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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우리는 팔부신중을 추적하기로 했다. 망량이 시해지술을 써서 뭔가 정찰을 하더니 말했다.
“지금 그들은 생사입멸로 나눠진 경계 중 사해(死海)의 중반부에 있구려.”
“바로 쫓으면 위험하겠소?”
“당연히 그렇소. 내가 세이메이와 감각을 공유하고 있으니 세이메이가 신호를 보내면 그때부터 추격하도록 하지.”
“상황을 보고 싶은데….”
“공유된 시각을 모두에게 전해주겠소.”
촤라락
망량이 부채를 휘두르는 순간, 내 눈에는 [세이메이]가 길잡이로 안내를 하면서 보고듣는 것이 마치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전투중이군.’
지금부터는 현지의 상황을 관찰해야겠다.
콰과과광
팔부신중 가루라와 천인이 선두에 서고 마후라가가 후방에서 음파로 지원을 하는 식으로 단 세 명이 나서서 사해의 마물들을 초토화시키는 게 보였다. 나는 가루라의 눈이 번뜩이는 순간 그의 입에서 수십 장짜리 화염광선이 토해지는 걸 볼 수 있었다.
번쩍
쿠콰콰쾅 - !!
일순간에 산이 세 개씩이나 날아가는 게 보였다. 나는 그 광경을 보자 움찔하고 말았다.
‘제길. 역시 마왕 놈들 강하긴 하군….’
가루라가 팔부신중 가운데서도 무투파에 속하긴 했지만 마왕이라 불리는 자들 답게 인간으로서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힘을 갖고 있었다. 사해의 마물들도 생해보다 몇 배나 강력하고 거대했는데 팔부신중에게는 마치 도살이라도 당하는 듯 손도 쓰지 못하고 죽어나가는 중이었다.
어느정도 습격해오던 마물들이 정리되자 긴나라가 세이메이에게 말을 거는 듯 했다.
[이제 알겠지. 여기가 인세의 지옥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옛 지배자]에 버금가는 마왕들이다. 이 곳이 인계가 아니라서 인과율사역도 비교적 자유롭다면 이런 마물들 따위가 우리를 막을 순 없다, 세이메이.]
세이메이가 천천히 대꾸했다.
[그래보이는군. 하지만 너무 자만하지 않는 게 좋다.]
[왜지?]
[이곳의 주인은 무서운 자니까.]
우우우우….
마치 예언이라도 한 듯 그 말이 끝나는 순간 허공이 열리면서 ‘무언가’의 눈(眼)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으음!]
[이건….]
팔부신중들은 그 ‘눈’을 보자 심상치 않음을 느낀 듯 놀랐다.
그리고 그 자의 목소리가 팔부신중 전체에게 울려퍼졌다.
[반갑구나, 마왕 팔부신중이여…. 너희가 설마 여기에 올 줄은 몰랐노라.]
저 존재는 팔부신중의 정체를 이미 간파한 듯 했다.
긴나라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그대는 누구인가? 이곳의 주인인가?]
긴나라의 물음에 그 존재가 마치 웃는 듯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후흐흐…. 너희의 힘을 먼저 시험해 보도록 하지….]
파앗
다음 순간 눈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거대한 차원문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 차원문을 본 세이메이가 중얼거렸다.
[방금 본 존재가 바로 삼해(三海)를 총괄하는 총 수문장이며 수해(樹海)의 왕이다. 신(神)에 준하는 자라고 할 수 있지.]
[그래보이는군….]
[저 차원문을 지나면 바로 입해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두렵지는 않나?]
[하하하하.]
긴나라가 웃음을 터뜨리더니 말을 이었다.
[강력한 존재이긴 하지만 우리가 힘을 합쳐서 못이길 자도 아니다. 겨우 저걸로 마왕 팔부신중이 공포를 느낄 성 싶은가?]
[…….]
[빨리 앞장서라. 우린 아무것도 두렵지 않으니.]
[끝까지 그랬으면 좋겠군….]
슈욱
세이메이와 팔부신중 전체가 차원문 내부로 걸음을 옮겼고, 그들이 모두 이동한 순간 그들 앞에는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괴물이 나타나 있었다.
[저건…?]
촉수를 넘실거리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괴어!
마치 혼돈의 심연 전체를 채우는 듯한 광대한 크기를 자랑하는 그 촉수마물은 지금껏 보았던 거대마물들보다 수백 배 이상 거대해 보였다. 그걸 본 세이메이가 말했다.
[수해의 왕은 입해의 끝, 멸해의 입구에 존재할 것이다. 그가 너희를 시험하고자 입해의 수문장을 보내왔구나.]
[후후…. 시험이라. 이런 촌구석에 박혀있는 놈이 광오하구나.]
긴나라가 웃자 옆에 있던 야차가 툭하고 내뱉었다.
[시간낭비할 때가 아니다. 빨리 해치우고 수해의 왕이란 놈과 담판을 짓자.]
[알았다, 야차. 모두 공격!]
쿠콰콰쾅
“음!”
팔부신중과 입해수문장의 격돌이 시작되는 순간, 나는 찌릿하고 관자놀이의 통증을 느끼면서 감각공유가 끊긴 것을 알아챘다. 동료들의 시선이 망량에게 향하자 망량이 입을 열었다.
“세이메이 또한 어쩔수없이 전투에 참여한 듯 하오. 거리도 멀어졌고 술자도 정신집중이 풀리니 술법도 같이 해제되었군….”
“그럼 이제 추격하면 되는 거요?”
“아직은 지켜보는 게 낫소.”
“왜 그렇소?”
“예전에 여동빈이 팔선의 도움을 받아 입해의 수문장과 싸워서 쓰러뜨렸을 때 거의 사흘밤낮을 싸웠던 기억이 있지. 물론 팔선의 모든 힘을 받은 여동빈이라고 하더라도 팔부신중 여섯에는 손색이 있으니 아마 길어도 몇 시진이면 결판이 나겠지만, 그래도 덩치가 매우 크니 조금 기다려봅시다.”
망량의 말이 맞았다.
콰과광
반 시진 정도가 지나서 세이메이의 감각공유가 다시 되돌아오면서 전투장면이 중계되었는데, 팔부신중이 다같이 입해의 수문장을 패고 있었지만 아직 결판이 날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 모습을 감각공유로 보면서 의아해졌다.
“뭐지? 팔부신중의 전력이 과거 팔선의 힘을 받은 여동빈보다는 훨씬 강할텐데 왜 저리 애를 먹는건지….”
“…….”
콰과광
아닌 게 아니라 팔부신중들은 광범위 주술이나 권능을 날리면서 열심히 입해의 수문장을 때리고 있었지만 그다지 큰 피해를 못 주고 있는 듯 했다. 여동빈이 싸웠을 때 그가 성난 칼날을 날릴 때마다 입해의 수문장이 반응했던 것과는 달리 팔부신중의 공격에는 다소 무딘 반응이었다.
조용히 관전하고 있던 아수라가 불쑥 입을 열었다.
“같은 마(魔)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아수라. 그건 무슨 소리야?”
“여동빈이 팔선의 힘을 받았을 때는 파괴력은 적더라도 그가 확실히 마(魔)에 상극이 되는 무예를 쓸 수 있었으며 팔선의 힘이 그 속성을 극대화시켜 주었다. 그래서 심연을 베어낼 때도 한방 한방이 뼈를 깎는 타격을 줄 수 있었지. 하지만….”
“팔부신중의 공격은 아니란 건가?”
“그렇다. 어찌되었든 저들의 권능은 혼돈(混沌)에서 비롯된 것. 같은 혼돈의 속성끼리 싸운다면 그 힘의 밀도가 큰 영향을 미치는데, 저 입해의 수문장은 공격력은 그리 강하지 않아도 혼돈에서 태어난 순수한 혼돈의 마(魔). 인간에서 마왕이 된 팔부신중보다 도리어 혼돈의 농도는 훨씬 높아.”
“농도?”
“그렇다. 그 때문에 권능으로 하는 공격은 모두 위력이 반감될 것이다. 게다가 체력도 더럽게 많아보이는구나.”
“흠…? 설마.”
“그 설마다. 팔부신중이 저 놈을 잡을 때는 도리어 여동빈 때보다 힘들 수도 있다.”
“……!!”
“화력이 전부가 아냐.”
그럴 수도 있다니! 나는 놀라서 아수라에게 반문했다.
“하, 하지만 전욱이나 제곡같은 [옛 지배자]들이 싸울 때는 별로 그런 거 느낀 적이….”
“오제쯤 되면 마왕 따위와는 격 차이가 심각하게 나는 거다. 실제로 마왕이 [옛 지배자]에게 공격을 받으면 같은 혼돈속성이라 피해가 줄어들겠지만 줄어든 피해조차도 치명상인 것뿐이다. 예전에 전욱이나 제곡의 손에 마왕이 찢겨나가는 걸 보면 쉽게 알 수 있지.”
“…….”
“후, 이렇게 보니 팔부신중이 얼마나 어설픈 위치인지 잘 알겠군…. 제기랄.”
아수라는 뭔가 자조하듯이 중얼거리는 듯 했다. 아무래도 혼돈의 권능을 놓지 못했던 자신의 과거를 부끄럽게 생각하는 듯 했다.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망량이 말했다.
“아수라의 말대로요. 저 싸움은 꽤 오래 갈 것 같군. 팔부신중의 권능은 강하긴 하지만 저 괴물에게 유효타를 거의 주지 못하고 있소.”
“그럼 이대로 멍하니 기다리기만 해야하오?”
“그건 아니지. 유사시에 대응해야 하니 이젠 슬슬 사해로 출발해 봅시다. 우리가 사해를 돌파하는 시간도 있으니까.”
파앗!
우리는 차원의 문을 열고 츠치미카도 일족의 마을을 나와서 사해로 진입했다. 그리고 아까 팔부신중이 쓸고 지나가서 폐허가 되다시피한 사해를 가로지르기 시작했는데, 사방에서 마기(魔氣)로 만들어진 안개가 뭉게뭉게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저건?”
“안개에 가까이 가지 마라. 위험하다.”
잠시 후, 그 안개가 스쳐지나간 대지에서 마치 식물이 자라나듯이 뿌직거리며 혼돈의 마물이 빠르게 생장하는 게 보였다.
“마물이!”
내가 그 모습을 보고 약간 놀라자 아수라가 중얼거렸다.
“여기의 마물은 자연마물이 아닌, 마기의 부산물같은 거다. 넘쳐흐르는 마기가 새로운 마(魔)를 만들어내는 건 이상한 일도 아니지.”
“설마 이 사해에서는 마물이 무한히 만들어진다는 건가?”
“아마 그렇겠지.”
“제기랄. 괜히 일찍 나왔나?”
“망량에게 생각이 있어보이는군. 일단은 빨리 돌파하자.”
타다닷
우리는 한참동안 달려서 어느 새 아까 팔부신중이 마지막으로 싸웠던 자리에 도달해 있었다. 여기는 아직 마물 재생성이 이뤄지지 않은 듯 했지만 오래 머물 수 없으리라는 건 자명했다. 망량이 촤락 하고 부채를 펴며 말했다.
“구천현녀의 힘을 빌어 이 지역을 봉하노니!”
두웅
다음 순간, 우리가 서 있는 백여 장 남짓의 공간에 마기가 씻은 듯이 사라지고 청량한 느낌이 감도는 걸 알 수 있었다. 망량은 씩 하고 웃으며 말했다.
“당분간 여기는 안전할테니 대기합시다.”
“…전부터 생각했는데 시해지술의 능력이 너무 빨리 성장하는 거 아니오? 이 정도면 이미 대술법사 아닌가.”
“구천현녀에게 힘을 많이 땡겨오는 요령을 터득했기 때문이오.”
“응?!”
“그런 게 있소.”
말을 얼버무리던 망량이 말을 이었다.
“다시 말해두겠소. 우리가 여기 온 건 그저 유사시에 대비하는 것 뿐이고, 만일 팔부신중이 수해의 왕과 만나서 그 안으로 끌려들어가면 더 이상 수해 안으로 들어가진 않을 거요. 그대로 소을촌으로 돌아가면 그만이지. 알아들었소?”
“알아들었소.”
“자아. 어디 기다려 볼까….”
우리는 침착하게 입해로 들어가는 차원문 앞에서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만 한나절 정도가 지나자 그제서야 전투상황이 끝나는 게 보였다.
‘사흘보다는 짧지만….’
마왕이 6명이나 달려들었는데 이제야 결판이 났다는 건 굉장히 고전한 셈이었다. 과거 여동빈의 선전을 의심할 수는 없었다.
[크아아아악!!]
쿠콰콰쾅
입해의 수문장의 핵(核)이 뜯겨나가며 요란하게 사망하는 게 보였다. 마지막에 핵을 맨손으로 뜯어낸 야차가 다시 인간형으로 되돌아오며 짜증을 냈다.
[아수라가 있었다면 놈이 적멸무극으로 파고들어서 빨리 핵을 뜯어줬을 터…. 이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을 텐데!]
그러자 천인이 불쾌하다는 듯 말했다.
[없는 놈 이야기는 왜 하는건지 모르겠군!]
[천인. 네 모든 술법이 이 괴물한테는 거의 안 통했지 않느냐? 네 술법 자체가 혼돈에 기인하니까! 차라리 속성이 다른 내 고대주술이 더 잘먹혔지.]
[…….]
[존재감없는 술법공격보다는 차라리 아수라가 도움되었을 것이다.]
천인이 비난을 받자 버럭 화를 냈다.
[개소리 말아라. 네놈도 본체로 변신했다가 다치면 위험할까봐 몸만 사린 주제에.]
[뭐라고?]
천인과 야차가 서로 으르렁거리기 시작하자 긴나라가 급히 중재했다.
[그만둬라! 무슨 추태냐?]
[…….]
[세이메이. 우리를 마저 안내해….]
그 때였다.
[날 만날만한 자격은 되는군.]
[수해의 왕!!]
수해의 왕의 목소리가 공간에 울려퍼졌다. 잠시 후 번쩍이는 금광(金光)이 울려퍼지더니 혼돈의 우주 속에 하나의 길이 생겨났고 그건 수해의 왕의 권능으로 보였다. 수해의 왕이 말했다.
[힘은 충분히 확인했다. 너희가 원하는 게 있다면 이 길을 따라오거라. 만나주마….]
후웅
목소리의 존재감이 사라지자, 긴나라가 세이메이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세이메이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길잡이를 할 이유가 없어졌으니 나는 이만 돌아가지.]
[플로지스톤 욕심은 나지 않나?]
[그 보물을 얻으려고 수해의 왕과 대면하고 싶진 않다. 너희가 살아나오면 대가를 받겠다.]
[그럼 가라.]
쉬익
[자, 가자. 창힐님이 계신 곳으로….]
세이메이의 신형이 사라지자 팔부신중이 다같이 모여서 금광의 길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걸 끝으로 시야공유가 끊겼고, 머지않아 세이메이가 우리가 기다리는 곳에 공간이동을 써서 나타났다.
우리 앞에 나타난 세이메이가 말했다.
“이제 사실상 망량의 계책대로 팔부신중을 함정에 빠뜨리는 건 끝난 것 같군.”
“세이메이…. 팔부신중이 수해의 왕과 싸우면 누가 이길까?”
“지금까지 입해의 수문장과 했던 전투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지.”
세이메이는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수해의 왕이 지닌 격은 팔부신중 개개인보다 훨씬 높다. 즉, 어설픈 공격은 속성때문에 수해의 왕에게 이빨도 들어가지 않아. 게다가 동물이나 다름없었던 수문장과 달리 수해의 왕은 술법과 권능까지 시전할 줄 아는데 팔부신중이 과연 장기전으로 갈 수나 있겠는가?”
“으음.”
“팔부신중이 모였다고 쓰러뜨릴 수 있을 정도로 만만한 상대였다면 나도 진작에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수해의 왕을 처리했을 거다. 이건 눈에 뻔히 보이는 결과라고 할 수 있어.”
“그러면 싸우지 않고 팔부신중이 수해의 왕과 대화해서 우리의 함정을 알아차릴 가능성은….”
“그럴 리는 없다.”
세이메이가 허공을 쳐다보며 말했다.
“혼돈만큼 약육강식의 본능이 철저히 작용하는 존재들은 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지…. 수해의 왕은 전후사정이 어쨌든 마왕들을 잡아먹으려 할 거다.”
“…….”
“더 볼 것도 없다고 생각된다만 이제 슬슬 되돌아가는 게 어떻겠나?”
세이메이의 제안에 나는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여기까지 온 김에 청월을 구해야겠어. 그게 원래 계획이었으니까.”
“그렇군. 가자.”
우웅
우리는 입해에 들어가서 망량의 시해지술에 의존해서 청월의 소재를 탐색했다. 예전에 비등이 있을때는 기억된 위치로 바로 가면 되니 편했었지만 처음부터 다시 찾으려니 무척이나 귀찮았다. 하지만 약 한 시진동안 계속 찾다보니 어느정도 위치가 감지되어서 결국 청월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 나를 구하러 온 것이란 말인가…!!”
청월이 감격한 듯 무릎을 꿇으며 울었다.
“고맙소…. 정말 고맙소….”
“음, 청월. 혹시 해서 묻는데 삿갓을 쓴 무사를 본 적 없소?”
“……? 그런건 본 적 없소만.”
“…….”
나는 그 말에 약간 표정이 일그러졌다.
‘역시… 그 삿갓을 쓴 놈은 나타나는 장소가 일정하지 않아. 그 말은 내 전생에 영향받지 않고 움직인다는 거야. 새삼 기분이 더럽군….’
예전에 그 삿갓무사놈이 입해의 마물과 싸우다가 죽은 적이 있었기에 혹시나 했었지만 역시나 여기 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내가 입술을 꽉 깨물고 있자 아수라가 말했다.
“빨리 되돌아가자. 수해의 왕이 우리한테까지 관심을 가지면 귀찮아질 것 같다.”
“그럴까.”
나는 아수라의 말대로 바로 되돌아가려 했지만 그 때였다.
쿠우우우 - !!
심연을 떠돌아다니는 거대한 입해의 마물 한 마리가 우리를 향해 날아와서 공격하는 게 보였다! 피하기엔 늦어 있었기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마물을 상대할 수밖에 없었다.
산처럼 거대하고 시뻘건 꽃게같은 촉수마물!
“아 젠장!!”
콰과광
나는 무량단을 써서 마물의 전면을 크게 베었고 아수라가 한박자 늦게 뛰어들어서 적멸무극을 그 상처 사이에 날렸다. 아수라의 적멸무극이 쐐기처럼 박혀들어가자 마물은 크게 홰를 치는 듯한 동작을 취하더니 잠시 후 혼돈의 점액질같은 머리를 아홉 개로 늘려서는 우리에게 광선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쓔슈슈슝
“큭, 제기랄… 마물 한 마리따위가.”
내가 짜증이 나서 외치자 망량이 마주 외쳤다.
“백웅, 얕보지 마시오! 이 입해의 마물 한 마리 한 마리가 투선과 대등한 놈들이라는 걸 인지하시오! 우리가 강하다고 해도 얕보면 큰일나는 놈이오.”
“알고 있소!”
“일단 핵부터 찾아볼 테니 기다리시오.”
우웅 하는 소리와 함께 망량의 시해지술이 펼쳐져서 마물의 핵을 탐색하는 듯 했다. 나는 그 사이에 아수라와 함께 마물을 상대하며 시간을 벌기 시작했는데, 함께 싸우고 있던 세이메이가 내게 마음속으로 말을 걸었다.
[백웅. 부탁이 있다.]
“갑자기 또 왜?”
[마물의 핵을 공략하면 바로 터뜨리지 말고 손으로 직접 잡아보지 않겠나?]
“……?”
[시험해보고싶은 게 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알았어!”
나는 어리둥절했지만 어찌되었든 세이메이의 부탁대로 해보기로 했다. 어차피 지금 전력으로 상대 못할 놈도 아니었기에 목숨걸고 싸우는 상황도 아니었다.
촤앗
망량이 시해지술을 발동하고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거대한 마물의 몸뚱이 내부에 존재하는 [핵]이 육안으로 빛나서 보이기 시작했다. 나와 아수라는 한 번 시선을 교환한 후 그 핵을 파내기 위해 달려들었고, 약 오백여 초 동안 칼질을 한 결과 마침내 놈의 육체를 다 후벼파서 핵에 도달할 수가 있었다.
덥썩
나는 핵이 보이자마자 달려들어서 그대로 잡아챘다. 그리고는 외쳤다.
“잡았다! 이제 됐….”
츠아아아 -
“어?!”
다음 순간, 마물의 거대한 몸뚱이가 마치 모래처럼 변해서 흩날렸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남은 것은 내 손에 남은 핵 뿐이었는데 그 핵이 갑자기 시꺼먼 액체처럼 변하더니 내 손바닥을 통해 스물거리며 흡수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혼돈의 마력 그 자체가 본질로 되돌아간 것만 같았다.
그와 동시에 꾸물텅거리는 듯한 역한 이족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퍼졌다.
[오오…. 그대에게라면… 먹혀도 좋다….]
“……!!”
[나, 그대에게 귀속되리라….]
츄아앗!
그리고 흡수가 완전히 끝나버리고 말았다.
이거 대체 뭐야?!
내가 당황하고 있을 때 어느 새 내게 다가온 세이메이가 내 팔목을 뒤집어서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중얼거렸다.
“역시… 그런거군.”
“뭐가?”
“여길 봐라. [이름]이 새로이 새겨졌다.”
“억?!”
그 말대로였다. 내 팔뚝에 있던 이름이 16개에서 17개로 늘어나있던 것이다!
그리고 새롭게 생겨난 이름을 살펴보자 이렇게 쓰여 있었다.
[ 전설적인 심연의 광폭한 혼돈 속 초대형 변이 심홍 꽃게 ]
나는 그 이름을 보자 뭔가 짐작가는 게 있어서 굳어버리고 말았다.
“…….”
이건 거대거미를 흡수했을 때와 비슷한 것 같은데?
나는 동시에 어리둥절해져서 말했다.
“잠깐. 나는 이 심연의 마물한테 이름을 받겠다고 한 적이 없고 그냥 싸워서 죽인 것 뿐인데 왜 이름이 새겨진 거지?”
“그래서 시험해보려고 했던 것이다.”
“뭘 시험해?”
“이름을 교섭으로 전달받는 방식이 아니라 전투로 쓰러뜨린 후 그 핵을 네가 취하는 형식이 되더라도 [이름]이 새겨지는지를.”
세이메이가 나직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역시나 생각대로군. 순수한 혼돈에 가까운 존재일수록 네게 [이름]을 흡수당하기 쉽다. 그게 정상적인 교섭이든 전투해서 쓰러뜨리던간에…. 다만 전투로 쓰러뜨릴 경우 핵을 취해야한다는 조건이 있다는 걸 알아냈군.”
“으음. 이게 좋은 건가?”
“글쎄….”
세이메이는 약간 걱정스러운 얼굴으로 말했다.
“확실한 건, 네가 교섭으로 [이름]을 받는 것보다는 무차별적인 전투로 학살해서 이름을 얻는 게 훨씬 쉬운 구조라는 거다. 이건…. 위험해.”
“위험하다고? 마력이 너무 많이 쌓이나?”
“아니, 모르겠나? 그런 위험이 아니라 이 구조는 마치 전생자에게 손쉽게….”
세이메이가 뭔가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한숨을 쉬며 말했다.
“…네가 중심을 잡고 가는 게 중요하다. 결코 힘을 가지려고 무리해선 안 된다는 소리다.”
“……? 뭐 그럴께.”
“너에 대한 동료들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기를 바랄 수밖에.”
나는 무슨 말인지 몰라서 어리둥절했지만 듣고 있던 아수라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세이메이. 백웅이 그럴 놈은 아니다. 괜히 앞서나가지 마라.”
“알았다.”
이놈들은 지들끼리 뭔 소리 하는거야?
좀 설명이나 해 주던가!
내가 어이없어할 때 망량이 말했다.
“이제 됐으니 돌아갑시다. 팔부신중이 외우주로 가든 수해의 왕에게 잡아먹히든 더 이상 상관할 바는….”
그 때였다.
파지지지직!!
파지지직!!
갑자기 저 멀리에서 수천만의 뇌전이 일어나면서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문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출현하는 것 같았다.
그 무언가는 기다란 몸뚱이를 지니고 있었으며 멀리서 볼 때는 은빛의 철갑에 둘러싸인 것 같았다. 그리고 어느 정도 그 모습이 완전히 드러났을 때, 나는 그게 함선(艦船)이라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었다.
파지지직
그 함선은 번갯불을 크게 튀기면서 어마어마한 뇌전에 휩싸인 상태였다. 적어도 수백 리가 넘는 거리라서 우리가 모두 그 함선을 쳐다보고만 있을 때, 그 함선에서 무언가 파장이 일어나더니 바로 앞에 왜곡(歪曲)을 만들어내는 게 보였다.
아주 먼 거리였지만 함선에서 인공지능이 말하는 듯한 기계음이 예리한 청력으로 들려왔다.
[계백함(階伯艦), 확률왜곡 개시합니다. 목표지 특이점으로 점프 중….]
쿠구구….
함선은 왜곡을 향해 기울어지는 듯 다시금 잠수했고, 이윽고 혼돈의 바다 속에서 더 이상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
“…….”
뜻밖의 상황에 우리는 모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저, 저건 또 뭐야?”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건 망량이었다. 망량이 말했다.
“쫓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