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검신-1298화 (1,295/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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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나는 그 자리에서 제천대성, 아수라와 세 시진이나 음주가무를 하며 술판을 이어나갔다. 나는 아는 노래 모르는 노래는 다 부르면서 분위기를 띄웠고 제천대성은 나보고 노래를 못 부른다고 타박하면서도 낄낄대며 분위기를 즐겼다. 아수라는 옆에서 그럭저럭 술이 맛있다며 보조를 맞춰주었다.

그리고 술이 거의 다 떨어질때쯤 제천대성이 게슴츠레 눈을 뜨며 말을 꺼냈다.

“…흐흐, 천계에서 주시당하는 위험인물이라 들었는데, 이렇게 융숭한 대접을 해주신다면 내게 바라는 게 있을 거 같구만…?”

“…….”

나는 그 말에 대번에 아까의 위화감을 눈치챘다.

원래 제천대성을 별다른 일 없이 소환하면 제단의 공양물을 보고 기뻐하기 마련이었는데 아까는 마뜩찮은 반응이었던 이유.

‘제천대성도 내가 천계에 위험인물로 찍힌걸 알고 있구나. 소환되고 나서 눈치챈 거야.’

하긴 투선이라서 언제든 천계를 대신해서 제일 먼저 위험인물과 싸울 위치라면 모르는 게 이상할 것이리라. 나는 그 말에 당황하지 않고 씩 웃으며 술병을 들었다.

“막잔 받으시지요.”

“막잔? 거절할 수 없군.”

쪼르륵

내가 술병의 바닥까지 털어서 술잔에 붓자 제천대성은 냉큼 술잔을 자기 목에 털어넣었다. 그리고는 빤히 나를 쳐다보았고, 나는 그 시선을 받자 입을 열었다.

“사실 천계의 위대한 신선 중 하나가 지상에 유폐되어 있습니다. 그 분을 구출하는데 힘이 부족할 것 같으니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응? 그게 누군데?”

“화룡진인(火龍眞人)입니다.”

“……!!”

그러자 제천대성이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그는 잠시 고뇌하다가 말했다.

“너 이 녀석, 무슨 꿍꿍이야? 나를 귀찮은 일에 끌어들이려는 거냐?”

“아뇨. 그저 구출할 화룡진인의 정체를 대성께 숨겨봐야 무의미하잖습니까. 솔직하게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흥….”

제천대성은 힐끔 아수라 쪽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말했다.

“저 놈도 한가락 하는 동료같군. 솔직히는 무슨…. 네 녀석들은 날 이런저런 빌미로 이용해먹고 싶은가 보군.”

가시돋힌 말투였다. 여태껏 제천대성을 만나면서 이런 반응은 거의 없었으나, 나는 왠지 이해가 되었다. 그는 가식없는 만남을 즐기지 흉험한 귀계의 한가운데에 발을 들이는 걸 결코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했던 말이 결론은 같더라도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들릴 수밖에 없다.

‘이번 생에 제천대성의 순수한 호의는 기대할 수 없겠군.’

하지만 차라리 그게 마음은 편할 것이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지금 대성과 이야기하는 이 자리가 사석(私席)이 아닌 공석(公席)이란 걸 알고 있으니까요.”

“…….”

“도리어 공석이니까 이렇게 말씀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가 최대한 담백하게 이야기하려 하자 제천대성은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 했다. 그러더니 입을 열었다.

“이 자리에 소환되는 대라신선의 성질을 알고 꾸민 계책이군. 그럼 굳이 날 소환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팔선이라던가 아무나 유명한 놈을 소환했어도 네 의도는 천계에 전해졌을 텐데 왜 굳이 나였냐?”

역시 제천대성은 얼렁뚱땅인 것 같아도 두뇌가 영민한 존재였다. 단숨에 내가 했던 말의 진의를 알아챈 것이다. 나는 그 말에 최대한 솔직히 대답하기로 했다.

“최강의 투선과 앞으로 친해지고 싶으니까요.”

“……?”

“대라신선의 소환의식은 자주 할 수 있는 게 아니죠. 친해지고 싶은 존재를 소환하는 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제천대성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낄낄 웃었다.

“크큭, 어디서 내가 쎄다는 얘기를 듣고 친해지려는 마음이 들었다 그거냐?”

“안 됩니까? 기왕 천계의 누군가와 친해져야 할 필요가 있었다면 대성을 형님으로 모시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호오….”

“제가 싫으시다면야 뭐 어쩔 수 없고요.”

제천대성의 눈빛이 처음과는 다소 달라졌다. 눈매가 약간 부드러워진 대성은 잠시 후 히죽 웃더니 말했다.

“솔직해도 너무 솔직하군. 노렸다면 성공이라고 해 주지, 하하!!”

부웅

제천대성이 여의봉을 꺼내서 손에 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더니 턱을 까닥였다.

“가자고.”

“저희도 근두운 탈 수 있습니까?”

“끝까지 뻔뻔한 거 마음에 들어. 어차피 길을 안내해줘야 하니 타라.”

“그럼.”

파앗

나는 아수라와 함께 거대해진 근두운에 함께 타서 하늘을 날았다. 나는 하늘을 날던 중 낙양 쪽을 가리켰고, 머지않아 근두운은 낙양 근처의 상공에 도달했다. 제천대성이 낙양 성내를 물끄러미 보다가 중얼거렸다.

“천계와의 연결은 잠시 해제해 두고.”

퍼엉!

그리고 근두운을 해제하자마자 우리 셋은 수백 장이나 되는 천공에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난데없이 하늘에서 떨어지게 되자 황당해서 말했다.

“아니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아까 보니까 이 도시에 [눈]이 너무 많이 뿌려져 있거든. 꽤 강력한 주술사나 마왕이 여기에 있나봐.”

후우우웅

제천대성은 하늘에서 떨어지며 씨익 웃었다.

“그렇다면 칠십이둔(七十二遁)으로 한 번 휘저어줘야지.”

그렇게 말한 제천대성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한 움큼 뽑더니 하늘에서 떨어지며 훅하고 불었다. 그리고 흩날린 머리카락은 이윽고 낙양의 천공을 한가득 채울 정도로 엄청난 숫자가 되었고 그건 가히 수천 명이나 되는 제천대성의 분신이 되었다.

슈슈슈슈슉!!

“……!!”

지붕에 내려앉아 하늘에서 무수한 제천대성의 분신이 떨어지는 걸 보는 건 장관이었다.

‘뭐?! 이렇게나 많이 만들 수 있었어?! 저번에도 수백 개를 만들긴 했지만 더 많구나….’

수천 명도 아니고 일만 마리가 훨씬 넘을 것 같다! 저것들 하나하나가 웬만한 초절정고수를 훨씬 능가하는 전투력을 갖고있다는 걸 생각하면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끼끼끼끼!

그리고 제천대성의 분신들이 마구 낙양 성내를 뛰어다니면서 원숭이처럼 낄낄대기 시작하자 낙양은 삽시간에 혼란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제천대성의 분신들은 단숨에 십여 장을 도약할 수 있으며 심지어 이단도약에 뒷구르기까지 할 수 있었고 때로는 봉을 이용해서 건물을 넘어다녔다.

“우왓.”

“뭐, 뭐야!”

낙양 사람들이 갈팡질팡하고 있었으며 단숨에 시내가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 와중에도 그저 혼란스럽게 하는 게 목적인지 분신들은 사람에게 해를 가하지 않는 게 보였다. 내가 황당한 눈으로 그 광경을 쳐다보자 진짜 제천대성이 다가와서는 말했다.

“고대주술이나 결계를 썼어도 내 분신은 쉽게 간파 못해. 분신이 다 잡히기 전에 빨리 화룡진인을 구출해서 나가자.”

나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대단해. 야차의 감지결계가 걱정이었는데 단숨에 엿먹였어….’

확실히 이 방법이면 우리의 정체는 팔부신중의 눈에 띄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번에 팔부신중에게 미리 존재를 들키는 한이 있어도 화룡진인을 구할 생각이었는데 새삼 제천대성의 능력에 전율했다.

“엄청나군요. 어떻게 이런 분신술을….”

“야 잡담할 시간 없어. 숫자를 늘리고 힘을 줄인 놈들이라서 오래 못 버텨.”

“알겠습니다.”

타다닷

나는 아수라와 제천대성을 데리고 바로 상관혁의 의가 지하로 가서 화룡신검의 봉인으로 갔다. 그리고 화룡신검의 봉인에 신력을 주입해서 바로 봉합해버리며 화룡신검의 본질을 모아서 화룡신검의 형태를 부활시켰다.

우우웅!!

역시나 바로 되살아난 화룡신검은 쇠약해보였다. 그렇다 해도 화룡진인을 구출한 건 사실이었기에 나는 제천대성에게 말했다.

“이제 화룡진인을 천계의 품으로 되돌려드려야겠군요. 허나 서왕모보다 화룡진인이 먼저 만나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누군데?”

“그녀의 제자인 검선 여동빈입니다.”

“…….”

“제천대성님이 지키시는 뒷문을 열어주시면 몰래 만날 수 있을지도요.”

제천대성이 팔짱을 끼며 웃었다.

“아주 딱딱 앞뒤가 맞는구만. 명분도 확실해. 근데 나는 네 얘기를 듣고 결정내릴 권한이 없걸랑.”

“권한이 없어도 만들 수 있는 게 제천대성님 아니십니까?”

“내가 왜? 오늘 처음 본 네가 뭐라고 서왕모나 십이대선한테 거스르면서까지 네 뜻을 따라줘야 하지? 천계의 뒷문을 투선더러 열어달라는게 제정신으로 할 소리야?”

제천대성이 따지고들자 나는 훗하고 웃었다.

“도와주신다면 제천대성님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小說)을 이 세상에 유행시켜드리지요.”

흠칫

제천대성은 뜻밖의 이야기를 들은 듯 당황해했다.

“소, 소설? 무슨 소리냐?”

“말 그대로 제천대성이 천축까지 가는 모험기를 온 세상 사람들이 읽고 즐거워하게 되겠지요. 멋있고 강한 제천대성이 사악한 삼장법사를 여래 앞에서 여의봉으로 때려죽이는 결말입니다. 옆에서 돼지요괴와 물요괴가 박수를 쳐주겠지요.”

오래돼서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아마 오승은이 쓴 내용이 이거였지? 맞겠지…?

“호오…?”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그 소설이 500년 후 미래까지 유행하게 되리라고.”

제천대성이 무척이나 호기심이 당기는 표정으로 고민했다. 그러더니 잠시 후 씨익 웃으며 말했다.

“재밌구만! 그래 어디 이렇게 된 거 끝까지 가 보자고!”

“열어주시는 겁니까?”

“따라와!”

제천대성은 눈을 빛내며 근두운을 소환했다.

“승진을 포기한 고위공무원의 깽판을 보여주지!”

우우우우!!

잠시 후 우리는 제천대성의 근두운을 타고 낙양을 벗어나서 어딘가 신비스러운 북부의 영산으로 갔다. 그리고 천계의 뒷문에 도착한 제천대성이 뒷문을 개방했으며 아름다운 선계의 비경이 우리들의 눈에 들어왔다. 제천대성이 근처의 바위에 걸터앉더니 말했다.

“화룡신검을 여동빈과 상봉시킬 거라면 여기서 한 시진쯤 쉬었다 가자. 검령을 발현시키려면 그 정도 영기는 회복시켜야 하니까.”

“감사합니다.”

우리는 잠시 쉬고 난 후 여동빈이 있는 곳으로 가게 되었다. 검선 여동빈이 평소에 머무는 장소에 도착하자 거기에는 야트막한 산지에서 마치 자연과 하나가 된 듯 가부좌를 틀고 있는 검선 여동빈이 보였다.

검선 여동빈은 우리가 찾아온 걸 느끼자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는 말했다.

“설마 스승님을 구출해서 찾아올 줄은 몰랐구나.”

나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휙하고 여동빈에게 화룡신검을 던져주었고, 화룡신검을 받은 여동빈은 한동안 침묵하다가 내게 예를 갖추어 인사를 했다.

“정말로 고맙다.”

나는 복잡한 표정으로 여동빈을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여동빈. 저는 천계에 오기 위해 두 가지 방법을 더 쓸 수 있었습니다. 하나는 제단을 통해서 정식으로 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당신과 나 사이에 이어진 단말을 이용해서 당신을 부르는 거였죠. 그런데도 제가 굳이 천계의 뒷문을 통해서 당신을 따로 찾아온 이유를 아십니까?”

“잘 모른다.”

“제천대성 님과 안면을 트고 화룡진인을 구하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서왕모를 만나게 되면 그녀가 내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가능하면 서왕모를 안 만나고 당신만 보고 갈려는 겁니다.”

“……?”

여동빈은 잘 모르겠지만 지금 내 외모는 고대에 복희가 초기인간을 다스릴 때의 그 외모와 같다. 다른 천계인물들은 복희의 얼굴을 전혀 모르겠지만 단 한 명, 여와의 화신 서왕모는 내 얼굴이 복희의 것임을 알아보리라.

“그리고 지상에 단말으로 부르는 건 제 목적을 제대로 이루기 힘들기도 했고요.”

내 말을 차분히 듣고 있던 여동빈이 말했다.

“연자여. 무언가 목적이 있어서 따로 날 찾아왔다는 소리군. 나 또한 그러하다.”

나는 피식 웃었다.

“서로 꿍꿍이가 있기는 마찬가지군요. 그럼 누가 먼저 꿍꿍이를 이야기할까요?”

“그대가 먼저 말해보라.”

“좋습니다.”

나는 여동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여동빈. 나는 당신에게 흑요석을 주고 싶어서 직접 왔습니다.”

“흑요석이라고?”

“그렇습니다. 지금까지의 내 기억을 당신에게 전송하는 술법을 시전하고싶어서 온 겁니다.”

여동빈이 어리둥절해했다.

“이해가 가지 않는군. 연자 그대가 신비한 괴인임은 알고 있으나 기억을 전하는 행위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나는 팔짱을 끼며 대꾸했다.

“그것은 전해받는 순간 알 수 있을 겁니다. 일부러 천계의 의식을 이용해서 검선께 기억을 전해주지 않은 이유도요.”

“…….”

“제 목적은 말했습니다. 검선께 전해드린 기억이 타인에게 전해지지 않는다면 저는 이 자리에서 기억을 전송해 드리고 싶습니다. 이제 검선의 목적도 말씀해 주시지요.”

검선 여동빈은 이철괴와 함께 찾아왔을 때 내게 진실한 가르침을 주면서 천계에 찾아와 줄 것을 부탁했다. 분명히 또 다른 목적이 있어서 내게 그런 요청을 했던 것이리라. 그러자 여동빈이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연자여. 우리 팔선(八仙)이 최근 고려 근처의 동해(東海)에 자주 파견되었음을 알고 있는가?”

“처음 듣는 얘기입니다.”

“그 일대에 갑자기 해신족(海神族)이라는 이족들이 대량으로 출몰하여 인간들에게 피해가 생겼고, 그 피해를 무마하기 위하여 단의 일족이라는 신비한 족속들과 협력하여 해신족들을 소탕하는 작전을 벌였다. 그리고 그 와중에 해신족의 고위사제라 하는 자가 소환한 무수한 이족떼를 척결하는 대전투가 벌어졌고 결국 승리했다.”

“…….”

“그런데 그 고위사제라는 해신족은 죽기 전에 바로 그대의 이름을 언급했다. 인간족이 백웅을 내놓으면 자신들의 침략행위는 사라질 것이라고.”

“……?!”

엥?! 뭐?!

그런 일도 있었다고?!

‘해신족 고위사제가 날 언급했다고?!’

내가 깜짝 놀라자 옆에서 듣고 있던 아수라가 중얼거렸다.

“그래서 백웅을 주목했던 건가? 단순히 구천현녀의 선검 때문이 아니라….”

“그렇다. 천계는 구천현녀님의 일 자체에는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나 구천현녀님의 선검술을 쓰는 존재와 해신족이 언급한 백웅이라는 존재가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높자 단숨에 이철괴가 파견된 것이다.”

“흐흠.”

여동빈이 나를 무표정하게 보며 말했다.

“연자여. 나는 뒤늦게 그대와 내가 단말이 이어진 존재라는 걸 알게 되었고 그대가 선검술을 쓰는 존재란 것도 알게 되자 그대를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그대가 천계의 어둠을 걷어줄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제게 천계에 와달라고 했던 거군요.”

“그렇다.”

여동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을 이었다.

“연자여. 선검술을 어떻게 배우게 되었는가?”

“그건….”

나는 대답하려다가 옆에 제천대성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는 잠시 곰곰이 생각하다가 아수라에게 물었다.

“제천대성께도 주면 어떨까?”

아수라가 껄껄 웃는 듯 했다.

“크크. 천계에 정보가 그대로 전해지지 않는다 해서 난장판이 안 벌어지는 게 아니지. 조용하게 살겠다면서 정말 그럴 생각이냐?”

“아니. 당장 때려눕혀야 할 강적이 있는 상태에서는 그런 자질구레한 거 안 따질 거야. 그리고 제천대성은 믿을 만 해.”

“그렇다면야 맘대로 해라.”

그러자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제천대성이 어리둥절해했다.

“무슨 소리냐? 여동빈한테 기억을 담은 흑요석을 준다는 얘기인건 알겠는데 내게도 백웅 너의 기억을 주겠다고?”

“그렇습니다.”

“정말 의미를 알 수 없군. 네 기억을 알게 되면 뭐가 달라지는 거지? 자기 비밀을 숨기려는 놈은 셀 수도 없이 보아왔지만 자기 기억을 남한테 보여주려는 놈은 처음 보는군.”

“싫으시다면 강요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나중에 달라고 하지 마십쇼.”

“이야 거 참….”

제천대성이 도리어 당황해서 자기 뒷머리를 긁는 걸 보자 나는 묘한 자부심같은 게 느껴졌다. 갖고 있는 정보를 잘만 활용하면 제천대성같은 강자도 당황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러자 여동빈이 내게 말했다.

“그 기억이란 걸 달라.”

“절 믿으십니까?”

“선검술을 익히는 자라면 사악한 자는 아니리라.”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파아앗!!

나는 흑요석을 써서 여동빈에게 기억을 전송했다. 얼마 전에 사대신기 아그니를 쓰면서 마기를 거의 바닥까지 없앤 데다 여동빈만한 강자라면 별일 없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여동빈은 잠시 후 기억을 받아들인 후 비틀거렸다.

“…….”

“괜찮으십니까?”

“가히… 상상치 못한 인생이구나….”

그 소감을 들은 제천대성이 호기심을 느낀 듯 내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야. 나도 줘 봐. 뭔지 되게 궁금하구만.”

“네, 그럼….”

파아앗!!

나는 제천대성에게도 기억을 전송했다.

“으헉…?!”

그리고 제천대성 또한 놀라면서 기억을 소화하고 있는 동안, 먼저 정신을 차린 여동빈이 입을 열었다.

“연자여. 묻고싶은 게 있다.”

“말씀하십쇼.”

“이미 그대의 삶은 그대가 당초에 원하고 있던 낙안행도(樂安幸道)와 거리가 상당히 멀어졌다. 팔부신중을 이 세계에서 쫓아낸다 해도 그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굳이 이곳에 찾아와서 내게 기억을 준 것은, 그저 강력한 동료를 늘리고자 함이었던가?”

나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런 목적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그럼 무엇인가?”

나는 28번째 죽음 이후로 줄곧 마음속에 꿍쳐뒀던 말을 허심탄회하게 풀어내기 시작했다.

“검선도 이젠 알고 계시겠지만 500년 후의 미래에…. 인류는 삼황오제에게 패배했고 황제 공손헌원의 화신으로 부활한 천마(天魔)의 손에 신역(神域)의 진인(眞人)들은 참살당했습니다. 신역절기로는 천마신공(天魔神功)을 이길 수 없었던 겁니다.”

“…….”

“다행히도 원인은 모르겠지만 황제가 봉인당한 덕분에 전 숨통이 트인 셈이 되었습니다만…. 결국 저는 그 때 거대한 좌절을 겪고 피폐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입술에 피가 나도록 깨물며 말했다.

“설령 신역절기를 얻어 무예의 극에 도달하더라도 극한의 [옛 지배자]를 이길 수 없다는 게 증명되어버렸으니까요….”

“…….”

“하지만… 전 그래도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며칠 전 저는 무(武)란 신념(信念)이라는 걸 알게 되었고, 아직 넘어야 할 벽이 많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일단은 눈앞에 있는 벽을 타협 없이 뚫고나가려고 검선을 찾아온 겁니다.”

그 말에 검선 여동빈이 나직이 말했다.

“선검술(仙劍術)인가.”

“그렇습니다.”

나는 타오르는 눈빛으로 여동빈을 노려보며 외쳤다.

“그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이번 생에 선검술의 진보를 이루고 말 겁니다. 검선 여동빈께서는 선배로서 재능없는 절 도와주셔야 합니다!”

마도구를 개조하든 방주를 이용하든, 수백 년의 수련을 하더라도 노력을 다져서 선검술만큼은 어떻게든 한 단계 올라서고 말겠다! 그게 궁극적으로는 내 전생여정을 줄이는 길이 될 테니까!

“…….”

여동빈은 한동안 침묵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연자여.”

여동빈이 한참 후에 처음으로 말을 꺼냈다.

“그대가 두 자루의 선검(仙劍)을 지니고 있음을 여태 모르고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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