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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부웅! 부웅!!
“더 빨리 안 하나!!”
“…….”
나는 이광을 다그친 끝에 결국 그가 뇌령팔식 5천번을 다 해내는 걸 볼 수 있었다.
“다 했습니다 스승님.”
이광은 빨리 끝내고 싶었던 건지 비교적 빠르게 시전해서 약 두 시진이 약간 넘은 시간만에 끝낸 듯 했다. 그렇다 해도 뇌령팔식 5천번은 굉장한 노동이었던 모양인지 이광의 전신에는 땀이 비오듯 쏟아지고 있어서 무복이 비라도 맞은 양 변해 있었다. 그의 얼굴에도 땀방울이 송글거리며 맺혀 있었다.
‘당연한 거지.’
이광은 초절정고수중에서도 매우 뛰어난 자이지만 지닌 내공과 체력은 한계가 있다. 그냥 칼 휘두르기 1천번도 매우 힘든데 뇌령팔식을 제대로 1천번만 시전한다 해도 웬만한 무사들은 탈진해서 며칠동안 기절하다시피 할 정도이다. 그런 무식한 수련 5천번을 선 자리에서 다 해내는 게 대단한 일이다. 나는 그런 이광의 자세에서 그의 남은 체력을 감안해보고는 이광이 약 3만 번 정도를 시전하면 죽을 지경에 이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더욱 되갚아줘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제놈도 못하는 걸 나한테 시켰다니…. 가만 두지 않겠다.
나는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어험. 아주 수고했다. 오늘은 이만 제자들과 함께 짐을 풀고 쉬어라.”
“알겠습니다….”
부웅 부웅
‘응?’
그리고 이광이 지친 표정으로 터덜터덜 자기 숙소로 돌아갈 때, 나는 한적한 구석에서 누군가가 창 휘두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그쪽으로 다가가 보자 그곳에서는 뜻밖에도 진소청이 창을 휘두르고 있었다.
부웅!
‘란나찰인가….’
그냥 단순하게 란나찰의 창법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꽤 열심히 한듯 진소청도 약간 땀이 난 게 보였다. 나는 의아해서 그에게 말했다.
“진소청. 너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뭘 하느냐?”
그러자 진소청이 이마의 땀을 닦으며 대답했다.
“사부가 성실히 기초에 매진하시는데 제자로서 가만있을 수는 없습니다. 새로운 터전에서 초심(初心)을 다잡으려 창술을 다시 다듬고 있었습니다.”
“…….”
으음…. 과연 진소청. 노력까지 열심히 하는군.
하지만 너 같은 절세천재가 노력까지 하면 뭐 어쩌자는 거야!
범재랑 둔재들에게 조금 숨통을 틔워달란 말이다!
‘혹시 모르지만 지금 네가 깨달음을 얻어버리면 나중에 내가 가르쳐줄 게 없단 말이다…!!’
나는 심술궂은 생각이 들어서 진소청에게 말했다.
“소청아. 너에게도 무술인으로서 과제를 줘야하겠구나.”
“감사합니다!”
“흠흠. 그럼 태사부로써 네게 명한다.”
“명하십시오.”
“앞으로 내가 괜찮다고 할 때까지 무술수련을 금지한다! 명상과 내공호흡 정도는 해도 괜찮다.”
“……!!”
진소청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짓자 나는 진소청에게 차분히 말했다.
“진소청. 넌 요즘 무술경지가 정체되는 걸 느끼고 있을 것이다. 맞지?”
“음. 그렇습니다.”
“관성이 네 무공상승을 방해하고 있다. 사시사철 무공을 몸에 붙이고 다니는 게 평범한 무림인의 도(道)라면, 너는 그 평범한 도리를 깨부술 필요가 있다. 일부러 무공에서 멀어짐으로써 한층 고차원적인 무리(武理)를 깨닫는 수행을 하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태사부님.”
진소청은 내가 아무렇게나 지어낸 개소리를 찰떡처럼 알아듣고는 바로 포권을 하여 예를 갖추었다. 나는 그런 진소청을 보며 생각했다.
‘일단 이광을 좀 갈군 다음에 가르쳐야지…. 진소청이 너무 세져버리면 이광을 갈굴 때 옆에서 진소청이 말릴 가능성이 크다!’
빨리 아군동료들을 성장시켜야 하는 상황에서는 진소청을 억제할 이유가 없었지만 이번엔 다르다. 이광을 괴롭히는데 방해가 되는 장애물이 될 게 뻔하므로 내 자의적인 판단으로 진소청을 억제해 버릴 것이다. 어차피 흉신도 가라앉힌 판에 이번 생에 극도로 강화된 진소청까지 필요할 일은 별로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망량에게 찾아가서 말했다.
“망량. 내가 없는 동안 별일 없었소?”
“딱히 아무 일도…. 이번에 새로 들어온 청룡무관 고수들의 무공이 촌장께서 말한 정도라면 앞으로도 아무 일 없을 듯 하오.”
“뭐 그렇겠지.”
“거듭 물어보는 걸 보니 또 어딘가로 갈 생각인가 보구려. 백련교주가 직접 쳐들어오지 않는 한 소을촌은 안전할 테니 걱정 말고 다녀오시오.”
나는 망량이 내 마음속을 읽고 있자 멋쩍게 웃었다.
“마을을 잘 부탁하오.”
후웅
나는 아직 이광을 갈구는 계획을 시작하기 전에 영입할 인물을 다 영입하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좀 더 움직일 필요성을 느꼈고 이번에는 별도로 다른 인물을 데리고 다니지 않으려 했다.
“…….”
하지만 내가 바람처럼 마을을 나가려 할 때 마을 입구에 금만재가 대자로 누워있는 걸 보자 멈춰서게 되었다.
“뭐하냐, 금만재.”
배째라는 듯 드러누운 금만재가 악을 쓰듯 외쳤다.
“당신은 약속을 어겼소.”
“무슨 약속.”
“해적섬에서 여기로 돌아오면 무공을 가르쳐준다 하지 않았소. 그 약속은 언제 지킬 생각이오!!”
“으, 귀찮은 놈….”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 금만재 저놈이 무공에 대한 동경이 무척 강하다는 걸 깨달았고 저 나이대 어린애다운 치기가 가득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도 저런 적이 있었지만 남이 저러는 걸 보니 혐오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나는 벌레 밟은 듯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넌 무공의 기초도 안 되어있어서 내가 가르치기에는 너무 부족하다. 내가 없는 동안에는 가서 이광한테 기초를 배워라.”
“이광이 누구요?”
“오늘 하루종일 창 휘두르던 사람.”
“아!”
“가서 널 봐주지 않고 철저히 뇌신류 무공을 지도해주지 않으면 내가 이광을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말해라.”
“알았소! 드디어 고수가 되는구려 하하하하하.”
“좋냐? 하하하하하.”
나는 기뻐하는 금만재와 나란히 웃으며 생각했다.
금만재가 이광한테 저 소리 하고나서 뇌신류의 기초수련 받으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나를 귀찮게 했으니 네 자업자득이다.’
파앗
나는 금만재를 떨쳐낸 후 이동했다. 그리고 열심히 날아가서 사공표국에 도착했고, 사공표국에 도착하자마자 사공린을 찾았다.
쿠궁
“당신이 사공린 맞소?”
사공린은 표위로서 사공표국 내실에서 사무를 보고 있다가 뜬금없는 내 출현에 놀란 듯 했다. 그도 그럴것이 하늘에서 날아와서 지붕을 뚫고 내려앉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경계심어린 눈빛으로 말했다.
“반로환동하신 강호의 고인이신가요?”
나는 사공린에게 말했다.
“경계하지 마시오. 나는 당신의 스승인 태산노옹에게서 부탁을 받고 왔소.”
“……!!”
사공린은 그 말을 하는 순간 주변에 내 말이 들렸는지 경계하는 듯 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기막으로 소리를 차단했으니 태산노옹의 정체는 주변에 알려지지 않소.”
“누구신가요?”
“말했듯 부탁을 받고 왔소. 바로 당신의 무공을 증진시켜주라는 부탁이오.”
파바밧
다음 순간 나는 갖고 온 목검을 꺼내서 빠르게 공손검법을 펼쳐내었다. 내가 처음에 펼친 것은 바로 현재의 사공린이 익히고 있는 공손검법이었고, 그 검류를 처음부터 끝까지 매끄럽게 펼치자 사공린은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 공손검법의 전개가 끝나자 그 다음으로는 원류(原流)라 할 수 있는 공손검법이 내 손에서 시전되었다.
쉬쉭
나는 마치 조용한 안개처럼 소리소문없이 마지막 출수를 마치고 검을 거두며 말했다.
“당신이 태산노옹을 통해 익힌 건 공손검보. 당나라시절 전설적인 고수인 공손대랑(公孫大娘)이 개량한 공손검법이며 태산노옹이 직접 복원한 검결이오. 그리고 후반부에 내가 펼친 것은 본디 공손가에 전해지던 원류검법이오.”
“…….”
“태산노옹은 내게 의뢰하길, 당신에게 원류검법을 가르침과 동시에 당신의 무공수준을 초절정수위 이상으로 끌어올리라 했소. 그래야만 현재 발호한 황산파의 변란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오.”
“그렇다면….”
“나는 현재 소을촌의 촌장으로 있소. 거기에 당신을 데려가서 무공을 수련시킬 생각이오.”
사공린은 뭔가 생각하는 듯 했다. 그러더니 말했다.
“죄송해요. 당신이 공손검법의 숙련자라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으나 제 스승님께서 신뢰한다는 증거가 하나도 없습니다. 당신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순 없어요.”
“미안하지만 이건 부탁이 아니오. 태산노옹은 현재 황도 낙양에서 일어난 변란 때문에 움직일 수 없는 상태이니 당신에게 무공을 가르칠 겸 당신을 이 환란에서 보호하라는 부탁까지 했소.”
“부탁이 아니라면….”
“설명할 건 다 했으니 실례하겠소.”
타당
나는 순식간에 사공린에게 달려들어 그녀의 혈도를 짚어서 제압했다. 무공수준차이가 너무 크게 났기에 사공린은 저항한번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뻣뻣이 굳었고, 나는 사공린을 안심시키기 위해 말했다.
“이렇게 무례를 범해서 미안하오. 하지만 아무리 쉬어가는 삶이라 해도 당신을 확보해야만 하오.”
“……?”
나는 제압된 사공린을 목갑에 넙죽 넣으며 생각했다.
‘사공린은 28번째 생에 황제 공손헌원의 심장이자 최강의 화신인 천마(天魔)로 각성했었다. 당연히 황제가 봉인된 지금은 천마로 각성하지 못할 테지만…. 그렇다 해도 사공린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는 무조건 살펴볼 수밖에 없어.’
28번째 삶에서 그 어마어마한 천마의 위력을 겪은 이상, 아무리 쉬어가는 생이라 해도 이걸 빼놓을 순 없는 것이다. 이런저런 체면치레를 하면서 사공린을 확보하지 못한다는 경우는 있을 수가 없었다. 더욱이 이번 삶에서 평화로운 삶을 위해서 최대한 변수를 줄여야 한다는 걸 생각하면 더더욱 그랬다.
‘대신에 사공린한테도 최선을 다해 무공을 가르쳐주지 뭐….’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사공표국의 국주이자 사공린의 아버지인 사공환에게 찾아가서 말했다.
“나는 소을촌의 촌장인 백웅일세. 그녀의 스승인 태산노옹의 부탁을 받아 그녀를 보호할 겸 소을촌에 데려가 무공을 수련시키겠네.”
“헉….”
“덤으로 앞으로 황산파의 발호에서 그대들을 지켜주지.”
“뜬금없이 나타나서 내 딸을 납치하고는 그게 무슨…!!”
콰과광
내가 뇌령인을 일 장에서 뿜어내서 하늘로 날려 보내자, 저만치 멀리에 있던 야산의 상단이 뇌령의 빛에 감싸여 통째로 소멸하는 광경이 연출되었다. 그 광경을 넋을 빼고 쳐다보던 사공환에게 말했다.
“보면 알겠지만 자네나 자네 딸에게 위해를 가하고자 한다면 이렇게 귀찮은 짓은 하지 않을 걸세. 자네가 무슨 백련교주도 아니고 뭐하러 그러겠나. 굳이 성명도 밝히지 않겠지.”
“야… 약속해 주시오. 린아에게 해를 가하지 않겠다고….”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그리고 또 하나 말해둘 게 있는데.”
“무엇입니까?”
“태산노옹의 부하라 자처하는 자가 만일 사공표국을 찾아와서 사공린을 찾는다면 그녀 자신의 의지로 먼 곳으로 무사수행을 보냈고 행적은 알 수 없다고 둘러대게. 현재 태산노옹은 적이 많으니 적들이 사공린을 노리고 있다네.”
“…알겠습니다.”
파앗
나는 사공린을 확보한 후 바로 근처에 있는 황산파에 잠입했다. 그리고 황산파의 정상 언저리에 있는 장문인의 거처까지 가서 용중일을 찾았다.
‘저깄군.’
나는 용중일이 정원 한가운데에 앉아서 조용히 명상에 잠긴 걸 알 수 있었다. 동시에 저 자가 고요히 있는 것 같지만, 이미 내 은신술을 간파했으며 내 존재에 경각심을 품고 있다는 것 또한 알아차릴 수 있었다.
틀림없다.
절대지경의 초입!
세상에는 그 경지를 철저히 숨기고 있으나 수백 년 환생자의 경륜을 이용하여 오랜 노력 끝에 간신히 절대지경에 발을 들인 환생자가 바로 저 놈이었다. 물론 지금은 아직 검형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여 경지에 숙련도가 많이 부족하긴 했다.
나는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었고 용중일은 내 쪽을 뒤돌아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결연한 표정으로 자신의 검을 잡으며 말했다.
“절대지경의 고수라니. 이번 생은 여기서 마무리할지도 모르겠군.”
역시 내 실력을 알아보는 듯 했다. 그 말에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런 말을 하는 게 나 말고도 있었다니 무척 낯설군, 용중일. 아니, 환생자(還生者)라고 해 둘까?”
“……!!”
“지금은 풍신류 종사이자 호법사자인 용비천의 친아들로 환생해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용중일은 평소 감정기복이 없는 그 답지 않게 두 눈을 부릅뜨며 경악하는 듯 했다. 그는 이윽고 날카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설마…. 너도 환생자인가?”
“비슷한 거라고 해 두지. 조금 다를 수도 있지만.”
“나 말고도 환생자가 있었을 줄이야….”
“칼은 내려놔라. 아직은 너와 결판을 낼 생각이 없으니까.”
용중일이 그 말에 천천히 자신의 검을 검집으로 집어넣었다. 어차피 어설픈 경계가 상대를 없애는데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있기 때문이다.
‘싸우면 내가 이기겠지만 여기선 굳이 힘빼고 싶지 않아. 그보다는 용중일을 내 계획에 이용해먹자.’
나는 팔짱을 낀 채 용중일에게 말했다.
“나는 망각의 인을 감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너는 그 망각의 인이 사라졌기에 명계에도 가지 않은 채 계속 환생하는 거겠지. 그래서 네 정체는 바로 알 수 있었다. 한 삼사백 년치 환생을 한 셈이겠군.”
“그런가…. 그래서 날 찾아온 이유가 뭐지?”
“지금 이 세상에 큰 이변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을 것이다. 뭔가 엄청난 일이 일어나는 중이지.”
“…….”
용중일이 침묵으로 긍정하는 듯 했다. 나는 말을 이었다.
“나도 이 세상에 미래에 닥쳐올 악몽을 구해내고싶은 마음이 있다. 그래서 여기서는 같은 환생자끼리 도울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왔다.”
“돕는다고? 내가 뭘 믿고 너를 돕는단 말이냐.”
“네가 가장 알고 싶은 건 진시황의 행방일 거다. 그걸 알려줄 수도 있지.”
“허억……!!”
내가 단숨에 용중일의 정곡을 찌르자 그는 너무 놀랐는지 비틀거렸다. 그 누구에게도 이야기한 적 없었던 그의 가장 큰 심중을 찌를 줄은 몰랐으리라. 그러더니 약간의 독기를 품은 눈으로 말했다.
“설마, 네 녀석, 마음을 읽는 초상능력을 갖고있나?!”
“그러면 어쩔 건데? 중요한 건 네가 궁금한 걸 내가 알고 있다는 거지.”
“으음…. 정말 알고 있단 말인가?”
“그래. 알고 있다. 다만 진시황의 행방 같은 게 지금 이 시국엔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것뿐이지.”
“뭐라고? 진시황 영정이 부활하게 된다면….”
나는 용중일의 말을 끊으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뭘 아는 척이냐? 개고생하면서 진시황 팔 잘라본 적 없으면 아는 체 하지 마!”
“……?!”
“그 개같은 새끼가 부활하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 나보다 잘 아는 사람 없으니까.”
용중일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았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네가 몇 번이나 환생하면서 장님이 코끼리 더듬듯 했던 세계의 비밀들. 나는 너보다 수십 수백 배는 많이 알고 있다. 일종의 선배라고 할 수 있지. 나와 손을 잡는다면 네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의미를 알 수 있게 될 거다.”
“으… 으음….”
이런 식으로 용중일에게 접근해보는 건 처음이었다. 지금껏 쓰잘데기없이 강하지만 딱히 숙적이라 할 정도도 아니어서 대개 무시하곤 했는데 이번 생에 처음으로 용중일에게 내가 주도해서 손을 내밀어보는 것이다. 하지만 용중일 또한 백련교 측에 존재하는 매우 큰 변수 중 하나였기에 이런 식으로 미리 제어해두지 않으면 내 평화로운 삶을 분명히 방해할 것이다.
‘물론 저 새끼는 소을촌에 들일 수 없다. 바깥에 두고 상황을 제어하는데 써먹어야지.’
왜 배신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28번째 삶에서 칠대절학을 가지고 십이율로 감으로써 대웅제국을 배신한데다가 원래도 음흉한 새끼이므로 성가시다.
용중일은 이마를 찡그리며 엄청난 고민을 하는 듯 하다가 겨우 땀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조… 좋소. 당신과 손을 잡겠소.”
“잘 생각했어!”
나는 흡족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용중일에게 말했다.
“앞으로 종종 찾아오겠다. 먼저 내 부탁을 몇 개 들어준다면 네 안목을 틔울 수 있는 정보를 전해주도록 하지.”
“어떤 부탁이오?”
“먼저 황산파를 움직여서 화산파와 종남파를 치는 계획을 좀 늦춰라. 당장이라도 칠 것처럼 굴고 있던데, 최소한 이 년은 미뤄라.”
사실 이게 진짜 내 용건이다. 황산파가 움직인다면 어떤 식으로든 강호가 크게 요동칠 텐데 그러다보면 갑자기 사태가 확대되면서 어둠의 세력도 막 움직여댈게 뻔하다. 경거망동하지 않도록 자제시켜야겠다.
“음…. 그건….”
“뭔가 곤란한가?”
“내 의지로 수립한 계획이 아니오. 백련교주가 풍신류에 내린 직령(直令)이기에 내 맘대로 미루거나 하긴 어렵소. 내게 이야기를 전달하러 수신류 호법사자 독고준이 직접 왔을 정도로 중대하게 여기고 있는 일이오.”
“……!!”
“교주는 우선 빠른 시일내에 화산과 종남을 손에 넣고, 나아가서는 다른 정파들도 손에 넣으라는 명령을 했소.”
뭐라고?! 백련교주가 명령을 내린 거라고?!
영락없이 용중일이 혼자 날뛰는 거라 생각했기에 약간 당황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나는 용중일에게 말했다.
“백련교주가 너희를 움직여서 중원무림을 뒤흔드는 계획인가?”
“그 진의까진 교주가 전달하지 않았소. 우린 그냥 명령들은 대로 할 생각이었소.”
“제길… 짜증나는군.”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게 용중일의 독단이 아니라 백련교주의 계획이라면 문제가 커진다.
‘황산파를 막으려면 백련교주도 설득해야 하는 건가…!!’
백련교주를 만난다면 평화로운 삶과는 아주 쉽게 거리가 멀어질 수 있기에 최대한 안 만나고 싶었는데 상황이 이렇게 흘러갈 줄이야!
‘안 돼. 지금은 백련교주를 만날 수 없어!’
백련교주는 다른 놈들과 달리 어설픈 말빨로 대충 속여넘기기 힘들다. 무공도 엄청 높기 때문에 힘으로 겁박하는 것도 결코 간단치 않다. 결국 진심을 다해서 내가 전생자라는 걸 밝히고 설득하는 수밖에 없을 텐데 그건 정말 싫다. 이번 생만큼은 세계의 어둠이고 지랄이고 쉬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인상을 찌푸린 채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너도 백련교 내에서 한 끗발 하니까 어떻게든 최대한 미뤄 봐. 일 년 이상 미룰 수 있겠어?”
“으음…. 백련교주가 어떤 인물인지 알고 하는 말이오? 내가 풍신류 소종사라고는 해도 그가 손가락만 까닥하면 망할 정도요. 그는 일세의 패왕이자 간웅이오.”
“나도 알아. 그래도 어떻게든 해 보라고.”
“…….”
용중일은 떫은 표정으로 고뇌를 거듭하다가 문득 뭔가 떠오른 듯 말했다.
“…그러고보니 교주는 우리 말고도 황도 낙양에서 벌어지는 일에 무척 신경을 쓰는 기색이었소. 그 쪽에서 뭔가 일이 크게 터져준다면 내가 임무를 미루는 게 합리화될 수 있을지도.”
“아. 그건가.”
“뭔가 알고 있는 게 있소?”
당연히 알고 있다. 지금 이맘때쯤이면 황도 낙양에 팔부신중이 모여있을 것이고 그런 팔부신중과 의문의 고대존재가 대치하는 중이다. 그리고 그 와중에 백련교는 이중첩자인 의성 상관혁을 이용해서 낙양의 동향을 살피며 끼어들 기회를 노리는 중인 것이다.
‘하지만 거긴 엄청 위험하지.’
사도이자 마왕급의 힘을 지닌 드라큘라가 그 고대괴물한테 기습당하자 바로 피떡이 되어 죽어버릴 정도다. 지금의 내 힘으로도 그 환란을 해결한다는 보장이 없는 장소였으며, 최소한 백련교주 이상의 힘을 지닌 동료를 데려가지 않으면 아예 얘기가 되지 않을 정도의 마굴(魔窟)이 되어 있으리라. 그 일을 해결하는 것 또한 무시무시하게 어려울 게 뻔했기에 나는 고뇌할 수밖에 없었다.
‘아! 그러면 되겠다!’
나는 문득 좋은 꾀가 떠올라서 용중일에게 말했다.
“용중일. 좀 있다 나랑 싸워서 얻어맞고 쓰러져라.”
“뭐라고?”
“내 계획은….”
잠시 후 나는 변태술을 이용해서 내게 익숙한 늙은 도인의 모습으로 변신했다. 그리고 용중일과 사전에 말을 맞춘 대로 황산파 고수들의 눈에 아주 잘 띄는 공터로 향해서 서로 마주섰고, 시선이 느껴지자 나는 철검을 들어서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황산파 장문인 용중일!! 천하무림의 근본을 뒤흔드는 악독한 침범행위는 그만두시오!!”
용중일이 그 말을 받아서 연기하듯 외쳤다.
“하하, 호북의 무당파에서 설마 북방의 일에 섣불리 간섭할 줄은 몰랐구려! 노도장의 무공으로 감히 내 무력행사를 막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시오?”
“지금이라도 멈춘다면 천하만물이 평안해질 것이외다.”
“허튼소리! 무당파의 이름에 개나소나 겁먹을 줄 알았다면 큰 착각이오.”
“으음…. 천하동도를 위하여 그대를 쓰러뜨릴 수밖에 없겠구려….”
나는 크게 외치며 용중일에게 뛰어들었다.
“이 현천도인(玄天道人)의 검을 받으라!!”
콰치칭
콰과과광
그리고 나는 용중일과 겉보기만 요란한 의념절기와 검강을 치고 박으면서 약 삼백 초 동안 하늘을 뛰어다니며 전투를 벌였다. 초절정에서 뛰어난 실력을 지닌 자가 관전한다면 무슨 바보짓인가 싶을 정도로 허세 넘치는 전투였지만 황산파에 그런 실력자는 한 명도 없었다.
“오오오오.”
“저게 사람의 무공이란 말인가.”
“무당파의 현천도인…!!”
황산파 문인들이 밑에서 경악하며 관전하고 있자 신이 났다. 나는 최대한 요란하게 할 셈으로 검날에 잘생긴 용형검강(龍形劍罡)을 멋드러지게 키워낸 후 용중일에게 날렸다.
“무당천마팔황신살용검(武當天魔八荒神殺龍劍) - !!”
쿠구구궁!!
그런 무공은 딱히 무당에 없었고 존재하지 않는 무공이었지만, 용형검강이 날아오자 용중일은 적당히 비껴내서 맞는 척 하려는 듯 자신의 검을 휘둘렀다.
“허억?”
그러나 내 용형검강을 마주한 순간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낀 듯 안색이 파리해지면서 갑자기 진심으로 검을 휘둘렀다.
검형(劍形)
촤앙!!
아직은 미완성인 사신검형으로 무당천하팔황신살용검을 잘라낸 용중일은 크게 몸을 뒤로 젖히며 한참을 날아갔다. 그리고는 크게 지친 듯한 육합전성을 내게 보냈다.
[거, 겉보기라지만 당신의 내공이 너무 엄청나서 버겁소! 힘 좀 줄여주시오.]
아무래도 인간수준의 내공을 가진 용중일에게는 내공차이 때문에 버거운 느낌이 드는 모양이었다. 하긴 지금 용중일 입장에서는 절대지경 무공을 지닌 호법사자를 상대하는 거나 다름없을 테니 힘들 수밖에 없다.
[알았다!]
좀 더 내공을 줄여볼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 후 삼백여 초를 더 요란 벅적하게 싸웠다. 그리고 마침내 신호를 주자, 나는 용중일에게 돌격해서 그를 땅에 내리꽂으며 가슴팍에 장심을 대었다. 당연히 사전에 합을 맞춘 연기였기에 둘 다 다치지 않았다.
꾸웅!
“으윽….”
나는 바닥에 쓰러져서 신음을 흘리는 용중일에게서 물러서며 도호를 외웠다.
“무량수불. 내가 많이 봐 주었다는 걸 알고 있겠지?”
“…인정하오.”
“승패는 정해졌으니 이제 무도한 계획을 거두시길 바라오, 장문인!”
“어쩌란 말이오.”
“자숙하시오!”
용중일이 상처받은 듯 연기하며 말했다.
“과연 천하제일 무당이로구나…. 우리 황산파는 일 년간 봉문하겠소!”
“아아아!!”
“장문인!!”
근처에서 구경하던 황산파 문인들이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방금 전 그 전투를 보았기 때문인지 아무도 내게 덤벼들 생각은 하지 못했다. 황산파의 장로 네 명이 나를 원망스러운 눈으로 보며 말했다.
“무당파의 현천도인…. 분명… 듣기로는 무당에서 수위권의 실력자는 결코 아닐 텐데.”
“이건 말도 안 된다. 청자배 도인조차 그리 강하지 않을 터인데 어찌 우리 장문을 쓰러뜨릴 수 있단 말인가. 이게 천하제일 무당인가?!”
“천하제일검… 인가….”
“우리는 봉문의 수모를 잊지 않을 것이오!”
“…….”
음…. 여하튼 잘 해결된 것 같다!
[용중일. 교주를 잘 막아둬라.]
[맡겨두시오.]
나는 그 자리를 물러나면서 하늘로 날아갔다. 하늘로 날아가다보니 저절로 변태술은 풀린 듯 했다.
‘현천도인에게 갈까.’
나는 현천도인이 있는 도관으로 가서 그에게 정중하게 포권하며 말했다.
“현천도인.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부디 저희 소을촌에 와 주십시오.”
“허허. 너무나 뜬금없구려. 이 도관에서 오랫동안 정을 붙이고 있었기에 옮기기에는….”
쿠웅
“…….”
나는 금괴를 여러 개 내려놓았다. 현천도인의 표정이 약간 흔들리자 나는 무릎을 꿇고 말을 이었다.
“이 돈으로 도관은 물론이고 근처 고아들을 돕는데 큰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으으으음….”
“정 그러시다면 근처에 있는 산적무리들을 소탕하는데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오오. 도와주신다면 감사하오.”
나는 현천도인과 함께 산적무리를 싹 다 베어죽이고 납치된 사람들을 구출했다. 현천도인이 말했다.
“엄청난 무공의 소유자구려…. 설마 전설의 반로환동….”
“으음. 무공은 문제가 아닙니다. 저는 현천도인의 훌륭한 성품이 우리 마을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하여 왔습니다.”
그러자 현천도인이 감동한 듯 고개를 크게 끄덕이곤 말했다.
“좋소. 꼭 가겠소.”
“네. 그럼 들어가 주십시오. 다른 도관의 제자들도 같이.”
“응?”
슈슉
나는 현천도인과 도관 제자들을 목갑에 넣은 후 재차 이동했다. 나는 날아가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걸로 완벽하군.”
세상에는 난데없이 출현한 무당파 은거고수 현천도인의 전설이 퍼지게 될 테지만 본인이 소을촌에 들어가 있으면 목격담이 퍼지거나 사실확인을 하기가 어려워질 것이다. 그리고 백련교주는 황도 낙양의 변란에 신경쓰기도 벅찬 상태인데 용중일을 꺾은 의문의 고수 현천도인의 저력을 경계하게 될 것이고, 황산파의 진격을 최대한 멈추고 신중해질 게 분명하다.
관중의 환란을 어느 정도 잠재운 걸 느낀 나는 이번 여정의 최대 목적지로 갈 때가 다가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설마 이걸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래도 한번쯤 해보고 싶은 일이었다.
쉬익
나는 고려로 가서 몰래 화서명을 찾아갔다. 화서명은 야밤중이라서인지 쿨쿨 자고 있었고, 나는 그를 몰래 깨웠다.
“허, 허억!! 누구냐.”
“화서명 어르신. 절 받으십시오.”
“아니?!”
나는 대충 화서명에게 내가 화씨의 방계라는 걸 설명하고는 화씨의 침술을 보여줌으로서 그를 설득했다. 화서명이 어느 정도 상황을 파악하자 촛불을 켜며 침착하게 말했다.
“좋아…. 자네가 화씨 방계라고 치지…. 그런데 이 야심한 밤에 나를 몰래 찾아온 이유가 뭔가?”
“주변에 알려지지 않게끔 제게 시술 하나를 해 주셨으면 합니다.”
“허허…. 그래 어떤 시술을 받고 싶은 건가?”
나는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절세미남(絶世美男)으로 만들어 주십시오!!”
화서명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성형?! 으음…. 미안하지만 의술은 인술일세. 그런 걸 섣불리 해주기는 좀….”
“여기 금괴를 받으십시오.”
쿵
나는 상당한 양의 금괴를 내밀었고 화서명은 움찔하며 크게 동한 표정이 되었다. 나는 절실한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
“이 금괴를 쓰셔서 뭘 하시든 상관없습니다. 해 주시겠습니까?”
“…아니…. 음…. 그러니까….”
화서명이 고민하다가 금괴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며 활짝 웃었다.
“내가 잘못 생각했네! 사람의 외모를 고치는 것은 마음을 고치는 것과 같다네.”
“그렇다면….”
“인술(仁術)이 분명하네!!”
“감사합니다!”
잘생겨져서 미호에게 갈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