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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가면?!
나는 그 말 한마디에 바로 과거의 일이 생각났다. 그리고는 당황해서 말했다.
“너, 너도 신투지존같은….”
“흐음? 과연 전생자라서 그런가…. 나같은 가면을 이미 만나봤나 보군.”
“…….”
나일라토프는 아무런 경계도 하지 않고 말했다.
“하긴 전생자는 하나뿐일 테지만 가면은 너무 많으니까 말이지.”
“……?!”
이게 무슨 소리지?
나는 나도 모르게 반문했다.
“이봐! 뭔가 알고 있는 거냐?”
“글쎄. 알고 있어도 안 가르쳐주고 싶은데.”
“뭐?”
“너 방금 내 명치를 때려서 죽였잖아. 너 같으면 자기를 죽인 놈한테 미주알고주알 정보를 떠들어대고 싶나?”
“…….”
어…. 할 말이 없다….
내가 입맛을 쩝쩝 다시자 나일라토프가 히죽 웃었다.
“뭐 좋아. 공간붕괴까지 25분 23초 정도는 여유가 있겠군. 이야기나 좀 해 볼까?”
따악
나일라토프가 손가락을 딱 하고 마주치자 순식간에 나와 나일라토프의 모습이 웬 응접실으로 이동해 있었다. 나일라토프는 화려한 서양풍의 응접실에서 고풍스러운 의자에 앉으며 어느 새 탁자 위에 올라와있던 홍차의 잔을 들었다.
홍차를 한 모금 마신 나일라토프가 손짓을 했다.
“앉아서 얘기하지.”
“…….”
아무리 봐도 이런 수법은 마법이나 주술같은데, 이게 과학이란 말인가?
내가 봐 왔던 과학과는 너무 다르다.
내가 따라서 의자에 마주앉자 나일라토프가 말했다.
“역시 의문의 존재와 얘기하는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닌가보군? 쓸데없는 경계심이 없는 걸 보면.”
“…별의별 일이 다 있었으니까.”
“흐흠. 역시 와 보기를 잘 했어.”
“네 녀석, 무슨 얘기를 하기를 원하는 거냐?”
내 질문에 나일라토프가 홍차를 후룩 하고 마시더니 대꾸했다.
“우선 어떤 경과로 나를 여기에 소환했는지 말해줘.”
“내가 그래야 할 이유는?”
“말해준다면 나 또한 네게 궁금한 걸 하나 대답해 주지. 괜찮은 거래 아닌가?”
“…좋아.”
경험상 이런 놈은 죽이려 해도 죽일 수가 없다. 도리어 이렇게 순순히 정보거래로 넘어가 준다면 내 입장에선 다행인 것이다. 나는 정신을 바짝 집중하며 목갑에서 흑요석을 하나 꺼냈고, 거기에 수해에서의 내 기억을 불어넣어서 나일라토프에게 건네주었다.
“여기 기억을 넣었다. 이걸 보면 왜 소환되었는지 알 수 있을 거다.”
“그래?”
하지만 나일라토프는 받지 않았다. 받기는커녕 멀뚱히 홍차를 마시면서 내 손을 민망하게 만들 뿐이었다. 나는 당황해서 말했다.
“이, 이건 기억을 전송하는 흑요석이다. 받으라고.”
“싫은데.”
“뭐?! 이게 뭐냐면….”
나일라토프가 고개를 절레 저었다.
“[위대한 종족]의 기억전송술법은 알고 있어. 흑요석을 매개체로 하는 이유는 아마 원래 쓰이는 금속을 지구상에서 구할 수 없으니 하위호환인 흑요석을 쓰는 거겠지. 전생하면서 그 종족과 거래해서 술법을 획득했나보군?”
흑요석의 술수를 알고 있다?!
나는 황당해하며 말했다.
“알면 받지 왜 안 받아. 이것보다 편하게 기억을 보여주는 술법은 없….”
“아니까 안 받는 거다.”
“왜?”
나일라토프는 홍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 술법을 쓰면 전송기록이 남거든. 주시자만 신경 쓰기도 벅찬데 그놈들까지 신경 쓰면서 여행하긴 싫어.”
엥?!
이게 무슨 말이야?!
‘전송기록?!’
나는 깜짝 놀라서 말했다.
“뭐, 뭣?! 지금 그건 무슨….”
“흠. 모르고 있었나?”
“무슨 말인지 말해줘!!”
“싫은데.”
“…….”
“…라고 말하고 싶지만.”
나일라토프가 다소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궁금한 것에 대해 너도 대답해주는 식으로 일대일 교환을 하자. 어떤가?”
“좋아.”
“정보거래의 원칙이 수립되었군. 그럼 첫 정보는 서비스로 넣어드릴까.”
나일라토프가 말을 이었다.
“네가 쓰고 있는 흑요석의 전송술법은 기억을 전송하는 술수지. 그럼 구체적으로 어떤 원리로 기억을 전송하는지 이해는 하고 있나?”
“어? 그… 그게….”
나는 말을 더듬었다. 그리고는 일단 이해하는대로 대충 말했다.
“내 기억을 흑요석에 불어넣으면 기억이 저장되고, 술수를 쓰면 저장된 기억을 타인에게 보여줄 수 있는 거잖아.”
“네게 술법을 전승한 자가 그 이상의 이야기는 하지 않던가?”
“1인칭과 3인칭의 시점으로 달리 보여줄 수 있다고 하던데….”
“흐음…?”
약간 놀란 듯한 표정을 짓던 나일라토프가 말을 이었다.
“아하, 생각보다 [위대한 종족]에게 깊은 정보를 이끌어냈나 보군. 그건 나도 모르고 있었는데.”
“그게 대단한 건가?”
“…3인칭이 가능하다는 건 [위대한 종족]이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를 말해주는 정보라고 할 수 있지. 뭐 일단 본론으로 되돌아가자구.”
손을 휘휘 젓던 나일라토프가 내게 질문했다.
“혹시 USB라는 걸 알고 있나?”
“알아. 흑요석의 술법처럼 정보를 담는 기록매체잖아. 미래시대도 약간은 살아봤어. USB에 자료를 담아서 다른 컴퓨터에 꼽으면 전송시킬 수 있잖아.”
내가 사마령 교수에게 배운 내용을 이야기하자 나일라토프는 히죽하고 웃었다.
“흑요석의 술법은 USB인 척 하지만 사실 클라우드 스토리지(cloud storage)라고 보면 된다는 말이야. 여기까지도 이해했나?”
“……?”
클라우드 스토리지?
그게 뭐지?
내가 어리둥절해하자 나일라토프가 말했다.
“쉽게 얘기하자면 네가 흑요석에 넣은 자료는 USB처럼 그 흑요석에 보관됨과 동시에 어딘가에 존재하는 [거대한 기억공간]에 함께 전송된다. 그 기억공간은 [위대한 종족] 본인들도 섣불리 열람할 수 없는 극비공간이지만 어쨌든 유사이래 모든 기억이 보관되어 있는 곳이지.”
“……?!”
“그 놈들이 그걸 쉽게 열 순 없겠지만 신경 쓰이거든. 어쨌든 전송기록이 남는 셈이고, 그 전송의 시기나 빈도 정도는 [위대한 종족]에서 알 수 있어.”
“뭐라고…!!”
나는 경악해서 외쳤다.
“내가 흑요석으로 기억을 전송할 때마다 [위대한 종족]이 그걸 다 봤단 말이냐!”
나일라토프가 고개를 저었다.
“음. 아니, 뭔가 잘못 이해했나 보군. 정확히 말하자면 그 공간은 클라우드 스토리지이지만 동시에 블랙박스(black box)이기도 해. 평상시에 열람할 수 없고 긴급상황이 발생했을 때만 까볼 수 있는 그런 공간이야. 관리자는 따로 있어.”
“……?”
“[위대한 종족]이 볼 수 있는 건 네가 언제 어떻게 몇 번이나 전송술을 시전했다는 간단한 내역일 뿐, 기억의 내용 자체는 알 수 없어. 이해됐나?”
“잘 모르겠다….”
“설명하기 귀찮으니까 그냥 넘어가지. 아무튼 네게는 별로 해가 되진 않겠지만 나한테는 그런 전송기록이 남아있으면 귀찮다는 거다.”
“왜 귀찮은데?”
“나는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이단(異端)의 행로(行路)를 가는 중이거든. 괜히 그 놈들하고 얽히기 싫다는 거지. 일단 나를 막아세울 능력 정도는 있는 놈들이니까.”
“…….”
정말 뭔가 알 수 없는 놈이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일단 머릿속으로 들은 내용만 외우기로 했다. 일단 외워두면 나중에 다른 동료가 이 내용을 해석해줄 것이다.
나는 말했다.
“어쨌든 나한테 해가 되지 않는다면 상관없는데…. 그래서 내가 흑요석을 쓰지 않고 직접 입으로 경위를 설명해주길 원한다는 말이냐?”
“그렇지.”
“좋아. 말해주지.”
나는 수해에 들어온 이후의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내 이야기를 차분하게 듣던 나일라토프가 입을 열었다.
“즉 내 제자인 이환 소령의 요청으로 [경매]에서 나를 불러달라는 소환을 하게 됐다는 말이군.”
“그래. 이환웅의 말로는 그냥 과학자라고 해서 괜찮을 줄 알았지.”
“괜찮지 않나? 과학 그 자체라구.”
“…….”
“후후후. 보기보다 인성이 그렇게 마모된 놈은 아닌 듯 싶군. 재밌어.”
뭐가 재밌는지 웃고 있던 나일라토프가 말했다.
“사실 지금 그 모습이 신(神)이 빚었을 법한 비대칭적 미(美)의 산물이라서 이미 인간을 초월해버린 전생자가 아닐까 싶었는데.”
“아….”
“그 모습이 본래 모습은 아니지?”
복희의 모습을 보고 하는 얘긴가?
나는 어리둥절해하다가 대꾸했다.
“그래.”
“유희를 위해 바꾼 모습인가?”
“유희?”
“죽어도 죽어도 반복해서 살 수 있으니 외형 정도는 맘대로 바꾸며 즐길 수도 있지. 나도 유희를 즐기는 입장이라 이해한다.”
“…….”
삶을 놀이라고 여기냐는 질문이었군.
‘놀이라고? 제기랄… 진공가향이 목표인데 이게 놀이일 리가 있겠어!!’
나는 왠지 언짢은 기분이 들어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개소리 말고 네가 [가면]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 이야기해라. 정말 네놈은 니알라토텝의 가면이냐?”
“흐음…. 본론으로 들어왔군.”
말이 끝나는 순간 다시금 탁자 위에 홍차가 소환되었고 나일라토프가 홍차를 홀짝였다. 홍차의 향을 음미하던 나일라토프가 말했다.
“그걸 대답해주기에 앞서서 전생자 백웅. 너는 [가면]이 뭐라고 생각하지? 가면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지 말해줄 수 있겠나?”
“가면….”
나는 나일라토프의 말을 듣고서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대답했다.
“나는 인간이면서 [가면]인 존재를 외우주로 가서 본 적이 있어. 그리고 그 자의 존재를 흡수하려고 진공가향 때 니알라토텝이 찾아왔었다.”
“호오! 재밌는 얘기군.”
“그는 자신을 ‘신의 찌꺼기’이며 비인간(非人間)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그는 자유의지가 있었고 무엇보다도 무신백좌의 일원이며 신역절기를 획득한 자였다.”
“…….”
“그리고 다른 가면도 봤는데, 그놈은 천계의 고위간부이면서 때때로 니알라토텝 그 자체인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자기자신의 의지를 각성한 때도 있었거든….”
삼청 태허천존을 생각하니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다.
자기의지가 있다가도 없는 존재라니.
나는 이야기하다가 나 자신이 혼란스러워져서 나일라토프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가면이란 건 대체 뭐냐? 너희는 [기어오는 혼돈]의 화신같은 거냐? [가면]이 각성하면 화신이 된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니알라토텝의 하위 화신같은….”
“이봐. 뭔가 잘못 이해하고 있군.”
“잘못 이해했다고?”
나일라토프가 홍차를 후룩 마시더니 말했다.
“니알라토텝은 [기어오는 혼돈]과 다른 존재야. 일단 그 전제를 확실히 하라고.”
“……!!”
“네가 봤던 니알라토텝이 외신 [기어오는 혼돈]과 같은, 동일(同一)한 존재가 아니라는 소리야. 이해가 되나?”
“무, 무슨 소리냐! 그 놈이 그 놈인 거 아니냐?!”
“달라.”
달칵
나일라토프는 홍찻잔을 내려놓으며 나직이 말했다.
“[가면]이 스스로 가면임을 각성하고 나서도 니알라토텝에게 자신의 존재를 의탁하지 않는 이유가 그 때문이거든. 나도 반항하는 [가면] 중 하나이고.”
“……?”
“흠. 이걸 참 뭐라고 설명해야 좋을까….”
그는 고민하듯 자신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돌려서 꼬았다. 그러더니 입을 열었다.
“전생자. 얘기하는 걸 들어보니 넌 몇 번인가 니알라토텝과 마주쳤겠군. 그렇다면 그 니알라토텝이 외신(外神)급의 힘을 갖고 있던가?”
“으음….”
나는 곰곰이 과거에 모습을 드러낸 니알라토텝의 권능을 생각해 보았다. 신투지존을 먹어치우고 모습을 드러내었을 때, 그리고 28회차 막바지에 나타났던 니알라토텝. 나는 그 막강함을 보았던 기억을 떠올리며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외신급의 힘인지는 모르겠지만 삼황오제보다 훨씬 강해보였어. 왜냐하면 나는 [기어오는 혼돈]이 삼황오제 전부를 순식간에 전멸시킨 걸 본 적이 있으니까.”
“응? 또 헷갈려하는군. [기어오는 혼돈]과 니알라토텝은 다른 존재라니까.”
“아.”
“…이거 참, 뭔가 멍청해보이는 전생자군. 다시 한 번 잘 생각해 봐. 니알라토텝이 외신급의 힘을 갖고 있었어?”
“어…. 그게….”
나는 한참동안 고민해보았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굉장히 강하긴 했지만 그게 외신의 힘인가는 잘….”
외신이라기엔 뭔가 부족하게 느껴졌었다. 내가 솔직히 얘기하자 나일라토프가 흡족한 듯 말했다.
“역시. 멍청하긴 해도 상황파악은 잘 하는군.”
“…….”
“즉 그거야. 니알라토텝 또한 [기어오는 혼돈]의 일부에 불과해. 매우 강대한 존재인 건 사실이지만 외신의 격까지는 아니지. 그래서 니알라토텝이 정말로 모든 봉인을 풀어서 승천했을 때 어떤 존재가 될지는 아무도 몰라. [기어오는 혼돈]이 실제로는 어떤 존재인지도.”
나는 아리까리했지만 일단 이야기를 정리해 보았다.
“…그러니까 전 우주에 퍼져있는 [가면]이란 놈들은 전부 자유의지가 있고, 니알라토텝을 자신의 주인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는 거냐? 니알라토텝이 [기어오는 혼돈] 본체 그 자체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셈이지. 다만 직접 대면했을 때는 그 압도적인 힘 때문에 굴복하는 편이지만….”
그렇게 말한 나일라토프가 말을 이었다.
“가면이 화신으로 승급한다는 것도 단순히 니알라토텝과 접촉하여 그에게 굴복하여 자아를 의탁하였으며, 나아가서 니알라토텝을 매개로 [기어오는 혼돈] 본체의 힘을 채널링(channeling)받는다는 얘기일 뿐이지. 결국 우리 자신이 승급하는 게 아니라 단말이자 도구로써 활용된다는 것 뿐.”
“…….”
“단언하지. 모든 [가면]은 자유의지가 있어. 하지만 그 자유의지로 니알라토텝에 굴복하는 걸 선택하는 놈이 많을 뿐이야.”
“그 말은… 너도 니알라토텝의 수하는 아니라는 말인가?”
“지금은.”
“지금은?”
“내가 원하는 답을 찾지 못한다면 나도 나중에 그 길을 택하게 될지도 모르지….”
말꼬리를 흐리는 나일라토프의 표정은 약간 우울해 보였다. 그러더니 재차 말을 했다.
“또한 모든 가면은 처음부터 절세무비(絶世無比)한 재능을 하나씩 갖고 태어나게 되어있어. 종족도 성별도 스타트지점도 모든 게 랜덤이지만 그것만큼은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지.”
“절세무비한 재능? 설마 거기에 도둑질 재능도 있나?”
“당연히 있겠지. 모든 재능이 존재해. 아마도 네가 만나봤던 중에 [도둑질]의 가면이 있었던 모양이군.”
“…….”
신투지존.
나는 그의 존재를 떠올리자마자 번뜩 생각나는 게 있었다.
‘여태껏 가면이 확실했던 존재들은 진천휘, 신투지존, 태허천존….’
진천휘의 재능은 말할 것도 없다. 천재 제갈유룡조차도 진천휘의 재능에 약간의 열등감을 느꼈을 정도로 천하에 다시없는 천재! 거의 모든 방면에 대단한 재능을 지녔다고 들은 바가 있었다.
신투지존의 재능은 천하무적의 도둑질 재능과 [듣는] 재능. 아마 둘이 거의 같은 재능일 것이리라.
마지막으로 태허천존의 재능은 뭔지 모르겠지만 천계의 삼청쯤 되는 존재라면 당연히 거대한 재능을 지니고 있었으리라.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나일라토프에게 말했다.
“그 말대로라면 너는 과학자의 재능이 있다는 건가?”
“그래. 그리고 재능을 깨닫고 내가 [가면]인 걸 깨달았을 때 제약도 하나 달아놨지. [과학]을 제외한 힘을 쓸 수 없다는 제약을 말이야.”
“왜 그런 거냐?”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과학 말고 주술이나 마법, 술법 등을 같이 익히면 더 막강해지지 않은가? [가면]이 스스로 제약을 건다는 경우는 나일라토프 뿐이었기에 내가 어리둥절해하자 나일라토프가 씨익 웃었다.
“그래야 윤회의 도정으로 나아갈 정도로 내 재능을 개화(開化)시킬 수 있었거든.”
“응? 윤회의 도정?”
“모르나?”
“음.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그 때였다.
삐 - 익
삐 - 익
뭔가 기분 나쁜 경고음이 울리더니 전함 내부가 가득 시뻘건 색의 형광빛으로 가득찼다. 그 경고음과 붉은빛을 보던 나일라토프가 느긋하게 말했다.
“흐음. 얘기하다보니 거의 공간이 붕괴할 시간이 다 되었나보군.”
“뭐?! 공간이 붕괴하면 죽는 거 아니냐?!”
“가만히 있으면 그렇게 되겠지.”
“빨리 뭔가 손을 써 봐!!”
내가 재촉하자 나일라토프가 말했다.
“마침 잘됐어. 이렇게 된 김에 직접 볼 수 있게 해주지.”
“뭐?”
“가이아(Gaia). 본래 위치로 항로를 되돌려라.”
나일라토프의 명령이 떨어지자 근처에 있던 그 동그란 기계가 기계음으로 대꾸했다.
[전함, 외우주로 도약 중…. 10초 후 넘어갑니다.]
쿠오오오오오!!
거대한 굉음과 함께 사방이 어둠으로 물들었다. 나는 한동안 의자에 앉은 채로 가만히 버티다가, 꽤 시간이 지났을 때 맞은 편에 있던 나일라토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윈도우 오픈(window open).”
츠아아 -
잠시 후 사방의 어둠이 걷히더니 주변의 풍경이 원형 구체 바깥으로 비쳐보였다. 마치 우주선 내부에서 바깥을 장벽 없이 내다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나타난 것은 우주공간이 아니라 그저 완벽한 백색(白色)의 공간이었다.
아니, 이건 백색이 아니다.
무(無)이자 혼돈!
이 완벽한 공백과 허무의 공간은 예전에도 한 번 느껴본 적이 있었기에 나는 눈을 부릅떴다.
“여, 여기는…!!”
“와본 적 있나 보군.”
나일라토프가 히죽하고 웃었다.
“여기가 바로 윤회의 도정. 무한겁(無限劫)의 세계다.”
츠츠츠츠
전함이 혼돈의 백색공간을 뚫으며 서서히 나아가자, 마치 액체에 물 한방울이 떨어지는 것처럼 옅은 파장이 일어나더니 함선의 끝이 사라지는 게 보였다. 그리고 스며들듯이 전함 전체가 빨려들어가자 잠시 후에는 방금 전과는 반대로 시꺼먼 어둠만이 남아있는 공간이 보였다.
구웅 -
전함에서 큰 구동음이 났다. 그러자 나일라토프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슬아슬했군. [주시자]한테 들킬 뻔 했어.”
“주시자…!!”
나는 내 생각이 맞다는 걸 느끼며 크게 외쳤다.
“이봐!! 난 방금 거기에 가본 적 있었어! 거기서 주시자의 허락을 맡고 다른 외우주로 갈 수 있는 거였잖아.”
“호오. 잘 알고 있군. 주시자와 얘기해 봤나?”
“그래! 윤회의 서쪽이니 어쩌니….”
나일라토프가 내 말을 듣더니 다소 놀란 듯 했다.
“흐음…? 생각보다 전생자라는 건 대단한 존재로군. 감히 맞설 엄두도 나지 않아서 맨날 도망다니는 그 공포스러운 외신과 정면에서 얘기를 해봤다니.”
“어? 도망이라니?”
“후후. 불명예스러운 소리지만 그렇다.”
나일라토프는 씩 웃으며 말했다.
“나는 외우주를 돌아다니며 여행하는 방랑과학자 나일라토프! 하지만 외신 주시자한테 허락받은 게 아니기에 걸리면 큰일난다고.”
“…….”
“방금도 시선에 걸릴 뻔 했는데 초양자 동시성 차폐막으로 확률을 변동시켜서 간신히 튀었거든.”
나는 그 말을 듣자 어이가 없어서 말했다.
“이봐! 뭐하러 외신한테 맞서면서까지 이렇게 위험한 외우주를 돌아다니는 거야?”
“방금 네가 했던 말에 정답이 있지.”
“뭐?”
“윤회의 서쪽.”
나일라토프가 끼긱 하고 자신의 고풍스러운 서양 의자에 전신을 뉘이며 말을 이었다.
“외우주를 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게 바로 이 윤회의 도정이야. 그리고 윤회의 도정이라고 하는 이 무한한 겁(劫)의 공간은 사실 회전하고 있어. 그리고 회전하는 와중에도 동서남북(東西南北)의 방위가 명확히 구분되어 있지. 또한 주시자 뿐만이 아니라 또 다른 외신이 이 공간을 유영하고 있기도 해.”
“……!!”
“근데 동서남북이잖아. 그럼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지 않아?”
“뭐가 궁금한데.”
“동서남북의 방위가 존재한다는 건 중앙(中央)이 있다는 뜻이야.”
나일라토프가 지금까지 중에 가장 열의가 담긴 눈빛으로 중얼거리는 게 들렸다.
“그 중앙에…. 윤회의 도정 한가운데에는 모든 우주의 비밀이 있을 거다. 나는 한 명의 과학자로써 그걸 알아내야 할 의무가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