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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뭐…?
나는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드는 걸 느끼고는 말했다.
“반복된다고? 그게 정말이냐!”
“방금 봤던 종말의 풍경을 처음 봤을 때의 일이지. 나는 첫 번째 세계종말을 보았을 때의 일을 생생히 기억한다. 나는 최선을 다해서 인류를 구하려 했지만 결국 패배했고 계시와 종말이 닥쳐왔다.”
“…….”
“아무리 나라고 해도 그때는 가이아를 써도 다른 곳으로 도약할 수 없었기에 정말 죽는 줄 알았어. 모든 것이 끝없는 암흑에 삼켜졌고 나도 의식이 사라졌지.”
나일라토프가 큭큭 웃는 게 들렸다. 자조적인 웃음이었다.
“크흐흐… 그런데 바로 다음순간 내가 처음 이 세계에 왔을 때의 풍경이 시작되더군. 나는 그 순간 내가 과거로 회귀하는 전생자가 된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란 걸 알 수 있었지. 왜냐하면 가이아가 종말 후 반복이 시작되는 순간을 녹화(錄畫)해뒀기 때문이었다.”
“녹화? 무슨 소리냐?”
“전 우주를 집어삼키는 파멸이 가이아만 비껴나갈 리가 없지. 심지어 가이아는 아무런 타격도 입지 않았다. 그럴 수는 없지 않나? 심지어 암전된 후 세계가 되살아나는 과정에는 시간이 거의 흐르지 않았어. 가이아가 녹화한 시간의 흐름에는 왜곡조차 없었고.”
“……?”
“나는 그 녹화영상을 보면서 알아챘지. 이 세계는 뭔가 이상하다고.”
사락…
나일라토프가 근처의 키 큰 풀을 만지작거리는 소리가 났다. 나일라토프는 내게서 시선을 뗀 채 풀을 만지며 말을 이었다.
“그 후로 세계구원을 5,982회를 더 시도했다. 모든 변인(變因)을 다 수집하기 위해서 되든 안되든 계속해봤다. 그리고 그때서야 비로소 이 세계는 결말이 고정되어 있으며 내가 무슨 수를 쓰든 종말이라는 결과가 달라지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지.”
“…….”
“그 이후로는 이 세계에서는 적당히 시간만 때우면서 다른 외우주를 여행하곤 했다. 다만 제대로 [역사]가 존재하고 종말과 계시에 맞닿아있는 곳은 이곳 뿐이라서 별다른 소득은 없던 차였지.”
나일라토프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감도는 게 보였다.
“그러던 중에 나를 불러주는 목소리가 들렸지. 바로 자네와 일행들이 나를 불렀던 거지. 나는 그때 정말 기뻤다네.”
나는 뭐가 기쁘냐고 되묻지 않았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원래라면 무감각하게 고개나 갸웃거렸겠지만 지금의 나는 두뇌회전이 빨라서인지 나일라토프의 말 속 저변(底邊)에 숨어있는 의미가 이성적으로 체감되었다. 저 ‘기쁘다’는 말에 사악한 의도가 숨어있음을 당연히 짐작하고 있는 것이다.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나는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나일라토프. 네 목적은 외우주를 넘어서 윤회의 도정에 있는 [중앙]이란 곳으로 가는 게 아니었나? 이제 와서 사실 목적이 내가 외우주의 역사를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보는 거였다고 하면 앞뒤가 안맞는 소리 같은데.”
“후후. 겸사겸사 하는거지. 후자를 이루면 전자도 가능하거든.”
“뭐?”
저게 무슨 소리야?
내가 혼란스러워하자 나일라토프는 빙긋 웃었다.
“어차피 자네는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외우주를 넘어서 되돌아갈 수 없지 않은가?”
“이 새끼….”
“원래 세계의 시간이 흘러서 아쉬운 건 자네이지 내가 아냐.”
나는 나일라토프의 말에 얼굴이 구겨지는 걸 느꼈다. 그리고는 말했다.
“그래서 시간을 더 끌 생각으로 이 곳과 외우주의 시간차이가 없다고 내게 거짓말을 했던거군. 들키든 안 들키든 아쉬울 게 없으니까.”
“정답일세. 정말 꽤 머리가 돌아가는걸…. 칭찬해주지.”
“네놈 칭찬따윈 필요없어.”
철컥
나는 아그니의 격철을 세게 당기며 위협하는 살기를 뿜어내었다.
“세계수의 열매니 핵이니 다 필요없다. 지금 당장 나를 외우주에서 되돌려보내지 않으면 네놈을 없애겠다.”
“아주 합리적인 판단이군. 하지만 나도 합리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자네가 아까부터 그 아그니의 방아쇠를 쉽게 당기지 못하는 이유를 알고 있다네. 내가 보는 자네 성격은 수틀리면 주먹이 먼저 나가는 성격인데도 말이지.”
“그 이유가 뭔데?”
나일라토프가 자신있게 말했다.
“정공법으로 나를 죽이고 나서 외신 주시자와 맞닥뜨릴 자신이 없는 것일세. 날 죽이는 건 사대신기의 힘으로 어떻게든 되겠지만 외신한테는 아직 안 통할 테니까.”
“…….”
“정답인 것 같군.”
나일라토프의 말대로였다.
‘…외신 주시자에게 내 언변이 통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나일라토프를 죽이면 어떤 식으로든 이 세계의 종말이 가속되거나 내가 이 세계에서 원래세계로 되돌아가는 과정이 진행될 것이다. 그러나 그 와중에 [윤회의 도정]이라고 하는 그 혼돈의 장소를 들러야 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리고 윤회의 도정에서 주시자가 저번에는 나를 그냥 돌려보내주었지만 이번에도 그러라는 보장은 없다. 심지어 외신쯤 되면 내 전생을 끝낼수 있을지도 모르기에 더 신중해진다.
‘그래도 다행히 대안은 있어. 마법의 신 헤르메스가 세계수의 핵을 써서 내가 귀환하는 걸 도와주기로 했지만.’
제 2의 귀환방법.
헤르메스 놈은 세계수의 핵을 이용하면 외신의 주문을 이용해서 나를 원래 세계로 되돌려보내줄 수 있다고 말한 바가 있다. 헤르메스의 말대로라면 그냥 이 자리에서 나일라토프를 아그니로 날려버리고 세계수의 핵을 헤르메스에게 가져다주기만 하면 탈출계획이 완성되겠지만 -
“…….”
제길….
“이런. 팔 떨어지겠군…. 쏘지도 않을 총을 언제까지 겨누고 있을 셈인가?”
“닥쳐봐 좀. 생각하고 있으니까.”
나는 직감하고 있었다. 평소 성질대로라면 진작 아그니를 쏴버리고 일단 나일라토프와 사생결단을 낸 다음에 헤르메스와 여차저차하는 막무가내식 진행을 했겠지만, 지금은 그래서는 안된다는 걸.
할 때 하더라도 조금만 앞날을 생각해둬야만 앞으로 희망이 생긴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상황대처법이 내 행동을 주저하게 만들고 있었다.
나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나일라토프에게 말했다.
“이봐. 그럼 너는 [환인계획]을 다른 5,982번의 시도 동안에 성공시킨 적이 있는 거냐?”
“흐음. 말해줄 이유가 없다만.”
“왜지?”
“지금 그 아그니가 겨눠지는 한 우리는 적일세. 자네가 나한테 정보를 들을만큼 듣고나서 쏘면 나만 손해 아닌가?”
“이대로 발사해서 총을 맞으면 더 손해일 것 같은데.”
“후후…. 이런 건 무척 사소한 일이야. 날 떠보려 해도 시간낭비일세. 적과의 동침을 하고자 했다면 벌써부터 적의를 드러내선 안되었던 것일세.”
나일라토프는 그저 불길한 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나는 놈의 속을 전혀 읽을 수 없어서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잠시 후 한숨을 쉬며 말했다.
“후우, 알겠다. 일단은 너를 믿어볼까 한다.”
내가 서서히 아그니의 총구를 늘어뜨리자 나일라토프가 밝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잘 생각했네. 우리끼리 싸우는 건 안될….”
옳거니, 방심했구나!
‘믿기는 개뿔이 믿겠냐!’
나는 그 순간 안광을 빛내며 의념천주를 발동시켰다. 절기(絶技)라고는 이름붙일 수가 없었지만 순식간에 최적의 자세로 이어지며 마치 시선이 빨려들듯이 조준점이 눈에 보이는 게 느껴졌다.
타앙!!
아그니가 발사되자마자 나일라토프의 심장 부분에 주먹만한 크기의 구멍이 생겨났다. 나일라토프는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자신의 심장을 내려다보다가 쿨럭 하고 입에서 선혈을 토해냈다.
“컥… 흐윽… 우욱….”
풀썩
나일라토프가 앞으로 무릎을 꿇으며 쓰러졌다. 그와 동시에 내 손에 소환되어 있던 아그니가 소환해제되며 소멸되었고, 나는 약간의 현기증을 느끼며 비틀거렸다.
‘크윽! 역시 많은 마력을 써서 소환한만큼… 부작용도 심하군….’
피를 흘리던 나일라토프는 나를 올려다보며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미, 믿는다고 했지 않….”
절대지경의 감각으로 죽일 기회가 보여서 손이 나가버렸다…!!
나는 뭐라고 대꾸해야할지 난감했지만 이윽고 얼굴에 철판을 깔기로 했다.
“좀 전에 마음이 바뀌었다!”
“뭐라고….”
“그러게 착하게 좀 살지 그랬냐!”
나는 버럭 소리치며 그대로 수요를 발검(拔劍)해서 나일라토프의 목을 쳤다. 무량단(無量斷)의 검기가 엄청난 속도로 허공 저편으로 날아갔다.
뎅겅
한차례 하늘을 날아간 나일라토프의 목이 바닥을 데구르르 굴렀다. 워낙 깔끔하게 베여서인지 피도 새어나오지 않았다. 너무 완벽히 죽은 모습이었기에 나는 그 순간 중얼거릴 뻔 했다.
“해치웠… 흐읍!”
수요의 정령이 이건 말하면 안된댔어!
나는 급히 내 입을 틀어막고는 재빨리 한쪽 손을 들어서 의념천주를 집중시켰다. 아그니때문에 체력과 기력을 엄청나게 썼기 때문에 피곤했지만 그래도 지금 당장 해야만 했다.
고오오
기력이 집중되며 의념의 집중도도 점차 심화된다. 일순간 밑바닥을 보일 정도로 고갈된 집중력이 다시 모아지며 절기 만상지투가 제대로 구현화되는 게 느껴졌다.
‘제길. 할 수 있을까?’
나는 이미 알고 있다.
놈은 겨우 이 정도로는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저 나일라토프란 놈이 죽여도 죽여도 죽지 않는 불사신이라는 사실을, 놈의 전함 가이아 내부에서 싸울 때 느꼈던 것이다. 무슨 수를 쓰는지는 몰라도 초고도의 과학을 이용해서 계속 부활하는 게 틀림없었다. 그 부활의 원인을 알지 못하는 한 나는 절대 나일라토프를 죽일 수 없다.
하지만 지금은 어찌되었든 아그니를 이용해서 제대로 중상을 입혔으리라. 아그니가 그만한 위력이 없었다면 저 나일라토프란 놈의 성격상 계속 나를 기만하기만 했을 뿐 지금처럼 진실을 일부나마 털어놓진 않았으리라. 그리고 나는 놈이 불사신에 타격을 입은 상태에서 어떻게 해야 놈을 상대할 수 있는지 직감하고 있었다.
‘불사신을 상대할 때 죽이는 행위 그 자체는 큰 의미가 없어. 진짜 중요한 건…. 불사신이 제대로 죽지 못하게 견제하는 거야!’
내가 황제 공손헌원에게 당해봐서 아는 사실이었다.
나는 그대로 만상지투의 기운을 모아 바닥에 떨어져 있는 나일라토프의 대가리를 향해 쇄도했고, 이윽고 놈의 머리통을 매의 발톱으로 낚아채듯 건지며 의념을 집중했다.
만상지투(萬常之偸)
연결(連結) 훔치기!
화아악 - !!
그 순간 내 눈앞에 엄청나게 많은 선(線)의 연결이 보였다. 거미줄 따위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많은 선 - 그 숫자는 최소한 수천만 줄이 넘어 보였고 교차되는 연결부위는 최소한 그 수십배 이상이었다. 보기만 해도 질릴 것 같은 그 천문학적인 숫자의 [선]을 보자마자 나는 내 예상이 맞아떨어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좋아! 예상대로야!’
정밀한 과학기술에 만상지투를 쓰면 저번에 계백함의 벽을 뚫을 때처럼 수많은 과학기술이 눈앞에 형상화가 되어서 나타나는 모양이군!
나는 나일라토프의 불사의 근원이 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힘의 근원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다.
바로 [전함 가이아]!
놈은 자신의 모든 과학력을 가이아에 집중시키고 거기에서 힘을 필요한만큼 빼서 쓰는 식으로 활용을 하는 게 분명했고, 그 말은 전함 가이아가 온전한 한 절대로 나일라토프를 죽이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뜻이리라. 왜냐하면 내 눈앞에 나타나 있는 나일라토프의 육체 또한 제갈유룡의 [인형]처럼 그저 필요할때 쓰고버릴 단말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그 전함 가이아와의 연결이야말로 바로 놈의 불사성을 견제할 유일한 수단이 될 것이리라!
‘기회는 지금뿐이야! 원래라면 놈이 바로 부활하겠지만 아그니에 맞아서 부활 매커니즘에 문제가 생긴 게 분명해…!!’
나는 수억을 넘는 것 같은 무수한 실선의 교차 속에서 구(球)같은 게 둥실둥실 떠다니는 걸 느끼며 그대로 흐름을 타듯 첫 연결선을 향해 내 의념(意念)을 내뻗었다.
치링!
그러자 구체에 빛이 들어오며 그 구체와 연결되어있던 실에도 빛이 들어와서 다른 구체를 향해 빛이 선으로 이어지는 게 보였다. 나는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맞닥뜨렸음에도 왠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오호. 이런 식으로 연결을 끝까지 따라가다보면…. 진짜로 내가 훔칠 수 있는 가이아와의 마지막 연결이 나오겠군!’
이 직감은 왠지 전생자의 직감과는 다른 느낌이 든다. 마치 세포 한 올 한 올이 살아서 섬세하게 적의 약점을 감지하는 듯한 예민한 기운 - 상대의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채는 대도(大盜)의 감각이 느껴졌다.
마치 구슬에 바늘을 꿰듯, 아니 외줄타기를 하는 중에 발가락 사이의 간격조차 올올이 느껴지듯 예민하게 피부에 맞닿이는 [소름]. 나는 그 소름이 차갑게 느껴질수록 정답에 가깝다는 걸 알아채고는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선택을 이어나갔다.
이유나 근거따윈 없다. 그냥 이 감각이 옳다고 믿고 나아갈 뿐.
치리링!
치링!
머릿속이 비워진 가운데 나는 이 외줄타기하는 감각이 어디서 나왔는지 알아챘다. 과거에 백면신군(白面神君) 방류향(芳柳享)에게서 도둑의 재주를 배울 때가 갑작스럽게 기억난 것이다.
[당신 정도의 초고수라면 아주 찰나동안 상대의 인지영역을 뛰어넘는 극속을 써서 아예 눈치도 못챌 정도의 ‘한 순간’을 만드는 게 가능할 것이오!]
그 때 구파장문인에게서 소매치기를 성공해야하는 상황이라서 도둑질의 조언을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의 조언대로 한순간의 빈틈을 얻기 위해 초기에는 뇌명을 써서 내 속도를 극대화시켰고, 그 이후에도 이 ‘도둑의 한 순간’을 얻기 위해 수백 수천 번이나 시도했던 것 같다.
어쩌면… 그 횟수가 누적되던 끝에 내가 ‘한 순간’을 직감적으로 알아채는 감각이 생겨난 건 아닐까?
치링! 치링!
내가 구를 선택해서 선을 이어나갈 때마다 지나쳐온 영역이 모조리 어둠 속으로 붕괴하는 게 보였다. 내가 지금 맞는 선택을 하는건지 틀린선택을 하는지는 몰랐지만 실패했다가는 뒷감당이 되지 않으리라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나는 손에 땀을 쥐는 긴장감을 느낄 것 같았지만 신기하게도 그와는 반대로 속마음은 무척이나 고요하게 대도의 감각대로 냉정하게 선택을 해 나가고 있었다.
치링!
그렇게 몇십 번을 선택했을까? 어느 순간 나는 이 무수한 실선과 구의 끝자락에 도달해 있었고 마지막으로 태양과도 같이 거대한 빛의 구가 둥둥 떠 있는 게 보였다. 그 빛의 구와 마지막 소구(小球)사이에 길다란 거미줄같은 마지막 [연결]이 이어져 있는 게 보였고, 나는 그대로 의념을 뻗어서 그 줄을 토막내었다.
슈칵 -
그리고 줄을 끊는 순간 거대한 빛의 구에서 경악한 나일라토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럴 수가… 의념절기를 써서 양자얽힘을 해킹한다고…?! 계(界)의 비대칭성을 감각만으로 다 통과했다고…. 전생자라지만 대체 어떻게 그런 걸.]
파스스슷!!
다음 순간 내 시야는 현실세계로 되돌아왔고, 내 한 손에 잡혀있던 나일라토프의 머리통이 흉측한 소리를 내면서 모래가루로 풍화(風化)되는 게 보였다.
나는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새어나가는 걸 멀뚱히 보다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됐어!!”
확신할 수 있다.
지금 일시적이긴 하지만 나일라토프의 불사성을 끊었다!
만상지투로 나일라토프의 단말과 가이아 사이의 연결을 완전히 끊었으니 부활 못한다!
‘좋아…!! 그럼 다음으로 할 일은.’
나는 일단 근처에 떨어져있던 메피스토펠레스 손목시계를 주웠다. 그리고 목갑을 열었다.
달칵
나는 즉시 목갑 안으로 들어갔고 거기서 열심히 수련하고 있던 이광을 마주쳤다. 나는 이광을 지나쳐서 바로 수정구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헤르메스! 당장 나와라!”
그러자 헤르메스가 약간 창백해진 얼굴로 바로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는 말했다.
“무… 무슨 짓을 저지른 거냐? 나일라토프가 널 속였다고 해서 이렇게 갑자기 놈을 공격해 버리다니! 아직은 너무 일렀다!”
놈이 나를 힐난하듯 외쳤지만 나는 도리어 당당하게 말했다.
“이미 저지른거 어쩌겠냐? 이렇게 된거 세계수의 핵을 빨리 손에 넣어서 튀어야겠어! 그러니까 핵을 얻을 수 있게 도와다오.”
“으으음…. 하긴 단말을 끊었다면 약간 시간을 번 건 틀림없군.”
고민하던 헤르메스가 말했다.
“나일라토프가 기생목을 써서 핵을 추출하려 한다는 건 아마 거짓말이 아닐 거다. 단기간에 뽑아내지 않고 오랜 시간동안 핵의 표면을 녹여두면 나중에 원할때 꺼낼 수 있으니까. 그러니 기생목의 위치를 찾아내면 된다.”
“기생목은 어딨지?”
“내 마법의 힘으로 표시해 주마. 마력이 아깝긴 하지만….”
위잉!
잠시 후 헤르메스가 웬 주문을 시전했고 푸른 빛이 내 주변을 맴돌았다. 헤르메스가 말했다.
“그 푸른 빛을 따라가면 기생목이 있을 거다. 기생목의 뿌리까지 파 내면 핵이 등장할테니 그걸 갖고 바로 내게 오거라!”
“알았어!”
나는 바로 나가려다가 문득 옆에서 듣고 있던 이광을 보고는 말했다.
“이광! 너도 따라와라.”
“내게 잡일을 시키려는 거요?”
“눈치가 빠르군.”
“…….”
이광은 노골적으로 싫은 표정을 지었지만 어쩔 수 없이 나와 함께 목갑의 공간 속에서 빠져나왔다. 나는 이광과 함께 푸른 빛을 따라서 기생목의 위치로 뛰어가면서 유들거리며 말했다.
“목갑 안에서 수련 많이 했냐?”
“더 많이 하려 했소. 사부가 난데없이 일을 저지르는 바람에 더는 못하겠구려.”
“미안하게 됐군.”
“흥,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는군.”
이윽고 이광이 뇌까린 한 마디에 나는 흠칫했다.
“…나라면 놈을 밟을 때 확실히 밟아버릴거요.”
“……!!”
“틀림없이 당신 앞에 한 번은 나타날 거요. 뒷일을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망설이지 마시오.”
이 새끼… 눈치챘단 말인가?
어떻게 이렇게 눈치가 귀신같지?
나는 내심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걱정 마라. 다 대안이 있으니까.”
타닷
나는 잠시 후 흉측하게 생긴 아름드리 나무가 있는 장소에 도달했다. 그 곳은 세계수의 중턱이었는데, 확실히 그 나무에서는 심상치 않은 사기(邪氣)가 뿜어져나오고 있었다. 나는 나무를 한방에 뽑아낼 셈으로 장인(掌印)을 방출했다.
뇌령인(雷靈印)!
쿠콰콰쾅
제대로 집중하고 쏘면 섬을 날려버리는 뇌령인이 날아가자 기생목은 한방에 소멸되었고 그 밑둥에는 마치 인간의 심장처럼 팔딱거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힘 조절이 잘 됐군. 기생목이 생각보다 강한 힘을 가진 덕분에 핵은 별로 안 다쳤어.’
천우진이 핵을 부수던 과거의 경험 덕분에 나는 핵이 웬만한 충격에도 다치지 않을 정도로 견고하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다. 그 덕에 뇌령인으로 힘조절을 적당히 해도 된다는 확신이 있었다.
나는 조그마한 수박만한 크기의 그 무언가를 떼서 집어들었고 이윽고 중얼거렸다.
“이게 세계수의 핵이로군.”
이제 핵을 들고 목갑 안으로 다시 들어가야겠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이광과 함께 뿌리 근처로 내려가서 이혼을 만났다.
“이혼. 나일라토프가 내게 세계수의 핵을 줬소.”
“……?!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핵이 없으면 나무가 죽지 않소!”
이혼이 당황할 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직접 부수면 몰라도 그냥 꺼내서 갖고다니는 건 상관없어보이는군. 아무튼 일단 말은 해두는 게 좋을 것 같았소.”
그렇지 않다면 나일라토프나 헤르메스가 내게 핵을 주겠다느니 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예전 신단수 결전처럼 대놓고 부수는 경우가 아니라 그냥 꺼내서 갖고다니는 정도면 나무가 바로 말라죽지는 않는 게 분명하다.
“설마 그걸 갖고나갈 셈이오?”
“안 될 이유는? 이 세계수가 당신 건가?”
“…….”
“걱정마시오. 좋은 일에 쓸 테니까.”
“하아…. 마음대로 하시오.”
이윽고 우리는 이혼의 안내를 받아서 세계수가 있는 이공간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다시 흑자(黑紫)색 철문을 지나서 상층부로 올라갈 때 갑자기 뜻밖의 인물을 마주쳤다.
“더 이상 마음대로 하는 걸 못봐주겠군.”
블라디미르 부사령관이 넓은 통로를 가로막고 서 있었고 그의 옆에는 많은 인간 강화병들이 전자총을 우리 쪽으로 겨누고 있었다.
“블라디미르 부사령관. 이게 무슨 짓이지?”
“사령관이 세계수를 숨기고 있다는 걸 모를 줄 알았소? 흐흐흐… 당신만 독점하게 둘 수는 없지.”
“이 놈…!!”
“순순히 항복하시오. 이 강화부대는 절대지경조차 쓰러뜨릴 정도로 강화된 초인병으로써….”
나는 이 촌극을 쳐다보다가 시간이 없다고 생각해서 수요를 뽑아들었다. 그리고는 노호성을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이 놈아! 절대지경이 니 친구냐!!”
슈칵!!
“크아아아악!!”
블라디미르의 외마디 비명과 함께 검뢰에 베인 놈의 모가지가 허공을 날았다.
슈칵!!!
나는 단숨에 블라디미르와 강화부대를 모조리 다 죽여버렸다. 딱 검뢰 삼 초식만 펼쳤을 뿐인데도 장내에는 팔다리가 잘린 시체들이 데굴거리며 굴러다녔다. 나는 다 죽여버리고는 인상을 찡그렸다.
“뭐야? 절대지경도 쓰러뜨릴 수 있다면서 뭐가 이렇게 약해.”
“…강화병의 배리어를 두부처럼 자를 줄이야. 난 그렇게 못 하는데….”
이혼이 멍하니 쳐다보다가 고개를 털며 말했다.
“아마 내 힘을 기준으로 절대지경을 판단해서가 아닐까 싶소.”
“흥. 무사시한테 무쌍참 맞으면 한방에 다 죽을 것들이.”
나는 비웃듯 중얼거렸고 옆에서 보고 있던 이광이 퉁명스레 말했다.
“하수들 상대로 힘자랑 하니 콧대가 서는 것 같아 참 보기좋소, 사부.”
“너도 자주 하잖아.”
“안 하오.”
“웃기시네. 뇌공섬~ 크아아악~”
틈만 나면 이광 네놈이 힘자랑 하는 걸 다 봤던 사람 앞에서 무슨 헛소리야.
“……?”
이광이 인상을 찡그리는 걸 보자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간단히 이광의 도발을 넘겨버리고는 이혼과 함께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나서는 메피스토펠레스에게 말했다.
“메피스토펠레스. 숭산의 천제단으로 가자.”
[사용자의 명령을 수행합니다.]
파앗!
나는 숭산의 천제단에 이광과 함께 도착하자마자 바로 공공을 찾아갔다. 그리고 공공에게 부탁했다.
“공공. 육요를 모았으니 의식을 주관해서 천제단을 열어주시오.”
[……!! 대체 무엇을 하려는 거지?]
“황제 공손헌원을 암살할 거요.”
나는 계획전반을 공공에게 말해주었다. 그러자 공공은 멍하니 듣다가 말했다.
[오오…. 정녕 그런 계획이라면 전적으로 찬성하노라…. 부디 성공을 기원하겠소.]
“맡겨달라고.”
그 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웅이여! 나도 황제토벌에 참여하겠네.”
“대조영!”
대조영이 정기와 결의가 넘치는 눈빛으로 말했다.
“언젠가는 이리로 올줄 알고 공공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지. 황제 공손헌원이 만악의 근원이라면 반드시 토벌해야할 걸세.”
“…….”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황제 앞에서 당신 힘은 쓸모없소. 아니, 모두가 그렇지. 육요를 직접 사용하게 될 나 외에는 모두 개죽음이 될 뿐이니 따라오지 마시오.”
아무리 이 세계가 [닫힌 세계]라도 대조영이 함부로 죽는 걸 보기는 싫다. 그는 나를 여러가지 방면으로 도와줬으니 반쯤은 동료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대조영은 다시금 강변했다.
“개죽음이라 해도 데려가 주게. 어차피 죽는다면 티끌만한 도움이라도 되고싶군.”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이윽고 대조영을 데려가기로 약속이 되자마자 공공이 의식을 주관하여 제단 위에 육요를 놓고 의식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고오오오….
의식의 빛이 밝아오고 있을 때였다. 차원이 뒤흔들리며 점차 삼황오제의 존재감이 느껴지기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 -
“백웅. 이게 무슨 짓이지?”
갑자기 목갑이 내 품에서 뛰쳐나오듯 날아가더니 그 안에서 헤르메스가 빛과 함께 모습을 드러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