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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나는 나일라토프의 말을 들어도 잘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금 내 상황에는 생뚱맞은 이야기이기도 했고 그래서 뭐 어쩌라는건지 모르겠다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리둥절해하면서 말했다.
“…뭐 윤회의 중앙으로 가고싶다 그거군. 그렇다 치고 나를 여기로 데려온 이유는 뭔데?”
“이야기를 단순화시키길 좋아하는 버릇이 있군. 그건 안 좋은 버릇이야. 쯔쯧…. 조금만 머리를 쓰면 훨씬 많은 정보를 손에 얻을 수 있을 터인데.”
“…….”
나일라토프가 혀를 차며 말했다.
“하긴 영겁에 가까운 세월을 살 수 있는 전생자 입장에선 단순한 성격이 도리어 나을 수도 있겠군.”
“아 좀 지랄하지 마! 왜 나를 윤회의 도정으로 데려왔냐고.”
“간단히 말해서 다중우주의 무한한 혼돈 속에서 전생자가 죽으면 어떻게 될지 궁금해서다.”
“어?”
죽인다고?
뜬금없는 말에 내가 당황할 때 나일라토프가 태연히 말했다.
“너는 그 경우 원래 세계에서 전생할까, 아니면 이 무한한 다중우주 - 너희는 외우주라고도 부르는 세계 중 하나에서 전생하게 될까?”
“뭐라고….”
“이건 아주 중대한 실험이다. 너를 외우주로 데리고 나올 수밖에 없었지.”
나는 그 순간 나일라토프의 눈빛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아무런 감정의 기복도 없이 무덤덤한 눈빛 속에 숨겨진 순수한 열의를 알아채는 순간, 이 놈이 진심이라는 사실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오랜 경험으로 이 정도는 알 수 있는 것이다.
“야이 씨발!! 이런 데서 죽어줄 것 같냐!”
쐐액!
나는 순식간에 쇄도해서 나일라토프의 목을 베었다. 그러나 베었다고 생각한 순간 나일라토프의 모습은 그 자리에서 사라져 있었고, 환영인가 싶어서 멈칫하고 있을 때 나일라토프의 목소리가 이 전함의 사방에서 들려왔다.
[전함 가이아의 모든 능력을 다해서 전생자 백웅과 싸우는 시뮬레이션도 재미있군. 가이아의 승률이 그렇게 높지 않다는 게 흥미로워.]
“날 얕보면 큰코다칠….”
간만에 내 힘을 고평가받자 은근히 기분이 좋다. 내가 코웃음치려 할 때 나일라토프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합리적으로 생각하자면 굳이 싸울 필요도 없이 그냥 이 전함에서 보호장치를 해제하고 자네를 윤회의 도정으로 떨구기만 해도 끝이야. 자네가 과연 자력으로 자기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까?]
“……!!”
어 그러네?!
형언할 수 없는 광기가 나일라토프의 목소리에서 울려퍼진다.
[백웅. 나는 무척 번민하고 있다네. 나의 이 지적호기심만큼은 과학의 재능만큼이나 멈출 수 없는 광기…. 내 충동을 해결하고 싶은 마음이 끓어오른다네. 자네가 윤회의 도정에서 죽으면 어디서 전생을 시작할까?]
철컹! 철컹!!
끼기긱….
전함 가이아에서 육중한 쇳소리가 울리더니 뭔가가 열리는 듯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명백히 나를 [배출]하려는 시도가 틀림없었다.
진심이다.
이 새끼는 진심이다!!
‘뭐 이렇게 종잡을 수가 없어?!’
방금 전까지 태연하게 얘기하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나를 윤회의 도정에 떨궈서 죽이고 싶은 충동을 실현하려 하다니! 이성적인 과학자가 이렇게 충동적이어도 되는 것인가?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나일라토프가 나를 떨궈버리면 자력귀환이 거의 불가능한 건 사실이다. 또 다시 주시자와 만나서 결판을 내던가 해야 하는데 만난다는 보장도 없고 만나도 외신 주시자가 내게 우호적이리란 법도 없었다.
절실히 느껴진다.
이놈이 [기어오는 혼돈]의 가면인 이유가!
‘제기랄! 어쩔 수 없지.’
나는 잠시 얼어 있다가 이내 최대한 합리적인 판단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해 봤어!! 그러니까 그만해!”
[해 봤다니?]
“니 말대로 외우주에서 죽어본 적 있다고오오오!!”
내가 소리를 빽 하고 지른 순간이었다.
슈르르륵
갑자기 나일라토프의 모습이 눈앞에 나타났고 기분 나쁜 쇳소리도 멈추었다. 나일라토프는 엄청난 호기심을 보이며 말했다.
“정말인가? 언제? 어떻게?”
“…예전에 딱 한 번.”
“자세한 이야기를 해 주게!! 부탁이야.”
나는 주먹을 꽉 쥐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개소리 집어쳐 미친 새끼야! 이런 식으로 두 번 다시 협박하지 않는다는 약속부터 해라.”
“그러지. 미안하네.”
어느새 정중하게 사과를 하는 나일라토프의 모습을 보자 황당하기까지 했다. 당연히 저런 사과는 아무런 진심이 담겨있지 않으니 받아도 의미가 없다. 그저 사람을 기만하기 위한 행위에 불과하리라.
나는 그 모습을 보자 표정이 일그러지면서 생각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 새끼도 [가면]이 맞아….’
아마 가면의 특징은 절세무비한 재능뿐만이 아닐 것이다.
그 재능만큼이나 형언할 수 없는 독특한 광기와 분위기 - 그것은 단순히 재능의 차원이 아닐 것이리라.
“…그리 과거의 일도 아니군. 27번째 삶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경청하려는 듯 몸을 앞으로 쑥 내민 나일라토프를 잠시 쳐다보던 나는 말을 이었다.
“그 때 나는 [가면] 신투지존을 탐색하려고 외우주로 간 적이 있어. 그리고 거기서 신투지존을 찾는 데는 성공했지만 진공가향을 시도해서 성공하는 바람에 거기서 같이 죽고 말았지.”
“호오! 진공가향이라? 그건 설마 [아버지]를 소환하는 공양의식을 말하는 건가?”
“뭐? 알고 있나?”
“내 세계에서도 같은 게 시도되었다는 기록이 있지. 그렇다면 아마 그 세계가 멸망한 건 틀림없겠군. 그래서 죽은 다음엔 어떻게 되었지?”
정말 아는 게 많은 놈이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어떻게 되긴 뭐가 어떻게 돼. 원래 세계에서 전생해서 새로운 회차를 시작했지. 원래시기와 장소 그대로.”
“……!!”
잠시 동안 충격 받은 표정을 짓던 나일라토프가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
“저, 정말인가? 내 이론과는 완전히 다르군…. 윤회의 도정에서 전생자가 죽으면 다른 다중우주로 시작점이 옮겨갈 것이라는 이론이 99.75퍼센트의 설득력을 갖고 있었는데….”
“엉? 넌 그렇게 생각했다고? 그러고도 날 바깥으로 추방시키려고 했단 말이냐? 이런 썩을 놈이….”
발끈한 내가 참지 못하고 욕을 했지만 놈은 신경 쓰지 않고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그 사실이 의미하는 건…. 선악과(善惡果)를 이용해서 다중우주를 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전생자의 전생(轉生)이 이뤄진다는 것. 범우주상수와 관련없이 시작점이 고정이라는 건 설마….”
나일라토프가 중얼거리다가 번뜩 뭔가를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공포와 절망이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처음부터 나는 중앙에 못 가는 거였잖아!!”
“……?!”
“이런 제기랄… 크흐… 흐흐흐흐…. 이 짓거리가 전부… 무의미….”
풀썩
갑자기 나일라토프가 그 자리에 주저앉듯 쓰러졌다. 놈은 아무런 힘도 없이 탈력한 듯한 상태였고 시선 또한 멍하니 바닥만 쳐다보고 있었다. 순식간에 폐인이 된 듯한 나일라토프를 보자 나는 황당해졌다.
“이봐. 그게 뭐가 어떻다는 건데? 너는 왜 중앙에 못 가는데?”
“…상수가 고정이라면, 고정된 존재 이외에는 원의 지름이 무한대가 될 테니까.”
“뭐?”
“나는 못 가는 거였어…. 그래….”
나일라토프는 마치 바보라도 된듯 입을 벌리며 백치처럼 중얼거렸다. 한 눈에 봐도 거대한 심적 충격을 받은 듯 했다. 나는 그 모습이 도리어 짜증나서 말했다.
“아오. 너만 알아듣는 얘기를 주절거리면서 왜 또 힘이 빠진 거냐고.”
“…….”
“정신차려!! 이제 네가 원하는 것도 알려줬으니까 나를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 달라고! 난 여기에 오래 있고 싶지 않아.”
내가 나일라토프의 어깨를 쥐고 흔들자 나일라토프는 멍하니 어깨를 흔들리다가 문득 초점 없는 눈으로 내 쪽을 보더니 말했다.
“…하나만 더…. 네가 몇 번을 전생했는지는 아직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이번이 30번째다.”
“30번…. 아직 초반인가….”
나는 ‘초반’이란 단어를 듣자마자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리고는 말했다.
“이봐! 넌 어떻게 내가 30번 전생했다는 말만 듣고도 초반이라고 단정 짓지? 내가 그렇게 많이 죽을 것처럼 생겼어?”
이런 건 따져봐야 해!
‘이 놈은 뭔가 알고있다!’
뭔가 따져볼수록 중대한 정보를 줄 것 같은 직감!
이어진 나일라토프의 대답에 나는 흠칫하고 놀랐다.
“아니…. 난 이미 계산을 했기 때문이다. 전생자가 존재한다면 그의 전생에 가장 큰 격변이 일어날 횟수가 몇 회인지를.”
“뭣!!!”
“전생자는 니알라토텝이 가장 신경쓰는 존재…. 당연히 윤회의 도정을 돌아다니며 시뮬레이션을 돌려서 전생횟수에 대한 연구를 해 봤지. 그래야 나중에 니알라토텝과 [거래]를 시도해볼 여지라도 생길 테니….”
그런 것도 계산할 수 있다고?!
나는 잠시 굳어 있다가 놈의 멱살을 잡고 외쳤다.
“몇 번인데!! 나는 앞으로 몇 번을 더 전생할 수 있냐고!!”
너무나 간절한 정보!
하지만 나일라토프의 입에서 흘러나온 얘기는 다소 실망스러웠다.
“몇 번을 더 할지는 모른다…. 애초에 나는 전생이 어떤 매커니즘인지조차 몰랐으니까…. 하지만 윤회의 도정 내부의 회전수를 측정해서 전생자의 전생이 몇 회째에 이르렀을 때 가장 큰 변화가 일어날지는 측정할 수 있었지….”
“뭐?”
“말했잖나. 이 윤회의 도정은 회전하고 있다…. 그건 굉장히 큰 의미를 갖고 있지. 근원에너지를 알 수 없는 원(圓) 운동이 질서의 엔트로피를 보존하고 있는데 하필이면 가장 거대한 혼돈의 무한세계에서 질서가 유지된다는 모순.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던 혼돈과 질서의 관계성을 처음부터 무너뜨리는 거였지….”
“아니 좀 개소리하지 말고 그래서 그 변화라는 게 언제 가장 크게 일어나냐고!!”
내가 멱살을 잡고 다그치자 나일라토프가 입을 열었다.
“666번째다.”
“……!!”
“계산대로라면 666번째 회전이 일어날 때 원운동에 최초의 모순(矛盾)이 발생한다고 시뮬레이션에 나왔지. 하지만 그건 무한궤도의 실패라기보다는 원운동의 에너지가 전이해서 다른 형태의 운동으로 변화하는 것일 가능성이 큰….”
아 또 못 알아듣는 개소리하네!
나는 성질을 못 참고 나일라토프의 말을 끊어먹었다.
“666번째에 내 전생이 끝난다는 거냐?!”
“모른다. 끝날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 때 가장 큰 변화가 생기겠지. 윤회의 도정에 깃들어있는 회전운동은 전생자와 직접 관련이 있다는 게 내 가설이니까…. 다만 전생자를 직접 만난 적이 없으니 상관관계를 직접 계산하진 못했지.”
“음….”
“666회차와 비교하면 30회차는 초반이 맞지. 안 그런가.”
“그건 그런데….”
뜻밖의 정보!
‘666번째 전생에서 크나큰 격변이 일어나는 거군!’
이 정보의 신뢰성은 솔직히 말해서 별로 없다. 방금 전까지 나를 윤회의 도정에 떨궈서 미아로 만들어버리려던 개 같은 놈이 무슨 말을 주워섬기든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적어도 외신을 피해서 도망다니며 외우주를 탐험할 정도의 과학자가 과학에 관련된 말을 하는 거라면 참고해둘 가치는 있으리라. 과학에 목숨을 건 놈이라면 자기의 전공분야에서 농담이나 기만을 일삼을 것 같진 않았다.
스윽
나는 슬며시 나일라토프의 멱살을 놓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한숨을 쉬었다.
“하아. 이제 지쳤으니까 그만하자. 나를 원래 세계로 되돌려주고, 너는 네 제자인 이환웅 소령을 데리고 떠나. 서로 지금까지처럼 살자고.”
“…….”
“왜 대답이 없어?”
왜일까?
갑자기 조금 활력을 되찾은 듯한 나일라토프가 빙긋하고 밝게 웃었다.
“흠…. 아까 얘기하는 걸 깜박했군. 사실 좌표를 잊어버렸다네.”
“어?”
“자네가 있던 세계의 좌표가 유실되었다고. 너무 급박하게 주시자의 시선을 피하는 바람에 말이야.”
나는 내가 또 뭔가 잘못 들었나 싶어서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놀라기보다는 허허 웃으면서 말했다.
“하하. 장난하는 거지?”
“하하하….”
“하하하. 장난 좀 그만….”
“장난이 아닌….”
나는 성질이 폭발하고 말았다.
“이 개새끼가!”
꽈앙
푸콰콱
내가 뇌신권으로 나일라토프의 대가리를 치자 이번에는 제대로 터뜨려졌다. 워낙 빠르게 쳤기에 나일라토프가 신비한 과학의 힘으로 피하지 못한 듯 했다. 나는 나일라토프를 혈편으로 만들자 약간 체증이 내려간 기분이 들었으나 이윽고 아까처럼 사방에서 나일라토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화내지 말게. 다시 좌표를 찾을 수 있으니까.]
“빌어먹을! 아가리 닥치고 당장 내 앞에 나와!! 네가 죽든 내가 죽든 어디 결판을 내자고!!”
나일라토프의 종잡을 수 없는 짓거리에 머리끝까지 열받아서 내가 소리를 질렀지만 나일라토프가 아무렇지도 않게 무덤덤하게 맞받았다.
[그럼 손해지. 자넨 죽어도 31회차를 시작하면 그만이지만 나는 죽으면 끝이잖나.]
“뭐 어쩌라고!”
[좋아…. 생각해보니 내가 일방적인 면이 있긴 하군. 그렇다면 내가 자네에게 한 가지 큰 도움을 준다면 진정할 수 있겠는가?]
나는 으르렁대며 검을 뽑았다.
“네놈이 내게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도움은 당장 나를 되돌려 보내주던가 그 목숨을 내놓는 것뿐이다.”
사람을 밑도 끝도 없이 갖고 노는 이런 놈과 끝까지 협력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쿠구구구
나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모든 내공과 기력을 집중해서 검에 충전시켰다. 그리고 구궁파천뢰의 공명이 강해지기 시작하자 나는 그대로 힘을 정제해서 한 자루의 뇌검(雷劍)을 만들어내었는데, 여태껏 만들어본 의념기 중에서 가장 압축되어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파지지직!!
말 그대로 내 내공이 일순간 바닥을 보일 정도로 압축해서 만들어낸 궁극의 뇌검!
이걸로 무량단을 써서 베면 어느 정도의 위력일지는 나조차도 상상할 수 없었다. 이렇게까지 기를 모아서 단순히 파괴를 하려고 써본 적은 달리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전함에 들어와서 열받은 만큼, 놈을 한번에 해치워버리면 신날 거라는 생각을 하며 서서히 뇌검을 들어올렸다.
‘죽어라 나일라토프!!’
얼마나 대단한 미래기술로 만든 전함인지 모르지만 이걸 맞으면 팔부신중 본체라도 중상을 입을 텐데 멀쩡할 리가 없어!
내가 뇌검을 막 휘두르려는 순간 - 나일라토프의 한 마디가 귓가에 박히는 게 느껴졌다.
[과학기술로 너를 똑똑하게 만들어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