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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검신-1259화 (1,256/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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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이광의 얼굴은 잠시 붉으락푸르락하게 변했다. 그 얼굴은 내가 엉터리 가짜일거라 생각하면서도 차마 반박하지 못하는 현실, 그리고 그 현실때문에 자신이 억지로 구배지례를 청하게 되어버린 상황에 기가 막힘을 느끼는 게 틀림없었다. 이광이 손을 떨며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자 나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흠흠. 사람이 많아서 구배지례를 청하기 민망하느냐?”

“…심히 난감한 요구요. 설령 사숙의 말이 다 옳다 하여도, 본인의 체면을 세워주실 수는 없소? 굳이 이 자리 이 순간이어야 하오?”

“음.”

“이는 심술에 지나지 않소. 제자들 앞에서 창피를 당할 순 없으니, 부디 사숙께선 정상적인 요구를 해 주시오.”

이광의 말은 나름대로 절실했지만 나는 껄껄 웃었다.

“하하하. 뇌신지혼에 대한 너의 갈망이 알량한 무관주의 체면에 좌우될만큼 약한 것이었다니 참으로 슬픈 일이구나. 그래도 이청운 사형과의 마지막 연결고리인지라 꿈에서도 나올 정도로 집착하고 있을 듯 한데.”

네 체면따위 알 게 뭐냐.

나는 절대 포기 못해.

바로 지금 여기서 이광 네놈한테 구배지례를 받고 말 테다.

“…….”

이광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이청운과 뇌신지혼을 언급하니 그의 내면에 있던 욕망을 바로 끄집어낼 수 있었고,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쐐기를 박았다.

“하기 싫다면 나는 상관없다. 황산파 토벌의 일도 그냥 나 혼자서 하면 될 일이니, 너희 청룡무관과 나의 인연은 여기까지인 걸로 하지.”

내가 등을 돌리고 가려는 자세를 취하자 이광이 급히 외쳤다.

“자… 잠깐!”

“잠깐?”

“기다려 보시오.”

나는 이광이 정신차리지 못하게 호령을 내질렀다.

“이광. 네가 정녕 뇌신류냐? 속세의 체면에 쩔쩔 매는 꼴이 네가 욕하던 구파 도사들만도 못하구나!”

“……!!”

“오래 기다리지 않겠다. 딱 열을 셀 터이니, 그 안에 결정해라!”

부들부들

이광의 손발이 더 심하게 떨리는 게 보였다. 그는 평생 최악의 순간을 맞이하자 공황상태에 진입한 게 틀림없어 보였다. 나는 그 모습을 느긋하게 즐기면서 천천히 숫자를 셌다.

“십… 구… 팔… 칠… 육… 오….”

그 때였다.

넙죽!!

거의 동시에 극호와 진소청이 내 앞에 달려들듯이 절을 했다. 내가 놀라서 물끄러미 그들을 쳐다보자, 진소청이 흙묻은 이마를 번쩍 들면서 초롱초롱한 눈으로 말했다.

“곧 이광 사부님의 사부가 되신다면 제게는 태사부가 되십니다. 미리 절을 받아주십시오.”

옆에서 같이 절하던 극호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 저도 그렇습니다. 저는 극호라 하는데 제 절도 좀 받으십쇼.”

“…….”

다시 한 번 그들은 넙죽 하고 내게 절을 올리는 기색이었다. 이대로 존장에게 바치는 삼배의 예를 다해버릴 생각으로 보였다.

나는 진소청과 극호가 왜 이러는지 알고 있었다.

‘이광의 망신을 최대한 늦추고 그의 체면을 살려주려는 거군.’

이러니 저러니 해도 그들에게 있어서 이광은 유일한 뇌신류의 희망이자 빛이었다. 아무리 내가 항렬으로 이광보다 위라고 하더라도 모든 문하생 앞에서 대놓고 무릎을 꿇는 건 보고싶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해서 멈출 수 있는 일도 아니었으므로 차라리 자기들이 솔선수범해서 미리 망신을 당한 후 이광의 구배지례를 당연한 것으로 만들려는 배려가 틀림없어보였다.

나는 내심 투덜거렸다.

‘쳇…. 이 인간들아. 괜히 사람 마음약해지게 하지 말어.’

이건 나와 이광의 일이란 말이다.

스윽

나는 가볍게 양 손가락에 의념을 실어서 그들의 몸을 허공으로 띄웠다. 진소청과 극호도 초절정의 고수라서 내 의념에 저항하는 듯 했지만 내가 내공까지 실어서 살짝 천축검을 외부로 뿜어내는 묘용을 발휘하자 일어설 수밖에 없는 모습이었다. 그들이 억지로 일어서자 나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끼어들지 말아라. 너희의 절보다는 이광의 절이 받고 싶다!”

“으음….”

진소청이 침음성을 흘리자 옆에 있던 극호가 깐족거렸다.

“저기 백웅 사숙조님. 저희 절을 두 번밖에 안해서 이대로라면 대단히 무례해져버리는데 괜찮으십니까?”

“상관없다. 다른 자라면 몰라도 나한테는 그런 게 무의미해.”

“네?”

“그만 깐족거리고 물러나 봐라. 더 이상 끼어들면 가만 안 둔다.”

그 말에 극호가 칫 하고 물러섰다. 내 말이 진심이란 걸 알아챈 것이다.

더 이상은 물러날 데도 없다는 걸 깨달은 걸까? 이광의 안색이 도리어 침착해졌으나 여전히 뭐 씹은 듯한 표정은 변하지 않은 채 그가 앞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그리고는 말했다.

“뇌신류 종사의 제자 이광, 뇌신지혼의 전승을 위하여 사숙께 구배지례를 올리겠나이다!”

이광이 무릎을 꿇고 내게 머리를 조아려서 절을 했다. 나는 그걸 보는 순간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가는 걸 참으려고 엄청나게 노력해야했다.

‘히, 히히히. 히히히히히히히힛!!’

세상에 이럴 수가.

딱히 이광을 주먹으로 패거나 갈군 것도 아닌데 이렇게나 기분이 좋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 오만하면서도 표리부동한 이광이 나를 웃어른으로 받들어모시며 절을 한다는 사실 자체가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건 엄연한 현실이었으며 기분이 좋아서 하늘로 날아갈 것만 같았다.

이윽고 이광의 절이 이어졌고 구배의 예가 모두 끝나자 나는 절을 마친 이광에게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어나거라.”

이광이 흙빛이 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자 나는 충동에 휩싸였다.

‘그냥 지금 대놓고 청룡무관 문하생 앞에서 이광을 비꼬면 어떨까?’

무척이나 통쾌하지 않을까?

‘…아냐. 그런 건 별로지.’

하지만 나는 그 충동이 멋없다는 걸 깨달았다. 당장은 기분좋음이 목젖까지 차오를지는 몰라도 그건 좀 아니다. 이런 건 내가 괴롭히고 있다는 티를 내지 않아야 재미있다는 걸 무의식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어디까지나 사문의 사숙으로써 이광과 뇌신류를 위해 노고를 다 하는 도중에 생기는 불상사로 포장을 해야만 오랫동안 이 행위를 즐길 수 있을 게 분명하다!

나는 이광에게 점잖게 말했다.

“문하생들 앞에서 무릎을 꿇게 해서 미안하구나. 속이 상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사숙.”

이광이 어느 새 속내가 어쨌든간에 표정을 관리하는 게 보였다. 나는 그래도 속이 썩어들어갈거라는 걸 짐작하고 있었으므로 속으로 히죽히죽 웃으면서 근엄하게 말을 이었다.

“휴우, 앞으로 우리가 만들어나갈 새로운 뇌신류의 미래를 위하여 구차한 자존심과 자만은 필요치 않느니라. 그걸 깨닫게 하기 위해 다소 거친 방법을 써서 미안하구나. 뇌신지혼을 위해서라면 무릎 정도 꿇을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

“자, 다같이 안으로 들어가서 술이나 한 잔 하자꾸나.”

나는 이광에게 다가가서 어깨를 툭툭 쳐주며 끌어안으며 말했다.

“오늘은 좋은 날이니 약주를 꺼내는 게 좋겠지?”

그러자 이광은 안간힘을 쓰며 표정을 관리하며 대답했다.

“…크흠…. 소청아. 약주를 꺼내오거라.”

“네, 사부님.”

나는 그런 이광을 힐끔 보면서 내심 킬킬 웃었다. 원래 이광의 기분이 좋아야 약주를 갖고나오는 법인데 그런 걸 다 무시하고 기분이 엿같을 때 약주를 꺼내게 하는 건 그의 신경이 긁히게 하는 것이리라.

잠시 후 안에서 술상이 나오고 넷이 탁자에 앉자 나는 약주 잔을 들어서 이광에게 내밀었다.

“자, 한 잔 따라보거라!”

“…….”

이광이 탁자 밑으로 넣은 왼쪽 주먹이 불끈 쥐어져서 부들부들 떨리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런 것과는 별개로 이광은 일단 미소를 띄면서 그 주먹을 자연스럽게 펴면서 꺼냈고 두 손으로 약주를 내게 따라주며 말했다.

“입에 맞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하. 당연히 입에 맞겠지. 네가 어림군 총사범일 때 수집한 술이니 중원에서도 손꼽히는 명주가 아니겠느냐.”

이광의 얼굴이 또 굳어졌다. 그 사실을 어떻게 아느냐는 사실에 놀란 게 분명했다.

나는 껄껄 웃은 후 게슴츠레한 눈으로 이광을 보며 히죽 웃었다.

“우리의 모험은 이제 시작일 뿐이니 각오 단단히 하거라!!”

정말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이광!!

달그락 달그락

나는 술과 음식을 즐기는 동안에 이광과 청룡무관 문하생들에게 일단 황산파를 토벌하게 된 사정을 다 이야기했다. 그러자 이광이 찝찝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단지 화산파에게 마을의 발전을 도움받았다는 이유만으로 황산파같은 거대한 문파와 싸우기로 하신 겁니까?”

“그렇다. 뭔가 문제라도 있느냐?”

“…….”

이광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황산파는 들리는 바에 따르면 장문인인 도룡신검(屠龍神劍) 용중일(龍重壹)의 무공이 심후하다 합니다. 괜히 들쑤시면 의외의 피해를 입을까봐 저어됩니다.”

그는 그 말만 하고는 관심없다는 듯 식사를 하려는 듯 젓가락을 움직였다. 당연히 이광의 이런 행동도 반발감을 느끼고 있다는 걸 뜻했다.

“호오….”

구라치는군, 이광.

예전에는 종남파도 그렇고 모든 구파를 한수아래로 깔아보는 안하무인이었던 걸 기억하고 있다. 당연히 황산파가 사실 풍신류이며 백련교의 지부 중 하나라는 걸 모르는 지금은 잡졸무리 이상도 이하도 아닌 걸로 인식하고 있으리라. 그런데도 저런 변명을 한다는 건 내 뜻에 따라 황산파 토벌에 나서는 게 내키지 않다는 뜻이리라.

‘좋다. 이광 네가 자기 일도 아닌데 열심히 나서지 않을 거라는 건 미리 예측했어. 그럼 계획대로 자극을 해 볼까.’

나는 싱긋 웃으며 식사를 하고 있던 이광에게 말했다.

“그 도룡신검 용중일이 용씨(龍氏)라는 걸 이상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느냐, 이광?”

멈칫

반찬을 자신의 접시로 옮기던 이광의 젓가락이 멈추었다. 그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내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사숙?”

“스승님.”

“스… 스승님.”

“실은 반로환동하여 세상 여기저기를 떠돌던 중 재밌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번에 내가 황산파를 치기로 한 것도 화산파를 위해서만은 아니지.”

나는 팔짱을 끼며 전생도중에 얻은 정보를 입 밖으로 꺼냈다.

“용중일은 풍신류의 호법사자인 용비천의 아들이며 풍신류의 후계자다. 또한 황산파는 백련교의 중원지부라고 할 수 있지.”

“……!!”

“이번에 화산파와 종남파에 선전포고를 한 것도 뒷배에 백련교가 있기에 저지른 일이다.”

내 말에 당혹한 건 이광만이 아닌 듯 진소청과 극호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광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말했다.

“정말입니까?”

“감히 스승님의 말을 의심하는 거냐? 애들 앞에서 대가리 박을테냐?”

“아, 아닙니다.”

내가 으르렁거리자 이광은 떨떠름하게 말을 이었다.

“믿기지 않는군요. 풍신류가 설마 구파의 일좌를 차지할 정도가 되었다니.”

“물론 용중일은 뛰어난 인물이라 풍신류의 무공 뿐만 아니라 황산파 본연의 고류무공도 달인급으로 익힌 자다. 어쩌면 그 애비인 용비천보다 더 강할지도.”

나는 거기까지 말한 후 전을 한입 집어서 우걱우걱 먹으며 이광을 도발했다.

“지금의 네가 목숨걸고 싸워도 용중일의 한쪽 팔도 뺏지 못할 것이다, 이광.”

“…….”

이광은 분노와 호승심으로 부글거리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그러면서도 냉정하게 자신을 잃지는 않는 모습이었다. 그는 태연한 척 술을 들이키며 말했다.

“사숙… 아니 스승님께서 저희를 이끌어주신다면 용중일의 목숨도 빼앗을 수 있겠군요.”

“하하, 그렇지. 그런데 말이다…. 네가 놈들을 쓰러뜨리기 전에 먼저 해야할 일이 있다.”

“그게 무엇입니까?”

나는 이광에게 말했다.

“청룡무관을 닫아라.”

“…네?”

잘못 들었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이광에게 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오늘부터 너희 모두는 소을촌의 무술사범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소을촌에서 새로운 뇌신류의 맥을 이어나가는 일에 동참할 수 있겠지?”

“…….”

한참 후, 이광은 모든 문하생들을 부른 후 떨리는 목소리로 청룡무관의 폐관을 알렸다.

“금일 부로 청룡무관은 폐관한다. 청룡무관의 가르침을 끝까지 따를 자들은 나를 따라 소을촌으로 오거라!”

“에엥.”

“소을촌이 어디 있습니까.”

이윽고 소을촌의 위치와 궁벽한 산골마을이란 게 문하생들에게 알려지자, 문하생들은 약 반 시진 가까이 저마다 모여서 수군거렸다.

우르르

그리고 그들은 거의 모두 흩어져서 자기 집으로 가 버렸고, 남은 것은 원래 사범이었던 윤광과 지평, 그리고 끝끝내 고수의 꿈을 버릴 수 없는 방일 뿐이었다.

“…….”

이광은 이거밖에 남지 않았다는 게 믿기지 않는지 멍하니 서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럴 만하다 생각했다.

‘문하생들 대부분이 관중에 집이 있고 적당히 무인의 꿈을 꾸고 있는 속편한 녀석들이었지…. 그다지 절실한 놈은 많이 없었어. 하물며 이광이 방금 전 그 꼴을 보여주고 시골마을로 간다는데 따라올 의리까지 가진 놈이 있을 리가.’

이걸로 해냈다.

이광의 마음의 줏대 중 하나였던 청룡무관을 분쇄시킴으로써 한층 궁지에 몰아넣은 듯 했다.

하지만 왠지 남아있는 녀석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나는 방일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이봐, 방일. 소을촌에 가는 게 얼마나 터무니없는 일인지 다들 깨닫고 도망쳤는데 너는 따라오는 거냐?”

“으으으윽…!!”

방일은 두 눈에서 굵은 눈물을 흘리면서 버럭 외쳤다.

“나, 나, 나는 고수가 되, 될거요…. 으흐흑… 지금까지 몇 년을 썼는데… 고수 되고… 싶소….”

나는 그런 방일을 보자 왠지 짠한 느낌이 들어서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좋아. 내가 약속하지…. 넌 고수가 될 거다.”

방일 녀석도 보답받을 때가 온 건가.

이번 삶에 방일을 천하에서 손꼽히는 고수로 키워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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