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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검신-1281화 (1,278/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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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나는 상대의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내가 [옛 지배자]라고?’

이런 착각을 받을 줄은 정말 생각도 못했다. 그러나 신력이 인간을 초월한 수준이었기에 그렇게 생각해도 일리는 있었고, 시바가 도리어 합리적인 판단을 하는 것이리라. 동시에 나는 내가 점차 인간의 영역을 벗어나고 있다는 걸 알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 건 인정하기 싫다.

나는 언짢은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는 시바에게 말했다.

“내가 어디서 왔는지는 직접 알아내 봐라.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닐 텐데.”

“크큭…. 그런가. 재밌군.”

시바는 내 말을 긍정으로 알아들었는지 기묘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런 시바에게 엄중하게 경고를 해야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봐. 경고하는데 중원에서 분탕질을 치지 마라.”

“어째서?”

“왜냐면….”

나는 팔짱을 끼며 최대한 오만한 표정을 연기하며 말했다.

“여기는 내 놀이터니까.”

“…….”

시바의 얼굴이 굳어지자 나는 아차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 [옛 지배자]의 화신이라면 이렇게 말할 거 같아서 말해봤는데 너무 유치했나?’

저 놈이 날 의심해서 공격하는 거 아냐?

‘으…. 약하게 나가면 안 될 놈 같아서 일부러 쎄게 나갔는데….’

나는 내심 전투를 대비하며 긴장해서 주먹을 꾹 말아 쥐었고 내 30번째 전생 최초의 대전투가 벌어질 거라고 각오했다.

여기서 어떻게든 시바를 없애버려야 후환이 덜할 것이다. 나는 시바를 죽이면 진국준도 죽는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각오를 다졌다.

‘진국준, 미안하다.’

진국준의 육체까지 죽이게 되더라도 시바를 몰아내야만 한다. 신의 화신이 멋대로 날뛰게 놔두면 엄청난 재앙이 벌어진다.

그러나 시바의 이어진 반응에 나는 눈을 의심했다.

스윽

시바는 독특한 천축의 예법으로 수인(手印)을 맺더니 내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눈을 반개하며 신어(神語)로 말했다.

[아무래도 파르바티의 예지가 너의 유희(遊戲)를 읽은 듯 하군. 괜찮다면 여기서 불가침조약을 맺지 않겠나?]

응?

나는 잠시 멍하니 있다니 지금이 중요한 순간이란 걸 깨달았다.

‘…[옛 지배자]인 척 하는 게 먹혀들었어! 끝까지 이 연기를 유지해낼 수 있으면 성공이다!’

하지만 방금 전은 시바가 내 신력과 기세에 당혹해서 속은 면이 있다. 그렇기에 이번에는 슬며시 내가 진짜배기인지 확인하기 위해 신어를 쓴 것이리라.

지금 이 상황은 시바가 나를 시험하는 것이다!

여기서 꼬이면 싸울 수밖에 없다!

‘으음…. 신어를 쓴 건 나 또한 신이라는 증명을 내놓으란 거겠지?’

어떻게 해야 신인 척 연기할 수 있을까?

나는 까다로운 과제가 나오자 머릿속으로 계속해서 의식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옛 지배자]의 화신이다…. 화신이다…. 엄청 오만하게 굴어야 한다…. 아니, 이런 의식만으론 안 돼.’

어설프게 굴지 말자.

인간이 아닌 신을 연기한다면 그 어떤 연기력으로도 부족해.

머릿속으로 나 자신의 인격을 설정한 후 마치 가면을 쓰듯 연기해 보자! 나는 예전에 신투지존이 가르쳐줬던 천면공자(千面公子)의 수련 당시에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려 보았다.

[이봐. 넌 애(哀)의 가면을 쓰고 있으면 슬프냐?]

[왜 안 슬픈데? 그 가면은 슬픈데 넌 왜 안 슬프냐고.]

[아니 무슨… 가면은 가면이지 어째서 쓰고있는 나까지 슬퍼야 합니까.]

[가면이란 뭐냐? 가면이란 인격(人格)이다. 일류 가면술사는 가면을 바꿔쓸 때마다 인격을 바꿀 수가 있어야 해.]

[인간은 원래 타인의 인격을 훔치면서 살아가는 존재다. 가면술사는 그 능력을 극대화시킨 것에 불과하고, 그 능력 자체는 모든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지. 중요한 건 인격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네가 훔칠 수 있는 유상(有常)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좋든 나쁘든 놈들의 인격은 거울처럼 비쳐서 네 안에 투영된 것. 그 모습은 네 안에 남아있단 말이다.]

[관계 속에서 영향을 받은 건 너뿐만이 아니기 때문이지. 이미 그 자리에 원형(原形)이 남지 않았다는 의미에서는 ‘훔쳤다’고 표현할 수 있다. 모든 게 변화하기 때문이야. 넌 찰나의 타인을 흡수할 수 있다.]

…찰나의 타인을 흡수한다….

나는 그 요체를 떠올리며 잠시 몸서리를 쳤다. 왜냐하면 엄청난 일체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신(神)을 연기하기 위해서는 원래 천면공자의 2단계가 필요할 것이다. 심연의 본질을 일깨워서 신의 본질도 훔쳐와야만 완벽할 테지만…. 위험할 뿐더러 지금은 그 본질을 훔칠 수 있는 대상이 눈앞에 없다.’

나는 내 눈에 일순간 청광(靑光)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면, 천면공자 1단계를 극대화시켜서 2단계에 접근하는 수밖에!’

고대의 비술이자 본질이라 할 수 있는 천면공자 2단계의 영역에 순수한 기술만으로 손을 내밀어서 신을 연기하리라!

슈슉

아주 잠시동안 나는 의념을 섞어서 가면을 피부 위에 덧씌웠다. 여태껏 연습 한 번 해본 적 없었는데도 무척 자연스럽게 이뤄졌기에 나는 약간 놀랐다.

천면공자의 술수는 정말 오랜만에 써 보는 것이었기에 되새길수록 신선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이 술수를 배운지 상당한 세월이 흘렀음에도 마치 엊그제 배운 것처럼 이 절기가 내 마음속에 빠르게 스며드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마치 체형에 딱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별개의 기억력을 발휘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꺼낼 수가 있었다.

나는 깨달았다.

‘뭐야? 쉽잖아.’

찰나의 타인을 흡수한다는 건 -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찰나 또한 흡수할 수 있다는 뜻.

그리고 접촉했던 횟수가 많았을수록, 그 경험이 강렬했을수록 나는 손쉽게 그 자의 존재를 가면으로 구현화할 수 있다.

나는 천면공자 2단계처럼 직접 가면을 뺏지 않는다.

단지…. 그 가면의 형태를 기억해내리라.

그리고 기술으로 최대한 닮게 모사해낸다!

파앗

그 순간 내가 머릿속에서 떠올린 자연스러운 기억의 흐름이 가면에 스며드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신투지존의 수련공간에서 쌓았던 수많은 가면술의 경험이 녹아들며 가면이 빠르게 변화했고, 이윽고 가면은 내게 영혼처럼 달라붙어서 일체화되는 게 느껴진다.

가면의 모사를 끝마친 나는 근엄하게 입을 열었다. [가면]을 쓰면서 신력을 소모하자 당연스러운 듯 내 말이 신어가 되어 자동번역되는 게 느껴졌다.

[아둔한 놈.]

[뭐라고?]

시바가 적대적인 내 말투에 꿈틀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연기했다.

[본좌가 북방(北方)에서 굳이 인간 따위를 관찰하러 온 진의(眞意)를 모르겠단 말인가?]

스스스스!!

그 순간 내 몸에서 시꺼먼 음신지력이 일어나서 암창(暗槍)을 만들어 내었다. 흑웅이 아직 깨어나지는 않았지만 이전 생에 각성한 후 나 또한 신력의 통제력이 꽤 늘어났기 때문에 이런 형태변환 하나 정도는 가볍게 할 수 있었다.

‘제발… 눈치채라….’

그리고 암창을 본 시바는 잠시 후 표정이 크게 일그러졌다.

[……네놈… 이었나?]

[후후….]

나는 놈의 확신을 더욱 비대하게 만들 요량으로 잠시 어둠의 형체를 내 몸 위에 덧씌우며 시꺼먼 불꽃을 장식처럼 이글거리게 만들었다. 그러자 나는 삽시간에 어둠을 둘러싼 거인 속의 인간처럼 변했고, 그 장대한 흑암의 형상을 보던 시바가 마치 지지 않겠다는 듯 잠시동안 놈의 진체(眞體) 형상을 마주 드러내는 게 보였다.

후와악

잠시 동안 기싸움같은 게 이어졌지만 나는 너무 도발하면 안 좋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차가운 비웃음을 지으며 기세를 물렸다.

[그렇다. 내가 바로 전욱(顓頊)이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가진 신력 중엔 전욱의 음신지력이 비중이 크고, 아마테라스를 연기하자니 그 녀석은 여신이라서 성별이 다르다. 그러므로 가장 자주 마주치기도 했던 삼황오제 전욱을 연기하는게 제일 합리적이다!

[……!!]

[네놈이 만신전의 졸개란 건 진작에 알고 있었다. 잘도 우리의 영역에 발을 들였구나.]

내가 암창을 쓱 내밀자 시바가 주춤거렸다. 그러더니 시바가 약간 성난 표정으로 말했다.

[이놈…. 고대에 마주쳤을 때도 건방지더니 끝까지 파괴신인 내게 오만하게 구는 것이냐? 황제만 아니었어도 네놈들 사제(四帝)와는 진즉 결판을 냈을 터인데!]

어? 설마 구면인가?

나는 뭔가 꼬일 거같은 예감에 움찔할 뻔 했지만 애써 태연하게 연기를 계속했다.

[너같은 놈 기억 안 난다…. 중요한 게 그게 아닐 텐데.]

너무 깔아뭉갠 것 같기도 하지만 아마 내가 아는 전욱이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

[너와 내가 싸울 때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겠지…. 우리는 황제의 신변에 이상이 생겼음을 이미 알아챘고 앞으로 다가올 재앙을 대비하고 있다.]

내 말에 시바가 호오,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얌전히 듣는 기색으로 변했고 나는 말을 이었다.

[해묵은 결판은 나중에 낸다. 이제와서 황제의 개들과 동맹을 맺을 생각은 없지만 서로를 방해하지 말자.]

[크크…. 그런가…. 전욱, 역시 말귀를 알아들었군.]

[또한… 화신을 써서 빙의한 모든 사건은… 지상의 일으로 끝낸다는 것도 알고 있겠지….]

내가 경고하듯 말하자 시바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인간의 말로 전환했다.

“아주 잘 알고 있지. 지금부터는 인간으로서 대화하자.”

“좋아.”

“서로 합의가 되었군. 이 자리에서 천축 삼대신과 중원 삼황오제의 인중(人中) 불가침조약이 추가로 맺어졌음을 선언하겠다. 후후!”

“…….”

시바가 경쾌하게 웃는 걸 보자 나는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내가 왠지 큰일을 벌여놓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 제길…. 일단 천축무림과의 전쟁을 막아는 놨는데 이게 미래에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

전욱을 사칭한 셈이 되어버렸지만 아무렴 어때! 지금 시바랑 눈알광선 쏘면서 개지랄하고 싸우는 것보다는 백배 낫지! 전욱이 따지러 오면 그땐 또 그때 일이다!

나는 애써 마음을 다잡고는 냉랭하게 말했다.

“그럼 더 이상 천축에서 관여하지 않는다 생각해도 되겠지?”

“흐흐. 어차피 브라만교 따위는 우리 신들에게는 놀잇감에 불과해. 나도 대호법이라는 역할놀이를 하고 있을 뿐…. 파르바티에게는 내가 직접 말해둘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그 진국준이라는 인간의 육체는 그만 놓아줘라. 이 몸의 주인과 친한 사이다.”

“흠, 그래? 그대의 뜻을 존중하여 다른 절대지경 고수의 육체를 찾아봐야겠군. 그래도 꽤 재밌는 장난감이었는데.”

아쉽다는 듯 중얼거리던 시바는 흐릿한 웃음을 짓더니 뒤돌았다.

“그나저나 수천 년 사이에 취향이 꽤 희한해졌군. 설마 복희의 인간형태를 따라할 줄이야. 나도 혹시나 하여 복희일까 싶어서 수를 깔아봤는데 완전히 예상이 빗나갔어.”

“…….”

“하긴 그 자는 유폐당했으니 그럴 리는 없다 여겼지만…. 역시나였군.”

아, 맞다…. 복희의 모습이었는데 시바 저 놈은 고대에 복희를 본 적 있었겠구나!

일부러 모른 척 하며 묘한 기대감으로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지만 뜻밖에 전욱이 나와서 당황해버린 모양이었다.

“다음에 볼 때는… 전장(戰場)에서 설욕해주지, 북방의 마신이여….”

슈욱!

시바의 신형이 빠르게 지평선 너머로 사라졌다. 나는 그 놈이 사라진 후에야 내 얼굴에 잠시 씌워두었던 가면을 벗으며 한숨을 쉬었다.

“휴우.”

천면공자를 굳이 2단계까지 안 써도 신인 척 연기할 수 있군!

그렇다면 앞으로도 2단계를 쓸 일은 없겠어!

‘가면술은 직접적인 공격능력이 적어서 잘 쓰지 않았는데도 나름대로 쓸 데가 있었군….’

나는 상황을 정리한 후 근처에서 대기하던 명룡자를 만났다.

“천축의 대호법은 몰아냈소. 그는 최소한 100년간은 중원을 침범하지 않을 것이오.”

“전투 한 번 하지 않고?! 그 자를 설마 말로만 몰아냈단 말인가.”

명룡자가 눈을 크게 뜨며 경악하자 나는 훗하고 웃었다.

“싸움만이 다는 아니잖소.”

“흐음….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대는 우리 무당파와 중원무림의 은인이다!”

명룡자는 감동한 얼굴로 내게 포권했다.

“언제든 무당파를 방문해 주게! 그대에게라면 우리의 비전절학과 보물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

비전절학이란 건 장삼봉이 남겼지만 실전된 칠대절학일 거고 보물이란 건 무당파에 봉인되어있는 의천검을 말하는 거겠지?

‘칠대절학은 옛날부터 수련했고 그걸 기반으로 팔선신공까지 만들어냈고 이제와서는 칠대절학 파해식도 나왔고 그 파해식의 파해식도 알고 있는데….’

나보다 칠대절학을 빠삭하게 아는 사람은 아마 없으리라.

그래서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명룡자에게 말했다.

“아니 됐….”

그 순간 나는 물욕이 생기는 걸 알 수가 있었다.

‘가만. 그러고보니 의천검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아본 적이 없네?’

장삼봉이 의천검이 위험하다고 경고는 했지만 막상 그게 왜 위험한지는 명확히 설명하지 않았던 게 기억난다. 그리고 방금 전 신격인 시바를 직접 대면했기에 나는 의천검을 회수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축에서는 더 이상 간섭하지 않겠지만, 다른 이면세계의 존재들이 의천검을 강탈해가면 그게 또 재앙이 될 수도 있겠지….’

내가 의천검을 쓰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위험한 건 봉인해버려야 해. 그래야 내 평안한 삶을 유지할 수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의 흐름을 마치자 명룡자에게 급히 말했다.

“…칠대절학은 됐고 보물은 좀 갖고 싶소! 그 보물 혹시 의천검이라고 하지 않소?”

“…….”

명룡자가 멍하니 있다가 경악했다.

“그 비밀을 어떻게?!”

“내가 뭔들 모르겠소! 그러려니 하시오!”

“하, 하지만….”

“주시오!”

나는 당당하게 손을 내밀었다.

“무당파랑 무림을 구했다면서? 그 대가로 보물을 주겠다고 자기 입으로 말했으니 나는 의천검을 받고 싶소!”

할 말 없겠지!

“…….”

명룡자는 얼굴이 크게 구겨졌다. 보아하니 말만 그렇게 해놓고 의천검이 아닌 다른 무당파의 영약이나 보검 정도를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의천검을 주기 싫다는 속내가 뻔히 보였다.

그러나 자기 입으로 한 말을 무를 수는 없었기 때문일까? 잠시 후 명룡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따라오라!!”

파밧

나는 이윽고 명룡자를 따라가서 비밀장소에 봉인되어 있던 의천검을 대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의천검을 보자마자 예전 생각이 떠올라서 씁쓸해졌다.

‘이거 들고 팽조랑도 싸우고 별의별 놈이랑 다 싸웠지….’

써본 경험이 있던 무기라서 더 애착이 가는 것 같다. 나는 옛 생각을 하면서 음신지력을 무작정 퍼붓듯 의천검의 손잡이에 힘을 흘려 넣었다.

파지지직

예전에 비해 신력의 절대량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늘어났기 때문일까? 생고생을 해서 뽑았던 그 때와 달리 의천검은 잠시 후 쑥 하고 별로 힘들이지 않고 뽑을 수가 있었다. 물론 소모도는 확연히 느껴졌지만 예전처럼 체력과 기력까지 고갈될 정도는 전혀 아니었다.

그리고 의천검을 단매에 뽑는 걸 본 명룡자의 눈이 매우 커졌다.

“허… 억…. 지, 진짜 그대는 어떤 자인가….”

“흐음.”

나는 간만에 잡은 의천검을 휭휭 휘둘러보고는 약간 의심스러운 표정을 느꼈다.

‘뭐지? 예전엔 못 느꼈던 건데…. 이 의천검의 가장 깊은 곳에 봉인이 하나 더 있네.’

설마 지금까지 내가 쓰던 의천검은 해방이 덜 된 상태였단 말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씩 웃었다.

“잘 됐군.”

원래 그냥 의천검 또한 웬만한 보패검을 뛰어넘는 위력을 보이는 명검이었지만 천하제일검이라는 명성에는 못 미쳤다. 화룡신검이나 해방칠요에 비하면 많이 부족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중에 내가 이 봉인을 해제해서 해방시킨다면 칠요에 손대지 않고도 해방칠요급 무기를 손에 넣을 수도 있겠지!

‘시간 날 때 해 볼까.’

나는 명룡자에게 말했다.

“명룡자. 심심하면 소을촌에 놀러오시오. 우리 소을촌은 무예를 추구하는 자를 마다하지 않소.”

“…알겠네.”

나는 그렇게 무당파의 일을 갈무리하고 소을촌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소을촌에 되돌아갔을 때 마을 입구에서 금만재가 검을 들고 기다리고 있는 게 느껴졌다. 딴에는 기습을 하려는 건지 수풀에 은신해있는 기척이 느껴졌다.

“죽어랏!!”

내가 모른 척 그 앞을 지나가자 금만재가 검을 찔러왔다. 그리고 나는 금만재의 검면을 손가락으로 퉁 쳐서 날아가게 만들고는 그걸 허공에서 추적해서 의념의 기류를 이용해서 그를 더욱 더 먼 허공으로 던져버렸다.

“으아아아악 - ”

한참 후 비명을 지르며 떨어져 내리는 금만재를 가볍게 화경을 이용해서 받아준 나는 놈을 한심한 눈으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날 기습해서 죽이려면 천하무림에서 최소한 열 손가락에는 들어야 할 거다. 어디서 까불고 앉아 있느냐.”

“으아아아아. 더는 못해. 지옥수련을 도대체 언제까지 해야 하냐고.”

울부짖던 금만재가 자기 검을 저 멀리 던져버리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제발… 제발 부탁입니다…. 전 그냥 꿈도 없고 놀고 싶어요…. 고수 안 되도 좋으니 이제 놔 주세요….”

“…….”

나는 너무 한심해서 정이 떨어질 지경이었다. 이런 놈이 혹시 그 삿갓무사가 아닐까 생각했던 게 과민반응처럼 여겨졌다.

‘뭐…. 금만재도 이만하면 충분히 괴롭혀준 거 같고 이제 놔 줄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았다. 너는 이제 소을촌 무공수련에서 빠져도 좋다.”

“저, 정말입니까?”

나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왜인지 몰라도 금만재의 얼굴을 볼 때마다 느껴졌던 짜증이 이젠 안 느껴진다.

“그래. 시내에 놀러가고 싶지? 돈도 충분히 줄 테니 이젠 마음껏 놀거라. 너네 아버지 밑에서 경영이나 배워라. 다만 깝치지 말고.”

“으허… 허허허…. 감사합니다….”

금만재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절했지만 나는 본체만체하며 마을로 들어가 버렸다.

‘그러던가 말던가….’

금만재에게 십여 년 이상 괴롭힘 당한 원한이 있었는데도 더 이상 갚을 생각이 안 든다. 한 줌의 증오나 미련도 없다. 왜냐하면 이미 충분히 갚아준 셈이었기 때문이었고 은원이 서로 정리가 되었다 느꼈기 때문이다. 이젠 그냥 금만재가 맘껏 살게 놔줄 생각이다.

‘정말… 아무 감정도 안 생기는군….’

멈칫!

그리고 그걸 깨달았을 때, 나는 알 수 없는 공허함 때문에 잠시동안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렇군.’

분노와 증오 또한 관심이었다.

무관심이 되어버리면 무감정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어째서인지 그 사실이 무척이나 두렵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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