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검신-1346화 (1,343/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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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아군이라고?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황당해서 말했다.

“야 이 미친놈아! 너같으면 그 말을 믿겠냐?!”

내 반응에 헤르메스는 여유롭게 말했다.

“어차피 믿든 말든 내가 너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라는 것만 증명하면 되는 일이 아닌가? 신뢰까진 바라지도 않는다.”

“…그래서 어디갔는지 신경도 안 쓰고 있었던 야차놈을 여기서 소환해서 없앤 걸로 내게 빚을 지웠다고 말할 셈이냐?”

나는 신경질적으로 말을 이었다.

“웃기지 마라. 야차 없앴다고 내가 고마워할 줄 알아? 개수작 부리지 말고 꺼져!”

“후후후…. 머리가 좋지 않으니 내가 방금 보여준 걸 잘못 이해해버렸군.”

“뭐 씨발!”

“네 말대로다. 팔부신중을 없앤 것 정도로 전생자에게 빚을 지울 수 있다고 생각하면 마법의 신 자리를 내놔야지. 내 진짜 의도는 바로 소환했다는 사실 그 자체이다.”

“엉? 그게 뭔 소리야.”

“정말 모르겠나…?”

헤르메스가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마치 약 올리는 듯 말하자 나는 열받는 걸 느꼈지만 동시에 알쏭달쏭한 기분이 들었다. 저 놈이 이유 없이 저러는 건 아닐 테고 뭔가 이유가 있으리라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는 잠시동안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말했다.

“모르겠는데.”

“…….”

뭔가 답답해 죽을 것 같은 표정을 짓던 헤르메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백웅, 너는 나일라토프의 손에 이끌려 강제로 어딘지 모를 외우주로 갔지. 그런데 야차 또한 외우주로 갔다. 너는 야차 일행의 행선지가 어딘지 알고있었느냐?”

“…모르지. 그걸 어떻게 알아.”

애초에 팔부신중을 이 세상에서 추방시키려고 세워놓은 계획이라서 어디로 추방할지 같은걸 생각해둘 리가 없는 것이다. 내가 퉁명스럽게 반문하자 헤르메스가 씨익 웃었다.

“그렇다. 어딘지도 모를 외우주로 가 버린 야차라고 할 지라도, 나와 [계약]을 맺었다면 나는 이 자리에 소환할 수 있다는 말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했나?”

“……?”

“즉, 마법의 신인 나는 외우주에서 외우주로 계약맺은 자를 소환할 수 있다. 충분히 널 도와줄 수 있을만한 능력이라고 생각하는데.”

자부심있게 말하던 헤르메스가 묘한 말투로 말했다.

“아주 편리하게 써먹을 수 있을 말들이지. 죽어도 양심의 가책도 없고.”

“……?”

“아무튼 잘 생각해봐라. 이 능력이 무슨 뜻인지.”

“아…!!”

그제서야 나는 헤르메스의 말이 무슨 뜻인지를 깨닫고는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러고 보니 그렇네!’

야차를 없앴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외우주로 가 버린 야차를 이 공간에 소환했다는 것!

그것은 엄청난 장벽이 가로막고 있는 외우주의 제약을 뚫고 타인을 소환가능하다는 말! 헤르메스의 말대로 놈의 능력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엄청난 이득을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아서 헤르메스에게 말했다.

“그, 그건 그렇다 치지. 그럼 네 녀석은 지금까지 계속 목갑에 있었단 말이냐? 그리고 왜 성좌의 가호를 받는 이제서야 내 앞에 나타난 거지? 그 안에 숨어서 날 감시하고 있었냐!”

일단 능력은 확인했으니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해야 했다. 내 질문에 헤르메스는 금화더미에 앉은 채 느긋이 대꾸했다.

“나는 때가 올 때까지는 그냥 기다리기로 했기 때문에 이 세상에 무수한 [눈]을 뿌려놓았을 뿐이야. 그리고 때가 아니라고 판단되면 그냥 죽기로 했었던 거지.”

“…뭐? 좀 알아듣게 설명을 해.”

“그러지. 쉽게 말하자면 바로 이게 나의 [눈]이다.”

헤르메스의 한쪽 손에는 어느 새 목갑이 들려 있었다. 아마도 놈이 마법으로 만들어낸 듯한 목갑을 잠시 달각거리던 헤르메스는 희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는 계속해서 마도구를 생산해서 세상에 뿌려두었지. 출처가 불분명한 신화 속의 마도구 중 상당수는 내가 만든 것이다. 그리고 이 마도구들은 모두 내가 원할 때 사용자의 정보를 제공해주도록 되어있었다.”

“……!!”

“이 목갑도 그 [눈] 중 하나였지. 그리고 이 세상에 뿌려놓은 [눈]이 모은 정보가 황제 공손헌원의 봉인을 알려주더군. 그때부터는 내가 나설 차례라고 생각했다.”

헤르메스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그래…. 전생자를 찾아야 했지. 그리고 [눈]을 하나하나 뒤지다보니 전생자에 가장 가까워보이는 게 바로 너였고 그때부터 너를 지켜보고 있었던 거다. 물론 지켜보는 동안은 마도구에 빙의해야 하니 다중차원을 만들어서 숨어있었고.”

나는 헤르메스의 말을 이해하려고 무척 애를 썼다. 그리고 한참 머리를 굴리다가 겨우 이해하고는 말했다.

“…그러니까 날 감시한 거 맞네! 이 새끼야, 왜 전생자를 찾은 거냐? 날 이용해먹으려고 그런 거잖아!”

틀림없다.

저 새끼는 마도구 목갑에 자기 시야를 연결해서 관찰하다가 어어하는 사이에 나랑 같이 외우주로 딸려온 것이다!

“이용이라니 듣기 섭섭하군. 방금 말했던대로 나는 충분히 네게 도움을 줄 능력이 있으니 너와 상부상조하고싶었을 뿐이다.”

“씨발, 개같은 소리하지 말고 꺼….”

“너에게든 나에게든 기회는 황제 공손헌원이 봉인된 이번 삶 뿐이니까 말이다.”

“…….”

나는 눈 앞에 있는 놈이 과거의 제갈부같은 소리를 하자 역정을 내려 했지만 놈이 갑작스럽게 한 말에 멈칫하고 말았다. 그냥 넘기기에는 너무 의미심장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내가 경계하는 눈빛으로 헤르메스를 쳐다보자 그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뭘 그리 놀라지? 나 또한 불멸자(不滅者)이며 신격…. 황제 공손헌원의 능력이 인과율계산이란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그 능력을 이용해서 승천에 도전하고 있다는 것도 짐작했었지. 너희 중원의 인간들이 황하에 문명을 만들기 전부터 알고 있었던 일이다.”

“…….”

“나는 알고 있었다. 전생자의 손에 흉신과 황제 중 하나가 쓰러진다면 무조건 황제가 먼저일 거라는 걸. 왜냐하면 반대의 경우는 있을 수가 없거든.”

아리송한 이야기를 하던 헤르메스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내 예상대로 황제가 봉인되었지…. 당연히 내 입장에선 봉인된 후에 나설 수밖에 없지 않겠나? 황제의 인과율계산능력이 존재하는 동안 내가 나서게 되면 무조건 수를 읽혀서 전생자와 함께 쌈싸먹힐 가능성이 너무 높으니까.”

인과율 계산능력이 뭔지 무척 잘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나는 헤르메스를 경계하는 눈으로 쳐다보다가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목갑을 쓰는 순간 네놈에게 모든 정보가 읽히는 거였단 말이냐!”

“목갑은 [눈] 중 하나에 불과해. 정확히는 내 본체가 중대한 이변을 감지하고 일부러 [눈]의 정보를 동시에 회수할 때나 혹은 [조건]을 충족시켰을 때 뿐이겠지. 이번에는 내가 선지자를 통해서 정보를 구매했기 때문에 황제의 봉인을 알아챘다.”

“어?!”

나는 깜짝 놀랐다.

“네놈도 선지자한테서 정보를 샀다고?!”

“그럼 왜 못 사겠나? 그는 마도왕이면서 우주적인 정보상이다. 나도 신이니까 그에게서 정보를 구매할 자격이 있지.”

“…….”

“황제의 봉인은 꽤 비싼 정보였어.”

회상하듯 중얼거린 헤르메스는 히죽히죽거렸다.

“흐흐…. 뭐, 정보를 얻고나서 위기의식을 느껴서 [눈]을 인식한 후에는 목갑으로 너를 감시했다는 걸 인정하지.”

“이 새끼가!”

“모르긴 해도 네가 전생하는 동안 내가 네 존재를 알아차린 적도 분명 있긴 했을 것이다. 하지만 황제 때문에 나서지 못하고 죽어지냈다고 이해하면 된다.”

“…씨발, 알게 뭐냐고. 그래서 이젠 어쩌자는 거냐?”

“어쩌자니 뭘?”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외우주를 넘어서 소환하는 능력을 지금 어떻게 사용해야할지 감도 안 잡히거든? 너같이 수상한 놈과 손을 잡아서 이용당하느니 그냥 나일라토프의 도움을 받아서 원래 세계로 되돌아가겠어!”

평소와 달리 감이 잘 오지 않는다. 이놈을 어떻게 대해야할지 전혀 모르겠으니 그 어떠한 교섭에도 응해서는 안 되지 않을까? 이렇게 혼란스러울 때는 몸을 사리는 게 나으리라.

“아하…. 그렇단 말이지….”

헤르메스가 여전히 히죽거리며 말을 이었다.

“너를 원래 세계로 되돌려 보내겠다는 나일라토프의 말을 정말 믿을 수 있긴 한 거냐?”

“뭐?”

“네가 날 의심하고 있더라도 일단 소위 팩트라고 불리는 사실만 이야기해주지.”

스윽

헤르메스는 마치 제갈사처럼 자신의 손을 들어서 하나하나 손가락을 꼽기 시작했다.

“첫째. 나일라토프가 본인 입으로 밝힌 목적은 바로 윤회의 도정으로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게 불가능해졌다는 걸 동시에 알아차렸지.”

“…….”

“둘째. 나일라토프는 네게 세계수의 핵을 줘서 지능을 높여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핵이 아닌 열매, 선악과를 어떻게 할지는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아니 그거야 지가 알아서 하겠지….”

“셋째. 나일라토프는 주시자를 피해다니는 입장이다.”

이어진 헤르메스의 말은 잠시 내 마음을 뒤흔들었다.

“너를 다시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는 순간 주시자의 이목에 걸릴 수밖에 없지 않나? 그런데도 넌 지능을 올려준다는 이야기에 혹해서 그걸 자세히 따져본 적이 없지.”

“……!!”

“하나하나는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종합해보면 무척 의심스러운 이야기야. 특히 첫 번째가 신경 쓰이지 않나?”

“뭐, 뭐가 신경 쓰인단 말이냐.”

“나일라토프는 이미 네 말 때문에 ‘윤회의 도정으로 간다’는 인생최대의 목적이 꺾여버렸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을 해 봐라. 만일 네가 인생최대의 목적이 꺾였을 경우 얌전히 남이랑 했던 약속을 따를지, 아니면 어떻게든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다른 방법을 강구할지.”

“…….”

“너 같아도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겠지? 그런데 이게 웬걸, 지금 나일라토프의 손에는 전생자라고 하는 사상최강의 패가 손에 들어와 있는 상태가 아닌가.”

헤르메스가 지팡이로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너는 지금 위험한 상태다. 매우.”

나는 헤르메스의 말을 듣고 있자니 마치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말 하나하나가 그다지 근거도 없는 협잡에 불과하지만 어쩐지 듣고 있는 동안 의심이 싹트는 게 당연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과거 제갈사와 마주했을 때 이런 느낌을 받았었는데 이놈은 한층 사이(邪異)하며 인외(人外)의 존재라는 느낌이 더 강하게 느껴졌다.

‘제길…. 정신차리자!’

나는 멍하니 있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는 말했다.

“야! 그게 사실이라 치더라도 너도 나일라토프 못지않게 수상한 새끼야! 니가 그걸 나한테 알려줘서 얻는게 뭐냐고.”

“후후…. 너와 상부상조라는 명목으로 이용하려는건 부정하지 않겠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원래 세계로 돌아갔을때 진행되어야 할 일이지.”

헤르메스가 마뜩찮은 얼굴로 자신의 턱을 괴며 중얼거렸다.

“…지금은 정말 위험하단 말이다. 이대로라면 너는 물론이고 나도 외통수에 걸릴 게 뻔하다. 그래서 성좌의 가호가 걸렸을 때 더 숨어버릴 수도 있었는데 일부러 나온 것이다. 나도 너의 도움을 받아야 귀환할 수 있거든.”

나는 못미더운 목소리로 캐물었다.

“위험하다고? 나일라토프가 날 죽일 거란 말이냐?”

“전생자면서 왜 그리 상상력이 빈약하지? 이 세상에는 죽느니만 못한 일이 너무나 많고, 나일라토프 정도면 그런 방법을 수만 가지는 실천할 수 있는 존재지. 또한 놈의 전함 가이아라면 전생자 봉인을 시도할 수도 있어.”

“…….”

“너는 머리가 나쁜 것 같으니 지금 그냥 확실히 말해두지. 나는 너와 동맹 겸 협력을 맺고 싶고, 그걸 위해서라면 네가 원래 세계로 되돌아가는 일에 협력을 아끼지 않겠다.”

“씨발, 누가 동맹한대?”

“잘 들어.”

헤르메스의 눈에 강렬한 사기(邪氣)가 응축되는 게 보였다. 동시에 강대한 신력이 그의 몸에서 흐르기 시작했는데, 그 기세는 과거 시몬 마구스에게서 느껴졌던 것보다 훨씬 강력했기에 나는 나도 모르게 움찔하고 말았다.

‘강하다…!!’

마법의 신이라는 게 결코 허명이 아닌 것 같았다. 내가 잠시 긴장했을 때 헤르메스가 눈에서 신광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아무리 세피로트의 수험자이자 마법의 신인 나라도 나일라토프가 마음먹고 수를 쓰면 막아낼 자신이 없다. 네가 사대신기를 쓰더라도 나일라토프라면 발동하기도 전에 무효화시키거나 병신 짓을 하게 만들 수 있지. 지금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지 감이 안 오는 모양인데….”

헤르메스의 이어진 말에 나는 황당함을 느꼈다.

“나일라토프가 너희 세상에 재앙으로서 강림했다면 황제와 흉신조차도 그를 경시할 수 없었을 거다. 그런 놈이 지금 너를 노리는 것이다.”

“……!!”

그 정도라고?!

내가 도저히 진위를 판별할 수 없어서 굳어있자 헤르메스가 한숨을 쉬었다.

“후우, 전생자. 네가 신뢰를 운운하니 그놈의 신뢰를 얻기 위해 하나 말해주지. 나 또한 외우주를 넘어서 온 존재다.”

“…뭐라고?! 정말이냐?”

“그렇다. 인간의 시간으론 아주 먼 옛날의 일…. 다만 어디까지나 [정식]으로 왔다. 무척 어려운 방법이긴 했지만 어찌되었든 내가 너희의 세상에 체류하며 영향력을 끼치는 것은 절대 삿된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헤르메스가 마뜩찮은 얼굴로 말했다.

“그러나 나일라토프는 그 모든 걸 무시하고 직접 윤회의 도정을 넘어다니며 여행하고 있다. 그것은 수만 년 이상 사법(邪法)을 연마하여 극에 다다른 나조차도 엄두를 낼 수 없는 일.”

“…….”

“그는 정말 무서운 존재다. 너는 이걸 알아둬야할 것이다.”

“…그렇다고 치자고. 하지만 나일라토프가 딴맘을 먹고 있다는게 내가 너를 믿어도 될 이유는 될 수 없어.”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헤르메스가 훗하고 웃었다.

“생각보다 심지가 굳은 자로군. 좋아…. 그렇다면 나 또한 비장의 패를 공개하는 수밖에 없나.”

“비장의 패?”

우우웅

잠시 후 헤르메스가 들고 있던 지팡이에서 은빛이 흐르기 시작하더니 지팡이의 수정구에서 강렬한 빛이 태양처럼 빛나기 시작했다. 눈이 부실 정도로 번쩍이던 수정구는 잠시 후 빛을 멈추었고, 헤르메스가 내 쪽으로 지팡이의 수정구를 갖다대며 말했다.

“보아라.”

“뭘 보라는… 헉!”

나는 수정구 안을 들여다보는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내가 할 말을 잊자 헤르메스가 말했다.

“아직은 간섭할 수 없지만 들여다보는 건 세피로트의 힘으로 가능하지.”

틀림없다.

수정구 안에 보이는 것은 소을촌!

그것도 소을촌 사람들이 생생하게 무공수련을 하거나 일하거나 잠자는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과거의 촌장이 하품을 하면서 일하다 말고 엎드려있는 게 생생하게 보였다.

“…말도 안 돼. 네놈이 마법으로 환영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야. 여긴 외우주라고.”

“후후. 그 외우주를 마법의 힘으로 넘은 게 바로 나다.”

헤르메스는 음충맞은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의심하는 것 같군. 그렇다면 한 수 보여주는 수밖에.”

헤르메스가 자신의 지팡이를 지반 위에 흔들리지 않게 박아놓은 후 자신의 양 손을 넓게 벌리고는 각각의 손에 기를 모았다. 잠시 후 헤르메스의 왼손에는 흑색 기운이, 오른손에는 백색 기운이 맴돌기 시작했고 헤르메스가 중얼거렸다.

“백웅. 동양에서 음양(陰陽)이라 표현하는 개념은 사실 세피로트에도 존재한다. 태호 복희가 태초에 만들어낸 개념이지만 우리의 세계에도 정반합(正反合)이 존재했으며 단지 표현법이 달랐을 뿐이지. 나는 세계를 이동한 후 마법에 그 이치를 접목하여 흑마법(黑魔法)과 백마법(白魔法)으로 분화시켜서 인간들에게 전수하였다.”

“…….”

“내 제자인 시몬 마구스도 모든 마법을 전수받은 후 그 원리를 직접 인간에게 적용시켜 탈혼(奪魂)능력을 얻길 원했다. 그 결과 생겨난 게 바로 너도 알고 있을 이혼대법(移魂大法)이다.”

나는 그 말에 헤르메스를 쳐다보며 말했다.

“네가 따지자면 내 사조(師祖)라는 소리를 하는 건가?”

놈이 말하는 걸로 봐서는 십중팔구 내가 이혼대법을 익혔다는 걸 알고 있을 듯 했다.

“후후후. 그랬으면 좋겠지만 이혼대법은 내가 지닌 세피로트와 완전히 계통이 달라져버린 주술이다. 이단아 중의 이단아. 아무리 마법의 신인 나라고 해도 이혼대법을 시몬마구스나 그 제자보다 잘 쓸 순 없어. 하지만 근원적인 원리를 알고 있다면….”

헤르메스의 양손에 깃들어있던 흑과 백의 기운이 서서히 수정구로 빨려들어가더니 합쳐져서 공기중에 왜곡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헤르메스의 눈에 한없는 어둠이 깃드는 게 눈에 띄였다.

“이혼대법이든 세피로트든 극에 도달하면 결국 하나의 길이 되는 법.”

키잉!

요란한 진동소리와 함께 왜곡이 일순간 태극(太極)과 비슷해보이는 모양을 만들었다. 그리고 수정구가 점차 커지더니 헤르메스가 그 수정구 안으로 손을 쑥하고 집어넣었고, 집어넣은 손은 마치 소을촌에 존재하는 것처럼 그대로 구현화되기 시작했다.

[으아악.]

[하늘에서 커다란 손이….]

헤르메스의 손은 소을촌 사람들에게 재앙처럼 인식되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하늘에 대뜸 커다란 손이 나타나는 걸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잠시 후 헤르메스가 자신의 손을 수정구에서 빼내고는 말했다.

“세피로트를 다룰 수 있는 자는 클리포트도 다룰 수 있다. 혼백(魂魄)을 조종하듯 생명의 나무를 이용하여 외우주 너머의 세계까지 파동을 미칠 수가 있지. 적어도 5개 이상의 세피라를 극한으로 터득해야 할 테지만.”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헤르메스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후후후…. 어차피 나중에 제갈사를 찾아서 물어볼 생각이 아니었나? 제갈사라면 내가 지금 한 게 어떤 수준의 마법인지 알아채 줄 거다.”

“…….”

이놈은 제갈사를 알고 있다.

그것도 내 이혼대법 스승이라는 사실도.

‘그리고 아마… 지금 내가 일부러 제갈사를 안 찾아가고 있는 이유도 알고 있다!’

여기까지 생각하니 괜히 식은땀이 났다. 눈앞에 있는 놈이 경망스럽게 떠벌거리고 있지만 결코 만만한 놈이 아니라는 게 실감이 난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다.”

헤르메스가 나를 주시했다.

“백웅이여. 나는 마법의 신이자 세피로트의 주인인 헤르메스. 그런 내 힘으로 정식으로 [길]을 열어서 되돌아가는 게 최선이다. 주시자님께 소멸될 걱정이 없는 안전한 방법이란 말이다. 그러면 굳이 나일라토프에 의존하지 않아도 원래 세계로 되돌아갈 수 있다.”

“…….”

이윽고 그가 결론을 이야기했다.

“세계수의 핵을 내게 가져와라. 나일라토프가 세계수를 찾아낼 때까지는 의심하지 않는 척 하라.”

“뭣….”

“내 지팡이를 여기 놔두지. 목갑은 평소처럼 쓰고, 나를 부르고 싶을 때만 수정구를 건드리면 된다.”

스스스스

지팡이를 그대로 꽂아둔 채 서서히 헤르메스의 모습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헤르메스가 사라지기 전에 마지막 말을 남겼다.

“전생자여. 나의 교활한 음모도 생존을 도모한 후에나 꾸밀 수 있는 것…. 부디 현명한 판단을 해라.”

파앗!!

다음 순간, 나는 목갑에서 튀어나와서 현실세계에 되돌아와 있었다.

머리가 깨질듯이 아프다.

“음….”

잠시 관자놀이를 지끈거리며 누르던 나는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았고, 여기가 어디인지를 알아차렸다.

“서문공백 사령관. 내가 천계로 간지 시간이 얼마나 지났소?”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곳인 서문공백 사령관의 집무실에 와 있었다. 아까 홍길동이 보패를 이용해서 나를 천계에 보냈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기억된 장소에 온 모양이었다. 그러자 서문공백 사령관이 당황하며 말했다.

“십 초도 지나지 않았소….”

“그런가.”

천계뿐만 아니라 목갑 안쪽까지 왔다갔다하면서 차원왕복을 했다. 당연히 시간차는 날 수밖에 없으리라.

‘머릿속이 복잡하군. 제길….’

순식간에 워낙 많은 일을 겪었으므로 혼란스럽다. 그러나 이런 일도 전생하면서 일상이었기에, 나는 대충 납득한 후 맞은편에 앉아있던 홍길동에게 시선을 향하며 말했다.

“대라신선 홍길동. 나는 천계와 이야기가 다 되었다.”

“다행이구려. 그럼 이만 나는 가 보겠소.”

“배웅하지 않겠다.”

“그럼.”

후웅

홍길동이 즉시 축지법을 써서 장내에서 사라졌다. 나는 놈이 사라지자 점차 두통이 사라지는 걸 느꼈고, 약간 맥이 풀린 눈으로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내 눈치를 살피던 서문공백이 말했다.

“백웅. 괜찮소?”

“서문공백. 당신은… 내가 갑자기 이 세상에서 사라져도 나를 원망하지 않겠소?”

내 말에 서문공백은 잠시 눈을 꿈벅거리다가 말했다.

“왜 원망한다는 말이오? 그대는 인류를 위하여 엄청난 일을 해주었거늘.”

쏴아아….

어느 새 먹구름이 끼고 서재의 창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다.

나는 의자에 몸을 뉘인 채 빗방울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실 외계인 토벌은 나일라토프가 부탁해서 한 것뿐이오. 딱히 대단한 정의감으로 행한 일도 아니었소. 그리고 나는 내 용건이 끝나면 곧장 내 세계로 되돌아갈 텐데, 사실 어쩌면 내 힘으로 이 세상을 완전히 구해줄 수도 있소. 그러나 할 수 있는데도 아마 끝까지 하진 않을 거요.”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삼제와 협력해서 황제를 칼침놓는 정도밖에 없다.

황제까지 행동불능으로 만들고 나면 인류에게 어느 정도 숨통이 트일 거라고 생각해서 이렇게 무모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지만 - 사실 마음만 먹으면 그 이상도 할 수 있으리라.

“…….”

“내가 끝까지 도와주지 않아서 인류가 멸망할 상황이 왔을 때 나를 원망하지 않겠냔 말이오.”

이 세상에 간섭하면서 줄곧 들었던 생각.

과연 내가 외우주에 이 정도로 간섭해도 괜찮은 것인가?

신이란 존재들은 인과율 때문에 간섭하고 싶어도 못하는 것 같지만 내가 아무리 간섭하더라도 인과율이 나를 제약하는 건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방종에 가까운 자유였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나는 불안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 불안감에 대한 답을 확인하려면 도움을 받는 당사자에게 질문하는 수밖에 없었다.

내 말을 듣고 한참 생각하던 서문공백이 입을 열었다.

“원망하지 않소. 왜냐하면 그것조차도 우리의 운명일 것이기 때문이오.”

“운명이라….”

“다만, 인류가 이 지경에 이르고 나서 계속해서 생각하는 것이외만... 어쩌면 이 세계의 주인공은 따로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곤 하오.”

뜻밖의 이야기에 나는 어리둥절해서 그를 돌아보았다.

“주인공?”

서문공백이 멋쩍어했다.

“아…. 뭐, 그냥 내 망상일 뿐이오. 당신을 위해서 본가의 역사서적과 온갖 자료를 뒤져보며 든 생각인데, 수많은 고대와 중세의 사건들 속에서 뭔가 계속 삐끗하며 엇나가는 느낌이 들었다오.”

“삐끗이라….”

“잘 될 수도 있었는데 안 되었던 일…. 만일에 그 때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이라는 ‘누군가의’ 후회가 연속되었던 것 같소. 그렇지만 그 후회가 누구의 것인지는 모르겠고….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이야기가 끝나있었기에 우리가 어떤 짓을 해도 결과(結果)는 달라지지 않는 게 아닌가 하는 절망스러운 상상이었소.”

서문공백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냥 우스갯소리로 넘겨주시오. 그저 이 암울한 현실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줄곧 하는 망상에 불과하니.”

“…….”

나는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아니오. 무척 도움이 되었소.”

나는 슥 하고 일어섰다.

“배웅하지 마시오.”

“검마에 대해서 더 알고 싶은 게 있으면 언제든 찾아오시오.”

“물론이오. 단지 오늘은 좀 생각을 정리하고 싶구려.”

“살펴가시오.”

쏴아아…

나는 현관으로 나와서 빗방울을 보며 생각했다.

‘양자택일을 할 때가 온 건가….’

이대로 나일라토프를 믿고 세계수를 채취한 후 그의 도움으로 원래세계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헤르메스라는 의문의 존재가 말하는 대로 세계수의 핵을 얻어서 그놈의 힘으로 되돌아갈 것인가.

문제는 둘 다 수상쩍기 그지없는 놈이며 절대 내 동료가 아니라는 것이다.

도리어 헤르메스 덕에 또 하나의 선택지가 생긴 걸 감사해야할 지경이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이럴 때 혼자가 아니라 다른 동료가 있었으면….

“……!!”

그 순간, 나는 헤르메스가 아까 했던 말이 무슨 의미인지 뒤늦게 알 수 있었다.

“그렇군….”

외우주에서 외우주로 계약맺은 자를 소환할 수 있는 능력.

그것은 원래 세계에서 이 세계로 내 동료를 소환해줄 수도 있다는 뜻이었으리라.

‘하지만 그건 절대 안 돼. 나 혼자서 몸 추스리기도 힘든데 어떻게 동료를 이 험난한 말세의 세계에서 함께 데리고 귀환한다는 말인가?’

도리어 나 혼자 돌아다닐 때는 죽으면 그만인데 동료가 죽을 위기면 훨씬 더 힘들어질 게 뻔하다. 나는 좋은 생각인 줄 알았다가 별로 쓸모가 없는 생각이니 괜히 실망스러워져서 입이 불툭 튀어나왔다.

“쳇. 죽어도 양심의 가책이 안 느껴지는 동료같은 게 있겠….”

…….

어라?

설마 헤르메스가 말한 게 그런 뜻이었나?

나는 순간적으로 아까 내게 놈이 무엇을 조건으로 제시했는지 알아채고는 몸서리를 쳤다.

“씨발…!!”

틀림없다.

팔부신중 소환!

헤르메스의 수정석비 조각을 이식받아서 노예나 다름없게 된 그 마왕들을 여기에 소환해서 부려먹자고 제안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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