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검신-1283화 (1,280/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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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나는 그 직후 생제르맹에게 질문했다.

“방금 어떻게 한 거요? 놈의 [이름]을 바꾸는 것만으로 죽일 수 있는 건가?”

“그렇소.”

생제르맹이 차분하게 대답해 주었다.

“[이름]이 귀속된 존재는 결국 종주에 의해 이름이 변경될 수 있다는 뜻. 저항할 방법이 없진 않으나 일반적으로는 따를 수밖에 없소. 그리고 [이름]이 바뀌면 본질 또한 바뀌는 게 당연한 일.”

“흠…. 이름을 프랑켄슈타인의 심장이라고 바꿨는데 놈은 가죽이 분리되며 죽었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

생제르맹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내가 따로 만드는 연금술의 역작이 존재하는데 그 이름이 바로 프랑켄슈타인. 그건 혼합변종(Chimäre)으로서 내가 호문클루스의 실패를 딛고 새롭게 연구 중이던 놈이었소. 나는 기존의 실패작을 프랑켄슈타인의 심장으로 만들어 부품으로 쓴 것이오.”

“응? 그것도 호문클루스같은 건가?”

“…아니오. 완전히 다른 계통. 다른 의미에서 영생(永生)과 강력한 힘을 추구한 결과물이오. 인간을 근본으로 해서는 한계가 있다고 느껴서…. 애초에 제물용이 아니오.”

“제물용이 아니라면?”

“전투용… 이지.”

그렇게 말한 생제르맹은 약간 말을 돌리려는 것 같았다.

“음. 아무튼 [이름]의 활용법에 관심이 많은 것 같구려. 내가 아는 한에서는 알려주겠소.”

“오! 그거 잘 됐군. 이거 보시오.”

나는 스윽 하고 내 팔뚝을 보여주었고, 생제르맹은 어리둥절해하며 보다가 말했다.

“흠…. 육안으로는 잘 해독이 안 되는군. 마안(魔眼)을 써야겠어.”

“마안? 마법이오?”

“연금술사와 드루이드가 공유하는 전통마술에 가깝소. 이건 [옛 지배자]의 힘을 빌리지 않고 이 땅의 고유한 정령들의 힘을 빌리는 거지. 그래서 마법과는 다르오.”

“호오….”

“잠깐만.”

주문을 외워서 자신의 눈에 손가락을 댄 생 제르맹이 잠시 후 눈을 크게 떴고, 이윽고 경악했다.

“이… 이럴 수가. 이렇게나 많은 [이름]을 수집했단 말이오?! 그것도 이렇게 격이 높아 보이는 이름을…. 당신이 정말 인간이 맞소?!”

“숫자가 많긴 많은가 보군. 사실 비교할 사람이 없어서 이게 많은지 어떤지도 몰랐소.”

“…응? 아, 아니 지금 보니 이 이름은… 허…억…. 칠두(七頭)의 적룡(赤龍)…. 아카나의 저편에 존재하던 신왕인 [옛 용]의 이름을 어떻게?!”

뭔가 경악을 금치 못하던 생제르맹이 잠시 후 말했다.

“이, 이건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오! 인간이라면 이렇게 할 수 없소! [이름]이란 건 본디 이렇게 쉽게 몸에 새겨서 내장하여 계약의 증거를 남길 수 있는 게 아니오. 대체 마도서라는 게 왜 있다 생각하오….”

“응? 무슨 말이오? 마도서는 또 왜….”

“으음…. 후우… 잠깐만….”

한동안 자기감정을 주체 못해서 마구 내뱉던 생제르맹이 진정하는 데는 반 각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생각을 정리하던 생제르맹이 입을 열었다.

“마도서의 본래 목적은 [옛 지배자]에 관련된 금단의 지식이 적혀있는 게 보통…. 강력한 마법이나 사악한 기록이 주된 내용이지…. 다만 때때로 마도서는 [이름]을 보관하기 위한 보관소의 역할을 하오.”

“[이름]의 보관소라고?”

“그렇소. 마도의 세계에서 [이름]은 종종 종속관계 때문에 강대한 상위존재끼리 거래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워낙 취급이 까다로우며 자기의 본체에 종속자의 [이름]을 새길 경우 부작용이 만만치 않소. [이름] 자체가 마력의 덩어리에 가깝기에 자기의 몸이 마력에 침식당할 우려가 크지. 그래서 [이름]을 마도서에 보관하여 마치 인간세상의 보물이나 금전처럼 거래하는 게 보통이오.”

“뭐? 그런 식으로 쓸 수 있단 말이오?”

“그렇소. 비전마도서의 가치가 큰 이유이기도 하지. 거기에 강력한 주문뿐만 아니라, 운이 좋으면 거기에 비장(秘藏)되어 있던 강력한 존재나 소환수의 [이름]을 얻어서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오.”

“……!!”

“심지어 역사가 오래된 마도서일수록 그럴 가능성은 더 커지지…. 여러 번 주인을 옮겨 다녔다면 그때마다 새로운 주인이 새로운 [이름]을 봉인해둬서 가치가 높아지는 것이오. 대충 이해했소?”

“그… 그런가….”

나는 황당한 느낌이 들었다.

‘설마 지금까지 선지자가 거래대상으로 마도서를 높게 쳐줬던 이유가?’

내가 완전히 해석을 하지 않았을 뿐 그 안에 또 다른 [이름]이 숨겨져서 보관중일 확률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거였나!

생제르맹이 상당히 안 좋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보통은 하나의 [이름]조차도 대마도사가 자기 몸에 두는 게 어려워서 마도서를 대신해서 보관소로 쓰는 판국인데…. 당신은 십여 개가 넘는 이름을…. 그것도 칠두적룡같은 강대한 자의 이름을 몸에 새기고 있소…. 그것도 마도술식 하나도 없이 원시적인 타투잉(tattooing)의 방식이라는 건 말도 안 돼…. 이는 정말… 정말로….”

“…….”

“물론… 이게 영 불가능한 일은 아니오…. 실제로 당신처럼 [이름]을 보관하는 존재들도 있다고 듣긴 했소만….”

“오!! 어떤 마도사나 술법사요? 그 자와 상담하면 되겠구려.”

내가 크게 기뻐하자 생제르맹이 찝찝해하며 대꾸했다.

“인간이 아니라 [옛 지배자]요.”

“응?”

“[옛 지배자]만이 그런 식으로 보관할 수 있다고 들은 바 있단 말이오…. 그들은 원초의 혼돈덩어리이니 당신처럼 [이름]을 보관해도 상관없소.”

“…….”

“정상이 아니라는 이유를 알겠지.”

나는 대꾸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내가 멍해져 있자 생제르맹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모르겠소. 당신이 의기(義氣)가 넘치고 세상을 위해 움직이는 강력한 신적 존재라는 건 확실하지만, 당신의 힘은 마(魔)에 너무나 가깝소. 어쩌면 내가 [옛 지배자]의 유희에 말려들었을 수도 있다는 우려가 느껴지지만….”

생제르맹은 이내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당신은 내게 실패를 바로잡을 기회를 주었소. 나는 그 은혜를 반드시 갚아야 하니 끝까지 백웅 당신을 믿고 가겠소.”

“…고맙소.”

잠시 후 나는 생제르맹에게 [이름]을 마도사들이 활용하는 방식에 대해서 대략적으로 듣고 자리를 나섰다. 다만 생제르맹의 말대로 [이름]을 움직여보려 해도 수정이나 변경을 할 수 없었는데, 생제르맹은 거기에 대해 자신의 추측을 덧붙였다.

“상리를 벗어난 상황이라 추측밖에 할 수 없소만, 이 [이름]들은 특정한 조건이 갖추어져야 움직일 수 있나 보군. 그것도 현재 완전히 해금되지 않는 이름들은 아무리 수정변경을 하려 해도 안 될 것이오.”

“그런가….”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이런 문제에 대해 인간 술법사나 마도사가 해법을 줄 순 없을 거요. 당신은 [다른 자]에게 조언을 구해야겠지.”

내가 아무리 바보라도 [다른 자]가 누구를 의미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나는 이를 악물며 고개를 저었다.

“절대 그러고 싶지 않소. 그렇게까지 [이름]의 힘이 절실한 상황도 아니고, 이 힘에 자칫하면 먹혀버릴지도 모르니.”

“흐음. 맘대로 하시게.”

나는 생제르맹에게서 물러나오며 생각했다.

‘안 되겠어. 조만간 억지로라도 사대신기의 힘을 쓸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야겠다.’

내 생각보다 [이름]에 잠재된 마의 힘이 더 강대하다는 게 생제르맹과의 대화에서 느껴졌다. 아직은 얌전한 척 하고 있지만 언제 내 성향을 마(魔)로 물들일지 모르는 노릇이니, 이 힘을 누르기 위해서는 억지로라도 사대신기를 써야하는 상황인 것이다. 나는 그런 고민을 하던 중 망량을 찾아갔다.

단순히 현재 마을 상황을 물어보러 찾아간 거였지만 망량은 대뜸 나를 보자마자 말했다.

“백웅. 지금 급히 할 일이 없다면 현천도인을 수련시켜주시오.”

“응?”

갑자기 현천도인은 왜?

내가 어리둥절해하자 망량이 말했다.

“전에 당신이 현천도인의 이름을 내세워 풍신류의 하부세력인 수라문을 제압했다고 들었소. 그리고 그 바람에 무당제일검 현천도인의 소문이 강호에 퍼지면서 애꿎은 무당파와 태경촌 사람들이 피해를 입어버렸지.”

“아….”

“물론 당신이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 해도 책임을 져야하는 일이오. 그리고 태경촌 쪽은 내가 이미 손을 써서 그 잔류자들을 소을촌으로 초빙하는 중이고, 당신은 무당파에 대해 책임을 져야하니 현천도인을 수련시켜주시오.”

“그, 그렇군. 현천도인을 수련시켜야 하는 이유는….”

“알아들었군. 당신 생각대로 그를 가짜가 아닌 [진짜 무당제일검]으로 만들어주는 것이오. 천축무림의 침공은 당신이 잘 물리쳤지만 앞으로도 풍신류를 비롯한 강호의 외적들이 무당파에게 시비를 걸 테고, 그럴 때마다 무당파를 도와줄 수는 없잖소? 그러니 현천도인을 진짜 실력자로 만들어서 무당파의 품으로 돌려보내란 말이오.”

망량의 말은 무척 조리 있었다. 나는 단숨에 납득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렇게 하겠소.”

“그런데 뇌신류 무공을 가르쳐줘서 초고수로 만드는 건 뇌신류 사람들은 물론이고 무당파 고수들이 납득하지 않을 건데 그건 어찌할 방법이 없겠소?”

“문제없소. 나는 무당파 장삼봉 진인이 남긴 고대절학도 잘 알고 있으니까.”

“…….”

망량은 잠시 황당한 눈으로 날 쳐다보다가 포기했다는 듯 말했다.

“영 쓸데없는 걱정이었군. 그럼 잘 부탁하오.”

나는 말이 끝나자마자 마을 외곽에서 도관 수련생들을 가르치며 소일하던 현천도인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현천도인. 먼저 사죄드리고 싶은 게 있소.”

“허허. 무엇이오?”

“사실은….”

나는 지금껏 현천도인의 이름을 팔아서 강호의 적들을 물리쳤던 일, 그리고 그 때문에 무당파에 피해가 왔었던 일 등을 솔직히 말했다. 현천도인은 아무런 표정변화없이 듣고 있었고, 나는 마지막에 꿇어앉으며 고개를 숙였다.

“정말 뭐라 드릴 말씀이 없소. 죄송하오.”

현천도인이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어 나를 일으켜주었다.

“허허…. 백웅 촌장, 일어나시오. 모든 게 정의를 위한 행동이었다면 본도가 그대를 탓할 이유가 없소. 더욱이 본파에 닥쳐온 위난도 물리쳐 주었다면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진 것이니 상관없소.”

“…감사하오.”

“다만 그대는 아직 내게 말할 게 있어보이는군.”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실은 내가… 무당파의 실전된 칠대절학과 육대절학의 합일로 나타나는 최강의 무공인 무쌍패를 알고 있소.”

“……?”

“그걸 지금부터 전수해드리려 하오만….”

그 순간 허허로운 도인의 얼굴이던 현천도인의 표정이 처음으로 괴상하게 변했다. 그의 수양으로도 감당키 힘든 일인지 그는 잠시 눈을 크게 뜨고 있더니 말했다.

“그, 그, 그게 어찌된 일이오…? 본도도 전설로만 알고 있던 그것을 어찌 외문의 고수인 그대가….”

“음…. 그게….”

천계에 수기공양해서 장삼봉진인을 소환한 후 그에게서 전수받았으며 수십 년간 전생하면서 숙련시키고는 천재들의 도움으로 숙성시켜서 마침내 장삼봉 진인의 도움으로 무아지경의 수련을 몇 년씩이나 반복한 끝에 무쌍패까지 익혔다고 하면 믿어줄까…?

“…….”

아니…. 지금 반응으로 봐서는 절대 안 믿을 것 같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시다시피 나는 뇌신류의 종사에 가장 가까운 절대지경의 고수이며 어쩌다보니 장진인의 유산인 칠대절학의 비급을 손에 넣게 되었소. 그걸 모두 익히게 된 후 무당파에 돌려주려 했는데 차일피일 미루다가 양심의 가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돌려드리게 되었소.”

“…허허…. 어찌 이런 일이….”

“당장은 사정이 있어 무당파에 사죄할 수 없소만 나중이라도 무당파에 이 빚을 꼭 갚도록 하겠소.”

“으음. 그렇다면야…. 감사히 전수받겠소.”

나는 그 날부터 칠대절학의 기초부터 현천도인에게 전수해주기 시작했다. 본래 칠대절학은 가능하면 이번 생에 노출시키지 않으려 했지만 망량의 말대로 무당파에 진 빚이 있어서 어쩔 수가 없었다.

‘현천진인의 수준을 초절정에서도 상위급으로 올려주고 칠대절학을 웬만큼 숙성시킨다면 충분하겠지.’

무쌍패를 얻고 말고는 개인의 역량차이였기에 무쌍패도 기본수련법만 다 알려주면 될 것이리라.

그리고 현천도인은 내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칠대절학을 배우는 게 눈에 보였다. 심지어 여태껏 칠대절학을 학습하던 다른 천재들보다 더 빨라보였기에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빠르게 배우다니?’

자세히 살펴보니 현천도인이 이미 익히고 있던 무당파의 진신내공과 무공 그 자체가 칠대절학을 배울 때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재능의 고하를 막론하고 말 그대로 장삼봉 진인이 무당파 후학을 내린 무공이 바로 칠대절학이었다는 게 입증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정도 수련속도라면 석 달만 수련해도 기초는 모두 다질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날부터 내 일과는 남을 수련시켜주는 게 되었다. 하루를 삼분하여 진소청에게 구궁파천뢰, 방일에게 뇌신류 만승검결, 현천도인에게 칠대절학 등 각각 다른 진도로 다른 무공을 수련시켜주는 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할애하고 남는 시간에는 서문혜나 사공린, 극호 등 소을촌에 와 있는 다른 인연있는 자들의 무공을 지도해 주었다.

나는 잠을 자거나 먹지 않아도 되었으므로 한 순간도 쉬지 않고 계속 수련과 전수를 계속했다. 전수를 반복하다보다 더러 내용이 섞여서 헷갈릴 때도 있었지만 어찌되었든 모든 무공은 내가 밑바닥에서부터 시행착오를 반복하며 익힌 것이었으므로 가르쳐주기 어렵지는 않았다.

그렇게 약 한 달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까? 그런 내 활동을 보던 서문혜가 어느 날 다가와서는 걱정스럽게 말했다.

“촌장님, 괜찮으신 건가요? 한 순간도 쉬지를 않으시고 잠자지도 먹지도 않으시는데….”

“내 내공은 백련교 호법사자 수준이라서 딱히 문제될 건 없소. 내공을 변환시키면 내 체력은 무한이라서.”

아직 노예시장이 열린다는 얘기가 들리지 않았다. 그 얘기가 들리자마자 한달음에 다 때려 부수고 구출하러 가기 전까지는 빡세게 전수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노예시장을 때려 부술 때는 나 혼자서 가면 통제가 힘들어서 놓치는 경우도 있을 것이므로 다른 소을촌 사람들도 데려갈 것이고, 그 때까지 소을촌 고수들을 강화시키는 건 당연히 내게 도움되는 일이었다.

“그래도 이렇게나 고생하시다니….”

안쓰러운 듯 중얼거리던 서문혜가 말했다.

“촌장님께 있어서 쉰다는 건 무엇인가요? 평소에 입버릇처럼 쉰다고 하시지만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하고 계시는 것 같아요….”

“응? 지금도 충분히 쉬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럼 달리 여쭙자면 열심히 일하는 건 무엇인가요?”

“흠….”

아마 [옛 지배자]나 마왕들하고 박터지게 싸우면서 세상 멸망이 코앞인 순간에 발바닥에 불나게 뛰면서 감당할 수 없는 절망에 오열하는 상황이겠지…. 인간이 수백만 수천만씩 죽어나갈 때 바늘구멍이라도 신한테 찔러보려고 발악을 하고….

더 열심히 할 수 있었는데 왜 하지 않았냐면서 나 자신에게 혐오감을 느끼는 것보다는 차라리 개발에 땀나듯이 미친 듯이 뭔가 하는 게 더 좋아. 그래야 절망을 잠시라도 잊어버릴 수가 있으니까.

“…….”

아니…. 뭐가 이래. 너무 칙칙하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평범한 인간의 사고방식이 아닌 것 같은데?

‘내가 언제 이렇게 되었지?’

평생동안 종말론만 생각하며 살아가는 인간도 나보다 비관적이진 않을 것이다.

나는 순간 혼란스러워졌다. 서문혜의 말을 듣고서야 지금 내 상황이 ‘쉬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내가 약간 당황스러워하자 서문혜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조금이라도 쉬세요. 저 뿐만 아니라 다들 내심 촌장님이 너무 열심히 하시는 것 같아서 걱정하고 있어요….”

“흐음…. 하지만 내가 쉬면 세상의 재앙을 막을 수가 없소.”

“그걸 촌장님만이 막을 수 있는 건가요? 그 재앙이 촌장님의 탓이라고 할 수 있나요?”

“꼭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러면 오늘 하루는 저희랑 놀아요.”

“응?”

서문혜가 밝게 웃으며 말했다.

“소풍이라도 가서 촌장님과 얘기하고 싶어요.”

“허어…. 겨우 그런 걸로 괜찮겠소?”

“네! 충분해요.”

“알았소. 갑시다.”

수련이야 이 정도면 다들 알아서들 할 수 있으니 잠시 자리비운다고 문제되진 않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서문혜를 따라서 먹을 간식거리를 들고 풍경 좋은 뒷산으로 향했다.

그리고 거기에는 이미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 인간의 형태로 변한 미호, 그리고 사공린이 있었다. 나는 어리둥절해서 그들에게 말했다.

“아니 다들 기다리고 있었나?”

“당연하죠. 오늘만큼은 데려올 거라고 서문혜 소저가 별렀어요.”

가볍게 웃은 사공린이 말을 이었다.

“미호 님이 달빛 풍경이 좋은 곳을 알고 계시다는데 같이 가요.”

“좋소.”

나는 잠시 후 그들 셋과 야밤에 절벽 근처로 가서 자리를 펴고 먹을 것을 풀어헤쳤다. 소을촌에는 이미 저명한 요리사도 몇 초빙되어 있었기 때문인지 먹을 것이 무척 풍족하고 맛있어 보였다. 미호는 기분이 좋은 듯 새하얀 꼬리를 흔들었다.

“우후후. 수련 도중 육식도 못하고 늘 풀떼기만 먹고 살았는데 오늘은 그나마 먹을 게 많군요.”

“미호…. 고기 정도는 줄 테니까 마을에 내려와….”

“소의 간을 좋아하는데 요리사들이 난색을 표하더이다.”

“…….”

하긴 먹고 싶을 때마다 소를 한 마리씩 죽이면 아무리 소을촌이 거대마을이 되었더라도 남는 게 없겠지….

“아 하세요, 촌장님.”

나는 도중에 서문혜가 가까이 와서 고기를 먹여주자 얌전히 받아먹었다.

‘어…. 미호가 질투하지 않나….’

나는 고기를 냠냠 씹으면서 힐끔 미호의 눈치를 살폈는데, 미호는 자기를 바라보자 어리둥절하다는 듯 말했다.

“왜 그러십니까 촌장님?”

예의발라보이지만 분명히 거리를 둔 경어. 미호가 나를 그저 상관으로만 대할 뿐 연인으로는 전혀 생각지 않는다는 증거였다. 나는 복잡한 눈으로 미호를 보다가 이윽고 한숨을 쉬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어차피 진공가향이나 그 이상을 이루어 외신을 멸절시키려는 이 여정이 끝나기 전까지 나는 결혼이나 연애 같은 건 할 수 없겠지. 결국 전생하게 되면 모든 게 허상이 되어버리니까. 결국 내가 즐길 수 있는 건 바로 이 순간뿐이다.

순간을 즐긴다라….

[나의 제자여. 충분히 이 순간을 즐기고 있나?]

[하하하…. 내가 있는 한 즐길 수가 없다고? 그렇기도 하겠지.]

[하지만 기억해 둬.]

‘누군가’의 웃는 얼굴이 기억의 한 켠에서 보였다.

[이 모든 게 56억 7천만 년의 업(業)이라는 사실을.]

마치 백일몽처럼 스쳐지나간 잠시동안의 회상에 나는 소름이 돋아서 몸서리를 쳤다.

“……!!”

바, 방금 그 기억은 뭐지?!

‘내 기억이 아니야!! 절대 아냐!’

적어도 지금 나는 저런 걸 겪어본 기억이 없어! 30회차의 전생을 겪으면서 저런 대화따윈 해본 적이 없다고!

그렇다면 [누구]의 기억이지?

누가 누구와 대화를 한 거지?

대체 어째서 이런 기억이 계속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거지?

하필이면 황제 공손헌원을 봉인시킨 이후부터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나는 이유는 대체….

“촌장님. 왜 그러세요?”

서문혜가 걱정스럽게 날 쳐다봤지만 나는 이마에서 땀이 흐르는 걸 느끼며 계속해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잠시 후 뭔가를 깨달았다.

“…같아.”

“네?”

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창힐도 그런 말을 했던 것 같다고….”

천암비서에 먹혔던 창힐.

그 창힐의 유언과 하필이면 겹치는 백일몽 속의 숫자는 바로 56억 7천만년.

“…….”

창힐이 남긴 것을 모두 손에 넣으면 56억 7천만년의 진짜 의미에 접근할 수 있을까?

그리고 창힐이 남긴 것이라면 분명 이 세상에 존재한다.

‘가능할 거 같아.’

미호가 걱정스럽게 날 보며 말했다.

“잠시 쉬시는 게 어떤지요.”

“…정말 쉬려고 하면 이렇게 하면 안 되는 거 같아.”

“네?”

나는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서며 주먹을 쥐었다.

“이런 식으로 깔짝대면서 온갖 노동을 다 하면서 세상의 평화를 지킬 순 없어. 여기저기서 나대는 놈들을 싹 다 내리누를 힘이 필요해.”

“그 말씀은….”

나는 다음 순간, 내가 생각해도 미친 것 같은 포부를 입 밖으로 내어버리고 말았다.

“언젠가 내가 팔부신중의 주인이 되어야겠어.”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재앙을 하나하나 틀어막을 수는 없다.

재앙 그 자체를 내 부하로 만들면 훨씬 편해질 게 분명하다.

주인을 잃어 미친 들개처럼 되어버린 그 놈들을 기회가 되면 부하로 만들어서 창힐이 남겼던 56억 7천만년의 단서를 알아내고, 덤으로 세상을 평정할 수 있는 힘도 손에 넣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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