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검신-1360화 (1,357/1,615)

1360====================

사신지혼(四神之魂)

나는 헤르메스가 나타나자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무슨 짓이긴. 지금 바로 육요를 이용해서 삼황오제 다 불러모을 생각인데?”

“…내게 세계수의 핵을 갖고 오라고 말했을 텐데.”

“삼황오제랑 결판지을 때 쓸거야. 쓰고 남으면 갈 생각이었다.”

그러자 헤르메스가 사나운 미소를 지었다.

“크크…. 아무리 육요를 쓰더라도 황제 공손헌원은 당해내지 못한다. 개죽음이나 당하려고 하는 것이냐? 이런 외우주에서 헛되이 죽으면 안 된다.”

“지금 설마 내 목숨 걱정해주는 건가? 참 고맙군.”

스윽

헤르메스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핵을 이리 다오. 그러면 당장 이 외우주를 탈출할 수 있게 해주마.”

“…….”

“빨리. 나일라토프가 언제 부활할지 모른다.”

헤르메스가 내게 재촉했지만 나는 핵을 든 채 멀뚱히 쳐다보고만 있을 뿐 건네주지 않았다. 헤르메스는 뭔가 이상함을 눈치 챈 모양이었고, 나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싫은데.”

“제정신이냐? 이제 나일라토프와도 적이 되었는데 나까지 적으로 돌리겠다고!”

기가 막히다는 듯 중얼거린 헤르메스가 마치 선심을 쓴다는 듯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어리석은 생각하지 말고 핵을 내놔라. 외우주에서 원래 세계로 귀환할 방법따윈 없지 않느냐!”

“정말 없을까?”

“뭐?”

내가 반문하자 헤르메스가 흠칫했다. 나는 웃음기를 잃지 않은 채 말했다.

“28번째 삶에서 난 정말 많은 경험을 했었지. 그리고 정말 심각하게 뒤통수를 처맞으면서 깨달은 게 있어.”

“…….”

“그건 바로 전생자는 전생자답게 행동해야된다는 거다.”

스으

나는 제단에 있는 육요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의식이 치러지던 도중에 갑자기 육요가 내 근처로 소환되어서 영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내가 육요를 단숨에 다루기 시작하자 전체적인 힘이 갑작스럽게 증폭하는 게 느껴졌고, 그 기세 때문인지 헤르메스는 잠시 주춤하며 뒤로 물러났다.

나는 세계수의 핵을 한 손에 든 채 다른 한 손으로 허공에 떠 있는 수요의 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고는 말했다.

“생각해보니까 내가 니 의도대로 해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어. 당장 꺼지지 않으면 나일라토프처럼 네놈도 작살내주마.”

헤르메스가 멍하니 있다가 다시금 한 손을 휘두르며 외쳤다.

“…이유가 없다고? 외우주에서 원래세계로 돌아가고 싶지 않으냐!”

“응, 돌아가고 싶은데.”

“방법이 없잖느냐! 네놈은 정말 무슨 생각을….”

“방법이 왜 없다는 거야.”

초조해하는 헤르메스에게 나는 히죽 웃으며 대꾸했다.

“죽으면 되지.”

“……!!”

“황제한테 한번 더 도전하다가 멋있게 죽을 생각이다. 죽는 방법을 선택할 수 있으니 무척 다행이군.”

내 대답에 헤르메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 게 보였다. 그러더니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정녕 멍청한 놈…. 외우주에서 죽으면 네 전생도 외우주에서 다시 시작될 것이다! 이 갇혀버린 우주에서 전생자가 쳇바퀴를 돌게되면 아무런 희망도 없어진다! 이런 것도 모르다니….”

나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아닐걸?”

“뭐… 뭐라고.”

“의심스러운 네놈한테는 흑요석을 안 줘서 모르겠지만, 나는 이미 나일라토프와 대화를 한 적이 있지. 그리고 그 대화 속에서 한 가지 사실을 알아챘어.”

나는 안광을 빛냈다.

“나는 달마가 있던 외우주에서 사망한 후 전생한 적 있다. 그리고 그 경험담을 들은 나일라토프 놈은 딱히 내 얘기를 부정하지 않았다. 그 말은 내가 외우주에서 죽어도 이 닫힌 굴레에서 계속 전생하는 게 아니라 그냥 원래 세계로 되돌아가서 새 삶을 살게 될 뿐이라는 거지.”

“…….”

“사실 이미 알고 있었던 거야. 근데 외우주마다 성질이 다를까봐 긴가민가하고 있었는데 외우주를 여행하고 다니는 괴물과학자가 그게 맞다고 인증해준 셈이 아닌가? 당연히 나는 이 세계에 갇힐까봐 걱정하지 않고 뒈지면 되는 거지.”

헤르메스가 굳은 표정으로 내 이야기를 듣다가 말했다.

“…그게 사실이라 치더라도 백웅 너는 여태껏 내 조언을 잘 따라왔다. 아마 이번 생에 죽는 게 무척 아까워서였겠지. 내가 네 비밀을 모르는 줄 아느냐?”

“내가 무슨 비밀이 있는데?”

이어진 말에 이번에는 내가 흠칫했다.

“흉신(凶神)과 계약하여 [이번 생]에서는 그가 끼어들지 못하게 했다는 걸 알고 있단 말이다.”

“음….”

헤르메스가 약간 득의양양해져서 자신의 수정지팡이를 내게 겨누며 외쳤다.

“다음 생부터 흉신이 제대로 개입하면 네가 무사할 줄 아느냐? 이번 생을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버렸다가는 네 동료들까지 끔찍한 꼴을 당할 것이다!”

이 새끼 그것까지 다 알고 있었군.

역시 무척이나 음흉한 새끼가 틀림없었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어쩔 수 없지.”

“…뭐?”

“어쩔 수 없다고. 뭐 어쩌겠어.”

“……?!”

헤르메스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황제 공손헌원조차 흉신과 정면승부를 할 수 없었다. 그런 흉신이 시작하자마자 최악의 힘을 보여주면서 널 공략해온다는 말이다. 아직 삼황오제 한 놈 잡기도 버거운 주제에 흉신을 어찌 상대하겠단 말이냐.”

“아 그러니까 어쩔 수 없다니까? 그때 가면 또 그때 나름대로 방법이 있겠지. 언제는 안 그랬냐고.”

“미, 미친. 흉신이 두렵지 않냔 말이다.”

“생각해보니까 그렇게까지 두려워할 일은 아닌 것 같더라고.”

나는 수요를 도리어 늘어뜨리며 말을 이었다.

“29번째 삶이 시작했을 때 흉신이 뭔가 계획을 세우고 부활중이었지. 근데 그 부활의식을 막기 위한 시간은 생각보다 넉넉했어. 마치 막을 테면 막아보라는 듯한 느낌이었거든. 그러면 내 입장에서는 몇 십 번이든 흉신이 부활하려는 의식을 공략하면서 싸워볼 만 해. 그리고 그래도 안 되면 그때가서 흉신이랑 또 교섭하면 그만이고.”

“이… 이… 입이 뚫렸다고 제멋대로 말하는구나. 그 자가 언제까지 네게 온정적일 것 같으냐!!!”

“아 그만해 씨발놈아! 어디서 남 걱정해주는 척이야?”

“뭣….”

나는 버럭 욕설을 내지르며 헤르메스를 노려보았다.

“내가 멍청하다면 네놈한테 세계수의 핵을 줬겠지만 지금은 안 그렇거든?! 어차피 개같은 상황이 이어질 거면 날 등쳐먹으려는 놈 하나라도 더 줄이는 게 훨씬 이득 아니겠냐고! 그리고 내가 어떻게 죽을지는 내가 결정해!”

“…….”

“마지막 경고다. 아가리 다물고 짜져있어라. 안 그러면 다음부터는 찾아내서 네놈부터 갈아버릴 테니까!”

내 엄포와 함께 잠시 장내에 침묵이 감돌았다. 헤르메스는 의혹과 당황이 섞인 표정으로 그 자리에 서서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더니 잠시 후 헤르메스가 약간 우울해하며 말했다.

“…계획을 수정해야겠군. 본디 의도했던 바는 아니지만.”

파지직

헤르메스의 수정지팡이에서 번갯불이 튀기 시작했다. 동시에 헤르메스의 전신에서 가공할 마력이 끓어오르기 시작했고, 놈의 전신이 시꺼멓게 물드는 게 육안으로 보였다. 이윽고 전신이 마치 끓어오르는 혼돈처럼 변한 헤르메스가 선혈 같은 안광을 내뿜으며 신언(神言)을 말했다.

[전생자여. 지금부터 그대를 속박하고 고문하여 정신을 망가뜨리겠다. 또한 세뇌(洗腦)하리라. 그리하여 후생(後生)의 보복을 피하고 내가 데미우르고스의 위치를 차지할 수 있으리라!]

본색을 드러냈구만!

슈화아악

그와 동시에 헤르메스의 바로 앞에 다섯 개의 소환마법진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소환마법진 위로 내가 익히 아는 놈들의 모습이 드러나는 게 보였다.

팔부신중!

“헉…?”

“여긴 어디냐.”

뜬금없이 소환된 팔부신중 놈들이 당황하는 가운데 개 중 내게 충성을 맹세한 건달파가 나를 확인한 듯 했다.

“앗, 설마 이 상황은.”

그리고 그는 빠르게 상황을 알아챈 듯, 급히 내게 외쳤다.

“주군! 저는 상위계약 때문에 헤르메스에게 저항할 수 없습니다. 제 [이름]을 받아주시옵소서!”

“건달파 무슨 소리냐?!”

옆에 있던 긴나라가 당황했지만 나는 건달파가 무슨 말을 하는지를 눈치 챘다. 그리고는 그의 말에 화답했다.

“받아들이겠다!”

“오오오…!!”

파아앗

다음 순간, 긴나라의 몸뚱이가 새하얀 연기처럼 변하더니 내 팔뚝으로 빨려들어왔다. 그리고 내 팔뚝에는 [건달파]의 이름이 추가되었다. 나는 건달파의 마력이 육중하게 밀려들어옴을 느끼면서 이를 으득 악물었다.

“이 개새끼… 하나하나 전부 다 나를 기만했구나.”

[후후. 눈치 챘나.]

음침한 미소를 흘리던 헤르메스가 자신의 수정지팡이를 그 자리에서 쾅 내려찍었다.

“흐으으으악.”

“으아아악!!”

우드드득

그와 동시에 4명의 팔부신중들의 인간형이 일그러지며 그대로 마왕으로 강제로 변신하는 게 보였다. 그리고 마왕으로 변신한 그들은 완전히 이지(理知)가 상실된 듯 마치 인형처럼 가만히 서 있게 되었고, 나는 그게 보나마나 헤르메스에게 세뇌당한 상태라는 걸 알아차렸다.

헤르메스가 말했다.

[신뢰를 쌓은 후 결정적일 때 팔부신중을 내 뜻대로 조종하려 했건만, 뜻대로는 안 되는구나.]

“씨발. 기대도 안했다 쓰레기같은 새끼야!”

나는 버럭 욕을 했지만 동시에 가슴 한켠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처음부터 헤르메스가 내게 팔부신중을 부하로 넘겨주는 것도 그저 기만일 뿐이었다. 겉으로는 팔부신중이 내게 충성을 맹세하여 주종관계가 맺어져 있지만 사실 헤르메스 때문에 수정석비 조각이 상위계약의 역할을 해서 내 명령권보다 무조건 상위에 있는 거였구나!’

생각할수록 아찔하다. 저 놈의 말대로 해서 만일에 헤르메스를 신뢰라도 했다간 어찌되었을까? 어느 순간 내 부하인줄 알았던 팔부신중이 내 말을 안 듣고 헤르메스의 뜻대로 나를 포박하거나 봉인하는데 협조하게 되었으리라.

구우우우우

나는 눈앞에서 팔부신중 넷이 마왕의 힘을 고스란히 뿜어내며 피빛 안광을 뿜어내는 걸 보자 약간 움찔했다. 이러니 저러니해도 저 놈들은 마왕이었고 나는 사대신기를 쓰지 않으면 네 명이나 되는 마왕들의 합공을 쉽게 이겨낼 수가 없다. 문제는 거기에다가 헤르메스까지 합공해오면 어찌할 것인가?

승산이 없진 않지만 무척 힘든 싸움을 예감한 나는 신중하게 머리를 굴렸다.

‘사도의 권능과 육요를 잘 활용해야겠… 어?’

그 때 나는 옆에 서 있던 이광이 사라져 있다는 걸 알아챘다. 그리고 이광이 어디로 갔는지를 알아채고는 눈을 부릅떴다.

“…야!! 너 지금 뭐하냐!”

이광은 어느 새 헤르메스의 코앞까지 걸어가 있었다. 헤르메스는 그가 걸어오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다가 말했다.

[이광이여. 사부를 위해서 먼저 내게 덤벼볼 생각인가?]

이광은 선선히 고개를 저었다.

“내 입장에서 사부에게 그 정도 의리가 있다고 생각하시오?”

[음…?]

“저 자는 내게 온갖 수모와 굴욕을 주었소. 온갖 거짓말과 기만을 일삼으며 내 무인으로서의 자존심을 갈기갈기 찢었소!”

[허어?]

헤르메스가 어리둥절해하자 이광은 잠시 후 서서히 헤르메스에게 무릎을 꿇었다.

“당신 편이 되어서 백웅을 찢어버릴 테니 나를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 주시오. 그리고 더불어서 내게 최강의 힘도 주었으면 좋겠소.”

[…….]

헤르메스는 잠시 후 껄껄 웃었다.

[흐하하하… 무척 재밌구나…. 여기까지 와서 설마 전생자를 배신할 줄이야!! 흐하하하하하.]

“…….”

[환영한다! 이광 너를 아군으로 받아들이겠노라.]

“고맙소.”

나는 그 광경을 보며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금까지 헤르메스를 잘 몰아넣었다 생각했는데 이런 식으로 흘러갈 줄은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나는 이광을 노려보며 악을 쓰며 외쳤다.

“이런 씨발!! 이광 이 개잡놈아! 구궁파천뢰도 가르쳐주고 무공을 얼마나 가르쳐줬는데 뒤통수를 친단 말이냐!”

“사부 당신도 나일라토프와 헤르메스의 뒤통수를 치지 않았소? 신의없는 자의 제자가 신의없음을 배우는 건 당연한 법.”

치징

이광의 창에 거대한 뇌전이 감돌면서 강렬한 구궁파천뢰의 기운이 감돌았다. 이광은 전투자세를 잡으며 말했다.

“애초에 이 알 수 없는 세계에 날 끌어들여서 죽음의 위기로 몰아넣은 게 사부이니 내가 살아남을 길을 찾는 걸 욕할 자격이 없소!”

“…….”

나는 황망한 눈으로 이광을 쳐다보았다.

정말 이딴 식으로 나올 줄이야!

‘이광 개새끼….’

헤르메스가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말했다.

[흐흐흐. 이 세계의 반쪽짜리 육요를 가지고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지 한 번 지켜보마. 제자에게까지 배신당한 전생자여!]

“으윽….”

[자아, 마왕 팔부신중이여…. 백웅을 공격하….]

헤르메스는 수정지팡이를 휘두르며 공격명령을 내리려 했으나 바로 그 순간이었다.

“드디어 방심했군.”

구궁파천뢰(九宮破天雷)

삼연구궁(三連九宮)

오의(奧義) 천광입멸뢰(天光入滅雷)!

꾸콰콰쾅

요란한 폭음과 함께 한 줄기 섬전(殲電)이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쨍그랑 하는 소리가 났다.

어느 새 이광의 창극(槍戟)이 헤르메스의 수정구에 박혀 있었고 수정구에서 거미줄같은 파열이 일어나서 수정조각이 사방으로 튀어나가고 있었다. 수정구가 부숴지자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같던 팔부신중들이 그대로 얼음이 된 것처럼 정지해버렸다.

파바밧

이광의 모습은 뇌영(雷影)의 잔상을 남긴 채 삼 장 밖에 나타나 있었다.

“…….”

[…….]

잠시동안의 정적.

나도 헤르메스도 아무런 말도 못 한 채 그저 이광만 쳐다보고 있었다.

이광이 자신의 목을 뚜둑거리며 나직이 말했다.

“한 번 배신했는데 두 번은 못 할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