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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나는 백련교주의 말에 주춤하면서 말했다.
“내가 추구하는 협의가 나쁘지 않다는 건 이미 다른 책사들이 말해줬어! 돌아가는 길일지라도 이게 옳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 이건 예전부터 쉴새없이 고민해왔던 문제!
그런만큼 나는 책사는 물론이고 다른 동료들과 계속 토론을 해 왔고, 그들은 대부분 협의를 추구하는 내 의지를 지지해주겠다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백련교주가 새삼 그 얘기를 꺼내는 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러자 백련교주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협의 자체가 나쁘지는 않다. 그대가 인간성을 지키며 무한의 삶을 지탱해가는 의미는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그걸 인정치 않았다면 나는 예전에 그대의 부하가 되지 않았으리라.]
“그러면 왜….”
[허나 지금 이 상황을 보라!]
홰액
[이것이 과연 협도(俠道)인가! 이것이 어설프게나마 정의라고 말할 수 있는가!]
백련교주가 갑자기 손을 앞으로 떨쳤고 약간 격앙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소을촌장의 삶을 유지하겠답시고 무모하기 짝이 없을 정도의 비효율과 어설픈 협의로 간만 본 결과, 당금의 천하는 그대가 끼어들기 전보다 더욱 어지럽혀졌다! 내 말이 틀렸는가?]
“그, 그건….”
[나는 이 자리에 괜히 온 게 아니다. 백련교주로서 이제 그대와 손을 잡거나 담판을 짓지 않으면 도저히 혼란을 극복할 방법이 보이지 않았기에, 나름대로 간절한 심정으로 찾아왔던 것이다. 이 마음을 알고 있는가….]
“…….”
[목적지가 틀리지 않았어도 방법이 틀렸다면 그 어떠한 현자의 계책도 비판받을 수 있는 것. 하물며 그대는 목적조차 없이 방황하고 있었으니 협의의 길이라는 마음가짐이 도리어 족쇄가 되어버린 것이다. 협의를 따라가려 했으나 결국 남은 것은 혼돈뿐이 아닌가.]
백련교주의 말은 무척이나 논리정연했다.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자 백련교주가 천천히 말했다.
[차라리 그대가 모든 세상의 연을 끊고 홀로 유유자적했다면 나는 그대를 위해 눈물 흘렸으리라. 내 삶이 희생될지언정 전생자의 삶은 나 따위에 비할 게 아니기 때문이다. 허나… 이게 무엇인가? 그대는 이도저도 아니게 되어버렸다.]
“미, 미안하다고. 용서해달라고 아까 그랬잖아.”
[착각하지 마라, 백웅. 이건 내가 그대를 용서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후웅 하고 백련교주의 눈에 기이한 신광이 일었다.
[역사를 미리 알고 사소한 희생을 막았답시고 그대가 추구하는 진정한 협의의 길에 위배되지 않은 것인가? 그대는 지금 유희와 협의를 둘 다 놓지 않는 자기자신에 취해있다.]
“……!!”
[나비효과 하나하나를 다 살폈는가? 사소한 희생을 막은 대가로 큰 환란이 온다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자기모순에 찌들려 있을 뿐은 아니었던가!]
자기자신에게 취해 있다고?
내 동공이 크게 흔들리자 백련교주가 말했다.
[나와 달마가 추구하던 것처럼 모든 사소함을 버리고 효율에 집중하라는 게 아니다. 그대의 말대로 그건 실패한 길이니 새로운 인간의 왕인 그대에게 강요할 수 없다. 그러나 반대로 대의도 협도도 아닌 자기만족일 뿐이라면….]
약간의 광기가 서린 백련교주의 육합전성이 내 귀에 천둥처럼 울려퍼졌다.
[나는 더 이상 그대를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너무나 아프다.
가슴 한켠이 크게 짓눌리는 기분과 함께, 여태껏 강대한 힘의 주체로만 파악했던 백련교주의 진심이 확하고 내게 날아드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실망한 거다.’
정확히는 나 자신에게 실망한 게 아니라, 내 삶을 버리지도 갖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유지하고 있는 지금의 상태에!
나는 한동안 침묵했다. 그리고는 말했다.
“알고 있어. 그래서 고쳐나가려는 거야.”
백련교주는 팔짱을 꼈다.
[그렇겠지. 그렇지 않으면 내게 흑요석은 주지 않았을 것이다. 편한 대로 부하로 부려먹었을 것이리라. 그럼 어떻게 고치겠다는 말인가?]
“지금의 나로서는 아직 전력을 다해서 이 생에 뛰어들기에는 마음속의 여유가 다 회복되지 않은 게 사실이야. 그래서 난 아직은 좀 더 나 스스로를 다듬으며 준비하고 싶다.”
[여동빈과 대련을 하면서 말인가?]
“그래.”
[너무나 어설프군. 고작 그런 걸로 납득할 것 같은가?]
“납득하지 못해도 상관없어. 나는 내가 생각한 길이 옳다고 생각하고 밀고나갈 테니까.”
[…….]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두 명의 호법사자들은 우리가 무슨 대화를 하는지 몰라서 약간 혼란스러워하는 기색이었다. 나는 잠시 후 생각이 정리되자 입을 열었다.
“독고운천. 내가 인간의 왕이라고 했던가?”
[그렇다. 누가 뭐라 하든 그대는 틀림없는 인간의 왕이다.]
나는 이를 악물며 말을 이었다.
“그러면 너의 왕이 폐허 속에서 스스로 일어서 재생(再生)할 여유를 지켜봐라! 그 후에 나를 다시 평가하라고!”
[……!!]
“지금은 엉망… 그래, 엉망진창이겠지만. 나는 절대 이대로 포기하지 않아!”
나와 백련교주 독고운천의 눈이 한 차례 마주쳤다. 그리고 독고운천은 한동안 내 눈을 응시하고 있다가 말했다.
[좋다. 그 각오를 직접 듣고 싶었다.]
그리고 나와 백련교주는 그 순간 서로 말은 하지 않았음에도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다시 전생의 인연으로 결속했다!
방금 전 입으로 떠들었던 혈맹이나 맹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신뢰가 생겨난 것이다.
그 때였다.
“백웅. 감동의 순간에 미안하지만 나도 한 마디 해도 되겠소?”
“어….”
망량이 장내로 걸어들어왔다. 나는 그를 보자 아차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다 들었겠구나!’
아니나 다를까, 망량은 씩하고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전에 말했던 부탁을 들어줄 때가 되었소. 내게도 흑요석을 주시오.”
“…….”
“전생자의 기억 속에서 내가 어떤 존재인지 알고 싶구려.”
이, 이런… 역시 이렇게 되는 건가?
전에 했던 약속을 어길 수도 없었기에 내가 당황하고 있자 백련교주가 물끄러미 망량을 쳐다보며 말했다.
[망량이여. 나 백련교주의 이름을 걸고 말할 수 있다. 그대는 흑요석을 받는 순간 지금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불행해질 것이다.]
“흐음.”
망량이 움찔하는 기색이었다. 백련교주의 말이 허언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것일까? 백련교주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대의 뛰어난 두뇌라면 이미 짐작했을 텐데. 백웅이 그대에게 기억을 전송하지 않은 이유는 그대의 능력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대를 자신의 삶에 끌어들이지 않으려는 배려였다는 것을.]
“…짐작은 하고 있소.”
[지금 그대가 걸어 들어오려는 건 상상을 초월하는 수라장이다. 지금처럼 괴짜를 만나서 책사짓을 하며 적당히 인간의 삶을 즐기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중압감이 생겨나겠지. 과연 감당할 수 있겠는가?]
“…….”
[내가 방금 그대를 죽이려 했던 게 도리어 자비로 느껴진다고 확신할 수 있다.]
백련교주의 말에 망량이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겠소?”
[뭣이?]
“어차피 언제인지 몰라도 나는 저 백웅이란 자에게 충성을 바치기로 했을 것이오. 그리고 삶이 반복되고 있음이 사실이라면, 나는 영세영겁에 걸쳐 백웅이란 자에게 충성할 이유를 찾았다는 뜻이 되었겠지.”
[…….]
“시간문제일 뿐, 나도 어차피 이 판에 몸을 담갔소. 이왕 이렇게 된 바에 좀 더 전후사정을 자세히 알아야 계책을 짤 수 있겠지.”
망량은 씩하고 웃었다.
“알겠소? 나는 나 자신을 믿소. 이전 생의 나, 망량 제갈현이 그렇게 멍청한 선택을 할 리가 없다는… 나 자신에 대한 신뢰요!”
[틀린 말은 없군…. 훗.]
백련교주는 쓴웃음을 짓더니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어떻게 하겠냐는 무언의 압박이 틀림없었다.
…….
에라이 젠장….
나는 어쩔 수 없음을 깨닫고는 한숨을 쉬었다.
“후. 날 원망 마시오. 그러면 기억을 전송….”
그 순간 백련교주가 날 제지했다.
[잠깐. 이대로는 안 된다.]
“어? 설마….”
[그렇다. 내가 충분히 감내할 수 있는 미량이긴 했지만 마력이 다시 흑요석에 깃들어 있었다.]
그 말에 나는 인상이 구겨졌다.
‘제기랄! 예전에 사대신기 아그니를 써서 마력을 다 뺐다고 생각했는데 그 짧은 시간에 또 채워졌단 말인가….’
갈수록 마력이 재생되는 속도가 빨라지는 것 같은데?
내가 고민하자 백련교주가 내게 제안했다.
[이번에는 바람의 신기, 바유에게 마력을 바쳐라.]
“이유는 뭐지?”
[바유와의 교섭을 이렇게 해 봐라.]
우우웅
나는 잠시 후 사대신기의 공간으로 들어가서 외쳤다.
“사대신기 바람의 바유여! 나 그대에게 마력을 바치고자 합니다!”
그러자 바유가 파앗 하고 내 앞에 소환되었다. 바유는 팔짱을 끼며 말했다.
[좋아. 그 대가로 뭘 원하나?]
나는 백련교주에게 들었던 대로 입을 열었다.
“바유여! 당신은 혹시 시간의 흐름을 조작할 수 있지 않습니까? 미래로 날려보낼 수도 있는 걸 보면….”
[흐음. 내 고유한 권능은 바람의 속성을 이용하는 것. 미래로 날려보낸다면 아마 시간의 바람을 타고 [작은 굴레]를 뛰어넘어 미래로 날려보내는 바람을 소환하는 것이다.]
“역시. 그렇다면 미래가 아닌 과거로 바람을 내뿜어 줄 순 없는 것입니까?”
[…….]
“과거로도 가 보고 싶습니다. 딱 지금 바친 마력의 양만큼요.”
바유가 뜻밖이라는 눈으로 날 쳐다보았다.
‘과연 백련교주.’
나는 백련교주의 지혜에 약간 감탄했다.
예전에 사대신기 바유는 나를 흉신과 오제가 공멸한 시공간에서 탈출시키기 위해 500년 후로 날려버리는 권능을 쓴 적이 있었다. 그 때는 그러려니 했지만 생각해보니 그것은 단순히 [작은 굴레]를 움직이는 방식과는 좀 다른 것이었고, 바유가 시간을 직접 만지작거리는 게 아니라 [바람]의 속성을 이용하는 거라고 유추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 가정은 현실이었고 바유를 잘만 이용하면 시간여행이 가능하다는 뜻이 되리라!
‘사대신기 바유를 써서 바람을 타고 과거로 갈 수 있다면….’
미래로 가는 건 손해에 가깝지만, 나는 앞으로 엄청난 이득을 얻을 수 있어!
그러자 바유가 말했다.
[안 된다.]
비틀
나는 순식간에 실망해서 몸에 힘이 풀렸다. 그리고 어이가 없어서 소리를 질렀다.
“미래는 되고 과거는 왜 안 되는 건데?!”
인간형의 정령으로 소환된 바유가 곤란하다는 듯 자신의 턱을 괴었다.
[음…. 전생자여. 그대는 아직 윤회(輪回)가 어떻게 흐르는 건지 모르는 단계인가?]
“……? 윤회가 뭐가 어쨌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대는 약간 멍청해 보이니 설명을 해 주지.]
우웅
바유가 바람으로 만들어진 원구를 허공에 소환했다. 그리고는 원구의 정수리에 해당하는 부분을 짚더니 힘을 주어서 원구를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빙글빙글 하고 원구가 회전하기 시작하자, 바유가 입을 열었다.
[잘 봐라. 위에서 아래 방향으로 전우주(全宇宙)의 윤회가 흘러가는 것이다. 이 [방향]이 어디에서 어디로 향한다고 생각하는가?]
“음…. 모르겠습니다….”
[과거(過去)에서 미래(未來)로 향하는 것이지. 그리고 필멸자들은 이 [방향]을 일컬어 [시간(時間)]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너희는 시간을 ‘흐른다’고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
[[작은 굴레]를 조작하는 능력이란 바로 이 윤회의 회전 속에서 위쪽의 점(點)을 찾아내어 짚는 것과 같다. 허나 이 점을 짚기 위해서는 굳이 회전을 거스를 필요는 없고, 바깥에서 회전하는 구체의 한 순간만 인지할 수 있으면 되는 것이지. 이것이 [옛 지배자]가 권능으로 굴레를 조작하는 방식이다.]
“저, 저기 잘 모르겠는데…. 그래서 왜 바람을 타고는 과거로 못 간다는 겁니까?”
바유가 약간의 자부심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나, 바람의 바유는 그런 식으로 굴레를 조작하지 않는다. 우주의 바람은 [큰 굴레]의 윤회에 귀속된 순수한 나의 권능이니, 나는 점을 찍지 않고도 순수하게 윤회의 바람에 올라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에서 미래로 가는데 인과율소모가 매우 적고 다른 지배자들에게도 견제받지 않지. [작은 굴레]를 조작해서는 내게 간섭할 수 없다! 그 대신에….]
치지직
바유의 손가락이 회전하는 구체에 닿자 마치 갈려나가듯 사라졌다. 그가 말을 이었다.
[정방향이 아닌 역방향으론 갈 수 없다. 왜냐하면 우주의 방향은 과거에서 미래로 향하고 있으니, 나는 그 대승적인 방향만큼은 거스를 수 없다.]
“…….”
[윤회의 바람이 미래로 불고 있기 때문이지.]
나는 그의 말을 듣자 황당해져서 말했다.
“그러니까 과거에서 미래로밖에 못 간다는 거네요?!”
[그렇다. 사대신기라 해도 큰 굴레의 방향은 거스르지 못한다. 역풍을 잠시 그대에게 임하게 해줄 순 있지만 그건 그대가 원하는 시간역행 효과가 아닐 거다.]
아니 그냥 앉아서 시간만 때워도 미래로 갈 수 있는데 그게 대체 무슨 쓸모지?!
물론 바유 덕에 한 번 구원받긴 했지만 매번 그런 탈출기로 쓸 수 있다는 보장이 없기에 바유는 현 시점에서 사대신기 중에서 제일 응용력이 별로라고 할 수도 있었다. 내 표정이 안 좋게 변하자 바유가 약간 기분이 상한 듯 퉁명스레 말했다.
[이놈. 네가 멍청해서 못 써먹을 뿐 나의 능력은 충분히 위대한 것.]
“아니 그게 아니고….”
[그리고 언젠가 전생자가 윤회의 도정에 도달하면 내 능력이야말로 사대신기 중에서 제일 강력할 수도 있거늘 표정이 왜 썩느냐! 내가 우주를 멸망시킬 수도 있거늘!]
“아, 죄송합니다….”
사대신기의 기분이 상하면 큰일이었기에 나는 급히 사과를 했다. 바유는 기분이 상한 걸 꾹 참는 듯 말했다.
[아무튼 우주의 바람을 응용할 수 있다면 어떤 식으로든 도와주마.]
“음….”
과거여행을 할 수 있을까 기대했지만 그게 안 된다면 어떻게 바람의 속성을 이용할 수 있을까?
나는 고민하다가 문득 희한한 생각이 떠올라서 말했다.
“잠깐…. 혹시 내가 아니라 다른 놈도 날려버릴 수 있습니까?”
[왜 안 된다고 생각하지? 안 된다고 한 적 없다.]
다소 목소리에 오기가 실린 바유를 보자 나는 바로 이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흐흐흫흐흐…. 십이율주를 최대한 미래로 날려 보내 주십시오.”
십이율주!
네놈만큼은 어떤 식으로든 괴롭혀주마!
[좋다. 그대의 마력만큼 날려보내주마.]
파앗!
잠시 후 바유의 전신에서 빛이 나더니 발광현상이 잦아들었고, 그가 말했다.
[그는 인간계의 시간으로 3일 후에 출현할 것이다.]
나는 실망해서 말했다.
“엥…. 그것밖에 못 날립니까?”
[신기 바유의 바람으로 미래로 날리는 능력은 당사자의 바로 앞에서 쓰지 않으면 효과가 한정된다. 그리고 그대가 제공한 마력도 사실 그렇게 많지는 않군…?]
“흐음.”
나는 그 말에 곰곰이 생각했다.
‘마력을 최대한 모아서 직접 놈의 앞에서 바유를 쓴다면 효과적이겠군.’
날 방해하지 못하게 십이율주를 미래로 날려버릴 수단이 생겨난 것인가!
“그럼 됐습니다.”
아무튼 겨우 3일 뿐이라서 기대할만한 효과는 아닐 것이다. 십이율주같은 놈이 겨우 3일 날려졌다고 세상에 무슨 변화가 생기겠는가? 그럴 리가 없다.
그래도 나는 마력을 소모했다는 사실에 만족하면서 씩 웃었다.
파앗
나는 사대신기의 공간에서 현실로 되돌아와서는 다시 흑요석에 기억을 불어넣었다. 막 사대신기에 마력을 바친 참이라서 암기가 없고 깔끔하리라는 확신이 생기자 나는 망량에게 흑요석을 건넸다.
“망량. 여기있소.”
망량은 잠시 주저하더니 각오를 한 듯 흑요석으로 손을 내뻗었다.
우웅!!
망량이 몸을 떨더니 이윽고 기억을 받아들인듯 서서히 혼탁한 눈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말했다.
“…이런 뜻이었군. 전생자의 삶에 끼어들어서 불행해진다는 건….”
나는 미안함을 느꼈지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사실 망량 당신은 그 동안 나만큼이나 고생했소. 매번 능력을 성장시킬 여유도 없이 날 위해서 일한다고 고생했던 것이오. 그래서 이번에는 가능하면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는데….”
“훗. 됐소. 말했듯이 난 후회하지 않으니까.”
망량은 정신력을 회복한 듯 씩 웃더니 이윽고 얼굴이 약간 어두워졌다.
“그런데…. 뭔가 또 일을 저지른 것 같구려.”
“응?”
“십이율주를 3일 후의 미래로 보내버렸잖소.”
“그게 뭐 어떻다 그러시오? 수천 년동안 동방에 틀어박혀 있던 괴물같은 놈이 사흘 없다고 별다른 일은….”
“흐음. 뭐 별 일 없을 거라 믿읍시다.”
그리고는 망량이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이번 생에 괜히 침울하진 않을 거요! 왜냐하면 전에 없이 쉬운 판인 게 사실이니까 나도 나름대로 즐겨보겠소!!”
나는 기억을 받은 망량이 예전과는 다르다는 걸 알아챘다. 흑요석을 쓰지 않고 꽤 오랜 기간 스스로 성장했기 때문인 걸까?
“쉬운 판이라니?”
“후후. 난 기억을 받는 순간 눈치챘다오.”
망량이 웃음기를 잃지 않고 말했다.
“지금 당신에겐 최강의 패가 아직도 남아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