 보인다는 걸 알아차렸다.
"저건?"
무척 거대한 뭔가가 앉아 있었다. 그 무언가는 사람처럼 생긴 존재였는데 그 키가 무려 삼 장이 훨씬 넘는 듯했다. 그리고 그 무언가는 내가 기척을 숨기지 않아서인지 오 십 장 밖에서 바로 내 존재를 알아채고는 힐끔 내 쪽을 쳐다보았다.
그 거대한 존재는 청동갑옷과 강인 해보이는 거대한 활을 장비하고 있었다.
그러고는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내 머릿속에 직접 통하는 심어(心語)였다.
[작고 약한 인간아! 이곳은 소호(少吳)가 자주 침범하는 위험한 곳이니 서둘러 네 촌락으로 돌아가거라!!]
나는 그 목소리 한 번에 상대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말로만 듣던 고대의 거인족(巨人族) 전사(戰士)였다.
"……."
거인족 전사가 존재한다는 건 설마 이 시대는…….
나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거인족 전사에게 외쳤다.
"호…… 혹시 인간족의 은(殷)나라가 있소?"
그러자 거인족 전사가 호쾌하게 웃었다.
[하하하. 너희 같은 하위종족에게 나라가 어디 있느냐? 염제(炎帝)께서 너희를 이 탁록(豫度)에서 보호하고 계심을 감사히 여기거라]
"……."
나는 내 예상보다 훨씬 더 과거로 왔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곳은 바로 탁록대전이 일어날 탁록이며, 지금은 아마 선사시대 중에서도 신화시대(神話時代) -
이 세계에 아직 하늘과 땅이 닫히기 전의 무시무시한 야만의 시대이리라!
나는 상황이 별로 좋지 않음을 직감했다.
'이거 큰일 난 거 아냐?!'
이래 봬도 신화시대에 대한 지식은 꽤 있었기에 지금의 말 몇 마디만으로도 어떤 시대인지는 쉽사리 알 수 있다. 나는 식은땀이 흘렀다.
'염제가 인간을 보호하던 시대이며 거인족이 돌아다니던 시대면…… 은나라가 성립하기도 전이야! 그리고 탁록이 이렇게 멀쩡하다는 건 아직 탁록대전도 벌어지지 않은 거고……
그렇다면 도대체 몇천 년 전이지?!'
아니, 몇천 년 전이 아니다. 몇만 년 전일 수도 있다!!
나는 잠시 동안 당황했지만 이내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깨닫고는 싱긋 웃었다.
"아이고, 제가 길을 잃어서 마을으로 어떻게 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길을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어차피 지금은 정보가 아무것도 없다. 아무래도 이 탁록 내에 인간족의 마을이 있는 것 같으니 그곳으로 가서 정보를 모은 다음에 앞으로 내 거취를 결정하는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러자 거신족 전사가 말했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말아라. 나는 상위전사로서 명을 받아 이곳을 지키고 있을 뿐 너희 하위종족의 부탁을 들어줄 이유가 없다. 집은 알아서 찾아가거라!]
"어……."
나는 힐끔 주변을 둘러보았다. 탁록은 예전에 '현재'의 시대에도 와 본 적 있었지만, 그때와는 달리 여기는 울창한 원시림(原始林)이 가득 했으며 심지어 기이한 형상의 나무들도 그득했다. 이런 요사스러운 숲이 얼마나 클지도 모르는데 나 혼자서 돌아다니는 건 개고생일지도 몰랐다.
'물론 기감을 동원하면 되긴 하는데…… 너무 귀찮잖아.'
아까 언덕 위에서 보았을 때 이 숲은 최소 이십 리 이상 펼쳐져 있으며 지형도 기괴하다. 또한 숲을 헤매는 건 그 자체로 매우 심력을 소모한다. 나는 눈앞에 있는 거인족을 어떻게든 구슬릴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곰곰이 생각했다.
'음…… 역시 이럴 때는…….'
뇌물이 필요하다!
"잠깐만 기다려 주십쇼."
[그러던가.]
나는 조금 멀리 떨어진 으슥한 곳 으로 갔다. 그리고 조그마한 절벽 밑에서 내 목갑 안에 무엇이 있는지 한 번 들여다보기로 했다. 한 손으로 목갑을 꺼내서 그 안을 쓱 들여 다보자 나는 순간적으로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어…… 에엥?!"
쑤욱!
나는 나도 모르게 목갑 안으로 휙 하고 들어가고 말았다. 그리고 목갑 안에 들어가자마자 나를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는 인물을 향해 외쳤다.
"너…… 너 괜찮냐?! 석화 안 됐어?!"
그러자 그 인물이 어리둥절했다.
"주군. 무슨 일입니까? 바깥에서 갑자기 이광과 웬 청년의 석상이 들어와서 놀랐습니다. 그리고 보시다시피 보물들이 모조리 석화되어 버렸습니다."
"!!"
석상을 집어넣을 때는 그냥 안 보고 넣어서 몰랐는데 설마 이런 일이!
나는 뜻밖의 일에 놀라우면서도 반가워서 말했다.
"건달파! 살아 있었구나!"
팔부신중 건달파!
헤르메스가 뜬금없이 수정석비의 파편을 매개로 소환해서 이 목갑 안에서 팔부신중 야차를 살해했고, 또 한 건달파를 소환하여 내게 복종시켰다. 그 이후 건달파는 목갑 안에서 이광의 수련상대가 되어주고 있었는데 워낙 일이 급박해서 생각지도 못하고 있다가 뜻밖에 살아 있는 걸 발견한 것이다.
'하긴 성좌의 힘으로 보호받는 마도구 안에 마왕의 힘을 가진 존재가 있으니 아무리 초절주문이라도 건달파를 석화시킬 순 없었겠지.'
아무런 동료도 없이 초반을 나야 한다고 생각하니 약간 답답하긴 했는데 가뭄 속의 단비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건달파에게 말했다.
"그런데 석화? 보물이 전부 석화되었다고?"
"그렇습니다. 보십시오."
건달파는 한편의 공간을 가리키며 말했다.
"석화된 걸 모아놓았는데 단 하나도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말대로다. 보물들이 모조리 딱 딱한 돌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그 보물 곁에는 건달파가 따로 정리했는지 이광과 이환웅의 동상이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다가 뭔가를 알아차렸다.
'아…… 그러고 보니 나 지금 정말 빈털터리네.'
칠요는 흉신한테 한 방 먹일 때 모조리 다 써버려서 사라져 버렸으며, 가득 채워놨던 천계의 보물고는 전욱에게 진상해 버렸다. 결국 지금 내 창고에 있던 건 원래 세계에서부터 모았던 보물뿐인데 그마저도 모두 석화되어 버린 것이다.
'지금 남은 거라고 하면, 급한 대로 꺼낸 철검 한 자루랑 홍균도인의 가면인가…….'
악몽 같은 외우주를 탈출해서 과거로 온 건 좋았는데 어째 시작이 좋지 않은 느낌이었다. 사대신기야 정신계에서 소환해서 꺼낼 수 있지만 중대한 상황이 아니면 일반적인 공양물로 쓰는 건 불가능하다. 또한 홍균도인의 가면은 굉장한 힘을 갖고 있지만 전뇌자의 손에 봉인 당해 있다.
그보다 보물이 헤르메스의 주문 때문에 죄다 석화되었다면 거신족 전사에게 줄 뇌물이 없지 않은가?
"음. 건달파. 지금 상황이 말이야……."
나는지금 동료 겸 부하가 건달파 뿐이었기에 일단 건달파에게 지금까지의 상황을 솔직히 다 말해주었다. 걸선의 모습을 한 채 조용히 듣고 있던 건달파가 잠시 동안 생각하다가 말했다.
"주군. 정말 대단하시군요. 설마 [큰 굴레]를 넘어서 선사시대로 오실 줄이야……."
"하핫."
"다만 거신족 전사에게 뇌물을 주는 게 좋은 책략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왜냐면 그가 제 마력을 감지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입니다."
"어? 방금전에는 모르던데……."
"주군이 평범한 인간처럼 보여서 별로 신경을 안 쓴 거겠지요. 지금 제가 보니 주군의 신력(神方)도 거의 느껴지지 않습니다. 아까 생사결을 벌일 때 일시적으로 바닥까지 소모한 게 운이 좋으셨던 것 같군요."
"흐음. 그랬군."
건달파가 신중한 얼굴으로 조언했다.
"하지만 주군께서 말씀하신 정도의 상위전사라면 조금만 낌새를 기울이면 제 존재를 눈치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거신족은 마왕을 극도로 싫어하니 싸워야 할 수도 있습니다."
"음!!"
"저는 거신족 상위전사를 상대로 싸워 이길 자신이 없습니다. 주군께선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자칫 큰일날 수 있으니 가능하면 전투를 하지 마십시오."
나는 건달파의 조언에 깜짝 놀랐다.
"뭐?! 거신족 상위전사가 그렇게 강하단말인가?"
"네. 저희 팔부신중이 역사속에서 날뛸 수 있었던 건 고대의 대전에서 강대한 신격과 상위종족들이다 퇴 각하거나 봉인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신족 중에서 최상위로 꼽히는 거신족. 그중에서도 상위전사라면 그자는 틀림없이 마왕보다 강할 겁니다."
"……."
방금전에 대면했을 때는 그리 큰 압박감을 느끼지 못했는데, 아무래도 강자인 만큼 인위적으로 자신의 기척을 감추고 숨길 수 있는 모양이 었다. 인간족이 거신족의 진짜 힘을 맞닥뜨리면 미치거나 죽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리라.
나는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러면 더더욱 놈과 교섭해서 뇌물을 줘야겠군. 그렇게 강한 놈과 친분을 맺어두면 도움 될거 아냐?"
"으음…… 보시다시피 모두 석화되어서 쓸 만한 게 없습니다. 그 홍균 도인의 가면이란 건 너무 흉흉한 물건이라 괜히 봉인을 해제하시는 건 악수일 것 같습니다. 받아서 좋아할 리도 없습니다."
"세계수의 핵이 있었으면 좋았을건데."
나는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세계수의 핵을 아까 갖고 있긴 했는데 천암비서 내부로 들어가는 대가로 제물로 바쳤기 때문이다. 세계수의 핵 정도면 석화에 당하지 않았을 텐데 무척 아쉬운 일이었다.
"뭐 방법이 없을까?"
"으음…… 신력을 자유자재로 쓰실 수 있다면 저 석화를 신력으로 조작해서 푸실 수 있습니다만 전에 듣기로 그게 힘들다 하셨지요."
"그래. 정밀한 조작이 안 돼. 지금은 신력도 다 떨어진 것 같고……."
"없는 보물을 다시 만들어 낸다 라…… 아!!"
건달파가 곰곰이 생각하다가 문득 뭔가가 떠오른 듯 내게 외쳤다.
"주군! 아까 창힐의 권능을 얻었다 하셨지 않습니까?"
"그래. 이 거북이 껍데기를 소환할 수 있어."
쉬익
내가 창힐의 권능으로 귀갑(鎬甲) 을 소환하자, 건달파는 무척 반가운 눈빛을 하며 말했다.
"오오!! 정말이셨군요. 예전에 봤던 것과 같습니다."
"예전에 봤다니?"
"아시다시피 저는 과거 창힐의 부하였습니다. 오랜 세월 옆에서 보필 했기에 창힐이 인간시절일 때부터 그 귀갑을 쓰는 걸 보아왔습니다."
"!!"
"물론 그가 신이 된 후에는 딱히 그 귀갑을 쓰는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만……."
오오?!
나는 뜻밖의 일이었기에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리고 급히 말했다.
"귀갑을 어떻게 썼지? 창힐이 내게 권능을 주긴 했지만 설명을 안 해줬어."
"그 귀갑은 상업의 힘을 갖고 있다 들었습니다. 창힐이 귀갑 위에 뭔가 를 적으면 온갖 보물이 순식간에 소멸되거나 혹은 난데없이 무(無)에서 창조되는 걸 본 적이 있었습니다. 혹은 보물의 상태가 훨씬 더 좋아지거나 혹은 열화(劣化)되었습니다."
나는 건달파의 말에 어리둥절해서 반문했다.
"무에서 창조되었다고? 원하는 물건을 기입하라는 것과 관계있는 건가? 그런데 물건이 소멸했다는 건 그걸로 설명이 안 되는데……."
"네. 제가 곁에서 듣기로 그 권능은 장사를 하는 느낌으로 사용해야 한다 들었습니다. 머리를 잘 쓰면 이득을 볼 수 있으나 그렇지 않으면 결국 등가교환이 될 것이라고. 그 이상 자세한 설명은 듣지 못했습니다."
"장사…… 등가교환이라……."
장사를 하는 느낌이라고?
그거랑 물건이 소멸하는게 무슨 상관이 있지?
나는 영 감이 잡히지 않아서 팔짱 을 끼고 눈을 감았다. 그러자 건달파가 말했다.
"시험삼아서 한 번 권능을 써보시 는 건 어떻겠습니까? 사소한 것이라도 그 성질을 파악하는게 지금으로서는 중요할 것 같습니다."
"그래. 뭐 하나하나 해보는 게 중요하겠지!"
성큼성큼
나는 대뜸 석화된 보물이 잔뜩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중에서 예전에 무사시에게서 강탈한 아메노 하바키리의 손잡이를 잡아서 들어보았다.
'완전히 석화되었군.'
마(魔)를 베는 항마력을 지닌 검이라 해도 바로 석화될 정도로 초절주문의 위력이 강했던 모양이다. 손잡이도 그렇고 날 부분까지 완전히 돌이 되어서 쓸 수가 없었다. 나는 아 메노하바키리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가 땅에 날을 박아 넣고는 귀갑을 띄워서 글씨를 썼다.
[아마노하바키리]
그러자 마치 저번에 내 팔을 기입 했을 때처럼 이질적인 고문자가 떠올랐다.
[아마노하바키리(저주받음)
일시불(一時拂) 가격 : 오만팔천육 백(五萬八千大百) 인두(人頭)
저주해제 가격 : 사용자 미설정(未 設定)
대납(對納) 및 담보설정(擔保設定) 가(可) ]
"?"
내 팔보다 가격이 훨씬 싼 데다가 새로운 항목이 생겼네?
나는 [저주해제 가격]이 따로 존재 하며 그게 인두라는 가치로 매겨지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사용자 미설정이라는 건 인두 외의 가치로 저주를 해제할 수 있다는 말인가?'
왜 그런 거지?
내가 이 사실을 옆에 있던 건달파 에게 말하자 그가 말했다.
"창힐은 그 능력을 쓸 때 여러 개의 물건을 같이 놔두고 여러 번 변이(變異) 시켰습니다. 제물을 바치는 것처럼 단순한 게 아닐지도 모릅니다."
"여러 개의 물건이라……."
거기에 뭔가 단서가 있는 것 같은데.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럼 나도 여러 개의 물건을 같이두고 써 볼까.
나는 그 옆에 의천검과 소림사 장서각에 있던 마도서를 아무거나 한 권 꺼냈다. 그러고 보니 의천검도 상당히 강력한 보물이었는데 칠요와 사대신기를 주로 쓰다보니 이번 생 에는 안 꺼냈던 것 같았다.
'의천검과 마도서도 예외 없이 석화되었군. 술자가 죽었는데도 이 정도 위력이라니…… 정말 마신의 초절주문이라는 게 강력하긴 하구나.'
나는 내심 헤르메스의 마법이 생각 보다 어마어마하다고 생각하며 의천검과 마도서를 놓고 생각을 해 보았다.
'변이라? 왜 변이가 되는 거지?'
제물을 바치는 건 단순히 내가 바치면 상대가 받아들이느냐 아니냐의 문제다. 공양물이나 제물이 중간에 거래조건에 따라 추가되거나 빠질 수는 있어도 변이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가치에 변동이 없기를 바라기 때 문이다. 그런데도 창힐이 이 권능을 쓸 때 여러 개를 놓고 변이를 시킨 이유가 뭘까?
나는 건달파를 힐끔 보며 말했다.
"변이라는 게 어떤 식으로 변이됐다는 거지? 가만히 있는 게 혼돈에 물들어서 촉수가 튀어나오고 그랬던 건가?"
"음…… 아닙니다. 그렇다기 보다는 생뚱맞은 물건으로 뒤바뀌었습니다. 원래 있던 물건이 사라지고 새로운 물건이 나타난 것 같았는데……."
"새로운…… 물건."
뭔가 거의 다 온 것 같은데 감이 잡히지 않는다!!
"으으…… 도대체 뭐지."
내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하던 바로 그때였다.
[인간이여. 딱 보면 눈치채야 하지 않는가?]
"?!"
헉?!
파앗
나와 건달파의 시선이 동시에 아무것도 없던 공간으로 향했다. 그리고 스윽 하면서 그 공간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그건 파는 거잖나]
아까 봤던 거신족 상위전사였다.
파앗
나는 그 순간 바로 검을 뽑아 들고 전투준비를 했고 건달파 또한 심상치 않은 얼굴로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틀림없다. 방금전 봤던 탁록의 거신전사!'
도대체 언제 이 목갑의 공간에 들어온 거지?! 나름 멀리 떨어져서 기척을 숨기고 목갑을 열고 들어왔는데!
그러자 거신의 상위전사는 흠, 하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
[경계하지 말아라. 어차피 염제의 명이 있어서 인간은 기본적으로 해치지 않는다.]
그러더니 찌릿하고 약간의 살기가 느껴지는 눈으로 내 옆에 있던 건달파를 보며 중얼거렸다.
[거기 마왕 놈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
쿠구구구
나는 눈앞의 거신전사에게서 가공할 신력(神方)이 뿜어져 나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기세만으로도 내 기세가 꺾일 정도였기에 나는 약간 식은땀이 흘렀다. 수많은 강적과 싸워본 경험이 있었기에 나는 상대의 강함을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틀림없이 팔부신중보다 강하다!! 보통 마왕급은 당연히 초월했고…… 이, 이 정도면 상당히 고강한 신격과 싸워도 되는 수준 아닌가? 적어도 지상계에서는 최강을 논할 수 있다…….'
나는 그 순간 달기, 제천대성, 항우 등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눈앞의 거신전사는 최소한 그 정도 수준인 게 분명했다. 괜히 건달파가 말만 들어도 거신족과의 전투를 피해야겠다고 생각한 게 아닌 듯했다.
나는 거신전사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가, 갑자기 제 공간에 들어와서 당황했습니다만…… 전 수상한 사람이 아닙니다."
거신전사가 피식 웃었다.
[흠…… 마왕을 부하로 데리고 다니는 외팔이 인간이 수상하지 않다고 하면 대체 누가 믿겠는가? 게다가 내 신력을 개방했는데도 정면에서 버티는 인간 따위는 하계(下界)한 이후 본 적이 없구나.]
"……."
전투를 해야 하는 것인가?
사대신기를 쓰면 이길 순 있겠지만 과연 과거로 돌아오자마자 그 정도 출혈을 감수해야 하는 건가…….
내가 초반부터 너무 운이 없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 때였다.
[하지만 상관없다. 하던 걸 마저 하거라.]
뜻밖의 말에 나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네?"
거신족 전사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서 자신의 활시위를 매만지며 대꾸했다.
[어차피 너희 실력으로 염제님과 우리 전사단(戰士團)에 해를 미칠수는 없다. 그리고 본디 이 탁록은 사연 있는 존재들이 염제의 보호를 받고자 몰려드는 곳이니 섣불리 편견으로 대하고 싶지는 않군.]
"……."
거신족 전사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또한 내게 뇌물을 주고 싶다 하지 않았느냐? 나는 뇌물을 싫어하는 성격이 아니니 방해할 생각은 없구나, 껄껄껄]
그 웃음만으로도 내부가진탕되는 기분이 들었고 전신의 혈류가 오르락내리락하는 듯했다. 저자가지닌 역량은 틀림없이 내 생각보다 더욱 높은게 틀림없었다.
내 옆에 있던 건달파가 구슬땀을 흘리며 내게 전음을 보냈다.
[주군. 저…… 절대 싸워선 안 됩니다. 저자는 전사장(戰士將)이 틀림없습니다. 전설로만 들었던 괴물이…….]
[전사장?]
그러자 거신족 전사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어디서 몰래 속닥속닥거리는 게냐? 일개 마왕 따위가!]
투웅
그 순간 거신족 전사가 허리춤에서 손도끼를 꺼내서 휙하고 투척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건달파가 마왕의 힘과 신법을 동시에 발휘해서 전이(傳移) 수법으로 손도끼를 피했지만, 놀랍게도 건달파가 다시 공간에 나타났을 때는 손도끼가 그대로 건달파의 가슴팍에 꽂혀 있었다.
쿠웅
"크윽!"
건달파는 손도끼에 적중당하자 신 음성을 흘리며 무릎을 꿇었고, 더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이지 못한다는 게 맞는 표현이었다. 어느새 건달파의 움직임이 봉쇄되어 그 주변의 시간만 멈춰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거신족 전사가 말했다.
[내 손도끼는 절대 피할 수 없다. 그리고 맞은 놈의 시간을 멈춰 버리지.]
"!!"
[나보다 강한 놈의 시간은 멈출 수가 없지만 역시 저 마왕 놈은 수준이 낮군.]
아직 건달파에게 치명상을 입히지는 않은 듯했지만 단 한 수에 건달파를 봉쇄시키는 실력을 보자 나는 큰일 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정도 강자는 내가 한창 천계나 [옛 지배자]를 상대로 싸울 때도 거의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신력을 이용한 인과율 조작!! 그 것도 낌새조차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럽다면 그 자체로 괴물이다.'
전투 중에 저 도끼를 무공으로 피해내거나 막아선다는 것 자체가 모험일 것이다. 저런 건 삼황오제를 상대로도 싸울 수 있는 존재일 것이리라.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만족할 만한 뇌물을 드린다면 물러가 주실 겁니까?"
[호오. 과연 범상치 않은 놈이구나. 하나도 겁을 먹지 않다니.]
뭔가 기쁜 듯이 말한 거신족 전사 가 씨익 웃었다.
[좋다. 약속하마.]
"그런데 그 전에 여쭈고 싶은게 있습니다."
[무엇이냐?]
"성함이 어찌 되십니까? 저는 백웅이라 합니다만."
[…….]
그러자 거신족 전사가 어안이 벙벙한 듯 눈을 몇 번 깜박혔다. 그러고는 미친 듯이 웃었다.
[크하하하하하!! 감히 인간 따위가 나와 통성명을 하려 들다니! 아주 배짱 있는 녀석이구나!!]
쿠르르릉
나는 또다시 몸 내부가진탕되는 느낌이 들었지만 아까보다는 덜했다. 어째서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거신족 전사가 호쾌하게 말했다.
[이 하계에서 염제께서 지어주신 나의 이름은 유망(檢岡)이다! 진짜 이름은 따로 있으나 적어도 너는 그리 알면 될 것이다!]
"!!"
유망!
나는 그 이름을 고서(古書)에서 본적 있는 것 같았다. 역사서에서는 그 이름을 염제 신농의 후손이거나 혹은 신농의 다른 이름이라고 말했고, 탁록대전 이후 세월이 지나 결국 황제에게 패배하여 죽은 존재라고 역사에 기록되어 있었다. 사실 여기에 올 때까지는 딱히 깊게 생각 하지 않았던 이름이었다.
그러나 나는 눈앞의 존재가 역사상의 유망이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틀림없어…… 역사서는 고대신화의 진실을 똑바로 기록하지 못하고 간접적으로 표현해놨다. 저 유망은 염제가 탁록대전에서 패배한 후에도 계속 황제와 싸우다가 봉인된 거신족이고, 그 사실을 역사서에서 에둘러서 표현했던 거야!'
그리고 역사서에도 나올 정도로 유명한 존재라면 틀림없이 염제 신농 의 측근일 것이리라. 나는 힐끔 건달파의 상태를 살핀 후 다시 의천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는입 을 열었다.
"유망 님. 아까 하셨던 조언을 다시 귀 기울여 듣고 싶습니다. 판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흐음…… 당황해서 내 말뜻을 바로 깨닫지 못한 건가? 하도 지켜보고 있자니 답답해서 나온 거였는데.]
유망은 자신의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말 그대로 팔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 권능이 상업의 권능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상업이 공양의식처럼 그냥 바치기만 하는 것이더냐.]
"……."
[사는 사람이 있으니 파는 사람도 있는 게 아니겠나. 나 유망은 너희의 대화를 들으며 그리 생각했노라.]
"헉!"
나는 그제야 유망의 말뜻을 깨달았다. 그러고는 급히 귀갑을 들어서 눈앞에 있는 이름 모를 마도서를 짚고는 외쳤다.
"이걸 팔겠다!"
우웅 - !!
슈슉
다음 순간 마도서가 갑작스럽게 소멸 되었고 동시에 귀갑에 생소한 글자가 떠올랐다.
[마도서 역란매장서(易關埋藏書)
매각 완료.
통화(通貨)가 저장되었습니다. 단 위를 지정하시겠습니까?]
"단위지정? 무슨……."
[따로 지정하지 않으면 기본설정에 따라 인두(人頭)로 표기하겠습니다.]
"?"
내 뒤에서 내가 창힐의 권능을 시전하는 걸 쳐다보고 있던 유망이 말했다.
[대충 어떤 능력인지 알겠군. 잘만 쓰면 쉽게 강해질 수 있겠구나.]
"네? 설명 좀……."
[인과율(因果律)을 저장할 수 있는 능력같구나. 인과율을 돈의 단위인 통화(通貨)로 변환시켜서 상업(商業)에 걸맞게 거래를 할 수 있는 거군? 그리고 권능을 시전하는 자는 그 통화의 단위를 뜻대로 조종할 수 있는데 기본설정은 인간의 목의 갯수로 지정되어 있나 보구나.]
?
어려워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어…… 그게…… 무슨 말입니까?"
[흠. 배짱은 있는데 머리 회전이 영 느린 놈이로구나.]
유망이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기본설정이 인간의 목인 이유부터 생각해보거라. 권능을 시전 하는 자가 늘 자기 보물만을 소모하면 손해 일 수도 있지 않느냐? 따지고 보면 돈을 죽적해서 원하는 대가를 매수(買收)하는 권능인데 그렇다면 보물 을 소모하지 않고도 돈을 저축해야 하지 않겠는가?]
"……."
[…… 설마 못 알아들었느냐?]
"그게 잘…… 이게 뭔 능력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크으으. 이 녀석 완전 형천 같은 놈이구나!]
쾅! 쾅!
뭔가 답답하다는 듯 자신의 가슴을 쾅쾅 치던 유망이 성큼성큼 걸어가서 저만치에 시간이 정지되어 있는 건달파 앞으로 갔다. 그리고 건달파의 가슴팍에서 자신의 손도끼를 팍 하고 뽑아내었다.
"커헉."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건달파가 앞으로 쓰러지자 유망이 내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네놈은 조금 머리가 돌아갈 것 같으니 저놈에게 설명해주어라. 일부러 네 인지능력은 남겨놨으니 들을 건 다 들었을 것이다.]
"…… 감사하오."
건달파는 피가 철철나는 자신의 가슴팍을 지공(指功)으로 빠르게 지혈 한 후 내 쪽으로 걸어왔다. 그러고는 말했다.
"주군. 쉽게 말하자면 이 권능은 '돈'을 이용해서 물건을 사고파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지금 그 능력에서 '돈'은 주군께서 알고 계신 인간 세상의 화폐가 아니라 인간의 모가지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왜 그런 거지?"
건달파는 유망의 눈치를 보며 머뭇 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 창힐은 고대부터 인간의 왕 이 되어 학정을 거듭하며 인신공양 을 미친 듯이 반복했습니다. 은(殷) 의 태무왕(太武王)이자 탕왕(湯王) 이 되어서 그리하였던 이유가…… 그 능력 때문이라면 설명이 됩니다."
"아!!"
내가 그제야 설명을 알아듣고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지자 건달파가 고개를 끄덕였다.
"창힐은 제물로 쓸 은나라 인간의 목을 치고 나서 그 인과율을 귀갑에 돈처럼 저장해놨던 것이지요…… 그리고 수백 수천 명의 인간을 공양하면서 몸뚱이는 제물로 바쳐서 따로 마도의 제물을 얻고, 목은 귀갑에 저장해서 재력을 비축했던 걸로 보입니다."
"!!"
"기본설정이 인두(人頭)로 되어 있는 이유는 그 때문입니다. 심심할때마다 인두를 얻을 수 있다면 돈을 빠르게 모을 수 있는 최상의 설정이 아니겠습니까. 창힐은 그런 식으로 수백 수천 년간 제물과 대가를 모아 서 결국 신으로 승급했던 것입니다."
"미…… 미친!"
나는 그제야 이 능력의 본질을 알아채고는 전율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창힐이 신화 역사 속에서 빠르게 성장하여 대마도사로서 황제의 총애를 받았던 이유라는 걸 알 수가 있었다.
인신공양을 낭비 없이 두 배 이상의 효율을 추구할 수 있는 상업의 권능!
인간의 목숨을 소모품으로 여긴다면 이보다 더 효율적인 능력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리라!
나는 문득 저만치에서 유망이 우리의 대화를 다 듣고 있다는 걸 인지하고는 조심스레 말했다.
"그…… 창힐에 대한 거 다 말해도 되냐? 다 듣고 있잖아……."
"이번에도 전음을 쓰면 전 죽을 것 입니다."
"음. 그렇긴 하지만."
아까 전음으로 얘기하니까 화나서 손도끼를 던진 게 유망이다. 또 전음으로 대화하면 이번에는 손도끼를 맞는 정도가 아니라 갈기갈기 찢길게 뻔했기에 육성으로 대화하는 건 어쩔 수 없긴 했다.
건달파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어차피 창힐은 없을 겁니다. 있을 리가 없지요. 앞으로도 없을 거고요."
"아……."
나는 건달파의 말이 무슨 뜻인지 바로 알아챘다.
지금은 탁록대전이 일어나기도 전의 과거 - 은나라 성립시기 쯤에 등장했던 창힐이 태어나기 수천 년도 전이 분명하다. 수천 년 후의 인물이 신이 된다 어쩐다 해도 뒤에 있는 유망은 그저 개소리로 들을 게 뻔했기에 건달파는 그냥 있는 대로 다 말한 것이다.
"아무튼 본론으로 돌아가서, 이 능력의 요체는 '돈'을 빠르게 모으는 것입니다. 보물을 매수하고 매도하기를 반복하면서 자본을 모은 후 좋은 보물이나 능력을 손에 넣을수록 좋지요. 그래서 자신이 가장 모으기 좋은 단위를 '돈'으로 설정하는게 가장 좋습니다."
"음…… 아무리 그래도 인간의 목을 단위로 할 수는 없어."
"네. 이 시대에 인간은 매우 숫자가 적으니까요. 미래에는 좀 숫자가 늘어나겠지만, 지금은 전 대륙에 수 만 명도 되지 않을 겁니다."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사람 모가지를 단위로 하면 살상을 일삼아야 하니까 싫다는 건데 왜 효율성으로 이해하는 거냐고!
나는 기가 막힌 눈으로 건달파를 보다가 힘이 빠져서 내심 생각했다.
'그렇군. 돈을 모으는 상업의 능력…… 그렇다는 건 돈을 뭘로 설정 하느냐에 따라 능력의 효용성이 달라진다는 건가?'
창힐은 인간 목숨 따위 파리만도 못하게 여기는 마도사였기에 인간의 목을 단위로 삼았다. 그렇다면 나는 이 신화시대에 무엇을 단위로 삼아야 좋을까?
내가 고민하고 있을 때 뒤에서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유망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마두(魔頭)로 설정하는게 어떠냐?]
나와 건달파가 동시에 뒤를 돌아보자 유망이 자신의 손도끼에 묻은 피를 툭툭 털어내며 말을 이었다.
[보아하니 이 탁록에 볼일이 있는 것 같고 나와도 볼 일이 많을 것 같구나. 그렇다면 이 땅에서 사악한 족속과 싸울 일이 많을 것인데, 자주 싸우고 죽이게 되는 놈들의 모가지를 돈의 단위로 하는게 맞지 않겠느냐?]
"마두라는 건 그런 괴물이나 마수들의 목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일리있는 얘기 같았다.
사람 목을 베어서 돈으로 쓰는 것 보다는 백배 낫지 않겠는가?
나는 귀갑에 대고 말했다.
"돈의 단위를 마두로 하겠다."
[마도서 역란매장서(易關埋藏書)의 매각단위가 신규설정 되었습니다.
매각결과 삼만칠천오백육십(三萬七 千五百大十) 마두(魔頭)를 획득하셨습니다.]
"…… 한자어로 숫자를 표기하니까 뭔가 비효율적인데 그냥 내가 아는 그 숫자로 표기해도 되겠냐?"
[사용자의 명령에 따라 앞으로 숫 자 표기를 변화시킵니다.
37560 마두 획득 완료.]
좋아. 기본적인 설정은 다 된 것 같군.
"지금 가진 마두를 써서 의천검의 석화 저주를 풀 수 있을까?"
[의천검의 석화 저주 해제에 12185000 마두가 소모됩니다.]
"으음, 비싸군……."
잡스러운 마도서 하나로는 어림도 없잖아? 한 몇백 개는 팔아야 겨우 의천검의 석화 해제를 시도해볼 수 있겠는데!
내가 질린 기색으로 귀갑을 쳐다보자 유망이 말했다.
[지금 네가 가진 모든 보물이 석화 저주에 걸려 있어서 가치가 떨어져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고귀한 보물의 석화를 푼 다음에 매각한다면 지금 설정되어있는 가치보다 훨씬 비싸게 팔 수 있을 것이다.]
"아, 그럼 방금 마도서 또한 원래가치보다 싸게 팔렸다는 말입니까?"
[당연하지. 석화 저주에 걸려서 한 장도 넘길 수 없는 마도서가 무슨 가치가 있겠느냐? 너는 엄청나게 헐 값에 마도서를 판 셈이다.]
"흐음."
그렇단말이지?
나는 이제야 능력의 요점을 알 것 만 같았다. 꽤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마음이 두근대고 있을 때 나는 문득 유망을 쳐다보았다.
"죄송합니다만 지금 이 상태로는 유망님께서 원하시는 귀한 뇌물을 드리기 힘들 것 같습니다만……."
[당연히 그렇겠지. 그래서 너희만 괜찮다면 탁록 일대에 있는 마물의 토벌의뢰를 맡기고 싶군.]
"토벌의뢰?"
유망이 팔짱을 꼈다.
[너희도 나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한 실력이 있는 걸로 보이는구나. 내가 직접 돌아다니며 쓰레기를 청소하기 귀찮은데 이 일대의 마물들을 소탕 해오지 않겠느냐?]
"……."
[내 의뢰를 들어준다면 그 뇌물, 받은 걸로 해 주겠다.]
토벌의뢰라니…….
생각지도 못한 뜻밖의 전개였다. 나는 유망의 제안이 나쁠 것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해가 되지 않아서 말했다.
"굉장히 관대하시군요. 만일 우리가 사악한 존재라서 탁록에 있는 인간들을 죽이러 왔으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유망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후후후…… 뭐 그런 질문이 다 있느냐.]
"네?"
[말이 보호지 사실 이 탁록의 인간들은 굳이 내가 보호할 것도 없다. 너희들이 그 돌연변이 놈들을 뚫고 평범한 하급인간들을 다 죽일 수 있을 리가 없지.]
"?"
슈슈슉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던 유망이 서서히 목갑 바깥으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충분히 마물들을 토벌하고 나면 다시 나를 찾아와라. 좋은 걸 주마.]
나는 유망이 나간 후 건달파에게 말했다.
"도끼 맞은 건 괜찮나?"
"마력으로 치유되는 걸 보니 그자가 절 봐줬습니다.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스스스
그 말대로 건달파의 가슴팍에 찍혀 있던 흉한 참상이 서서히 아무는 게 육안으로 보였다. 건달파의 말대로라면 유망이 제대로 죽이려 들었으면 저렇게 회복시키는 게 불가능했다는 소리리라.
'상위존재들 사이에 격차가 크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팔부신중이자 마왕인 건달파도 대웅제국이 상대할 때는 그 자체로 재해에 가까운 존재였으며 대제국을 멸망시킬만한 강자였다. 아마 절대지경이 여럿 덤벼들어도 칠요신기나 강력한 술수의 도움이 없으면 굉장히 상대하기 힘들 것이다. 그런데 그런 건달파를 가볍게 짓눌러 버릴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유망인 것이다.
나는 건달파에게 말했다.
"지금은 딱히 방법이 없어. 유망의 실력을 볼 때 우리가 싸우지 않고 이 숲을 몰래 빠져나가는 건 불가능에 가까우니, 그의 말대로 마물들을 토벌하자."
"저는 상관없습니다. 다만……."
"다만?"
건달파는 저만치에 쌓여 있던 석화된 보물을 쳐다본 후 말했다.
"상업의 권능을 좀 더 연습하시고 나서 출발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돈을 쌓아서 강해지는 능력이라면, 쓸데없는 물건을 환금해서 괜찮은 장비를 얻을 수 있을 테니까요."
"아마노하바키리나 의천검의 저주를 해제하란 말인가?"
"그래도 될 것입니다. 명검(名劍)을 가져서 나쁠 건 없으니까요."
건달파가 걸선의 모습을 한 채 자못 신중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유망이 저렇게 강하다면 이 신화 시대의 마물들 또한 만만치 않을 수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죽을 확률을 줄이시는 게 좋으리라 봅니다."
"음…… 맞는 말이다."
나는 건달파의 말이 일리가 있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살아온 세월이 있어서인지 조언이 핵심을 짚어주는군.'
책사라 할 만큼은 아닐지 몰라도 엇나가지 않게끔 도와줄 정도의 지혜는 있는 놈 같았다. 나는 어차피 이 목갑 안에 넣어둔 걸 다 쓰지도 않고 있었기에 이 기회에 정리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어디보자. 소림사 장서각에 있던 마도서가 잔뜩 쌓여 있으니 이걸 대량으로 환금하는게 제일 용이할까? 갯수도 수만 개나 되니까 400개 정도만 환금하면 단숨에 의천검의 저주를 풀 수 있겠……."
내가 마도서들이 있는 책장을 쳐다보며 중얼거리자 건달파가 깜짝 놀라서 말했다.
"안 됩니다!"
"왜?"
"아까 유망이 했던 이야기를 생각 해보십시오. 여기 있는 보물들은 원래 높은 가치가 있지만, 석화가 되었기에 그 귀갑이 가치를 터무니없이 낮게 매겼습니다. 그렇다면 나중에 석화를 다 풀게 되면 저 고대마도서 덩어리들은 굉장히 큰 자산이 됩니다."
"아!!"
"시험 삼아 한두 개 환금하는 건 괜찮지만 수백 개 단위로 하면 손해 입니다. 나중에 전부 석화를 해제해서 비싸게 팔 수 있으니까요."
생각해보니 그렇네?!
나는 나머지 보물들을 살피면서 말했다.
"하지만 다른 것들도 다 귀한 보물이긴 마찬가지야. 결국 마물들을 베어서 먼저 마두(魔頭)를 돈처럼 쌓은 후에 바꾸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