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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나는 멍하니 있다가 나도 모르게 검을 휘둘러서 제갈현에게 휘둘렀다.
슈칵!
[키아악.]
패잔병으로 보이는 촉수괴물 대여섯 마리가 망량 뒤편에서 습격하려다 검뢰에 찢겨나갔다. 제갈현이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자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일단 여기서 내가 더 할 건 없는 것 같군. 근처의 동북아해방군 기지가 어딨는지 알고있소?”
“무, 물론이오. 길안내를 하면 되겠소?”
“부탁하오.”
나는 제갈현의 뒤를 따라가며 남은 적들을 해치우며 기지로 귀환했다. 나는 한참을 걷는 중에 제갈현에게 질문했다.
“미안하지만 질문 몇 가지만 해도 되겠소?”
“내가 더 많이 하고싶소만 해 보시구려.”
“당신은 혹시 망량이라는 별호를 쓰지 않소?”
“……? 처음 듣는군.”
“그럼 혹시 대명제국(大明帝國)시대에 살고있지 않았소? 그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내 질문에 제갈현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대꾸했다.
“나는 올해로 32세의 광동대학원생이며 2년반 전에 학군(學軍)으로 참전해 싸우고 있었소. 이번 전투에는 고향을 구한다 하여 일부러 참전하여 소대장이 되었는데 내 소대원들이 전부 외계인에게 죽어버렸소.”
“…….”
“소대원들이 다 죽은 슬픔이 마음에 남아 있기에, 귀신 씨나락까먹는 소리에 답할 정도로 여유롭지는 못하구려.”
“음. 미안하오.”
나는 멋쩍게 머리를 긁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내 질문은 정말 괴팍한걸 넘어서 그를 조롱하는 것처럼 들릴 것이리라.
‘하지만 정말 망량과 똑같이 생겼다.’
중세 명제국의 복식인가 현대의 복식인가의 차이일 뿐 얼굴은 쌍둥이 수준으로 똑같았다. 게다가 이름까지도 똑같이 제갈현이지 않은가? 이 상황에서 그가 망량이 아니라고 단호하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그렇게 고민하던 와중 한참 시간이 지나자 동북아해방군의 기지에 도착했다. 내가 도착하자 미리 진을 치고 있던 군인들을 헤치고 웬 직책있어보이는 고위간부가 뛰쳐나오더니 감동한 듯 말했다.
“오오, 사령관님의 지원군이란 게 설마 이렇게 강력할 줄이야…!! 정말 감사하오!”
“음. 도와주게 되어 기쁘구려.”
“뭔가 해드릴 건 없는지….”
나는 힐끔 나를 따라온 제갈현을 보며 말했다.
“저기 제갈현이라는 병사를 내가 데려가고 싶소. 그의 공적이 출중한지라.”
이대로 얼렁뚱땅 그와 떨어질 수는 없다. 어떻게든 이 말도 안 되는 우연의 정체를 밝혀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으음…? 차림새를 보아하니 학군의 병사군. 마음대로 하시구려.”
“서문공백이 있는 본진은 어떻게 갈 수 있겠소?”
“거기는 여기에서 300km 떨어진 가령(茄岭) 지역입….”
그 때 낭랑한 나일라토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걱정 말게. 공간이동 쯤은 마음껏 지원해줄 테니까.”
슈욱!!
다음 순간, 근처에 있던 군인들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나는 다시금 나일라토프와 서문공백 사령관이 있는 사령실에 나타나 있었다. 내가 힐끔 나일라토프 쪽을 쳐다보자 나일라토프가 훗하고 웃었다.
“너 정도의 힘이면 4티어 종족인 파르텔퀴안쯤은 순식간에 썰어버리는군. 과연 대단해.”
“이걸로 네가 말했던 공적은 다 세운 거겠지.”
“설마. 몇 번은 더 도와달라고.”
“뭐? 얘기가 다르잖아.”
내 표정이 일그러지자 나일라토프가 내 뒤편에 같이 공간이동해 온 제갈현을 힐끔 쳐다보더니 묘한 표정을 지었다.
“…오호. 과연 조금 더 설명해줄 게 있을 것 같군.”
“야. 무슨 개소리냐고.”
“다시 한 번 더 작전타임을 가져보자는 이야기일세.”
나일라토프가 자신의 엄지손가락을 뒤편으로 까딱거렸고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은 아까 얘기를 했던 장소였다. 나는 놈이 이야기 겸 설명을 하려한다는 걸 알아챘기에 한숨을 쉬었다.
“제길.”
쿵!
이윽고 작전타임을 하러 들어온 구석의 방에는 나와 나일라토프, 그리고 제갈현이 어정쩡하게 서 있는 형상이 되었다. 나일라토프는 순식간에 과학기술을 써서 장내의 환경을 우아한 서양형식의 고풍스러운 방으로 뒤바꾼 후 자리에 앉아서 홍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홀짝 하고 한 모금을 마신 나일라토프가 말했다.
“거기 있는 자는 자네의 동료인 ‘망량’과 완전히 똑같이 생긴 이 세계의 인간이군. 그렇지 않은가?”
“그래. 그것도 이름은 제갈현이야. 망량의 본명이지.”
“호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나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느끼며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내 시대에 살고있던 망량이 하필이면 이렇게 똑같은 얼굴으로 이 시대에 살고 있으며, 그것도 내가 너를 만나서 외계인 토벌을 만난 직후에 마주칠 확률이 대체 가능하긴 한거냐고!”
“…….”
후룩
나일라토프는 말없이 홍차를 마셨고 옆에 있던 제갈현은 영문을 모르는지 어리둥절해서 눈만 꿈벅이고 있었다. 나일라토프가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천문학적으로 낮은 확률이지. 이 확률을 설명해줄 수 있는 해답은 딱 하나, 업(業) 뿐이다.”
“업?”
뜬금없이 무슨 소리지?
내가 어리둥절해하자 나일라토프가 말했다.
“우선 다들 앉아. 조금 어려운 얘기가 될테니까 편하게 앉아서 들으라고.”
“그러지.”
나와 제갈현이 의자에 덜컹 앉아서 들을 자세를 취하자 나일라토프가 말을 이었다.
“반응을 보니까 아직 그대, 전생자는 업(業)의 개념을 잘 모르고 있군. 혹시 업에 대해서 알고있는 만큼 내게 얘기해줄 수 있겠나?”
“업…?”
나는 그 단어를 아예 안 들어본 건 아니었다. 망량이나 제갈사를 통해 온갖 공부를 했었기에 업이라는 단어 자체의 개념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일라토프가 말하는 건 뭔가 다른 느낌이었기에 섣불리 얘기하지 못할 뿐이었다. 나는 나일라토프의 제안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예전부터 알기로는…. 인과율이 잘못 적용했을 때 되돌아오는 반작용같은 거였지. 혹은 신적인 존재가 필멸자에게 내리는 숙제 같은 거였나? 아니면 세월이 쌓여서 나타나는 결과 같은 거….”
“대략적으로는 알고 있군. 그러면 설명하기 편하겠어.”
“내가 알고 있는 개념과 다른 업이란 게 있는 거냐?”
“흐음. 잠깐 생각을 정리해보지. 자네가 가능하면 알아듣기 쉽도록….”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하던 나일라토프가 입을 열었다.
“동방에서는 업이라고 하는 개념을 서방세계에서는 카르마(karma)라고 불렀네. 뜻은 대동소이(大同小異)하며 다르지 않아. 결국 자네가 말한대로 업이란 인과율(因果律)이며 어떠한 행위의 결과를 상징하는 것일세. 선(善)을 행하면 선행의 카르마가 쌓이게 되어 훗날 복덕(福德)의 근원이 되고, 악(惡)을 행하면 악행의 카르마가 쌓이게 되어 훗날 훼멸(毁滅)의 근원이 되는 식이지.”
“뭐야? 예전에 들어본 것 같은 종교이론이군.”
“그야 자네도 수많은 삶을 살아오면서 피치 못하게 밀교나 산스크리트어로 된 불교경전을 봤을 테니까….”
“그래. 대충 내가 아는 대로잖아. 뭐가 어려운 개념이란 거야?”
“좀 더 들어보게.”
내가 약간 신경질을 내자 나일라토프가 약간 타이르듯 말하고는 말을 이었다.
“이렇게만 보면 업(karma)과 인과율은 완전히 같은 것으로 보이지. 하지만 인과율은 법칙의 총체를 일컫는 단어이며 업이란 좀 더 구체적으로 인과율을 작동시키는 기둥의 역할이야. 그리고 단순히 인(因)이 있으니 과(果)가 있다는 직선형태의 원리와는 좀 다른 성질을 갖고 있지.”
“다른 성질이라면?”
“두 가지가 있어. 첫째는 이 우주의 법칙 속에서 업(karma)이란 비대칭적이며 불규칙하다는 것. 또 하나는 바로 인력(引力)이 존재한다는 것이야.”
“……?”
“이해를 못한 표정이군. 이게 정말 중요한 개념인데.”
무슨 개소리야?
내가 멍하니 있자 나일라토프가 뒤편에 있던 제갈현에게 말을 걸었다.
“제갈현. 갑작스럽게 끌려와서 느닷없이 현학적인 질문을 하게되어서 미안한데, 자네는 평소부터 착한 일을 하면 즉시 보답받고 나쁜 일을 하면 즉시 벌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편인가?”
“내게 물어본 것이오?”
“그렇네. 대학원생.”
그러자 제갈현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하…. 즉시 선행이 결과를 맺고 즉시 악행이 심판을 받는다면 외계인이 우리 광동성을 침략해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죽는 일도 없어야겠지. 내 소대원들을 광선총으로 쏴죽인 외계인들은 벼락맞아 죽었어야 했고. 하지만 정작 그 외계인들을 심판해준 것은 저 백웅이라는 기인이오.”
그렇게 대꾸한 제갈현이 목이 마른듯 홍차를 거침없이 꿀꺽꿀꺽 마셨다. 그리고는 말했다.
“정녕 무례한 질문이군. 내가 아무리 사람처럼 생긴 대학원생이라지만 그런 질문은 예의가 아니오.”
“자학성향이 심한 친구로군. 후훗.”
나일라토프는 빙긋 웃더니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방금 제갈현의 말대로야, 백웅. 이 세상은 잔인하게도 선행을 행했다 해서 바로 돌려받지 못하게 되어있고 나쁜 짓을 저질렀어도 바로 심판받지 않지. 아니, 애초에 선악(善惡)이란 것의 기준이 무척 모호하지 않은가? 특히 [옛 지배자]나 신격(神格)이 관여하는 문제에서는 더더욱.”
“그렇긴 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업, 카르마라고 불리는 점진적(漸進的) 인과율의 축(軸)은 분명히 존재하며 작동한다. 그 어떠한 주술사나 마법사도 업의 존재를 부정하지 못한다고. 무언가를 행했을 경우 업은 축적되며 어떤 식으로든 결과를 돌려받게 되어있다.”
“…무슨 말을 하고싶은 거지?”
“이것이 바로 업의 성질인 비대칭성이다. 업은 분명히 인과율을 머금고 있으며 원인과 결과가 존재해. 하지만 그 인과가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작용하게 되는지 그 육하원칙(六何原則)은 그 누구도 몰라. 무한의 혼돈이며 불규칙하다는 거야.”
“으음….”
“10년 전에 행했던 악행은 지금 당장 심판받을 수도 있고, 10년 후에 심판받을 수도 있고, 100년 후에 심판받을 수도 있어. 하지만 그 불규칙성을 이어가는 업(業)에는 어떠한 규칙도 기준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
나는 나일라토프의 말을 어느 정도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해한만큼 그에게 반문했다.
“이 세상의 모든 일의 시작과 결론이 제멋대로이고 혼돈스럽다는 말을 하는 건가?”
“그래.”
“거 참 간단한 얘기를 무척이나 꼬아서 하는군…. 세상 사람중에 그걸 모르는 사람이 대체 어딨다고 그래? 살다보면 다 아는 얘기 아닌가?”
도리어 저걸 모르는 놈이 병신일 것이다!
내가 어이없어하자 나일라토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제대로 아는 자는 거의 존재하지 않아. 왜냐하면 방금 말했던 첫 번째 성질, 카르마의 비대칭성과 불규칙성은 다들 체감하고 있지만 두 번째 성질인 인력(引力)은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는 영역이거든.”
“인력?”
“그래, 인력.”
나일라토프가 홍차를 달각 하고 내려놓으며 손깍지를 꼈다.
“사실 내가 외우주를 전함을 타고 돌아다니며 연구한 바로, 업은 불규칙한 혼돈이 아니라 분명한 규칙성이 존재해. 그리고 그 규칙 중 하나가 바로 인력 - [끌어당기는] 힘이다.”
“끌어당기다니 뭘?”
“인과율의 밀도(密度)에 따라 대우주의 혼돈속에 부유하는 무수한 오브젝트(object)들이 끌려당겨 온다는 소리다. 그 인과율의 끈이 얼마나 밀접한가에 따라서 인력의 힘도 달라지지. 그렇기에 인과율의 중심이 되는 전생자가 강력할 수밖에.”
“……?”
“함선 가이아를 이용해서 윤회의 도정을 돌아다니면서 측정한 결과이며 법칙이다. 이걸 제대로 논문으로 증명한 건 전 우주에 나밖에 없을걸!”
나일라토프는 자부심을 느끼는 목소리였지만 나는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듣지 못했다.
“……?”
“…….”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이자 나일라토프가 골치아파했다.
“흐음. 불가(佛家)의 표현을 써서 표현하는 게 쉬우려나? 자네는 연기(緣起)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이 있나?”
“어…. 그것도 인과율과 비슷한 뜻이 아닌가? 원인이 있으니 결과가 있다는….”
“비슷하지만 좀 다른 의미가 담겨있지. 그것은 바로 결과가 인연(緣)으로 인해 발생(起)한다는 알고리즘이야. 단순한 원인이 아닌 인연(因緣)이라는 게 무척 중요한 점이야.”
“…….”
“즉, 아까 말했던대로 인과율이 작용하는 육하원칙은 무한대의 혼돈이라서 원래 필멸자의 힘으로는 무슨 수를 써도 측정할 수 없는 영역이야. 그러나 사실 인연이 강하게 맺어져있는 존재들일수록 상호작용(相互作用)이 강하게 발생하게 되고, 그 상호작용 자체가 인과율을 움직이는 법칙성을 새로이 창조할 수 있다는 소리지. 그러므로 원초의 인과율 그 자체를 읽는 건 최상위신격밖에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인과율에서 파생한 연기, 즉 업(業)의 법칙성을 읽어낼 수 있다면 간접적으로 인과율을 읽거나 조작하는 게 가능하다는 소리야!! 이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알겠나!!”
나일라토프가 약간 얼굴이 벌게질 정도로 흥분해서 속사포처럼 빠른 설명을 했다. 나는 이런 나일라토프의 모습을 처음 보았기에 당황해서 손을 내저었다.
“지, 진정해.”
“후우. 카르마의 인력법칙을 발견한 건 내 인생 최고의 업적이라 다소 흥분했군. 그래서 이해한 거겠지?”
“아니…. 뭔 개소리야.”
“…….”
나일라토프는 마치 썩은 동앗줄을 씹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다시 안색을 회복하며 말했다.
“음. 기대도 안 했네. 진짜야.”
“…….”
“아무튼 쉽게 말하자면… 인연을 강하게 맺은 존재가 많을수록 그 자에게는 강한 인력이 발생하게 되고, 그 자에게로 인과율이 집속(集束)하기 쉽다네. 자네에게 지금 일어난 엄청난 우연도 아마 그 인력의 산물일 것이리라 생각되는군.”
“응? 인력 때문이라고?”
“그래.”
나일라토프가 힐끔 제갈현을 쳐다보더니 말을 이었다.
“자네는 무려 30번이나 전생하면서 대단한 인과율을 축적하고 있는 존재일세. 그리고 그 인과율에 집속되어 있는 업(業)이 얼마나 가공할 인력을 지니고 있는지는 나도 알 수가 없군…. 아마도 외우주로 나왔음에도 인연(因緣)의 업(業)이 작용하여 이전의 세계에서 관계 깊었던 인물을 다른 형태로 만나게끔 한 게 분명해.”
“어…. 그러니까….”
나는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이해하려고 애쓰다가 내가 이해한 만큼 말했다.
“내가 원래 세계에서 망량과 인연이 깊었기에 그 인력의 법칙 때문에 여기서도 망량과 동명이인을 만나게 되었다 그 소리란 말이냐?”
“오, 그래도 나름대로 잘 이해했군. 바로 그것일세.”
“그게 말이 되냐!! 그 인력법칙 하나로 이런 말도 안 되는 천문학적인 우연이 설명이 돼?!”
나는 어이가 없어서 소리를 버럭 질렀지만 나일라토프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설명이 되네. 왜냐하면 그 비과학적으로 보이는 인연의 인력이야말로 인과율의 법칙에 존재하는 핵심요소이기 때문이야.”
“……!!”
이, 이 새끼 날 놀리는 게 아니라 진심이야?!
내가 도리어 당황하자 나일라토프가 차분하게 말했다.
“나도 처음에는 너무나 미신, 오컬트적인 요소라서 믿을 수가 없었지. 하지만 과학을 고도의 경지로 연마하면 연마할수록…. 이 세상에서 과학이나 확률 같은 건 그저 누군가의 장난감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게 되었지.”
그는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
“진짜 중요한 건 바로 인과율이며 그 인과율에 작용하는 업의 법칙이야. 업의 인력이 존재하는 이상 확률은 부차적인 요소에 불과하지. 확률은 인력에 뒤늦게 끼워 맞춰져도 상관없어.”
나는 멍하니 그의 말을 듣다가 하나의 단어에 반응해서 반문했다.
“장난감?”
“그래. 말하자면 오픈월드(open world)를 생성하기 위한 기초적인 툴(tool)이나 프로그램의 코딩같은 게 과학이겠지. 하지만 정작 그 오픈월드를 즐기는 플레이어가 굳이 그 코딩의 세부사항까지 알 필요는 없어…. 툴조차도 그저 취향일 뿐.”
뭔가 우울하게 중얼거리던 나일라토프가 문득 정신을 차린 듯 화제를 돌렸다.
“뭐, 아무튼 그런거지. 아무래도 급하게 외우주로 나오면서 자네의 인과율이 인연을 끌어들인 거라고 보면 될 걸세. 망량이 이 시대의 인간이 아님에도 출현한 건 그런 이유겠지.”
“으음. 뭔가 석연치 않은데….”
내 감은 그게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것만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절반의 정답일 뿐이라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내가 꿍얼거리고 있을 때 나일라토프가 말했다.
“그리고 또 하나…. 아까부터 말하고 싶었던 건데, 자네는 외계인 파르텔퀴안을 쓰러뜨린 걸로 일이 끝난 게 아냐.”
“…엥? 그건 또 무슨 소리냐고.”
뜬금없는 말에 놀란 나는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이환웅이 있었다면 50일동안 고전하며 쓰러뜨렸을 놈들이라면서? 그걸 한나절도 안 되어서 다 때려부숴줬는데 내가 훨씬 더 많은 일을 한 게 아니냐고!”
“응. 너무 힘내버린 게 문제야.”
“뭐?”
삐빅 삐빅
허공에서 반투명한 자판같은 걸 꾹꾹 누르던 나일라토프가 말했다.
“자네가 너무 빨리 파르텔퀴안을 쓰러뜨린 탓에 그 힘에 호기심을 느낀 2~4티어의 외계인들이 지금 인류침공계획을 짜버리고 말았어. 본디 이환웅의 미약한 힘이었다면 그들의 호기심을 끌 일도 없었을 텐데 자네의 무공이 너무 강력하다보니까 생겨버린 일이지.”
“엥?”
“인류따위 외계인들에게 벌레나 다름없었는데 알고 보니 그 벌레가 말벌이었던 거지. 당연히 말벌부터 잡으려 들지 않겠나?”
“…….”
“어디 보자… 한 네다섯 부족만 더 때려잡으면 그래도 강대한 힘에 경각심을 가져서 원래의 인과율에 맞도록 수정할 수 있겠군.”
나는 나일라토프의 말에 기가 막혀서 외쳤다.
“씨발!! 그런 게 어딨어! 내가 아무 대가도 없이 그만큼 싸워줄 호구인 줄 알아?!”
“아무 대가도 없기는? 인류의 평화와 안녕이 기다리고 있지. 또한 세계수의 핵도 머지않아 먹을 텐데 그 정도도 못해주겠나.”
“으으.”
빌어먹을…. 왠지 계속 이용당하는 느낌이다.
저 놈이 인과율 계산을 했다는 것도 전혀 믿을 수가 없고 그저 편리한대로 부려먹으려는 거 아니야?
내가 곱지 않은 시선으로 나일라토프를 노려보고 있자 옆에서 듣고 있던 제갈현이 말했다.
“흥미로운 얘기인데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소.”
“호오, 뭔가?”
제갈현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업(業)에 인력이란 게 있다면 설마 백웅의 다른 동료들도 이 세계에서 보게 된다는 말이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