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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뭐?
말이 끝나는 순간 옥형이 태을진인을 향해 손을 뻗었고, 태을진인은 대라신선이라서인지 즉시 위험을 느끼고는 보패를 발동시켰다.
구룡신화조!
동시에 구룡신화조에서 여섯 마리의 염룡(炎龍)이 튀어나와 태을진인의 몸을 칭칭 감는 듯 했다. 저 육룡의 방어는 거신족의 선조회귀를 이룬 서문혜조차도 뚫을 수가 없었기에 천계 최강의 방어력을 자랑한다고 할 수 있었다. 완전한 방어태세가 갖춰지자 공격을 하려던 옥형이 멈칫했고, 태을진인이 자신의 보패 방어막 안에서 말했다.
“성좌 옥형이여! 저 자의 말에 꼬드겨지다니…!! 우리가 희생될 필요는 어디에도 없지 않소.”
[…….]
“지금이라도 멈추시오. 우리끼리 싸울 필요는 없소.”
그러자 옥형은 힐끔 내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다시 확인하고싶군. 저 셋을 포함하면 그대는 세계수의 씨앗을 주겠는가?]
“음….”
나는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다시 대선(大仙) 세 명을 보자 괜히 역겨운 기분이 들어서 홧김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알았다.]
옥형은 나와의 대화를 끝낸 후 대선들을 바라보며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수백년 전 구천현녀가 우리를 소환한 후 우리는 선녀의 형태로 천계를 관찰해왔다. 그리고 너희 셋이 그저 종말의 공포에만 사로잡혀 이목이 흐려지고, 권위적으로 변하고, 너희의 권위에 도전하는 신선을 처형하는 걸 보아왔지.]
그 말에 세 명의 대선이 흠칫했다. 옥형이 틀린 말을 한 게 아닌 듯 잠시 쭈뼛거리던 태을진인이 말했다.
“그건 곤륜성의 위계를 잡아 모두의 평안을 추구한 것이었을 뿐이오.”
[아니. 너희는 어느새 대선(大仙)의 고절함과 품위를 잃고 마치 인간의 권력자처럼 타락해버렸다. 천계가 망할때 빼돌렸던 뛰어난 선주(仙酒)를 즐기며 지선(地仙)들에게 술시중을 들게 하지 않았느냐? 의미없이 신선들에게 계급을 부여하여 서로를 감시하게도 만들었고 너희의 권위를 과시하는 연회도 자주 열었다.]
“…….”
[더 이상 너희의 위에 상관(上官)이 없으며 무적의 권력을 손에 넣었다는 실감을 이기지 못했느냐?]
옥형의 말에 태을진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옆에 있던 보현진인(寶賢眞人)이 말했다.
“성좌는 신적인 존재로 별의 의지를 내리는 화신(化神). 그런 당신들에게 인간성이나 윤리기준이 있단 말이오? 당신들이 받은 임무는 그저 천계의 보호일 뿐일텐데 어찌 이리도 오지랖을 넓히시오.”
[너희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구나.]
“무엇을 말이오?”
[구천현녀가 우리 성좌를 소환할 때 한 가지 조건을 걸었다. 우리가 원할 때 언제든 천계를 멸망시켜도 된다는 거였지. 그 정도가 아니면 아무리 구천현녀라도 셋이나 되는 성좌를 직접 인계에 소환할 순 없다.]
“……!!”
[그녀만한 대존재가 내걸기 쉽지 않은 조건이었다. 대신 우리는 그녀를 존중하여 최대한 그녀의 가치관을 따르는 선녀로 화신을 만들었다. 우리가 인간성과 정의를 추구함은 구천현녀의 의지이기도 하노라.]
“헉….”
그 말에 세 명이 동시에 경악한 듯 눈을 크게 떴다. 저 반응을 보면 수백 년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옥형은 눈코입이 없는 무면(無面)의 광인(光人)같은 형태로 날개옷을 나풀거리며 말을 이었다.
[너희 말대로 우리에게 윤리적 기준에 따라 너희를 심판해야할 이유는 없다. 그게 너희의 타락을 목격하고도 가만히 두었던 이유였지. 그러나 바로 오늘, 너희 세 명이 천계의 유지에 불필요하며 도리어 파멸을 부추기는 존재란 걸 확인했으니…. 멸망의 권한을 가진 북두칠성(北斗七星)의 성좌(星座)로서 인과율을 얻었노라.]
인과율을 얻었노라 -
그 울림이 끝나는 순간 옥형의 새하얀 손이 죽 늘어나더니 태을진인의 구룡신화조에 닿였다. 태을진인이 자신있게 외쳤다.
“구룡신화조는 천계 최고의 방어보패! 아무리 성좌라도 이걸….”
퍼억!!
“커… 어억….”
그것이 태을진인의 유언이었다. 옥형의 백옥수(白玉手)가 마치 보패 구룡신화조의 방어막따윈 무시하듯 뚫고 들어가서 단숨에 그의 심장을 뽑아버렸기 때문이었다. 태을진인은 심장을 따이고도 잠시동안 살아서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이윽고 옥형이 다시 한 번 손바닥을 내뻗자 몸이 통째로 뭉개져서 소리소문없이 고기조각이 되고 말았다.
“아, 아니?!”
“비켜라 보현진인!!”
경악하는 보현진인 옆에 있던 연등도인이 재빨리 보패 삽십삼천영롱보탑(三十三天玲瓏寶塔)을 꺼냈다.
위잉
무려 33개나 되는 보패들이 보탑의 형태로 떠올라서 거대한 결계를 만드는 강대한 보패! 게다가 연등도인은 보패에만 의존하지 않는듯 그가 결계에 불어넣는 영기(靈氣) 또한 태을진인의 구룡신화조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아마 세 명의 대선 중에서 연등도인이 가장 강한 건 틀림없으리라.
콰앙
옥형이 뻗어낸 무형의 손이 마치 파리를 잡듯 삼십삼천영롱보탑을 내려치자 연등도인의 입에서 울컥하고 핏물이 흘러내렸다.
빠각
동시에 삼십삼천영롱보탑 중에서 무려 여덟 개나 되는 보탑이 한번에 떨어져내렸고 결계의 일각이 선명하게 무너져내렸다. 그 말은 지금 옥형은 여덟개나 되는 보패의 힘을 상회하는 일격을 가했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옥형은 단숨에 보현진인에게 내상을 입히는 괴력을 보이고도 마뜩찮은 듯 중얼거렸다.
[흠. 너무 살살했나? 신선 따위가 내 공격을 버티다니….]
그러자 옆에 있던 성좌 요광이 말했다.
[연등도인은 광성자를 제외한 십이대선 중에 가장 강한 자. 보통 신선과는 다르다.]
[그래봤자 필멸자. 성좌에 비하면 벌레만도 못하지.]
[그건 그렇지.]
[뭘 그렇게 올려쳐주고 있나? 설마 오랫동안 같이 지내다보니 동정심이라도 들었는가?]
[설마.]
이윽고 성좌 요광과 천권, 두 명의 신적 존재가 서서히 그들의 손을 들어올렸다.
[강한 놈이니 우리가 거들어도 조금은 버텨줄거 아닌가.]
[한 방에 죽이면 재미가 없어서.]
옥형이 이해가 갔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 말이 들려오자 연등도인이 절망에 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잠시 후, 무형의 손이 주욱 늘어나서 그의 삼십삼천영롱보탑을 깨부수기 시작하자 연등도인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아무리 저항해도 그는 세 명의 성좌를 상대로 반격조차 할 수 없어 보였다.
콰과광!!
“크허억….”
마지막 보탑이 떨어져내리는 순간 연등도인은 쿨럭 하고 칠공에서 피를 꿀럭거리며 쏟아내며 쓰러졌다. 옆에 있던 보현진인은 재빨리 깃발형태의 보패를 휘둘러서 꺼지듯이 사라졌는데 아마도 도주용 보패를 쓰려는 기회를 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러자 옥형이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대신선이란 자가 이토록 추할 줄이야.]
슈욱
푸콱!
옥형의 손이 잠시 사라졌다 싶자 짧은 소음과 함께 어느새 그 손에는 또 하나의 심장이 들려 있었다. 그리고 머나먼 곳에서 외마디 비명소리가 은은하게 울려퍼졌는데 보나마나 그 비명소리의 주인은 보현진인일 게 분명했다.
연등도인이 탈력해서 칠공에서 피를 흘리며 무릎을 꿇고 있자 성좌 요광이 그에게 다가가더니 냉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일 열심히 싸운 놈이니 상처하나없이 넘겨주고싶군.]
요광의 손이 텁 하고 연등도인의 머리 위에 얹혀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마치 머리통을 뽑듯 쑥 하고 뽑아내는 동작을 취하자, 연등도인은 끔찍한 비명을 질렀다.
“끄아아아아아악!!”
둥실
요광의 손에는 연등도인의 영혼이 달랑거리며 붙어 있었다. 나는 그 광경을 보자 깜짝 놀랐다.
‘산 채로 대신선의 영혼을 뽑아내다니?!’
이혼대법이 극성에 이르면 산 채로 인간의 영혼을 뽑아내는 기술을 쓸 수 있긴 하다. 그러나 이혼대법도 한계가 있어서 강력한 정신체나 영체를 상대로 함부로 쓸 수가 없으며 십이대선같은 존재는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그런데 마치 장난감 다루듯이 영혼을 뽑아내는 게 가능하다니!
주물럭 주물럭
요광은 뽑아낸 연등도인의 영혼이 너무 큰 게 마음에 안 드는지 힘을 주어 꾸깃거리며
압축시키기 시작했다.
[끄아아악. 아아아악.]
그 와중에도 연등도인의 영혼은 끔찍한 비명을 지르는 걸로 봐서 지옥의 고통이 연속되는 게 틀림없었다. 이윽고 연등도인의 영혼이 딱 한 손에 들어올만한 공처럼 변하자 만족스럽다는 듯 요광이 중얼거렸다.
[신선인 주제에 연화체(蓮花體)에 들어가서 인간같은 행동을 하는 게 마음에 안 들었지. 수백 년 동안 별려왔던 걸 해냈구나.]
[재밌는 놀이군. 나도 해 볼까?]
[해 봐. 어차피 넘겨주기 좋게 영혼을 가공해주는 게 낫겠지.]
[그럼….]
꾸드드득 꾸드득
“…….”
나는 세 명의 성좌가 대라신선 셋의 영혼을 공처럼 갖고놀며 압축시키는 기괴한 광경을 보며 멍해져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저 자들은 실로 무자비했으며 상대를 벌레처럼 다루는데 익숙해 보였다.
‘저게 바로 성좌…!!’
인간과 유사하게 행동하지만 인간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신적 존재!
머나먼 우주에서 내려온 강대한 의지!
‘설마 십이대선을 애처럼 다룰 줄이야.’
성좌를 상대하느니 차라리 마왕과 싸우는 게 낫다던 제갈사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이제야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잠시 후 [작업]이 끝난 세 명의 성좌가 내게 세 개의 공을 내밀며 말했다.
[자. 원하는대로 했다. 이제 사도 그대도 약속을 지키기 바란다.]
“…으음.”
[십이대선의 영혼이니 전욱도 꽤 만족할 것이다.]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공을 쳐다보았다. 아무리 혐오스러운 놈들이라지만 산 채로 영혼이 압축당해서 공이 되어버린 모습을 보자 불쌍한 마음이 안 들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우거지상을 하고 있다가 어쩔 수 없이 세 개의 공을 받아들며 말했다.
“알았소. 최대한 이걸로 전욱을 설득해 보겠소. 더 이상의 희생은 필요없소.”
그러자 옥형이 놀랍다는 듯 말했다.
[백 명을 채우지 않아도 되는가? 정말로 그대는 언변만으로 북방의 흉폭한 악몽인 전욱을 대할 수 있다는 말인가?]
어째 말하는 걸로 보아서는 성좌에게 있어서도 전욱은 상당한 두려움의 대상으로 보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차피 전욱이 원하는 건 힘을 강화시킬만한 재료일 테니 말이오.”
[오오…. 욕심이 없구나.]
욕심이 없다는 말에 나는 갑자기 욕심이 생기는 걸 느꼈다.
‘어? 그러고 보니 이거 기회 아닌가?’
그래서 나는 재빨리 말을 바꾸었다.
“…그래서 말인데, 신선의 영혼 대신에 전욱에게 줄만한 천계의 보물을 좀 가져갈 필요가 있을 것 같소. 그래야 내가 전욱을 설득하고 천계의 안위를 보존하기 쉽소. 어차피 그런 보물들에게 세계수의 씨앗만큼의 가치는 없을 것 아니오?”
하는 김에 곤륜성에 남아있는 천계보패나 보물을 싹 다 가져가면 좋겠다!
[일리 있는 말이로구나.]
슈슈슉
잠시 후 옥형, 요광, 천권 셋의 모습이 성좌의 화신에서 선녀의 형태로 돌아왔다. 옥형은 방금 전과는 딴판으로 옥구슬 구르는 듯한 가녀린 선녀의 목소리로 말했다.
“백웅 님. 따라오시지요. 곤륜성의 보물고로 안내하겠습니다.”
나는 세 명을 따라서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의아해서 물었다.
“갑자기 왜 다시 선녀로 되돌아간 것이오?”
“인과율이 소모되었기 때문이지요.”
“…무슨 말이오? 성좌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건 인과율을 얻었을 때뿐이란 말씀이오?”
내가 의아해서 반문하자 옥형이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구천현녀에게 [수호]의 인과율을 얻었으니 이 곤륜성 내에서 언제든 방금 전처럼 성좌의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힘을 발휘할수록 이 세계에 체류할 수 있는 시간은 줄어들지요. 그래서 방금 전에는 벌레를 응징하는 인과율을 대신 소모했던 것입니다.”
“음….”
“그들을 응징한 후에는 성좌의 모습을 하고 있을 필요가 없으니 원래대로 돌아온 것뿐이지요.”
그런 원리인가?
나는 성좌가 인과율을 소모한다는 개념을 처음 접했기에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성좌라는 존재를 만난 것도 전생하면서 이번이 처음이야. 조금만 더 질문해 볼까?’
내가 궁금한 걸 물어보려고 다시 입을 열 때였다.
끼기기긱….
어느 새 눈앞에는 보물고가 있었고 옥형이 손짓하자 요광과 천권이 거대한 보물고의 문을 둘이서 한 짝씩 맡아서 여는 중이었다. 나는 깜짝 놀라서 말했다.
“엥? 어느새….”
“걸음에 공간을 압축했을 뿐입니다. 그러면 길어도 오십 걸음이면 올 수 있으니 시간낭비할 필요가 없지요.”
“이건 술법같은 것이오?”
“성좌의 권능입니다.”
“하지만 신력이 느껴지지 않던데….”
“모든 권능의 발동에 신력이 필요한 건 아닙니다. 우리 성좌 또한 [지배자]와 마찬가지로 혼돈에서 태어난 자들이니 혼돈에 속한 흐름을 다루는 건 숨쉬듯 할 수 있지요. 특히 시간이 아니라 공간 쯤이면 흔적도 안 남습니다.”
“…….”
뭐, 뭐지…. 방금 뭔가 무서운 얘기를 들은 것 같은데….
내가 아연해 있을 때 휘황찬란한 보패의 빛이 내 눈에 들어왔다. 황금과 은빛이 겹쳐서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천계의 지도부는 방금 전 그 셋을 징벌함으로써 전멸했습니다. 게다가 어차피 종말이 코앞인데 이깟게 무슨 쓸모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어진 옥형의 말에 나는 제정신이 돌아왔다.
“전욱을 설득할 수만 있다면 다 가져가십시오.”
“……!!”
천계 최후의 보물!
그 모든 걸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내게 오다니!
나는 정신없이 앞으로 뛰어들어서 내 목갑에 다 집어넣으려 했지만 순간 멈칫하고 말았다.
‘마… 맞다.’
목갑에도 한계는 있다. 예전에 [치우의 팔]을 집어넣었을 때 사정없이 터져나가지 않았던가? 그 때 너무 당황했던 기억이 났기에 나는 신중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칠요같은 보물도 많이 넣어두긴 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상식적인 숫자였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보패와 보물들은 말 그대로 수백 수천의 단위였기에 저걸 다 넣었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야 최대한 목갑이 안 터지게 많이 담아갈 수 있지?
‘음…. 성좌… 신적 존재….’
어찌되었든 성좌도 [옛 지배자]에 아래 위계에 준하는 신적 존재들이다.
신의 반열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런 방법도 가능하지 않을까?
나는 고민하다가 옥형에게 말했다.
“세 분께 부탁이 있소.”
“무엇입니까?”
나는 목갑을 품에서 꺼내어 세 명의 성좌에게 내밀며 말했다.
“이 목갑에 최대한 많이 담을 수 있는 성좌의 가호를 내려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