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검신-1370-1375화 (1,367/1,615)

1370-1387

뭐라고!

흉신이 나를 전생자라고 지목한 순간 나는 뭔가가 크게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등골에 소름이 쫙 돋으면서 방금 전 나일라토프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네 능력이 통하지 않을 수도 있다. 흉신은 네가 생각하는 그런 수준이 아니라.......]

설마?!

나는 주춤거렸지만 불안하게 헤매던 내 시선에 전욱의 참혹한 시신이 눈에 들어왔다.

'으으.’

그러자 갑자기 내면에서 답답함이 끓어오르면서 한기가 가시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냉열(冷熱)이 들끓는 듯한 상태가 되자 나는 공포를 이겨내었다는 걸 알아챘다. 공포 이상으로 전욱이 비참하게 살해당한 상태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불쾌감이 치밀어올랐기 때문이리라.

약간이지만 냉정을 되찾은 나는 도리어 흉신을 노려보며 말했다.

“뭐 어쩌라는 거냐!! 개소리하지 말고 죽일 테면 죽여라!”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한에서 그저 마지막 자존심만을 내세우는 게 내게 허락된 최후의 반항이란 걸 깨닫고 있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지금 내 힘은 흉신에게 벌레 이하나 다름없었기에 이제부터는 대항이 무의미했다.

'빌어먹을... 그래도 얌전히 자살은 못 해!'

대라멸진의 기운이 다 소모되기 전에, 사대신기를 써서 뭐라도 해보고 죽겠다!

[....]

내가 최후의 발악수단을 필사적으로 생각하고 있을 때, 흉신이 문득 자신의 한쪽 손을 들어 허공을 움켜잡는 자세를 취했다. 그러자 어느 새 그 손에는 석판(石版)이 소환되어 잡혀 있었다.

고오오오.

석판은 마치 살아 있는 듯 불길한 울음소리 같은 걸 쉴 새 없이 흘리고 있었다. 나는 석판에 어떤 내용이 적혀 있는지 보고 싶었지만 잘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흉신은 잠시 후 석판을 주시하다가 말했다.

[지음받은 자여. 그 미약한 힘에 비하여 창대한 업적을 이루어냈는가? 그리하여 내게 불간섭의 인과율을 얻어내었는가.]

“?”

[미약한 빛...... 영원한 연옥(陳獄)의 길을 걸으려 하는 자였는가......]

멈칫.

나는 뜬금없는 흉신의 말에 이게 무슨 소린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쿠구구구구.

흉신의 몸이 마치 액체처럼 변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액체가 진동하는 듯하더니 그 진동 때문에 주변에 널려 있던 지배자들의 사체가 모조리 쌀알처럼 작게 변했고 이윽고 먼지처럼 분쇄되어 흩날리기 시작했다. 그 소멸의 과정 동안에 흉신의 몸 또한 마치 형태가 없었던 것처럼 흩어졌고 자욱한 연기가 흐르는 듯했

'...... 도대체 뭘 하려는 거지?'

이해할 수가 없다. 흉신은 난데없이 학살을 벌인 후 지금 무엇을 하려 하는 것인가?

후우우우......

우우우....

끔찍한 비명 같은 불길한 호흡소리가 장내에 맴돌았다. 그리고 그 호흡소리가 이어지는 동안에 흉신이었던 연기 덩어리가 모여서 신비롭게 허공을 유영했고, 그 연기 덩어리는 또다시 신언을 발했다.

[이제...... 모든 것을 이해했을 터...... 황제여......]

응?

나는 뜻밖의 말에 뒤에 있던 황제 공손헌원을 돌아보았다. 황제는 거의 숨이 끊어져가는 듯 기식이 엄엄해 보였지만 이윽고 흉신의 말에 답하듯 대꾸했다.

[그렇군... 이 또한 환상이었나......]

“황제!”

슈슈슈.......

황제는 그 자신의 형체도 제대로 유지 못하는지 황금빛 형상이 파직거리며 영기가 수그러드는 중이었다. 그러나 황제는 끝내 무릎을 꿇지는 않았고 이윽고 내 쪽으로 시선을 향하며 말했다.

[이미...... 모종의 방법으로...... 내 소환능력을 봉인했었나? 아니..... 그 정도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군...... 아마 스스로 나 자신을 봉인하지 않고서는.......]

[...... 그런가...... 아무리 나라도...... 너처럼 약한 전생자가 벌써 본좌를 봉인할 수 있을 줄은 예측하 지 못했다......]

황제의 한마디에서 그가 뜻하지 않게 방심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황제는 난데없이 출현한 변수인 내게 호기심을 생겼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나 정도의 힘을 가졌다면 아무리 전생자라 해도 황제 자신에게 피해를 줄 수 있을 정도의 인과율은 쌓지 못했으리라 여긴 것이다. 그러나 나는 30여 회차 내에 황제 공손헌원을 한 차례 봉인하는 데 성공했고, 그 인과율이 아마 황제 공손헌원이 이번에 [기어오는 혼돈]을 소환하지 못하게끔 영향을 미친 것 이리라.

나는 황제 공손헌원을 빤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미안하게 됐군. 하지만 네 사정은 알 바 아니다.”

약간의 독기를 섞어서 툭 내뱉자 황제는 도리어 여유롭게 대꾸했다.

[본좌를 봉인하는 동안 크나큰 업보가 쌓였나 보군...... 후후.]

“다 아는 것처럼 말하지 마라 ....”

화가 난다.

나는 당장에라도 사대신기를 써서 황제를 마무리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아직 대라멸진의 힘이 남아 있었기에 쇠약해진 황제의 숨통을 끊을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었다. 눈앞에 있는 황제놈이 바로 28번째 전생에서 나와 내 동료들을 농락하고 모든 동료들을 희생시킨 장본인이었기에 놈에 대한 원한이 골수까지 차 있었다.

'지금이라면...... 황제에게 28번째 삶의 복수를.......’

꾸욱.

나는 왼팔에 잡힌 검에 힘을 주며 갈등했다. 절대 이치에 맞지 않는 행위란 걸 알고 있으면서도 황제를 속 시원하게 베어 버리고 싶은 충동이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황제 때문에 죽어간 망량, 제갈사, 제갈부, 서문혜, 아수라, 미호, 백련교주, 검마, 천우진, 사공린, 진소청, 유하, 류진, 한백령, 이설표, 무영검제, 진국준 등 28번째 삶의 모든 대웅제국 동료들의 얼굴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그들은 모두 황제 공손헌원의 인과율 계산에 농락당하여 죽음을 맞이했다.

얼마나 피맺힌 원한이 나와 황제 사이에 있는가!

하지만 나는 잠시 후 과거의 말이 스쳐 지나갔다.

[다만 인간의 왕이여. 그대에게 이 세상의 끝을 결정할 권한이 있다면...... 절대로 남의 뜻에 휘둘리지 말라.]

세이메이의 유언.

[우둔한 인간의 왕이여. 과연 네가 다시 도전할 때는 내 적수가 될 수 있겠는가? 대답해라!]

... 그리고 공손헌원이 봉인되기 전 마지막으로 내게 했던 질문.

“......”

나는 검을 축 늘어뜨렸다. 내가 머뭇거리고 있을 때 흉신이 좌중을 향해 신언을 내뱉듯이 말했다.

[가면으로 태어나 신의 반열에 오른 자여...... 네게 기회를 주지.... 내 수하가 된다고 약정한다면 해방시켜 주겠다.]

[......]

[위대한 굴레를 구분할 수 있는 자라면 내 제안을 받을 자격이 있지......]

다소 오만한 말투였으나 이 세상의 그 누구도 흉신이 오만하다 생각하지 못하리라.

황제 공손헌원은 흉신의 말에 침묵 했다. 그러더니 차분히 말했다.

[꿈은 꿈일 뿐...... 무량대수(無量大數)의 총람(總覽) 속에서 당세(當世)의 생(生)에 연연하는 우(愚)를 범할 정도로 얕보였나 보구나.]

무척 어려워 보이는 고어(古語)를 이야기하는 황제의 말에 흉신은 아주 약간, 웃는 듯했다.

[그러한가? 그렇다면 네 업(業)을 넘겨받아 주마.]

[ …...마음대로......]

응? 방금 뭔가 거래를?

투웅!

그 순간 황제의 전신이 보이지 않는 압력에 튕겨져서 먼 곳으로 날아가는 듯했다.

정확히는 비명도 없이 어마어마한 미증유의 힘에 산산조각이 되어서 부서진 것이었다. 틀림없이 흉신의 권능이 황제를 압살해 버린 것이었으므로 나는 그 살해장면에 흠칫하고 말았다.

'도...... 도대체......'

흉신은 어떻게 저렇게 강하단 말인가? 내가 알 수 없는 전율에 부들부들 떨고 있을 때 흉신이 말했다.

[전생자. 황제가 네게 약속한 업(業)을 이루어주마.]

이어진 흉신의 말에 나는 갑작스런 선택의 순간이 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원래 세계로 되돌아가겠는가?]

뭐지?! 어째서 뜬금없이 흉신이 내게 저런 제안을....

나는 당황해서 반문하려다가 문득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를 자연스럽게 알아차렸다.

‘그...... 그렇군! 방금 전 흉신이 황제를 소멸시키면서...... 황제가 원래 내게 들어줘야 할 [소원]을 넘겨 받은 거야!’

아직까지 두뇌가 좀 활성화되어서 일까? 나는 그럭저럭 쉽게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틀림없이 황제와 흉신의 마지막 거래는 '나'에 대한 거래를 지키느냐 아니느냐였던 것이 다!

하지만 왜?

흉신 입장에서 황제가 들어줘야 할 '소원' 따위는 그저 악성부채에 불과했다. 가만 놔둬도 소멸할 황제에게서 굳이 빚을 넘겨받을 이유가 대체 뭐가 있단 말인가?

일부러 빚을 넘겨받는다는 제안이었으므로 황제도 흉신의 제안을 받아들인 게 분명했다.

도무지 흉신의 제안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나는 이게 내게 전혀 나쁠 게 없음을 깨달았다.

'그래...... 흉신이 무슨 생각을 하든 간에...... 난 이제 이 외우주에서 탈출하기만 하면 그만이잖아!'

좋아. 마음을 결정했다.

"알았......”

바로 그때였다.

[백웅. 이건 함정이야.]

전뇌자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렸다.

......... 함정?

나는 전뇌자의 말에 언뜻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갑자기 전뇌자가 끼어든 게 이해가 가지 않은 탓도 있지만, 탈출시켜준다는 이 좋은 제안이 어째서 함정이라는 말인가?

아니...... 그 전에 전뇌자가 믿을만한 상대인 건가?

뜬금없이 나타나서 내게 1000회차 의 나 자신이라는 괴물과 싸우게 하고 영문모를 소리를 늘어놓던 전뇌자. 그리고 여태껏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는데 이제야 모습을 드러낸 저의가 의심스럽기도 했다. 도와주려면 좀 더 일찍 도와줄 수 있지 않았는가.

마음속에 싹을 틔운 의심이 채 가시기 전에 전뇌자의 말이 이어졌다.

[흉신이 지금 저렇게 몸을 변화시킨 이유가 왜인 것 같아?]

'...... 모르겠는데.’

그러고 보니 흉신은 마치 연기 덩어리처럼 변해서 흐릿하게 윤곽만 드러내고 있었다. 강인한 실체를 유지하지 않고 저렇게 변신한 이유가 뭘까? 내가 이유를 몰라서 멀뚱멀뚱 서 있자 전뇌자가 말했다.

[아무리 외신에 가까운 지배자라 하더라도 이미 인과율이 닫혀 버린 외우주에서 인지(認知)만으로는 탈출할 수 없어. 그래서 흉신은 자기만이 쓸 수 있는 권능을 시전한 거야.]

‘저게 흉신의 권능이라고?'

[그래. 무량(無量)한 시공간을 제패 한다는 바로 그 능력이야...... 수많은 [옛 지배자들이 경외하는 절대적인 초상능력!]

약간의 경외심을 담은 듯한 말투로 중얼거리던 전뇌자가 말했다.

[흉신은 출구를 열어주는 식으로 당신을 탈출시키지 않을 거야. 그렇게 하면 [문]의 수호자에게 걸릴 뿐만 아니라 외신인 주시자와 충돌을 일으키게 되기 때문이야. 황제라면 어쩌면 그래도 될지도 모르지만 흉신은 주시자와 다른 계파이니 결국 그가 택할 방법은 바로 당신을 억지로 자신의 권능에 태우는 거야.]

'태운다고?'

이어진 전뇌자의 말에 나는 나도 모르게 입을 벌릴 정도로 당황했다.

[저 상태로 변신한 흉신은 자아(自我)의 통의(統意)가 결집 되는 곳으로 시공간을 무시하고 이동할 수 있어. 그때 안개화한 자신의 몸에 당신을 섞어서 데려가는 거지. 당신또한 마치 백련교주처럼 혼돈으로 뒤죽박죽이 될 거야.]

‘!!’

[또한 외우주의 공간사이를 직접 통과하니 어떤 부작용이 생길지는 예상조차 할 수 없어.]

나는 끔찍한 상상이 들어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저 괴물 같은 흉신에게 일시적으로 동화하게 된다고?! 아무리 내가 전생하면서 별의별 일을 다 겪었다지만 그렇게 끔찍한 경험을 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당황하고 있을 때 전뇌자가 말했다.

[...... 어쩌면 전생자로서 빠르게 힘을 얻기 위해서는 그게 더 좋을지도 몰라. 하지만 당신은 그렇게 되면 흉신과 손을 잡는 미래밖에 선택 할 수 없게 돼. 나는 당신에게 최대한 많은 선택을 고를 기회를 줘야만해.]

'제길...... 그렇지만 이제 와서 흉신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대체 어떻게 탈출하라는 말이야?!

[......]

전뇌자는 한참을 침묵했다. 그러더니 말했다.

[원래라면 황제와 협상하려 했지만...... 왠지 미래의 인과율이 뒤틀린 것 같아서 이렇게 상황이 변해버렸네. 이젠 내가 직접 서(書)의 힘을 써서 개입할 수밖에 없겠어.]

'응?’

전뇌자의 다음 말에 나는 내가 생각 밖의 상황에 직면했음을 알 수 있었다.

[백웅. 흉신의 제안을 거절하고 천암비서로 들어와. 그게 유일한 방법이야.]

천암비서로 들어오라고?!

나는 당황해서 말했다.

‘드...... 들어오라고? 그게 대체 무슨.’

천암비서가 출입이 가능한 곳이었던가?

책 아니야?

의아함을 느낀 내가 반문하려 할 때였다.

[전생자...... 내 제안을 거절할 셈 인가.]

흉신이 아무런 감정 없는 신언을 흘려내는 게 느껴졌다. 그 한마디에는 막대한 압력이 깃들어 있어서 나는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전신이 사시나무 떨듯 떨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부들부들

나는 간신히 무릎을 꿇는 것만은 모면할 수 있었지만, 등골이 서늘해 졌다.

‘절대지경의 의지력...... 내가 그동안 모은 신력...... 그런 건 아무짝에 도 쓸모없구나.'

방금 전의 말도 안 되는 학살을 보고 이미 깨닫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더욱 절망적이다.

지금 흉신과 나의 힘에는 어느 정도의 격차가 있을지 가늠조차 할 수 없다. 그리고 여태껏 내가 만나왔던 흉신은 말 그대로 내게 아무런 관심이 없었을 뿐, 아주 사소한 적의를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나는 벌레처럼 짓눌려 버린다는 걸 깨달았다.

동시에 나는 전뇌자의 제안을 받아 들여야 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너무 힘의 차이가 커...... 흉신의 제안을 한 번 받아들이면...... 전생내내 끌려다닐 게 분명해! 지금 여기에는 뭔가 함정이 있어!'

약자로 지내왔던 세월이 주는 직감. 전생자의 직감과도 다른 그 위기의식은 내게 생각 이상으로 깔끔한 미래의 모습을 제시해 주었다. 당연히 전뇌자도 못 미더운 놈이고 난데없이 엉뚱한 제안을 믿기도 힘들지만 - 적어도 나는 이성보다는 직감을 따르는 게 나은 것이다!

나는 내면에서 전뇌자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 전뇌자. 천암비서 내부로 가면 흉신을 피해서 확실히 원래 세계로 되돌아갈 수 있는 게 맞겠지?’

['확실히'가 100퍼센트, 10할을 의미한다면 그렇지 않아. 당신의 선택에 따라 계속 확률은 변동해.]

'빌어먹을! 그냥 확실하다고 해주면 어디 덧나냐고.’

[한 가지 확실히 말해줄 수 있는 건 있어.]

'뭔데?’

이어진 전뇌자의 말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었다.

[당신은 [매듭]을 잘 활용해야 할 거야.]

'뭐.......’

매듭이라니 저번에 그거?!

[우선은 흉신의 말에 대답하는 게 좋겠어. 어차피 당신이 천암비서의 내부로 들어오면 그때 다시 한번 설명해줘야 하니까.]

너무 수상쩍은데.... 이미 [매듭] 때문에 크게 한 번 데인 적이 있었기에 나는 아무런 신뢰가 가지 않았다. 그래서 흉신을 믿을지 전뇌자를 믿을지를 다시 크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전뇌자는 어찌 된 모양인지 내게 입에 발린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을 셈인 듯했다.

매듭이라.......

대체 그걸 어떻게 활용하란 거지?

'감도 잡히지 않는군.’

하지만 나는 한참 후 마음을 정하고는 고개를 번쩍 쳐들고 외쳤다.

“흉신이여! 나는 당신의 제안을 거절하겠다!”

매듭을 어떻게 쓰든 간에 그건 나중에 걱정할 문제다. 우선은 지금 직면해 있는 선택부터 해결하는 게 옳을 것 같았다. 그러자 흉신이 의외라는 듯 말했다.

[이 닫힌 세계에서 자력으로 빠져 나갈 수 있겠는가?]

“그쪽이 걱정할 문제는 아닐 것이다!”

[......]

잠시 후 흉신의 모습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또 보자......]

파아앗!!

흉신이 빛을 뿜어내며 장내에서 사라짐과 동시에 나는 이 혼돈의 공간에 3개의 소용돌이가 크게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어?”

쿠구구구....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마치 액운을 상징하는 듯한 흉흉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 소용돌이는 계속해서 우회전을 하며 기세를 더하더니 서서히 원(圓)의 형태로 변화하며 둔화하기 시작했다.

“제길! 저건 또 뭐야?”

전뇌자가 내 귓전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흉신이 이 세계에 차원문을 열었어. 곧 3명이 소환될 거야.]

“뭐? 소환? 그건 또 뭔...... 크흐 흐윽!!”

풀썩

나는 다음 순간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엎어지고 말았다. 동시에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입에서 피를 됫박이나 쏟아 버렸다.

“쿨럭! 쿨러럭!! 으흐, 으윽.......”

이건 심하다.

핏방울이 맺힐 새도 없이 턱 밑으로 줄줄 흐르니 정신이 아찔해졌다. 바닥에 내 피가 흘러서 김이 나올 정도였다.

'내장이 터진 건가?! 아니, 이건 미세혈관은 물론 생혈(生穴)이 가닥가닥 끊어진 정도가 아니면.......'

내가 의학적 지식으로 내 상태를 판단하고 있을 때 전뇌자가 말했다.

[당연한 일이야. 홍균도인의 가면을 훔친다고 당신의 오른팔은 원초의 혼돈에 오염되었고, 내가 말렸는 데도 대라멸진을 발동해서 전신의 잠력을 모두 소모해 버렸어. 아까 흉신에게 덤벼들 때 이미 죽었어야 했는데 천암비서에 봉인해두고 있던 홍몽의 권능을 해방한 덕분에 지금까지 버틴 것뿐.]

“!!”

[대라신선이 와도 못 살린다는 관용구를 쓰기에 딱 좋네.]

역시 몸 상태가 엉망이구나!

'...... 그 정도면 진짜 죽는 수밖에 없는데......’

굳이 전뇌자가 짚어주지 않더라도 여태까지의 경험으로 보면 내 몸 상태가 회복 불가능에 가깝다는 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이번 생을 끝내야 하는 건가?! 아니 외우주에서 죽으면 어쩌면 이 곳에 생이 귀속될 수도 있으니 이거 위험한 거 아냐?!

내가 당황하고 있을 때 전뇌자가 말했다.

[그러니까 지금 다가오는 저 자와 잘 교섭해 봐. 대화할 수 있도록 나노머신으로 최대한 당신의 명줄을 연장해 줄게.]

[안 되면 싸워야겠지만 적어도 제자는 당신과 대화할 의사가 있어 보이네.]

“이봐 ....”

한동안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전뇌자가 침묵해버렸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그와 동시에 혼돈의 저편에서 서서히 다가오는 전함을 볼 수 있었다.

우우웅

혼돈 속을 유영하다가 내 앞에 멈춘 그 전함의 위에서 새하얀 가운을 입은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내가 아주 잘 아는 존재였고, 나를 발견하자 씩 웃으며 말했다.

"이거 아주 놀랍군. 가이아조차도 자네의 몸 어디에서도 인공지능의 흔적을 찾지 못했는데, 설마 방금 전까지 인공지능과 대화하고 있었던 건가?”

“...... 나일라토프.”

그러고 보니 저놈도 이 혼돈의 공간에 이미 와 있었지. 삼황오제와 황제 세력의 전투가 시작된 후 갑자기 자취를 감췄다 싶었는데 계속 은신해 있다가 모든 게 정리되고 나자 나타난 것인가?

나는 엎드린 채 고개만 들어서 나일라토프를 쳐다보며 힘없이 말했다.

“대가리를 잘려서 화가 많이 나 있겠군. 죽일 테면 죽여라.”

"화가 나 있다고? 내가?"

나일라토프는 뜻밖이라는 듯 눈을 둥그렇게 뜨더니 껄껄 웃었다.

“그럴 리가. 나는 의념절기로 양자 얽힘을 해킹한 그 환상적인 기술에 한동안 찬사를 보내고 있었네. 그런 짓이 가능한 존재가 있을 줄은 나조차도 전혀 상상하지 못했거든. 그 정도의 예술적인 경지라면 기꺼이 죽어줄 만하지 않은가.”

“허세 부리기는......”

내가 툭 하고 내뱉자 나일라토프가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네 손에 몇 번인가 더 죽었는데 딱히 원망한 적은 없었어. 왜냐면 육체는 껍데기에 불과하거든.”

“......”

많이 죽어본 사람의 경험으로 볼 때 정말 허세가 아닌 것 같다. 이놈은 애초에 미쳐있다. 아니, 미쳐 있다기보다 자신의 육체나 목숨에 아무런 미련이 없는 것이다.

내가 할 말을 잊고 있을 때 나일라토프가 저만치에 있는 소용돌이의 차원문을 쳐다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네가 아는 얼굴이 소환 되나 보군.”

파아앗

이윽고 나는 차원문에서 제일 먼저 소환된 자의 인영(人影)을 발견했고, 그 정체를 알아채고는 신음성을 흘리듯 중얼거렸다.

“...... 이광?!”

뜬금없이 이 자리에 소환된 듯한 이광은 창을 쥔 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광이 약간 놀란 듯 눈을 조금 크게 뜨더니 쓰러져 있던 나를 보고는 말했다.

“사부. 여기는 어디고 무슨 일이오?”

영문모를 상황인데도 최소한의 침착함을 유지하는 이광의 모습을 보니 조금은 안심이 되는 것 같았다. 나는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에 힐끔 옆에 있는 나일라토프를 쳐다보았고, 나일라토프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저자를 해칠 생각은 없다. 안심해도 돼.”

이윽고 나는 이광에게 손짓을 해서 이쪽으로 오도록 했고 이광이 지근거리까지 오자 그는 설명을 요구하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이광은 상황을 분석하듯 중얼거렸다.

“이 기이한 곳에서 뭔가 격전이 있었소? 그 와중에 사부는 치명상을 입은 것 같군......”

나는 여유로운 척 웃으려 했다.

“후...... 난 걱정하지 말아라.”

이광은 진심으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찌 걱정하지 않을 수가 있겠소? 나를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 준다 하지 않았소.”

“......”

“죽기 전에 약속 지키시오.”

이 새끼가 자기 돌아갈 생각만 하고 앉아 있었네......

“이런 씨ᄇ...... 쿨럭!!"

나는 욕지기를 내뱉으려다 이내 이렇게 체력을 낭비해도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애써 몸을 추스려 자세를 앉은 상태로 만들고는 나일라토프에게 말을 걸었다.

“나일라토프, 내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이광은 원래 세계에 돌려보내다오.”

“굳이 일을 어렵게 만드는군."

“뭐?”

“아까도 말했을 텐데...... 내 요구 사항은 하나다.”

스윽

나일라토프가 내게 손을 내밀며 말을 이었다.

“세계수의 핵을 다오. 그럼 탈출시켜주지.”

“......”

그러고 보니 방금 전 흉신이 출현하기 전에 그런 말을 했었지?

나는 약간 질린 눈으로 나일라토프를 쳐다본 후 말했다.

"이젠 짜증 나는군. 네놈이 진짜 원하는 건 대체 뭐냐?”

“무슨 말이지? 세계수의 핵을 달라니까.”

나는 천연덕스러운 나일라토프를 노려보았다.

“웃기지 마. 세계수의 핵은 처음부터 네놈 손아귀에 있었던 거나 마찬가지야. 네가 이 세계의 인류에게 과학기술을 전수해줬고 그 인류의 최후기지에 세계수의 핵이 자라고 있었지. 굳이 나한테서 돌려받지 않아도 넌 언제든지 세계수의 핵을 쓸 수 있었지 않나.”

“......”

“이제 와서 딱히 내가 가진 이 핵이 필요하지도 않을걸. 사람을 언제까지 갖고 놀 생각이냐?"

거짓말 따위는 아까 저놈의 모가지를 베어 버릴 때부터 알아챘다. 내가 아무리 머리가 별로 좋지 않아도 이 정도를 눈치채지 못할 리는 없다. 이놈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을 기만하기만 할 뿐 나를 상대로 진심을 드러낸 적은 딱히 없는 것이다. 아무런 목적도 알 수 없는 놈이 그저 헛손질만 하면서 나를 놀리는 듯 한 기분에 도리어 살기를 직면하는 것보다 더 짜증이 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이광이 느닷없이 툭 하고 내뱉듯이 말했다.

"나일라토프, 당신은 그냥 사부가 이 세계에서 계속 머물러있길 원하 는 거 아니오?”

이광은 팔짱을 낀 채 자신의 목을 한 바퀴 돌린 후 서늘한 눈빛으로 말했다.

“상대를 계략에 빠뜨릴 때 생사결이라면 당연히 죽든가 살든가 잡아서 고문하든가 셋 중 하나일 것이오. 그러나 상대가 그 어느 쪽도 아니고 싸우려 들지도 않는다면 답은 전혀 다른 곳에 있소. 바로 그 길항(結抗) 자체가 상대가 의도한 목적 일 가능성이지.”

이광은 힐끔 이 혼돈의 공간을 살펴보더니 말을 이었다.

“죽이지도 살리지도 싸우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뜻대로 조종하려 들지도 않는다. 그건 사부가 이 세계에 머물러있기를 원한다는 뜻이 되겠구려.”

나일라토프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있다가 잠시 후 슬며시 웃으며 말했다.

“백웅에겐 이미 말해뒀지만 넌 상황을 잘 모를 텐데도 쉽사리 유추하는군. 이런 음모에 꽤나 익숙한 사내인가.”

“......”

그 말대로다. 이광은 전후사정도 잘 모를 텐데 한순간에 나일라토프의 속내를 간파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이런 분야에서 이광의 감각과 두뇌는 무척 특출나다고 할 수 있었다.

나는 짜증 나는 얼굴로 나일라토프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네놈은 내가 이 세계에 머물기를 원한다고 말했었지. 이 세계의 또 다른 가능성을 보고 싶다고 했었지...... 하지만 그런 억지에 더 이상 어울려주고 싶지 않아. 이제 나를 그만 놔주는 게 좋을 거다.”

“흐음....”

나일라토프는 나를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긴 듯했다. 그러더니 말했다.

“백웅. 등가교환의 법칙을 알고 있나?”

“뭐? 과학법칙이잖아.”

사마령 교수에게 배운 미래지식을 이용해 바로 대꾸하자 나일라토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과학의 법칙이지. 허나 비단 과학만의 법칙은 아니야. 주술이나 마법에서도 등가교환의 법칙은 적용 되지. 상등하는 대가를 내놓지 않으면 주술이나 마법 또한 발동되지 않아. 그게 바로 과학과 마법의 유사성일세.”

“그렇다면 왜 유사성이 생긴다고 생각하는가?”

“제기랄...... 지금 내가 네놈한테 이론 설명이나 듣고 있을 때 같냐!!”

나는 나일라토프가 뜬구름 잡는 얘기를 시작하자 기가 막혀서 외쳤지만 나일라토프는 내 외침을 아랑곳 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왜냐하면, 우주의 모든 것은 거래(去來)이기 때문이야. 과학과 마법, 본디 체계도 원리도 다른 존재들이 등가교환의 성질을 지닌 것은 [무언가]와 거래를 하기 때문일세. 거래를 할 때 동등한 대가가 없으면 교환을 해주지 않는 것은 모든 이의 공통적인 이기심이 아니겠나?”

우우우

나일라토프가 개소리를 하는 동안에도 나머지 2개의 소용돌이 중 하나가 점차 구체화 되면서 안에서 인영이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또 한 명이 소환된다는 걸 알아챈 나는 마음이 급해져서 말했다.

“제길...... 그래. 거래란 게 중요한 거 맞아. 그러니까 나랑 거래해서 나를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 달라니까.”

“아니. 자네는 거래의 중요성을 모르고 있어. 상등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전혀 모르고 있는 걸로 보이는군.”

“으, 씨발!!”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아무것도 몰라.”

이 새끼는 대체 뭐야?! 거래를 하자는 거야 말자는 거야?! 자기 입으로 나를 길항상태로 빠뜨리고 이 세계의 가능성을 보겠다고 말했잖아!

이미 답이 나와 있는데 또 뭐가 필요한 거냐고!!

내가 속이 뒤집어져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려 하는 그때였다.

“과연, 그렇군.”

옆에 있던 이광이 불쑥 꺼낸 한마디에 장내가 굳어져 버렸다.

"나일라토프 당신은 다른 누군가에게 백웅 사부의 행동을 봉쇄하라는 의뢰를 받은 거구려.”

뭐라고?!

그러자 나일라토프가 눈에 이채를 띄었다.

“범상치 않다 싶었는데 정말 귀계(鬼計)에 익숙한 자로군. 후후......”

“아까부터 당신의 은근한 심리가 느껴졌소. 속에 능구렁이가 백 마리는 들어있는 자들 특유의 화법이었지. 그리고 사부와 교섭을 한다면서도 붕 떠 있는 그 태도는 현재 수면에 드러나 있는 거래관계의 주체만으로는 성립할 수 없는 것.”

이광은 팔짱을 끼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대답은 간단하지. 지금 이 자리에는 보이지 않지만 나일라토프 당신이 따로 거래하고 있는 또 다른 [누군가]가 존재하는 것이오. 그게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사부에게 호의적인 존재는 아니겠지.”

“!!”

“그 [누군가가 제시한 의뢰는 바로 사부의 행동을 최대한 봉쇄하며 이 세계에 묶어두는 것. 사부는 여태 눈치도 못 채고 있었으니 당신은 아주 성공적으로 의뢰를 성공한 듯

하오.”

뭣!!

나는 옆에서 이광의 말을 듣다가 눈을 부릅떴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흐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일라토프는 특유의 묘한 미소를 짓더니 말했다.

“아주 재밌어. 단순무식한 전생자와 얘기하는 것과는 또 다른 재미가 있군......”

이광은 귀찮다는 듯 말을 이었다.

“나는 그리 재밌지 않소. 나는 사부 때문에 억지로 이 세계에 끌려 들어온 셈이니 나를 당신들 사이의 문제에 공연히 끼워 넣지 마시오. 지금 당신이 시간을 질질 끌려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나선 것뿐이니.”

"흐음.”

“또 하나. 방금 전 등가교환의 거래를 운운한 것은 바로 사부에게 은근히 새로운 거래에 내놓을 수 있는 '대가'가 있는지를 물어본 것이었을 거요. 맞소?”

“아주 이야기가 편하군.”

나일라토프가 순순히 인정하자 나는 옆에서 듣고 있다가 열이 뻗쳐서 나일라토프에게 외쳤다.

“이 개자식!! 그냥 처음부터 나한테 대가가 있는지 제시하면 될 거 아니냐고!! 이제 와서 뭐?! 실컷 시간이란 시간은 다 잡아먹고 이제 와서 나를 또 이용해 먹으려고?!"

나일라토프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우리 첫 만남이 기억나나? 자네는 너무 성급하고 지성도 뒤떨어져서 별로 대화하고 싶은 존재가 아니었어. 격(格)도 낮아 보였지. 그래서 그 후에도 자네를 상대로 추가적인 거래를 하고싶은 생각은 없었네.”

“뭐!!”

“이해하게. 자네도 인간의 왕(王)으로서는 그럭저럭 평균이상의 자질이 있지만 내게 의뢰했던 ‘그 존재'에 비하면 너무나 격이 뒤떨어져. 제대로 된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였지.”

“그냥 이 세계에 갖다놓고 시간이나 끌면서 자네가 전생자로서 어떤 변인(變因)을 만들어낼지나 관찰할 셈이었지...... 그때까지는."

나는 분노보다는 궁금함이 느껴졌다. 도대체 누구한테서 의뢰를 받았단 말인가?

내가 거기에 대해서 질문하려 할 때 나일라토프의 말이 이어졌다.

“생각이 달라진건 자네가 양자얽힘을 조작해서 내 부활을 금지했기 때문이야.”

“그 한 수를 보고 나니 대화할만 한 상대라고 여겨졌지.”

아까 저놈의 목을 따고 나서 만상지투로 회로를 따 버렸을 때를 얘기 하는 건가? 나는 별 생각 없이 했던 행동이지만 저놈이 자못 주목하는 걸 보니 내가 굉장한 일을 해냈나 싶어서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 이광이 저만치에서 2번째로 소환되는 인영이 점점 구체화되는 걸 보더니 말했다.

“나타났군.”

우웅!

이광에 이어 모습을 드러낸 것은 홍안의 청년이었다. 극히 잘생긴 그 앳된 청년은 내가 익히 아는 얼굴이었기에 나는 그자를 보자마자 깜짝 놀라서 외쳤다.

“이환웅!!”

이환웅! 나일라토프의 제자이자 난데없이 우리 세계에 소환되어서 결과적으로 내가 외우주까지 오게 만든 원흉!!

근데 저 녀석은 분명히 외우주에 같이오지 못했을 건데?!'

나일라토프 또한 이환웅을 발견했는지 눈에 이채를 띄었다.

"호오. 내 제자가 왔군. 과연 흉신의 의도는 그건가?”

이환웅은 난데없이 알 수 없는 공간에 소환되자 얼떨떨해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더니 멀리에 있던 나와 이광, 나일라토프를 발견하자 가까이 다가왔다. 이윽고 이환웅이 다가오자 그는 상당히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사부, 어떻게 된거지? 난 분명히 백웅이 있던 세계에서......”

나일라토프는 의미모를 웃음을 짓더니 말했다.

“기다려봐라. 아무래도 '세 번째’가 누구일지 짐작이 가니까 빨리 백웅과의 교섭을 끝내야 할 것 같구나.”

“? 알았어.”

이환웅은 일단 납득한 후 상황설명을 기다리기도 한 모양이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한층 머리가 복잡해졌다.

‘흉신은 대체 왜 이광과 이환웅을 소환한 거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환될 자는 대체 누구지?'

흉신의 속내가 전혀 읽히지 않았다. 내가 고민하고 있을 때 나일라토프가 말했다.

"백웅. 이광의 말대로 나는 본의 아니게 자네를 이 세계로 인도한 후, '누군가’와 거래해서 자네를 함정에 빠뜨렸지. 하지만 지금이라도 자네가 그자가 제시했던 것 만큼의 또 다른 대가를 등가(等價)로 제시 할 수 있다면 내 모든 힘을 다해서 원래 세계로 데려다줄 것을 약속하지.”

“...... 웃기고 있네.”

나는 짜증이 나서 중얼거렸다.

"네놈이 나한테 명예니 약속을 내세우면서 공염불을 한 게 몇 번인 줄 아느냐? 이제 와서 네놈의 약속에 무게가 있을 것 같아!! 자칭 과학자면서 아무런 약속도 지키지 않으려 들다니 너처럼 가벼운 새끼랑 무슨 말을 하겠느냐!!”

내 말에 나일라토프는 침묵했고 되레 옆에 있던 이광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사부. 그런 속내를 교섭중에 솔직히 다 말해 버리면 어떡하오? 정말 상황을 해결하자는 건지 말자는 걸지 ......”

“시꺼! 죽을 때 죽더라도 열 받잖아!”

“정신 나갈 것 같군.”

내가 소리를 빽 하고 지르자 이광은 마뜩잖은 표정으로 꿍얼거렸고 나일라토프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 그래. 내가 너를 기만하기만한 건 사실이다. 확실히 과학자의 명예는 함부로 걸 게 아니었어. 다만 이번 한 번만 더 믿어달라고 할 수밖에 없겠군...... 지금은 나로서도 나름대로 절실한 상황이니까."

“절실한 상황이면 절실하게 행동해! 난 죽음 따위 두렵지 않으니까 내가 한번 각오를 하면 네 녀석이 나랑 배짱 싸움을 해서 이길 순 없을 거다!”

“그렇군... 맞는 말이야.”

순순히 인정하듯 고개를 끄덕인 나일라토프가 입을 열었다.

"내게 자네를 봉쇄하라고 의뢰한 것은 바로 니알라토텝이다. 그리고 그가 내게 제시한 대가는 내가 [중앙]으로 갈 수 있는 자격을 주는 것이었다.”

“?!”

“백웅, 자네는 나에게 이와 상등한 대가를 줄 수 있겠는가?"

“뭐, 뭐라고…...”

니알라토텝! [기어오는 혼돈]의 가장 강력한 사도이자 화신, 그리고 그 자체로 외신(外神)에 가까운 힘을 지닌 거대한 존재!

28번째 생에서 황제조차 갖고 놀았던 그놈의 이름이 언급되자 나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여태 의식은 하고 있었지만 설마 이번 일에 놈이 직접 개입되어 있었을 줄이야!

하지만 나는 당황을 멈추고 갑작스럽게 머릿속이 차갑게 가라앉는 걸 느꼈다. 그러고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 그러면 나를 배신한 건 언제지? 처음부터였나, 아니면 도중부터 였나.”

“날카롭군. 방금 말했던 대로 자네를 이 세계로 데려온 건 순수한 호기심이었고 니알라토텝의 의지는 관계없었다. 그러나 내가 니알라토텝의 제안을 받아들인 건 자네와 대화하여 한 가지 진실을 깨달은 후였지.”

“......”

나는 어렵지 않게 그 진실을 유추할 수 있었기에 입을 열었다.

“윤회의 [중앙]으로 갈 수 있는가 없는가. 넌 스스로 갈 수 없다고 했었고, 그 때문에 갈 수 있는 자격을 얻으려고 니알라토텝이란 놈과 접촉 한 거군.”

“후후후...... [가면]인 내게 언제나 그쪽에서 접촉하려 했지. 그동안 내 과학력으로 접촉을 차단하고 있었지만 내가 원하기만 하면 차단만 풀어도 얘기할 수 있었어. 그리고 그 자격을 얻는 대신에 적극적으로 자네를 이 세계에 묶어두려 했지.”

“그래서? 내가 그만한 대가를 줄 수 있는지를 묻고 있는 거냐?"

내 반문에 나일라토프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내 불사성을 차단한 그 한 수는 인상 깊었어. 어쩌면 자네라면 그 존재만큼 성장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군. 그래서 당장 내놓을 수 있는 대가가 아니라도 약속만 해주면 자네의 성장을 믿고 거래하도록 하지."

"재수 없는 새끼......"

"너무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주게. 이건 [가면]으로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니까."

"음......"

나는 침음성을 흘렸다. 그 말대로 나일라토프 저놈은 순수하게 자기 이득만 추구하다 보니 저런 선택을 했다는 게 이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가면]이라는 놈들의 본질을 생각하면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중요한 건 저 재수없는 놈한테 무작정 복수하려 드는 게 아니라 저 놈을 이용해서 이 개 같은 상황을 벗어나는 것! 일단 여기서 벗어나면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서 어떻게든 되리라.

'윤회의 [중앙]으로 갈 수 있는 권리...... 내가 그만큼의 뭔가를 갖고 있는가?'

나일라토프는 사실상 황제나 흉신을 상대해도 싸움까진 아니라도 무난히 도주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신적 존재다. 그래서 내가 칠요나 전국옥새를 내놓는다 하더라도 나일라토프 입장에선 심드렁할 게 뻔했다. 나일라토프 정도면 스스로 그 정도 보물은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서 놈한테 사대신기를 내놓을 수는 없다. 사대신기는 결국 니알라토텝과 결판을 내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결전병기! 아무리 지금 상황이 급해도 내놓을 수 있는 보물이 아니다.

대체 뭘 내놓아야 나알라토프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내가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이광이 말했다.

“사부. 자세한 상황은 모르겠지만 귀중한 걸 내놓으면 되는 거요? 현물이 아니라 미래의 성장성을 담보로 잡은 것도 상관없소?"

“그렇다고 하는데.”

“그러면 간단하구려.”

이광이 팔짱을 끼며 황당한 말을 했다.

“사부가 미래에 저 나일라토프를 [중앙]이란 곳으로 직접 데려다주면 되지 않겠소.”

“엉?”

“등가교환이란 말에 딱 맞는군. 저 놈도 어느 정도는 이런 답변을 원하는 것 같고.”

내가 나일라토프를 윤회의 [중앙]이란 곳으로 데려다준다고? 나는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황당한 기분이 들었지만 바로 다음 순간 나일라토프가 그걸 원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부러 등가교환이라는 단어를 쓰면서 강조한 건 아마 그런 뜻이리라.

나는 그 분위기를 깨닫자 어이가 없어서 나일라토프를 쳐다봤다.

“제기랄. 지금 나보고 어딘지도 모르는 외우주 너머까지 데려다 달란 말이냐? 무슨 이딴 약속이......”

“이광 말대로일세. 그건 전생자인 자네만이 해줄 수 있는 약속이야. 나는 그 한마디를 듣고 싶어서 여기까지 온 것이네.”

“전생하다 보면 언젠가 가능할걸세. 전생자가 가면만이 쓸 수 있는 [기술]을 쓸 수 있다고는 생각지도 못했으니까.”

“?”

저 녀석은 만상지투를 굉장히 높게치는군. 왜 그런 거지? 만상지투가 강한 기술이긴 하지만 신급 존재에게 늘 통용될 정도로 좋은 것도 아닌데 ....

의아한 생각이 들었지만 어쨌든 지금은 이 거래가 가장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 그렇게 하지. 하지만 말해 두는데 한 번만 더 사람을 기만했다가는 국물도 없어.”

“알았네. 그럼 이제부터 거짓과 기만 없이 자네가 원래 세계로 되돌아가는 걸 전력으로 서포트하도록 하지. 우선 그걸 위해서 첫 작업을 시작하겠네.”

그렇게 말한 나일라토프가 갑자기 손을 앞으로 뻗었고, 그 손에는 황금색 회중시계가 소환되었다.

치리링!!

“어?!”

나는 그 황금색 회중시계를 분명히 본 적이 있었기에 깜짝 놀랐다. 나일라토프는 내 반응을 아랑곳하지 않고 그 회중시계를 낚아챈 후 옆에 서 있던 이환웅에게 던져주며 말했다.

“받아라, 제자야.”

“스승님. 이건....”

나일라토프는 씩 웃으며 말했다.

“이제부터 메피스토펠레스는 너의 것이다.”

저 회중시계가 메피스토펠레스라고?!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나는 저 황금빛 회중시계를 28번 째 생에서 본 적이 있었기에 알고 있었다. 그건 비록 [매듭]속의 일이긴 했지만, 등장인물은 현실과 거의 다를 바가 없었기에 정사(正史)와도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그것은 목걸이며 동시에 회중시계 입니다. 15세기 독일 뮌헨의 시계공방에서 유행했던 하일리히(Heilig)양식으로 판단됩니다.]

금색 목걸이이자 회중시계, 히든피스, 그것은 28번째 생에서 전뇌자가 내게 전뇌세계에서 건네줬던 것으로, 그 정체를 추적하다 보니 사실 그게 크로노쿼츠라고 불리는 시간이동(時間移動) 능력을 가진 아티팩트란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갈무후의 지혜를 빌려 수수께끼를 풀고 히든피스 내부로 들어가게 되자 파우스트 박사를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난 그 당시 파우스트 박사와 대화 했던 내용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여기는 광속으로도 200억 광년이 걸릴 정도로 머나먼 성계...... 내가 이 성계로 온 까닭은 단지 신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오. 바로 이곳에 태초우주의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이오.]

[여기가 바로 외우주와의 경계지점이며 특이점 폭발의 여파로 생겨난 허공(虛空)의 경계. 이곳에서 나가면 바로 점층화 된 우주전쟁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혼돈의 무덤이 쌓여 있소. 그 무덤을 나가면 바로 외우주가 나타나지.]

[우주의 특이점이 폭발할 때 가장 먼저 탄생한 것이 무엇이겠소?]

[그것은 바로 허공록(虛空錄). 전지(全知)의 왕이며 [지배자]들의 왕. 우주에서 가장 현명한 존재! 그 존재보다 앞선 존재는 오로지 [아버지] 뿐이며, 그렇다면 특이점의 폭발 때 세계에서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허공록 뿐인 거요.]

[물론이오. 그 시계는 [다중우주]의 시간을 불러올 수 있소. 이 장소에서 꾸준히 태초의 우주를 연산력으로 읽어 들인 덕분이오. 메피스토펠레스의 연산력이 스며든 분신이라고 도 할 수 있지.]

쓸데없이 기억력이 좋아서일까? 새삼 그 당시 파우스트의 말이 무척 어려웠는데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다 생각이 났다. 물론 너무 어려운 소리를 해대서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확실한 건 하나였다.

'본래 금빛 회중시계인 히든피스는 파우스트 박사의 모든 것이 담겨 있는 유물이야. 그것도 500년 후의 대웅제국에 우연의 일치로 나타난 것!! 그런데 어떻게 저 나일라토프가 히든피스를 갖고 있는 거지?!'

그리고 그게 메피스토펠레스라니?!

내가 당황해하자 나일라토프는 뜻 모를 미소를 한번 짓더니 이환웅에게 말했다.

“왜 그러지? 기쁘지 않은 표정이구나.”

그의 말대로 이환웅은 금빛 회중시계를 받아놓고 도리어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더니 말했다.

“전후상황이 하나도 이해되지 않는데 뜬금없이 강인공지능이 담긴 유물을 건네준다는 건 결국 제게 무척 어려운 미션을 주신다는 말일 테니까요.”

“과연 이환웅, 내 제자답게 똑똑하구나.”

“상황이라도 좀 설명해 주십시오. 여기는 어디고 제게 이걸 주신 이유가 뭡니까?”

이환웅이 따져 묻자 나일라토프가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제자야. 넌 사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단다. 한낱 닫힌 세계의 주민일 뿐이지.”

“?!”

“하지만 지금부터 줄 미션은 네가 실존하는 존재가 될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무, 무슨.”

그 말에는 아무리 괴짜인 이환웅이라도 당황했는지 이환웅은 얼빠진 기색이 역력했다. 상식적으로 이환웅이 아닌 그 누구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스승이 저런 헛소리를 하면 납득은 커녕 이해조차 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환웅은 잠시 후 표정이 싹 변하더니 침착하게 되었다.

“이해했습니다.”

“정말 이해했느냐?”

“제가 꿈속의 등장인물이나 다름없다는 소리겠지요. 제가 현실이라고 믿고 있던 것은 가상세계라는 말이고 제가 싸우고 있던 세기말의 세계 조차도 모형정원이란 뜻 아닙니까. 스승님은 '바깥'세상에서 오신 분이 니까 그런 거겠죠.”

“후후, 정확히는 다른 개념이지만 뭐 대충 정답이다. 과연 내 제자답다.”

“........ 후우.”

이환웅은 한숨을 쉬더니 손에 들린 회중시계를 철그렁거리며 말했다.

“이 메피스토펠레스를 이용해서 저 백웅이란 자를 도우면 되는 겁니까?”

“정확해. 그가 원래 세계로 되돌아가도록 도와줘라.”

“가능한 일이겠지만 그걸 해서 어떻게 제가 실존할 수 있게 되는 거지요?”

“그건 미션을 수행하다 보면 알게 될 것이다. 너라면 틀림없이 깨달을 것이야.”

“받아들이겠나?”

이환웅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겠습니다.”

“좋다. 메피스토펠레스를 네게 귀속시키겠다.”

우우웅!!

잠시 후 밝은 빛과 함께 황금빛 회중시계가 이환웅의 심장으로 흡수 되었다. 이환웅은 잠시 동안 비틀거렸고, 그는 한동안 의식이 몽롱해져서 몸을 가누지 못하는 걸로 보였다. 그런 이환웅을 쳐다보고 있던 나일라토프가 말했다.

“말하고 싶은 게 있나보군, 백웅.”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가 개발한 강인공지능이야. 연산력을 1할 떼어서 내게 손목시계로 준 적도 있어. 그런데 네가 어떻게 갑자기 메피스토펠레스를 이환웅에게 줄 수가 있지?”

내 질문에 나일라토프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파우스트가 미래에 개발하게 될 완성형 메피스토펠레스를 다중우주의 시간에서 가져왔을 뿐이다.”

“?!”

“인과율을 소모하면 가이아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지."

뭐라고?!

그런 말도 안 되는 게 가능하단 말인가?!

'이, 이 자식....’

강력한 신적 존재라고는 생각 했지만 생각보다 더 강력한 놈인 것 같았다. 생각지도 못한 나일라토프의 실력에 내가 당황하고 있자 나일라토프가 말했다.

"이환웅이라면 강인공지능과 함께 성장하면서 자네를 원래 세계로 되돌려보내 줄 수 있겠지. 이로써 거래가 성립한 것 같군.”

“성장? 무슨 헛소리야. 난 지금 당장 이 세계에서 탈출해서 되돌아가고 싶다고. 네가 직접 가이아에 태워서 데려다주면 되잖아.”

“아니, 지금은 그럴 수가 없네. 어설프게 가이아로 탈출하려 하면 뒤통수를 맞아서 전멸할지도 모르겠네.”

나일라토프는 그렇게 말하면서 스윽 세 번째 소용돌이를 쳐다보았다.

“저기서 나타날 녀석이 범상치 않아. 슬슬 전투준비를 하는 게 좋겠군.”

“......”

우우우우 -

아닌 게 아니라 이광, 이환웅에 이어 세 번째 소용돌이 또한 서서히 원으로 굳어지면서 안에서 무언가가 나오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앞선 경우와 달리 그 '무언가’는 나타나기 전부터 무시무시한 압박감을 방출하고 있어서 나도 선명하게 느낄 수가 있었다.

파지직

전신의 세포가 짓눌리는 기분이 든다. 나는 강대한 압력, 그리고 어디선가 느껴보았던 마력의 기운 때문에 순식간에 세 번째 소용돌이에서 튀어나올 '적'의 정체를 알아챌 수가 있었다.

“...... 마법의 신 헤르메스!!"

틀림없다. 아직 모습을 드러내진 않았지만 좀 전에 싸워보았기 때문에 알 수 있다. 무시무시한 마법을 난사하면서 나를 위기로 몰아넣었던 그 마력의 낌새를 잊을 리 없었던 것이다.

피처럼 붉은 눈동자 수십 개가 어둠 저편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게 보인다. 아까보다 더욱 흉흉한 기색으로 [뱀]이 서서히 흘러나온다. 뱀의 머리가 음영의 형태로 어둠 속에서 흘러나옴과 동시에 헤르메스의 영언이 울려 퍼졌다.

[흉신이 직접 문을 열어준지라 무척 망설였지만 오기를 잘 했군...... 전생자, 네놈을 내 손으로 찢어발길 수 있을 테니까!!]

"커헉!!”

나는 그와 동시에 눈과 귀에서 피가 철철 흘러넘쳐서 비명을 내질렀다. 내가 큰 고통을 느끼며 앞으로 다시 한번 엎어지자, 나일라토프가 말했다.

"백웅이여. 흉신은 이 자리에 자네 의 인연을 모조리 불러모아 결자해지(結者解之)하기를 바란 듯하군.”

“뭐?”

“다시 말하자면 이 자리에 소환된 우리 셋이야말로 자네가 이 외우주에서 해결해야 할 인연이란 뜻이지. 어떤 식으로든 마무리를 내야만 할 것일세.”

“... 크으, 제기랄!! 대체 무슨 생각이냐고!!”

나는 기가 막혔다. 흉신이 대체 왜 이런 오지랖을 부린단 말인가?! 서로 불가침조약을 하기로 해놓고 이런 식으로 나와도 되는 것인가? 내가 이런 생각을 하리라는 걸 유추했는지 나일라토프가 사족을 덧붙였다.

“아, 자네에게 직접 해를 끼치는 건 아니니 불가침을 깨는 건 아니겠지. 게다가 해가 될 자만 불러낸 것도 아니고 나는 자네에게 득을 보게 해줬지 않은가?”

“......”

나는 나일라토프와 대화나 할 시간이 없음을 직감했다. 나를 흉맹한 기세로 노려보는 저 헤르메스를 보면 지금 내가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라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급히 나일라토프에게 말했다.

"나일라토프...... 보면 알겠지만 나는 지금 몸 상태가 경각에 달해서 저런 강적과 싸울 수 없다. 거래했으니 날 지켜줘!”

“싫은데.”

“그래, 가서 싸...... 어?"

지금 내가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내가 나일라토프를 돌아보자 나일라토프가 여유작작하게 말했다.

“‘거래’는 이미 성립되었네. 그러나 그 거래조건에 마법의 신 헤르메스와 싸우는 건 들어가 있지 않아. 이 위기를 벗어나는 건 스스로의 힘으로 해 보게.”

“웃기는 소리!! 내가 이 자리에서 살아나가지 못하면 네놈을 윤회의 도정에서 [중앙]으로 데려가 주지 못하잖아! 그러니까 지켜줘야지!!"

내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나일라토프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안 지켜줘도 상관없지 않은가?"

“뭐?”

“자네는 전생자일세. 죽으면 아마 원래 세계로 되돌아가던가 아니면 이 세계에서 새로운 전생 시작점이 생겨서 새 전생을 시작하겠지. 즉 자네에게 있어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는 뜻이 아닌가.”

이어진 나일라토프의 말에 나는 뒤통수를 크게 한 방 맞은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거래는 이미 이뤄졌네. 죽든 살든 자네는 이제 내 소원을 들어줘야 할 걸세......” “!!”

“거래조건대로 이환웅은 그대로 빌려주지. 그에게 탑재된 메피스토펠레스가 생을 반복하더라도 인과율을 추적하여 결국 자네를 원래 세계로 탈출하도록 인도해줄 테지만......”

나일라토프가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다음 생에 내가 설령 백웅 자네를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일부러라도 외우주의 [문]으로 와서 날 만나야 할 걸세... 하하하하!!"

빌어먹을!!

이딴 식으로 거래를 해석할 수가 있다고?!

아니 그것보다 내가 전생자라는 걸 이런 식으로 이용해먹을 수 있단 말인가!!

“제...... 제기라아아알!!"

내가 크게 비명을 지르자 저만치에서 헤르메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흥미롭군...... 우주의 방랑자여. 그대는 이미 우둔한 전생자를 한 번 이용 해먹은 듯하구나.]

헤르메스는 어느새 자신의 본체라고 할 수 있는 거대한 흑사(黑蛇)의 전신을 이 공간에 모두 소환해 둔 상태였다. 산맥보다 더욱 거대한 그 본체를 쳐다보고 있자 놈의 마력이 점차 증대되는 게 느껴졌고, 저런 괴물을 상대로 지금의 내가 이기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여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헤르메스의 말에 나일라토프가 피식 웃었다.

“자네가 날 상대로 음모를 꾸미며 전생자를 뜻대로 조종하려 하는 건 잘 구경했네. 하지만 내가 자네라면 여기서 전생자를 죽이지는 않을 걸세.”

[...... 호오, 과연 그런 말이군.]

이어진 헤르메스의 말에 나는 한층 정신이 나갈것 같았다.

[내가 전생자에게 봉인을 걸어서 이 외우주에 수십억 년 동안 봉인해서 인격을 해체해도 방해하진 않겠다는 소리겠구나, 나일라토프.]

“과연 현명하군.”

[나일라토프여. 전생자가 인격과 힘을 잃어버리면 그가 다음 전생을 시작했을 때 이 닫힌 세계를 관찰하다가 그를 찾아내서 다시 그대의 취향대로 길들이겠다는 소리구나. 허나 너무 욕심이 많은 듯싶은데?]

“흐음. 혼자 먹으면 체한다는 뜻인가?”

[그렇다.]

“그럼 나와 지분을 논해보겠는가?"

[그래. 이렇게 된 이상 나 또한 이 외우주에 몇억 년 정도는 머물러 주지. 어차피 그대가 원하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내가 원하는 승천(昇天)과 비슷해 보이는구나.]

“재밌는 제안이군.......”

어느새 두 놈은 의기투합해서 나를 어떻게 쪼개어 먹을지를 의논하고 있었다.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된 거지?

정말 죽느니만도 못한 꼴이 됐잖아!!

내가 어이가 없어서 입을 쩍 벌리고 있자 옆에 서 있던 이광이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사부. 내가 당신이라면 일이 이 지경이 되기 전에 나일라토프가 다른 마음을 먹지 못하게 교섭환경을 바꿨을 거요. 힘 있는 놈이 하자는 대로 네네 하면서 끌려왔으니 어찌 이런 꼴이 되지 않았겠소?"

나는 이광의 말에 괜히 열이 뻗쳐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빌어먹을! 난 대라멸진을 써서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단 말이다. 이 상태에서 교섭을 해야 하는 건데 너라고 뭐 뾰족한 수가 있겠냐!”

"있소.”

흠칫

“있다고?”

내가 반문하자 이광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당신에게 유일한 아군을 믿는 것 이오. 이제 슬슬 움직이겠군.”

76-1

내게 유일한 아군?

'아!’

내가 이광의 말뜻을 이해한 순간이었다. 상황이 흘러가는 걸 지켜보고 있던 이환웅이 나일라토프에게 말했다.

“스승님. 저자와 협력하여 백웅을 죽이게 되면 전 어떻게 되는 겁니까?”

“걱정할 거 없다. 어차피 인과(因果)만 종속되면 어떤 식으로든 백웅이 너와 다시 만날 수밖에 없으니까. 그것이 바로 계약의 강제력이지.”

“......저의 이번 생은 아무래도 상관없단 얘기군요.”

“그렇다. 백웅을 죽이고 나면 이번'되감기'를 벗어날 수 있게 가이아에 탑승시켜주지. 인생을 다시 한번 이득 보며 사는 건 굉장한 이득이 아니겠느냐?”

“되감기라, 그런 거였군요.”

이환웅은 설명받지도 않았는데 나일라토프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다 이해한 듯했다.

언뜻 이환웅이 이득 보는 것 같지만 단순히 그런 얘기가 아닐 것이다. 나는 전생자였기에 나일라토프가 얼마나 잔인한 얘기를 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 이환웅은 자기 삶을 부정당한 거야.'

자기가 목숨 바쳐 지키려 했던 인류, 자신의 민족. 모든 게 거짓이고 나일라토프의 장난감에 불과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환웅이 제정신이 라면 저런 미친 소리를 듣고도 기뻐 할 순 없다. 삶 자체가 거짓인데 다시 인생을 우월한 지위에서 시작하는 게 무슨 의미란 말인가? 제자에게 하기에는 굉장히 잔혹한 말이었다.

“그렇단 말이죠......”

그러나 나일라토프의 그 냉혹한 말을 듣고도 이환웅은 당황하거나 슬퍼하기는커녕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했다. 그러더니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저도 손절각을 잡는 게 낫겠습니다.”

“으음? 손절이라면......”

나일라토프가 뜻밖의 이야기를 들은 듯 어리둥절할 때였다.

퍼억!

그 순간 이환웅의 손이 의념을 담고 빠른 속도로 나일라토프의 심장을 관통했다. 나일라토프는 고통을 못느끼는 듯 물끄러미 피가 솟구치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고, 이환웅은 천천히 그의 심장을 뽑아내며 말했다.

“스승님을 따르는 것보다 백웅을 따르는 쪽이 훨씬 보상이 막대할 것 같거든요.”

슈슈슉......

나일라토프의 몸뚱이가 마치 연기처럼 변해서 사라졌다. 뜻밖의 사태에 나는 깜짝 놀라서 이환웅에게 말했다.

“이봐!! 네 스승을 배신한 거냐?!"

“딱 봐도 그렇지 않나?"

펑!

이환웅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며 피 묻은 심장을 쥐어서 터뜨렸다. 핏빛을 머금은 혈관과 육괴(肉塊)가 비산하여 잔인한 광경이었지만 잠시 후 그 핏덩어리들이 씻은 듯이 사라지고 말았다.

“아니, 피가......”

“어차피 정보생명체니까 당연한 거다. 양자과학으로 우리에게 실체로 인식시켰을 뿐 방금 전 내가 죽인 나일라토프는 실존하지 않아. 피도 심장도 육체도 모두 양자전정(量子剪定, Quantum pruning)으로 실재에 끼워 넣은 정보일 뿐.”

“?”

“하지만 방금 전의 일격으로 메피스토펠레스의 연산력을 이용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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