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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나는 전욱의 화신이 나타나자마자 정신이 약간 혼미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 기분의 기저에 깔려있는 근본적인 감정은 의문(疑問)이었고, 나는 지금까지 내가 얻어왔던 상식을 뒤집어엎는 이 현상에 대한 그 의문을 입밖으로 외쳤다.
“어째서 수요가 아니라 월요의 유적에?!”
내가 알기로 칠요의 제작자는 삼황오제로써, 각각 자신이 담당한 칠요와 인과율이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전욱은 수요의 제작자이며 월요의 제작자는 삼황 여와일 가능성이 무척 높았기에, 상식적으로라면 이 자리에 나타나야 할 것은 전욱이 아닌 여와여야 하는 것이다!
‘아니 애초에 여와가 나타나기를 그리 바라지도 않았지만! 수호자는 왜 안 나와?!’
내가 속으로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이해를 하지 못하고 당황하고 있을 때, 전욱의 화신이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우리와 칠요의 관계를 알고 있구나. 하긴 복희의 모습을 하고 있다면 당연히 뭔가 있는 놈이겠지.]
“아, 그게 이건….”
그러고 보니 지금 내 모습은 복희의 인간형태였잖아!
‘어떻게 변명하지?!’
내가 그 사실을 깨닫고 얼굴이 빠르게 굳어지자 전욱이 서서히 칠흑같은 안개의 기운으로 뒤덮인 암수(暗手)를 내 쪽으로 내밀며 말했다.
[대답하라. 네놈은 무엇이고 어떤 목적으로 여기에 왔는가.]
“…….”
어떻게 해야 할까.
‘제길…. 일단 싸워서 벗어나야 하나?’
나는 크게 고민을 하다가 전욱의 화신과 한 번 싸워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전욱의 본체를 상대로도 흑웅을 운용해서 버텨본 경력이 있었기에, 잘만 싸운다면 이 자리에서 벗어나는 건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아냐. 그건 멍청한 짓이겠군.’
하지만 나는 바로 그 생각을 철회했다. 어찌되었든 흑웅의 힘은 지금 봉인상태이며 사대신기를 쓰려고 해도 나중에 더 강한 적이 나올 때를 대비해야 한다. 전후사정도 모르는 상태에서 섣불리 전욱같은 존재를 적으로 돌리는 건 절대 현명한 행동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기보다는 지금 이 상황이 무엇인지 알아내야한다는 직감이 들었다. 의문이 있다면 그걸 해결해야만 이득을 본다는 걸 오랜 전생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침착하게 머리를 굴리며 입을 열었다.
“전욱이시여. 저는 옛날에 복희의 제자였던 인간입니다.”
[복희의 제자?]
“그 때 불로불사의 술법과 변신술을 배워서 옛 스승이신 복희의 얼굴을 따라하게 된 것입니다. 그 이후로 쭉 살아오며 은거하다가 이제 인류의 종말이 머지 않아 그 전에 칠요를 회수하려 움직이게 되었습니다.”
[…….]
“그리고 그 와중에 전욱 님께서 이 세상 곳곳에 남겼던 유물을 회수하였고 또한 그 유물에 있던 신력을 흡수하여 수천 년간 수련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신력을 갖게 된 듯 합니다.”
어떠냐!
이 정도면 잘 지어냈지!
복희의 제자였던 것도 사실이고 인류종말이 얼마 남지 않은 것도 맞고 유물에 있던 전욱의 신력을 흡수한 것도 사실이야! 이게 아주 틀린 말도 아니고 말이다!
내가 내심 뿌듯해하고 있을 때 전욱의 화신이 말했다.
[…아주 그럴듯한 소리군. 힘의 파장을 보니 복희의 제자 정도는 되어 보이는 실력이구나.]
이어진 전욱의 말에 나는 크게 당황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네놈은 여와와 함께 소멸한 스승 복희를 되살리려고 이 자리에 왔단 말인가? 이제 와서 칠요를 이용해 복희의 제자가 할 일이라곤 그것밖에 없을 터.]
“……?!”
뭐, 뭐라고?!
복희가 소멸했다고?!
‘이게 무슨 소리야!’
전혀 상상하지도 못했던 상황!
나는 당황을 최대한 감추며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금 복희 님은 그저 광증(狂症)때문에 자기만의 이공간을 만들어 유폐된 것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그걸 소멸이라 표현하신다니 적대관계라 하지만 표현이 과하십….”
[호오. 언제적 얘기를 하는 건지….]
“네?”
이어진 말은 정말 충격적이었기에 나는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자칭 복희의 제자라면서 그 후 복희와 여와가 스스로 소멸을 택하여 반고의 곁으로 갔다는 걸 몰랐구나. 하긴 그 이후에도 술법은 계속 쓸 수 있었을 테니 인간들은 변고를 알지 못했으리라.]
“……!!”
말도 안 돼.
종말까지 버티지 않고 그냥 둘 다 동반자살을 택했다고?!
[흥이 식었으니 꺼져라.]
전욱의 말에서는 나에 대한 의심보다 귀찮음이 더 강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 사실이 뭔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전욱이 이렇게 귀찮아하는 성격이 아닌데? 차라리 소호금천에 가까워보이는….’
뭔가가 있다.
여와와 복희가 소멸한 것도 이상한 일이지만 눈앞의 전욱에게서도 강렬한 변화가 감지되고 있었다.
하지만 쉽지 않다.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의 원인을 알아봐야만 한다는 직감에 약간 조급해짐을 느꼈다.
‘제길…. 방금 저 말은 아마도 물러나라는 최후통첩! 지금 조금만 선을 잘못 넘으면 바로 적대관계가 될 거야. 전욱은 근본적으로 귀찮아한다고 해서 싸움을 피하는 인물이 아니다! 더 이상 모험을 했다가는 큰일날지도….’
하지만 나는 여기는 도박을 걸어볼 때라고 느꼈다. 외우주란 결코 여러번 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래서 일단 입을 열어보기로 했다.
“…전욱 님. 저와 사도의 인과율이 이어져있지 않으십니까?”
[뭐라고?]
“저는 반드시 칠요를 획득해야만 합니다. 제가 칠요를 얻게 도와주신다면 그 인과율을 정상적으로 이어 전욱 님의 검(劍)이 되겠습니다.”
사도가 되겠다는 제안!
내 말에 전욱이 뜻밖의 제안인 듯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자칭 복희의 제자라면서 나의 사도가 되겠다고. 하긴 말세(末世)이니 그럴 만도 하군….]
“부탁드립니다. 저는 이래봬도 신력도 높아서 꽤 싸움도 잘 하는….”
그 순간 마치 단칼처럼 단호한 대답이 들려왔다.
[일 없다.]
“……?”
나는 잠시동안 전욱에게 들려온 말을 인지하지 못하고 멍하니 있다가 반문했다.
“네?”
그 야망넘치던 전욱이 이 제안을 아무렇지도 않게 거절한다고…?
사아아 -
전욱의 화신에게서 흘러나오는 어둠의 기운이 점차 옅어지는 게 느껴진다. 그것은 전욱이 점차 현실세계에 관여하는 걸 줄이며 물러난 준비를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전욱의 눈에서 암광이 흐릿하게 빛나며 그의 말이 들려왔다.
[본좌에게 남은 것은 종말의 그 때까지 만귀전에서 버티는 것 뿐…. 이 세계의 명운도 창생사멸도 더는 관여할 바가 아니노라.]
“뭐, 뭐라고.”
[그리고 규명되지 않은 사도의 인과율 따위… 어차피 이 또한 황제의 만신전에서 알아서 없애줄 테지. 크흐흐.]
사아아
전욱의 자조적인 목소리와 함께 더더욱 화신의 역소환이 빨라졌다. 이제 곧 전욱의 형체가 사라질 게 뻔했다.
나는 전욱의 태도에서 한 가지를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패기도 야망도 없다.
모든 꿈이 사라진 태도!
이렇게까지 관심이 없다는 건 전욱이 아예 모든 야망을 접었다는 얘기밖에 되지 않았다.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아서 크게 외쳤다.
“왜, 왜입니까?! 전욱 님께서는 황제를 그리 좋아하지 않잖습니까! 다른 사제(四帝)도 마찬가지라서 그에게 전적으로 복종하지 않았잖습니까!”
나는 전생하면서 본 적이 있다.
복희와 황제가 겨루던 때, 기회가 생기자 거침없이 황제를 제거하기 위해서 내게 칠요 대해방마저 이끌어서 차도살인을 이루려던 전욱의 모습을!
[…….]
“그리고 자신에게 직접 붙은 인과율을 만신전의 힘을 빌려 제거한다니요?! 그런 분이 아니셨잖습니까!”
[네놈은 정체도 불분명한 주제에 마치 제왕들의 관계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하고 있군…. 후후.]
전욱은 잠시 힘없이 웃는 듯 하더니 말을 이었다.
[모든 균형은 이미 망가졌다…. 우리 혼돈의 지배자들에겐 그저 장난감이라 생각했던 그 균형이 사실 제왕의 존엄을 지켜주고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땐 이미 늦어버렸지…. 이제 우리 모두는 그저 승천의 그 때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처지이다.]
“…….”
[이만 물러가라. 종말 앞에서 발버둥치는 건 네놈의 업이지 본왕의 업이 아니다.]
준엄한 목소리였지만 그 담담함에서 전욱이 모든 마음을 접었다는 게 여실히 느껴진다. 평소의 전욱이라면 아무리 복희의 제자를 자처하더라도 필멸자를 상대로 저렇게 점잖게 달래지 않았으리라. 나는 그걸 느끼자마자 당황스러움과 함께 동시에 이건 아니라는 반발심이 느껴졌다.
‘어찌 천하의 전욱이 이토록 초라한 꼴이 될 수가!!’
이건 내가 아는 북방의 패왕 전욱이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인지 나는 잠시동안 내 개인적인 손이득을 제쳐두고 감정에 몸을 맡기고 내뱉었다.
“황제한테 쫄아갖고!!”
[……?]
그러자 전욱이 황당해하는 반응을 보였다. 동시에 막 소환해제 되려던 그의 화신에서 마치 어둠 그 자체가 연옥이 되어 타오르는 듯한 암화(暗火)가 치솟았다.
화르륵
[네놈, 점잖게 말하니 겁을 상실했구나. 감히….]
“천하의 전욱이 언제부터 점잖게 말했다고 그러시냔 말입니까!!”
나는 버럭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아직 황제가 다 이긴 거 아닙니다!! 그 놈은 결국 [옥좌] 앞에 갈 때까지 승천에서 이긴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 왜 벌써 포기합니까!”
왠지 자존심이 상한다.
전욱도 천하의 거악(巨惡)에 속하는데다 여태껏 전생하면서 나를 많이 이용해먹은 원수같은 존재지만, 이렇게 추하게 꺾여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가 답답하다.
[……?!]
처음으로 전욱이 격정이라 할만한 반응을 보였다. 화신에서 흘러나오던 암화가 점차 거칠게 흔들리더니 이윽고 마치 바람에 나부끼는 양촛불처럼 불안하게 휘청대기 시작했다. 그것은 전욱의 심리 또한 흔들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네놈…. 뭘 알고 있지? 승천을 언급한다는 건…. 정말로 황제 공손헌원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뜻이냐?]
나는 그 말에 일순간 망설였지만 눈을 질끈 감고는 외쳤다.
“네!! 알만큼은 압니다! 이대로 가면 사제(四帝)가 어떤 꼴이 되는 지도요!”
[어떤 꼴이 된단 말이냐?]
“제물!!”
[……!!]
“제곡이 제물이 되어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되고 그의 반왕전도 함께 소멸하는 미래를 보았습니다! 황제는 처음부터 그러려고 사제를 만들었단 말입니다. 짚이는 게 있지 않으십니까?”
그 말에 전욱은 뭔가 움찔하는 기색이었다.
“제곡 외에는 본 적이 없으나 아마 나머지 제왕들도 그를 따라가게 될 것입니다.”
[미래라고…!! 어떻게 너 따위가 그걸 알 수 있지?]
으… 제기랄!! 오제 쯤 되는 존재한테 이렇게까지 진실을 까발려도 되는 건가?
나는 지금이라도 멈춰야하지 않냐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기호지세나 다름없었기에 마음속의 뜨거움에 더욱 더 불을 붙이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끝까지….’
구라를 친다!
“그게 바로 복희 님께서 제게 주신 권능이었습니다. 한 순간이지만 [굴레]에 영향 받지 않고 진정한 미래를 볼 수 있게 하셨습니다. 복희 님은 자신이 소멸할 경우를 대비해서 제자인 저에게 종말의 미래를 보여주시고 희망을 남기셨던 겁니다.”
[…….]
차라리 복희가 소멸했다니 다행이 아닌가. 직접 복희를 찾아가서 대면하면 이 거짓말이 들통나겠지만 복희가 소멸되었으니 들킬 염려가 없다!
‘그리고 복희쯤 되면 그런 능력을 줄 법도 하니까 더더욱 의심 못 하겠지!’
나는 더욱 자신감을 가지고 밀어붙였다.
“어째서 모든 걸 포기하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만 아직은 아닙니다! 신에게 찰나의 시간일 뿐일지라도 지금부터라도 바로잡는다면 제물이 되는 미래만은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이하구나. 고작 칠요를 얻기 위해 행하는 거짓말이라기엔 차원이 다르게 장황하고 그럴듯하다니.]
“제발 믿어주십시오.”
쿠구구구….
한동안 침묵이 감돌았다.
그러더니 한참 후 전욱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네놈의 이름은 무엇이냐.]
“제 이름은 백웅입니다.”
[좋다, 백웅….]
이어진 전욱의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우선 본좌를 세 치 혀로 농락하려 한 대가를 받아라.]
꾸콰콰쾅!!!
“으아아아악.”
다음 순간, 아무런 전조증상도 없이 어마어마한 흑염(黑炎)이 몰아쳐서 내 전신을 뒤덮었고 나는 그 어둠의 불꽃에 휩싸여서 충격파와 함께 허공으로 날아갔다. 내 몸 뿐만이 아니라 반경 수십 장을 한번에 뒤덮은 그 흑염의 기둥은 마치 화산 중심에서 끓어오르는 용암보다 더 뜨거운 듯 했으며 나는 대번에 전신이 녹아내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크으으으읍!!’
신력으로 인과조작을 해서 단숨에 흑염포를 날리다니!
인과를 조작하기에 이런 건 호신강기를 펼쳐서 막을 수도 없었다. 그렇기에 본디 인간이라면 꼼짝없이 당했을 공격이었지만, 나는 그 공격을 당한 직후 내 전신에 미세한 신력(神力)의 막이 자동으로 덧씌워지며 내 몸을 즉사에서 구해줬다는 걸 알아챘다.
치지지직
전신의 피부가 높은 화상을 입고 시꺼멓게 익거나 조금 녹아들어서 형태가 일그러져서 고기 타는 냄새를 내었지만 나는 내심 히죽하고 웃었다.
‘흑웅…!!’
방금 그 방어는 틀림없이 흑웅이다!
마력을 자주 한계까지 소비한 덕인 걸까? 흑웅이 아직 깨어나지는 않은 것 같았지만 신력에는 마주 신력을 이용해서 내 몸을 지켜준 게 틀림없다! 흑웅이 정말로 수면상태였다면 방금 전의 일격에는 절대지경이고 뭐고 꼼짝도 못하고 절명했으리라.
‘머지않아 깨어난다!’
나는 그 사실에 기쁨을 느끼면서 우선은 전신에 활류를 공급해서 시꺼멓게 익어가는 피부를 빠르게 보호했다. 충격이 지나쳐갔으면 그 다음은 내 거대한 내공을 이용해서 몸을 안정화시킬 수가 있었다.
우웅
내가 호신강기와 함께 활류를 생성하며 내 몸을 허공에 띄워서 치료하고 있자 어느 새 내 맞은편의 허공에 전욱의 화신이 떠올라 있었다. 전욱의 화신이 슥 하고 내 쪽으로 어둠의 손을 내뻗으며 말했다.
[과연…. 자각하지 못하나 신력으로 공방(功防)을 이룰 줄 아는군. 보았던 대로의 실력이다.]
나는 성대에서 극렬한 고통이 밀려오는 걸 느끼면서 시꺼먼 재처럼 변한 가래침을 퉷하고 내뱉었다.
“저를 죽이시려는 겁니까?”
[필멸자 주제에 본좌에게 건방진 언사를 행하였으니 본디 죽여서 네 영혼을 만귀전으로 끌고 가 처참히 갈기갈기 찢어버릴 것이다.]
“…….”
제길. 설득은 실패했나….
전욱은 의욕을 잃어버렸을 뿐 힘을 크게 잃어버린 게 아닌 듯 했다.
단지 화신을 통해서 세상에 잠깐 간섭했을 뿐인데도 나를 통째로 구워버릴 만큼의 권능을 낼 수 있다는 것 - 그것은 아직 내가 전욱의 본체를 상대하기에는 매우 많이 부족하다는 뜻이리라.
‘31번째 삶에는 뭐 하지?’
내가 진심으로 죽음을 각오하고 검을 들자 뜻밖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방금 전의 일격을 받아내었으니 백웅 네게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고 인정해주마.]
“네?”
나는 갑작스러운 태세전환에 적응이 되지 않아서 멍하니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는 말했다.
“제 말을 믿어주시는 겁니까?”
[크크크… 크하하하하하하!!]
쿠르르릉
전욱의 화신이 갑자기 광소를 터뜨렸다. 그러자 강화도 인근의 모든 대지와 해양이 떨리며 지진이 잠시동안 일어났고, 아주 먼 곳에서 조그마한 화산 하나가 즉시 분화해 버리는 게 보였다. 마치 폭죽처럼 화산이 바로 터지는 걸 보면 신의 힘이 어떤 수준인 건지 바로 느낄 수가 있었다.
전욱이 말했다.
[네놈의 말마따나 네 말을 들어서 희망이 생기는 상황은 결코 아니다. 네놈은 복희가 존재했을 때에 비해서 신계(神界)에 어떤 사태가 벌어진 건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지. 이 모든 게 허무한 발버둥일 뿐이란 것도….]
“…….”
전욱의 눈에서 강렬한 암광이 이글거리며 타올랐다. 그 암광에 스며있는 건 분명한 집착과 복수심이었다.
[허나…. 본좌는 네놈을 죽을 때까지 부려먹겠다. 네가 틈새를 만들어준다면 결국 그 오만한 황제에게 한 칼을 먹일 기회도 생기겠지. 네 스스로 그걸 원한다면 나, 북방상제 전욱의 칼으로 써 주겠노라.]
그 말과 함께 전욱이 나를 응시했다. 나는 그 눈빛이 내 대답을 요구하는 것이란 걸 알아채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죽을 때까지 이용해 주십시오.”
한두 달이라는 짧은 시간.
그 안에 이 세계의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내 목숨을 걸어야만 할 것이다.
[좋다.]
퓨웅!!
다음 순간 전욱의 손가락에서 어둠의 빛이 날아와서 내 심장을 관통했다. 하지만 고통도 외상도 없었고 잠시 몸을 비틀거릴 때, 나는 선명하게 전욱과 나 사이에 새로운 [연결]이 정식으로 이어졌음을 느꼈다.
전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과율을 정식으로 이었으니 넌 이제 내 정식 사도다.]
“감사합니다.”
나는 꾸벅하고 인사했다.
‘이걸로 이제 전욱의 권능을 쓰는데 망설이지 않아도 되겠군.’
아마 이 세계 한정으로 그 권능들을 눈치 안 보고 쓸 수 있다면 크게 전력을 향상시킬 수 있으리라.
[그리고 이걸 받아라.]
슈슉!!
전욱의 말이 끝나자마자 내 눈앞에 월요 삼종신기가 순간이동해서 나타났다. 내가 양손으로 삼종신기를 모두 움켜잡자 전욱의 화신이 눈에서 암광을 뿜어내며 말했다.
[지금 모든 칠요(七曜)의 봉인과 수호자는 소멸한 상태. 모든 칠요의 맹약이 황제에게 귀속되었으니 칠요의 힘 또한 반감되었으며 [옛 지배자]의 권능 또한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칠요를 모으겠다면 마음껏 모으도록 하라.]
“……!!”
[그리고 칠요를 모으는 와중에 본좌가 시키는 일은 뭐든지 해야 할 것이다.]
나는 약간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 말대로라면 지금 칠요는 우리 세계보다 훨씬 약해져있는 칠요라는 소리가 아닌가?
아닌게 아니라 월요 삼종신기를 잘 살펴보니 미해방상태라지만 원래 내가 월요를 볼 때마다 느꼈던 그 힘의 파장보다 훨씬 약해보였다.
절반짜리 칠요를 잔뜩 모아서 대체 무슨 수로 종말을 타파한단 말인가?
멀쩡한 걸 다 모아도 힘들다는 걸 이미 아는 판에!
나는 황당해서 말했다.
“잠깐. 이런 게 어딨습니까? 분명 칠요는 종말을 유예하는 보물이고 종말까지 그 힘이 유지되어야 할 터….”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군.]
이어진 전욱의 말에 나는 종말의 진실이 성큼 다가온 걸 느꼈다.
[황제가 [최초의 문자]를 이용해서 제 마음대로 칠요의 계약을 모두 파기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