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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나는 한참동안 몸을 추슬렀다. 그리고 약 한 시진이 지나서야 기력이 조금 돌아오고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하루라고 보면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니었으나 실전이었다면 수백 번 죽었을 시간이라 생각하니 섬뜩했다.
“후우. 가 볼까.”
나는 아수라가 들어갔던 차원문으로 들어갔다. 한 시진동안 나오지 않았다는 건 아직도 싸우는 중이거나 사후처리를 하고 있다는 뜻이리라.
그리고 내 생각대로 여기저기에 소을촌 고수들이 돌아다니면서 ‘경매물품’들을 하나하나 점검하면서 옮길 준비를 하는 게 보였다. 내가 힐끔 근처의 광경을 보자 여기저기에 이족들이 죽어 있었으며 더러 인간고수들도 죽어있는 게 보였다. 나는 가장 가까이에 있던 극호에게 다가갔다.
“극호. 다들 다치지는 않았나?”
“아, 태사부!”
극호가 외치자 모두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내 쪽으로 오기 시작했는데 극호가 말했다.
“별 일 없었습니다. 경상을 입은 사람이 있지만 지금 기공으로 회복중이고 현천도인이 호법을 서 주고 있습니다.”
“경상! 누가 다쳤지?”
“소을(小乙)입니다.”
살수조장?!
나는 흠칫했고 극호가 위치를 알려주려는 듯 어떤 곳을 바라보았다. 후미진 건물 뒤편이었는데 내가 급히 가 보자 그곳에서는 복부에 몇 개의 구멍이 뚫린 살수조장 소을이 고통을 참으며 운기조식을 하고 있었고 옆에서 현천도인이 검을 든 채 호법경계를 서 주고 있었다.
“이봐!! 어쩌다가 소을이 칼을 맞은 거지?”
그러자 호법을 서 주던 현천도인이 대답했다.
“전투 중에 방일을 감싸다가 당했소.”
“…방일? 방일은 어딨지?”
“독고성이 데려갔소.”
“…….”
왠지 나는 알 것 같다. 독고성이라면 십중팔구 방일의 미숙함 때문에 소을이 칼을 맞았다고 정신교육을 시켜주고 있으리라. 당연히 뇌신류니까 약간의 구타나 욕설이 난무하겠지만 나는 지금 그것까지 신경쓸 상황이 아니라 생각했다. 나는 복잡한 눈으로 소을을 보다가 말했다.
“경상이라더니 치명적인 요혈을 피해서 칼을 맞았군. 살만 뚫린 게 다행인가? 하지만 그래도 칼을 맞았으면 경상이 아닌데.”
그러자 극호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본인 입으로 경상이라 했으니 그러려니 하는거죠. 무림인이 칼맞는게 별로 드문 일도 아니니.”
“…….”
극호도 이러니 저러니 해도 뇌신류군.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소을에게 다가가서 그의 몸에 강대한 기를 불어넣었다.
후우우웅!!
‘좋아. 화타백팔침의 요결에 따라 생명력을 활성하는 혈에 기를 집중하자….’
이런 식으로 하면 육체의 자연치유력을 올려서 피를 빠르게 멎게 하고 상처를 치유할 수 있었다. 그렇다 해도 본디 간단한 응급처치에 쓰이는 의술이었지만 내 기가 막대한 덕분인지 소을의 안색에 빠르게 혈색이 도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지금까지 계속 본인이 기공치료를 하고 있었던 것도 큰 도움이 되었으리라.
이윽고 소을이 정신을 차리자 나는 소을에게 말했다.
“왜 방일을 감쌌지?”
“그의 무공이 미숙하여 풍신류 고수에게 둘러싸이자 죽을 위기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얘기가 아니다. 네놈의 무공은 흑도 중에서도 살수 그 자체인 흑야문의 무공. 살수의 소양 중에 남을 감싸는 건 존재치 않을 텐데.”
그러자 소을은 표정변화 없이 대꾸했다.
“제가 소을촌을 위하여 공을 세우면 원한을 퉁쳐주겠다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새끼, 그때 그 얘기를 하는 건가?
나는 소을의 말을 알아들었지만 도리어 성난 표정으로 말했다.
“네 멋대로 해석하지 마라. 네 멋대로 빚을 갚지 마!”
“적어도 촌장님께 마음의 빚은 생겼겠지요.”
“이 새끼가….”
나는 이를 으득 갈았지만 예전처럼 바로 살수조장 소을을 패지 못했다. 다들 보고 있는 앞에서 이유 없이 촌장이 소을을 팬다면 결코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주먹이 나가는 걸 참으며 말했다.
“내가 죽기 전까지 죽지 마라. 알겠냐?”
“그것도 명령이십니까?”
“명령? 그래, 명령이라고 하자. 으휴.”
“알겠습니다.”
나는 살수조장 소을이 결코 순수한 호의로 방일을 구해주지 않았다는 걸 눈치 챘다. 저 놈은 나중에 나를 위해서 두 번의 살행을 해야 할 텐데, 그게 무척 어려울 것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마을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는 내게 압박을 주기 위해서 일부러 칼을 맞는 무리수까지 두면서 방일을 구했고, 그 의리를 마을사람들에게 보여주어서 내가 놈을 패기 힘들게 만든 것이리라.
모든 게 나중에 내가 놈한테 무리한 살행을 요구하기 힘들게 만드는 포석인 것이다.
‘살수새끼가 뭐 저렇게 머리를 굴려? 젠장할.’
그러든 말든 내가 놈을 괴롭히려면 방법이 없는 게 아니었지만 놈은 무척이나 끈질긴 독종같았다. 아니, 그러니까 젊은 나이에 중원살수 중 손꼽히는 천재라고 불리는 걸까? 저런 새끼를 간단하게 골탕 먹이고 예전 목숨의 빚을 갚게 하는 건 힘든 일이 되리라.
내가 내심 짜증을 내고 있을 때 옆에 있던 극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태사부. 사실 풍신류 호법사자와 아수라 님이 전투중입니다.”
나는 그 말에 흠칫하고 놀랐다.
“뭐?! 그걸 왜 이제 말해?!”
“아수라님이 일대일로 그 자를 이기겠다고 승패가 날 때까지 태사부님께 알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역시 알리지 않을 순 없어서….”
“제기랄. 그럼 한 시진째 싸우고 있단 건가?”
“네. 둘은 이곳이 비좁다고 저 멀리 산을 넘어갔습니다.”
“…….”
나는 이상함을 느꼈다.
‘아무리 그래도 용비천은 무한의 내공인 천령단을 쓸 수 있는 놈이다. 제대로 힘을 쓰면 천재지변이 일어날 테고 절대지경 고수인 아수라와 한 시진이나 싸운다면 그 엄청난 기력의 변동을 내가 당연히 느꼈을 텐데?’
그러나 산 너머는 너무나 조용하다. 나는 수상쩍음을 느끼고는 극호에게 말했다.
“위험하니 나 혼자서 가 보겠다. 너희는 반 시진 후에도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감옥에서 사람들만 구출해서 차원문 밖으로 나가라.”
“알겠습니다.”
파앗!
나는 빠르게 하늘을 날아서 산 너머로 갔다. 그리고 잠시 후 산 너머에서 폐허가 되어있는 장소를 발견했고, 약 오십여 장에 걸친 파괴의 흔적 한가운데에 서 있는 아수라를 발견했다.
“아수라!! 괜찮나?”
그러자 아수라가 내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
“괜찮다. 그것보다 섣불리 가까이 오지 마.”
“왜?”
“아직도 폭주 중이… 읏차!”
콰과광
그 순간 발검자세를 잡고 있던 아수라가 의념천주를 발동해서 엄청난 쾌검으로 자신을 향해 날아온 시꺼먼 촉수덩어리를 터뜨렸다. 절대지경이 아니라면 무조건 당할 정도로 강대한 기세의 촉수였기에 나는 흠칫하고 놀라며 아수라의 삼 장 앞에 있는 ‘무언가’를 쳐다보았다.
‘저건?’
알…?
시꺼멓고 혈관이 여기저기에 불거져있는, 딱 성인남자 크기만한 둥그런 알이 서 있었다. 그 알은 고요히 존재했지만 알의 전면에는 부릅뜬 눈알이 크게 붙어있었기에 괴기스러움이 느껴졌다. 물론 나는 저런 부릅뜬 눈알을 이족을 상대하며 수도 없이 보았기에 그리 충격받지는 않았다.
‘저 알에서 방금 전 촉수가 뻗어나왔다….’
나는 혹시하는 생각에 아수라에게 물었다.
“아수라. 설마 저 흑란(黑卵)이 용비천인가?”
그러자 아수라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씨발!! 대체 뭐야? 호법사자가 왜….”
내가 당황해하자 아수라가 말했다.
“한 50초만에 적멸무극으로 저 놈을 죽이기 직전까지 갔었는데, 놈의 목을 따는 순간 갑자기 저렇게 변해버렸다. 그리고는 틈만 나면 촉수를 뻗어내서 주변에 있는 모든 걸 공격하려 한다. 나는 저 놈이 어떻게 성장할지 몰라서 이 자리를 뜨지 못하고 계속 감시중이었다.”
“…….”
“마물이 되어버린거지. 보다시피.”
나는 어이가 없어서 말했다.
“말도 안 돼. 천령단은 [옥좌]에서 직접 기를 퍼오는 능력이야! 어떻게 마물이 될 수 있지?”
“흐음. 확실히 네 이전 생의 기억에 비춰보면 있을 수 없는 일이군. 그렇다면 네가 이번 생에 개입하지 않은 동안 변화가 일어났단 소리다.”
“변화?”
“그래. 누군가가 용비천을 개조해서 천령단의 저항력을 누를 정도로 마(魔)의 힘을 이식시킨 것…. 에라이!”
콰광
다시 한 번 촉수를 쳐낸 아수라의 얼굴에 신경질이 감돌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수라가 무난하게 쳐내는 것처럼 보여도 저 촉수는 절대지경조차 상당한 집중력을 기울여야 겨우 쳐낼 정도로 강력한 힘과 속도를 갖고 있었다. 저런 걸 한 시진이나 상대한다면 짜증날 수밖에 없었다.
아수라는 뚫어져라 흑란이 되어버린 용비천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용비천을 저리 만든 범인이 누구든 간에 지금 당장은 저 놈을 없애버려야겠다. [저건] 무림세상의 인간들이 감당할 수 없는 존재다.”
“적멸무극이 안 통하나?”
“아니. 보니까 저 흑란 자체가 그렇게 내구도가 강하진 않아서 통할 것 같긴 한데…. 저 알이 부숴졌을 때 안에서 뭐가 나올지 짐작도 안 되어서 널 기다리고 있었다.”
“…….”
“이제 슬슬 해볼까?”
나는 아수라의 말에 고민했다. 확실히 아수라 말대로 저 흑란을 부수니 더 쎈 괴물이 튀어나온다 하면 그 자체로 악몽이다. 그러나 나는 이윽고 각오를 하고는 말했다.
“죽기밖에 더 하겠냐? 적멸무극은 아껴.”
“네가 할 테냐?”
“그래.”
스으으
나는 발검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눈을 반개한 채 집중력을 모으다가 어느 순간 다시 한 번 촉수가 뻗어져 나와서 나와 아수라를 공격하는 순간을 포착했다.
‘온다….’
나는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의념천주를 강하게 곧추세우며 절기를 시전했다. 내 검집에서 섬광이 튕겨나갔다.
무량단(無量斷)
다음 순간 내 몸이 아슬아슬하게 촉수의 공격을 피해내며 반대로 흑란을 일쾌로 베어버렸다. 위력만으로는 아수라의 적멸무극으로 부수는 게 더 확실할 테지만 내 무량단이 상대적으로 기력손실이 덜하기 때문에 내가 흑란을 없애기로 한 것이다.
푸콰콱!!
거대한 피분수가 터져 나왔다. 그 피분수는 시꺼먼 칠흑이었기에 불쾌하고 이질적이었으며, 동시에 내 무량단에 베인 흑란의 눈깔도 격렬하게 요동치면서 비명소리를 꽤애액 하고 토해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흑란이 부정형(不定形)의 혼돈과 점액질로 녹아내리더니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요동치기 시작했다.
철퍽! 철퍽!
무척이나 끔찍한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무척 더러워지는 것 같았다. 공격해오면 다시 반격할 생각으로 침착하게 기다리고 있자, 이윽고 그 혼돈이 허공을 향해 치솟아 오르더니 하늘 너머로 날아가고 말았다.
쓔우웅
하늘 너머로 사라진 혼돈은 두 번 다시 보이지 않았다.
“…….”
“…….”
저건 대체 뭐야?
끝까지 정체불명의 적을 상대한 느낌에 내가 머리를 긁적였다.
“용인이라도 튀어나올 줄 알았는데.”
혼돈이 되어 소멸한 용비천이 불쌍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리고 과거에 미호를 죽인 원수새끼였으니 잘 죽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망량은 가능하면 살려서 데려오라 했지만 저렇게 된 것도 자기 팔자가 아니겠는가?
“일단은 돌아가자. 지금 우리끼리는 알 수 없는 문제니까.”
“응? 잠깐.”
나는 방금 전 흑란이 발작하던 장소에 뭔가 떨어져있는 걸 알아챘다. 그리고는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뭔가 돌멩이 조각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돌멩이 조각은 은은한 빛을 내고 있었고 상당한 영기를 품고 있는 듯 했다.
‘수상하군….’
일단 가져가야겠다.
나는 이후 소을촌 고수들과 힘을 합쳐서 반나절동안 경매물품의 철창을 모두 해제하고 안에 잡혀있던 사람들을 해방시켰다. 그 숫자는 대뢰옥에 있던 인간들보다 몇 배나 많았으며 수백 명이나 되었기에 머릿수만 해도 상당했다. 그리고 사람들의 면면을 가볍게 확인해보니 전 세계에서 잡힌 듯 인종과 외모가 무척 다양했다.
“우선 사람들을 모두 목갑에 넣은 다음 물건들을 이동시키겠어. 다들 이곳에서 나갈 준비를 해.”
“알겠습니다.”
나는 한 번에 물건과 인간들을 다 넣어갈 수도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일단 분량을 나누기로 마음먹었다. 왜냐하면 여기에 오기 전에 생 제르맹의 충고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꽉 채우지 말라고 했지.’
노예시장의 인간들과 물건을 다 넣게 되면 목갑의 공간이 8할 이상 찰 거라는 예감이 든다. 꽉 채우는 건 아니지만 위험하다. 위험은 가능하면 피해야 했기에 앞으로도 절반이상 채우지 않도록 노력해야겠다.
우웅
차례대로 모두가 이 경매 차원에서 나가기 시작했다. 내가 두세 번을 왕복하자 모두를 소을촌으로 옮길 수 있었다. 나는 소을촌에 모두가 와 있는 걸 확인하자 겨우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드디어 전생하면서 처음으로 이족 노예시장을 타파하고 사람들을 구해내는데 성공한 것이다!
나는 일단 마을의 중요인물들을 모두 불러서 회의를 열었다. 작전은 성공했지만 되짚어볼 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용비천을 해치우러 가서 맞닥뜨린 흑란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가져온 기묘한 돌덩어리를 꺼내며 말했다.
“풍신류 호법사자 용비천의 몸에 있던 걸로 추정되는데 이게 뭐라고들 생각하시오?”
“으음….”
“잘 모르겠습니다 촌장님.”
사람들은 한 번씩 돌덩어리를 돌려보면서도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심지어 망량조차도 모르겠다는 반응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 돌덩어리를 받은 생 제르맹이 한참동안 만지작거리고 있다가 눈을 크게 부릅뜨며 말했다.
“이… 이것은… 어째서 이게?”
“생 제르맹. 혹시 뭔지 알고 있소?”
“정말로 이게 인간의 몸속에서 나왔고 검은 알처럼 인간을 변하게 했단 말입니까?”
“그렇소만….”
“아… 아아…. 어찌 이런 무도한 짓을….”
잠시 침음성을 흘리던 생 제르맹이 이윽고 자신의 머리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촌장 백웅이여. 이것은… 수정석비요. 우리 서방에서는 에메랄드 타블렛이라 하는 물건이란 말이오.”
“……?!”
“너무나 안타깝소…. 허허….”
뭐라고?!
내가 깜짝 놀라자 생 제르맹이 우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누군가가…. 금기를 깨고 수정석비를 파괴하여 그 조각으로 마법의 신,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토스를 이 세계의 굴레에 끌어들였소. 용비천이란 자가 변신한 건 그 때문인 듯 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