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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헤르메스 뭐시기?
나는 이름을 들어본 것 같지만 잘 기억나지 않는 명사 때문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리고는 반문했다.
“뭔 소리요? 그건 뭐 하는 놈이오?”
“흐음. 이야기가 조금 길어질 것 같은데... 내 연금술 분야인지라 여기있는 자들이 모두 알아들을 이야기는 아닌 것 같소.”
“응?”
껄끄러워하는 생 제르맹의 태도에 내가 어리둥절해하자 옆에 있던 아수라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여기 모인 게 동양의 천생 무인들뿐인데 서양 신비학과 연금술의 종사 얘기를 하면 알아듣겠냐. 서로한테 고문일 테니 알아들을 사람만 남고 일단 해산해달란 거지.”
“아! 모두 해산하시오.”
나는 그제야 알아듣고는 모두에게 일단 오늘은 해산시키도록 했다. 해산한 사람들이 노예시장 사람들을 각자의 숙소로 분주하게 옮기는 작업을 하도록 했고, 곧 장내에는 나와 아수라, 망량, 생 제르맹만이 남았다.
생 제르맹이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토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오?”
“음…. 들어본 것 같은데 잠깐만….”
나는 잠깐 기억을 더듬거리다가 마침내 기억속에서 얼핏 들었던 이야기를 찾아내고는 말했다.
“맞다. 예수회의 마테오 리치가 말하기를 수정석비가 그 헤르메스 뭐시기 하는 놈이 승천하기 전에 남겼던 최고의 보물이라 했었소. 어…. 그리고….”
“……!!”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음….”
진짜 기억이 너무 많아서 잘 안 떠오른다. 내가 팔짱을 끼고 고민하고 있자 생 제르맹이 당황한 듯 말했다.
“마테오 리치? 조디악 멤버의 그 수사가 대명제국에 와있고 그를 만났단 말이오?”
“응? 어…. 대충 그렇지. 그 자도 수정석비를 찾고 있는 것 같았소.”
“으음! 역시 다들 목숨을 걸고 있었군….”
“…….”
아, 기억이 안 나. 너무 겪은 게 많아서 바로는 안 떠오르네. 그런데 뭔가 있었던 것 같은데….
나는 머리를 굴리다가 안되겠다 싶어서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아무튼 헤르메스 뭐시기….”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토스.”
“그냥 헤르메스라고 합시다…. 아무튼 그 새끼가 뭐 어쨌다는 건지 요점만 말해주시오. 너무 복잡하면 알아듣기 힘드오.”
그러자 생 제르맹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헤르메스는 말하자면 연금술의 신(神)이오. 내가 태어났을 때는 이미 승천하여 신이 된 존재였고, 그 전설적인 존재가 수정석비를 매개물로 하여 이 세상에 강림한 것이오.”
“…으음. 그러니까 말 그대로 신이란 거요? [옛 지배자]요?”
“그건 좀 다른 얘긴데….”
생 제르맹은 잠시 말을 고르다가 설명을 이었다.
“현재 서방에는 [수호자]님이 [옛 지배자]의 힘에서 인류를 보호하고 있소. 그러나 수호자께서 등장하기 전에는 고대신들이 알음알음 인류를 살펴주고 있었으며, 그 당시 인간들은 고대신과 통할 수 있는 채널(channel)을 갖고있었소. 그리고 채널 너머에 고대신들이 존재하는 차원을 일컬어서 티타니온(titanion), 혹은 크로노스 디아스타시라고 불렀소. 서방의 인간들은 [옛 지배자]들이 괴롭히면 그 채널에 호소하여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였던 것이오.”
“…….”
“헤르메스는 필멸자 출신으로 최초로 신성을 얻어서 크로노스 디아스타시로 넘어가서 신체(神體)를 획득한 존재이며 아틀란티스에서 시작된 연금술을 인간에게 전수한 존재요. 최소한 4천년 전의 인간이며 필멸자 출신 신격인 것이오.”
“어, 어렵군…. 무슨 말인지….”
내가 당황해하자 옆에서 팔짱을 끼고 있던 아수라가 냉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백웅. 저놈의 연금술사가 어렵게 말해서 그렇지 간단하게 이해하면 된다. 말하자면 나같은 마왕(魔王)이지만 고대신들에게 가호를 받아 신성을 획득했기에 꽤나 격이 높은 마왕인 것이다.”
“아! 마왕이라고?”
“그래. 신이라는 명칭이 붙었지만 설명만 들으니 그냥 마왕이군. 다만 보통의 마왕은 [옛 지배자]의 수하인데 고대신에게 붙었다는게 굉장히 특이하긴 하다. [옛 지배자]같은 존재는 절대 아니야.”
“그렇군….”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아수라의 말을 듣고 있던 생 제르맹이 다소 놀란 듯 말했다.
“나같은이라니…. 설마 그대도 마왕인가.”
“그러면 어쩔거냐? 연금술사.”
“아, 아니오. 전혀 마력이 느껴지지 않아서.”
아수라의 눈에서 일순간 혈광이 번득였다.
“크크크…. 너같이 하찮은 놈과 실랑이하고 싶지 않으니 미리 말해두지.”
저벅
아수라가 생 제르맹 바로 앞까지 걸어오더니 약간의 살기를 뿜으며 으르렁거렸다.
“알아듣기 쉽게 얘기해라. 백웅이 지금 사정이 있어서 그렇지 너 정도 되는 식자(識者)나 술사는 언제든 구할 수 있어. 백웅을 이용해먹겠다는 마음을 가진다면 네놈부터 찢어죽인다.”
“…알았소.”
나는 아수라를 진정시켰다.
“그만 해라. 나쁜 뜻으로 그런 건 아닌 것 같은데.”
“흐음. 저런 놈들은 경고를 해두지 않으면 한도 끝도 없이 사람 머리 꼭대기에 올라서려고 하니까.”
“알았으니까 그만….”
아수라가 살기를 거두고 뒤로 가자 생 제르맹은 창백해진 안색이 겨우 정상으로 되돌아온 것 같았다. 생 제르맹은 잠시 머릿속을 정리한 후 다시 설명을 시작했다.
“아수라 님의 말이 맞소. 굳이 분류하자면 헤르메스는 상위마왕이라 할 수 있소. 허나 승천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그가 고대신의 차원으로 건너간 후 인간세상에 되돌아오지 않았다는 특수함 때문이오.”
“응? 그게 특이한 거요?”
“그렇소. 역사적으로 마(魔)의 경지를 올려 마왕이 된 존재는 여럿 있었겠지만 그들은 모두 [옛 지배자]와 결탁하여 사도나 화신이 된 자들이었소. 허나 고대신이라고 하는 자들과 계약하고, 그들의 차원으로 건너가서 살 것을 허락받은 건 오로지 인류 중에 헤르메스 뿐이라 할 수 있소.”
생 제르맹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질서진영의 마왕이자 신격이며 연금술의 종사. 때로는 고대신들의 전령(傳領). 무척이나 특이한 존재인 건 틀림없지. 그래서 신화에 등장하는 헤르메스의 이름을 붙였는지도….”
“응? 헤르메스 트리스… 트리스메기스토스, 그게 진짜 이름이 아니오?”
생 제르맹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그 자의 진명은 누구도 모르오. 워낙 초고대의 연금술사라서 그 이름을 알고있는 존재는 없을 거요. 딱 하나 있긴 하겠지만 그 자 또한 전설적인 존재라서 인간중에는 없다고 해야겠지. 그 존재가 전설로 전해오면서 그리스 로마 신화의 전령인 헤르메스의 이름이 붙은 것이오.”
“딱 하나?”
“그의 제자요.”
“제자라고….”
그 순간이었다. 나는 예전 기억이 생각났다.
[멍청한 놈. 그 정도라면 재능 수준을 넘었어. 유사 이래 그 어떤 인간 마도사도 너보다 빠르게 이족의 말을 배우진 못했다. 마왕 시몬 마구스도 서방 영지주의의 종주이자 연금술의 신 헤르메스의 제자였으며 신령을 기만한 천재마도사였지만 너보다 빨리는 못 배웠어.]
제갈사가 내게 마물 소환술을 가르칠 때, 내 진도가 너무 빠르자 놀라워하면서 했던 말! 나는 그 말이 문득 생각나면서 헤르메스에 대한 걸 어디서 들었는지를 알 수가 있었다. 그리고는 외쳤다.
“영지주의의 마왕, 시몬 마구스의 스승! 그게 헤르메스란 놈인가?”
“……!!”
그러자 생 제르맹이 정말 놀란 듯 눈을 부릅떴다.
“시, 시몬을 알고 있소?! 정말 연금술이나 신비학을 잘 모르는게 맞소?”
“아…. 사실 내가 아는 마도사가 시몬의 제자이자 배교교주요. 그가 평소에 언급했었소.”
그는 질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시몬의 제자라니…. 마왕이 된 존재가 인간제자를 거뒀다는 건가. 그럴 수가.”
“흐음. 아무튼 정리하자면 질서의 마왕 헤르메스의 제자인 시몬이 외신과 계약해서 혼돈의 마왕으로 승격했다 그 말이구려. 사제(師弟)가 각자 반대되는 진영의 마왕이 되었다는 말인가? 둘 다 마왕이 되다니….”
“그런 거요. 물론 둘 다 나 따위 연금술사에 비하면 아득하게 높은 존재들이라서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소.”
그러더니 생 제르맹이 말을 이었다.
“어쨌든 이걸로 헤르메스에 대한 설명은 된 것 같구려.”
“알아들었소. 이제 그 헤르메스란 놈이 수정석비의 조각을 이용해서 이 세상의 굴레에 끼어들었다는 게 무슨 말인지 설명해 주시오.”
“그냥 액면 그대로의 이야기요. 말했듯이 헤르메스는 고대신의 전령이자 일종의 하위신격. 그 자의 힘을 빌리기 위해서 누군가가 일부러 수정석비를 부숴서 그 조각의 마력을 이용해서 헤르메스 소환의식을 치른 것이오.”
“그 말은, 지금 이 대명제국에 헤르메스 뭐시기라는 강력한 마왕이 소환되어 있다 그 소리인가?”
“아마도….”
잠시 망설이던 생 제르맹이 말했다.
“용비천이란 자가 시꺼먼 알로 변했던 현상은 헤르메스의 소환이 성공했다고밖에 볼 수 없는 것이오. 왜냐하면 그 알은 헤르메스에게 인과율을 모아주는 연금술의 금기주법이기 때문이오.”
“금기주법?”
“초고대 아틀란티스 시절부터 이어져 오는 금기의 주술. 너무 사악해서 전승이 끊겼다 알고 있었지만 나도 연금술사 나부랭이다 보니 대충 존재는 알고 있소. 그 이름은 영겁의 씨앗(Αιώνιος σπόρος)이란 술법…. 그 시꺼먼 알은 강제로 기생한 본체를 전생(轉生)시켜 살육을 벌이게 하고, 살육당한 자들의 영혼이 인과율이 되어 술법사에게 힘이 되어주는 것이오.”
“…….”
“그 시꺼먼 알을 가만 놔두었으면 강력한 마도생명체로 변이하여 세상에 재앙을 몰고 왔을 것이오. 잘 막았소.”
나는 생 제르맹의 말에 아연해져서 대꾸했다.
“제기랄. 용비천쯤 되는 놈이 그런 기생술법에 멀쩡히 눈뜨고 당했단 건가? 대체 황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
“더 강력한 힘을 준다느니 해서 꼬드긴 게 아닐까 싶군. 실제로 수정석비의 조각을 몸에 박아 넣은 만큼 평소보다 더 강력했을 테니까.”
내가 힐끔 아수라를 보자 아수라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다. 마력을 뺀 순수한 내 무력을 가늠하려고 대충 싸워본 것도 있지만, 네 기억 속의 용비천보다는 훨씬 강했다.”
“으음. 수정석비 조각을 몸에 박은 놈들은 여태까지보다 훨씬 강해졌다는 건가?”
“아마도….”
이어진 아수라의 말에 나는 머리가 아파지는 걸 느꼈다.
“다른 팔부신중들이 그 짓을 했다면 이제 너 혼자서 황궁에 쳐들어가서 깽판놓는 건 힘들 수도 있겠지.”
“…….”
맞는 말이다. 지금까지 측정된 전력으로 보면 황궁에 나 혼자 쳐들어가서 양패구상이 가능했지만 만일에 지금 말했던 영겁의 씨앗같은 외법으로 마왕 팔부신중이 전력을 강화했다면 정말 위험하다. 나는 불안해하며 말했다.
“아니, 결국 자기자신을 마도생명체로 바꾸는 금기의 주술이잖아? 마왕쯤 되는 놈들이 그런 짓을 할 리가….”
“수정석비의 조각을 몸에 넣는다는 건 그 자체로 인과율을 획득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지. 부작용을 감수한다면 우리같은 마왕들이 욕심내 볼 만한 일이야. 인간세상에서 쓸 수 있는 힘이 훨씬 강해지고 활동제약도 적어지니까….”
“…….”
“아무튼 지금은 너무 고민해봤자 답이 없다. 정말 중요한 건 하나잖은가.”
아수라의 눈이 빛났다.
“수정석비를 파괴하고 헤르메스를 이 땅에 강림시켰으며 조각을 이식시켜서 금기의 술법을 행한 범인이 누구인지를 알아내야 한다.”
“범인이라니…. 제갈유룡이나 야차가 한 거 아닐까?”
“확실하지 않아. 그들은 그럴 능력이 되지만 동기가 확실하지 않다고.”
“으음.”
내가 고민하자 나를 유심히 쳐다보던 아수라가 입을 열었다.
“백웅. 네가 우려하던 상황이 찾아온 거다.”
“뭐?”
“억지로 지금껏 세상의 변화를 네가 억눌러 왔지만, 황궁에 일어난 이변은 더 이상 간접적인 방법으로는 억누를 수 없는 거라고 생각한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젠 직접 부딪혀야 해.”
“…….”
“선택해. 더 늦으면 수습조차 할 수 없을 거다. 내가 볼 때 헤르메스란 놈과 팔부신중이 제대로 손을 잡으면 큰일 날 수도 있다. [옛 지배자]만 못하다고 하지만 놈들은 내로라하는 마왕들이니까.”
“젠장….”
나는 이를 악물었다. 아수라의 말이 구구절절 옳다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과연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지금이라도 황궁에 쳐들어가서 팔부신중이나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토스와 목숨걸고 혈전을 벌여야 하는 것일까?
나는 고민하다가 억눌린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하고싶지 않아…. 아무리 직접 부딪혀야 한다고 하지만… 결국 이 세상의 환란에 휩쓸리는 거잖아!! 진짜 다른 방법은 없는 거냐고!”
“환란에 맞서 싸우는 게 두려운가?”
“제길! 누가 두려워서 그래?”
나는 발악하듯 외쳤다.
“뻔해!! 놈들을 어떻게든 쓰러뜨린다 해도 더 쎈 놈이 튀어나올 거고 결국 내 힘만으론 감당이 안 되는 상황이 올 거라고! 판을 키우기가 싫지만 그럴 수밖에 없다는 걸 내가 모르겠냐고!!”
“음….”
“마왕들이 날뛰는 상황까지 왔으니 [옛 지배자]가 출현하는 것도 금방이야, 제기랄!”
“그야 그렇겠지.”
아수라가 일리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또한 딱히 해줄 수 있는 말이 없는 듯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해야하지?
최대한 조용히 지내고 싶은데 벌써 일이 여기까지 꼬였다는 건가?
바로 그 때였다.
“그럼 커져버린 판을 다시 줄이면 되잖소?”
모두의 시선이 망량에게로 향했다. 여태까지 한 마디도 안 하고 조용히 듣고 있던 망량이 처음으로 입을 연 것이다. 나는 당황해서 망량에게 반문했다.
“판을 줄이다니?”
“대충 문맥은 파악했소만, 백웅 당신은 너무나 요령이 없구려. 천하를 상대로 하나하나 다 때려잡는다는 발상도 그렇고 직접 달려가서 때려잡는 것 외에는 별다른 대안이 없소. 그런 식으로 해서는 같은 난이도라고 해도 몇 배나 되는 지옥을 느낄 수밖에….”
한탄하듯 중얼거리던 망량이 말을 이었다.
“이럴 땐 그 마왕이란 놈들이 무엇을 위하여 헤르메스란 자를 소환했는지, 그리고 그 자를 소환하지 않고는 안 되었던 배경부터 먼저 유추하는 게 우선이오.”
“응? 당연히 자기네 세력을 강화하려고….”
“아니오. 당신이 전에 내게 말하기를 황궁에서 고대의 마물이 팔부신중과 대치중이었다고 했잖소? 그러다가 어느 순간 고대의 마물이 해갈되고 팔부신중은 황궁을 움직여서 이 나라의 수도를 옮기는 천도계획을 세웠다고 했었지.”
“음 그렇소만.”
“그리고 이후의 얘기를 들어보니 황궁의 연금술사가 여기로 소환당해서 살해당했고, 그 전에 남겼던 말은 바로 그 ‘고대의 마물’을 이용해서 초상기인의 연구를 진전시켰다는 말이었소. 그 말대로라면 고대의 마물은 팔부신중의 손에 쓰러졌던 것이지.”
“아.”
“여기서 추측을 해볼 수 있소. 고대의 마물을 정말로 상처 없이 쓰러뜨릴 수 있었던 것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하오. 별 피해 없이 쓰러뜨릴 수 있었다면 굳이 수정석비를 부수는 무리수를 두면서 헤르메스를 강림시키려 하지 않았을 것이오. 헤르메스를 어떻게든 강림시키려는 이유는 아마도 전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며 즉, 팔부신중은 현재 고대마물과의 전투에서 꽤나 피해를 입었다는 뜻이 되지.”
“……!!”
나는 논리정연한 망량의 말에 빠져들어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화, 확실히.’
그럴 듯한데?!
내가 놀라고 있자 망량의 말이 이어졌다.
“지금 당신은 은연중에 황궁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소. 금의위를 싹 다 살해해버림으로써 그들의 수족이 될 졸개들을 봉인했고, 대뢰옥의 포로들을 다 구출해서 제물을 텅텅 비게 만들었고, 초상기인을 연구하던 연금술사를 암살해버렸으며, 당신이라고 하는 의문의 강적 때문에 신경이 쓰여서 팔부신중이나 제갈유룡이 고대마물과의 일전에 집중하지 못하게끔 했소. 아마도 팔부신중이 큰 타격을 입은 데는 당신이 알게 모르게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오. 대결에만 집중했다면 다수의 마왕들이 이판사판으로 밀어버릴 수 있으니 피해가 더 적을 가능성이 컸겠지.”
“그런가….”
“즉, 지금 황궁이 헤르메스를 소환한 것은 당신의 행위로 촉발된 인과율. 당신의 행위가 결과를 맺은 것이니 당황할 일이 아니고 도리어 기뻐해야 할 일이오. 왜냐하면 황궁은 현재 상당한 위기를 맞이하고 있기에 강경일변도로 나올 수밖에 없다는 뜻이니.”
“흐음…. 그럼 판을 어떻게 축소시킬 수 있겠소?”
“아주 간단하오.”
망량은 부채를 펼치며 눈을 빛냈다.
“지금부터 황궁이 뭔 짓을 하건 무시하시오. 그리고 팔부신중을 황궁에서 떠나게끔 만드는 것이오.”
“……?!”
“황궁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거기에 팔부신중이라는 마왕들이 드글대고 있기 때문. 그 자들이 인간세상을 버리고 떠나버리면 세상에는 평화가 찾아올 거고 헤르메스 소환도 유야무야될 거라 생각하오. 적이 팔부신중만 아니라면 별 상관없잖소? 물론 이 과정에서 팔부신중과 싸우면 안 되지. 싸우게 되면 놈들이 이 세상에 머물 이유를 만들어주는 셈이니까.”
“…….”
“싸우지 않고 강적을 줄이는 것. 이게 바로 판을 줄이는 방법이지.”
나뿐만 아니라 듣고 있던 아수라까지 놀랐는지 눈을 크게 떴다. 나는 놀라서 반문했다.
“그,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어떻게 떠나게 할 수 있소?”
“이것도 일의 이유부터 짚어보면 쉽게 알 수 있소. 애초에 팔부신중이 황궁에 눌러앉아있는 이유가 무엇이오?”
“그거야 황궁의 어둠의 지배자인 제갈유룡과 동맹을 맺어서일 거요.”
“하찮은 인간에 불과한 내 아버지 제갈유룡과 난다긴다하는 강대한 마왕들이 손을 잡은 이유는 무엇이오?”
“어…. 그건… 아마도 팔부신중의 주인인 창힐이 그걸 원했기 때문일 것이오. 지금이 아니라 예전부터 손을 잡은 관계였지. 아마 이 나라의 역사를 배후에서 조종하기 위해서 제갈유룡의 요청에 응했던 것일 거요.”
“그러면 지금 그들의 주군인 창힐은 어딨소?”
“…….”
나는 힐끔 아수라의 눈치를 살폈다. 아수라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입을 열었다.
“없소. 소멸되었소. 하지만 팔부신중은 창힐이 실종되었다고만 생각하고 있지.”
“흐음…. 예상대로 그랬던 건가….”
망량은 씨익 미소를 짓더니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팔부신중이 인간세상에 잘 개입하지 않으려는 금기를 깨고 황궁에 억지로 눌러 붙어있는 것. 그것은 제갈유룡과의 의리 때문이 아니라 주군이 없다는 불안감이 집착으로 변한 것이오. 즉 ‘주군이 돌아올 곳’을 미리 만들어놓겠다는 충정이라고 할까?”
“흠….”
“그렇다면 방법은 간단하오. 실종된 창힐이 절대 되돌아올 수 없는 장소에 존재한다는 헛소문을 퍼뜨리고 놈들이 그걸 믿게끔 하는 것이오. 저런 심리로 움직이는 놈들이라면 아마 쉽게 걸려들 것이오.”
“으응?! 절대 되돌아올 수 없는 장소?!”
“그 놈들을 싹 다 거기로 보내버리면 최소한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엔 귀환할 수 없겠지. 이보다 더 깔끔한 방법은 없소.”
망량은 어깨를 으쓱였다.
“뭐 대충 여기까진 구상했소만 더 이상은 내 상상력이 부족하여 계책을 짜지 못했구려. 하지만 백웅 촌장쯤 되는 기인이라면 그런 곳도 하나쯤 알고 있을 것 같은데….”
“…….”
“그런 장소만 알려준다면 나머지 계책은 내가 짜 주겠소.”
그 순간, 나는 하나의 장소가 생각났다.
그리고는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외차원(外次元)….”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생 제르맹이 깜짝 놀랐다.
“서, 설마 필멸자이면서 외차원으로 가는 법도 알고 있는 것인가? 이런 말도 안 되는 기인이….”
아오키가하라 수해로 가서 그곳의 [관리자]를 뚫기만 하면 된다.
물론 방법을 알고 있는 것과 직접 행하는 건 다른 문제이긴 하다. 하지만 내가 가는 게 아니라면 별 상관없긴 하다.
“모르진 않지….”
나는 대충 대답하고는 망량의 말에 점차 귀가 솔깃해짐을 느꼈다. 그리고는 말했다.
“망량. 외차원으로 향하는 장소는 내가 알고 있소. 놈들을 그 장소로 유인할 방법을 알려주시오.”
망량은 자신있게 말했다.
“그건 아주 간단하오. 인간의 힘으로 쉽게 이룰 수 있소. 당신의 활동 덕분에 심리적으로 크게 몰린 놈들이라면 아주 쉽게 걸려들 것이오.”
“어떻게?”
망량은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위대한 창힐을 기리는 노래를 전 중원에 퍼뜨리는 것이오…. 흐흐.”
그리고 다음 날부터 망량의 계책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