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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검신-1367화 (1,364/1,615)

1367====================

사신지혼(四神之魂)

나는 황제의 말에 당연히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 죽을 고생을 해서 훔쳐낸 건데 이걸 바로 달라고!’

어떤 꿍꿍이속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고 또한 황제에게 심각하게 뒤통수를 맞은 경험이 있었기에 나는 일단 의심부터 했다. 하지만 이대로 마냥 침묵으로 거절만 하고 있다면 결국 저 압도적인 힘을 이용해서 무력으로 탈취하려 들게 뻔했다.

시간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에 나는 황제를 노려보며 말했다.

“이건 내가 내 힘으로 홍균도인과 내기를 해서 벗겨낸 가면이오. 당신은 이 내기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데 어째서 가면을 달라고 하시오?”

[그런 건 본좌와 상관이 없다. 중요한 건 서로가 원하는 걸 줄 수 있다는 거겠지.]

“주기 싫소. 다른 걸 제시하시오.”

[주기 싫다라….]

황제는 옥좌에 턱을 괸 채 마치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그대가 그 가면을 쓰기라도 할 셈은 아니겠지?]

“……?”

내가 이 홍균도인의 가면을 쓴다고?

영 생각도 하지 못했던 소리였기에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세상에 누가 이딴 불길하기 짝이없는 가면을 쓴다는 말인가!

나는 어이가 없어져서 피식 웃으며 말했다.

“당신의 용가면만큼 멋진 가면이 아니라서 그러고싶진 않군. 이 가면을 보자면….”

나는 슬며시 좌수에 들려있던 홍균도인의 가면을 보다가 순간적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아까는 그냥 벗겨내는데 급급해서 제대로 외형을 못 보았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엥? 이, 이거 정말 이상하게 생겼…네?’

기괴하다.

그 말이 딱 어울리는 가면이었다.

마치 살아서 숨쉬는 듯한 분홍빛 촉수의 문양이 눈밑에서 일렁이고 있었고 시시각각 왜곡(歪曲)이 형상화된 어둠이 삐직거리며 이동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마치 아까 홍균도인처럼 눈두덩 안쪽에는 총천연색의 혼돈이 소용돌이치고 있지 않은가?

나는 이 끝내주게 불길한 가면에서 진짜 이상한 것은 바로 가면의 뒤편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뒤편은 인피(人皮) 특유의 역한 냄새를 풍기면서 쉴 새 없이 씨액거리는 괴기스러운 울음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기에 도무지 쓸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나는 비위가 상할 정도로 끔찍한 이 가면을 보자 잠시 당황해서 멍하니 서 있다가 말했다.

“…가, 가면의 가면이라서 그런지 무척 역겹군! 설마 가면이라는 족속들은 가면을 벗겨낼 때마다 열화(劣化)해서 질이 안 좋아지는 건가?”

[신기한 자로군. 가면을 벗겨낼 수 있다면 그대 또한 가면의 기술을 쓸 수 있다는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면의 특성을 모르는가….]

“…….”

[아무튼 좋다. 정보를 교환할 생각이 없다면 본좌로서는 무력을 행사하여 가면을 뺏을 뿐이다.]

엉?! 그건 안 돼지!

나는 이대로 전투를 시작하면 큰일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거의 반사적으로 가면을 들어올리며 외쳤다.

“누가 교환 안한댔소? 당연히 가면을 주고 정보를 받을 생각이오. 근데 교환순서가 이상하다고 말하는 것이오!”

[순서가 이상하다고?]

나는 저만치에 넋을 잃고 있는 홍균도인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렇소! 나는 저 자와 내기를 하여 가면을 벗기는데 성공하면 3개의 소원을 홍균도인이 들어주기로 하였소. 그 내기의 결과가 정산(定算)되지도 않았는데 섣불리 가면을 거래했다가 홍균도인이 딴소리를 하면 어쩐단 말이오?”

[…….]

“황제 공손헌원이여! 위대한 지혜를 발휘하여 이 거래의 순서를 올바르고 공정하게 맞추시면 좋겠소.”

그러자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파괴신 시바가 역정을 내었다.

[황제여! 저깟 애송이의 말을 뭐하러 다 들어주시오? 그냥 반역자들을 숙청하고 힘으로 빼앗읍시다!]

윽…!!

나는 시바의 말대로 하면 우리 쪽이 순식간에 괴멸당할 거란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움찔했다. 실제로도 황제 입장에서 굳이 교섭하지 않고 힘으로 밀어붙이더라도 별로 손해볼 게 없는 상황인 것이다.

그러나 황제는 시바의 말에 한 마디도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팔짱을 낀 채 뭔가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홍균도인에게 어떤 소원 3가지를 빌 생각이었느냐?]

“내기하던 시점에서는 딱히 생각지 않았소. 이기고 나서 생각할 셈이었소.”

[좋다. 그러면 이렇게 하자.]

이어진 황제의 말에 나는 약간 놀랐다.

[홍균도인과 너 사이의 인과율을 내가 대신 받아들이지. 그리고 본좌가 너의 소원 1가지를 들어주는 것으로 대가를 치환하는 건 어떠하느냐?]

“……!!”

[물론 전생자의 이름도 알려주지.]

뭐지?! 대체 무슨 계산을 했길래 이렇게 좋은 조건으로 나오는 거지?

나는 당장이라도 고마워서 춤을 출 뻔 했지만 교섭에서 상대방에게 쉽사리 의도를 간파당하면 안되었기에 도리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홍균도인은 3가지나 소원을 들어줘야 했는데 왜 당신한테 인과율이 넘어가면 한 개로 바뀐단 말이오?”

[몰라서 묻는가? 홍균도인은 기껏해야 스스로를 본체라고 착각한 가면에 불과하다. 그에 비해 본좌는 아주 옛날에 그를 초월해 버렸지…. 세 배 이상의 격차가 있을진대 이 또한 그대라는 대도에게 헌사하는 후의(厚意)일지어다.]

“…….”

오만하지만 상대는 황제 공손헌원.

그만큼 오만할 수 있는 존재라는 건 틀림없다.

증오스러운 개새끼지만 격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게 내 마음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나는 왠지 짜증이 나서 속으로 이를 박박 갈다가 마지못해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좋소. 받으시오.”

이쯤에서 타협하는 게 옳다고 생각한 나는 그대로 가면을 황제 공손헌원에게로 던졌다.

스스스

마치 돛단배가 물결을 헤치고 나가듯 속도변화 없이 날아간 가면은 마치 빨려들듯이 황제 공손헌원의 손아귀에 잡혔다. 황제 공손헌원은 탁 하고 그 가면을 잡은 채 한동안 가면을 쳐다보다가 중얼거렸다.

[본좌도 너와 다를게 없다고? 정말 그랬다면 처음부터 승천을 노리지도 못했겠지…. 본질을 억제하지 못한 아둔한 자여.]

누구에게 하는 말일까?

잠시 후 황제 공손헌원이 한 행동은 모두의 예상을 뒤엎는 것이었다.

덜걱

황제 공손헌원이 홍균도인의 가면을 자신의 용가면 위에 덧대듯이 그대로 써버리고 만 것이다!

[……!!]

[아, 아니!]

[도대체 왜?!]

황제의 만신전 권속 넷은 물론이고 삼제(三帝)또한 경악하고 말았다. 나도 그의 행동을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어서 눈을 크게 부릅뜨고 말았다.

‘이럴 수가!’

저걸 왜 쓴단 말인가?

삼황오제에게 씌워졌던 저 [가면]은 질서의 신격과 타협할 수 있는 기능이 있었지만 동시에 강력한 제약의 기능이 훨씬 더 강했다. 소호금천이 가면을 벗자마자 권능을 되찾고 강력해진 것만 봐도 알 수가 있었다. 그런데도 황제는 스스로 가면의 제약을 걸어버릴 줄이야!

이어진 일은 더더욱 놀라웠다.

끼기기기이익….

홍균도인의 가면은 잠시동안 마치 철이 부식되는 듯한 기묘한 소리를 내며 녹아들어가며 용가면 내부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그 끔찍한 가면이 부글거리며 기포와 함께 녹아서 용가면으로 흡수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한참 후 황제 공손헌원은 기분이 좋다는 듯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하하하!! 관조자인 양 설치던 놈을 잡아먹었구나. 아주 순조롭게 흘러가는 중이구나!!]

그의 앙천광소를 듣고 있던 모든 이들이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한 듯 했다. 그리고 황제가 홍균도인의 가면을 흡수한 순간 멀리에 서 있던 홍균도인의 육체가 마치 가루처럼 변해서 파스스 흩날리는 게 보였다.

홍균도인은 또 왜 사라진 걸까?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하지만 확실한 건 하나였다.

다들 깨닫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입밖으로 내지 못해서 조심스러워하고 있을 때 제일 먼저 입을 연 것은 바로 전욱이었다.

[황제여. 당신에게는 처음부터 가면이 아무런 제약이 되지 못하는 것이었구려.]

[…….]

황제는 전욱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지만 어째서인지 그의 가면 너머에서 웃는 듯한 얼굴이 보인 것은 착각이었을까?

대신에 황제는 전욱에게 말했다.

[전욱. 본황이 최후의 승리자가 되는 게 그리도 싫었느냐? 설마 이 정도로 격차가 나는데도 반역을 하려 들 줄은 몰랐다.]

전욱은 무언가 체념한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자리가 당신만의 자리라는 법은 없었소.]

[어리석군. 나의 승리가 결국 우리 모두의 승리가 되는 법이거늘….]

[그것도 당신의 아집이오.]

[다 이해하노라. 우리 [옛 지배자]들에게 있어서 아(我)만이 전부임을. 자타(自他)를 구분하는 유일한 기준이 오로지 욕망뿐인 우리에게 처음부터 동료의식 같은 건 없을 수밖에.]

[…….]

[인과율을 읽으며 생각했던 종말의 때는 아니었으나 빠르게 결론을 낼 때가 찾아온 듯 싶군.]

그렇게 뇌까린 황제 공손헌원은 어느 새 마지막 세 번째 차원문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파직!!

파직!!

틀림없이 저기서 무언가 엄청난 게 튀어나올 게 분명했다. 황제가 직접 행차할 때도 이 정도의 반응은 아니었는데 지금도 저 차원문에서는 우주의 혼돈이 메아리치며 계속 심도(深度)를 높이고만 있을 뿐이었다.

황제가 입을 열었다.

[대도여. 전생자의 이름이 궁금하다 하였는가?]

앗! 내 질문에 대답해주려는 건가?

나는 급히 외쳤다.

“그렇소!”

[그 자의 진짜 이름은 모른다. 다만 그를 가리켜 위대한 의지가 칭하던 칭호가 있었다.]

“그게 누구요?”

이어진 황제의 말에 나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마도황제(魔道皇帝)라고 불렸다. 위대한 의지는 전 우주에서 오로지 그만이 그 칭호를 쓸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

…뭐?

익히 들어본 이름이 튀어나온 순간, 나는 엄청나게 방대한 수수께끼의 거대한 일보(一步)가 내딛어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이걸 알기 전으로는 되돌아갈 수 없음을 직감적으로 느끼게 되었다.

‘마도황제… 분명 그 놈은…!!’

내가 생각을 더듬어가며 정리하려던 그 때였다.

황제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왔구나.]

투쾅!!

거대한 소리와 함께 세 번째 차원문에서 마치 회색빛으로 점철된 듯한 기이한 마수(魔手)가 튀어나왔다. 이 중에 괴물이 아닌 자가 없었지만 그 마수를 보는 순간 모든 이가 움찔하고 놀란 듯 했다.

‘어? 저 손 모양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쿠구구구구….

그 마수가 차원문의 한켠을 붙잡았고, 또 하나의 마수가 튀어나와 맞은편을 붙잡아서 억지로 크기를 늘리는 게 보였다. 차원을 통째로 잡아 찢으며 나오려는 듯한 그 모습을 보자 나는 왠지 우스꽝스러워서 풋 하고 웃었다.

‘크큭! 뭐야 저건?’

나는 옆에 있던 전욱에게 히죽거리며 말을 걸었다.

“전욱 님. 저기 빠져나오지도 못하는 꼴을 좀 보십시오. 뭐하는 놈인지는 몰라도….”

[…….]

“전욱 님?”

전욱은 내 말에 대꾸하지도 못하고 굉장히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황제 공손헌원과 그 휘하의 사대신격이 나타났을 때도 이 정도로 위압감을 느끼진 않았던 것 같은데 지금의 전욱은 말 그대로 새파랗게 질렸다는 표현이 맞았다. 이윽고 전욱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이… 이럴 수가. 우리가 예전에 전쟁을 벌였을 때…. 그 자의 힘이 이 정도는 절대로 아니었을 텐데…. 설마 신성(神聖)이 수련을 해서 강해지기라도 했단 말인가? 어찌 이런!!]

마치 형용할 수 없는 악몽을 맞닥뜨리는 듯한 반응이 틀림없었다.

[…….]

[으으으….]

그런 반응을 보이는 건 전욱뿐만이 아니었다. 옆에 있던 제곡은 물론이고 권능을 되찾은 소호조차도 기에 눌려서 약간 좌절의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황제를 사위로 둘러싼 사대신격들조차 무언가에 큰 압박을 받는 표정이 역력했다.

비슈누가 황제에게 말을 걸었다.

[황제시여. 설마 ‘그’가 기연(奇緣)을 얻어서 존재의 격을 높인 것입니까? 저와 싸울 때도 저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비슈누는 누가 출현하는 건지 짐작은 한 듯 했으나 그 또한 전욱과 마찬가지로 당황과 경악에 휩싸인 표정이었다. 나는 저 재수 없는 비슈누의 표정이 당황으로 물드는 걸 보자 기분이 좋았지만, 이내 이게 심각한 일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저… 저 비슈누란 놈은 여와와 복희를 혼자 공격하러 갈 때도 별로 당황하지 않던 놈인데…?’

저래 봬도 비슈누는 삼황오제와 동급이며 천축신화 최고위 신격이며 만신전에서도 높은 서열이었다. 그런 비슈누가 순수하게 당혹과 경악으로 평정심을 잃을 정도라니!

지금 혹시 분위기 이상한 건가?

그러자 옥좌에서 팔짱을 낀 채 차원문을 주시하고 있던 황제 공손헌원이 쿡쿡하고 웃는 듯 했다.

[크크크…. 어리석구나, 비슈누. 기연 따위는 인간 같은 필멸자에게나 존재하는 개념이지 않은가? 진정한 신의 반열에 오른 자일수록 타고난 힘을 더 이상 승급시킬 수 없지…. 특별한 의식과 대가를 치르지 않는 한은.]

[…….]

[내가 인과율을 살피는 동안에 저 자는 절차를 밟아서 정식으로 봉인을 해제했을 뿐이다. 허나…. 설마 종말에 이르기까지 저 괴물의 진짜 힘을 눈치 챈 자가 단 하나도 없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다. 이 또한 유쾌하구나.]

황제가 껄껄 웃자 비슈누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진짜 힘이라니 무슨 말씀이신지…? 그가 스스로 동면상태에 들어가서 힘이 약화되었음은 알고 있었지만 어차피 그런 봉인으로 억눌리는 힘이란 한도가 있지 않은지요. 봉인된 여력까지 생각해도 절대 저렇게까지는….]

[비슈누여. 그대 또한 그대도 모르게 ‘지배자’의 한계를 결정짓고 있었구나.]

[한계란 존재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신성이 강대하다고 하더라도 수억 년 동안 보아왔던 힘의 한계를 분명히 알고 있다 생각합니다.]

[…….]

그러자 황제가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

[비슈누여. 그대는 이제부터 종말 최후의 전투가 시작된다면 보게 될 것이다.]

[무엇을 말입니까?]

[한계가 없는 존재라는 것을….]

덥썩

다음 순간 일어난 일에 나는 내 눈을 의심해야 했다. 차원문을 찢고서 서서히 상체를 드러내고 있던 ‘무언가’가 느닷없이 자신의 거대한 회색빛 마수를 뻗어서 근처에 있던 무언가를 붙잡은 것이다.

붙잡힌 것은 바로 제곡이었다. 제곡이 어떻게 해서 붙잡힌 건지는 몰랐으나 그는 마수가 자신을 움켜잡는 것을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었던 게 틀림없었다. 왜냐하면 붙잡힌 직후에 크게 당황해서 외쳤기 때문이다.

[왜… 왜 이러시오! 계획대로 내가 여기에 균열을 만들어 당신을 인도했거늘 어째서 같은 편을….]

푸콱!

그것이 삼황오제 제곡(帝嚳)의 최후였다. 회색빛 마수에서 근육이 울끈불끈하며 한 차례 힘을 주어 움켜잡는 순간 제곡은 한 마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신체(神體)가 무참하게 터져나갔고, 혼돈의 빛을 띄는 신혈(神血)이 방울지며 공간을 유영했다.

“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삼황오제가… 한 방에 당했다고?

내가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때 마치 돌기둥이 긁히는 듯한 육중한 소리와 함께 차원문 너머에서 ‘그것’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언뜻 인간이라고 착각할지도 모르는 얼굴 - 그러나 촉수로 뒤덮인 하관과 더불어 그의 등에서 시꺼먼 절망의 날개가 마치 박쥐와 같은 형상으로 서서히 펼쳐지고 있었다. 백색의 안광에는 알 수 없는 분노의 빛이 감돌고 있었으며 손끝에서 마치 파충류같은 단단한 느낌의 발톱이 억세게 돋아나는 게 보였다.

우오오

푸스스하며 흩어지고 있는 삼황오제 제곡의 혼백(魂魄)이 유영하고 있었으나 ‘그것’은 서서히 자신의 입김을 들이마시며 한 차례 거세게 호흡을 했다.

꿀럭!

마치 목구멍을 따라 혼백이 넘어가는 듯한 그 광경은 악몽과 같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제곡이 부활할 수도 없게 해치워버린 ‘그것’이 잠시 후 박쥐같은 날개를 활짝 펼쳐내었다.

‘그것’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부웅!

그 대신에 마치 벌레를 잡듯이, 아무런 굴곡 없는 동작으로 크게 팔을 한 차례 휘둘렀고 - 그 동작이 끝나자 황제의 뒤편에 서 있던 여신 누트의 목이 사라졌다.

또 한번의 소리없는 신살(神殺).

그러나 장내의 누구도 움직이지 못했다.

‘그것’이 차분히 첫 걸음을 내딛으며 자신이 강림했음을 고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나는 몇 번이고 마주쳤던 그 존재를 제대로 인식할 수가 있었다.

덜덜덜

‘윽… 흐억….’

나는 내 다리와 입술이 덜덜 떨려서 말을 하기는커녕 그 자리에 서있기도 힘든 상태라는 걸 깨달았다.

그저 공포만이 머릿속을 채워서 이성 있는 생각을 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오락가락하며 환영이 눈앞을 맴돈다. 오늘 수많은 신적존재를 마주쳤지만 마음 그 자체가 꺾이려는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흉신(凶神)이 나타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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