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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나는 그의 소개를 잘은 알아듣지 못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롤랑. 반갑소.”
그러자 롤랑이 말했다.
“백웅, 당신은 나의 은인(恩人)이오. 비록 나의 주군 샤를마뉴에 대한 충성의 맹세가 남아있어 그대에게 충의를 바칠 순 없으나, 기사의 명예를 걸고 최대한 당신을 돕겠소!”
“흐음. 도와주겠다니 고맙구려. 당신은 [옛 지배자]와 싸우는 걸 잘 하는 편이오?”
내 질문에 롤랑이 씩 웃으며 대꾸했다.
“충분한 장비와 지원이 있으면 내가 최전방에서 버티는 역할이었소. 그리고 회복과 보조를 저기 있는 생 제르맹이 맡아주곤 했지.”
나는 그 말에 약간 놀라서 생 제르맹을 쳐다보았다.
“생 제르맹이?”
“…예전 일이오. 그리고 결국 롤랑과 나는 토벌임무에 실패했었지.”
생 제르맹은 고통스러운 과거기억이 떠오르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그는 진심으로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고 싶지 않은 듯 롤랑의 시선을 회피하며 말을 이었다.
“본인의 말대로 롤랑은 서방에서 역대최강의 전사 중 하나요. 백웅 촌장이 [옛 지배자]의 부하들과 싸우는데 큰 전력이 되어줄 수 있을 거요.”
“흐음…. 그럼 이 은빛 대검도 롤랑에게 돌려주는 게 좋겠군.”
나는 휙하고 내 손에 들려있던 거대한 은빛 대검을 롤랑에게 던져주었다. 그러자 롤랑은 대검을 받더니 이내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성검 듀란달이 자격없는 자의 손에 들어가면 발광을 해대는데 한 줌의 동요도 없다니. 백웅 당신은 정말 대단한 전사인가 보구려. 과연 내가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소.”
“듀란달? 그 검의 이름이오?”
“그렇소.”
은검 듀란달을 들고 있던 롤랑이 말을 이었다.
“만일 [옛 지배자]나 추종자와 싸울 때는 나를 꼭 데려가 주시오. 도움이 될 거요.”
“알겠소. 아, 그러고 보니 무공은 좀 알고 있소?”
“무공? 그게 뭐요?”
“무공이란 건….”
나는 무공과 기, 의념의 개념을 롤랑에게 알려주었다. 그러자 롤랑은 조용히 듣고 있다가 말했다.
“카프트(kaft)를 말하는군. 나도 전사이니 쓸 줄 아오.”
“…정신차리자마자 미안하지만 대련 한 번 해보겠소? 당신의 실력을 가늠해보고 싶어서.”
나는 호기심이 생기는 걸 견딜 수가 없었다. 아무런 이성이 없을 때 순수 육체능력만으로도 최정상급 고수와 대등한 능력을 발휘하던 자가 이성을 갖게 되면 어느 정도로 강할까?
“물론! 전사는 검으로 말하는 법이 아니겠소.”
그리고 나와 롤랑이 근처의 연무장으로 가려 하자 뒤에 있던 생 제르맹이 급히 외쳤다.
“롤랑 당신 알몸이오! 갑옷을 소환하시게.”
“아…. 그렇군.”
롤랑이 깜박했다는 듯 중얼거리더니 듀란달을 가로로 치켜들고 무언가 주문을 중얼거렸다.
촤좌좌좍!!
그러자 잠시 후 롤랑의 전신을 투철하게 감싼 은빛의 전신갑주가 그의 거체를 둘러쌌다. 순식간에 갑옷이 소환되는 걸 보자 나는 깜짝 놀라서 말했다.
“인공보패?!”
롤랑은 내 외침에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해했고 내 의문에 반응한 것은 연금술사 생 제르맹이었다.
“그게 뭔지 모르겠지만 저건 수호자께서 듀란달과 함께 하사한 카론의 갑주요. 동방의 보패와는 다른 물건이오.”
“아…. 비슷한 걸 본 적이 있어서 말이오.”
“그런가. 소환갑옷이라는 착안은 다들 비슷하겠지.”
잠시 후 나는 롤랑과 일 장의 거리를 두고 서로의 검을 겨누었다. 롤랑의 거대한 덩치에 비하면 나는 소인족이나 다름없었으나 싸움에서 덩치는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는 롤랑의 실력을 볼 셈으로 곧장 뛰어들어서 뇌신류의 검초로 공격해 보았다.
까앙!
‘팔목의 소형방패로?’
그리 전력을 다한 절초가 아니었다지만 롤랑은 내 검초의 흐름을 가볍게 읽고는 그 궤적에 팔목방패를 갖다대어서 막아내고는 곧장 유연하게 흘러들어와서 내려베기를 했다. 나는 그 투박한 베기가 중원의 검술과는 많이 다르다고 생각했지만 검술의 요체는 확실히 담겨있었기에 경시하지 못하고 제대로 막아야만 했다.
카앙
그리고 서로의 무기가 부딪히는 순간, 나는 이번 생 최초의 이질감을 느꼈다.
“……!!”
상대가 내 힘에 전혀 밀리지 않아!
지금까지 싸우면서 내 압도적인 내공으로 인한 압도적 육체능력 때문에 상대가 되는 절대고수들은 내게 비해서 부족한 육체능력을 의념으로 때우면서 흘려보내는 기색이 존재했다. 즉 언제나 내가 강격(强擊)을 밀어붙였고 상대가 유(柔)의 묘리를 발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롤랑은 순수한 육체능력이 내공으로 강화된 나와 거의 대등했기에 별개의 의념절기를 쓰지 않고도 대등한 힘겨루기가 가능해 보였다. 그 말은 순수한 육체능력이 보통 인간의 수백 배를 뛰어넘는다는 의미였다.
‘저, 정말 대단한 육체군.’
나는 내심 질리는 걸 느꼈다. 이래봬도 지금의 내 내공은 십여 번 이상 천년설삼을 먹고 수십 수백년동안 고수들과의 결전을 통해 정련해온 것이었는데 육체의 잠재력만으로 내 강격의 위력을 따라올 수 있다니? 그것도 지금은 그 육체의 잠재력을 이성으로 통제할 수 있기에 더 대단해 보였다. 그가 소형방패를 응용하며 유연함까지 살리자 육감에 맡기는 검술의 위력이 동방의 고명한 검류만큼이나 위압적이었다.
콰광! 쾅!!
잠시 십여 초 동안 나와 롤랑은 서로 일체의 기교 없이 자존심 싸움을 하듯 강격의 초식만으로 주고받았다. 그리고 거의 대등한 상태가 되자 롤랑이 도리어 놀란 듯 했다.
“이럴 수가! 사악한 고대룡을 맨손으로 잡았던 내 힘과 막상막하라니!”
“힘이라면 나도 어디 가서 꿇리진 않아서.”
나는 중얼거리며 살짝 변초를 쓰면서 삼보절기를 써서 일순간 롤랑의 뒤로 돌아갔다. 그리고 아까처럼 살짝 뇌령인을 써서 그의 옆구리를 간장치기 하듯 쳐 보려고 했다.
쿠콰쾅
‘음, 잘 막네.’
그리고 아까와는 달리 폭음과 함께 롤랑이 엄청난 반사신경으로 기습적인 뇌령인을 팔목방패로 막은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저 방패도 그렇고 카론의 갑주라는 갑옷 자체가 대단히 강력한 유물이라는 걸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좋아…. 이걸로 마지막.’
절대지경인지만 확인해 보자.
나는 마지막으로 그가 의념천주를 지니고 있는지 시험해볼 셈으로 눈을 반개하고는 곧장 무량단을 날렸다.
키잉!
그러자 어마어마한 속도로 무량단이 발출되었고, 롤랑은 반응하지도 못하고 상반신과 하반신이 두동강나고 말았다.
…어?
후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롤랑의 거대한 몸뚱이가 반토막 나서 허공을 날자 나는 당황해버렸다. 지금까지 롤랑이 보여준 능력이면 당연히 막을 줄 알았는데 너무 손쉽게 즉사해버렸기 때문이었다.
“이, 이런!”
내가 무슨 짓을?!
막을 줄 알아서 힘조절을 안 했는데!
파아앗!!
하지만 놀라움도 잠시, 허공을 날던 롤랑의 몸은 숨을 몇 번 쉴 시간이 지나자 갑자기 환한 은빛과 함께 원래대로 되돌아와 있었다. 반토막난 몸뚱이가 마치 거짓말처럼 붙어 있었고 대신에 롤랑의 전신에 땀이 송골거리며 맺힌 게 보였다. 롤랑이 숨을 크게 몰아쉬며 말했다.
“후 - 욱! 후 - 욱!! 엑스칼리버에 난도질 당했을 때같은 기분이군. 과연 엄청난 검사구려.”
엑스칼리버?
롤랑은 설마 조디악 멤버 중 아서 왕과 싸운 적이 있었단 건가?
“미, 미안하오. 막을 줄 알았는데….”
내가 급히 사과하자 롤랑이 덤덤하게 대꾸했다.
“괜찮소. 도리어 당신만한 고수가 날 인정해준거라 생각하여 기쁘군. 그리고 이게 원래 내가 싸우는 법이오.”
“응?”
내가 어리둥절해하자 옆에 있던 생 제르맹이 말했다.
“롤랑은 늘 [옛 지배자]의 화신과 싸우는 최전방에서 모든 공격을 버티는 기사였소. 그는 카론의 갑주를 입고 있는 한 절대 죽지 않는 능력이 있소.”
“……!!”
“화신의 마법에 당해서 한 번의 전투에서 수십 번씩 죽는 게 롤랑의 일상이었지. 그 틈에 드루이드나 술법사가 화신을 봉인하는 전법이었고….”
나는 황당해져서 롤랑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마치 목 졸린 오리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으… 으엑…. 그거 진짜 아프겠구만…. 죽는 게 보통 일이 아닌데.”
“……?”
롤랑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희한하군. 마치 당신도 수십 번 죽어본 것 같은 감정이 배여나오는구려.”
“어…. 뭐…. 칼싸움 하다보면 다 그런걸 느끼지 않겠소.”
“아닌데….”
“…….”
“아무튼 당신이 내게서 무엇을 시험하려 했는지 알 것 같구려. 무예의 극에 도달한 자들이 얻게 되는 새하얀 기둥이 있는지 볼려고 한 게 아니오?”
나는 롤랑의 말에 약간 놀라며 대꾸했다.
“그렇소. 그걸 동방에서는 절대지경의 의념천주라 하오.”
“내가 살면서 딱 두 명 보았소. 하나는 예니체리의 수장이었고 또 하나는 천축에서 온 달인이었소.”
롤랑이 말을 이었다.
“나는 소양이 일천해서인지 꽤 오래 살았지만 그 경지엔 도달하지 못했소.”
“…….”
나는 이만하면 롤랑의 실력을 알아보았다 생각하며 검을 내렸다. 그리고는 정중하게 포권하며 말했다.
“앞으로 사악한 자들과 싸울 때 힘을 조금 빌리겠소. 그 때까지는 소을촌의 마을사람으로 지내주시오.”
“하하, 물론이오!!”
나는 롤랑의 힘이 쓸만할 거라 생각했다.
‘서방 최강의 기사라는 게 허언이 아니야.’
무술경지가 극고에 도달하지는 않았으나 서양기사가 도달할 수 있는 한계에 도달한 최상의 기사인 게 분명했다. 게다가 성검 듀란달과 카론의 갑주를 착용했을 때의 전투력은 충분히 인간을 초월한 마왕들을 상대로 버텨볼 만 했다.
‘나중에 팔부신중과 싸우게 된다면 큰 전력이 되겠군. 롤랑이 앞에서 버텨주는 동안 다른 술법사들이나 고수가 팔부신중의 헛점을 찌르기 쉬워진다.’
노예시장을 해방한 걸로 이렇게 괜찮은 전사가 아군이 되다니! 이런 수확은 예상치 못했기에 내심 즐거운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나는 옆에 있던 생 제르맹이 계속 우울한 표정이었기에 의아해져서 말했다.
“생 제르맹, 왜 그러시오?”
“백웅. 나와 롤랑은 서양대륙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었던 중대한 임무에 실패한 패배자들이오. 그리고 지금 당신이 적대하는 적수들은 그때의 적보다 더 강대해보이는데 과연 우리가 힘이 될 수 있겠소?”
“음….”
“[옛 지배자]에게 패배했던 그 때의 실패를 또 겪을까봐 우울해지는구려.”
나는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은 나로 치면 달기나 마왕들에게 패배한 상태에서 죽어서 전생하지 않고 계속 살아왔을 경우의 삶을 살고 있는 셈이었다. 그래서 나는 고민하다가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며 말했다.
“걱정마시오. 그럼 내가 포기하지 않고 언젠가 그놈들을 싹 다 죽여줄 테니까.”
“……?”
“안심하고 날 따라오면 되오.”
생 제르맹이 황당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헛웃음을 지었다.
“허허! 저 까다로운 롤랑이 어째서 바로 당신을 따르는지 알겠구려….”
나는 이후 노예시장의 인물들을 통제하는 작업이 사나흘만에 끝나는 걸 알 수 있었다. 롤랑은 선천적인 힘이 매우 강했기에 힘이 필요한 용역작업에 주로 투입되었고 뇌신류 사람들과도 무난하게 첫대면을 끝낸 듯 했다. 그리고 독고성에게 불려간 귀족들은 뇌신류 방식으로 매일같이 혹독한 체력훈련을 받는 듯 했다.
“일어서라!!”
“으아악. 이놈이 우리가 누군 줄 알고….”
“누구긴 누구냐. 노예새끼들을 살려줬더니 감사한 줄도 모르고 감히 뇌신류에게 까분단 말이냐?”
“아, 아니.”
“그 근성을 고쳐주마. 일단 아가리를 연 네놈부터….”
“흐아악.”
귀족들은 매일같이 독고성에게 걷어차이고 주먹에 맞으면서 길들여지는 것 같았다. 다소 비인간적이었지만 귀족들의 건방짐을 다스리려면 저 정도는 되어야 할 듯 했다.
일련의 수고로운 작업이 끝나자 서문혜가 내게 찾아와서 말했다.
“백웅 님. 아버님께서 백웅 님을 뵙고 싶어하세요.”
“검마가? 무슨 일이오.”
“이전에 무영검제님을 소을촌에서 무영문으로 보내셨지요. 그 이후 무영검제님과 아버님께서 함께 무영문의 검술을 절차탁마하셨는데…. 뭔가 막히신 듯 합니다.”
“흐음…. 가봐야겠구려.”
나는 생각하지도 않고 곧장 서문혜와 함께 무영문으로 갔다. 그리고 무영문에서 검마를 만나자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가 있었다.
“백웅 촌장….”
차 한잔을 두고 넷이 탁자에 앉아있었다. 고요가 흐르는 가운데 검마가 찻잔을 들어서 한 모금을 마시고는 입을 열었다.
“본문에 남궁조 사숙을 보내주신 것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리오. 그리고 또 한 번 도움을 청하게 되어 민망하게 되었소.”
“우리 사이에 그런 걸 따질 게 있겠습니까? 어떤 게 막히셨다는지….”
“…….”
검마는 잠시 뚫어져라 나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사실 며칠 전에 백련교주가 본문에 찾아왔소.”
“……!!”
뭐라고?!
내가 너무 놀라서 벌떡 일어나자 옆에 앉아있던 무영검제 남궁조가 침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와 검마는 그동안 얻은 쌍영검(雙影劍)의 심득으로 검진으로 합공하여 그에게 대항했지만 십초지적도 되지 못했다.”
“백련교주가 대체 왜 찾아왔었습니까? 두 분, 괜찮으십니까?”
“진정하게. 그 자가 독이나 암수를 쓰진 않았으니.”
내가 다시 자리에 앉자 검마가 차분하게 말했다.
“백련교주는 수신류 호법사자 독고준과 화신류 호법사자 한백령을 대동하고 본문에 나타났으며 기타 호위병력은 하나도 데려오지 않았소. 그러나 그들 셋만으로도 천하를 멸할 것같은 기백이 느껴졌지….”
그럴 것이다.
그들 셋이면 백만대군도 문자의 의미 그대로 멸할 수 있으니까.
“그 자는 본문이 소을촌과 연결된 걸 알고 있다면서 혹시 내게 소을촌장 백웅의 무공이 어느정도인지 알고 있느냐고 질문했소.”
“내 무공수준을 물었단 말이오?”
“그렇소. 나는 잘 모른다고 했으나 백련교주는 절대지경일 거라고 이미 추측하고 있었소. 그리고는… 우리 둘에게 한번 덤벼보라고 했소.”
“…….”
“결과는 말했다시피 패배…. 우리는 그 날 다 죽는 줄 알았지만 백련교주는 그냥 호법사자들과 함께 떠나면서 한 마디를 남겼소.”
검마가 나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조만간 자기가 직접 소을촌에 찾아가겠다고.”
…….
예상은 했던 일이지만…. 이런 식으로 예고를 받을 줄이야.
‘그나마 무영문을 멸망시키지 않은 게 교주답다고 해야하나?’
백련교주는 피도 눈물도 없는 존재 같았지만 의외로 쓸데없는 살상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사상은 효율에 맞춰져 있었으며 살육을 목적으로 하기보다는 수단으로 다루는 존재였기에 어찌보면 무영문을 멸망시키지 않은 것도 교주답다고 할 수 있었다.
내가 곰곰이 생각하고 있을 때 검마가 말했다.
“백련교주는 조만간 자기 말대로 당신을 찾아갈 것이오. 그리고 그가 천하곳곳에 눈과 귀를 뻗치고 있는 걸 알아차렸기에, 혜아에게도 본론을 바로 전하지 않고 귀하를 본문에 찾아오게 한 것이오.”
“그렇구려. 백련교주가 찾아올 거란 사실을 말해줘서 고맙소. 무영문에 피해가 안 가도록 내가 최선을 다하지….”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려 하자 검마가 나를 제지했다.
“잠깐.”
“왜 그러시오?”
검마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확신하오. 당신이 백련교주에게 쓰러진다면 이 무림은 끝장이란 걸…. 그래서 나와 사숙이 그와 싸울 때 느꼈던 심득을, 당신과 비무를 하며 전해주고 싶소.”
“……!!”
“십초도 되지 않아 패배한 자들이 할 소리는 아니지만 무영검법으로 그의 무공을 파헤칠 수 있는 부분이 분명 있었소.”
나는 검마는 물론이고 무영검제도 간절한 표정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 표정은 그들이 정말로 교주의 약점같은 걸 알아챘기 때문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나는 큰 호기심을 느끼고는 말했다.
“좋소. 한 수 부탁드리겠소.”
저벅…
잠시 후 나는 무영문의 연무장에 나가서 검마와 무영검제를 앞에 두었다. 그들은 이미 호흡을 맞춘 듯 검진(劍陣)의 형태를 띄고 있었으며 합공에 최적화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둘 다 흑요석의 기연을 받아들이진 않았지만 이미 강호의 최정상고수들이다. 이들의 검진을 십초 이내에 깨뜨렸다는 건….’
백련교주의 무공이 원래 내가 알고 있던 이 시기의 백련교주의 무공수위보다 더 강해졌을 수 있다는 것이다.
‘뭔가 변화를 줄만한 요인이 있었던 걸까?’
나는 곰곰이 생각했지만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내 잡상을 깨뜨리듯 무영검제의 호령이 떨쳐졌다.
“백웅 촌장! 무영검(無影劍)과 탈혼검(奪魂劍)의 진수를 맛보게!!”
파바밧!!
다음 순간 검마와 무영검제가 거의 동시에 달려들었다. 나는 그들의 검이 무영탈혼검 특유의 허와 실이 구분되지 않는 특징을 띄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고, 동시에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이런!! 나는 무영탈혼검을 너무 잘 알아…!!’
왜 이런 게 고민인가.
그것은 상대는 내 뇌신류 무공을 잘 모르는데 나는 이미 수십 번 전생하면서 검마나 무영문 고수들과 싸워본 적이 많았기에 알 만큼 아는 상태인 것이다. 그것도 나 스스로가 검마의 무영탈혼검을 전수받은 적이 있으며 꽤 수련도 해 봤기에, 어떤 의미에서는 내 무공의 일부라고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알았다.
그래서일까?
나는 딱히 삼보절기나 무쌍패를 쓸 필요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삼보절기는 절대 못 피할 것 같은 공격을 피할 때 쓰는 것이었고 무쌍패는 절대 못막는 공격을 막을 때 쓰는 거였지만, 눈앞의 둘의 합공은 그 어느 쪽도 아니었다.
언뜻 허실이 구분되지 않는 무형의 검망(劍網)이 촘촘히 떨쳐져서 가공할만한 절초처럼 보였지만, 무영탈혼검을 잘 아는 내 입장에서는 그 검망 사이에 존재하는 미세한 헛점이 마치 손에 잡힐 듯이 보이는 것이었다.
투두둑
내가 우상으로 검로를 그으면서 쇄도하는 검초를 쓰자마자 무영검망은 단숨에 찢겨나가는 형상이 되었고 급히 좌측을 맡고 있던 검마가 내 옆구리를 찔러들어왔다. 나는 그 공격에 하체의 중심을 흐트러뜨리지 않으며 앞발의 방향만 살짝 옆으로 틀면서 무영탈혼검법의 허(虛)가 실(實)과 분리되는 접점을 향해 검극을 두들겼다.
따앙!!
검마의 검이 뒤로 튕겨져 나갔고 내 빈틈을 향해 재차 무영검제가 무영검기를 일으켜 내 상단을 베어왔다. 본디 남궁세가의 절정고수조차 속절없이 살해당할 정도로 강력한 게 그의 무영검기였지만 나는 무영검기의 기척을 파악할 수 있었기에 가볍게 만승검결의 방어검초로 무영검기를 튕겨내고는 도리어 무영검제의 가슴팍으로 일검을 찔러넣었다.
“허업.”
까앙
무영검제가 숨을 급히 들이쉬며 내 공격을 막아내자 이윽고 그 또한 밀려나는 형상이 되어버렸다. 고작 삼 초 정도의 공방이었지만 내가 현격한 우위를 보이자 무영검제가 거의 정신나갈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말도 안 돼…. 어찌 이런 무공이! 이게 절대지경인가?!”
“…….”
그리고 무영검제와 달리 검마는 상당히 침착했다. 그는 마치 예상했다는 듯 입을 열었다.
“무영탈혼검법의 허실을 모두 꿰뚫고 있군. 그게 자네의 절대지경은 아닐 테고, 설마 본문의 검법을 미리 접해본 적이 있는 건가?”
나는 이런 데서 거짓말을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며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
“그렇소. 그래서 이런 대결로는 나와 백련교주의 우위를 구분할 순 없소. 난 이미 무영문의 검법을 꽤 잘 아니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그건….”
나는 내가 전생자라고 솔직히 말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이젠 슬슬 말할 때도 되지 않았나 싶었다. 검마라면 나의 좋은 이해자가 되어줄 수 있을 거라는 계산도 있었다.
‘안 돼! 문제가 생길거야!’
그러나 잠시 후 그 충동을 억누르자 냉정한 생각이 머릿속에서 발현되었다.
‘솔직하게 말해도 좋겠지만 무영검제와 검마에게도 이제 내 무공을 전수해줘야 해. 지금까지처럼 소을촌에서 떨어져있게 하면 이번처럼 백련교주나 황궁에게 노려져서 위험해질지도 몰라. 그렇다면 여기서는 거짓말을 해서라도 저들을 소을촌 휘하로 끌어들여야겠다.’
보호해주려면 가까이 둘 수밖에 없다.
이건 선의의 거짓말일 것이다.
‘그래…. 하자….’
나는 천천히 뜸들이며 입을 열었다.
“검마. 무영검제. 잘 들으시오. 무영문의 선대문주인 서문걸(西門杰)은….”
그리고 거짓말을 하려고 마음먹자, 나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입에서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사실 내 친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