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검신-1297화 (1,294/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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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이광이 혼절한 후 나는 바로 마을에 내려가지 않고 명상하던 동굴로 향했다. 그것은 당장 내가 마을에서 해야 할 잡스러운 일은 망량이 처리해줄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었으며 그런 잡일을 하는 것보다 더 중대한 일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깨달음!

완연한 무(武)의 깨달음은 아니지만 아예 단서조차 없던 상황에 실낱같은 ‘느낌’이 다가왔다는 건 내게 있어서 고무적인 게 틀림없었다. 사실 절대지경에 오른 이후 남은 과제라고는 무량단이나 기타 절학의 숙련도 향상밖에 없었으며 ‘절대지경 이후’의 경지가 와닿지 않는 상태 - 그런 상태에서 기약없이 무공만 수련하는 건 지루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뭔가 다르다.

깨달음 하나로 강해지거나 한 건 아니지만,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계단이 하나 생겨난 기분!

‘하지만 이 느낌은…. 오래 지나지 않아서 그 형태를 감춰버릴 것 같다.’

그것은 오랫동안 무예를 수련한 수련자로서의 감이었다. 어떻게든 이 사소한 깨달음을 갈무리하며 필사적으로 잡아채지 않으면 신기루처럼 날려버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근거는 없었지만 근거 이상으로 확실하게 다가오는 감이라는 건 내 인생에서 때로는 이성적인 고찰보다 훨씬 중요했다.

우웅

나는 동굴에 앉아서 십만 번 수련으로 소모된 체력과 기력을 일단 회복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천랑뇌신결을 운용하며 뇌구의 회전을 반복하다보니 머지않아 기력을 완전히 충만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구궁파천뢰의 성취 자체는 그렇게 높지가 않군...’

이설표는 내게 구궁파천뢰에 천재적인 재능을 갖고있다고 감탄한 바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 동료들이 500년동안 ‘백웅’에게 맞춰서 뇌신류 신공을 개량하다보니 만들어진 필연이었고, 또한 구궁파천뢰의 수련기간도 사실 500년 후의 미래에 머문 시간이 멀지 않았기에 그렇게 길지 않았다.

‘구궁파천뢰도 열심히 연마해서 대성(大成) 이상의 성취를 얻어야 해. 지금은 뭔가가 부족해….’

나는 이를 악물었다.

‘구궁(九宮)의 경지에 언제 이를 수 있을까.’

이설표가 알려준 구궁파천뢰의 성취도에 따르면 극한에 이르게 되면 구궁(九宮)을 시전할 수 있게 되는데, 이 구궁은 이론상으로만 존재할 뿐 구궁파천뢰를 창시한 자들은 물론 후대의 그 어떤 자도 이루지 못했다고 했다. 일단 구궁에 필요한 내공의 단위가 천문학적으로 늘어날 뿐만 아니라 전신의 뇌령이 포화상태에 이르렀을 때 생겨나는 몸의 불균형을 해결할 방법이 아직 없었기 때문이다.

슈슈슈슉….

내가 체력까지도 완전히 회복한 것은 가부좌를 틀고 앉은지 두 시진이나 지나서였다. 급속회복이라면 훨씬 빨리 이룰 수 있었겠지만 가부좌로 명상을 하는 시간 자체가 집중력을 높여주었기 때문에 무리하지 않았다.

“아….”

그리고 두 시진 내내 생각을 하다보니 나는 무언가를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나는 아직까지 무엇하나 제대로 극(極)에 도달한 경지가 하나도 없구나.”

지금껏 내심 알고는 있었지만 직시하지 않으려 했던 치명적인 단점!

내 칠대절학은 아직도 발전도중이다. 무쌍패를 익히게 되면서 나머지 육대절학의 경지도 전반적으로 올라가긴 했지만 장삼봉의 개세신공이니 만큼 파도 파도 가능성이 무궁무진했기에 나는 아직 하나하나를 극성으로 익혔다고 볼 수 없었다. 진짜 극성으로 익혔다면 장삼봉처럼 합체절기를 쓸 수 있어야할테지만 합체절기는 아직도 요원한 일이다. 구궁천라십단금(九宮天羅十段錦)이나 현천구룡파(玄天九龍波)같은 걸 쓸 수 있어야 극성에 이르렀다 할 수 있으리라.

그렇다고 무쌍패를 극성으로 익혔냐면 그것도 아니다. 대성에 이르러 이제 연속사용도 어느 정도 가능하긴 하지만 장삼봉처럼 능어일념(能於一念)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

팔선신공은 말할 것도 없다. 하나하나씩 종사급 고수들의 도움으로 대충 숙련시키긴 했지만 칠대절학보다 더욱 수련기간이 짧고 내 재능이 일천하여 그 가능성을 충분히 열었다고 할 수 없다. 절대지경의 의념천주로 요결만 끌어다 쓸 수 있긴 하지만 진짜 위력을 살린다면 지금보다 두 배 이상 강해질 테니, 대성조차 아니라는 느낌이 강하다.

무당파 절학은 그렇다 치고 뇌신류 신공은?

뇌신류 검술의 완성인 검뢰에서는 무량단을 얻어서 대성을 넘어선 경지에 이르렀고 극성에 가장 가깝다. 그러나 이마저도 500년 후의 투선급 고수인 독고성은 뇌신검무(雷神劍舞) 세계베기(世界斬)의 경지에 이르러서 번개의 뇌성(雷性)을 살리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 위력은 일순간 능어일념으로 무쌍패를 쓰는 장삼봉마저 위태롭게 할 정도였다.

나는 아직 검뢰의 속성화를 터득하지 못했기에 검뢰에서 완벽히 극에 달했다고 말할 수 없었다. 좀 더 500년 후의 세계에서 머물렀다면 독고성에게 그 비결을 전수받았을지도 모르지만 시간이 없었다.

뇌신류 창술이나 권술성취는 검술만도 못하니 따로 할 얘기도 없다. 뇌령인이나 뇌신권 등을 즐겨쓰지만 내 잠재능력이 너무 높아서 절학이 강력하게 보일 뿐 권술성취 자체는 잘해봤자 뇌신류 면허소지자 정도일 것이다. 권법도 딱히 재능이 없는데 깊게 파지조차 않았으니 당연하다.

신법에서는 꽤 가능성이 있다. 주능통이 전해준 멸혼보의 극한, 파천일보(破天一步)를 터득했기에 현재 이 세상에서 나보다 신법이 빠른 존재는 거의 없다고 봐도 될 것이다. 그러나 파천일보는 모든 넋을 잃고 한 번의 달리기에 모든 걸 집중하는 가공할만한 집중력이 필요했기에 언제나 최상의 경지라 보기는 힘들었다. 게다가 파천일보를 순수한 전투 그 자체에 응용하기에는 아직 그 용법을 잘 모른다는 느낌이다. 신법 또한 제대로 익혀봐야 할 필요가 있다.

무영탈혼검법에 있어서도 딱히 할 말이 없다. 배우긴 했지만 내 전공은 뇌신류 검술이다. 평범한 십 년차 무영문도보다야 훨씬 경지가 높겠으나 극성을 논하기에는 부끄러울 지경이다.

남은 거라면 천둔검법과 신투지존의 무공들이다. 그러나 천둔검법은 예전에 5단계까지 단말으로 전해받았으나 그저 내 무예의 모순을 해갈하는데 그쳤으며 그 진의는 절대 얻지 못했다. 기껏해야 육의성천도를 모방하는 수준이다.

그리고 신투지존의 무공은 내 적성에 꽤 맞았기에 짧은 수련기간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성취도가 높았지만….

‘만상지투에 있어서는… 난 아마 천재일지도 모르지만…. 아니 천면공자도 그렇고 신투지존의 무공이 전부 나랑 잘 맞는다만…. 하아…. 씨발….’

나는 대번에 인상이 구겨졌다.

솔직히 나는 내가 만상지투를 잘 쓴다는 것 자체가 떨떠름할 때가 많았다. 특히 28번째 삶의 막바지에서 만상지투를 이용한 결과가 ‘무공이 아니다’라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더더욱 기분이 찝찝하다.

진짜 기분이 이상하다.

천재적인 재능을 과시하고 싶은 검술 등의 진짜배기 무공에서는 재능이 바닥이라서 늘 재능을 갈구했는데, 정작 도둑질 계열의 무공의 적성이 높아 천재적이라는 걸 나 스스로 인식한다는 게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다.

‘신투지존은, 그리고 그의 무공인 만상지투는 내가 원하는 이상적인 무인의 모습이 아니야!’

또 따져보자면 선검술이야 아직도 그 정체가 모호하니 극성을 논할 수도 없고, 암야참 또한 마찬가지다.

정말이지 나는 무엇하나 제대로 극에 달한 게 없는 것이다.

“…….”

풀썩

“깨달음이란 바로 이런 거였나….”

깨달았다.

아까 얻은 깨달음이 뭔지를 깨달은 것이다.

나는 그 동안 내 마음속을 괴롭히던 심마(心魔)의 정체를 깨달아버렸다.

그것은 재능이 하나도 없는데도 절세무공 수십 개를 한 몸에 수습하여 기약없이 성취를 올려야 한다는 극한의 모순!!

나는 사실 이 모순을 아주 예전부터 느끼고 있었지만 절대지경에 올라 의념천주로 대부분의 단점을 상쇄할 수 있게 되면서 이 모순을 회피하는 게 가능했다. 그 이후부터는 절대지경의 힘을 휘두르며 무량단의 압도적인 정면승부 능력을 즐기게 되면서 이 단점을 제대로 고민한 일이 드물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야 현실을 직시했다.

절대지경에 올랐다고 하더라도 이건 현실도피다.

내가 아직도 재능이 없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십 개의 절세무공을 하나하나 극성으로 올려야하는 과제가 존재한다는 점 - 이걸 어떻게든 해결하지 않는다면 나는 더 이상 전진할 수가 없다.

10년이 지나든, 100년이 지나든, 계속해서 현실도피하면서 암야참이 뭔지 선검술이 뭔지 묻고다니면서 제자리걸음하고 있을 수도 있다.

이 답답함을 무의식에서는 깨달았기에 심마의 의식을 발현시킨 것!

“그래서 당장 어떤 무공을 수련할 것이냐?”

나는 이 답답한 심정을 그만 혼잣말로 내뱉고 말았다. 이 혼잣말은 나자신에게 내뱉은 의문이었으며 동시에 심마에게 도전장을 내미는 것이었다.

“앞으로 수백 년간 생사를 걸고 무인의 집념으로 완성시키려는 무공은 대체 무엇이냐, 백웅!”

나 스스로에게 호통을 치자마자 나는 전신에서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는 떨구었다.

답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없다….’

정말 없는 게 아니라 너무 이룰 게 많아서 도리어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이 모순을 막상 현실로 인식하니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구궁파천뢰, 선검술, 암야참, 천둔검법, 칠대절학, 무쌍패, 팔선신공, 검뢰, 파천일보 등등….

이 모든 게 이뤄야 할 성취가 남아있었지만 정작 하나조차도 제대로 집중해서 끝을 볼 자신이 없다. 최우선 과제라면 당연히 구궁파천뢰겠지만 구궁파천뢰도 지금은 수월하게 진도가 나가고 있으나 나중에 벽에 막히게 되면 또 다른 무공에 눈이 돌아갈 것이다. 선검술과 암야참은 기약이 없으며, 모든 절세무공이 그러하다.

깨달음이란 바로 신념이 무예라는 것.

이것은 동시에, 내가 과거 이광의 명령으로 뇌영검법 10만 번을 펼쳤을 때의 절실한 신념으로 때려부숴야 할 벽이 무수히 많이 존재한다는 걸 의미한다. 여동빈이 말했던 것처럼, 재능없는 무인이 벽을 부수기 위해서는 생사를 건 신념밖에 없다는 걸 절실히 느껴왔기 때문이다!

또한 그 한 번 한 번의 고비가 실패하면 무조건 죽을 것이며, 그 죽음 속에서 재능부족으로 인해 무수한 시간이 낭비될 것이며, 나는 그 끔찍한 시간낭비와 고통과 절망을 겪고 싶지 않아서 절대지경의 현재 상황에 안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과연 몇 번이나 ‘벽’을 신념으로 때려부숴야 할까?

내 재능으로 내가 원하는 경지에 이르려면…. 수십만 년동안 수천만 번을 죽어야 할 수도 있다.

내 의지력으로 그게 가능할까?

‘이젠…. 내 체력과 기력이라면 란나찰 10만번조차 별로 큰 고난이 아니야. 생사를 걸게 만들 수 없어. 그래서 더….’

생사를 넘나드는 극한수련조차 이젠 힘들다는 걸 깨달아버렸다. 가만히 있어도 엄청난 기력이 자동회복되기 때문에 생사를 넘나들 일조차 별로 많지 않다. 물론 지금 상태에서도 삼황오제나 팔부신중한테 무작정 덤벼든다면 생사를 건 수련은 되겠지만 그게 정말 의미가 있을까? 결국 그들과 싸울 때는 무공보다는 권능이 주력이 되는 게 현실일 것이다.

깨달았다.

아니 깨달아버렸다.

내가 너무나 괴로운 현실을 외면하고 있었다는 걸….

“아…. 젠장… 하….”

누가 나보고 그 모든 절세무공의 극한을 보라고 시킨 건 아니다.

그러나 나는 여태껏 장난삼아 전생한 게 아니다. 외신조차 없앨 수 있는 궁극의 진공가향이 있으리라고 믿으며 전생했으며, 그 와중에 신역절기에 도달하여 무의 극한을 바라보아야만 신을 상대로 제대로 싸워이긴다는 걸 이미 깨달은 상태다. 그리고 그 압도적인 경지는 지금상태로는 절대 불가능하단 걸 알아차렸다.

왜냐하면 뿌리가 얕은 나무는 결코 거목(巨木)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높은 경지에 오른 만큼, 더 높은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더 압도적인 경험치와 수련치를 필요로 한다!!’

나는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가진 것의 절반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해서는 더 높은 곳으로 갈 수가 없어!!’

왠지 내가 지금까지 선검술이 안되면 구궁파천뢰, 구궁파천뢰가 안되면 암야참, 암야참이 안되면 칠대절학 같은 식으로 빙빙 돌아갔던 이유를 알 것 같다. 하나의 벽에 부딪히면 무궁무진한 수련과 생사를 건 신념으로 그걸 돌파해야 했는데 그 하나하나의 벽이 수천 년 이상의 수련과 수십 번의 죽음을 요구하고 있었다. 하나하나가 천하무림에서 역대최강으로 손꼽힐 만 했고 그만한 절세무비한 재능을 요구했다.

그런 상황에서 세계가 멸망할 위기가 닥쳐오고 [옛 지배자]들이 싸우자고 덤벼들고 동료들도 지키고 정보도 모으고 하다보니 당연히 엄두도 내지 못했던 것이리라.

나는 여태껏 이 사실을 무의식적으로 외면했다.

알아봤자 황제 공손헌원이나 삼황오제나 [옛 지배자] 등과 피터지게 싸우는 와중에는 절대 이룰 수 없는 꿈이었기 때문이다.

부들부들

나는 주먹을 꽉 쥐고 떨었다.

재능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상태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요구되는 소양이 확실히 달라져 버렸다. 이미 절대지경의 의념천주를 얻었으니 이 압도적인 능력을 기반으로 지금껏 얻었던 무공들을 다져야 하는 시기가 찾아온 것이다.

몇 십 년이 될지 몇 백 년이 될지 모르지만 지금부터는 경지의 급상승 대신에 피터지는 수련과 끔찍하게 재미없는 함묵(含默)의 고행 속에서 내실을 다질 때.

‘어쩌면 이게 싫어서 그 동안 외면했던 걸지도….’

나는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며 동시에 또 하나의 깨달음을 정리했다.

‘신념이 무예를 만든다는 것. 그건 이미 내가 한 번 들은 적 있었던 이야기야.’

나는 그로부터 한 시진 동안 좀 더 명상을 하고난 후 마을로 내려갔다. 그리고 마을로 내려가자마자 망량과 아수라, 생 제르맹을 다 불러서 이야기를 했다.

“망량. 전에 말했던 팔부신중 일망타진의 계(計)는 언제쯤 발동할 것 같소?”

내가 진중한 목소리로 묻자 망량은 이상한 낌새를 느낀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

“흠. 소문은 일단 실었고 며칠이면 효성공주도 섬서성주를 만날 테니…. 한 서너달 후일 건데.”

“좋소. 그거만 확실히 알면 됐소.”

그리고는 옆에 있던 생 제르맹을 돌아보며 말했다.

“생 제르맹. 당신에게 제작을 의뢰하고 싶은 물건이 있소.”

“무엇이오?”

나는 동굴에서 생각했던 것을 차분히 이야기했다.

“바깥에서보다 안쪽의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이공간 마도구요. 바깥에서 1년밖에 흐르지 않았으나 내부에서 10년의 시간을 보낼 수 있으면 좋겠소.”

“허어…?”

생 제르맹은 눈을 꿈벅이더니 대꾸했다.

“만들 수는 있소만 만드는 용도를 내게 말씀해주셔야 답변을 드릴 수 있소.”

“수련이오.”

“수련? 설마…. 마도구의 내부에서 기와 의념을 사용해서 무공을 수련하겠단 말이오?”

“안되오?”

“…….”

생 제르맹이 약간 기가 막히다는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말했다.

“당신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마도구는 만능이 아니고 내구도도 당연히 한계가 있소. 강력한 마도구라고 해도 그 안에서 강력한 마왕이나 절세고수가 강대한 힘을 지속적으로 방출하면 내구도가 소모되어 결국 부서지게 되어있소. 봉인전용 마도구조차 한계가 명백할지언대, 어찌 그런 수련용 마도구를 제작할 수 있겠소?”

“으음.”

“나는 또 적 포로를 고문하는 용도로 제작하는 줄 알았소. 이미 무력화시킨 적을 집어넣는 게 아니면 그런 용도의 마도구는 인간의 힘으로 만들 수 없소. 당신정도의 초인이 마도구 내부에서 수련한다면 무조건 부숴질 거요.”

“인간의 힘…?”

나는 그 말에 문득 생각나는 게 있어서 말했다.

“생 제르맹. 그렇다면 수정석비의 조각을 이용하면 만들 수 있겠소?”

“음! 역시 그 얘기를 하는군….”

생 제르맹이 침음성을 흘리더니 슬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은… 할지도…. 하지만 최대한 조각을 많이 모아오시오.”

“알았소.”

망량의 계책을 잘 수행해야겠다.

그 때까지 대화를 얌전히 지켜보던 아수라가 의문을 품고 입을 열었다.

“백웅!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뜬금없이 수련용 마도구라니.”

“아수라. 나는 깨달았다.”

“뭘 깨달았는데?”

“나는 이 절대지경 상태에 안주할 수가 없어. 내 앞에 놓인 벽 하나하나를 신념과 생명을 걸고 뚫고나가야만 해.”

“…….”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번이 기회야. 난 어떻게든 이번에 심마를 극복하고 말겠어!”

“심마를…?”

“극복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발판을 만들겠단 말이다.”

그러자 아수라는 팔짱을 끼고 있다가 알아챈 듯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하군. 언제 그 모순을 알아챌까 싶었는데 설마 혼자서 자신의 심마와 그 원인을 느낄 줄이야. 설마 이광과 십만 번 수련을 한 게 효과가 있었던 건가?”

“…….”

“네가 뭘 하려는지 알 것 같다. 네가 벽을 넘는데 목숨을 걸 필요가 있다면 언제든 어울려 주마, 백웅.”

“음 그것 때문에 말인데.”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지금 당장 여동빈을 만나러 천계로 가려고 하는데 나랑 같이 가 줘.”

“…….”

“안… 되겠냐?”

아수라는 뜻밖의 이야기를 들은 듯 잠시동안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크큭, 하고 괴소를 흘리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하!! 죽을 때는 같이 죽어달라 그 말이냐? 만일 일이 잘못되서 천계의 수많은 신선들에게 포위당해서 죽을 때가 되면 같이 싸워달라고?”

원래라면 아수라의 반응에 당황해하며 미안해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동굴에서 이미 무수한 생각을 하면서 마음을 정리한 후였기에 표정변화 없이 차분하게 대꾸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갈 수밖에 없어. 지금 내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여동빈을 만나는 것뿐이야.”

“그렇긴 하지. 구궁파천뢰든 암야참이든 선검술이든…. 그 요체는 여동빈을 만나는 것과 연결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으니.”

“그리고 이왕 해야 할 일이라면 더 미루지 않기로 마음먹었을 뿐이야. 더 미루면 팔부신중 때문에 복잡해질 수도 있으니까.”

내 대답에 아수라가 뭔가를 느낀 듯 말했다.

“팔부신중을 외우주로 쫓아 보내는 작전 중에 죽을 수도 있어서 그런 거군.”

“…그래. 둘 다 죽을 가능성이 있지만 기왕 할 거라면 깨달음부터 얻어보는 게 선후관계에서 효율적이잖아?”

“크크!! 맞는 말이다.”

아수라는 기분 좋게 히쭉 웃더니 한걸음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 대홍수의 일도 조만간 해결하러 다녀야 할 터. 네가 그런 생각이라면 지금 당장이라도 어울려 주마.”

“정말 괜찮겠나?”

“안 그래도 한번쯤 해보고 싶었던 일이다. 천계 신선들을 미친듯이 베다가 전장에서 죽으면 무인으로서는 끝장나게 재밌겠지.”

“…하하.”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아수라처럼은 생각을 못 하겠군.’

예전에 [옛 지배자]가 수요를 통해 내 몸에 빙의했을 때 이미 겪어본 일이었기 때문일까? 천계 신선들을 마구잡이로 도살했지만 그게 딱히 재밌는 일도 아니었고 빙의가 풀리든 안 풀리든 죽을 거라는 생각에 정신이 없었다. 나는 아직은 아수라처럼 전투와 죽음 자체를 즐기는 마음상태는 되지 못하는 것이리라.

나는 망량에게 말했다.

“그렇게 되었으니 망량. 천계로 안정적으로 올라갈 수 있게 당신 사제의 힘을 빌리고 싶소.”

“…….”

망량은 우리의 대화를 듣다가 침중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설마 내 사제 천우진의 힘을 빌린다는 건, 스승님의 마을에서 제(祭)를 치러서 천계로 향하는 등용문을 소환하겠다는 말이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들은 적 있는 방법이지만 망량선사한테 뇌물을 너무 많이 바쳐야 해서 싫소. 나는 ‘뒷문’을 이용해서 갈 생각인데 과정이 좀 필요하오.”

“뒷문? 어떤 과정 말이오?”

“세상에는 천계와 이어지는 인계의 통로가 있는데 고대에는 북쪽에 하나 있었소. 근데 그건 전욱이 무너뜨리면서 사라졌고 그 외에도 몇 개의 통로가 있지. 그 중에서 뒷문의 위치를 하나 알고 있는데 거기를 통해 천계에 갈 생각이오.”

“음?! 그, 그런….”

“그러니까 어떻게 하는 거냐면….”

나는 동굴에서 미리 생각했던 계책을 망량에게 말해주었다. 계책이라기보다는 전생하면서 이미 한 번 써먹었던 방법을 써먹는 것에 지나지 않았긴 하지만 어찌되었든 망량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놀란 듯 했다.

“놀랍군…. 마치 당신은 천계에 수십 번은 왔다갔다한 것 같소. 어떻게 그런 방법을 다 알고 있단 말이오?”

“하하.”

“음…. 그 정도로 준비가 되어있다면 도와줄 수밖에. 하지만.”

그리고는 그 자리에서 술법으로 웬 종이를 소환하더니 일필휘지로 무언가를 휘갈겨썼다. 망량은 그 종이를 곱게 접더니 이윽고 지조(紙鳥)를 만들어냈고 그 지조를 허공으로 둥실 띄우자 지조는 마치 살아있는 새처럼 어딘가로 휙하고 사라져 버렸다. 일련의 술법을 시전한 망량이 입을 열었다.

“도와는 주겠으나 천계에서 죽지 마시오.”

“안 죽으려고 노력하겠지만 장담은 못 하오.”

“죽어버리면 내 부탁을 들어주겠다는 약속은 어떻게 할거요?”

“아, 그렇군….”

“후우….”

망량은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됐소. 당신은 악운에 강해보이니 어떻게든 되겠지. 사제에게 전령을 띄웠으니 바로 찾아가 보시오.”

“고맙소.”

파앗

나는 곧장 망량선사의 마을에 아수라와 함께 찾아가서 천우진을 만났다. 천우진은 망량의 술법으로 날아온 지조를 받은 듯 한 손에 구겨진 종이를 들고 있었고 무척이나 기분나빠하는 표정이었다. 그리고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 개종자들아. 내가 너희가 해달라면 다 해주는 하인으로 보이느냐? 이런 제기랄…. 사형을 어디까지 이용해먹으려는 거냐!”

진짜 기분이 나쁜가보다.

나는 히죽 웃으며 천우진에게 말했다.

“천우진. 정 그러면 거래를 하는 건 어떠냐?”

“무슨 거래?”

“우리가 천계에 가서 일정한 목적을 달성하고 되돌아온다면 후불로 네게 산하사직도의 진짜 사용법을 가르쳐 주지.”

“…….”

천우진은 더더욱 기분이 나빠진 듯 말했다.

“개망종아. 네가 뭔데 산하사직도의 진짜 사용법을 운운하느냐? 직접 한번 당해보고 싶으냐?”

“그럼 내기할래?”

“내기라고?”

“진짜 사용법이 따로 있으면 넌 이번 생에 내 밑에서 계속 일해줘야 하고, 반대의 경우 내가 너한테 전국옥새와 전시안을 구해주겠다. 내 이름을 걸고 난 전국옥새가 어딨는지 위치를 알아.”

“……!!”

그러자 천우진은 흠칫했다. 내가 너무 강하게 나오자 불안감을 느낀 듯 했다. 하지만 이윽고 자존심 때문인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이 약속은 물릴 수 없다. 너야말로 약속을 지켜라.”

“알았다.”

예전에 천우진이 전국옥새와 전시안에 탐욕을 부리던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일까? 생각보다 도발이 잘 먹히자 나는 흡족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천우진이 마을에 제단을 마련한 후 내가 마련해 온 노예시장의 홍옥(紅玉)과 온갖 종류의 화려한 보물들을 그 위에 올렸다. 쌍고검과 식토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우우우….

그리고 이번 생에 처음으로 대라신선이 소환되는 의식이 거행되었다. 나는 몇 십 번이고 보아왔던 장면이라 감흥이 없었지만 아수라는 옆에서 신기한 듯 지켜보는 모양이었다.

파아아앗!!

모습을 드러낸 대라신선은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엥? 너 나 아냐? 뜬금없이 다른 유명한 신선도 아니고 나를 불러내는 놈은 처음 보겠네?”

육신을 가지고 소환된 대라신선이었지만 나는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럴 만한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빙긋 웃으며 그 대라신선에게 말했다.

“반갑습니다, 제천대성(齊天大聖).”

제천대성은 제단 위에 있던 제물들을 힐끔 쳐다보더니 약간 투덜거렸다.

“거 뇌물은 싫어하지 않는다만 그렇게까지 내 취향은 아닌데…. 용건부터 말해볼래?”

응? 예전과 약간 반응이 다른데?

하지만 나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슬며시 말했다.

“그럴 줄 알고 준비했습지요.”

“응?”

퍼엉!

나는 곧장 목갑을 열어서 노예시장에서 가져온 최상급 술과 안주를 잔뜩 꺼냈다. 그걸 본 제천대성의 입이 가득 벌어졌고 옆에서 지켜보던 천우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나는 술병의 목을 잡으며 500년 후의 미래에서 배워 온 유행어를 외쳤다.

“한턱 쏠테니까 신나게 마셔봅시다!!”

제천대성이 멍하니 있다가 광소를 터뜨렸다.

“새끼 술 좀 마시나본데!!”

잠시 후 우리는 신나게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나는 앞에 나와서 노래 한 곡 부르면서 생각했다.

‘가자!’

천계 뒷문으로 가는 계획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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