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검신-1287화 (1,284/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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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내 선검 실력을 검증하겠다고?

나는 여동빈의 말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보통 이럴 때는 죽자사자 한판 붙는 것이고 그 결과 내가 여동빈 손에 죽은 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무인으로서 검선 여동빈과 싸우다가 죽는 건 영광이니 그것도 나름 괜찮겠지만,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서 당황스럽기도 했다.

‘바로 검부터 맞댈 순 없어.’

이 상황은 다 해결된 게 아니다. 아니, 나는 지금 일이 어떻게 흘러가는지조차 모르고 있다. 이럴 때 상대 뜻대로만 해줘서는 결국 문제도 모른 채 상황에 코가 꿰이게 마련이라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침착하게 말했다.

“여동빈! 내 선검실력을 검증하려는 이유가 뭡니까? 내가 천계에 칼을 들이댈까봐 걱정되어 싹을 꺾어놓겠다는 말입니까?”

내 말에 여동빈은 심유한 눈으로 나를 묵묵히 바라보았고, 이윽고 말했다.

“그랬다면 이 자리에 우리 둘만 오진 않았을 것이다.”

“흐흠.”

옆에 있는 이철괴도 별다른 반발이 없는 걸로 봐서는 여동빈의 말에 동의하는 듯 했다.

“…….”

저 말은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적어도 내 힘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고 찾아왔다는 소리다.’

아직 장성하지 않은 소년의 몸에 시골마을 촌장에 불과하다면 대라신선이 얕보기에 충분한 조건이다. 그러나 이철괴도 그렇고 여동빈도 그렇고 대화속에서 날 경시하지 않는다는게 여실히 느껴졌고 방금 전의 발언은 그걸 확인해주고 있었다. 어쩌면 나를 대규모 병력을 일으켜 토벌해야 하는 대상으로 여기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리였다.

‘젠장.’

원래라면 팔선에게 이 정도 취급을 받는것에 기뻐하리라. 말이 팔선이지 그들은 중원에서 가장 명성이 혁혁한 대라신선들이며 도가의 전설이었으니 대단한 존재들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나를 얕보지 않는다는게 도리어 큰일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나는 새로이 만나는 인외의 존재들이 강자의 위치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틈을 타서 계책을 꾸미고 헛점을 노리는게 편했다. 그러나 상대가 얕보지 않으면 그런건 말짱 헛것이 되고 만전의 준비를 한 자들과 싸워야 한다는 뜻이 되어버린다.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일지는 불문가지였다. 어쩌면 팔선과 근미래에 싸울지도 모를텐데 이런 상황이 되어버리다니!

“선검을 겨루기 전에 하나 말해두지….”

내가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자 여동빈이 선검 끝을 살짝 늘어뜨리며 말했다.

“그대가 이 지상에서 무엇을 하고싶든, 선검술로 인하여 이미 그대와 구천현녀님 사이에 인과의 고리가 생겼다. 결자해지(結者解之)를 위해 찾아올 용기가 없는가?”

나는 그 말에 대꾸했다.

“천계로 가는 건 문제가 아닙니다. 허나 천계에서 당신들이 나를 겁박하여 합공하지 않는다는 법이 없으니 어찌 쉽게 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이철괴가 퉁명스럽게 나를 힐난했다.

“이상한 자로군. 천계는 정의로우니, 그대가 사이한 존재가 아니라면 세속의 명리를 좇아 지상의 인간을 죽이려 들진 않을 것이다.”

“아니, 그렇지 않소!”

나는 나도 모르게 울컥하는 기분이 들어서 버럭 외쳤다.

“천계는 썩어빠졌소! 당신들은 종말의 거룡 토벌 때 그걸 느끼지 않았소? 특히 여동빈 당신은…!!”

내 외침에 여동빈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무슨 말이지?”

“종말의 거룡이 세상을 먹어치우려는데 천계 그 누구도 도와주지 않아서 망량선사에게 찾아갔을 정도잖습니까! 윗대가리가 다 썩어있는걸 뻔히 알고 있는데 어떻게 내가 천계에 갈 수 있겠어!”

“…….”

“…….”

내 말에 여동빈은 평정을 잃지는 않았지만 눈을 지긋이 감았고, 옆에 있던 이철괴가 도리어 더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그대는 어찌 그 사실을… 천 년 전의 비사를 어찌 알고 있지?”

아차.

나는 한순간의 감정이 격해져서 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이 정도는 대처할 수 있다는 걸 깨닫고는 침착하게 말했다.

“나는 망량선사와 연이 통해있소. 그러니 나를 쉽게 움직이려 들지 않는 게 좋을거요.”

“선사께서….”

이철괴는 대번에 난감해하는 듯 했다. 아무래도 내가 망량선사와 거래를 했었고 아는 사이라는 사실은 모르고 찾아온 듯 했다.

잠시 후 여동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달라지는 건 없다.”

“네?”

“선검을 들어라. 오늘은 그대의 선검만 보고 갈 터이다.”

나는 여동빈의 똥고집에 기가 막혀서 어이없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내 말을 전혀 듣지 않은 양 자기 할 일만 하고가겠다는 태도라니! 마치 벽창호와 같았고 내 언변이 전혀 먹히지 않는 골수무인이라는 걸 다시금 느낄 수가 있었다.

하지만 보여달라 해서 쉽사리 보여준다면 어떤 식으로 책을 잡힐지 몰랐기에 나는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젠장. 왜 그리 내 선검에 집착하는 겁니까? 같은 선검술사이자 선배로서 조언을 해주겠다는 겁니까?”

“그리 거창하지 않다.”

여동빈은 정기신이 일치된 정갈한 자세로 한 줌의 흐트러짐도 없이 말을 이었다.

“그대의 가능성을 보고싶을 뿐이다.”

“…….”

“정녕 선검을 들지 않겠나?”

나는 그 담담한 한 마디에서 아무런 의도도 없는 순수한 무심(武心)같은 걸 느낄 수가 있었다.

‘아! 내가 너무 깊게 생각하고 있을 뿐이야….’

여동빈은 내 생각처럼 복잡한 계책을 부리는 자가 절대 아니다.

진짜 그냥 붙어보자고 제안한 것 뿐이다.

책사도 없이 나 혼자서 머리 굴리는데 어느 새 익숙해지다보니 사소한 일까지 신경쓰게 된 것일까? 여동빈은 아까부터 그저 선검술을 겨뤄보고 싶어할 뿐인데 내가 그 의도를 곡해한 것이다.

나는 문득 부끄러워졌다. 예전의 생에서는 찾아다니면서 선검술을 가르쳐달라고 졸랐을 정도였는데 어느새 무(武)가 내 삶에서 뒷전이 된 것일까? 소을촌에서 무예전수에 여념이 없으니 당연히 무를 추구하고있는 줄 알았지만 사실 그건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 되어버렸던 게 아닐까?

‘이런 번민 자체가 싫군…. 이번 생은 번민이 싫어서 도피하는 게 아니었던가.’

나는 문득 피식하고 웃었다.

‘그래. 책사도 없는데 나 혼자서 천계와 구천현녀의 꿍꿍이를 예측해봐야 뭐하겠나? 어찌되었든 여동빈은 여동빈이다.’

천계는 못믿어도 여동빈의 무심은 믿을 수 있다.

그러니 여기서는 여동빈의 말대로 기탄없이 한번 깔끔하게 선검술을 붙어보는 게 낫겠다!

“좋습니다. 여동빈. 선검을 겨뤄봅시다.”

우웅

나는 선검을 소환했다. 그리고 반백반흑으로 물들어 있는 나의 선검을 보자, 이철괴가 어리둥절해하며 말했다.

“응? 선검이란 게 저런 색깔일 수가 있는가?”

“…….”

반면에 여동빈은 뭔가를 느꼈는지 얼굴이 약간 굳어있는 게 보였다. 그러더니 여동빈이 말했다.

“먼저 가겠다.”

“선공하십시오.”

쓔웅

검선 여동빈의 단순한 일참(一斬)이 단순한 궤적으로 날아오는 게 느껴졌다. 느껴졌다고 표현한 것은 지극히 단순한 직선 횡참(橫斬)일 뿐이지만 초절정고수의 인지능력으로도 포착하기 힘들 정도의 극속(極速)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 어마어마한 속도의 횡참을 감지한 것은 전적으로 절대지경의 의념천주, 그리고 절대지경 고수들과 많이 겨뤄본 경험 덕분이었다.

초식이라고도 부를 수 없을 정도로 단순화된 무념의 일참.

이건 차라리 내 무량단과 비슷한 것 같았다.

‘의외로 난 이런 공격은 자주 접해봤군. 쾌(快)는 모든 고수가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분야이기 때문인가….’

경험상 이런 유형의 공격은 완전히 피하거나 막을 수 없다. 그러나 한 번 읽기만 하면 갖다대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청운에게서 묘역을 배울 때부터 체계화되어 오랫동안 쌓여왔던 고수의 영역이 그대로 펼쳐지는 게 느껴진다.

카앙!!

내가 여동빈의 검로(劍路)에 갖다댄 선검의 날이 격렬하게 불꽃을 튀겼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과거의 일이 떠올랐다.

오늘은 선검 대 선검의 대결이 되었고 내 선검은 떨리기만 할 뿐 전혀 부러질 기색이 없었다. 나는 예전 여동빈과 겨뤘던 25번째 삶의 사투(死鬪)가 머릿속에서 선명하게 떠올랐으며, 그 당시 내가 받았던 수모 또한 곧장 기억났다.

‘그 때는 내 강철장검이 부러지고 목에 검날이 스쳤다.’

그 때의 수준차이는 그 당시에는 실감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여동빈의 쾌(快)를 간파하지 못했기에 그에게 치명적인 간격을 내어주고 말았고, 쾌의 끝자락에 섞인 혹(惑)의 잔결(殘缺)을 감지하지 못했기에 검끝의 변화를 이겨내지 못하고 병기마저 부러졌던 것이다.

사소해보이지만 거대한 실력차이였으니 그 때의 내가 얼마나 미숙했는지를 절절히 느낄 수가 있었다. 그 때 분명히 여동빈은 내 목을 일 초에 딸 수 있었음에도 일부러 베지 않고 목에 검날을 스치는 걸로 봐준 게 분명했다.

하지만 오늘은 막아내었으며 아무런 무리가 없다는 것. 그것은 더 이상 여동빈의 기습적인 쾌(快) 정도로는 중심을 파헤칠 수 없는 단단한 무예의 기반이 나의 내면에 생겨났다는 뜻이었다.

슈슈슉

여동빈의 의념천주가 감지되면서 그의 의지가 무형(無形)속에서 실체가 되며 뒤늦게 초식으로 구현화되는 게 느껴졌다. 현실세계에서는 이뤄지지 않는 일이지만 의념천주를 지닌 절대지경끼리는 느낄 수 있는 영역 - 이것은 마치 바둑의 수읽기처럼 전략의 영역에서 고급무예가 맞설 여지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지결(地決)이군.’

여섯가지 요결 중에서 가장 중립적이며 상대의 수에 대응하는 능력이 좋다고 알고 있었다. 지결은 홀로 쓰여서 천결이나 우결처럼 강대한 위력을 보이지 않았으며 다른 결구로 향하는 관문의 역할을 한다. 나는 여동빈이 지결을 펼칠 거란 걸 읽자 그가 후수(後手)를 택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선공은 자기가 했으니 이번에는 내게 공격하는 기회를 주는 건가?

‘그럴듯한데….’

나는 딱히 일희일비하지 않고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지결에 대항할 초수를 감각적으로 골랐고 곧장 생각을 거치지 않은 채 발출했다. 생각을 거치면 이미 늦기 때문에 절대지경 고수들은 이미 자신의 전략을 정해놓고 그때그때 의념천주를 이용해 대응하는 것에 가까웠다.

무량단(無量斷)

어째서 내 손에서 무량단이 펼쳐졌는지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당연히 25번째 삶에서 첫 수에 장검이 부러졌던 쾌검(快劍)의 치욕을 여동빈에게 갚아주려는 행위였으며, 실제로 내가 펼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법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백련교주의 심천무량마저 벨 수 있는 절세의 뇌검(雷劍)이 마치 포효하듯이 나와 여동빈 사이의 짧은 공간을 관통했다.

쩌엉!!

쿠콰콰쾅

먼저 번개가 천지사해를 뒤덮듯 번쩍인 후 뒤늦게 천둥번개가 울려퍼졌다. 나는 마지막까지 무량단을 전개하면서 손끝에 아무런 베이는 맛도 없었으며 여동빈의 실체 또한 걸리지 않았다는 걸 알아챘다.

‘피했다? 아니…. 피하지 않았다….’

모순같았지만 그런 느낌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여동빈의 몸이 여러 개로 나뉘어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분신술인가?

‘아냐! 이건….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거야!’

분신술이나 분영술 특유의 기(氣)가 일렁이는 미세한 느낌조차 들지 않는다. 극도에 도달한 의념천주가 상대의 미래의 움직임을 의념으로 예측하기 시작했는데 그 예측이 뜻밖의 환각을 스스로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여동빈의 움직임, 즉 보법(步法) 자체가 절대지경을 현혹시킬 정도로 절세무비한 것이라는 걸 의미했다.

여동빈의 신형은 불규칙하게 내 주변의 사상(四象)을 제압하는 듯 했지만 그건 실체화된 움직임이 아니다. 이대로 여동빈을 자유롭게 두면 거기로 갈지도 모른다는 내 예측이 억지로 만들어낸 환상에 가까웠다. 진짜 여동빈은 아직 움직이지도 않았으며 이제 막 선검을 휘둘러 공세로 전환하는 중이라는 걸 알고 있다.

대체 이건 무슨 현상이지?!

저 사상의 방위 중에 하나로 여동빈이 이동한다는 건가?!

나는 도무지 알 수 없는 기괴한 현상에 당황하다가 찰나의 염화(念話)가 들려오는 걸 느꼈다.

[다음 교환으로 끝내자.]

여동빈이 서서히 움직이는 게 느껴진다.

그리고 나는 의념천주가 불러일으킨 찰나의 기나긴 시간 속에서 무쌍패를 써야할지 말지를 잔뜩 고민했다. 여동빈의 이런 말도 안 되는 일 초식의 원리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뇌신류의 방어초식으로 도저히 막을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쌍패를 쓰게 되면 여동빈이나 천계가 나를 한층 의심하게 될게 뻔했다.

‘내겐 무쌍패만 있는 게 아냐!’

갑작스러운 오기였을까? 나는 무쌍패를 선택할 수 있는 패에서 버려버린 후 곧장 구궁파천뢰로 초식을 전환했다. 선검에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뇌력(雷力)이 미친듯이 흘러들어가며 주변의 공기가 번개의 힘 때문에 떨릴 지경이 되었고, 내 몸 또한 황금빛의 번개로 빛나기 시작했다.

파지직!! 파직!

뇌령이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는 게 느껴졌다. 동시에 나는 여동빈이 들어올 것으로 예상되는 검로에 그대로 구궁파천뢰를 실어 선검을 날렸다.

구궁파천뢰(九宮破天雷)

일백(一白)

천축검(天縮劍)

여동빈과 나 사이의 공간이 조여들기 시작한다. 나는 천축검의 효과가 나타나자마자 곧장 이흑과 삼벽에 실은 절기를 구궁파천뢰의 원리에 따라 발동시키기 시작했다.

이흑(二黑)

역천보륜(易天寶輪)

삼벽(三碧)

여의조령(如意照靈)

위잉 -

선검의 검기성강(劍氣成罡)이 마치 별빛처럼 떨어져 내리더니 이윽고 역천보륜의 구결에 따라 반회전을 했고 이내 몸 주변을 공전하는 듯한 형상이 되었다. 나는 수십 개의 역천보륜이 회전하는 내 몸뚱이를 그대로 가져다 여동빈에게 부딪히려고 돌격하기 시작했다.

‘여의조령과 역천보륜을 합치면 자동으로 적의 공격에 반응한다!’

사록(四綠)

뇌명(雷鳴)

오황(五黃)

삼보절기(三步絶技)!!

더 이상은 설명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간결하게 몸통박치기가 날아갔다. 미지의 절기를 허투루 대항하지 않고 모든 신체의 잠재력을 뇌명으로 끌어내어 역천보륜과 여의조령을 이용한 방어절기를 여동빈에게 충돌시켜서 승기를 이끌어내려는 것이었다. 스치기만 해도 최소 사망일 것이다!

타앗

그러나 - 나는 여동빈의 일 보 앞까지 도착했을 때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왜?’

여동빈이 없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분명히 천축검까지 써가며 거리를 좁히고 찰나지간에 격돌하려 했는데 한 발짝 앞까지 다가와 보니 눈앞에 여동빈이 없다. 순간이동을 했다기에는 아무런 전조도 없었으므로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전혀 생각조차 해보지 못한 경우였기 때문이었다.

타앙!!

“……!!”

뒤늦게 내 정신을 일깨워준 것은 무언가 부딪히는 듯한 소리와 함께 내가 방금 전까지 서있던 자리에 여동빈이 검을 휘두르고 있는 상황이었다. 여동빈은 무언가를 이미 베어버린 듯 했고, 나는 그걸 느끼자마자 설마 사지가 날아갔나 하는 생각에 몸의 감각을 도야시켰다.

하지만 별다른 일이 없다. 내 몸은 멀쩡했고 - 그저 이번 일 초의 교환은 나와 여동빈이 서 있던 위치가 바뀌었을 뿐이었다.

“…….”

지이이잉

여동빈의 선검이 마치 벌떼 울듯이 떨리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세게 때린 탓에 진동이 전달된 듯한 형상! 여동빈은 물끄러미 내 시선을 맞받더니 입을 열었다.

“그대는 선검을 제대로 쓰지 않는 것인가 아니면 쓰지 못하는 것인가?”

“읍.”

마치 정곡을 찔린 것 같았다. 나는 여동빈의 말에 잠시 숨이 멈추는 충격을 느꼈지만 이내 정신력을 회복하고는 침착하게 말했다.

“마치 선검을 제대로 썼다면 날 벨 수 있었다는 뜻으로 들립니다만.”

“……?”

그러자 여동빈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더니 말했다.

“그만한 절세무공을 시전하면서 어찌 흐름을 모르는가?”

“네?”

“어느 쪽의 우위도 없었다. 나는 그대의 움직임을 읽어내었으나 방어를 뚫을 수가 없었다.”

여동빈은 그렇게 말하고는 침묵했다. 나 또한 할 말이 없어서 그냥 멀뚱히 그를 마주보고 있자 여동빈이 입을 열었다.

“질문에 답하라. 그대가 선검을 마치 장식처럼 휘두르는 이유가 무엇인가?”

“…….”

“방금 전 그대의 선검에는 그 어떠한 인과도 구현되지 않았다.”

장식처럼 휘두른다는 말에 나는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여동빈이 무엇을 읽어냈는지를 알아챘다.

‘…나는 선검의 ‘날’을 세우지 못해. 그걸 알아챘구나.’

과거 여동빈이 내게 선검술을 가르쳐줄 때 선검의 날을 세워야 한다고 가르친 적이 있었다. 물론 지금 내가 쓰는 선검도 물리력을 충분히 쓸 수 있지만, 진짜 선검은 마치 만상지투처럼 무형의 개념조차도 베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선검의 날을 세워보려고 온갖 가르침을 구하며 미래세계에서 고생했지만 결국 선검술의 진전은 딱히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원(圓)을 그리는 수련을 반복하며 진의(眞意)를 얻으려 부단히 노력했지만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습니다. 내가 부족한 것이지 당신을 기만하려 한 건 아닙니다.”

“옳은 수련법을 알고 있군.”

“…….”

“최종오의를 써서 한 초식을 더 겨뤄보려 했으나 더 이상은 필요 없겠구나.”

스윽

여동빈은 갑자기 선검을 소환해제했다. 나는 그 모습에 나 또한 같이 선검을 해제했고, 여동빈이 심유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그대의 심기체(心技體)에서 심(心)이 뒤흔들려 방금 전의 대련에서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는 우리가 목숨을 걸고 겨루지 않아 다행이었으나 그대가 방황하고 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가.”

“내 마음이 흔들렸단 말입니까?”

“그렇다. 그대가 무념의 일참을 행했을 때 그 무념의 방향이 너무 쉽게 읽혔으니, 이 싸움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여 초식의 위력이 약해졌던 것이다.”

“……!!”

“평소라면 그 일격을 막아내는 게 버거웠을지도 모르지만 방황하는 칼끝조차 피해내지 못할 정도로 월공투계가 허술하지는 않다.”

방금 전 싸움에서 무량단의 위력이 약했다고?!

하지만 나는 그 충격적인 말에 이내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걸 납득하고 말았다.

‘아수라도 그런 말을 했지.’

나는 무량단의 약점에 대해서 아수라가 했던 말을 기억해 냈다.

[역시. 백웅 너의 필살기인 무량단은 약점이 있어.]

[까놓고 말해서 그건 그냥 강력한 검뢰일 뿐이지.]

[물론 잡스러운 절기보다는 훨씬 강력하지. 그러나 현묘함은 극히 떨어지며, 무엇보다도 아무 생각 없는 무념(無念)이니만큼 네 무량단은 그때그때 성격이 달라진다. 위력이 불안정하니 검로도 단순해질 수밖에 없고 결국 정면승부만 피하면 무량단을 무력화할 방법은 여러가지 생겨버린다.]

아수라는 무량단이 강력하긴 하지만 초식의 특징 때문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즉 무심의 상태에서 펼치므로 그때그때 위력이 다르며, 달리 말하면 내 마음의 방향을 한 갈래만 읽어내면 극히 피하기 쉽다는 뜻이 되어버린다.

여동빈의 말대로 내가 전투에 집중하지 못하고 잡념이 있었다면 당연히 무량단은 같은 절대지경끼리의 싸움에서 약세를 보일 수밖에 없다. 충분히 납득할만한 설명이었다.

그러나 정말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은, 대체 내가 무엇 때문에 마음이 흔들렸다는 것인가?

‘방금 전에는 나름대로 정말 집중했는데…!!’

이번 생에 전생하고 나서 가장 전력을 다해서 집중한 게 이번 싸움이다. 그런데도 여동빈에게 집중하지 못했다는 혹평을 듣자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여동빈에게 항의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나는 최고로 집중했습니다.”

“…….”

여동빈은 한결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대의 실력은 이미 최정상에 이르러있다. 나도 최종오의를 쓰지 않으면 그대와 상대할 자신이 없다.”

나는 뜻밖의 칭찬에 눈이 둥그레졌다. 여동빈이 저렇게 평가할 정도로 내 실력이 나아졌단 말인가? 하지만 잠시 후 여동빈의 말이 약간의 살기를 띈 채 이어졌다.

“허나 절세고수답지 않게 그 검에 쓸데없는 게 너무 많이 매달려있으니, 다시 한 번 그대와 생사결을 벌인다면….”

우드득!!

갑자기 여동빈이 주먹을 세게 쥐었다. 그의 눈빛이 형형하게 빛났다.

“그대는 내게 죽는 게 아니라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 대가로 죽게 되리라.”

느껴진다.

여동빈은 내게 화가 난 게 아니라 내 마음을 다스리라고 준엄하게 질책해준 것이다. 그것은 대가(大家)만이 베풀 수 있는 가르침이었다. 여동빈이 내게 악의가 있었다면 마음에 대한 조언을 해주진 않으리라.

지금의 나는 그것도 못 알아들을 정도의 바보는 아니었기에, 짧게 한숨을 토해낸 후 여동빈에게 포권했다.

“으음!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자 옆에서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이철괴가 당황스러워하며 여동빈에게 말했다.

“여동빈!! 저 자는 이미 주시의 대상이며 대라신선의 회의에서 신장(神將)들을 보내어 체포하자는 얘기까지 나왔었네! 어찌 무예의 가르침을 주는 거지?”

여동빈은 표정변화없이 대꾸했다.

“그건 정황일 뿐 우리가 직접 받은 명령이 아니오. 우리는 구천현녀님의 명령을 받아서 왔을 뿐 다른 정황에 신경 쓸 이유가 없소.”

“모르는 척 하는 건가? 자네만한 자가 [그 분]께서 저 자를 주시한다는 걸 모를 이유가 없을 터.”

“알 바 아니오.”

“…….”

이철괴는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여동빈을 보다가 홱하고 고개를 돌렸다.

“이상한 생각하지 말게. 난 먼저 돌아가겠네.”

후웅

이철괴의 신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쏴아아 -

어느 새 소나기가 내리고 있었다. 나와 여동빈이 겨루던 인적 없는 뒷산의 봉우리 정상에도 비가 내리기 시작해서 쏟아지는 비 사이에서 서로를 마주보게 되었다. 아무래도 내가 아까 전개했던 구궁파천뢰가 천지의 기운을 변화시키는 바람에 갑작스러운 기상이변이 일어난 모양이었다.

여동빈은 소나기 한가운데에서도 비를 한 방울도 맞지 않고 있었다. 그가 지닌 무형의 검기가 저절로 빗방울을 흘리는 것이었다. 자연스러운 의념 자체가 현실을 뒤바꿔버리는 것! 딱히 기막이나 기공을 운용하지 않고도 저게 가능한 존재는 강호에 거의 존재치 않았으며 여동빈같은 절대지경의 고수나 가능한 일이었다. 여동빈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고싶은 말이 있는 듯 하군.”

“신장이 나를 체포하고싶어 한다니, 이래서 내가 천계로 가긴 가겠습니까? 가는 날이 내 제삿날일 것 같은데.”

내가 비아냥거리듯 한탄을 중얼거리자 여동빈이 말했다.

“와 주기를 부탁한다.”

“……?!”

천하의 여동빈이 부탁이라고?!

내가 눈을 크게 뜨자 여동빈은 천천히 등을 돌리며 빗줄기 너머로 사라졌다. 그가 남긴 마지막 한 마디가 귓가에 맴돌았다.

“연자(然者)여.”

반 식경 후 소나기는 그쳤다.

나는 소나기를 다 맞으며 생각에 잠겨있다가 한참 후 기공으로 몸의 물기를 말렸다. 그리고는 좌측 뒤편을 보며 말했다.

“미호. 이제 다 갔으니까 나와도 돼.”

휘리릭

그러자 미호가 공중제비를 돌며 은신해있던 장소에서 튀어나왔다. 뒷산에서 수련하다가 얼떨결에 나와 팔선의 대화를 본 미호는 약간 두려운 눈으로 나를 보더니 말했다.

“천계의 팔선과 대적하다니, 설마 천계와 싸우실 생각이십니까?”

“아니. 내가 미쳤어? 천계랑 싸워서 뭐가 남는데.”

“그러시면 천계로는 안 가실건가 보군요.”

“그건 모르겠어.”

“네?! 가시면 무조건 함정이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내 말에 미호가 기겁을 했지만 나는 하늘을 보며 침묵했다.

지금 천계에 가고 말고는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고, 진짜 내 마음을 어지럽히는 건 따로 있었다.

“…….”

마음이라.

전투에서 평정심은 충분히 갖추고 있는 것 같은데, 여동빈 정도 되는 고수만이 느낄 수 있는 영역이 따로 있는 것 같았다. 하수를 상대로는 느낄 수 없지만 절대고수들은 내 마음이 무뎌지면서 칼끝도 무뎌졌음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쉰다고 말해놓고 번잡스럽게 일만 열심히 할 때부터 느꼈던 거지만, 어느새 그 번잡함이 무예의 마음조차도 삭게 만들고 있었던 것인가?

정말로 내가 원하는 게 뭐지?

‘한 명이라도 흑요석 동료가 곁에 있을 땐 마음 그 자체에 대해 생각해볼 일도 거의 없었는데.’

아무도 곁에 없으니 자연히 나 스스로의 마음에 집중하게 되는 것인가.

나는 곰곰이 생각을 하다가 미호에게 말했다.

“나, 며칠간 뒷산의 동굴에서 수행 좀 할게. 그리고 너한테 부탁할 게 있어.”

“어떤 부탁이십니까?”

“그건….”

나는 미호에게 부탁을 해놓고는 뒷산의 동굴에 들어가서 무작정 가부좌를 틀고 명상만 반복했다. 먹지도 자지도 않고 ‘나’는 무엇인가에 대해서만 죽자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뭔가 시원하게 나아지는 게 없었다.

그렇게 약 사흘이 지났을까?

동굴의 입구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전적인 수련법이군. 아니, 그만큼 네가 번민에 휩싸였다는 뜻인가?”

“…….”

그는 풀썩 하고 내 앞에 마주 앉았다.

“흐음. 일전에 시바가 움직인 걸 미리 알려주지 못해서 미안하게 됐다. 하지만 신이 화신처럼 빙의체를 조작해서 멋대로 움직이는 것까지 내가 알기는 힘들었지.”

“그런 건 됐어.”

“아주 고민이 가득한 표정인 걸 보니 또 다른 일이 터졌나보지? 여우를 시켜서 내가 마을에 돌아오자마자 여기로 보내라고 한 걸 보면.”

나는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어볼 게 있어서.”

“뭐를?”

나는 소심하게 중얼거렸다.

“개소리라고 비웃지 마.”

그는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멀뚱하게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비웃지 않아. 적어도 무(武)에 관한 거라면.”

“…….”

나는 지난 사흘 동안 내내 고민했지만 답을 내지 못했던 문제를 아수라에게 질문했다.

“아수라. 무인은 마음(心)이 없어도 의념을 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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