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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나는 무사시를 첩자로 쓰면 좋을거라 생각하면서 어떤 식으로 영입할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흠. 전력을 다하면 어려울 게 없는 상대야. 이미 난 무사시한테 한 번 이겼으니까….’
물론 유쾌한 승리가 아닌 목숨을 건 신승(辛勝)이었지만 이제와서 알게 뭔가. 나는 한 번만 이겼으면 그만인 것이고, 그 이후로 내 실력은 계속 상승해왔으니 이제 무력 이외의 수단까지 쓴다면 무사시 하나 상대하는 건 그렇게까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무사시는 힘을 추종하는 놈이니 일단 한 번 꺾어놓기만 하면 내 말을 들어줄 확률이 높다.
‘애초에 십이율주에게 꺾이고 나서 억지로 특위로 일하고 있는 놈이니, 같은 방식으로 놈을 무릎 꿇리면 내 말 또한 들어주겠지.’
예전처럼 장기전을 유도하면서 무량단과 무쌍패로 상대하면 수월하게 이길 수도 있다.
정말 문제는 놈이 현재 있는 장소였다. 나는 침음성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무사시놈, 팔부신중이 활보하면서 감시하는 곳에서 잘도 은신하면서 버티고 있군.”
그렇다.
예전과는 달리 현재 황궁은 제갈일족과 손을 잡은 팔부신중의 본거지나 다름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명목상으로나마 황제인 주후총이 실종되어있을 정도니 이미 마굴일 것이고 그런 곳에서 무사시 하나 영입하자고 죽기살기로 싸우면 팔부신중한테 뒤통수맞거나 다구리맞을 게 뻔하다. 싸우기에는 최악의 장소다.
그렇다면 무사시를 끌어내어서 싸우자고 해야한다.
‘방금 전에 무사시를 발견했다가 다시 은신했으니 처음부터 다시 찾아야하지만….’
그러나 문제는 내가 무사시가 황궁 내에서 어디에 은신해있는지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무사시가 공간을 의념천주로 베어서 숨는 기법은 그만의 고유한 기술이었고 그 어떠한 방법으로도 감지를 할 수 없었다. 정탐을 위해 만들어진 상급마도구로도 힘들 정도이며 과거에도 무예경지가 극도로 높아진 백련교주가 감으로 겨우 발견할 정도였다.
그렇다고 어설픈 방법으로 무사시를 끌어내기는 힘들다. 저 놈은 십이율주에게 반발심이 있으나 어쨌든 맡은 일은 열심히 하는 성격이었으므로 특위 일을 성실히 하고 있다. 저 마굴에서 어떻게든 버티며 팔부신중의 정보를 십이율주에게 주고 있는 상황에서 무사시 또한 목숨을 걸고 있을 게 뻔하므로, 그런 절박한 놈을 어설픈 미끼로 꼬셔내는 건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야차가 황궁에 쳐놨을 주술결계나 제갈유룡, 제갈부가 펼쳐둔 팔진도를 통과하는 문제도 있긴 하지….’
…생각해보니 무척 어려운 일이잖아?!
나는 방금 전까지 첩자로 적격인 놈을 찾았다는 기쁨이 순식간에 사그라드는 걸 느꼈다.
‘으윽. 이럴 때 흑요석 받은 책사가 하나있으면 바로 방법을 알려줄 텐데…. 망량한테도 의논할 수 있겠지만 이번 일은 제갈일족이 직접 연관되어 있는 일이야. 상담하는 것 자체가 망량을 끌어들이게 돼….’
나는 의존하는 마음이 생기는 걸 겨우 참았다. 이런 유혹이 생긴다고 흑요석을 쓰지 않는다는 방침을 바꾼다면 그때부터는 빼도박도 못하고 세상의 혼돈을 정면으로 헤쳐나가야 한다. 지금도 꽤 많이 관여하긴 했지만 아슬아슬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더 이상은 무리였다.
나는 머리터지도록 생각하다가 문득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쉰다고 해놓고 또 열심히 일하고 있군…. 제길… 하지만 뭐라도 해야 후회가 없을 것 같으니.”
이것도 미래세계의 단어로 하자면 강박관념이라는 건가?
‘모르겠다. 무사시 놈이야 언제 됐든 만나면 패주고 끌어들이면 되겠지…. 급하게 생각하지 말자.’
지금 내게 진짜 중요한 일은 내게 모여든 소을촌 사람들의 힘을 키워주고 나아가서는 내 편안한 삶의 주축이 되게끔 만드는 것이다. 촌장으로서 해야 할 일도 많이 남아있으니 너무 커다란 일은 나중에 생각하자.
“그럼 오늘도 열심히 일해… 아니 놀아 볼까!!”
나는 평소 하던 대로 무예지도와 전수를 반복했다. 그리고 이번에 천축 시바의 천축무림침공을 막은 게 컸던 모양인지 그로부터 약 두 달 반 정도는 아무런 소식도 없이 평범한 소을촌의 나날이 지나갔다.
그 기간동안 사공린, 극호, 살수조장 등의 무공이 급증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수련을 막 시작했을 때는 티가 나지 않았지만 점차 체계가 잡히고 내가 가진 상위의 무공과 요령을 전수하다보니 원래부터 천재였던 자들이 빠르게 힘을 얻어가는 것이다. 이 정도 속도라면 일 년 후에는 괄목할만한 성장이 있을 게 분명했다.
방일 또한 처음에 비하면 많이 나아졌다. 이제 이류무사라고 부르기엔 확연히 무공의 토양이 달라졌으며 몇 년 더 갈고닦게 하면 안정적으로 일류의 경지에 올라설 수 있으리라.
현천도인도 칠대절학의 기본요결 전수는 이미 끝마쳤고 그에게 처음부터 수련을 시키고 있었는데 조만간 기초를 다 몸에 붙이고 나면 현천도인 그 자신의 무공 또한 크게 발전할 거라는 게 느껴졌다.
‘…진소청은… 모르겠구만….’
문제는 진소청이었다. 나는 진소청에게 구궁파천뢰를 가르치는 중이었는데 이 녀석은 처음 전수받은 날부터 뇌령을 계속 회전시키고만 있을 뿐 별다른 상위의 가르침을 더 이상 요구하지 않았다. 구궁파천뢰의 위력을 분명 체감하고 있을 테니 초조해할 만도 한데 아무 말 없이 기초만 미친듯이 파고들고 있으니 도리어 내가 진소청에게 잘되고 있냐고 물어보고 있었다.
“이혼대법의 요령을 모르면 기초범위의 회전 말고는 못 하게 될거고 계속 몸이 아플거다. 진도가 빨리 나가려면 내게서 이혼대법을 배우는 게 좋지 않겠냐?”
그러자 진소청은 뇌령 회전만 반복하다가 내 말에 대답했었다.
“말씀하시는 게 어떤 분야의 요령인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급할 게 없으니 스스로 그 요령을 터득하여 진리를 더듬어볼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응?! 그게 말이 돼? 이혼대법은 그냥 요령이 아니라 최강의 사파마공 중 하나인데….”
“쓰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요. 태사부께서는 선하게 쓰실 테니 저도 앞으로 그리하겠습니다.”
“…….”
그 이후 진소청은 정말로 내게 이혼대법을 전혀 요구하지 않았다. 물론 진소청의 수련속도를 제어하고 싶은 욕심에 안 가르쳐주거나 질질 끌려고 하긴 했지만 너무 담백하게 이혼대법 요령을 포기해버려서 내가 뻘쭘할 지경이었다. 나는 그러면서도 내심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래…. 아무리 진소청이라도…. 아무런 가르침이나 요령이나 요결도 없이 무(無)에서 어떻게 혼백을 다루는 걸 알아채겠어!’
그게 되면 지금껏 뼈를 깎는 노력으로 이혼대법을 익힌 역대 중원의 배교교주들은 다 뭐가 돼?
진소청이 구궁파천뢰를 제대로 터득하는 건 좀 시간이 걸릴 게 분명하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두 달 반이 지났을 때 또다른 이변이 발생했다.
“소을촌의 촌장 백웅이 바로 자네인가?”
“…….”
“허허…. 촌장네 집에서 차나 한 잔 얻어마시러 왔건만 무서운 얼굴이군. 설마 내가 누군지 알고 있는 것인가.”
나는 허허로운 눈빛의 갈색 옷의 노인을 다소 긴장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차분하게 말했다.
“고명하신 팔선(八仙) 이철괴(李鐵拐) 선배께서 인간으로 변신술까지 쓰며 하계의 조그마한 마을에 들르신 이유를 모르겠습니다만….”
그렇다.
상대는 나를 모르겠지만 나는 이미 그를 전생하며 수차례 마주친 적이 있는 것이다.
‘젠장…. 인간으로 변신했어도 신선때 얼굴과 하나도 안 달라졌잖아.’
도가인물의 도움을 받아서 이철괴의 정신체가 인간에게 빙의한 후 그의 몸을 변신술로 조종하고 있거나, 그게 아니면 뭔가 큰 대가를 바치고 그가 임시로 인간세상에 육체를 얻은 것이리라. 물론 후자의 경우는 중대한 대사가 있을 경우에만 가능한 일이니 전자가 좀 더 가능성이 있다.
팔선 이철괴!
그는 도가의 전설적인 차시환혼(借屍還魂) 술수의 종사(宗師)였으며 팔선 중에서도 연배가 무척 높은 편이었다. 과거 여동빈의 기억을 들었을 때 종리권조차도 이철괴 앞에서 대선배라서 쪽도 못쓸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이철괴의 술수역량은 팔선 중에서도 단연 우수했으며 그는 공격능력이 특히 비범한 팔선이라고 들은 적이 있었다.
어째서 팔선 이철괴가 우리 마을에 찾아왔단 말인가?
그러자 이철괴는 흐음, 하고 자신의 턱을 쓰다듬더니 말했다.
“과연 듣던대로 백웅 촌장은 대단한 기인(奇人)이군. 세상이 넓다하나 나를 보자마자 일견(一見)에 이철괴임을 알아낼 수 있는 자는 무척 드물 것이야. 도가의 지선(地仙)들도 어림없는 일인데 어떻게 알아챈 것인가? 세간의 초상화와 내 진짜 얼굴은 무척 다를 텐데.”
나는 침착하게 말했다.
“대답할 이유는 없소. 팔선쯤 되는 대라신선이 허투루 찾아올 리 없을 터, 만일 소을촌의 평화와 안정에 누를 끼친다면 나 백웅은 좌시하지 않겠소.”
천계를 상대로 처음부터 굽히고 들어가봤자 그다지 의미 없다. 예전부터 겪었던 바로는 그럴수록 더 오만해지거나 인간을 깔보게 마련이다. 그 사실은 남화노선이나 팔선 조국구 때 질릴 정도로 느꼈다. 차라리 처음부터 쎄게 나가는 게 옳으리라.
“…….”
이철괴는 묘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자신의 갈의(褐衣)의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말했다.
“너무 날세우지 말게. 나는 대라신선이니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 않네. 정말 인간이라면 말이지….”
“나와 싸우려 온 건지 아닌 건지 확실히 하시오.”
“허허!! 재밌는 친구군. 초조함도 느껴지는데 어째서지?”
우득
내가 주먹을 세게 움켜쥐자 이철괴가 그 기세를 느꼈는지 움찔했다. 그러더니 약간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다시 말하지만 날세우지 말게. 싸우려 온 게 아니니.”
“용건은 무엇이오?”
“선검술(仙劍術)!”
“……!!”
나는 표정관리를 하려 했지만 이철괴는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천계에 와서 그대가 선검술을 익히게 된 경위를 소명해줄 수 있겠나? 그 권유를 하기 위하여 나 이철괴가 오늘 소을촌에서 차라도 마시며 느긋하게 얘기하려 했네만.”
“…….”
이런 젠장할… 그걸 깜박하고 있었구나.
‘선검술은 구천현녀의 권능을 쓰는 것…. 저번에 선검술에 걸려있던 제약을 풀긴 했지만 그 사실이 변하는 건 아니었어! 당연히 이번 생에 선검을 썼을 때 구천현녀한테 신호가 가게 되어있었는데….’
그 순간 나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이번 생에 선검술을 처음으로 썼던 건 지금부터 치면 상당히 과거의 일이었다. 최소한 석달 전의 일일 텐데 이제서야 찾아온 이유가 뭐란 말인가?
‘저번에 그 난리를 피웠을 때는 선검술 쓰려하자마자 몸이 아팠고 천우진한테서 그게 구천현녀의 견제란 말을 들었었지. 당연히 이번에도 그렇게 반응할 수 있었을 텐데 여태껏 가만히 있다가 이제야…?’
나는 이 상황이 뭔가 이상함을 깨닫고는 잠시 말을 아꼈다. 이럴 때 섣불리 말을 하면 약점만 더하는 행위라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철괴의 말대로 지금 공격적인 언행을 계속하는 건 그리 좋지 않으리라는 걸 깨달았다.
‘이철괴는… 그냥 구천현녀의 사자일 뿐이다. 별다른 의도가 있어보이진 않아.’
하지만 그것도 약간은 캐물어볼 필요가 있으리라. 나는 짐짓 수상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냥 지선에게 명령을 내려서 전해도 될 터인데 굳이 당신정도 되는 대라신선이 혼자서 우리 마을을 찾아오신 이유가…?”
“허허. 사실 혼자서 온 게 아니라네.”
“뭐라고?”
“저 친구가 인간세상은 간만이라서인지 부끄러움이 많군. 이제 슬슬 나와보게.”
그 때였다. 오색구름이 뭉치면서 맑은 빛이 허공에 퍼져나왔고, 그 빛을 향해서 허공에서 하나의 신형이 쏜살같이 날아오는 게 보였다. 보통 고수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어마어마한 속도였지만 지금 내 눈에는 분명히 그게 어검(御劍)이며 비행술(飛行術)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파바밧
영롱한 오색구름을 헤치듯이 땅에 내려앉은 것은 고색창연한 기상을 지닌 한 백의의 신선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를 보는 순간 이마에서 땀이 배여 나오는 느낌이 들었고 그럴 이유는 없는데도 나도 모르게 긴장해버리고 말았다.
어검비행술의 착지와 동시에 그 신선이 대지에 발을 내딛자 나는 나도 모르게 외쳤다.
“검선 여동빈…!!”
틀림없이 여동빈이다!!
이번 생에 단말을 이용해서 그를 부른 적이 한 번도 없었기에 거의 신경쓰지 않았는데 이렇게 실체가 되어 내 앞에 이철괴와 함께 올 줄이야!!
그러자 여동빈은 한 줌의 흐트러짐도 없는 냉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여동빈 또한 이철괴처럼 인간의 몸을 빌린 게 분명해보였다.
“선검술 사용자여. 구천현녀님께 함께 가자.”
“…….”
내가 침묵하자 도리어 옆에 있던 이철괴가 찔끔하고 놀라는 기색이었다.
“이 친구야! 그걸 처음부터 다 말해버리면 어떡하나. 놈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살살 긁어내야 하는데.”
“의미없소. 저 자의 눈빛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으며 각오한 자의 눈빛. 우리는 그저 천계의 사신일 뿐이니 주어진 일에만 충실하면 되오.”
“끄응.”
배분으로 치면 여동빈보다 이철괴가 아득히 위일 것이다. 여동빈이 어린아이시절에 이미 원숙한 도인이던 종리권이 이철괴에게 대선배라고 불렀으니 당연하리라. 그러나 이철괴는 종리권에게 호통치던 때와는 달리 여동빈의 단호한 말에는 뭐라고 하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아마도 여동빈이 팔선 필두이므로 겉으로 보이는 배분 이상의 무게감이 있는 게 분명했다.
여동빈이 지긋이 나를 바라보자 나는 침착하게 말했다.
“너무 갑작스러운 이야기요. 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오.”
“그런가? 언제까지.”
“…적어도 한 달은.”
“한 달 후에 찾아오겠다.”
우와 깔끔한 걸?
나는 냉큼 그 제안에 동의했다.
“좋소!”
그러자 이철괴가 속 터지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으으… 여동빈 이놈….”
이철괴 입장에서는 나랑 심리전하며 정보 캐낼 생각이었는데 여동빈이 멋대로 뛰어들어 이야기를 마무리지어버렸으니 기가 막히리라. 그것도 여동빈이 심리전이나 계교를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라서 더 따지기도 뭣하리라.
‘휴우. 차라리 이런 게 낫군….’
이철괴보다 여동빈이 훨씬 얘기하기 편하다고 느끼며 안도의 한숨을 쉴 때였다.
“아직 이야기는 안 끝났다.”
“네?”
우웅
나도 모르게 버릇처럼 존댓말을 쓰자, 갑자기 여동빈이 선검을 소환해서 내게 겨누는 게 보였다.
“나 여동빈은 구천현녀님께 별개의 임무를 신청하여 승락을 받아내었다.”
내가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자, 여동빈이 아무런 감정없는 눈빛으로 말했다.
“그대가 얼마나 선검을 사용할 수 있는지를 검증해 오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