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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나는 선지자가 없다는 사실이 상당히 신경쓰였다. 하지만 바로 눈앞에 전욱의 화신을 불러내놓고 더 이상 쓰잘데기없는 소리를 하면 진짜 분노를 살게 뻔했으므로, 급히 태세를 전환하기로 했다.
“전욱이시여! 선지자의 일은 그저 개인적인 호기심이었습니다. 사실 육요를 다 모았다는 보고를 드리기 위해 전욱님을 소환했습니다.”
그러자 전욱의 화신은 약간 화가 누그러진듯 자신의 턱을 쓰다듬는 자세를 취했다.
[다 모았다…? 그 외계의 사도를 상대로 뺏아왔다는 뜻이냐.]
전욱도 금요를 할치올레이푸라가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내색하지 않고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제법이군.]
전욱은 약간 감탄한 듯한 어조로 말했다. 저 반응으로 보아서 할치올레이푸라는 역시나 최상위급의 사도가 틀림없었다. 그러더니 전욱이 말했다.
[좋다. 그럼 당장 천제단으로 가서 육요해방의 의식을 진행하라. 그와 동시에 삼황오제의 정령신(精靈身)이 모이게 될 터이니 오늘 바로 계획이 완결될 것이다.]
“아뇨. 사실 그것때문입니다만…. 육요해방은 조금만 기다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내가 조심스럽게 반대를 하자 전욱이 침묵하다가 대꾸했다.
[어떤 이유냐?]
그저 화만 내지 않고 차분한 걸 보면 전욱이 어느 정도는 나를 인정한 것으로 보였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는 천천히 말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황제가 상대입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아무리 다른 오제께서 도와주신다 하더라도 제가 그의 손에서 일 합을 버틸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최소한 몇 합은 버텨야 그를 없애는데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흐음….]
“최근 수련이 더욱 진전되어 소성(小成)을 얻기 직전입니다. 조금만 더 강해질 시간을 주십시오.”
힘을 더 쌓아서 도전하는 게 나으니 시간을 달라는 논리가 통할까?
나는 내심 두근거렸지만 이윽고 전욱이 뜻밖의 말을 했다.
[우리는 네가 시간벌이도 되지 못할 거란 걸 알고 있다. 네가 강하다 하지만 우리 본체의 수준에서는 얘깃거리도 되지 못하지. 그래서 네 제안은 쓰잘데기없다 생각하지만, 네가 그리도 바란다면 잠시 유예를 주마.]
“……!! 가, 감사합니다.”
쓰잘데기없다고 생각하는데도 왜 유예를 주는거지?
전욱의 생각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이내 전욱이 말을 이었다.
[착각하지 말아라. 벌써 잊었느냐? 새로운 육요의 탄생을 위해서 6인의 [옛 지배자]를 모아 가계약을 한다고 했을 텐데.]
“…아! 그랬었지요. 그런데 그게 왜….”
[아둔한 놈. 설마 그 가계약을 우리가 다 해줄 줄 알았더냐?]
“네?”
전욱의 손가락이 나를 지목했다.
[너도 발로 뛰어서 이 지구에 와 있는 [옛 지배자]를 물색하란 말이다. 적어도 한 놈을 찾아내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 네게 시간을 주는 것은 이 추가의뢰를 달성할 시간을 주는 것이다.]
“헉!!”
[하지 않을 셈이냐?]
후와아악
전욱의 화신에게서 무시무시한 흑염이 뿜어져 나오자 나는 진심어린 살기를 느끼고는 땀을 흘렸다. 절대 농으로 하는 얘기가 아니었기에 나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하, 하겠습니다!”
[좋다. 그리고 또 하나…. 천계에서 홍호로에 신선 백 명의 영혼을 담아왔느냐?]
“아, 그건 여기….”
나는 목갑을 딸깍 열어서 전욱의 화신에게 보여주었다. 목갑 내부에 가득 차 있는 천계의 보물을 보던 전욱이 침묵하자, 나는 미리 꺼내놓았던 십이대선 세 명의 영혼을 손바닥 위에 띄우며 말을 이었다.
“천계 곤륜성은 삼황오제에 철저한 복종을 할 것을 맹세했으며 대선 셋의 영혼을 가공해서 내놓았습니다. 그들은 천계의 보물로 100인의 영혼을 대신해달라 간청했습니다.”
[흠…. 같잖은 짓을.]
나는 전욱에게 고개를 숙였다.
“전욱이시여, 사도로서 부탁드립니다. 굳이 100명이나 희생시키지 않아도 인과율이라면 이걸로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
전욱이 잠시 생각하다가 갑자기 쑤욱 목갑 안으로 손을 뻗었고 마치 빨려들어가는 듯 했다.
“어!”
나는 그 모습에 깜짝 놀랐는데 전욱은 이윽고 아무렇지도 않게 흑수(黑手)를 빼내었고 거기에는 한 손에 잡힐 정도로 작아진 천계의 보물덩어리들이 잡혀 있었다. 신의 권능으로 단숨에 물체의 부피를 수만 배 이상 압축시킨 것이리라. 그리고 전욱이 말없이 내게 다른 손을 내밀자 나는 대선의 영혼을 내놓으라는 뜻인 걸 알아채고는 급히 넘겨주었다.
꿀꺽
전욱은 양손에 잡힌 공물을 단숨에 자신의 입 안으로 털어넣었다. 그리고 우물거리며 씹어먹는 듯하더니, 잠시 후 말했다.
[충분하겠군. 네 부탁을 받아들이마.]
“가, 감사합니다.”
[생각보다 유능한 듯 하여 많이 봐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네 손을 약자의 피로 물들여야 할때 망설이지 않기를 바라겠다.]
“유념하겠습니다.”
[우리가 내려준 사도의 문양은 사용하지 않는 것 같던데 왜 사용하지 않느냐?]
응?
‘문양은 왜?’
뜬금없는 전욱의 질문에 나는 어리둥절했다. 그리고 그게 삼제(三帝)가 내게 하사한 3개의 문양이라는 걸 알아채고는 손바닥을 펴서 살펴보았다. 약간 신력을 집중하자 문양 세 개가 손바닥에 떠올라서 빙글빙글 도는 게 보였고 나는 다시 시선을 전욱에게로 향했다.
“그저 신분을 증명하는 용도인 줄 알고….”
[그러고보니 그걸 사용하는 법을 알려주지 않았군. 주언(呪言)을 알려주겠다.]
“주언이요?”
[따라서 암송하라. 폭광(暴狂)의 가면(假面)이여 임하거라.]
“폭광의 가면이여 임하거라.”
콰칭!
그와 동시에 갑자기 내 얼굴에 반투명한 가면이 씌워지는 게 느껴졌다.
“으앗?!”
나는 또 다시 가면이 내 본질을 장악하려는 줄 알고 급히 벗겨내려 했지만 이번에는 이상하게도 벗겨지지 않았다. 저번처럼 힘이 모자라거나 아프거나 한 문제가 아니고 애초에 만상지투를 써도 아예 닿지를 않는 느낌이었다. 내가 손을 허우적대자 전욱이 말했다.
[너는 예전에 스스로의 힘으로 폭광의 가면을 벗었다. 그러므로 [제약]은 남지 않고 가면의 [힘]만이 남았을 터. 형태가 가면일 뿐 순수한 힘의 덩어리가 뭉쳐졌으니 벗기기 애매할 것이다.]
“아…. 그렇습니까.”
[생각지도 못한 일이지. 제약도 없이 가면의 힘을 쓸 수 있다는 건….]
뭔가 짜증난다는 듯한 어투로 중얼거리던 전욱이 말을 이었다.
[너는 폭광의 가면을 사용한 상태에서 완력(腕力)을 계속 상승시킬 수 있다. 그것이 폭광의 권능이다.]
“완력….”
나는 어리둥절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반문했다.
“저… 완력이라는 건 육신의 힘이 아닙니까? 사도의 권능이라기엔 뭔가 약한 것 같습니다.”
내 생각은 당연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신적인 존재들이 시공간을 조작하고 산맥을 날려대고 원소를 조종하는 어마어마한 권능에 비교하면 단순한 신체능력의 상승은 별것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물며 절대지경에 이르게 되면서 단순한 내공상승으로 육체능력이 강화되는 게 얼마나 별것 아닌지 깨닫게 된 상황에서는 완력상승 따위가 눈에 찰 리가 없다.
[사용자의 역량에 비례해서 계속 상승시킬 수가 있다. 이 권능이 너무 강력해서 축융이 내 사도일 때도 거의 내려주지 않으려 했었다.]
전욱은 무척 자신이 있어보였다. 나는 그게 더 이해가 안되었다.
“……?”
단순히 완력이 쎄지는 게 뭐가 강력하다는 거야?
축융한테 내려주는 걸 아까워할 정도란 말인가?
[이해가 안되나 보군. 안되면 안되는 대로 쓰도록….]
전욱은 굳이 설명하기 귀찮다는 듯 고개를 내젓고는 마지막 한마디를 남기고 사라졌다.
[다음에 부를 때는 육요해방 직전이기를 바라겠다.]
파앗
나는 전욱에게 보고하여 상황을 정리하고 시간벌기를 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주어진 과제를 어느 정도 해결했지만 동시에 [옛 지배자] 한두 명을 만나서 칠요의 가계약에 끌어들여야 하는 새로운 과제가 생겼기에 성가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젠장…. 겨우 일주일만에 또 어려운 일을 해야 하나? 그냥 목갑 안에 수련이나 하러 들어가자.’
나는 내심 투덜거리면서 다시 목갑 안으로 들어가려 하다가 멈칫했다.
“흠. 어차피 일주일 후에 달기를 만나러 망량선사의 마을로 돌아가야 하는데…. 전욱이 시킨 일까지 깔끔하게 끝내는 게 낫겠지.”
나는 이 의뢰가 생각보다 쉬울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지금은 말세(末世). 세계의 끝을 짐작하여 온갖 [옛 지배자]가 지구에 은둔하여 잠복하고 있는 상황. 그들 중 몇몇만 찾아내는 건 그렇게까지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리라. 하지만 정작 찾기가 귀찮아지니 좀 더 쉬운 방법을 머릿속으로 고민해보았다.
그리고 영 생각이 나지 않아서 제갈현을 찾아가서 질문했다.
“…하여 [옛 지배자]를 찾아서 칠요의 가계약을 제안해야하는데 어찌하는 게 좋겠소?”
“[옛 지배자]를 쉽게 찾아내는 방법을 알고 싶은 거구려.”
“그렇소.”
“쉽게 가자면 나일라토프를 찾아가서 물어보면 되겠지만 지금 중대한 거사를 앞두고서 괜히 그에게 빚지는 것도 좋지 않겠지. 내가 추천하는 방법은 바로 남극에 있는 인류연합의 총본부로 가는 것이오.”
나는 뜻밖의 방안에 의외라서 반문했다.
“남극의 인류연합 총본부? 거긴 왜….”
“인류연합은 외계인뿐만 아니라 향후 인류의 적이 될 [옛 지배자]의 존재를 어느 정도 스캔해놓았을 것이오. 파우스트 박사가 있으니 당연히 그 정도는 해두지 않았겠소? 그 정보만 받으면 쉽게 의뢰를 달성할 수 있겠지.”
“아…! 그렇군. 당장 가겠소.”
파앗
나는 남극의 인류연합 총본부로 갔다. 그리고 파우스트 박사를 찾아가서 말했다.
“[옛 지배자]의 정보를 주시오!”
“갑자기 또 무슨 일이오?”
“알다시피 나는 강대한 외계인세력을 상당수 격파했소. 그러나 그 외계인들의 뒤에는 [옛 지배자]가 있으니 그들과 교섭하여 인류에게 평화를 되찾아주겠소.”
“……!!”
파우스트 박사는 크게 감격했는지 들고 있던 둥근 시약유리통을 떨구었다. 강화유리인지 유리통은 깨지지는 않았고, 그는 서둘러 주섬주섬 유리통을 줏더니 말했다.
“그런 거라면 당연히 건네 드려야지. 메피스토펠레스가 적에게 탈취당할까봐 그 안에는 정보를 넣지 않았는데 잘 찾아오셨소.”
삐빅
이윽고 파우스트 박사가 커다란 컴퓨터 앞에서 복잡한 기계를 조작하더니 내게 웬 둥근 패드 위로 올라가라고 손짓했다. 내가 그 위로 올라가자 파우스트 박사가 말했다.
“전뇌장치를 이용해서 바로 자료를 뇌 속으로 전송하겠소. 시간이 좀 걸리니 가만히 서 있으시오.”
우우웅
이윽고 파우스트 박사가 말한 대로 내 머릿속으로 지식이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당연히 흑요석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느렸지만, 뜻밖에도 대웅제국에서 전뇌기를 이용해서 전송하는 것보다는 꽤 빠른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의 인류 기술력이 왠지 대웅제국보다 나은 것 같은데…?’
하긴 여기는 원래 세상과 달리 과학의 극한에 이른 나일라토프에게 직접 과학을 전수받았으니 그럴 수도 있으리라. 나는 내심 납득하고 있었는데 바로 그 때였다.
파지지직
“크으윽….”
갑자기 내 머리통에서 번개가 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의 두통이 연속해서 닥쳐왔고, 관자놀이를 쇠줄에 갈아버리는 듯한 끔찍한 느낌이 연속적으로 찾아왔다.
“크악… 게에엑….”
웬만한 고통을 다 겪어봤지만 이건 또 새로운 고통이라서 내가 헛구역질을 하는 표정을 짓자 파우스트 박사가 당황해했다.
“아니?! 이 무슨 부작용이….”
“끄억…. 당신 설마 나를 이걸로 죽이려고….”
내가 바닥을 기면서 꿈틀거리자 파우스트 박사가 강하게 부정했다.
“아니오! 당신을 죽일려면 이렇게 미개한 방법은 쓰지 않소!! 좀 더 과학적으로 접근할 것이오!”
“…….”
변명이 왜 그래!
“이건 전혀 알지 못하는 이상현상이… 자, 잠깐만….”
이윽고 파우스트 박사가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1… 1279.7 요타바이트… 아니 그걸 몇 배나 넘는 퀸틸바이트(Quintilbyte)급의 연산량…?! 어떻게 인간의 뇌에서 이, 이런 말도 안되는!!”
파지지직!!
갑작스럽게 눈앞이 암전(暗轉)하며 나는 정신을 잃었다.
아무것도 없는 어두운 공간.
그 공간이 아주 서서히 빛으로 채워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지독한 피비린내가 자욱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무척이나 역하다.
이것은 혈로(血路).
그저 선홍색으로 가득 채워진 더러운 피가 사방의 벽을 타고 흐르고 있다. 바닥 또한 질척해서 발등까지 핏물이 차고 올라와 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반 걸음을 내딛었고 찰박거리는 피웅덩이 소리가 귓가를 시끄럽게 했다.
머리가 어지럽다.
이곳은 무척 좁은 장소라는 느낌이 든다.
‘언젠가… 한 번 와봤던 것 같은….’
지끈!
두통이 여전히 남아 있다. 하지만 방금 전까지 느꼈던 미친 듯한 편두통만큼은 아니다. 나는 헛구역질의 기운이 조금 수그러드는 걸 느끼며 비틀거리면서 제자리에 버티고 섰다.
꾸우우우우 -
혈로의 저편에서 끔찍하고 불길한 괴물의 소리가 들린다. 나는 비척거리면서 천천히 선홍빛 혈로를 걸어가기 시작했고, 참방거리는 소리와 함께 피비린내가 내 전신을 감싸는 게 느껴진다.
무척이나 끔찍한 풍경인데 끔찍하다고 느껴지지 않는 게 이상하다.
왜일까.
이건 피가 아니라 다른 것 같다.
나는 약 백여 걸음을 걷자 통로 저편의 괴물의 윤곽이 모습을 드러낸 것을 볼 수 있었다.
꾸우우우우
괴물의 모습은 무척 이질적이었다. 여덟 개나 되는 흑조(黑鳥)의 날개를 펼친 채 얼굴에는 무려 세 개나 되는 눈알이 있었고 피부가 시뻘건 핏빛으로 가득 물들어 있었다. 또한 눈동자에는 알 수 없는 별빛이 박혀서 번득이고 있었으며 팔다리는 완전히 괴물의 그것으로 변해있었고, 뜻밖에도 몸통부분은 꽤나 인간과 흡사한 것처럼 보였다.
그 괴물은 무언가 통로를 막고 있는 철창 때문에 창살을 붙잡고 이쪽으로 오지 못하는 듯 했다. 놈은 창살을 붙잡은 채 눈을 데굴거리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보다 머리 두 개 정도 더 커다란 그 기이한 괴물을 쳐다보던 나는 이상한 불쾌감이 느껴졌다.
“뭐야 이건….”
무척이나 싫다. 당장이라도 죽여버리고 싶다.
괴물도 마치 같은 생각이라는 듯 갑작스럽게 포효를 했다.
꾸우우우워어어어어어!!!!
혈로가 통째로 흔들리며 피빛이 홍수처럼 물결친다. 나는 그 피빛에 젖어가는 동안에도 놈을 똑바로 노려보고 있었고, 알 수 없는 살의가 미친듯이 들끓어오르는 걸 느꼈다.
죽여야 해….
저 놈을 죽여야 해!
콰칭
나는 곧장 선검을 소환해서 손에 잡았다. 다행히도 이 공간은 선검이 먹히는 공간인 것 같았다.
나는 그대로 선검을 써서 검뢰를 내려베려고 했다.
“나랑 얘기 좀 해.”
가녀린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직전까진.
나는 그 익숙한 목소리가 뒤를 홱하고 쳐다보았다.
그리고 너구리 인형을 안고 있는 그 소녀가 피웅덩이의 수면 위에 서 있는 것을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선검을 놓고 말았다.
첨벙
“…….”
실체화된 선검이 요란하게 피웅덩이 위에 떨어졌다.
나는 입을 벌린 채 약간 전신을 떨었다.
그리고 소리를 내어 상대의 이름을 불렀다.
“전뇌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