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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흉신의 예고없는 학살이 시작되었음은 바로 다음 순간부터 비슈누의 목이 쩍 하면서 허공을 날아가며 실감할 수 있었다. 신답게 아무런 전조도 없는 공격이었지만 중요한 건 비슈누가 방금 전 누트의 모가지를 날렸던 흉신의 일격에 똑같이 당했다는 점이었다.
왜 못 피하는 것일까?
이미 내 머릿속에서 삼황오제에 버금가는 비슈누가 왜 흉신에게 한방에 당하느냐는 의문은 사라져 있었다. 지금 궁금한 것은 그저 신들의 싸움에서 어찌 이토록 압도적인 차이가 나는 건지, 그리고 흉신은 정말로 이 자리의 모든 것을 없앨 생각인 건지 - 오로지 그런 의문이 몽상처럼 머릿속을 끓게 만들고 있었다.
[커학!!]
기묘한 비명소리를 내지른 비슈누의 목이 갑자기 휙하고 날아와서 본체에 붙었다. 그래도 누트보다는 더 강대한 신력을 갖고있기 때문일까? 재생능력을 이용해서 부활한 듯한 비슈누는 곧장 자신의 사완(四腕)을 모아서 두 개의 합장(合掌)을 형성한 후 진언(眞言)을 외쳤다.
옴(唵) - !!
흔히 알려진 천축 원류불종(元流佛宗)의 진언! 애초에 천축의 밀종(密宗)은 상위신 비슈누가 스스로 만들어내 섬김받는 종교였기에 그 근본인 비슈누 본체가 외치는 진언은 필멸자와 차원이 다른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 순간 옴의 진언 한 번에 비슈누 근처에서 차원의 왜곡이 수천 개나 생겨났으며 흉신의 몸에 형언할 수 없는 오채(五彩)의 균열이 일렁거렸다. 나는 신력을 다룰 수 있었기에 비슈누의 지금 반격이 고대의 신선조차 신술로 흉내낼 수 없는 가공할만한 권능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저 속성은… 창조(創造)?!’
적을 파멸시키는 공격처럼 보이지만 화안금정으로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한 순간에 비슈누는 흉신의 몸 주변에 수많은 차원을 임의로 생성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차원을 엮어서 밀도(密度)를 강화시키자 순식간에 거미줄이 얽히듯이 흉신 주변의 시공간이 억세게 봉인된 듯 했다.
우드득!
흉신이 다시 한 번 팔을 휘두르려다가 멈칫했다. 수천 개의 차원이 동시에 창조되어서 상대를 묶어버리는 비슈누의 어마어마한 술수에는 아무리 그라고 해도 잠시 멈출 수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고고고고 - !!
비슈누의 사완합장이 이어지는 동안 비슈누의 양쪽 눈과 이마의 삼안(三眼)이 형형한 빛을 내면서 피어올랐다. 비슈누의 몸에서는 마치 불타는 듯한 영기가 쉴새없이 일렁였고 그 마력의 파장은 잠시동안이지만 권능을 해방한 소호금천보다 더 강렬하게 퍼져나왔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나는 어찌된 상황인지 알아차렸다.
‘비슈누, 잠력(潛力)까지 다 긁어내어서 전력을 다하고 있구나!’
실로 기호지세(騎虎之勢)!
무척 단순해보이는 술수지만 비슈누에게 더 이상 권능의 대결은 없었다. 그는 이번에 흉신을 묶고있는 속박이 풀리면 무조건 패배할거란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뒤도 생각지 않고 신격 비슈누의 모든 신력과 권능을 쏟아붓고 있는 것이다! 단순한 힘대 힘의 구도였으나 그만큼이나 상대를 견고하게 묶을 수가 있었다.
쿠쾅!!
잠시 폭발음이 울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것은 어느 새 심연의 우주처럼 시꺼멓게 변해버린 장내의 풍경 속에서 비슈누가 만들어낸 수많은 차원들이 마치 철쇄(鐵鎖)처럼 형상화되어 흔들렸고, 그 철쇄가 흔들림과 동시에 우주의 별 중 하나가 터져버렸기 때문이었다.
“……!!”
지, 진짜 별이 터진단 말인가?!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저건 아무래도 진짜인 것 같았다. 정령체만 소환되는 공간이라지만 어느 새 이 공간의 법칙 자체가 뒤바뀌어있음이 피부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 곳은 이미 가상의 우주공간이었으며 별빛이 퍼져있는 대우주 그 자체였다. 아마 비슈누의 권능이 그 여파만으로도 별을 터뜨릴 수 있는 건 사실일 듯 했다.
‘저게 바로 고대신 비슈누 본체의 진정한 힘인가…!!’
촤르르
흉신은 자신의 몸을 묶은 듯한 철쇄를 잠시 말없이 내려다볼 뿐이었다.
주르르륵….
어마어마한 권능을 시전한 비슈누는 자신의 모든 눈에서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는 비통하게 외쳤다.
[나의 형제 시바여, 도망쳐서 브라흐마에게 귀의(歸依)하라!]
[뭐라고?]
시바가 흠칫하자 비슈누는 한탄하듯 말했다.
[이 놈은 절대 이길 수 없다. 삼법(三法)의 결맹(結盟)으로 후일을 도모하라…!]
파괴신 시바는 아주 잠깐 망설였다. 그러나 아까 전욱의 삼지창에서 회수했던 자신의 염주를 굳게 붙잡으며 흉신에게 뛰어들었다.
부웅
[웃기는 소리! 묶었으니 저 놈을 마무리 해주마.]
[안 돼!!]
파아앗
[이놈!]
[흉신이여… 각오하라!]
비슈누의 비통한 외침이 울리는 그 순간 - 틈만 보고 있던 소호금천과 응룡이 동시에 뛰어들었다. 황제와 반역자들, 절대 섞일 수 없는 진영같았지만 흉신의 존재감이 너무 압도적이었기에 일단 흉신을 처치하기 전에는 임시동맹을 하기로 무언의 약속이 오간 것이다.
소호금천의 양 날개가 활짝 펼쳐지자 마치 심연의 우주 전체가 붕조의 날개털에 가려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소호금천의 양쪽 눈에서 파멸의 회광(灰光)이 마치 번갯불처럼 번쩍이더니 소호금천이 권능을 시전했다.
멸라신위(滅羅神威)
서천은하광(西天銀河光)
키이이이이 -
마치 귀를 긁는 듯한 소리와 함께 흉신의 신형 전체가 어마어마한 빛을 뿜어내는 타원형의 면적에 갇혔다. 마치 흉신의 전신을 세로로 절단하려는 듯 윙윙 도는 전륜(轉輪)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 빛은 마치 흉신의 심장부터 쪼개겠다는 듯 흉신의 가슴팍에 큰 상흔을 만들어내었다.
촤좌좍
나는 저게 단순히 절단계 능력인줄 알았으나 이윽고 저 회전하는 빛에 수많은 구슬같은 별빛이 섞여있다는 걸 깨닫고는 눈을 크게 떴다.
‘으… 은하의 빛을 소환한 건가! 그럼 설마 흉신의 몸 중앙에 파고드는 칼날같은 흡인력은 설마….’
미래의 대웅제국에서 사마령 교수에게 현대 우주과학을 배울 때 들은 적이 있었다. 은하의 중심에는 무엇이든지 빨아들이는 거대하고 시꺼먼 구멍 같은 게 존재한다고 하는 이야기였고, 나는 별의 응력(凝力)을 이루며 강제로 회전시키는 게 어쩌면 그 검은구멍일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상상이 들었다.
쿠구구구!!
그러나 철쇄에 묶인 채 소호금천의 서천은하광의 칼날에 가슴팍을 베이고 있는 흉신이었지만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아니, 틀림없이 서천은하광의 규모는 인간의 상상을 초월할 텐데 저걸 저렇게 버티는 게 되는 건가?!
그러는 동안에 응룡도 권능을 뿜어내었다.
[우주의 바람이 몰아치노니….]
칠요의 시련때 맞닥뜨렸던 성간(星間)을 휘몰아치는 어마어마한 우주의 권풍(圈風)이 발현되어 서천은하광을 향해 날아갔다. 그리고 두 개의 권능이 합쳐지자 회전하는 은하의 칼날은 더더욱 기세를 더해서 강력해지는 게 육안으로 보였다. 응룡은 자신보다 소호금천이 더 강했기에 그의 공격기술을 보조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콰과과
두 명의 지배자급 존재가 합공을 해서일까? 흉신이 처음으로 움찔하는 반응을 보였다. 그런 흉신의 지근거리에 직접 다가간 파괴신 시바가 눈에서 혈광을 흘리며 자신의 팔에 전력을 담았고 크게 내질렀다.
[크아아아아아!!]
콰과과과광
굉난타(宏亂打)!
수백만 개의 권영(拳影)이 형성되어서 빛보다 더 빠른 속도로 시바의 거권(巨拳)과 염주가 쉴새없이 흉신을 타격했다. 절대지경 고수라 해도 지금 시바의 힘과 속도는 도저히 흉내조차 낼 수 있는 게 아니었고, 빛의 속도를 더더욱 넘기 시작하자 시바는 눈깜짝할 사이에 수천 개의 잔영(殘影)을 만들어내면서 염주를 휘둘렀다.
꾸콰콰쾅
시바의 염주 굉난타에 휘말려든 시공간과 차원이 무형의 균열을 만들어내며 마치 유리창처럼 깨져나가기 시작했다. 일격일격에 비슈누가 창조한 차원을 또다시 부숴버릴 정도의 막강한 완력을 담고있는 것이다. 나는 저 살벌한 타격을 보자 놈이 어째서 파괴신이라고 불리는지를 알 수 있었다.
투쾅!
흉신의 턱을 시바의 강권이 갈겨서 두상을 뒤흔들었다. 흉신은 잠시 턱이 돌아갔으나 이내 묵묵히 고개를 원상복구시키는 듯 했다. 그리고 한동안 시바의 공격에 넝마처럼 얻어맞는 흉신은 여전히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이 정도면… 이긴 거 아닌가?’
비슈누를 포함해서 무려 네 명이나 되는 최상위 지배자들이 합공을 가하고 있고 그 중 소호금천은 권능이 해방되어서 더 강해져 있었다. 철쇄에 묶여서 얻어맞기만 하는 흉신이 불쌍해보일 정도였다.
그 덕분일까? 방금 전 흉신에게 압도되어서 잔뜩 쪼그라들어있던 심상이 약간 회복된 것 같았다. 나는 흉신의 압박감에서 간신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때 어느 새 내 옆에 와 있던 전욱이 내게 말했다.
[백웅. 빨리 내 가면을 벗겨라.]
“…네?”
뜬금없는 요청에 내가 당황하자 전욱이 말을 이었다.
[어서. 신력을 조금 나눠줄테니 빨리 해라.]
우웅!
전욱이 손을 뻗자 그의 손끝에서 강력한 힘의 덩어리가 내 몸으로 들어왔고, 그걸 흡수하자마자 나는 단숨에 지금까지 입었던 육체적인 피해가 상당히 회복되는 걸 느꼈다. 비록 홍균도인의 가면을 훔친 오른팔은 재기불능인 것 같았지만 이정도만 해도 상당히 살만한 것이었다.
전욱이 진심임을 느낀 나는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엡!”
타앗
나는 재빨리 왼손으로 만상지투를 시전해서 전욱의 가면을 벗기려 했다. 다행히 전뇌자가 내게 말은 걸 수 없어도 돕고있는 중이기 때문인지 가면의 윤곽은 금방 손 끝에 감지되었다. 나는 윤곽을 따라서 힘을 주어서 가면을 벗기기 시작했고, 잠시동안 접착제처럼 세게 눌러붙어 있던 가면이 띠딕거리면서 떼어지는 손끝의 감각이 느껴졌다.
‘끄으윽…. 힘들군…!!’
소호금천의 가면을 벗길 때만큼이나 힘들다! 나는 절반쯤 했을 때 조금 막혀서 전신에 구슬땀이 나는 게 느꼈고 목에서 타는 갈증이 났다. 당장이라도 포기하고 싶었지만 나는 근성을 발휘해서 억지로 끝까지 전욱의 가면을 벗겨내었다.
푸화앗!
전욱의 가면이 벗겨지는 순간 - 그는 마치 소호금천 때처럼 광대한 마력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오오…. 오랜만에 내 권능을 되찾았구나….]
잠시 감회가 어린 듯 중얼거리던 전욱이 힐끔 내 쪽을 보더니 말했다.
[이상한 놈이 난입하려고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혹시 네가 바깥에서 싸우던 놈이냐?]
“……?”
이상한 놈?
나는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이내 누구를 뜻하는지를 알아채고는 얼굴이 굳었다.
“아마 그럴겁니다.”
[본좌도 공격에 참여할 터. 너는 그 놈이 난입해서 배후를 치지않게 경계를 하라.]
“알겠습니다.”
[흐흐… 본좌의 권능이 강화되었으니 너는 사도의 문양을 적극적으로 쓸지어다.]
투웅
전욱은 곧장 싸움터에 끼어들어서 흉신을 합공하기 시작했다. 나는 전욱의 말에 나도 모르게 내 손바닥을 들어서 펴보았다.
우우우….
신비로운 영기가 흐르는 내 손바닥에는 원래 세 개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지금 보니 그 중 1개의 문양이 소멸되어 있었고 2개가 남아 있었다.
‘제곡이 소멸했기 때문인가?’
그리고 그 2개의 문양은 처음 봤을 때와 달리 크기가 더욱 커져 있었고 문양 안에 새겨져 있는 주술언(呪術言) 각인의 형태가 달라져 있었다. 아마도 이건 본체인 삼황오제 소호와 전욱이 자신들의 권능을 해방했기 때문이리라.
“…흐음.”
생각해보니 아까는 이 문양의 힘을 하나도 사용하지 않았었구나.
그것도 그럴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능력인지 하나도 모르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 써야할지를 몰랐기에 일단 사대신기부터 썼던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이제 내게는 사도의 문양도 생겼으니 마력소모가 큰 사대신기보다는 문양을 먼저 쓰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내가 잡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치지지직 -
“……!!”
시공간의 한켠에서 불길한 마력이 새어나오는 게 아주 잠깐이지만 느껴졌다. 장내에서 여유로운 상황인 게 나뿐이라서인지 나만이 거길 주시하고 있었고, 나는 먼 곳에 있는 그 균열에서 무언가가 또 나올 거라는 걸 알아챘다. 그리고 누가 나올지는 이미 짐작하고 있는 중이었다.
‘좋았어. 어차피 저 괴물들의 싸움에 끼어들긴 좀 그렇고….’
아까 당했던 복수를 해 볼까!
내가 새로운 침입자를 향해 달려가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쉬익
“백웅, 어딜 가는 거지?”
“…나일라토프.”
내 앞에 나일라토프가 순간이동해와서 가로막고 있었다. 나는 놈의 얼굴을 보자마자 화가 치밀어올랐지만 간신히 억누르고는 말했다.
“내가 부상을 입었다고 만만해보이나?”
“딱히 아무 말도 한 적 없네만.”
“사생결단을 내고 싶다면 어디 해 보자고. 어차피 네놈과 해결을 봐야 여기서 탈출할 수 있겠지….”
꾸욱
나는 넝마가 된 오른팔을 축 늘어뜨린 채 왼손으로 검을 잡았다. 그리고 검뢰를 일으키며 동시에 육요를 띄워서 내 힘을 증폭시키기 시작했다.
무량단이든 사대신기든 사도의 문양이든 쓸 수 있는 건 다 쓴다.
그리고 눈앞의 개새끼를 쓰러뜨릴 것이다.
내가 전투할 준비가 만반인 걸 보고 있던 나일라토프가 훗하고 웃으며 말했다.
“반대야. 예상외의 상황이 일어나서 다시 손을 잡고 싶군.”
“…뭐?”
“이대로라면 나도 소멸될 것 같거든. 무수히 반복되는 이 세계에서 내가 절대 손대지 않으려고 했던 금기(禁忌)에 떡하니 손을 대버리다니 백웅 너도 참 어지간하군.”
“금기라는 건 설마….”
나일라토프는 힐끔 자기 뒤편에 있던 차원의 균열과 거기서 튀어나오려는 침입자의 낌새를 살폈다. 그리고는 다시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빙긋 웃었다.
“저런 잡졸은 신경쓸 상황이 아니야. 세계수의 핵을 내게 주면 둘이서라도 도망칠 수 있을 것이다.”
“…네놈 말을 어떻게 믿어.”
“흐음. 그럼 어찌 탈출하려는 거지? 나 이외에 황제나 흉신의 견제를 뚫고 이 자리에서 몸을 뺄 수단이 있긴 한가?”
“어떻게든 되겠지.”
“…….”
그 때였다. 나일라토프의 여유있던 안색이 크게 납빛으로 굳었다. 그는 크게 긴장한 듯 저 멀리에 있던 흉신을 한 번 쳐다보더니 다급하게 말했다.
“고, 고집부리면 안 된다. 이젠 진짜 위험하다. 설마 저 정도로 분노했을 줄은….”
나는 뭔 일인가 싶어서 나도 흉신을 한 번 쳐다보았다. 지금 보니 회색빛으로 뒤덮여 있던 흉신의 몸에 갑자기 혈색(血色)이 도는 것 같았다. 저게 뭔가 중요한 변화라고 느끼는 걸까?
콰과광
‘그래도 계속 맞고 있네….’
그러나 비슈누의 철쇄에 묶인 채 계속 네 명의 [옛 지배자]에게 다구리맞고 있는 흉신의 상태는 여전했기에 나는 안도감을 느끼고 코웃음을 쳤다.
“흥, 웃기지 마! 나도 죽으면 죽는거지 뭘….”
“네 능력이 통하지 않을수도 있다. 흉신은 네가 생각하는 그런 수준이 아니라….”
뭔가 내게 설명해주려던 나일라토프는 갑자기 경악한 표정으로 뒤바뀌었다.
“……허억!!”
그러더니 다급하게 한 마디를 남기고 사라졌다.
“알아서 피해라.”
파앗
“……?”
나는 나일라토프가 말 그대로 함선 가이아와 함께 쏜살같이 달아나듯 이 공간에서 사라진 걸 보자 황당했다. 저 놈도 어지간히 괴물이었는데 저렇게까지 겁을 먹다니? 저 놈은 대체 뭘 느꼈단 말인가?
그리고 바로 그 때, 흉신이 처음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흉신의 우완(右腕)에서 시뻘건 용암같은 근육이 솟아오르는 게 보인다. 마치 철쇄에 묶인 적도 없었다는 듯 우완이 천천히 앞으로 뻗어져나가자 철쇄를 묶고 있던 비슈누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크아악… 으윽…. 이노옴….]
철그럭
흉신의 오른손이 슬며시 비슈누의 철쇄 한 가닥을 거머쥐는 게 보였다. 그리고는 한 차례 손목에 탄력을 주어서 세게 휘두르는 듯 했다.
퍼버버벙!!
“……!!”
그것이 천축의 대신(大神)이자 만신전의 고대신 중 하나였던 비슈누의 최후였다. 비슈누의 신체는 철쇄가 비누거품처럼 터져나감과 동시에 수천 개의 육편(肉片)과 혈액을 튀겨내며 사방으로 비산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비슈누를 살해한 흉신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이번에는 자신의 정면에서 염주로 굉난타를 하고 있던 시바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갑자기 왼팔을 뻗어 시바의 목을 잡아쥐었다.
우드득!!
[크아앗!!]
콰앙
그러나 시바는 거기서 결판이 나지 않았다는 듯 목을 잡힌 채로도 계속 염주로 흉신을 가격하며 발악했다. 시바쯤 되면 아무리 흉신이라도 단숨에 살해하기는 힘든 듯 했고, 흉신은 그래서인지 자신의 가슴팍을 찢어발기고 있는 은빛 회전반을 내려다보다가 갑자기 자신의 박쥐같은 날개를 쫙 하고 펼쳤다.
후웅!
[우오오오오.]
흉신의 박쥐날개가 펴지면서 날아간 역풍(逆風)은 그대로 신수 응룡의 전신을 꿰뚫어버렸다. 둥근 구멍이 전신에 숭숭 뚫려버린 응룡은 고통스럽게 몸을 뒤틀었고, 흉신은 그대로 목을 잡고 있던 시바의 동체를 응룡 쪽으로 내던져버렸다.
꽈앙!!
[커억.]
두 신체(神體)가 부딪히면서 시바는 피투성이가 되어서 각혈을 했고 응룡은 그대로 소멸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흉신은 그제서야 자신의 가슴팍에 꽂히고 있던 소호금천의 서천은하광을 쑤욱 하고 뽑아내었다. 은하의 별빛이 우주의 검은구멍의 흡인력으로 회전하던 가공할 권능의 결정체를 마치 장난감 들듯이 다루는 것이었다.
[아니…?]
소호금천은 자신의 전력을 다한 서천은하광이 단숨에 무효화되자 어이가 없는 듯 괴음을 내었지만 그 때는 이미 흉신이 도리어 서천은하광을 그에게 던지고 있었다. 소호금천은 당연히 자신의 권능을 곧장 소멸시켰지만 흉신이 다시 한 번 자신의 우완을 크게 호선으로 휘둘렀다.
스칵!
마치 누트와 같이 소호금천의 머리통이 그대로 절단되어버렸다. 벌써 세 명이나 되는 [옛 지배자]들이 저 기술에 당한 것이다. 이름은 뭔지 모르겠지만 당했다 하면 저항조차 못 하는 듯 했다.
이제 장내에 멀쩡히 남은 것은 황제와 전욱 뿐 -
아까 참전해서 싸우던 전욱은 멀찍이 떨어져서 황망한 듯 흉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잠시 부들거리며 몸을 떨다가 거세게 외쳤다.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굴레]를 벗어나지 않는 이상 신이 지닌 힘에도 한계는 있게 마련이거늘, 흉신 너의 그 힘이 어찌 우주의 법칙에 맞는 것인가!]
[…….]
[한계가 없다는 게 어찌 유한한 인과율의 고리 속에서 인정될 수 있는가!]
저건 단순히 무력감에 의한 분노가 아니었다.
진정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흉신의 힘의 원천에 당혹스러워하는 것이다.
흉신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도리어 전욱의 말에 대답한 것은 황제 공손헌원이었다.
[가능한 일이다, 전욱.]
[어찌 그렇소?]
[그는 본디 정통한 계시자(啓示者)이며 종말(終末)의 주인공. 다들 잘 모르고 있었지만, 사실 그게 의미하는 건 하나였지….]
이어진 황제 공손헌원의 말이 천둥처럼 장내에 울렸다.
[종말(終末)이 이 세계의 운명인 이상, 그 종말의 계시자는 종말이 시작되었을 때 무량(無量)의 힘을 갖는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바로 흉신(凶神)이 [아버지]에게 받은 진정한 인과율이다.]
[……!!]
[그래서 본좌는 처음부터 그와 힘으로 싸울 생각은 접어두었던 것이니라.]
뜻밖의 진실과 함께 찾아온 침묵!
흉신은 왜인지 몰라도 황제와 전욱에게 바로 덤벼들지 않고 상황을 지켜보는 듯 했고, 전욱은 자신의 암창을 거머쥔 채 침묵하고 있었다.
[전욱이여. 이제 그만두어라.]
황제는 마치 달래듯이 전욱에게 말했다.
[그대는 승리를 원하지만 처음부터 승리를 논할 수 있는 위치에 선 적이 없었지 않은가.]
[…….]
전욱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갑자기 중얼거렸다.
[사도 백웅이여.]
나는 갑자기 나를 부르는 전욱의 말에 당황하지 않았다. 지금 그가 최후를 각오했다는 게 직감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나는 차분히 그 자리에 부복하며 예를 갖추었다.
“말씀하십시오.”
[이제 이건 네 것이다.]
쿠웅!
내 눈앞에 전욱이 날린 거대한 암창(暗槍)이 날아와서 꽂혔다. 내가 물끄러미 그 암창을 쳐다보자, 전욱이 말했다.
[패배자의 창을 받기 싫은가?]
“……!!”
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는 왼팔에 전력을 다해서 사도의 문양을 떠올렸고, 전욱이 준 폭굉(爆宏)의 문양이 빛을 내기 시작했다.
우우웅!
폭굉의 문양이 발동하자 나는 신력을 거의 쓰지 않고도 한 손으로 암창을 쑤욱 드러내서 뽑을 수가 있었다.
엄청나게 무겁다.
폭굉이 발동하고 있어도 역시 전욱의 진신병기를 들기에는 힘이 딸리는 게 분명하다.
하지만 나는 근육이 축축하게 느껴질 정도로 버틴 후 일어서서 말했다.
“제왕의 창을 하사받으니 영광이옵니다!!”
내가 왜 이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다 죽어가는 저 성질 더러운 전욱에게 충성을 바칠 이유 같은 건 없음에도 - 왜 나는 굳이 이 암창을 들었을까. 이걸 든다고 해서 황제나 흉신같은 괴물들에게 통하지도 않을 텐데.
하지만 왜인지 그가 자기자신을 패배자라고 칭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다.
[훗.]
전욱은 그저 옅은 웃음을 지은 후 그대로 흉신에게 달려들었다.
흉신은 지금까지처럼 아무런 감정의 변화도 보이지 않은 채, 전욱의 심장을 수도(手刀)로 꿰뚫었다. 너무나 무미건조하고 압도적인 일격이었다.
투확
짧은 소음과 함께 흑암의 거인이 쓰러졌다.
삼황오제 전욱의 죽음이었다.
나는 실감이 안 나서 입을 벌렸다.
“아….”
…거기까지였다면 나는 아무것도 안했을지도 몰랐다.
우드득
흉신이 쓰러진 전욱의 머리통을 밟아서 터뜨리지 않았다면 말이다.
“……!!”
대라멸진(大羅滅盡)
그리고 나는 나도 모르게 흉신에게 뛰어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