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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내 말에 다들 이해가 안 가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것이 금요의 행방을 찾아내기에 가장 빠르고 직접적인 방법이 바로 소호금천 소환이었는데 굳이 요순을 소환하겠다는 내가 이상해보일수밖에 없으리라.
그래서인지 달기가 사나운 표정을 지었다.
“이유가 뭐냐? 허튼수작이라면 네놈의 팔다리를 찢어놓겠다.”
“팔다리를 찢을 필요는 없어.”
나는 태연하게 달기의 말에 대답을 이어갔다.
“금요의 행방을 더 잘 아는게 요순일 확률이 높은 것 뿐이다.”
“정말이냐? 왜 창조주인 소호금천보다 요순이 더 잘 알 수가 있는거냐?”
“내가 보았던 [미래]의 한 조각이라고 해 두지….”
“…무슨 소리냐?”
달기의 반문에 내 옆에 있던 대조영이 말했다.
“달기여. 백웅은 미래를 볼 수 있는 자. 삼황 복희가 보여준 미래를 바탕으로 이미 칠요의 위치를 예지하여 이만큼이나 모을 수가 있었다.”
대조영의 말에 달기가 흠칫했다.
“미래라고! 설마 [작은 굴레]가 아닌 [큰 굴레]를 봤단 거냐?”
그 말에는 공공이 대답했다.
[아마 그럴 것이다. [작은 굴레]는 무수한 초월자들의 예지가 모여들어 한치앞도 알 수 없는 혼돈이기에 사실상 미래를 읽어봤자 큰 의미가 없다…. 그러나 칠요정도 되는 유물과 그 미래까지 알아냈다면, 백웅을 신뢰해야만 한다.]
“…….”
[그를 의심한다는 건 그에게 미래를 맡긴 복희마저 의심하는 것.]
달기는 대조영과 공공이 나를 옹호하는 말을 하자 깊은 고민에 빠진 듯 했다. 그러더니 말했다.
“과연 복희의 제자는 맞는 것 같구나. 좋아, 한 번 믿어보겠다.”
“훗!”
나는 여유로운 척 웃었지만 속으로는 약간 식은땀이 났다.
‘와…. 대충 속여도 어떻게든 되긴 하는구나!’
이렇게까지 위험천만한 기만을 해야하나 싶기도 했지만 나는 아까부터 쭉 생각했었다. 지금은 반쪽짜리 금요를 얻는다고 소환권을 낭비하기 보다는 나 자신에게 중요한 행동을 해야만 한다고.
나는 옆에 있던 공공에게 말했다.
“공공. 나는 제단에 신력을 주입하겠으니 당신이 제단의 흐름을 읽어내어 제례의식을 주관해 주시오.”
[할 수는 있겠지만 거신족의 신언은 계파가 달라서 좀 어색할 것이다. 그대가 복희에게 수련한 신술(神術)로 하는 게 더욱 확실할 텐데?]
나는 뜨끔해졌지만 태연하게 대꾸했다.
“신술의 사용횟수에는 한계가 있소. 소환된 삼황오제가 어떤 변덕을 일으킬지 모르니 우리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아껴둬야 하오.”
[과연 그렇겠군. 맡겨두어라.]
우오오오 -
잠시 후 공공이 양팔을 벌리고 고대어 주문을 외우면서 천제단에 흐르는 주술의 힘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과연 공공은 고대의 거신족 장로라서 그 자체로 인간의 주술사보다 훨씬 뛰어난 술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초월자의 영역에서 권능을 다루던 자라면 천제단의 제어 정도는 어렵지 않게 해내리라.
치지지직
천제단에 시퍼런 영기가 감돌기 시작했고 신령스러운 기운이 마치 회오리처럼 휘돌기 시작했다. 나는 더더욱 천제단에 손을 대고 순수한 신력 그 자체를 밀어넣었고, 잠시 후 공공이 내게 말했다.
[준비가 다 되었다. 그런데 혹시 요순과 관련있는 유물이 따로 없느냐?]
“유물이라니?”
[방금 전 외계인들이 [옛 지배자]를 불러오려고 차원의 파장을 바꿔버려서 천제단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한다. 그래서 차원 저편에 있는 요순을 확실히 소환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그와 관련있는 유물이 있다면 인과율의 힘으로 확실히 소환할 수 있을텐데.]
“음….”
요순과 관련있는 유물이라?
‘내가 뭘 갖고 있었지….’
나는 지금까지 내가 얻었던 유물들을 머릿속에 쫙 그려보았다. 그리고 요순과 관련있을거라 예상되는 물건을 하나하나 생각해보며 요순에 대한 정보또한 떠올려보았다.
‘요순은 상대에게 기생(寄生)하는 능력을 지닌 마신(魔神). 그리고 여태껏 세상에 관심이 없는 척을 했지만 사실은 천계의 옥황상제로 변신해서 화신을 이용해 천계를 암중에서 조종하고 있었고, 한때 재능이 뛰어난 신공표의 몸을 빼앗으려 한 적이 있다. 내가 그런 요순과 관련 있는 유물을 갖고 있었나?’
그리고 잠시 후 머릿속에 한가지가 떠올랐다.
‘순어구.’
당연히 통신용 보패인 순어구를 쓰면 된다. 요순과 연관된 가장 확실한 보패! 낚싯바늘을 매개체로 만들어진 이 보패는 남궁세가에서 몰래 비전하여 쓰고 있었고 나 또한 그 활용성 때문에 매번 전생할 때마다 남궁세가를 전멸시키고 챙기는 중이었다.
그러나 나는 난처함을 느꼈다.
‘제길. 순어구는…. 망량이랑 무사시가 갖고 있네.’
무사시를 이중첩자로 만들어 십이율주를 염탐하는 작전을 쓰고 있는 중이었기에 지금 순어구 한 쌍은 망량과 무사시가 각각 나누어가진 채 미래의 통신도구처럼 쓰고 있었다. 미처 이런 일이 생길줄은 몰랐기에 지금 외우주에는 갖고오지 못한 상태인 것이다.
하지만 나는 또 하나의 유물을 떠올렸다.
‘…옥황의(玉皇衣)!’
내가 28번째 삶에서 탑의 시련을 통과한 덕에 복희에게서 옥황상제의 권능을 부여받던 그 때 얻었던 옥황상제의 옷! 엄청난 방어력과 순간이동 능력을 갖고있는 최상위 의복보패였다. 옥황상제가 요순의 화신이니 당연히 옥황의는 요순을 확실히 불러낼 수 있는 보패라고 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문제는 28번째 죽음을 맞이하면서 옥황의를 얻었던 것도 없었던 일로 되어버렸다. 심지어 이번 생에 옥황의를 따로 얻었던 적도 없었으니 지금 내 수중에는 없는 상태였다.
‘끙. 옥황의가 없구나…. 그럼 뭘 써야하지?’
전욱을 소환한다면 전욱의 동상을 쓰면 될 것이고 소호를 소환한다면 전국옥새를 쓰면 된다. 그러나 요순을 따로 소환하려 한 적은 없었기에 나는 낭패스러움을 느꼈다.
내가 당황해하고 있자 옆에서 물끄러미 보고 있던 대조영이 말했다.
“백웅이여. 어려워하는 것 같군. 갖고있는 요순의 유물이 없는 것인가?”
“그런 것 같소…. 혹시 당신은 갖고 있소?”
“나도 없네. 세상 모든 곳을 돌아다녔지만 삼황오제의 유물같은 건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게 아니지. 하지만….”
대조영이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어쩐지 자네는 지금 그걸 갖고 있을 것 같은 직감이 드는군. 그런 느낌이야.”
“……?”
나는 그의 말에 황당해서 멍하니 쳐다보다가 반문했다.
“지… 직감? 당신같은 사람도 그런 거에 의존하는 편이오?”
“무슨 소릴 하는건가. 직감이야말로 제왕(帝王)의 소양이라는 걸 모르고 있었는가? 내 능력일세.”
“아니 그게….”
나는 대조영이 농담을 한다고 생각해서 어이없어했지만 그의 눈을 바라보자 무척 진지했다. 그는 진심으로 직감이 중요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대조영이 말했다.
“자랑은 아니지만 환인의 가호를 얻을 때 함께 얻은 능력이 바로 이 제왕의 직감일세. 이 직감은 구체화된 미래같은 건 볼 수 없지만…. 초월적인 수준으로 내가 선택할 길이 옳은지 아닌지를 가끔씩 보여준다네. 나는 이 직감을 이용하여 발해제국을 건국할 때 모든 고난을 헤쳐나왔지.”
“……!! 직감 그 자체가 초능력(超能力)이란 말이오?”
“그렇네. 그리고 역사상 강력한 제왕, 특히 신에게 선택된 자들은 대개 이와 비슷한 능력을 하나씩 갖고 있는 편이었지. 운(運)과 명(命)의 영역에 걸쳐있는 특수한 능력이라고 할까. 이런 종류의 초능력은 술법사나 주술사들은 무슨 수를 써도 손에 넣을 수 없는, 제왕만의 능력일세.”
“…….”
“비슷한 걸로는 악운(惡運)이 있긴 하지. 제왕의 직감보다는 훨씬 써먹기 힘드네만.”
나는 대조영이 말하는 게 붕 뜬 공상처럼 들렸지만 정작 반박은 하지 못했다.
‘나랑 똑같잖아.’
왜냐하면 나 또한 지금까지 ‘전생자의 직감’이라고 나 스스로 이름지어 부르는 직감에 따라서 선택하는 일이 무척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전생자의 직감은 대조영이 말하는 ‘제왕의 직감’과 마찬가지로 성공률이 무척이나 높았다. 단순한 인간의 운빨을 훨씬 넘어선 영역에서 미래를 직관하는 듯한 거대한 시선이 느껴지곤 했던 것이다.
설마 제왕의 직감과 전생자의 직감은 비슷한 것인가?
내가 놀라고 있을 때 대조영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자네는 술법의 신 복희의 제자이니 어딘가 아공간이나 보패에 유물을 잔뜩 보관하고 있겠군. 그 중에 삼황오제와 연관이 있는 건 싸그리 다 꺼내어서 다시 한 번 살펴봄은 어떤가?”
“음…. 알았소.”
나는 곧장 그의 제안대로 목갑에서 삼황오제와 관련있다고 했던 모든 보물을 꺼내보았다.
우르르
내가 꺼낸 보물을 보자 대조영과 공공이 탄성을 질렀다.
“오오!!”
[이렇게나 많은 보물을 갖고있다니…!!]
그리고 뒤에서 쳐다보고 있던 달기가 왠지 호기심과 탐욕이 어린 눈빛이 되었고 뭔가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었다.
“…제, 제법이구나. 본녀도 좀 볼 수 있겠느냐?”
“구경만이라면.”
“흐응….”
달기가 내 곁으로 와서는 바로 옆에 붙었다. 그리고는 힐끔거리며 내 옆얼굴을 쳐다보기 시작했는데 시선이 왠지 부담스러웠다.
잠시 후 그들이 기웃기웃 거리던 중에 대조영이 의아해하며 내게 말을 걸었다.
“음? 이건 엄청난 명검이군. 이것도 삼황오제의 유물인가?”
나는 대조영이 가리킨 검을 보자 바로 알아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건 의천검(義天劍)이오. 무당파에서 보관하고 있던 걸 내가 얻어내었소.”
이번 생이 시작되고나서 무당파를 겁박하던 만신전의 시바를 쫓아낸 공로로 명룡자가 내게 흔쾌히 건네주었던 기억이 난다.
“으음…. 이것도 삼황오제의 유물이라니. 그래서 누구의 것인가?”
나는 입맛을 쩝쩝 다시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게… 잘 모르겠소. 장삼봉 진인이 거짓된 신왕의 검이라 했고 삼황오제의 것은 확실한데 정체가 불확실하오. 다만 북방상제 전욱의 것이 아닌 건 확실하지.”
의천검을 강제로 뽑을 때 음신지력과 파장이 전혀 맞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그렇다면 당연히 전욱의 유물은 아닐 것이다.
“…….”
대조영이 골똘히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백웅. 의천검을 제물로 써보는 게 어떤가?”
“응?! 갑자기 왜….”
“보아하니 지금 요순의 물건이라고 할만한 후보가 하나도 없어보이는군. 그렇다면 당연히 주인이 불명확한 걸로 시도해보는 게 그나마 가능성이 있지 않겠나.”
“그건 그렇소만…. 엉뚱한 자가 소환되면 낭패잖소.”
“어차피 외계인때문에 천제단의 파장이 흐트러진 상태에서는 확률이 혼돈으로 치달아버려서 마찬가지일세. 아예 [옛 지배자]가 소환되어버릴 가능성도 있는 상태에서 차라리 삼황오제로 범위를 한정하면 다행이지 않겠나?”
“아하.”
대조영의 말이 무척 일리가 있었다.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의천검을 집어들었다.
“그럼 한 번 해보겠소.”
어차피 의천검 말고도 다른 칠요도 내 손에 있겠다 굳이 무기로 아쉬울 것도 없었다. 차라리 이번 기회에 의천검의 진짜 정체를 알아내는 게 도리어 더 이득일수도 있으리라.
키잉 -
천제단에 올라간 의천검이 청령(靑靈)한 빛을 내며 제물의 준비가 끝나자 공공이 양 팔을 벌리며 외쳤다.
[천제단이여! 의천검을 제물로 위대한 존재를 이 자리에 소환하노라!!]
쿠구구구 -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천제단으로 봉선의식을 하려면 본디 차례, 권리, 자격, 시운이 필요하지만 현재 이 세상에서 천계는 멸망하여 이세계로 도피해버렸기에 그 대부분이 유명무실해져버렸다. 천계가 사라지며 그들에게 허락을 맡을 필요가 없어졌고 이제 천제단은 그저 삼황오제에게 직결할 수 있는 소환제단의 기능밖에 남지 않았기에 남은 건 제단을 구동하는 데 필요한 주술적 절차와 가동신력뿐이었던 것이다.
번쩍 -
한 차례 거대한 번개가 쏟아졌다. 그리고 잠시 후 어마어마한 존재감이 느껴지면서 [무언가]가 제단 위에 나타났다는 걸 깨달을 수가 있었다. 아직 필멸자의 눈에 보이게끔 형상화되지 않았지만 차원 너머에서 막 건너온 [무언가]가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다.
우우우…
그 존재감은 잠시동안 기운을 모으더니 잠시 후 꾸물텅거리는 형체를 만들며 서서히 화신(化神)을 이 자리에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부정형(不定形)의 반투명한 액체같은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내며 거대한 존재감과 함께 신언(神言)이 울려퍼졌다.
[나는 황제의 후예인 오제(五帝) 요순(堯舜)…. 나를 부른 자 누구인가….]
“……!!”
정말로 요순이구나!
저 부정형의 화신 모습은 예전에 신공표를 흡수할 때 본 적이 있어서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의천검의 정체가 확실해지는 걸 알 수 있었다.
[거짓된 신왕의 검].
의천검(義天劍)은 바로 삼황오제 요순의 유물이었던 것이다!
‘자, 잠깐. 그렇다면 장삼봉 진인은 그걸 알고 있었던 건가? 그런데 왜 의천검을 쓰지 말라고 했던 거지?’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이 있어서 고개를 갸웃하고 있을 때였다.
[너희가 날 불렀….]
천제단의 소환에 응한 요순의 화신이 우리에게 말을 거는 그 순간.
촤롸롸롹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 그 소리와 함께 갑자기 온 세상의 시간이 멈춰버리고 말았다.
쩌엉!
“……?!”
우우우우
정말로 모든 게 멈춰버리고 말았다. 약간의 탐욕을 담은 눈으로 내 의천검을 바라보던 달기도, 요순의 실체를 보고 경계하던 대조영도, 옛 적수가 눈앞에 나타나서 성난 표정을 짓던 공공도 완전히 시간이 멈춰버린 듯 움직이지 않았다.
단지 멈추지 않은 것은 이 공간에 단 세 가지 뿐이었다.
나.
어느새인가 내 품속에서 제멋대로 떠올라있는 천암비서(天暗秘書).
그리고 눈 앞에 있는 요순의 화신.
요순의 화신은 어두운 빛을 뿜어내며 떠올라있는 천암비서를 보자 기겁한 듯 깜짝 놀란 소리를 내었다.
[아… 아니 그건? 그 책은 도대체 무엇이냐? 어찌하여 인과율이 이런 식으로….]
츠아아아
천암비서의 책장이 넘어가다가 문득 하나의 장(章)에 멈추었다. 그리고 마치 요순을 향해 보라는 듯 펼쳐진 천암비서에서 어둠의 영기가 더욱 강하게 뿜어져 나왔고, 그 책장을 마주한 요순의 화신이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으…. 아아…. 본좌가 인식하지도 못한 사이에 악몽(惡夢)의 경계에 이미 먹혀있었다니!! 위대한 자여! 이럴 수는 없나이다!!]
뿌드드득!
뿌드득!
[끄아악!!]
잠시 후 요순은 영혼 째로 빨려 들어가듯 천암비서의 책장 안으로 흡수되었다. 천암비서가 잠시 동안 덜컹대면서 무언가 날뛰는 것을 억제하는 듯 움직였고, 이윽고 털썩 하고 땅바닥으로 고스란히 떨어졌다.
“…….”
나는 걸어가서 천암비서를 집었다. 그리고 천암비서의 펼쳐져 있던 책장이 새파랗게 빛나고 있으며, 그 안에 익숙한 삽화가 그려져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이건….”
틀림없다.
산하사직도의 [꿈] 속에서 원시천존의 도움으로 내 혼돈의 재능을 개화했을 때 나타났던 그 삽화! 그 당시에 기이하기 짝이 없는 두 마리의 괴물이 그려져 있기에 의아해했던 기억이 났다.
꿈틀
그리고 나는 그 두 마리의 괴물 중 한 마리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책장 안에서 허우적대며 움직이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림이 살아서 움직이는 듯 했다. 나는 그 순간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 그랬구나….”
이 괴물은 바로 삼황오제 요순(堯舜)이다.
천암비서는 잡아먹은 [옛 지배자]를 삽화로 만들어서 이 책 안에 가두어 두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요순은 한 번 천암비서에 잡아먹힌 적이 있으니 그 이후로도 나와 천암비서를 맞닥뜨리기만 하면 이유불문하고 잡아먹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또 한 마리의 괴물은 뭐지?!’
나는 급히 맞은편의 장에 있는 다른 괴물의 삽화를 보았다. 그러나 뭔가 이상했는데, 이 괴물의 삽화는 살아서 움직이는 요순과 달리 시꺼멓게 비어져서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기는커녕 내용물이 없는 것처럼 음각(陰刻)되어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뜻밖의 진실에 당황하고 있을 때였다.
[아직은 혼돈(混沌)의 업(業)이 많이 쌓이지 않아 태허(太虛)의 길이 열려있으니.]
어디선가 들은 것 같은 목소리.
[서(書)의 힘에 물들지 마.]
어린 여자아이의 목소리에 나는 퍼뜩하고 정신을 차렸다.
“누구냐?”
하지만 더 이상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고, 어느 새 시간정지도 풀려 있었다.
다른 셋은 난데없이 요순의 화신이 사라지자 어리둥절해하는 듯 했다.
“뭐지?”
“소환된 요순이 왜 사라진거냐?”
[……?]
그들은 영문을 모르는 기색이었지만 나는 방금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해 본 ‘실험’이 예상대로라는 걸 깨닫고는 내심 전율했다.
‘천암비서는… 여태껏 잡아먹은 [옛 지배자]를 가두고 있다.’
그리고 한 번 잡아먹힌 존재는 설령 내가 외우주로 가서 다시 맞닥뜨린다 하더라도 다시금 천암비서의 먹이가 될 뿐.
나는 그 사실을 머릿속에 각인하며 한숨을 내쉬며 의천검을 들었다.
“휴우. 요순의 소환이 실패한 것 같군. 여기서 연거푸 다른 삼황오제를 소환할 수는 없을 테니 다른 곳으로 가서 소호금천을….”
그 때였다.
파직!!
갑자기 내가 들고 있던 의천검에서 어마어마한 마력이 용솟음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의천검에서 뿜어져 나온 마력의 기둥이 천공을 한 차례 갈랐고, 그와 동시에 혼돈의 빗방울이 대지로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쏴아아아
“헉?”
대조영이 혼돈의 빗방울을 맞더니 당황해하며 말했다.
“하나하나의 빗방울이 순수한 마력의 덩어리!!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인가.”
“그, 그게.”
꿀럭 꿀럭
나는 대답을 하기도 힘겨웠다. 왜냐하면 의천검을 들고 있는 지금 난데없이 전신에 마력이 팽배해져서 마치 토할 것만 같은 기분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여태껏 마력을 억지로 소모하면서 최대한 공복상태로 만들었는데 단숨에 배가 빵빵해질 정도로 과식을 해버린 느낌이었다.
우우우
내 눈가에 화기가 감도는 게 느껴졌고 나는 보나마나 내 눈이 시꺼멓게 물들었으리라는 걸 감지했다. 29번째 삶의 최초에 똑같은 현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력이 말도 안 될 정도로 넘치는 중인 것이다!
“큭, 으으윽….”
빨리 사대신기를 이용해서 이 마력을 전부 소모해야 해.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사대신기를 소환하려 했지만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아주 마음에 드는구나. 복희의 제자.”
덥썩
달기가 갑자기 내 양 손목을 두 손으로 잡아채며 나를 꼼짝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쿠웅!
내 몸이 달기에게 밀려서 뒤로 넘어졌다.
동시에 나를 덮치고 있는 달기의 요사스러운 미소가 내게 정면으로 마주쳤다. 나는 몸을 움직이려 해 보았지만 마력이 마치 성난 말처럼 날뛰고 있어서 제정신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게다가 달기 또한 강대한 마력을 발산하고 있기 때문인지 떨쳐낼 수가 없었다.
“뭐, 뭘 하려는….”
“뭘 하려는 것 같으냐?”
“…….”
마치 먹잇감을 보는 듯한 눈빛에 나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
“너는 내 꺼다.”
그리고 다음 순간, 싱긋 웃은 달기가 내게 입을 맞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