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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나는 그 날부터 약간은 설렁설렁 살기로 마음먹었다. 왜냐하면 사공린의 조언이 와 닿았기 때문이었다.
“마음의 여유가 없으면 조급해져서 큰일을 그르치지 않겠습니까?”
확실히 단순한 수련의 반복에서는 큰 문제가 없지만 정신적 여유가 떨어질수록 생각할 여유도 사라져서 나중엔 실수를 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 날 소풍을 재밌게 즐긴 후에는 하루에서 꼭 두 시진을 따로 떼어서 일부러 잠을 자기로 했다. 굳이 잠을 잘 필요는 없었지만 그래도 의식적으로 쉬는 게 중요할 것 같았다.
‘뭐…. 두 시진동안 명상으로 수련해도 되고.’
그리고 나는 며칠간 널럴하게 사는데 익숙해지려다가 뭔가를 깨달았다.
“아…? 잠깐…. 뭔가 중요한 걸 잊고 있었는데.”
당장 눈앞에 산재해 있는 재앙뿐만 아니라 중대한 삶의 과제가 있지 않았던가? 하도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깜박하고 있었던 게 있다는 걸 나는 깨달았다. 나는 그게 떠오를락 말락해서 전전긍긍해하며 정신을 집중했지만 묘하게도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퍼억
“커헉.”
그리고 별 이유 없이 살수조장에게 무공을 가르쳐준다는 명목으로 명치를 때리고 있을 때 문득 깨달을 수 있었다.
“아! 호월!!”
그렇다!
[백웅…. 만일에 다음 생이 있다면, 반드시 호월 교주를 찾아내어야 한다. 그 자가 모든 운명의 단초를 쥐고 있다.]
28번째 삶의 막바지에서 [옥좌] 앞에서 파수병이 되어있던 백련교주!
그가 내게 황제 공손헌원에게 대항할 수 있는 선검의 비예(秘藝)를 전수해주고 나서 당부했던 말이 바로 호월을 찾으라는 말이었다!
나는 황망해져서 주먹을 꾹 쥐고 당황스러워했다.
“내가 왜 지금까지 이걸….”
어찌보면 다른 모든 것보다 우선일 수도 있는 과제였는데 여태껏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당황스럽기까지 했지만 이윽고 어째서 여태껏 떠올리지 못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28번째 삶에서 황제와 맞부딪힌 경험이 워낙에 강렬해서 다른 걸 잊을 정도였고, 29번째 삶은 갑작스러운 마력의 부작용 때문에 너무 휘둘리며 살았으며, 30번째 삶은 너무 시달린 끝에 탈력이 와 버렸던 것이다. 머릿속 한켠에는 이 과제가 남아있었으되 그걸 진행할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이리라.
이제서야 마음의 여유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었다. 침착하게 생각을 가라앉히는 시간을 일부러라도 갖게 되니 마치 잊었던 걸 되살려내는 느낌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명치를 맞고 바닥을 구르고 있던 살수조장에게 말했다.
“좋아. 지금 해야 할 일이 생각났으니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다!”
나를 2번이나 목을 베어 죽인 놈이라서 10년 정도는 매일 개패듯이 패려 했지만 이젠 좀 살살 패볼까!
“커헉…. 자, 잠시….”
“응?”
“저, 저에게도… 진짜 상승무공을 배울 기회를 주십시오…. 이런… 식으로는… 절대 무공이 늘지 않습니다….”
비틀거리며 일어난 살수조장이 독기어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렇게 하면… 제대로 연습상대가… 되어드릴 자신이 있습니다….”
“…….”
나는 묘한 눈으로 살수조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놈을 향해 쏘아붙이려 했다.
“매일 처맞아도 모자랄 놈이 어디서 감히….”
이 새끼야! 난 너한테 2번이나 죽었어!
아직 덜 갚아줬거든!
다시 달려들어서 살수조장의 명치를 때리려던 그 순간.
멈칫
나는 얼마 전 금만재가 내게 덤벼들었던 게 기억이 났다. 그 습격이 전혀 내게 위협적이지는 않았지만, 중요한 건 금만재를 놔준 직후에 느꼈던 감정이었다.
관심이 사라지자 금만재를 향한 모든 분노와 원망의 감정이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그것은 내게 통쾌함을 주기 보다는 허망함을 주었고, 동시에 공허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그 공허감은 왜인지 모르게 나를 두렵게 만들었다.
두려움?
“…….”
나는 다른 것도 아니고 나 자신의 문제에서는 솔직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그 사실이 못내 껄끄러웠다. 나와 원한을 진 자에게 고스란히 갚아줘야 한다는 신념이 있는데도 이 사실만 떠올리면 주춤거리게 될 정도였다.
어째서지?
나는 뭐가 두려운 거지?
그리고 나는 번민하다가 이윽고 살기를 거둬들였다.
‘쳇…. 돌려서 말하는 건 성미에 맞지 않아.’
그냥 솔직하게 이 자리에서 풀어버리자!
나는 주먹을 풀며 차분하게 살수조장에게 말했다.
“솔직히 말하마. 내가 너에게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아느냐?”
“잘… 모릅니다.”
“많은 이들이 보는 앞에서 비참하게 2번 죽이는 것이다. 그래야 계산이 맞으니까.”
2번 다 그러했다.
어쩌다보니 그런 상황이었지만, 사실 목을 베이는 고통보다는 무사로서 그게 더 비참한 일이었다. 자존심이 상했던 울분이 더 심했던 것이다. 살수조장을 절대 쉽사리 용서해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
약간 놀란 듯 살수조장이 날 바라보았다. 나는 무표정하게 놈을 바라보며 말했다.
“넌 황당하겠지. 일면식도 없는 놈이 네게 이토록 원한이 많으니까. 하지만 나는 진심이야.”
“…제… 청부대상 중에… 촌장님의 혈육이라도 있었습니까?”
“아니. 남을 위한 복수가 아니야. 바로 나 자신을 위한 복수지.”
“믿기지 않습니다…. 저는 촌장님 같은 절대고수를 태어나서 처음 봅니다…. 그 정도의 원한을 진 기억이….”
“…….”
나는 침묵하다가 말했다.
“나는 네놈이 청부살인을 하는 쓰레기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원한은 없고 의뢰니까 했을 뿐이라는 건 참작해줄 수도 있지. 그러니까 네 말대로 기회를 주도록 하겠다.”
“그 말씀은….”
나는 팔짱을 끼며 불편한 눈빛으로 살수조장을 노려보았다.
“지금부터는 네놈을 제대로 키워주도록 하지. 그리고 그 대신에 내가 명령하는 살행(殺行)을 두 번 실행해서 성공한다면, 네놈을 용서해 주겠다. 소을촌을 위해서 공을 세운 것으로 네놈을 향한 내 원한을 퉁쳐주겠다는 말이다.”
이제 와서 흑요석까지 주면서 살수조장을 죽이는 것도 너무 쪼잔하다. 그냥 이런 식으로 놈과의 은원을 해결해버리는 게 낫겠다.
“……!!”
“대신 그 살행은 무척이나 어려울 거라고 말해두지.”
살수조장의 눈에 빛이 번쩍거렸다. 자기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라는 걸 깨달은 게 분명했다. 그는 급히 부복하며 외쳤다.
“하겠습니다! 시켜만 주십시오.”
“아무리 불가능해보여도 하겠느냐?”
“물론입니다!!”
“좋다. 오늘부터는 수련장에 나와라. 다른 뇌신류 고수들과 함께 배우는 거다.”
“감사합니다!”
나는 히죽하고 웃었다.
‘저 놈이 내 명령을 수행하다가 죽으면 그것도 나름 복수가 되는 거겠지….’
나는 살수조장의 실력으로는 절대 해낼 수 없을 청부대상을 나중에 정해줄 생각이었다. 어찌되었든 소을촌에 원한을 가진 놈들이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수 있으니 그런 놈들 중에 특히 강대한 놈을 하나 지정하면 되리라. 살수조장의 지금 실력으로 못 죽이는 놈은 강호에 천지로 널려 있다.
나는 그 날 살수조장에게 제대로 된 무공대련을 해준 후 한숨을 쉬었다.
‘…후우. 제길. 왜 물러지는 건지 모르겠구만.’
원래 내 성격이라면 이렇게 관대해질 리가 없다.
당연히 살수조장을 10년 내내 패다가 나중엔 개처럼 죽일 생각이었는데 설마 무공을 가르쳐주게 될 줄이야.
살수조장한테 당연한 복수를 하려는 것뿐인데 ‘두려움’이 왜 느껴지는 걸까? 나는 이게 왠지 중요한 것 같았지만 내 마음이 변화하는 기제가 무엇인지를 잘 알 수가 없었다. 이런 점에서는 아직도 내 마음수양이 많이 부족하다는 게 실감이 났다.
그리고 나는 다음 날 호월의 단서를 찾으려고 망량에게 내가 가진 호월에 대한 정보를 일단 공유했다. 백련교의 비사(秘事), 사대신기와 호월 등에 대한 내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들은 망량은 크게 놀란 듯 말했다.
“엄청나군…. 백련교가 소림사보다 오래된 종교라는 건 대충 문헌에서 짐작했소만 설마 그토록 규모가 큰 비사가 있었을 줄이야!”
“아무튼 나는 그런 탓에 백련교 사대무류의 창시자인 호월을 찾아야만 하오. 말했던 대로 그는 어느 순간 실종되었소.”
“흐음….”
“나는 본디 설렁설렁 살려고 했지만 얼마 전에 포부도 따로 하나 생겼고, 강호행을 하면서 조금이라도 호월의 단서를 찾아볼 생각이오.”
“잠깐 기다려 보시오.”
잠시 머리를 굴리던 망량이 입을 열었다.
“호월이 여태껏 살아있다면 그는 천 살이 넘은 존재. 아무리 무공의 달인이라도 천 살을 살 수 있는 거요?”
“사실 반로환동으로도 천 년은 좀 무리오만, 호월은 홀로 마왕급 존재인 팔부신중의 합공을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특별한 존재였소. 또한 용인(龍人)처럼 변할 수 있었으니 사실상 그 정도의 강자라면 세월은 크게 의미 있지 않으리라 생각하오.”
“오오….”
“아마 지금의 나보다 훨씬 강할지도 모르지.”
“그렇구려. 당신같은 초인이 말하는 거라면 그렇겠군. 흐흠…. 무림의 세계도 초월자의 영역으로 가게 되면 어마어마하군.”
망량은 오싹하다는 듯 잠시 몸을 떨다가 부채로 자신의 손바닥을 탁 치며 말했다.
“당신의 말대로라면 호월을 찾기에 앞서서 성진이라는 자와 먼저 동맹을 맺는 게 낫겠소.”
“응? 성진?”
“그렇소. 아유타 공주라는 자는 모르겠지만 당신의 말대로라면 성진 또한 술법의 힘으로 아직 이 시대에 살아있지 않소? 그 자는 호월의 사제이니 당연히 당신에게 협력해줄 거요.”
“그게….”
나는 망량에게 성진의 배경설명을 해 줬다. 그러자 망량은 도리어 재밌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차피 지금 소을촌은 알게 모르게 백련교의 감시를 받고 있을 것이오. 백련교가 바보가 아니라면 성주에게까지 인정을 받고 몇 년 사이에 수십 배나 확장된 이 소을촌을 주시하지 않을 리가 없소. 좋든 싫든 조만간 백련교와는 부딪히게 될 터.”
“그 말은….”
“성진이란 자는 지금 백련교주에게도 자기 정체를 숨기고 은둔하는 듯 한데 잘만 하면 그를 이용해서 백련교주의 지배력을 약화시킬 수도 있지 않겠소? 그는 말하자면 백련교 내부의 오래 묵은 반골세력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흠!”
“덤으로 호월을 같이 찾자고 하면 성진이 동맹을 반대할 이유는 없으리라 생각하오. 그리고 성진의 지배하에 있는 귀혼일파와 녹월 또한 당신의 부하가 될 것이니 일석이조요.”
“그렇겠군…!! 알겠소.”
나는 곧장 예전에 녹월의 인도에 따라 갔었던 성진의 은거지로 날아갔다.
‘저기였지.’
그리고 안개가 가득한 심산유곡 속의 동굴 앞에서 화안금정으로 결계를 감지한 후 검뢰를 이용해서 일격에 베어버렸다.
촤아앗
내가 검뢰로 결계를 베고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 나를 가로막듯 안개로 만들어진 흐릿한 분신이 출현해서는 술법으로 말을 걸어왔다.
[검뢰인가…. 그것도 술법을 벨 수 있다니 너는 강력한 동술을 갖고 있군…. 정체가 무엇이냐?]
나는 상대에게 말했다.
“달마대사의 제자인 성진이여! 나는 뇌신류의 종사인 백웅이다. 네게 호월을 같이 찾자고 말하러 왔다.”
[……!!]
성진은 크게 놀란 듯 그 자리에 굳었다. 그러더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넌 대체…? 호월 사형을 찾으려는 이유가 뭐지?]
나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나는 알고 있다. 성진 네가 진공가향 당시에 그 자리에 있었고, 호월을 도와서 초기 백련교 사대무류를 세우는 데 공헌했다는 사실을. 그리고 이후 뇌신류를 장악하려다가 뇌신류 종사 주능통한테 개발려서 찌그러져 있다는 것도. 지금은 귀혼일파의 수장이지?”
성진의 분신이 무척이나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
“너와 난 아직까지 일면식도 없다. 그러나 난 너에 대한 걸 거의 다 알고 있다. 너는 내가 어떤 존재라고 생각하느냐!”
내가 일갈하자 성진은 뭔가를 깨달은 듯 했다.
[서… 설마 너는… 전생자(轉生者)?!]
나는 훗하고 웃었다.
“흑요석을 줄 필요가 없어서 편하군. 전대 전생자의 제자라는 건.”
[그럴 수가…. 설마 이 시대에 새로운 전생자가 출현할 줄이야.]
“지금 내 목표는 호월을 찾는 것이다. 너와도 목적이 일치하니 도와줄 수 있겠나?”
[아니…. 맨입으로는 믿을 수가 없다. 네가 나를 현혹시키려 온 [옛 지배자]의 사도일 가능성도 있다.]
“쯧…. 의심이 많군.”
[정말 전생자라면 하나만 더 말해 다오. [옛 지배자]를 토벌하고 우리 백련교를 떠받칠 궁극의 버팀목이 무엇인가?]
나는 성진의 말뜻이 무엇인지 알아채고는 곧장 눈을 감고 집중해서 사대신기 바루나를 소환해서 꺼냈다.
“사대신기 말하는 거냐?”
[……!!!]
슈아악
그 순간 성진이 분신으로 본체를 옮겨와서 내 눈앞에 나타났다. 그리고는 감격으로 떨리는 외침을 내질렀다.
“이, 이, 이럴 수가!! 그것은 물의 신기 바루나! 그대가 사대신기를 이미 이 세계로 가져왔던 것인가!”
“그래! 외차원까지 가서 가져왔지. 이래도 안 믿을래?”
“아니…. 믿겠다. 그대야말로 백련교의 정통한 후계자이며 전생자이다!”
풀썩
성진이 갑자기 무릎을 꿇자 나는 당황했다.
“아니 무릎까지 꿇을 필요는 없는데.”
“그대에게 모든 도움을 아끼지 않겠다. 뭐든 말만 하라.”
나는 성진을 일으켜 세우고는 말했다.
“대충 당신의 모든 사정은 알고 있으니까 구구절절 신세한탄할 필요는 없어. 그저 방금 말했던 대로 호월을 찾는 것만 도와주면 돼.”
“그것은 사실 나도 천 년 동안 줄곧 해왔던 일이다. 하지만 중원 방방곳곳을 돌아다녀도 호월 사형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겠지. 500년 후까지 대웅제국이 전력을 다했는데도 못 찾았으니까.”
“응? 무슨 말인가?”
“…….”
전뇌자를 통해 머리에 입력된 대웅제국의 자료. 거기에는 성진을 포함한 전생동료들이 대웅제국이라는 초거대제국의 힘을 빌려서 호월의 행적을 찾았는데도 찾지 못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었다.
내가 그 사실을 성진에게 이야기해주자 그의 표정이 좋지 않게 변했다.
“으음…. 그대가 한껏 끌어 모은 유능한 동료들이 초거대 제국의 힘을 빌려서 500년이나 전세계를 찾았는데도 호월 사형이 없었단 말인가…. 이런 미친….”
“그래. 그래서 사실 당장 찾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진 않아. 이건 내 전생여정 중에도 굉장히 어려운 과제일 거라 생각해. 그래도 시도는 해 봐야지.”
“…….”
성진이 잠시 후 말했다.
“현재와 미래를 뒤져서 없었다면 과거를 뒤지는 수밖에 없을 거라 생각하네.”
“응? 무슨 말이야?”
이윽고 성진이 자기 스스로도 자신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가우리(高句麗)의 을지문덕(乙支文德). 내가 황우(黃牛)의 행적을 찾아다니다가 유일하게 찾아낸 단서이지만…. 크게 기대는 하지 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