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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나는 구궁파천뢰의 새로운 요령에 감을 잡게 되자 주구장창 그것만 연습하게 되었다. 다른 길로 새는 게 아닌가 하는 염려도 처음에 있었지만 이내 잊어버릴 수 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충분히 수련치를 채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한달 내내 쉬지 않고 수백만 번 원을 그렸던 게 바로 선검술(仙劍術) 수련이었지.’
선검술의 수련이라고 해도 매일같이 원을 그리는 작업만 반복될 뿐이라서 이번 생에는 그렇게 열심히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구궁파천뢰의 요령에 있는 핵심이 바로 [순환]이라는 걸 알게 되자 원을 그리는 선검술의 수련이 가장 적절할 것이라는 직감이 왔던 것이다. 그래서 수백만 번이나 원을 계속 그리던 끝에 감각이 와 닿았으니, 이것이야말로 선검술 수련도 하고 구궁파천뢰의 성취도 얻은 일석이조(一石二鳥)였으리라.
차라리 잘되었다는 마음도 있었던 것 같았다. 소을촌에 있을 때는 내 수련 외에도 이것저것 신경 쓸 게 많아서 온전히 집중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치치치칭!!
“음. 또 여섯 개인가….”
이제 요령을 잡아서인지 뇌혼에 의념을 불어넣어 원하는 대로 순환각을 잡는 건 안정적으로 할 수 있게 되었지만, 문제는 내 내공이 넘쳐흘러서인지 그 숫자를 조절하는 게 힘들었다. 그래도 어쨌든 숙련도가 올라가면 점차 각을 줄여갈 수 있을 건 분명했기에 나는 자신감이 붙었다.
그 때 이광이 말을 걸어왔다.
“사부. 소성(小成)을 축하하오만 이젠 내 수련도 봐주셔야겠소. 나는 사부가 안 가르쳐주는 동안 칠대절학을 독학하는 수밖에 없었소.”
“그렇군. 도와주지.”
나는 이광이 여태껏 익힌 칠대절학의 성취를 차분히 살폈다. 그리고 보던 중 이광의 성취가 여전히 천재적으로 빠르다는 걸 깨닫고는 침음성을 흘렸다.
‘굉장하다. 반 년이면 아마 칠대절학만으로 뇌신류의 절기만큼 숙련도를 뽐낼 수 있을 것이다.’
이광의 무서운 점은 단순히 초식을 기계처럼 외우는 게 아니라 그 요체(要諦)를 귀신처럼 파악해서 자기에게 맞도록 변형시킨다는 점이었다. 사실 내가 가르칠 것도 얼마 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나는 이광에게 말했다.
“이 정도 성취면 말해둬야 할 것 같군. 이미 얘기했다시피 육대절학의 성취가 모두 높아지게 되면 무쌍패(無雙覇)에 입문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무쌍패에는 큰 제약이 있다.”
“어떤 제약이오?”
“심기체가 모두 합일하여 백척간두의 지점에서 무위전변(無爲轉變)을 시행하여 무쌍패의 패력(覇力)으로 적의 힘을 무효화해야 한다. 만일 그게 실패하면 무조건 죽는다.”
“……!!”
“무쌍패를 쓰면 설령 백련교주의 절기라도 무효화시킬 수 있다. 하지만 이 제약 때문에 양날의 검이라 할 수도 있지.”
“이해했소.”
이광은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리 말하는 사부는 쓸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군. 나중에 시범을 보여주시오.”
“시키는 거나 잘 해라.”
나는 이광에게 쏘아붙이며 다음날부터 이광을 수련시키는 시간을 조금 늘렸다. 그리고 시간이 약 한 달 정도 더 지났을까? 나는 드디어 안정적으로 뇌혼의 숫자를 다섯 개까지 줄이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치치칭!!
‘좋아. 확실히 실력이 붙고 있어.’
게다가 내 생각보다 성취가 빠르다. 원리를 이해했기 때문에 남은 건 숙련도상승뿐이었기 때문이리라. 이런 식으로 일 년 정도면 충분히 ‘요령’을 구궁파천뢰에 접목시킬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문득 이광이 내게 뜻밖의 이야기를 했다.
“사부. 실전경험을 쌓을 기회가 필요한데 방법이 없겠소?”
“어? 실전경험?”
이광은 고개를 끄덕였다.
“칠대절학을 구궁파천뢰에 섞어서 실제로 운용해보려면 실전을 해봐야 하오. 머릿속에서 가상의 적을 상대하는 건 실력상승에 한계가 있소.”
“흐음…. 실전경험이라….”
“가능하면 강한 적일수록 좋소.”
“기다려 봐.”
나는 고민하다가 헤르메스를 불렀다.
“헤르메스!”
“왜 불렀지?”
어느 새 신출귀몰하게 공간에 모습을 드러낸 헤르메스에게 나는 나직이 말했다.
“다 들었겠지만 실전경험을 위한 연습상대가 필요하다. 혹시 네 마법으로 어떻게 안 되냐?”
“너희끼리 싸우면 되잖나?”
“지금 이광이 필요로 하는 경험이 같은 뇌신류끼리의 대전이 아닌 것 같거든.”
감이 온다. 이광이 나와 연습대련을 하자고 하면 간단할 텐데 굳이 요청했다는 건 다른 영역의 실전이 필요하다는 소리였다. 실제로도 나와 이광이 익힌 무공이 거의 비슷했기에 실전에 제대로 적용할만한 경험치인지는 아리송했다.
그러자 헤르메스가 킬킬 웃더니 말했다.
“그런 거라면 아주 좋은 연습상대가 있지. 그런데 백웅, 이렇게 시간을 막 써도 괜찮겠나?”
“무슨 소리야?”
“너희가 이 공간에 들어온 지 약 100여일, 바깥의 시간으로는 9일 남짓이 지났다. 원래 세계라면 별로 큰일나진 않겠지만 지금 너는 육요를 모은 데다 별의별 이벤트를 다 끌어들이지 않았나?”
“……!!”
“슬슬 나가서 일을 해결하거나 아니면 봉합하고 와야만 할 것이다. 안 그러면 나일라토프가 뭔가 행동을 하겠지.”
“나일라토프….”
나는 끙하는 소리를 내었다. 나를 이 외우주로 납치한 정체불명의 그놈을 도대체 어떻게 상대해야할지 모르겠다. 나는 잠시 고개를 저은 후 말했다.
“알았어. 일단 놈과 이야기를 좀 해두고 오지. 그 동안에 연습상대를 만들어낼 수 있나?”
“그거야 간단한 일.”
촤앗!!
헤르메스가 손을 휘젓자 갑자기 공간에 물결이 일어나더니 그 자리에는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아니…?”
“앗!”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리고 공간에 모습을 드러낸 자의 이름을 외쳤다.
“걸선(乞仙)! 아니…. 팔부신중 건달파(乾闥婆)!”
그랬다. 뜬금없이 거지의 옷을 입은 평범한 외모의 장년 사내!
내가 그의 정체를 폭로하자 옆에 있던 이광이 당황했다.
“걸선이라고? 정파 삼대기인이 그 팔부신중이라는 괴물이라는 말이오?”
“그게….”
내가 이광에게 뭔가 말하려 할 때 걸선이 힐끔 주변을 살피다가 말했다.
“야차가 갑자기 사라져서 무슨 일인가 싶었지. 너희들의 짓이었나?”
걸선의 말에 헤르메스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고개를 빳빳이 들 때가 아닐 텐데. 가련한 마왕아.”
“뭣이?”
파지지직!!
“크아아아악!!”
헤르메스가 손가락을 튕기자 걸선은 전신에서 피빛 번개가 튀겨지면서 비명을 내질렀다. 그리고 동시에 벌떡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의 신체가 인간과 마왕이 섞인 것으로 점차 괴이하게 변모하기 시작했다. 팔부신중 건달파의 본체를 약간 드러내고 있던 걸선을 히죽거리며 쳐다보고 있던 헤르메스는 다시 손가락을 튕겼고, 걸선은 인간으로 되돌아와서 털썩 주저앉았다.
“허억… 허억….”
“수정석비의 조각을 네 몸에 이식한 순간부터 너희 팔부신중 모두는 나,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토스의 영원한 노예이다. 이제 상황파악을 했느냐?”
“크윽…. 그, 그렇게 된 건가….”
걸선은 뭔가를 깨달은 듯 했다. 그리고는 체념하고는 말했다.
“죽여라.”
“이런, 죽이려면 진작에 죽였겠지. 하지만 널 죽이려고 부른 건 아니고 기회를 주려고 불렀다.”
“기회?”
헤르메스가 우리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들의 연습상대가 되어라.”
“……!!”
“저들이 충분히 만족한다면 해방시켜주지. 그게 아니면 넌 비참하게 죽을 것이다.”
“…야차도 이런 식으로 죽였나?”
“그 녀석은 너 같은 기회도 얻지 못했지. 바로 죽였다.”
“큭.”
“자, 선택해라.”
걸선이 고개를 숙이고 뭔가 고민하는 듯 했다. 그러더니 말했다.
“뭐든 하겠으니 나 하나로 끝내다오. 다른 동료들만큼은 살려다오.”
“크크크큭!! 감히 노예 따위가 의견을 내는 건가?”
파지지직!!
헤르메스가 광소를 터뜨리며 걸선에게 다시 피빛 번개가 튀겨지게 했다.
“흐아, 아아아아악!!”
걸선은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땅을 뒹굴었고 그는 마치 익힌 고기처럼 시꺼멓게 전신이 변해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참지 못하고 외쳤다.
“이봐 그만해!!”
그러자 핏빛 번개가 멎었다. 헤르메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길을 들였을 뿐이다. 이제 남은 건 너희 마음대로 갖고 놀도록….”
파앗
헤르메스의 모습이 사라졌다. 나는 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걸선을 씁쓸한 눈으로 보다가 말했다.
“걸선, 아니 팔부신중 건달파. 일어서시오.”
그러자 시꺼멓게 탄 피부가 쩌적거리며 갈라졌고 이내 전신을 재생시키며 걸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시꺼멓게 죽은 눈빛으로 우리를 노려보며 말했다.
“도대체 너희는 우리 팔부신중에게 어떤 원한이 있기에 이런 짓을 하는 거지? 수해의 경매에 참여했던 것도 네가 아니냐?”
“일이 이렇게 된 건 유감이군. 하지만 나는 팔부신중 당신들이 세상에 백해무익하다 생각하여 처음부터 원래 세계에서 추방하려 했소. 당신들의 지난 업보를 생각해보시구려.”
“업보…? 네가 우리에 대해 뭘 안다고.”
“알 만큼은 알고 있지. 당신들이 갑자기 실종된 창힐을 부활시키려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과, 역사가 이어져오는 동안 무수한 학살과 파괴를 반복했다는 것도.”
“후. 처음부터 우릴 노렸던 거군.”
건달파는 약간 체념한 듯 말을 이었다.
“마음대로 해라. 연습상대를 원한다고 했나? 원하는 만큼 칼을 맞아주마.”
“꽤나 멋진 척을 하는군. 나는 그 전에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소만.”
“동료를 팔아넘기진 않는다.”
“그런 게 아니오. 개인적인 궁금증일 뿐.”
나는 건달파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당신은 과거에 약한 백면서생 시절의 백련교주 독고운천을 구한 적이 있었소. 그리고 걸선으로 활동하는 동안 무림에서 사악한 마두를 여럿 때려잡기도 했었소. 그러나 그런 선행과는 별개로 천축무림에서는 건달파의 힘으로 학살을 종종 저질렀다고 들었소.”
“…….”
“당신에게 있어서 선은 무엇이고 악은 무엇이오? 대체 무슨 기준으로 행동했던 거지?”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인간으로서의 걸선은 분명한 정파 삼대기인이었고 뛰어난 정파의 고수였다. 행적만으로 따지고 보면 그보다 훌륭한 정파인은 드물 정도였다.
그러나 팔부신중으로서의 건달파는 아수라에게 듣기로 종종 학살도 저질렀고 무림방파에 쳐들어가 파괴를 일삼기도 했다고 한다. 주술사를 특히 많이 죽였다고 했다.
그리고 이런 건 건달파뿐만이 아니다.
팔부신중 대부분이 이런 이중성이 있었다.
팔부신중들은 왜 이렇게 이중성이 강한 것일까?
건달파가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말했다.
“우리에게 있어서 전제조건은 그저 창힐님께 충성하는 것뿐이다. 나머지는 그냥 개인의 취향에 따라 행동했을 뿐 그 행동을 선악으로 구분하고 행동한 적은 없다.”
“창힐? 왜 그리도 창힐에게 목숨을 거는 건지 모르겠군. 말해주시오.”
“왜 그리 관심이 많지? 우리를 이 꼴로 만들어놓고 철저히 조롱할 생각이냐.”
“그렇다 하더라도 당신이 솔직히 대답해줘야만 할 거요. 당신이 입을 닫으면 헤르메스를 시켜서 다른 자들을 대면할 테니까.”
“…….”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우리는 창힐 님 외에는 그 누구도 인간을 구할 수 없다고 믿는다.”
나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창힐이 인류의 구세주(救世主)이기에 믿고 따른단 거요? 그래서 헛소문을 믿고 외우주까지 실종된 창힐을 찾으러 갔나?”
“그렇다. 그 외의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
건달파는 강한 신념이 담긴 말투로 말했다.
“그 분께서는 고대 은주시대부터 신들과 교류하였고 삼황오제의 수좌이신 황제 공손헌원께 인정받아 신이 되셨다. 그리고 인간일 때부터 계속해서 종말에 인류를 구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셨지. 황제 공손헌원이 강해질수록 창힐님도 강해지시니 결국 인간은 구원받지 않겠는가!”
“…….”
“그 과정에 불가피한 희생이 있었다는 건 인정하지. 그러나 우리가 인류를 이끌어줘서 파멸에서 구해주지 않느냐? 희생당하는 자들도 마땅히 감수해야 할 것이다.”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고….”
나는 어이가 없어서 중얼거렸다.
‘건달파는 그래도 팔부신중 중에서 괜찮은 놈인 줄 알았는데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다니!’
건달파가 말하는 걸로 봐서는 다른 놈들도 뻔하다.
즉 창힐이 인류의 구세주이며 팔부신중은 그를 돕는 간부들이니 미천한 일개 인간들은 그들에게 의견을 내세울 수 없으며 때로는 희생해야만 한다는 입장인 것이다. 이런 식이니 팔부신중이 계속해서 인류에게 해악을 끼쳐올 수밖에 없었으리라.
‘화가 나는군….’
다시 생각해도 팔부신중을 외우주로 보내버린 건 잘한 결정이었던 것 같다. 나는 그에게 일말의 인정조차 끊어버리기로 하고는 이광에게 말했다.
“이광. 저 자를 상대로 무공을 연습하면 족할 것이다. 절대 반격해서 널 죽음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제약을 걸어두면 안전하게 두드려 팰 수 있겠지. 헤르메스에게 말해서 저 자의 힘도 제약시키겠다.”
이광이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었다.
“흐음.”
무슨 일이 생기려 하면 헤르메스가 도중에 건달파를 막아주기도 할 것이다. 인간 걸선의 무공이든 팔부신중 건달파의 힘이든 충분한 연습상대가 되어주리라.
“헤르메스, 난 바깥으로 나갈….”
나는 그렇게 말해두고는 고개를 돌려 이 공간을 나가려 했다.
바로 그 때였다.
“그 말대로라면 인류를 구할 수 있다면 굳이 창힐이 주군이 아니라도 된다는 소리군.”
이광의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하자 이광이 훗하고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지 않소? 걸선.”
“이광.”
걸선이 날카로운 눈으로 이광을 쳐다보았다. 그가 말했다.
“네 사부곁에서 수련하던 어린아이 시절이 생생히 기억나거늘 너는 어느덧 늙어버렸구나.”
“그러는 당신은 예전과 다를 바가 없구려. 마왕이라는 사부의 말이 이해가 되는군.”
“방금 했던 말은 무슨 말이냐?”
“그냥 말 그대로요.”
이광이 말했다.
“창힐이 아닌 다른 사람이 인류를 구한다면 창힐에 바치던 충성을 버리고 다른 주군을 섬길 수 있다 얘기한 셈이 아니오?”
“…웃기는구나. 너도 관(官)의 생활을 했다는 걸 알고 있거늘 그게 가능하다 생각하느냐? 우리 팔부신중의 충성은 수천 년 전부터 이어지고 있으니, 너희 인간들의 알량한 황조(皇朝)에 대한 충성심보다 수백 배 크다!”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이란 말이군. 달리 말해서 창힐이 딱히 인류를 구할 생각이 없고 그럴 처지도 아니라면 더 이상 충성할 이유가 없는 게 아니오?”
“…….”
“창힐은 언제 실종되었소?”
“몇 년 전이다….”
“창힐이란 자가 정말 뒈졌다면 어쩔 셈이오? 같이 자결할 셈인가.”
“그건….”
걸선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이광이 슬며시 내 쪽을 쳐다보더니 말했다.
“백웅 사부. 난 눈치 챘소.”
“뭘 눈치 챘단 거냐?”
“창힐이 뭐하는 놈인지 모르겠지만 사부가 놈을 죽인 게 틀림없소. 그렇지 않소.”
“……!!”
어… 어?!
어떻게 그걸 알았지?!
나는 크게 당황했지만 일단 표정에 드러내지 않고는 말했다.
“허튼 소리. 왜 그리 생각하느냐?”
“사부가 갑작스레 소을촌에서 대오각성하여 날뛰었다는 시기는 그리 먼 과거가 아니오. 그리고 저 자들이 주군 창힐을 잃었다는 시기도 왠지 비슷해 보이는군. 또한 사부는 당연히 창힐이 사라졌다는 걸 전제로 그동안 책사 망량과 열심히 계책을 짜던데, 도대체 어떻게 그런 신적인 존재가 소멸되었다는 걸 소을촌에서 한발짝도 안 움직이고 확신하셨소? 만일 창힐이 살아있으면 강력한 마왕들에게 역공을 당할 게 뻔한데도.”
“…….”
“답은 하나뿐이지. 사부가 창힐을 죽였으니까 창힐이 더 이상 없다고 확신하는 거요. 살해자야말로 희생자의 소멸에 가장 강력한 확신을 갖고 있는 자가 아닌가.”
나는 말문이 막히는 걸 느꼈다.
‘미… 미친.’
이광의 추론이 억측덩어리이긴 했지만, 놀라울 정도로 순식간에 진상에 접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그는 단숨에 내가 전생하자마자 창힐이 소멸되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까지 제기한 것이다.
망량의 추측과는 뭔가 다르다.
말 그대로 이유따윈 별로 필요없고 자신의 감과 심득에만 솔직한 추리!
이광의 말에 듣고 있던 건달파는 솔깃해진 듯 눈을 부릅뜨며 나를 노려보았다.
“설마… 네놈이 정말로…?”
이런!
나는 괜히 일이 골치아파질까봐 인상을 찌푸렸지만 옆에 있던 이광이 태연히 말했다.
“그렇소. 창힐을 죽인 건 아마 사부일 것이오. 근데 그러면 이젠 어쩔 거요?”
“어쩔 거냐니! 당연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 백웅이라는 놈을 죽여 주군의 원수를 갚으리라!”
쿠르르르
갑자기 걸선의 몸이 건달파의 본체로 되돌아가며 강렬한 투기와 마력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이광은 그 기세를 태연하게 정면에서 받아가며 말을 이었다.
“갚고 나서는? 다같이 울면서 자결할 셈인가. 그럴 리가 없을 터.”
“…….”
걸선은 정곡을 찔린 듯 기세의 방출을 멈추었다.
“난 걸선 당신의 눈을 어릴 적에 봤던 기억이 나오. 선량한 척 가면을 쓰고 있지만 만상만물에 접하고 싶은 욕심이 그득한 얼굴이었지. 선도 악도 제멋대로 행한다는 건 결국 동물(動物)다운 욕망에 충실하여, 한 순간도 자신의 욕구를 제어하고 싶지 않은 개구쟁이란 뜻이니 결코 자신의 힘과 권세를 포기하지 않소.”
“이광! 네가 나에 대해 뭘 안다고 지껄이느냐!”
“내가 당신보다 살아온 세월은 짧으나 복마전(伏魔殿)과 같은 황궁에서 수십 년을 버텼소. 타고난 힘을 믿고 고고하게 살아온 당신과 달리 사람보는 눈은 더 정확하지.”
“뭐라고….”
이어진 말에 걸선이 눈을 부릅떴다.
“걸선. 당신은 지금 연기를 하고 있소. 당신뿐만 아니라 당신의 동료들 전부 다.”
“여… 연기?! 이 놈이 감히.”
“그 충성심이 진짜라 말하고 싶소?”
“적어도 너같이 하찮은 인간놈 따위가 우리의 충정을 논할 수는 없다!”
“그럼 주군 창힐이 뒈졌으니 다 포기하고 당장 자살하시오. 불사이군이니, 주군이 죽었으면 함께 순장(殉葬)당하여 의(義)를 다함이 고대무장들의 의리가 아니었소?”
“…….”
“못하잖소. 어쨌든 살고 싶으니까 여태껏 내 개소리도 듣고 있지 않은가.”
걸선의 표정은 이제 멍하게 변해 있었다. 이광의 얼굴에 냉소적인 기색이 감도는 게 보였다.
“당신들이 무엇을 연기하는지 알고 있소? 바로 [충성하는 자기자신]이오. 마치 가을의 만주(滿酒)를 세 모금 마시면 스스로 취한 줄도 모르듯, 자신의 말로 자신이 교묘히 취해갔으리라. 그대들은 수천 년 동안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듯 충성심에 홀려 예까지 와버렸구려.”
“뭣이….”
“참으로 아둔하구려, 걸선 선배.”
걸선이 크게 움찔하더니 이를 갈며 반박했다.
“이광!!! 황궁에서 선황제에게 충성을 바쳤던 자가 감히 충성을 논하는가? 그러는 너야말로 선제(先帝)의 죽음 이후 낙향하여 아무것도 못하고 동네무관주가 되었잖은가. 네놈이야말로 진정한 충성을 논한다면 왜 선제를 따라 자결치 않았느냐!”
“착각하고 있군. 내게 의(義)란 세 가지가 있었소.”
“세 가지?”
이광이 손가락 세 개를 내밀었다.
“하나는 황제에 대한 충성의 의. 또 하나는 뇌신류의 종사로서 뇌신류를 유지하고 발전시켜 백련교에 복수해야할 문파의 의리, 마지막은 친우에게서 자식의 육성을 부탁받은 의(義). 하나의 뜻이 꺾였으나 다른 두 개의 뜻이 남아있다면 무책임하게 죽어야 할 이유는 없잖소? 왜냐하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섣불리 자진한다면 내게 뜻을 맡긴 자들의 의리를 저버리는 셈이니.”
“…….”
“수천 년을 살아왔다면서 이것도 모르시오? 당신 헛살았으니 개방은 당장 해체하시오.”
“이 애송이가….”
“이는 당신들도 마찬가지요. 당신들의 의(義) 또한 하나가 아니오. 당신들에게 주군 창힐에게 충성할 의리가 사라졌으매 인류를 구원하고자하는 의지가 남아있다면 그 의리에 합당한 선택을 해야 하지 않겠소?”
걸선은 혼란스러운지 눈을 꿈벅이며 아무런 말도 못 했다. 마치 이광의 말 그 자체에 먹혀버린 듯한 반응이었다. 그는 한참 후 나를 쳐다보더니 말했다.
“백… 웅… 정말로 네가… 주군 창힐 님을 죽였느냐…!!”
마치 지옥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끔찍한 원념이 담긴 목소리.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죽였다.”
천암비서가 창힐을 먹어치웠지만 결국 천암비서가 그렇게 행동한 것도 내가 전생자로 활동하다보니 일어난 일이니 내가 죽인 셈이 되리라. 내가 순순히 인정하자 믿을 수 없다는 듯 걸선이 말했다.
“대체… 왜….”
나는 별 수 없이 미래의 정보를 얘기해주기로 마음먹었다.
“걸선, 아니 건달파. 창힐이 남긴 [문자]가 종말의 시대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아는가? 한자의 문화권에 있는 모든 인간들을 이족(異族)으로 변이시키고 인류를 다른 종족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리고 너희가 제공받은 신의 혈육도 사실 사채관계나 다름없어서 나중에 창힐의 힘이 부족하면 너희가 창힐에게 인신공양당해 흡수된다.”
“……!!”
“이걸 네가 믿든 말든 상관은 없다. 하지만 내 이름을 걸고 말하건대 창힐은 절대 인류를 위하는 놈이 아니었다. 결국 신이 되어서 종말에 더 위대한 신이 되려는 놈이었을 뿐이지.”
아마 그랬기에 창힐은 천마(天魔)가 되려고 했으리라.
천마란 바로 황제 공손헌원의 심장이자 의지 그 자체 - 그 천마의 힘을 얻은 후 나중에는 황제마저 배신하여 황제의 힘도 찬탈하려는 게 아니었을까? 터무니없는 야망을 지닌 놈이었다.
침묵하던 걸선이 말했다.
“그럼… 백웅 너는 진심으로 인류를 구하려한단 말이냐?”
“딱히 진심은 아니고 겸사겸사. 내 진짜 목표는 진공가향이다.”
걸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진공가향? 그렇다면 넌 설마 호월 교주의 후계자….”
“그렇다. 백련교 사대무류와 신녀의 의지를 잇고 있다.”
“…그랬군.”
걸선은 그러려니 하고 수긍하는 기색이었지만 이번에는 뜻밖에도 이광이 흠칫 놀라는 기색이었다.
“……?!”
전혀 예상도 못한 이야기였다는 반응이었다.
잠시 후 걸선이 말했다.
“진공가향 또한 인류를 소멸로서 구원하는 또 다른 방법이긴 하지…. 그 방법 자체에 호오는 없으나 우리는 주군 창힐 님의 명에 따라 백련교를 치러 참전했었다. 하지만 정말로 창힐 님이 소멸하셨고 네 말이 사실이라면…. 그 진공가향이라는 방법에 따라볼까 한다.”
나는 걸선의 말에 신경질을 냈다.
“뭘 니 맘대로 단정짓고 그래? 난 너희 팔부신중이 싫어. 너희를 부하로 받아준다고 얘기한 적도 없다고.”
그러자 옆에서 이광이 내게 말했다.
“사부. 그냥 받아주시오.”
“왜 또 갑자기?”
이광이 가늘게 눈을 뜨며 말했다.
“내가 왜 이렇게 귀찮은 작업을 했겠소? 저 자들이 진심으로 도와주면 앞으로 훨씬 더 귀찮은 일을 모면할 수 있을 게 아니오. 부하는 많아서 나쁠 거 없소.”
“…….”
“내 수련도 훨씬 진심으로 임해줄 거요. 진심인지 아닌지는 내 수련에 큰 차이가 있소.”
왜 그리 열심히 나서나 했는데 결국 자기자신을 위해서였구만!
나는 곱지 못한 눈으로 이광과 걸선을 한 번씩 노려보았지만 문득 과거 제갈사의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전생자의 특권이지. 적이었던 존재를 아군으로 만들 수 있다는 건….]
제갈사 뿐만 아니라 다른 전생동료들도 줄곧 내게 말해왔다.
나는 언젠가 내 적이었던 모든 자들을 용서해야할지도 모른다고.
그렇기에 인도(人道)를 함부로 벗어나서는 안 된다고.
‘정말 이래도 될까?’
나는 이번 생에 소을촌에서 팔부신중들을 내 부하로 만들겠다고 다짐하긴 했다. 다만 내가 생각하던 건 일단 팔부신중을 한차례 다 개박살내서 속풀이를 한 다음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진심으로 팔부신중들을 납득하기보다는 그저 놈들의 업보에 따라 실컷 부려먹으려는 노예처럼 여기는 마음이 강했다. 내 자신의 왕의 자격을 증명하는 용도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대로 걸선 등 팔부신중을 받아들인다면 그렇게는 대할 수 없다. 당연히 다른 동료들처럼 대해줘야 할 것이다. 물론 ‘동료’가 아니라 ‘부하’이니 한 단계 낮게 대하긴 하겠지만.
가능할까?
다른 이들과 달리 아예 수천 년 전부터 인류사의 악역으로 암약해왔던 마왕들을?
언제 뒤통수칠지 모르는 저런 놈들을?
나는 있는 힘껏 고민해 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걸선에게 말했다.
“배신하지 않고 내 말에 따른다고 맹세한다면 생각해 보마.”
어차피 언젠가는 해야 하는 일이었고 다짐도 했다.
더 이상 찌질거리며 미루느니 그냥 해버리고 나서 후회하는 게 나으리라.
“다른 팔부신중도 구해줄 수 있겠나?”
“…개짓거리를 안 한다면.”
“좋다.”
걸선, 팔부신중 건달파가 본체로 다시 화했다. 그리고는 내게 정면으로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쿵
[나 팔부신중 건달파, 내 이름을 걸고 그대 백웅에게 충성을 바치리라!]
“그래.”
[새롭게 인간을 구할 수 있는 길이 진공가향이라면 그 길을 따라가 보겠다!]
“…….”
나는 무릎을 꿇은 건달파를 보자 복잡한 심경이 되었다.
‘결국 해 버렸다….’
30번째의 삶에서 최초로 팔부신중을 부하로 만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