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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나는 살수조장이 들어오자마자 그를 따로 불러서 말했다.
“이봐. 네 진짜 이름은 뭐야?”
이게 중요하다. 왜냐하면 나는 저 놈에게 2번씩이나 목이 따였음에도 놈을 그저 ‘살수조장’이라고만 알고 있었기에 진짜 이름을 몰랐다. 지금부터 놈에게 복수한다고 치면 이름도 모르는 건 터무니없었기에 나는 놈의 이름을 알아야만 했다.
그러자 살수조장이 말했다.
“없습니다.”
나는 그 말에 바로 얼굴이 험상궂어져서 놈을 노려보았다.
“웃기지 마라. 이름이 없는 사람이 어딨단 말이냐? 그것도 너만한 무림고수가!”
그러자 살수조장이 내 살기에 움찔하면서도 안간힘을 쓰면서 대답했다.
“저… 정말입니다. 저는 태어날 때부터 고아였으며 살수로 키워졌기에 이름이 없습니다. 이후에도 흑야문주님께 임무를 받을 때만 가짜신분과 이름을 받아서 활동했을 뿐입니다.”
“…진짜?”
“그렇습니다. 저는 직책으로 불리거나 가명만 쓸 수 있었습니다.”
“흑야문주가 널 따로 부르는 이름도 없었나?”
“그냥 조장이라고만 부르셨습니다.”
거짓말은 아닌 것 같다. 살수조장은 아마도 흑야문의 명운을 걸고 보내져 왔을 테니 어설픈 거짓말을 할 리가 없는 것이다. 나는 황당해져서 머리를 긁적였다.
‘젠장! 두 번이나 날 죽인 원수가 설마 이름도 없는 놈이었다니.’
진짜배기 무림 살수의 삶이란 이런거란 말인가.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그럼 너를 지금부터 소을(小乙)이라고 부르겠다.”
“소을? 이 마을의 이름입니까?”
“그래. 간단하고 좋지?”
이름 짓기도 귀찮다. 나는 살짝 살수조장을 노려보았다.
‘이노옴…. 운 좋은 줄 알아라.’
본디 말똥이로 하려 했지만 왠지 이건 다른 놈한테 아껴두고 싶었다. 정말로 저 놈은 운이 좋은 것이리라.
“알겠습니다.”
나는 살수조장 소을을 명명한 후 소을에게 말했다.
“소을. 우선 네가 지금껏 배웠던 살수의 무공을 모두 내 앞에서 펼쳐봐라.”
“네.”
파파팟
그러자 소을은 흑야문의 흑야신공(黑夜神功)을 운용하며 빠르게 권장법과 검법을 연계해서 펼치기 시작했다. 흑월검법(黑月劍法)이 흑월장(黑月掌) 막바지에 매끄럽게 흘러나오는 걸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과연 절정의 경지에 오른 놈 답군. 검기를 자유자재로 쓸 수 있고 숙련되어 있어.’
전생초기에 내가 당해내지 못하고 당할 수밖에 없었다. 하도 초절정고수나 절대지경을 많이 봐서 지금와서 절정고수는 하찮을 뿐이지만, 사실 소을의 나이는 약 20대 중반에 불과해 보였고 그 나이에 절정에 올랐다는 건 앞으로 강호를 주름잡을 최정상고수의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었다.
고려의 명문 후기지수조차도 각고의 노력이 바탕이 된 후에야 절정고수가 되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충분히 살수조장의 경지는 나이에 비해서 높은 편이었다. 하지만 나는 감탄하기보다는 저놈의 검기에 목이 베였던 기억 때문에 언짢음만 느껴졌다.
“그만! 그 정도면 다 본 것 같군.”
소을이 무공전개를 하는 걸 멈추자 나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나이에 비해 탁월한 무공이군. 살수출신으로 그 정도 무공을 쌓기 어려웠을 텐데 흑야문주가 많이 지도해줬나 보군.”
“조장이 된 후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보통 살수의 무공은 비천하기 마련인데 절정고수씩이나 되니 자기보다 진신무공이 강한 자들도 여럿 죽여왔겠구나. 그래서 여태껏 무림인과 일반인을 다 합쳐서 몇 명이나 암살했지?”
“47명입니다.”
퍼억
“……!!”
나는 소을이 대꾸하자마자 바로 기력을 조금 실어서 놈의 배를 차 버렸다. 감정은 최대한 억제했는데 감정을 실었다간 놈을 죽일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소을은 살수로 훈련받아서인지 큰 고통을 느끼면서도 비명을 전혀 지르지 않고 참는 듯 했다. 나는 소을을 차가운 눈으로 보며 말했다.
“청부받아서 사람 죽인 게 자랑은 아닌데 거리낌 없이 말해주는군. 돈만 받으면 원한관계도 없는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게 참 개같은 놈이구나.”
“죄…죄송합니다.”
“그래서 그 중에 무고하고 선량한 사람을 몇 사람 죽인 것 같냐? 흑마한테 물어보면 다 알 수 있으니까 거짓말하지 마라.”
소을은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없습니다.”
“이 자식이…. 거짓말하지 말라니까. 흑야문도 멸망하고 네놈도 사지가 찢겨봐야 정신을 차리겠냐?”
내가 으르렁거렸지만 소을은 눈을 똑바로 뜨며 말했다.
“세상의 이목으로 선량한 사람은 있었지만 무고한 자는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무고하고 선량한 자는 죽인 적이 없습니다.”
“…….”
어, 뭐지….
청부살인이나 하는 쓰레기라서 겁을 주면 대충 밑바닥을 드러낼 줄 알았는데 눈빛이 뭔가가 달랐다. 그것도 철저한 갑을관계에서 모든 게 망할 수도 있는데 자기 신념을 담은 발언을 할 수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었다. 그것도 내게 욱하는 마음을 드러낸 것도 아니었기에 이질적인 기분이 들었다.
나는 약간 호기심이 생겨서 소을에게 말했다.
“재밌는 얘기군. 선량한데 무고하지 않은 사람이란 건 어떤 사람이냐?”
소을이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마을에 수해가 났을 때 자기 곡간을 열어서 구휼하고 장애인과 약자를 도운 선량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를 청부받아서 죽인 적이 있었습니다.”
“선량한 자 아니냐? 왜 무고하지 않다는 거지?”
“그를 죽여달라 청부한 것은 그가 첩과 살림을 차린 후 길가에 내쫓긴 본처의 아들이었습니다. 내쫓긴 후 본처가 생활고로 굶어죽자 아들이 원한을 품고 돈을 모아 못된 아버지를 죽여달라 했었던 것입니다.”
“…….”
“제가 흑야문의 청부를 하며 단 한 건도 억울하고 죄없는 자를 없앤 적은 없습니다. 타인의 눈에 위선을 행하지만 뒷구멍으로 수많은 원한을 사고있던 자들을 죽인 게 대부분입니다.”
나는 코웃음을 쳤다.
“흥. 변명이 치졸하구나. 네놈은 그리 말할지 몰라도 흑야문주 흑마는 그렇게 사회정의에 관심있는 놈은 아니다. 놈은 돈이 된다면 선량한 자들을 주륙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을 텐데 너만 그런 의뢰를 피했다고 주장할 셈이냐?”
“반대입니다. 조장이 된 후, 처음부터 문주께서 위선자를 척결하는 의뢰만 제게 맡기셨습니다.”
“뭐?”
“선량하고 힘없는 자들을 없애는 건 어려운 암살이 아닙니다. 하지만 위선을 행하는 부자와 권력가를 없애는 건 무척 어렵습니다. 그래서 제가 본의 아니게 악한들만 상대하게 되었습니다.”
“…음. 이른바 전공이란 말인가.”
나는 놈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흑마는 차기 중원제일살수로 살수조장 소을을 점찍고 있었고 그에게 흑야신공까지 알려줄 정도로 신임하고 있었다. 그리고 최고의 살수로 키우기 위해서는 당연히 어려운 고난을 준비해줘야 했고, 그 고난을 위해서 권력이나 재력이 높은 악인척결 위주로 의뢰를 맡겼던 것이리라.
위선을 행할 수 있다는 건 그만큼 위선자를 지키는 호위무사나 방해꾼이 많다는 뜻이고, 그런 자들을 없애는 청부살인은 당연히 최고의 실력을 갖고 있는 살수조장만 가능했으니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내 소을의 말에 어떤 헛점이 있는지를 알아차리고는 비웃었다.
“웃기는군. 조장이 된 이후라면 그 전까지는 네가 어떤 놈을 죽이고 있는지도 잘 몰랐단 말이겠지. 새끼살수란 그런 거니까. 그 때 죽였던 놈들 중에 선량하고 무고한 인간이 없다고 단정지을 수 있나?”
“…….”
소을이 주춤거리자 나는 말을 이었다.
“또 하나. 네 녀석의 말대로 네가 악당만 척결했다 하더라도 그저 상황이 맞아 들어가서 그리 된 것뿐이지 네놈이 원해서 만들어진 상황은 아니다. 살수의 대장인 흑마가 선량한 놈을 죽이라고 시켰으면 네가 거부했을 리는 없지. 살수의 위계는 절대적이니까.”
“그건…. 그렇습니다.”
“생존하려고 시키는 대로 살인만 밥먹듯이 했던 놈이 자기가 옳다고 우겨대는 꼴이 참 보기 역겹구나. 네 주체적인 의지로 협(俠)을 행하지도 않았던 조직의 부품 따위가 뭘 정당화시키고 있냐.”
“…….”
“그리고 그냥 돈을 들고 튄 잡범이라도 대충 놀러가듯이 죽일 수 있는 게 네놈이니까 그 말 자체도 믿을 수 없어! 네녀석은 애초에 살인에 문턱이 하나도 없잖아!”
“예?”
내가 소리를 버럭 지르자 소을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놈에게 화가 나는 걸 견딜 수가 없었다.
‘말은 잘하는구나 씨발새끼! 위에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다 했던 새끼가 이제와서 자기는 나쁜 놈만 죽였다고 변명해? 일면식도 없었던 내가 천년설삼 찾으러 가다가 네놈한테 죽었다 이놈새끼야!’
신념같은 게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살인청부업 하는 새끼가 신념이 있어봤자다. 무림인도 싸움나면 상대를 죽이기는 마찬가지지만 돈받고 사람 죽이는 놈은 그 이하의 쓰레기가 틀림없는 것이다. 무림인은 자신의 무(武)를 갈고닦으며 자기 목숨을 지키는 거라는 변명이라도 가능하지만 살수는 그런 게 아니기에 더욱더 비판의 대상인 것이다.
나는 더 이상 화를 참지 못하고 근처에 있던 나무몽둥이를 들고는 말했다.
“나한테서 삼 초식을 버텨봐라. 못 버티면 네녀석은 다음 대련까지 계속 외양간 청소다!”
“알겠습….”
“준비 시작! 죽어라!”
퍼억 퍽 퍽
“끄악….”
소을이 일초식도 못 버티고 나무몽둥이에 얻어맞아 쓰러지자 나는 안 죽을 정도로 개패듯이 팼다. 목이 베였을 때의 그 고통을 생각하자 절로 손에 힘이 들어갔다.
퍽 퍼억 퍽퍽
한참을 패고나자 조금 분이 풀리는 것 같았다. 나는 속이 시원해짐을 느끼며 근처에 나무몽둥이를 던지며 말했다.
“한 달 후에 다시 대련할거다. 네놈은 그때까지 매일 외양간 청소하면서 똥을 치워라. 하루라도 거르면 넌 진짜 죽는다.”
“…….”
“기절했군.”
나는 피떡이 된 소을의 목덜미를 잡아서 질질 끌고 간 후 대충 내상치료를 해주고 숙소에 던져놓았다. 다른 놈들이라면 무공을 가르쳐서 전력으로 삼을 테지만 나는 소을 놈한테 딱히 그러고 싶지 않았다. 무공이야 배우던가 말던가 알아서 하고 나는 놈을 패기만 할 것이다.
‘심심할 때마다 패야지.’
똑같이 당했던 대로 목을 베기만 해서는 복수가 덜하다. 일면식도 없는 상대에게 터무니없는 횡액을 당하는 그 기분을 고스란히 느끼게 해주고 말리라!
그리고 나는 그날부터 제대로 뇌신류의 수행을 위해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극호와 그의 부인인 모용연에게 주어졌던 암묵적인 신혼기간이 끝났음을 알리고, 동시에 나는 이광과 진소청, 극호를 불러내어서 말했다.
“극호의 결혼식 때도 말했지만 란나찰 10만회를 한 번에 성공하는 자에게 구궁파천뢰를 전수하겠다! 바로 오늘부터 시작이다.”
그 말에 이광이 기다렸다는 듯 이를 바득거리며 갈았다.
“스승. 스승이 탈력해있는 동안 나는 계속 체력과 내공을 갈고닦았소. 스승은 결코 했던 말을 물리지 마시오!!”
“하하하하. 절대 그러지 않을 것이다. 한 번 했던 약속은 무조건 지킨다!”
“좋소!!”
그 때 진소청이 손을 번쩍 들며 말했다.
“태사부! 여쭐게 있습니다.”
“뭐냐 진소청?”
“지금 이 자리에 나오지 않은 독고성 어르신께서 방일과 금만재를 너무 혹독하게 다루시는 듯 합니다. 조금 아이들에게 자비를 베풀게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
나는 뭔가 불길함을 느끼고는 진소청에게 말했다.
“독고성이랑 애들은 어딨는데?”
“뒷산 수련장에 있습니다.”
나는 급히 뒷산 수련장에 뛰어가 보았다. 그리고 그 곳에는 차디찬 주검처럼 쓰러져 있는 방일과 금만재가 보였고 독고성이 그들에게 극노한 듯 외침을 터뜨리고 있었다.
“일어나지 못할까!!”
“…….”
딱 봐도 구타에 지옥수련이 이어진 결과 방일과 금만재가 쥐잡듯 잡힌 것 같았다. 내가 멍때리고 있었던 시간동안 매일 저렇게 당했고, 그걸 보다못한 진소청이 내게 이른 것 같았다. 나는 독고성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사형. 저 아이들이 아직 무공에 초심자인 걸 알고 계실 터인데 조금 자비롭게 대해주는게….”
“흥!! 우리 뇌신류가 저런 재능 없는 녀석들에게 어디까지 시간을 쏟아야 하는 것인가! 정작 나는 내 수련을 할 시간을 다 뺏기고 있으니 분함을 이루 말할 수가 없네, 사제!”
“음…?”
“크흠. 나는 애새끼들이나 가르치러 사제를 따라 소을촌에 온 게 아니란 말일세.”
나는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이윽고 독고성의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았다.
‘이… 이 인간, 구궁파천뢰 배우고싶어서 나한테 강짜부리는 거구만!’
독고성은 일부러 방일과 금만재를 쥐잡듯이 잡은 게 분명했다. 심하게 갈아댈수록 밑의 후배들이 나한테 이를 게 뻔했고, 내가 이리로 오게 유도한 것이다. 그리고 내가 독고성에게 구궁파천뢰를 안 가르쳐주는 것을 간접적으로 항의하고 있는 셈이었다. 나는 기가 막혀서 독고성에게 말했다.
“사형. 구궁파천뢰는 란나찰 10만 번 하시면 가르쳐드리려 하오만….”
“뭐라고오오!! 전대 종사의 사형인 내가 이제 와서 창술, 그것도 란나찰을 10만 번이나 해야하겠나.”
“아니 그래도 다른 문인들과 형평성이….”
“갈!! 나는 평생 검술만 연마했던 자다. 내게는 다른 기준이 필요하고, 어험…. 그리고 그냥 구궁파천뢰를 가르쳐주면 어디 덧나는 것이냐.”
독고성의 강짜가 생각보다 심해보였다. 나는 그 이유를 내심 깨닫고는 침음성을 흘렸다.
‘란나찰 10만 번 하기 싫고 할 자신도 없는 거구나….’
하긴 나도 이광 괴롭히려고 내놓은 과제일 뿐 정말로 무공수련에 진전이 된다고 생각해서 내놓은 게 아니다. 이런 고문같은, 다시 말하자면 멍청하기 짝이 없는 무식한 과제를 독고성이 억지로 하려 할 리가 없었다. 그래서 배분과 사문내 위치를 이용해서 억지로 넘겨버리고 자기만 구궁파천뢰를 배우려는 게 분명했다.
독고성한테 구궁파천뢰 가르쳐줘도 상관없긴 하다. 그렇지만 지금 가르쳐주면 이광에게 10만 번을 시키는 명분이 크게 약화되고 만다. 나는 한동안 고심하다가 독고성에게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하겠소, 사형.”
“가르쳐 주는 건가?”
“중단세 휘두르기 20만 번.”
“…….”
“란나찰은 다 합치면 30만 번이니 단순 휘두르기면 훨씬 덜할 거라 생각하오.”
“흐흐흐…. 보통 사람은 일만 번 하다가 피토하고 죽을 정도인데 내게 20만 번을 하라고!”
“단순 휘두르기도 못 하오? 이광도 하는 걸 설마 사형이 못 하겠소?”
“끄응….”
독고성은 이광을 비교하자 무척 불편해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함부로 반박을 못 하는 듯 했다. 자존심이 무척 높았기에 만에 하나라도 이광이 란나찰 10만 번을 해내면 새파란 후배만도 못한다는 게 되어버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를 따라온 진소청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좋다! 그렇게 하겠다.”
“그럼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으리라 생각하겠소.”
나는 독고성도 어찌어찌 달래고는 바닥에 누워있는 방일과 금만재를 흔들어서 깨웠다. 그리고 내공치료로 그들의 체력과 기력을 회복시키자 갑자기 금만재가 내 멱살을 잡더니 울부짖듯 말했다.
“그… 그만해…. 언제까지 날 괴롭힐 작정이야.”
“네 입으로 고수가 되겠다고 하지 않았냐? 벌써 우는 소리냐.”
“이렇게 고생할 줄 몰… 몰랐다고…. 흐흐흑….”
금만재가 정말로 울음을 터뜨리자 나는 조금 당황했다. 그 때 옆에 앉아있던 방일이 퉁퉁 부은 얼굴로 말했다.
“…난…. 고수가 될 수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소….”
“흠.”
“더 많은 수련을 시켜주시오….”
방일과 금만재의 차이가 단숨에 느껴졌다. 물론 금만재가 이광한테 괴롭힘 당한 적 있다는 것도 생각해야겠지만 고행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차이났다. 방일은 죽는 한이 있어도 고수가 되고 말겠다는 필사적인 마음이 있었지만 금만재는 그저 얻어걸려서 멋진 고수가 되겠다는 생각이었기에 뜻밖의 고난에 정신을 못차리는 듯 했다.
‘그렇군…. 방일은 좀 더 진지하게 키워줘야겠어.’
나는 방일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으켜주며 말했다.
“방일. 내일부터 너는 내가 직접 지도해 주마.”
“감사합니다.”
기초를 마련할 때까지는 딴 사람들한테 맡기려 했지만 그냥 마을에서 퍼놀기만 하기도 심심하다. 그래서 나는 방일을 직접 열심히 가르쳐 보기로 했다.
그리고 다음 날 - 이광이 새벽부터 란나찰 10만 번에 도전을 시작했다.
부웅 부웅!!
나는 방일을 데리고 나와서 다른 뇌신류 고수들과 함께 이광의 란나찰 수련을 지켜보았다. 나중에 딴소리한다고 하면 안 되었기에 이광이 도전할 때는 나도 반드시 봐줘야하는 것이었다.
‘확실히 이광, 체력과 기력을 많이 갈고닦았나보군.’
10만 번의 수련은 그냥 매일 적응해서 횟수를 늘리기에는 너무나 비인간적인 횟수다. 그래서 이광은 내가 멍 때리는 기간 동안 섣불리 란나찰에만 전념하지 않고 명상과 체력훈련을 통해 잠재력을 갈고닦는데 집중한 모양이었다. 그래서인지 동네 무관주를 하면서 좀 굳어있던 이광의 창끝이 좀 더 날카로워지고 정기가 가득 차 보였다.
후웅!
이광은 자세 한 번 흐트러지지 않고 벌써 횟수가 8천여 번에 도달해 있었다. 심지어 호흡조차도 안정되어 있어서, 보통 사람이라면 지금쯤 내공이 다해서 탈진했을 텐데 이광이 무척 뛰어난 고수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흐음…. 과연….’
하지만 꽤 시간이 지나서 이광의 란나찰 횟수가 3만 5천 번에 도달했을 때, 나는 이광의 눈꼬리와 손끝이 서서히 떨린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걸 보는 순간 확신하며 히죽거렸다.
“크큭.”
나는 결과가 뻔히 느껴졌기에 여유롭게 관전하기 시작했다. 다른 자들은 나같은 걸 못 느끼는지 그저 멍하니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약 4만 5천 번이 넘어갔을 때였다.
휘청!
갑자기 이광의 한쪽 무릎이 풀려서 그의 자세가 무너지는 게 보였다. 진소청이 깜짝 놀라서 외쳤다.
“스승님!”
“……!!”
이광의 전신에서는 비오듯 땀이 흐르고 있었고 코에서 코피가 조금 흐르고 있었다. 이광은 땀 때문에 창이 미끌거리자 잠시 옷에 창대를 닦고는 말했다.
“걱정… 마라. 더 할 수 있다. 흐읍…!!”
콰아앗
그 순간 이광의 내공이 풀려나오듯 전신에 기력이 충천하는 게 보였다. 나는 그걸 보자 이광의 자신감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런 전략인가. 처음부터 전신의 혈맥에 내공을 분산시켜놓았던 거군. 그리고 체력이 다 떨어질 때쯤 그 분산된 내공을 다시 불러들여서 빠르게 회복시킨 거야.’
말은 쉽지만 내공의 조예가 매우 높지 않으면 흉내도 낼 수 없는 일! 이광이 중원에서 손꼽히는 초절정고수라는 건 인정할 만 했다.
하지만….
‘이광…. 넌 아직도 이 시련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했구나.’
그리고 약 하루나절이 흘렀을 때.
쿠웅!!
이광은 6만 번을 조금 넘겼을 때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는 앞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의 눈에는 생기가 사라져 있었고 그저 땀범벅이 되어서 숨만 가냘프게 헐떡이고 있었다. 아무리 더 해보려 해도 불가능한 상황이 찾아온 것이다.
땀웅덩이에 쓰러져 있는 이광을 향해 다가간 나는 그의 앞에 쪼그려앉아서 말했다.
“63823번. 아주 열심히 했구나, 이광.”
“…….”
“하지만 너는 더 이상 창을 들기는커녕 일어설 수도 없겠지.”
그러자 이광이 끊어질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할 수 있… 어…. 이대로 내가….”
“아니, 넌 할 수 없어. 체력도 내공도 아직 부족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지. 네게 부족한 건….”
나는 뭔가 말하려 했지만 이광의 눈에 초점이 사라진 걸 알아챘다.
“…….”
“기절했나.”
“태사부님. 제가….”
“아니. 내가 기공치료하는 게 나을 거다. 비켜라 진소청.”
“네.”
나는 기절한 이광을 붙잡고 질질 끌고나오며 생각했다.
‘이걸로 한동안은 체력과 기력이 다 떨어져서 도전할 엄두도 못 내겠지. 지옥같은 경험을 했는데도 실패했다는 좌절감이 더더욱 도전을 꺼리게 만들 것이다.’
나는 처음부터 이광이 이 시련을 통과할 걱정을 전혀 하지 않았다.
좀 더 시련에 익숙해진다면 8만 번까지는 갈 것 같지만 10만 번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것은 내공 문제도 있었지만 나중에 변명을 한다면 변명을 못 하게 흑백련을 더 줄 생각이기 때문에 그게 문제의 본질은 아니다.
이광은 그 때의 나와 다르다. 설령 10만 번을 너끈히 할 수 있는 내공이 있더라도 이광은 거기까지 결코 갈 수 없다.
자존심을 넘어선 절대적인 의지.
‘나’를 잊어버린 어딘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모든 걸 버려야만 한다.
내면의 갈구를 넘어서서 한 점에 도달해야만 한다.
“지금의 네가 가능할 리가 없지.”
내가 이광을 봐 왔던 세월이 몇 년이나 되었다.
모순투성이인 이광이 될 리가 없다는 걸 처음부터 알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