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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경매라고?
촤아앗
다음 순간, 팔부신중들의 눈앞에 새하얀 창 같은 게 떠올랐고 나와 이환웅 앞에도 마찬가지로 떠올랐다. 그 창을 본 이환웅이 중얼거렸다.
“이게 말로만 듣던 스테이터스 창인가? 과연 이세계….”
“응?”
이환웅은 그 창을 손가락으로 눌러보려다가 그냥 손가락이 통과하자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어…. 아닌듯?”
“…….”
뭐야 실없는 녀석….
내가 어이없어하고 있을 때 [수해의 왕]이 장중한 목소리로 우리 모두에게 의사를 전달하는 게 느껴졌다.
[우선 너희가 여기에 온 목적…. 그 소망을 거기에 기입하라.]
슉 하고 한 손에는 마치 필기구같은 은필(銀筆)이 나타나 있었다. 은필을 이용해서 목적을 적으라는 요구였는데, 팔부신중의 천인(天人)이 마치 비웃듯이 말했다.
[웃기고 있구나. 우리의 왕께서 여기를 거쳐가셨을 터, 우리를 함부로 시험해서 무엇하자는 것인가?]
[…….]
[이런 요식행위는 집어치워라.]
그 말에 수해의 왕은 뭔가 곰곰이 생각하는 것 같더니 이내 약간의 웃음기가 담긴 목소리로 대꾸했다.
[후후…. 그래…. 창힐이 이 곳을 지나갔을 수도 있지. 요식행위라도 좋으니 너희가 이 공간에서 원하는 걸 적어라.]
[싫다면?]
[싫다면 경매에 참여할 자격이 박탈될 것이다. 선택은 알아서 하라.]
침묵.
마치 눈치를 살피듯 기묘한 정적이 흘렀고 나는 저만치 먼 거리에 있는 팔부신중을 힐끔 보며 생각했다.
‘수해의 왕…. 팔부신중을 갖고 놀려 하는군.’
나는 수해의 왕이 의도하는 흐름에 맞춰줘야 할지 어떨지를 알 수가 없었다. 어찌되었든 팔부신중을 이세계로 보내버리거나 소멸시키면 내게는 이득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마음을 먹었다.
‘모르는 척 하자.’
그렇다면 내 소망을 뭐라고 써서 내지?
‘그냥 이 자리에서 얌전히 동료들과 함께 탈출하고 싶다고 적는 게 최선이겠군.’
그 이상의 의도를 수해의 왕에게 드러낼 필요가 없다. 어찌되었든 팔부신중의 제거만 이뤄지면 수해에 더 볼 일은 없었고 수해의 왕과 깊게 얽혀서 좋을 건 없을 것이다. 내가 쓱쓱 하고 다 적고 나서 약 한 식경을 기다리자 수해의 왕이 자신의 손을 들었다.
슈슈슉
모두의 눈앞에 있던 새하얀 창이 사라졌다. 수해의 왕은 그 창을 자신의 주변에 띄워서 하나하나 읽는 듯한 행위를 하더니, 이윽고 무면(無面)에서 입이 생겨나서 씨익 - 하고 기분나쁜 미소를 지었다.
[크흐흐…. 그렇군….]
그러더니 수해의 왕이 말했다.
[제각기 다른 소망을 지니고 이 멸해에 왔구나. 나는 이 영지의 지배자로서 너희의 소망을 들어주고픈 마음이 충분히 있다. 하지만…. 맨입으로 소망을 이뤄줄 수는 없음을 말해두겠다.]
[맨입이 아니라면?]
[이건 경매다.]
수해의 왕이 자신의 양 팔을 벌렸다. 그러자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황금빛의 원형 구조물같은게 우리 앞에 떠올랐고 그것은 심상치 않은 혼돈의 파동을 내뿜고 있었다. 수해의 왕은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너희가 써서 내놓은 소망을 무작위로 경매의 매물로 내어놓겠다. 만일 그 경매에 입찰하여 대가를 지불하고 최종승리자가 된다면 나는 무조건 그 자에게 그 소망을 들어주겠다.]
[그건 또 무슨….]
[단, 타인의 소망을 이루든 말든 관심이 없을 테니 규칙 하나를 추가하도록 하지….]
[어떤 규칙 말이냐?]
[타인의 소망에 입찰하여 승리했을 경우 그 자는 그 소망을 대신해서 이룰 권리가 생긴다. 혹은 그 권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 대신에 외우주를 왕복할 권리 1회를 주도록 하지…. 혹은 내가 알고 있는 가장 강력한 주문 중 하나를 무작위로 주겠다.]
[……!!]
그 순간 지금까지 수해의 왕에게 응답하던 천인이 크게 놀란 듯 했다. 그러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재밌군! 자신의 소망을 타인에게 입찰당한 자는 어떻게 되는 거지?]
[당연히 소망을 이루지 못하고 빼앗긴 셈이니 영원히 이 멸해에서 나의 부하가 될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경매가 끝날 때까지 그를 구제하지 않는다면 말이지.]
[…만일 소망을 이룰 대가가 입찰자 모두에게 부족해지는 상황이 온다면?]
[그 때는 입찰자끼리의 결투로 승패를 가른다.]
천인은 뭔가 이해했다는 듯 씨익 웃었다.
[과연. 이해했다.]
[또한, 어떤 종류의 소망이든 ‘모두’나 복수(複數)를 조건에 넣을 수 없다. 불가능하진 않으나 그만한 제약을 걸어야 할 것이다. 제약에 대해서는 그때 물어보면 알려주도록 하지….]
[…쉽진 않겠군.]
나는 수해의 왕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크게 외쳤다.
“이봐!! 나는 더 이상 경매에 참여할 생각이 없는데 그냥 내보내 줘!!”
진심이다. 나는 경험상 [옛 지배자] 부류들이 이런 제안을 할 때 결코 좋은 결과가 나온 걸 본 적이 없었다. 이 자리에서 무모하게 외우주 왕복권이나 주문을 원하여 무리를 하기보다는 그냥 멸해를 탈출해버리는 게 백배 나을 것이다!
‘어차피 팔부신중들이야 알아서 지랄하다가 사라지겠지. 수해의 왕의 부하노릇이라니 사절이다!’
그러자 수해의 왕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후후…. 거부권은 없다. 이 멸해에 정식으로 도전하지 않고 여기까지 온 이상 너희의 목숨은 이미 내 의지에 달린 것과 마찬가지…. 아무것도 해보지 못하고 내게 능욕당하고 싶다면 원하는 대로 해 주지.]
“뭐라고?!”
“잠깐.”
나는 크게 반발했으나 그 때 옆에 있던 이환웅이 내게 재빨리 입을 열었다.
“아까 백웅의 동료로 보이는 자들도 이 경매에 참여하는 거요?”
이환웅의 질문에 수해의 왕이 대답했다.
[물론….]
“어째서 우리 눈에는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끔 한 건지 알 수 있소?”
[저 백웅의 역량을 보고싶기 때문이지.]
뜻밖의 대답에 나는 어리둥절해서 말했다.
“내 역량을?”
[난 그대를 알고 있다…. 해신이 그대를 노려 지금도 천지의 바다에 자신의 종속을 내보내서 정보를 캐고 있지…. 해신조차 모르는 운명으로 인해 맺어진 결투의 인연이던가….]
“…….”
[해신의 숙적으로 설정된 자가 어떤 자인지 알아보고 싶군…. 동료의 도움 없이 그대 스스로의 힘으로 어찌할지 내게 보여준다면 이 자리에서 충분한 이득을 얻고 풀려날 수 있으리라.]
아무래도 수해의 왕은 내가 전생자라는 것까지는 눈치 채지 못한 모양이다.
“개소리.”
나는 씹어뱉듯이 중얼거렸다. 이런 식으로 수해의 왕에게 농락당하는 느낌이 된 게 절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그러자 이환웅이 내게 말했다.
“백웅. 일단은 경매에 응하는 게 낫겠는데?”
“이기면 다행일 테지만 지면 저 놈의 부하가 되는데 어떻게 함부로 택할 수 있겠냐.”
“어차피 정면으로 싸워봤자 승산이 극히 낮기는 마찬가지잖아. 거부권이 없는데 뭘 어떻게 하겠어.”
“…….”
“일단 작전부터 세워서 잘 해보자고. 지금 징징대봤자 나아지는 게 없으니까.”
“…그래야겠군.”
나는 이환웅의 말이 맞음을 인정하고는 수해의 왕에게 말했다.
“참여하겠다! 단지 조건이 있어.”
[어떤 조건인가?]
“나는 외우주 왕복권이나 주문따위 필요 없어. 난 동료들을 모두 탈출시키겠어!”
[호오….]
수해의 왕이 잠시 생각하다가 재밌다는 듯 말했다.
[좋다. 그러나 한 번 이길 때마다 한 명이다.]
“알았다. 탈출한 사람의 소망은 어떻게 되는 거지?”
[없던 걸로 한다.]
그렇게 대꾸한 수해의 왕이 손을 천천히 저었다.
[10분 후에 시작하겠다…. 그 때까지 다시 은필을 부여할 테니, 아까 적었던 소망을 수정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
우웅
다시금 은필과 새하얀 창이 눈앞에 떠올랐고 거기에는 내가 방금 적었던 소망이 적혀 있었다. 손으로 지우는 동작을 하자 그 글자가 지워지는 것도 보였다.
[작전은 알아서 짜도록….]
우웅
잠시 후 외부풍경이 보이지 않게끔 약 십여 장 크기의 새하얀 원구가 우리를 둘러쌌다. 아마 팔부신중들 또한 이러한 공간에 둘러싸였으리라.
나는 이환웅을 돌아보며 말했다.
“작전? 어떤 작전을 말하는 거냐.”
“일단 말해두겠는데 나와 당신의 승리조건은 다르다구.”
이환웅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품속에 있던 군용 소검을 꺼내서 자신의 손톱을 살살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나는 원래 세계로 되돌아가는 게 목적. 반대로 당신은 이 자리를 탈출하고 동시에 동료들도 같이 내보내는 게 목적.”
“…….”
“하지만 당신은 아까 내게 약속했지. 나를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주겠다고. 내가 선약인 이상 이해관계를 무시하고 날 도와주면 좋겠어.”
“그게 될 것 같나? 이 경매에서 패배하면 수해의 왕의 부하가 될 판인데.”
“우리 둘 다 이기면 되잖아.”
이환웅이 씨익 웃었다.
“팔부신중만 피를 보게 만들자고. 충분히 가능한 일이니까.”
“어떻게 하자는 얘기지?”
“경매에 출품될 [소망]은 한정되어 있어. 내가 추측컨대 팔부신중이란 놈들은 창힐을 만나려고 여기 왔으니까 [외우주를 넘는다]는 게 소망일 거고, 당신의 소망은 동료의 무사귀환, 내 소망은 나 자신의 귀환. 총 3가지 종류라 할 수 있지.”
“음…. 그렇겠지.”
“팔부신중의 소망에 입찰해서 당신이 놈들의 소망을 뺏는 게 기본적인 작전이 될 거야. 저 놈들은 6명 모두가 [외우주를 넘고싶다]라는 소망을 입력했을 테니 총 6번 빼앗을 기회가 있는 거지.”
“……?”
나는 언뜻 머리가 안돌아가서 멍하니 있다가 말했다.
“내가 팔부신중 놈들의 소망을 뺏어야 한다고?”
그러자 되려 이환웅이 무슨 말 하느냐는 표정으로 날 쳐다보았다.
“응? 방금 전에 동료들의 탈출을 선택지에 넣을 때부터 그 작전을 염두에 둔 거 아니었나? 한 번 뺏을 때마다 한 명 탈출시켜줄 수 있으니까 당신의 동료 3명을 다 탈출시키기 위해서는 최소 3번 이겨야 하잖아. 게다가 당신 자신의 탈출까지 염두에 두면 당신은 최소한 4번 탈취에 성공해야 해.”
“아니…. 당연히 그렇게 기본적인 건 이해했지. 근데 빼앗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니냐?”
“엉?”
“외우주를 넘겠다고 하는 소망을 가만 놔두면 알아서 사라져줄 텐데….”
이환웅은 그 말에 뭔가 이해한 표정을 지으며 썩은 미소를 지었다.
“당신, 뭔가 알고 있었군. 외우주를 넘어도 결코 멀쩡히 넘을 수 없다는 건가?”
“…그래.”
“흐흠…. 보기보다 음흉한 사람인걸.”
이환웅이 중얼거리다가 말했다.
“가만 놔두면 그렇게 되겠지만 당신은 탈출이라는 소망 또한 이뤄야 하잖아. 안 뺏을 수가 없지 않겠어?”
“음….”
“그리고 놈들의 소망을 빼앗는다면 저놈들은 영영 수해의 왕의 부하가 되는 건 마찬가지. 팔부신중의 제거라는 목적 또한 이룰 수가 있지.”
“그런가….”
“또 하나. 팔부신중은 무조건 당신과 당신 동료들의 소망에 입찰해서 뺏으려 할 거다.”
“뭐?”
“아까 눈치 못 챈 건가?”
이환웅이 나직이 말을 이었다.
“팔부신중 입장에서 괜히 갖고 있는 보물을 바치면서 억지로 6명 전부 외우주를 넘기에는 대가가 부족할 거야. 그들 입장에서 가장 소모가 적은 방법은 바로 당신들의 소망을 뺏는 거지. 왜냐하면 뺏기만 하면 외우주 왕복권 1회가 무조건 생기는 거잖아.”
“……!!”
“팔부신중이 마왕이라면 당연히 인간들을 때려죽이고 그 소망을 뺏겠지.”
허억?! 그랬나?!
나는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이었기에 진심으로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런 내 표정변화를 본 이환웅 또한 깜짝 놀라더니 말했다.
“으… 으응? 진짜 대놓고 얘기하던데 못 깨달았던 거야?”
“그래. 경맨지 뭔지 무슨 소리 하는지 잘….”
“…….”
잠시 침묵하며 표정관리를 열심히 하던 이환웅이 말했다.
“뭐 아무튼, 그건 우리 또한 마찬가지지. 당신이 얼마나 보물을 보유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4명 전부를 귀환시키고 나 또한 외우주로 보내주기 위해서는 아마 턱도 없을 거야.”
“흐음. 그렇겠군.”
“결국 서로의 소망을 빼앗는 게 최선의 전략일 수밖에 없지. 단지 꺼림칙한 것은 당신이 동료들과 의견조율을 하지 못했다는 점이야.”
“그게 왜?”
“당신은 동료들과의 무사귀환을 소망으로 바랐겠지? 당신의 동료들이 만일 똑똑한 자들이라면 그게 아닐 수도 있단 소리야. 뭔가 쓸데없이 전략을 세웠다면 일이 꼬일 수도 있어.”
“……?”
“끄응…. 뭔가 좀 어렵군…. 시간 없으니 더 설명해주기도 좀 그렇고.”
이환웅은 자기 머리를 벅벅 긁다가 이윽고 말했다.
“아무튼 지금 중요한 건 당신이 팔부신중을 이길 힘을 가지고 있냐는 건데, 가능하겠어?”
“해 볼 수밖에.”
“좋아. 그럼 이렇게 하자구….”
이환웅이 잠시 후 자기 전략을 내게 이야기해줬고 나는 끄덕이며 그걸 경청했다. 그리고 잠시 후 수해의 왕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시간이 되었다. 수정된 소망을 거둬들이겠다.]
스스스
[그럼 경매를 시작하겠다.]
촤좌좍
다음 순간, 엄청나게 거대한 원형 탁상이 공간 전체에 나타난 듯 했고 나와 이환웅은 그 탁상 위에 마치 개미처럼 서 있게 되었다. 저만치 멀리에는 팔부신중들이 마찬가지로 탁상 위에 올라와 있었고, 또 그 맞은편에는 내 동료인 망량, 아수라, 세이메이 3명이 서 있었다.
세 부류로 나뉘어진 경매 입찰자들을 보던 수해의 왕이 말했다.
[첫 번째 소망이다.]
이어진 말에 나는 눈을 부릅떴다.
[‘아수라가 죽었으면 좋겠다.’ 이 소망에 입찰할 자는 손을 들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