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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나는 이혼을 따라서 거대한 나무를 향해 달려갔다. 이혼의 말대로 이 공간은 도저히 남극 지하에 생길 수 없을 정도로 넓은 이공간이었고, 그래서인지 꽤나 경공을 썼는데도 단숨에는 나무 앞에 도착할 수 없었다.
투홧
멸혼보를 쓰지 않아도 내 경공이 훨씬 빨랐기에 나는 나무 밑둥지역에 이혼보다 빠르게 도착할 수가 있었다. 잠시 후 도달한 이혼은 약간 경악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그런 경공술이… 현 인류의 무림인 중에 나보다 빠른 자가 없는데 굉장하군.”
나는 씨익 웃으며 대꾸했다.
“달려서 지구를 몇 바퀴씩 돌아보면 경공조예는 저절로 늘게 마련이지.”
“…….”
이혼은 의혹어린 눈으로 날 쳐다보았지만 나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말한 것이었다. 나는 힐끔 나무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래서 이젠 뭘 하는 거요? 나일라토프가 내게 ‘계획’에 대해서 자세한 걸 설명해주진 않았고 당신에게 들으라고 했소.”
“아, 그런가. 일단 정상으로 올라갑시다.”
“또 뛰어서 올라가는거요?”
“그럴 필요는 없소.”
이혼은 손을 뻗었고 반투명한 창 같은 게 허공에 나타났다. 이혼이 잠시 후 삐빅거리며 그 창을 터치하며 조작했고 땅에서 쿠궁하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관짝같은 게 솟아오르는 게 보였다. 위잉 하고 관짝의 문이 열리자 이혼이 그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타시오.”
엘레베이터같은건가?
나는 이혼을 따라서 관짝 안에 들어갔고, 잠시 후 빛이 번쩍하더니 문이 열렸다. 그리고 밖으로 나오자 거대한 목초지(牧草地)가 나타났다. 목초지라고 표현한 것은 이 드넓은 풀밭에 드문드문 송아지 같은 게 풀을 뜯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음머 -
나는 송아지를 보자 황당해서 말했다.
“이렇게 고지대인데 소를 키운다고? 산소가 부족할 텐데….”
얼추 봐도 그 높이만으로도 수백 리가 넘어갔다. 인간세상의 산 높이보다 수십 배나 높다면 소를 키울만한 공기가 있을 리가 없다.
“여긴 세계수요. 줄기부분은 산소가 희박하지만 정상에 마력이 집중되기 때문에 물리법칙과 동떨어져 있지…. 그 덕에 한우를 방목하고 있소.”
그러고 보니 과거 독고성, 명룡자, 극호 등이 신단수 결전 때 겪었던 경험 속에서도 그랬던 것 같다. 나는 평화롭기 그지없는 세계수의 정상의 풍경을 바라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렇군. 근데 환인계획이란 게 이게 전부요? 설마 세계수 키워놓고 그 정상에서 소 키우는 계획은 아니었겠지.”
“하하. 그렇게 느긋한 계획이면 얼마나 좋겠소.”
너털웃음을 터뜨린 이혼이 약간 우울해진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환인계획이란 인류의 수호자가 될 환인(桓因)을 소환하는 계획이오. 환인을 소환하기 위해서는 이 세계수의 장성한 마력을 통째로 들이부어야 하기에 우리는 세계수가 다 성장할 때까지 인류를 지켜내는 임무를 맡고 있었소.”
“……?!”
“여기 있는 소들은 그냥 취미로 방목하는거요. 지상세계에선 키울 수 없는 환경이니.”
나는 갑작스럽게 환인계획의 전모를 듣게 되자 당황스러웠다.
‘뭐?!’
이렇게 갑자기 알게 된건 둘째치고 계획 자체가 뭔가 영 생뚱맞은 이야기를 하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이혼을 돌아보며 말했다.
“자, 잠깐. 영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환인을 소환한다고? 환인이라는 [옛 지배자]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오?”
“음…. 나일라토프가 그것도 얘기 안하고 당신을 여기로 보냈단 말이오?”
이혼이 미심쩍은 표정을 짓자 나는 내심 아차 하면서 급히 둘러대었다.
“나일라토프는 당신이 다 말해줄거라 했소. 나는 그냥 환인계획이 내 힘을 키우는데 도움이 될거라고 들어서 온 것 뿐이오.”
“힘을 키우는데 도움이 된다고? 설마….”
이혼은 잠시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이윽고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인류를 그만큼이나 구해주신 영웅이라면 세계수의 지분을 드려야만 하겠지. 나일라토프의 속뜻을 알았으니 내 몫이 줄어듬을 감수하겠소.”
“응? 뭔 소리요?”
“나일라토프의 말은 아마 그런 걸거요. 세계수가 장성하고 나서 나타날 열매를 당신에게 주겠다는 거겠지. 원래 내가 섭취해서 강대한 신의 힘을 얻으려 했지만, 당신은 세계수의 열매를 먹을만한 사람이니 주겠소.”
“…….”
거짓말만 했는데 어쩌다보니 이혼이 나와 나일라토프의 진짜 거래 내용에 도달해있었다.
‘쩝... 그냥 가만히 듣기나 하자.’
나는 황당했지만 어쨌든 할 말이 없었기에 입을 다물었고 이혼이 말을 이었다.
“환인계획은 나일라토프의 도움으로 설립한 계획이오. 그 내용이란 바로 종말의 세계에서 인간을 구해줄 구세주이자 강대한 신인 [환인]을 소환하는 것이고, 소환하기 위한 제물로서 세계수를 통째로 바치는 게 바로 계획의 골자라고 할 수 있소.”
“아니 그러니까 그게 좀 이상하구려. 환인이라는 [옛 지배자]나 고대신이 정말 존재한다는 거요? 내가 알기로 그런 존재는 없는데….”
“당연히 없겠지. 우리가 만들 거니까.”
“……?!”
엥?!
이혼의 말에 내가 그를 쳐다보자 이혼이 우울한 얼굴로 말했다.
“그 어떠한 신도 우리 인류를 도와주지 않았소. 삼황오제라고 하던 전설적인 존재들도 무슨 이유인지 역사 속에서 자취를 감추었고, 우리에게는 외계인에 비하면 장난감이나 다름없는 천박한 과학에 의존하여 생존을 구걸하게 되었소.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신을 만들어서 살아가야만 할 것이오.”
“그 말은….”
나는 잠시 후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환인은 기신(機神)이란 말이구려.”
“그렇소.”
기신!
그것은 바로 인조신(人造神)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그걸 직접 눈으로 본 적이 있었다. 바로 미호의 예시였다.
‘아베노 세이메이가 동영을 구하기 위해서 다른 모든 것을 제물로 바치고 그 대신에 미호를 신격화시켜서 인위적인 신으로 만들었었다….’
기신으로 재탄생한 미호는 어마어마한 힘을 지니고 있었고 그 힘을 이용해서 큰 위기를 벗어난 적이 있었다. 인위적으로 탄생시킨 신이라 하더라도 그 근본이 강대하다면 결과적으로 진짜 신과 다를바없는 힘을 가지게 된다. 특히 대웅제국 시절의 미호는 신력도 각성하고 달기도 먹어치우게 되자 인과율에 걸릴 정도의 존재가 되었고 그 힘으로 상위 [옛 지배자]인 비류마저 물리칠 정도였다.
개념은 어렵지만 실제 예시를 본 적 있으니 나는 바로 환인계획의 요체가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뭔가 납득이 되지 않아서 이혼에게 따지듯 말했다.
“내가 알기로 기신을 만들기 위해서는 신의 [그릇]이 될만한 게 있어야 하오. 세계수만 다 키운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잖소? 당신들은 어떤 그릇을 준비한 거요.”
[그릇].
신의 육체.
마치 과거의 미호처럼 신의 영혼을 담으면서 그 혼의 힘을 제대로 사역할 수 있는 강대한 육체가 필요하다. 하지만 내가 알기로 그런 방법은 아베노 세이메이의 궁극적인 음양술과 마도술수가 합쳐져야만 가능했고, 이 세계의 조악한 과학으로는 비슷한 것조차 할 수 없으리라.
내가 따져묻자 이혼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엄청난 무력에다가 마치 기신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은 그 지식…. 당신은 진정 기이한 인물이구려.”
“질문에 대답해 주시오. 내가 볼 때 현재 인류의 과학력으로는 신의 [그릇]을 만들 수가 없소.”
“통렬하군. 하지만 그 말대로요. 최강의 무기가 핵폭탄이던 시절을 벗어난지 얼마 안되는 우리 인류의 과학력으로 신의 그릇은 못 만드오. 강인공지능인 메피스토펠레스가 다 성장하면 몰라도 지금은 절대 불가능하지.”
“그렇다면 어떻게 환인계획을 실행하겠다는 말이오?”
이혼이 훗하고 웃었다.
“애초에 이 환인계획을 우리 인간들에게 제안한 건 나일라토프요. 이걸로 설명이 되겠지.”
“……?”
뜬금없는 대답에 나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내 그게 무슨 뜻인지를 알아차리고는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나일라토프 그 놈이 인류 대신 [신의 그릇]을 만들어준다 그 말이오?”
“그렇소.”
“……!!”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환인계획이 얼마나 현실성이 있는지를 알아차렸다.
‘나일라토프의 과학기술은 외우주를 자유롭게 항해할 수 있을 정도! 그 놈이 자신의 기술력으로 만들어 낸 [신의 그릇]이라면….’
그릇이 얼마나 견고하고 큰가에 따라서 당연히 만들어지는 기신의 성능도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나일라토프의 과학기술이라면 미호보다 더 뛰어난 [그릇]을 만들어서 무한대에 가까운 세계수의 마력을 최대한 담아낼 수도 있으리라.
나는 그 결과물이 어느 정도일지를 순식간에 상상해낼 수가 있었다.
‘28번째 생의 미호는 결과적으로 삼황오제에 필적하는 힘을 지닌 기신이 되었다. 그런데… 만일 시작부터 미호보다 몇십 배는 뛰어난 [그릇]을 이용해서 나일라토프가 기신을 만든다면…?’
가히 전무후무한 괴물이 튀어나올 게 자명하다!
내가 생각에 잠겨있다가 문득 뭔가를 깨닫고는 이혼에게 말했다.
“이혼! 당신은 두렵지도 않소?”
“뭐가 말이오?”
나는 진지한 눈으로 그를 걱정했다.
“나일라토프 그놈은 산전수전 다 겪은 나조차 측정할 수 없는 괴물이오. 놈이 순수한 호의로 당신들 인류를 돕는다 생각하시오? 마치 신이 인간을 갖고놀듯 당신들 또한 농락당하다 버려질 거라는 두려움이 없냔 말이오!”
“……!!”
이혼은 내 말이 정곡을 찔렀는지 흠칫했다. 그러더니 마치 죽은 듯 공허한 회색눈빛으로 하늘을 쳐다보더니 말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소. 우리를 돕는 유일한 초월자는 나일라토프뿐이니까…. 그리고 설령 우리를 이용해먹는다 하더라도 감수할 생각이오.”
“감수한다는 건 나일라토프 때문에 전 인류가 멸망해도 받아들인다는 거요?”
“어차피 우리의 힘만으로는 지구에 들어와있는 수많은 외계종족 중에서 4티어조차 당해내기 힘든 상황이었소. 이래죽으나 저래죽으나 죽을거라면 발악이라도 해보고 죽는게 낫지 않겠소?”
“…….”
이혼의 심정이 이해가 갔기에 나는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온갖 강대한 초월자들이 난무하는 아수라장에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게 호의적인 자에게 모든 걸 의지할 수밖에 없는 그 마음! 내가 전생하면서 수백 수천 번도 느낀 마음이 아니었던가.
내가 침묵하자 이혼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일라토프가 말하길 [환인의 그릇]은 이미 만들어져 있다고 했소. 우리는 세계수가 다 클 때까지 버티기만 하면 되오.”
“이미 만들어졌다고?”
“그렇소. 나일라토프의 모든 기술력이 집약된 궁극의 그릇이라고 들었소. 그가 호언장담할 정도라면 우리는 그를 믿고 따를 수밖에 없소.”
“어떤 그릇인지 혹시 알고 있소?”
“음…. 그것까진 나일라토프가 밝히지 않았소. 우리가 만일 패배해서 적에게 붙잡혔을 때 정보를 불어버릴까봐 걱정된다더군.”
헛소리.
아무리 그래도 유일한 인간 조력자에게까지 숨긴다는 게 말이 되는건가.
나는 그것조차도 나일라토프가 수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굳이 입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그 대신에 말했다.
“이혼. 알겠으니 일단 먼저 내려가 보시오. 나는 이 목장을 좀 구경하다 가고싶구려.”
“알았소. 순간이동기는 소환해둘 테니 천천히 내려오시게.”
쿠구구구….
이혼은 순간이동기라고 칭한 관짝에 타서 빛과 함께 사라졌다. 다시 최하층인 뿌리 근처로 내려갔으리라. 나는 이혼이 사라진 순간이동기를 말없이 쳐다보다가 손목에 차고 있던 메피스토펠레스를 천천히 풀었다.
투욱
손목시계를 내던진 후 나는 입을 열었다.
“나일라토프. 이 거짓말쟁이 새끼야. 당장 쳐죽이기 전에 내 앞으로 튀어나와.”
나일라토프는 늘 손목시계를 통해 내 근황을 염탐하고 있었다.
당연히 지금의 대화도 전부 들었으리라.
그리고 대화를 전부 들었다는 건 - 이미 그의 거짓말이 까발려졌다는 걸 피차 눈치챘다는 뜻이다.
저벅
내 말이 끝나는 순간 아무것도 없는 삼 장 밖의 허공에서 나일라토프가 걸어나오는 게 보였다. 나일라토프는 투명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이상하군. 갑자기 똑똑해진 거 아닌가, 백웅? 설마 그 짧은 순간에 이만큼이나 문제의 핵심에 접근하다니.”
“왜 안 똑똑해지겠어?”
나는 살기를 일으키며 사나운 눈으로 놈을 노려보았다.
“이렇게 대놓고 뒤통수 치는 새끼가 바로 옆에 붙어있었는데 너같으면 대가리 안 굴리겠냐 개새끼야!!”
“…….”
“왜 거짓말을 한 거지? 세계수를 갖고 환인계획인지 개뼉다구인지를 논할 정도로 연구할 정도로 위치를 잘 알고 있었는데 왜 내게는 모른 척 했는지 말해!!”
내가 으르렁거리는데도 나일라토프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나는 저 놈이 침착하다는 게 나를 얕보아서 그런다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열이 받아서 당장 기술을 시전했다.
만상지투(萬常之偸)
마력 훔치기
그와 동시에 이 세계수 정상에 가득 차 있던 농밀한 마력이 마치 빨려들듯이 만상지투를 통해서 내 한쪽 팔에 몰려드는 게 느껴졌다. 나는 갑작스럽게 거대한 마력이 밀려들어서 손이 시꺼멓게 변하자마자 사대신기 아그니에게 외쳤다.
[아그니! 내 팔에 있는 모든 마력을 바친다!]
후와아악!!
그와 동시에 염총 아그니가 소환되어서 내 한손에 잡혔다. 모르긴 해도 전뇌자의 세계에서 소환했던 아그니보다 몇 배나 되는 위력을 가진 게 분명했고, 나일라토프는 그 위력을 알아봤는지 눈꼬리가 떨릴 정도로 놀랐다.
“이런…!! 세계수의 마력으로 사대신기를?! 위험하군.”
철컥
나는 아그니를 나일라토프에게 조준하며 노려보았다.
“검객 나부랭이가 자꾸 신기에 의존하는 것도 좋지 않지만 너같은 개새끼를 죽일 때는 얘기가 다르지. 당장 아가리 열고 변명하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
“후….”
나일라토프는 한숨을 쉬더니 졌다는 듯 자신의 양팔을 축 늘어뜨렸다.
“내가 거짓말을 한 이유는 전생자의 힘을 연구하고 싶었기 때문일세.”
“연구? 나를 함정에 빠뜨려서 죽이는 연구 말이냐?”
“아니.”
나일라토프가 서서히 말을 이었다.
“과연 이미 [닫혀버린] 세계에 새로운 전생자가 진입할 경우 결말을 바꿀 수 있을지가 궁금했다네.”
나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무슨 소리냐? 설마 그 말은….”
“이상하게 생각한 적 없나? 사실 메피스토펠레스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가지 방법으로 자네를 감시하고 있었기에 웬만한 행적은 다 파악하고 있었네. 자네가 나를 지독하게 의심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딱히 방해공작 같은 걸 펼친 적이 없었고 그냥 맘대로 하게 놔 두었지.”
나일라토프가 힐끔 아그니를 쳐다보며 말했다.
“내가 조금만 작정하고 자네가 정보를 얻는 걸 차단하고 내 뜻대로 계교를 부려서 왜곡했다면, 자네는 절대로 이 상황까지 도달하지 못했을 걸세. 그러나 나는 자네가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뒀지. 왜라고 생각하는가?”
나는 나일라토프에게 비아냥거렸다.
“생각할 게 있나? 백날 똑똑한 체 하다가 결국 한방 얻어맞게 된 것 뿐이지, 얼간이 놈아.”
“후후. 미안하지만 그건 아닐세. 왜냐하면 결말은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야.”
“또 무슨 병신같은 소리를….”
“한 번 보겠나?”
나일라토프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이 세계의 정해진 결말을….”
후와아악!!
다음 순간, 갑자기 사방이 어둠으로 가득차더니 수천억 개의 별빛이 온누리에 펼쳐졌다. 갑자기 우주공간으로 내던져진 것 같았고 나는 바로 아그니를 발사하려 했지만 잠시 후 눈앞에 펼쳐진 상황에 당황해서 굳어버리고 말았다.
“헉…?!”
백 겹의 광원이 소용돌이치는 형형색색의 빛무리 -
그건 분명히 본 적 있었던 선명한 기억이었으며, 동시에 악몽이나 다름없는 광경이 이윽고 나타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내가 멍하니 있을 때 잠시 후 머나먼 곳에서 둥실 떠다니며 인간들의 시체가 하나둘씩 나타나는 게 보였다.
우우우
부숴진 달의 잔해가 흐르며 어둠 속에서 수억의 시체들이 떠다니는 이 괴이한 풍경. 나는 저 머나먼 곳에 보이는 어둠보다 더 어두운 통로를 보자마자 이게 무슨 상황인지를 알아차렸다.
“[계시]….”
“호오, 알고 있군. 설마 직접 본 적이라도 있나?”
“…….”
“이건 그냥 시뮬레이션일 뿐이니까 진정해.”
어느샌가 나일라토프가 내 근처에 나타나 있었다. 놈은 팔짱을 낀 채 허공을 떠다니며 말했다.
“이게 이 세계의 정해진 결말이다. 모든 것이 멸망하여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고, [옥좌]가 출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무(無)만이 남게 되지.”
“뭐 어쩌라고?”
나는 나일라토프를 쏘아보며 말했다.
“안 그러게 만들면 되잖아. 지금부터 네놈의 힘으로 이 세계를 좋게 만들어서 그 종말을 피하려고 노력하면 될 텐데 왜 나한테 징징거려!”
이어진 나일라토프의 말은 뜻밖이었다.
“징징거리는 게 아니다. 난 이미 몇천 번이나 노력했어.”
“뭐?”
“노력했다. 이번뿐만이 아니라 내 모든 힘과 가이아의 기술을 다 동원해서 이 세상의 인간을 구하고 이 세계를 구하려고 해봤다고.”
“……?!”
“하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아.”
따악
나일라토프가 손가락을 마주치는 순간 사방의 풍경이 원래대로 되돌아왔다.
이윽고 나일라토프가 광기어린 미소를 지었다.
“결과가 정해진 채 무한히 반복되는 인형극의 세계. 그것이 바로 [외우주]란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