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검신-1295화 (1,292/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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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내 말에 검마와 무영검제는 동시에 당황한 듯 했다. 무영검제는 살짝 평정을 잃고는 말했다.

“…전에 서문휘 사형의 사제였다 한 건 그냥 해본소리라고 하지 않았나!! 이제 와서 무슨 소리지?”

그랬다. 전에 소을촌에 천축세력과 쳐들어온 무영검제를 설득할 때 그를 뒤흔들 생각으로 했던 얘기가 바로 내가 전대 무영문주 서문휘의 사제면 어쩔거냐는 것이었다. 물론 그 사건이 끝난 후 무영검제에게 그냥 내 정보력이 좋아서 알게 된 것 뿐이며 그냥 해 봤던 얘기라고 대충 퉁치고 넘어갔던 것이다.

즉 내가 전전대 문주인 서문걸의 친구라고 하는 건 모순이 된다. 일전에 했던 것과 앞뒤가 맞지 않는 소리이니 무영검제가 따지고 들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는 위기에도 당황하지 않고 태연하게 술술 말이 입에서 나오는 걸 느꼈다.

“소을촌의 혈맹인 당신들에게 혼란을 주지 않기 위한 배려였소. 그 때 내가 제대로 무영문의 위계를 따지고 들려고 했다면 당신들이나 나나 서로 피곤했을 것이고 그럴 상황도 아니었기에 얼추 관련 없는 것처럼 넘어가려 했던 것이오. 백련교주가 찾아오지 않았다면 앞으로도 평생 그랬겠지.”

나는 좀 더 강하게 말을 이었다.

“허나 백련교주가 무영문마저 사정권에 넣은 지금은 이것저것 가릴 때가 아니게 되었구려. 나는 과거 서문걸에게서 무영문의 무공을 일부 전수받았으며 무영문에 변고가 생기면 도와주라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오!”

“……!!”

무영검제가 흠칫했다. 그는 아직도 갈피가 잡히지 않는 듯 당황스러워하는 표정이었고 반면에 검마는 냉정침착하게 내 말의 진위를 분석하는 듯 했다. 잠시 후 검마가 입을 열었다.

“이해가 가지 않는군. 우리 무영문의 무공을 당대 문주가 자유자재로 외인에게 전수한 경우가 있긴 했고 그것은 문주만의 권한이 맞소. 허나 그것만으로 당신이 조부의 친우라고 주장하기엔 너무 허술하지 않소? 구체적으로 어떤 인연을 맺었다는 말이오?”

으윽!

냉정하게 검마가 따지고 들자 나는 단숨에 말이 꼬일 뻔 했다. 역시 검마쯤 되는 자를 한두 마디로 현혹시키기는 쉽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나는 표정에 내색하지 않으며 그들을 지긋이 바라보다가 말했다.

“이미 들었겠지만 나는 뇌신류 전전대 종사인 이강룡의 제자이며 뇌신류 사람이오. 다만 잠시 강호를 떠돌 때 서문걸과 의기투합하여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고, 그 때 친우의 인연으로 서로의 무공을 교환하였소. 나는 뇌신류의 무공을 서문걸에게 일부 가르쳐주었고 서문걸 또한 마찬가지였지. 그리고 각자의 문파에 변고가 있을 경우 서로 도와주기로 약속했던 것이오.”

“조부께서 뇌신류의 무공을 익혔다는 이야기는 들은 바가 없소.”

“당신이라면 그런 사정을 이야기하겠소? 친구끼리 무공을 나누고 의리로 도와주기로 했다는 이야기가 겉으로는 미담이지만 실상 문파의 후예들에게 안 좋게 비칠 게 뻔하잖소.”

“으음….”

검마는 적당히 둘러댄 답변에 그다지 할 말이 없는 듯 했다. 딱히 내 말이 논리적인 건 아니었지만 아니라고 할 수도 없게끔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실제 증거가 나와야만 근거가 생기는 말인데, 나는 이미 무영문의 무공을 알고 있음을 증거로 내보인 상태 - 인과가 역전된 이상 지금 이 자리에서 명명백백한 시비를 따질 수 없는 것이었다.

‘중요한 건 지금 검마가 납득하냐 아니냐가 아니다. 애초에 대충 지어낸 거짓말으로는 그럴 수도 없지.’

일단 이 자리를 모면하고 진실과 거짓을 뒤섞어서 모호하게 만드는 게 최선이다.

나는 바뀐 분위기를 놓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믿든 믿지않든 나는 무영문을 진심으로 혈맹으로 생각하오. 그렇기에 당신의 딸인 서문혜 소저의 신분을 알게 되자 최선을 다하여 귀문으로 인도했던 것이고, 앞으로도 웬만해선 침묵한 채 암중으로 도와주려 했소. 그러나 천하제일문이자 최강의 무림세력인 백련교가 정면으로 나서게 된 이상, 더 이상 그럴 수는 없소!”

“그럴 수 없다 함은 무슨 의미요?”

“오늘부터 두 분께서는 무영문의 모든 제자들을 이끌고 소을촌으로 와 주시오. 소을촌에 머무는 한 백련교주가 직접 쳐들어오더라도 내가 무조건 안위를 보전해 드리겠소.”

“…….”

“…….”

검마와 무영검제는 곤혹스러운 듯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들 입장에서는 뜻밖의 진실이 밝혀짐과 동시에 갑작스러운 종속제안을 받은 셈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무영검제가 인상을 찌푸렸다.

“너무 갑작스럽군. 당신이 괴인(怪人)이란 건 알고 있으나 조금 상식선에서 이야기를 할 순 없겠소?”

“미안하군. 허나 상황이 위급하니 나로서는 더 이상 설명하기 힘드오. 당신들이 내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이대로 발걸음을 돌리는 수밖에.”

“흠….”

무영검제가 고민하고 있자 검마가 한발짝 앞으로 나와서 말했다.

“솔직히 말하지. 나는 당신의 말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오. 당신이 조부의 친구라는 말에는 아무런 근거도 없소.”

“…….”

“되는대로 주워섬긴 말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오. 당신 정도의 절대고수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면 무영문의 무공을 익히는 게 그렇게까지 불가능한 일도 아니고.”

으윽…. 들켰나?

내가 속으로 심장이 두근거리면서도 표정을 관리하고 있자 검마가 말을 이었다.

“허나 당신이 우리 무영문을 굳이 보호하려 함은 약육강식의 이치와 동떨어진 행위. 어떤 의도가 숨어있는지 모르겠으나 그 비효율에서 당신의 의(義)가 살아있다고 믿고 싶소. 혜아가 그 동안 봐 왔던 당신은 그렇게 나쁜 이가 아니기도 하고.”

“그럼….”

“두 가지를 약속해준다면 당장 오늘이라도 무영문은 소을촌에 복속하겠소. 이는 무림종파의 종주로서 제안하는 말이오.”

“말씀하시오.”

검마는 투명한 눈빛으로 차분하게 말했다.

“첫째. 당신이 알고 있는 상위무공의 심득을 아낌없이 우리에게 전해주길 바라오. 둘째.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를 차별하거나 배신하지 않길 바라오.”

과연.

검마는 내 말의 진위는 둘째치고 철저히 무영문의 이득에 따라 내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한 듯 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내 목적대로 되는 셈이었기에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 이름을 걸고 그렇게 하겠소.”

“좋소. 백웅 촌장의 결의에 따르겠소.”

그렇게 나와 검마 사이에서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분위기가 되자 옆에서 듣고 있던 무영검제가 투덜거렸다.

“뭘 훈훈한 척을 하고 있나? 결국 모든 게 백웅 촌장의 의도대로 된 것이니 무력함이 느껴지는군.”

나는 그 말에 씩 웃으며 대꾸했다.

“지금 투덜거릴 때가 아니오. 지금 당신의 실력으로는 백련교주의 헛점조차 내게 알려줄 수가 없으니, 오늘부터 용맹정진해서 무예실력을 높여야하지 않겠소?”

“……!!”

무영검제가 무척 자존심 상한 표정을 지었지만 할 말이 없는 듯 했다. 나는 검마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아마 검마 또한 그리 좋은 기분은 아닐 것이다.

‘어찌보면 검마는 백련교와의 충돌을 피해갈 수도 있다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억지로 그를 인연의 고리에 끌어들인 셈이 되겠군….’

검마 입장에서 그리 좋은 선택은 아닐 텐데도 나를 따라오겠다 한 것은 고난을 피하기보다는 정면으로 맞서려는 그의 성향이 영향을 미쳤으리라. 다가오는 난세에 실력을 키우지 않고 도피해서는 답이 없다는 게 평소 검마의 지론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검마 또한 기분이 상했을 게 틀림없다 생각하며 내심 미안하게 생각했다.

‘최선을 다해 실력을 키워주겠소.’

어찌보면 진작에 무영문을 끌어들였어야 했는데 너무 미적거린 결과 이렇게 된 건지도 모른다. 나는 마음을 정리하고는 잠시 후 무영문의 인원을 목갑 안에 넣어 이동시키기 시작했다. 무영문의 여러 가지 보물과 자산 등을 모두 넣자 꽤 양이 많았다.

다음 날 무영문의 소을촌 이주가 완료되자 망량이 내게 곤란하다는 듯 말했다.

“으음…. 노예시장 사람들만 하더라도 마련된 임시거주지가 꽉 찰 정도였는데 무영문 사람들도 숫자가 제법 되는구려. 고수들 숫자만 수십 명에 그들을 따르는 제자와 아랫사람들까지 합치면 수백 명이군.”

“묵을 데가 없단 소리요?”

“일단 마련은 해두었소만 이제 정말로 꽉 찼소.”

“아니 저번에 내가 산을 날려서 부지를 만들었는데 벌써….”

망량이 무슨 말을 하냐는 듯 부채로 자기 얼굴을 부쳤다.

“그 정도 땅은 인간들이 살기 시작하면 금세 채워지기 마련이오. 게다가 당신 요구사항이 단순히 잠만 자는 곳이 아니라 꽤나 수준있는 거주지를 원했기에 목수들과 미장이들이 보조시설도 많이 만들었단 말이오.”

“음….”

“이미 소형마을이 아니라 대형마을에 준할 정도로 마을의 영토를 늘리고 건물을 지을만큼 지었는데도 이렇게 되어버렸군…. 이미 일천육백 호를 훨씬 넘긴다는 걸 알고나 계시오.”

“…….”

“이젠 마을 증축만으로는 해결이 아니되오. 부지도 관개시설도 한계에 도달했단 말이오. 그럼 뭘 해야하겠소?”

증축이 안 된다면 뭘 해야 하지?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망량이 입을 열었다.

“이제는 소을촌이 성(城)으로 승급할 때가 되었소.”

“성?!”

내가 깜짝 놀라서 반문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지금까지는 마을의 테두리 내에서만 움직였지만 이 정도로 덩치가 커지면 독립된 일개 성으로 인정받아야만 하오. 규모도 인원도 경제도 당연히 그래야만 하는 것. 도리어 늦은 감도 있지.”

“서, 성이라니…. 생각지도 못했는데.”

“중원역사에 으레 있어왔던 일이오. 사람이 모여서 점차 커진 마을이 수십 수백 년을 거쳐 성이 되는 게 상식이었소. 그렇다고는 하나 삼 년도 되지 않아서 벽지의 궁벽한 시골마을이 성으로 승급하는 일은 역사상 없었겠지만.”

그렇게 중얼거린 망량이 어딘가로 검지손가락을 향하며 말했다.

“가서 효성공주를 데려와 주시오. 마침 팔부신중을 보내버리는 계획을 진행하는 김에 그녀의 도움도 받아야 할 것 같소. 그래야 성으로 승급하는 게 수월할 듯 하군.”

“효성공주를?”

나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반문했다.

“이제 그녀를 노예시장에 팔아넘긴 하남의 영회왕을 타도하러 가야하는 거요?”

망량은 고개를 흔들었다.

“설마…. 영회왕이 썩어빠진 인간이라도 황족(皇族). 노예시장에 공주를 팔아넘긴 건 대명률로 심판받을 중죄이지만 그 죄를 내릴 수 있는 것도 황제 뿐. 그리고 당신 말대로라면 황제도 이미 팔부신중에게 죽었거나 노예가 되었으니 이번 일을 시끄럽게 만들면 팔부신중이 주목하여 개입하려 들 것이오.”

“으음!”

“사실 일전에 섬서성주에게 권한을 위임받은 걸 생각하면 굳이 이렇게 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나는 본디 일거양득을 좋아하는 성격이라 이번엔 내 맘대로 하게 해 주시오.”

“어떤 책략을 꾸미고 있소?”

망량이 주먹을 꾹 말아쥐며 결연한 표정으로 외쳤다.

“효성공주는 미인이니까 미인계나 써볼까 싶소. 팔부신중을 그녀의 미모로 홀려서 외차원으로 보내버리는 것이오!”

“헉…!!”

그, 그게 가능하단 말인가?!

정녕 상상치도 못한 계책!

‘대단하다!’

설마 효성공주를 이용해서 팔부신중을 없애버릴 수 있다니 망량은 정말 최고의 책사가 아닌가…!!

“뭘 또 진지하게 듣고 앉았소? 농담이오.”

“…….”

“그런 게 가능할 리 없잖소.”

아 그렇구만….

망량이 능청맞은 얼굴로 히죽대자 왠지 얄미워졌다. 내가 뚱한 표정으로 서 있자 망량이 껄껄대며 말했다.

“일단 데려와 주시오. 데려오면 설명해 줄 테니.”

나는 망량의 말대로 숙소에 묵고 있던 효성공주를 데려왔다. 그리고 효성공주가 찾아오자 망량이 그녀에게 말했다.

“공주님. 당신을 노예시장에 팔아넘긴 남편인 영회왕을 죽이고 싶으십니까?”

“…….”

너무나 솔직한 망량의 질문에 효성공주는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그렇다면 하면 죽여주실 건가요?”

“물론이지요.”

엥?

아까 했던 말과는 다른 망량의 말에 내가 흠칫 놀라자 효성공주는 그를 빤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죽이고 싶어요.”

“잘 말씀하셨습니다. 허나 지금의 황제는 지독한 암군(暗君)이며 그의 눈과 귀를 흉악한 자들이 가로막고 있어서 이 황당한 일을 고발한다 하더라도 결코 정상적인 절차로는 원을 갚을 수 없습니다. 하물며 황족의 처결이라니,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하는 멍청한 황제는 결코 이 일을 제대로 처벌하지 않겠지요.”

“…사람을 놀리는 건가요?”

“아뇨. 정상적인 절차의 복수와 대명황실의 공주로서의 복권을 포기하신다면 영회왕 그 자를 죽일 수 있다 말하는 겁니다. 그것도 아주 잔인하게.”

“…….”

“절대 놀리는 게 아닙니다. 어쩌시겠습니까?”

망량의 질문에 효성공주가 크게 고민하는 듯 했다. 그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노예시장으로 굴러떨어졌던 제게 동아줄을 내려주었으니 더 이상 바라는 건 욕심이겠지요. 소을촌장님이 앞으로의 제 삶과 안위를 보증해주신다면 받아들이겠습니다.”

“물론이오.”

내가 대답하자 망량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좋습니다. 그러면 섬서성주에게 보내드릴 테니 제가 말하는 대로 계책을 진행해 주십시오.”

이윽고 망량의 계책이 이어졌다. 그 이야기를 끝까지 듣던 효성공주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당신 책략대로 하는 건 어렵지 않겠군요. 하지만 섬서성주는 본디 욕심 많은 자이니 다른 마음을 먹고 나를 감금하거나 살해하려들 수도 있는데, 그 과정에서 누가 절 보호해준단 말입니까?”

“그건 걱정마십시오. 강력한 무사가 임무가 끝날 때까지 당신을 호위해 줄 겁니다.”

“알았어요. 따르지요.”

이야기가 끝나고 효성공주가 자리에서 물러나자 나는 망량을 힐끔 보며 말했다.

“아수라를 그녀의 호위로 보내는 게 좋겠소?”

“설마. 섬서성주가 태풍의 핵이 된다면 반드시 그 자의 주변을 캐려고 팔부신중이 졸개들을 보낼 거요. 아수라의 얼굴이 눈에 띈다면 모든 계획이 망가지지.”

“하지만 뇌신류 고수들도 얼굴이 팔려서….”

“최근에 얼굴이 팔리지 않은 괜찮은 강자를 영입했잖소? 당연히 그를 염두에 뒀던 거요.”

“아!”

“그를 보내시오. 섬서성주 따위가 부리는 고수들로는 그의 호위를 뚫지 못할 거요.”

“알겠소.”

다음 날 효성공주는 십 척의 장대한 거한의 곁에서 말을 탄 채 마을을 떠났다. 그녀가 말을 타고 달리는데도 성큼성큼 뛰듯이 걷는 것만으로 가볍게 따라잡는 거한의 뒷모습을 보던 나는 중얼거렸다.

“롤랑이 잘 해주길 바라야겠군.”

서방 최강의 기사 중 하나인 롤랑이 듀란달과 갑주까지 써서 싸운다면 중원무림에 그의 호위를 뚫을만한 고수는 몇 되지 않으리라. 특히 불사신이라는 특성은 호위무사로는 최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었다.

롤랑 또한 호위임무를 많이 해봤다고 했기에 그의 숙련도에 기대할 뿐이었다. 나는 망량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 책략이 정말 먹히겠소? 전에도 말했지만 팔부신중에도 긴나라라고 하여 머리를 잘 쓰는 책사가 한 명 있는데….”

“그리고 그 자 또한 창힐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심이 있다고 말했었지. 충성심이 과대한 책사는 범부보다도 더 속이기 쉬운 점이 있소. 하물며 인간 황족끼리 투닥거리는 과정에서 튀어나오는 변수라면 의심하기가 쉽지 않겠지….”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한 망량이 하품을 하며 말했다.

“흐암…. 그보다… 정말 백련교주가 쳐들어와도 이길 자신 있소? 무영문주 검마의 말을 들어보니 오는 건 기정사실일 것 같던데.”

“서로 죽이려 한다면 결판은 순식간에 날 것이오. 다만 그 자도 나도 그 정도는 알고 있기에 어쩌면 별 싸움 없이 헤어질 수도 있겠지.”

“호오…. 절대고수의 세계란 건 재밌군.”

망량은 흥미로운 듯 자기의 턱을 쓰다듬다가 말했다.

“아! 당신이 없을 때 진소청이 뒷산의 공터로 와 달라 요청했었소. 지금이라도 얼른 가 보시오.”

진소청이?

나는 어리둥절하면서도 일단 빠르게 움직여서 뒷산으로 갔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진소청이 내게 포권하는 걸 볼 수 있었다.

“태사부님을 뵙니다!”

나는 그의 인사를 끄덕이며 받아주었지만 장내에 존재하는 한 명의 인간을 더 발견하고는 떫은 얼굴로 말했다.

“이광은 왜 와있냐?”

그랬다. 이광이 형형한 눈빛과 앙상 마른 골격을 드러낸 채 진소청의 옆에 서 있는 것이었다. 그러자 이광이 다소 가라앉은, 그러나 전의를 본격적으로 드러낸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부. 지금 이 자리에서 란나찰 십만 회에 도전하려 하오.”

드디어 또 삽질을 하는거군!

‘흐흐흐…. 마침 우울하던 중에 잘되었구나.’

이광이 실패해서 쓰러지는 꼴을 보면 기분이 좋아질 것 같다!

나는 내심 기대가 되었지만 뚱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도전하고 싶다면 언제든 하라고 했을 텐데 굳이 이런 뒷산으로 불러야 했나? 설마 또 실패해서 제자들 앞에서 창피당하기 싫은 거냐?”

내가 약간 모욕을 줬지만 이광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꾸했다.

“지금 마을에는 그 출신을 알 수 없는 이상한 인간들이 너무 많이 있소. 목숨을 걸고 진행하는 시연인데 그런 외부인들 앞에서 하고 싶지 않소. 그건 사부의 잘못도 있다고 생각하오.”

“흥. 핑계는 유구하군.”

나는 코웃음을 치고는 근처의 바위에 걸터앉았다.

“그래 어디 해 봐라. 네가 어디까지 하나 끝까지 지켜보겠다.”

“그 전에 한 가지 약속해주시오.”

“응?”

이광은 무척 결연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란나찰 십만 번은 무림문파 그 어떤 곳도 섣불리 입에 담지 못할 정도의 극한수련…. 나는 목숨걸고 도전하고 있으니 사부가 입만 산 인간이 아니라는 걸 보여달라 요구할 자격이 있소.”

“뭘 요구하겠다는 거냐? 웬만하면 들어줄테니 말해봐라.”

구궁파천뢰를 더 자세히 가르쳐달려고 하는 건가?

내가 어리둥절해하고 있을 때 이광이 창극을 내 쪽으로 겨누었다.

“내 요구는 간단하오.”

그리고 이어진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사부도 나와 같이 옆에서 란나찰 십만 번을 해 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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