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6====================
사신지혼(四神之魂)
나는 수요의 보물 외에도 낙양의 용문석굴을 한 번 들러서 안에 있던 보물을 갖고 나왔다. 이외에도 더 가볼 만한 탐사지가 더 있었지만 나는 이제 슬슬 마을로 가 보기로 했다.
‘뭐, 이 정도면 됐겠지.’
수요의 유적에서 얻은 것만으로도 차고 넘친다. 더 이상 캐어봐야 쓸데없이 행동의 규모만 커지고, 가진 게 많아지니 생각만 많아질 뿐이다. 지금 내가 하려는 건 세상을 구원하는 게 아니라 마을을 운영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촌장에게 더 이상의 보물은 사족에 가까울 것이다.
나는 마을에 도착한 후 금천재, 금만재, 연종휘 등을 불러내서 임시회의를 가졌다.
“다들 알고 있겠지만 대뢰옥에서 구출한 포로 수백여 명이 목갑에 있다. 이제 그들을 촌민으로 받아들여서 소을촌에서 살게 할 생각이다.”
원래라면 무영문에 의탁시키거나 고려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전자의 경우 무영문에 너무 과한 빚을 지우는 것이기에 흑요석도 공유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좀 과한 느낌이 있었고, 후자의 경우는 내 행적이 십이율에 알려져서 앞으로 귀찮아질 우려가 커서 피하는 것이다.
내 말에 금천재가 울상을 지었다.
“초, 촌장님…. 전에 듣기로 그들 중엔 지체 높은 분이나 황연 대장군도 있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들을 이 마을에서 거둔다는 건 황궁에 적대하여 역모를 꾸미는 것이라고 보일 것입니다요….”
“역모? 당장 황궁에 쳐들어가서 황제고 뭐고 다 죽여 버릴 수도 있으니 상관없어. 몇 번 해본 적도 있고.”
“히이익.”
그들 모두 아연해 하는 기색이었지만 나는 허세가 아니었다. 이제 와서 황궁의 후환 따위를 두려워하기에는 황궁과 차원이 다른 초강적을 너무 많이 만나왔던 것이다. 게다가 금의위를 거의 몰살시킨 지금에야 당장 직접적인 후환을 두려워할 일이 뭐가 있을까?
“그런 걱정은 집어치고, 그들이 이 마을에 정착하는데 당장 필요할 게 뭘지 의견을 내 봐.”
“…….”
옆에서 생각을 하고 있던 금만재가 제일 먼저 의견을 꺼냈다.
“그들을 제대로 대우한다면 돼지우리 같은 헛간에 묵게 할 수 없으니 충분한 세간을 마련한 가옥을 마련해주어야 합니다. 그 숫자가 백 수십여 명으로 알고 있는데, 약 6인에게 하나의 집을 배정한다 치더라도 넉넉잡아 서른 개 정도의 가옥을 추가로 지어야 하며 그 가옥은 유사시에 외적에 맞서 싸우거나 대피할 수 있는 위치에 지어져야 할 것입니다.”
“흐음. 괜찮은 의견이군. 그럼 서른 개 정도의 집을 더 짓는다는 거지?”
그러자 금천재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아, 안됩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이 마을은 분지지형이고 사람이 살만한 부지는 생각보다 없습니다. 일부를 제외하곤 전부 쓰임이 있는 농지(農地)입니다. 추가로 가옥을 지어도 최대 열 개 정도이고 서른 개는 절대로 무리입니다요. 억지로 짓는다 해도 닭장처럼 변할 것입니다요.”
“그까짓 농사해서 수익이 얼마나 난다고 그래? 어차피 이 마을은 매화표국 표행에서 마을에 머물며 쓰고 가는 돈이 진짜 수익 아니었어.”
“그, 그렇긴 합니다만 이런 일을 진행할 때 지나치게 부자연스러우면 안 좋지 않겠습니까? 피치 못하게 원래 촌민들의 땅을 강제로 뺏고 훼손하는 건데 그들이 앙심을 품고 마을 내부의 사정을 밖으로 알리려 하면….”
“흐음.”
그것도 맞는 말이다. 보통 이럴 때 그냥 촌민들을 학살한다는 생각도 하겠지만 나는 그렇게까지 할 생각이 없고 일단 기존의 촌민 또한 자연스럽게 끌어안는 게 좋으리라. 나는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마을을 더욱 넓히는 수밖에 없겠군. 이 근처에서 공릉촌(孔綾村)으로 통하는 좁은 길목의 양옆에 있는 산(山)을 없애버리겠다.”
“산을요?!”
“그 산이 없어진 만큼 사람이 살 공간이 생길 거 아냐.”
“충분할 거 같긴 합니다만….”
금천재가 말을 우물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그, 그래도 사람은 필요합니다. 집을 짓는 인부도 그렇고 여러모로….”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은데.”
“화산파의 도움을 받는 게 어떠실지…. 화산파는 영향력이 강하니 집을 잘 짓는 목공들을 쉽게 소개시켜줄 수 있을 겁니다.”
“그렇군. 그게 좋겠어.”
나는 금천재의 의견을 수용한 후 곧장 근처의 야산으로 향했다. 분지지형답게 이 마을에서 다른 마을로 가면 좁은 통로 같은 산길을 통해가거나 아예 산을 통째로 넘는 수밖에 없었고, 그 중심에 있는 산이 바로 공릉촌과의 사이에 있는 두 개의 산이었다. 나는 그 중 하나의 산을 깎아내려 작정한 것이다.
고오오오
나는 내공과 의기를 집중한 후 그대로 쌍장에서 거대한 기운을 발사했다.
“뇌령인!!”
쿠콰콰쾅
뇌령인을 약 두세 번 정도 쏟아 붓자 커다란 산의 절반 이상이 날아갔다. 사실 일격으로 날릴 수도 있었겠지만 과하게 힘을 쓰면 다른 마을까지 뚫고 날아갈 수도 있었기에 조금 힘조절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약 이백여 장 정도의 새로운 텅 빈 부지가 생겨나자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되돌아오자 연종휘가 말을 걸어왔다.
“갔다오시는 동안 이야기를 해 봤는데 화산파에서 목공집단을 소개받는 동시에 당분간 매화표국을 통해 식량을 많이 융통해야할 듯싶습니다.”
“식량을?”
“네. 먹을 입에 전체 마을인구의 이 할 이상 늘어났으니 당연히 식량이 많이 필요할 터…. 한동안 식량마차가 끊이지 않게끔 해야 합니다. 또한 매화표국에도 그만한 돈을 줘야합니다.”
“좋아. 매화표국에 잠시 갔다오지.”
“그 역할은 제게 시켜주시지 않겠습니까?”
“연종휘 네가 갔다오려고?”
내 반문에 연종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사소한 일까지 허공답보를 쓰시며 주변의 이목을 끌게 되면 조만간 화산파를 제외한 무림세력이나 강호의 기인들이 접근해오지 않겠습니까. 잡스러운 일은 부하에게 시켜주십시오.”
“그것도 그렇군…. 그럼 이 금괴를 가져가라.”
나는 연종휘에게 교섭에 필요한 금괴를 주었고 연종휘는 등에 큰 자루를 메고 금괴를 넣었다. 그리고 연종휘가 출발하자 나는 금천재와 금만재를 힐끔 보며 말했다.
“연종휘가 갔다오는 동안에 너희에게 간단한 무림의 호흡법을 알려주지. 호신술의 일환으로 익혀둬라.”
청룡무관의 비전심법인 뇌룡일기공(雷龍一氣功)을 가르칠 생각이다.
“으윽.”
“만세!”
그러자 금천재는 우거지상을 지었고 금만재는 뛸듯이 기쁜 표정을 지었다.
“약속을 지키시는 거군요.”
“…엉. 열심히 배우면 더 많이 가르쳐 주마. 근데 금천재 너는 왜 죽을 표정이야?”
“아니… 그게…. 음….”
“빨리 대답해.”
“무공의 기초를 가르쳐주신다는 건…. 앞으로도 위험한 일에 발을 들이게 된다는 소리 같아서 말입니다요….”
“…….”
금천재 놈, 역시 나이와 경험이 있어서 그런가? 내가 왜 가르치는지 대충 눈치를 채 버렸군! 그에 반해 금만재는 숨길 수 없을 정도로 기뻐하고 있어서 어른스러운 척은 하고 있어도 애새끼라는 걸 여실히 알 수 있었다. 나는 되려 퉁명스럽게 말했다.
“잘 알고 있군. 그럼 안 죽게 열심히 배워두는 수밖에 없겠지?”
“아, 알겠습니다….”
나는 떨떠름해하는 금천재와 기뻐하는 금만재에게 약 세 시진 동안 뇌룡일기공의 호흡법과 기초적인 권장법을 가르쳤다. 그리고 기초중의 기초를 알려주는 게 다 끝났을 때쯤 연종휘가 마을로 돌아왔다.
“매화표국주와 얘기를 다 해 두었습니다. 머지않아 그가 목공을 수소문할 것이고 화산파의 도움도 받을 테니 식량원조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잘했다 연종휘.”
“이제는 뭘 하실 생각이신지…. 목공과 식량이 도착하려면 적어도 사나흘은 걸릴 것입니다.”
“지금 당장은 할 게 없으니 너희 모두에게 무공이나 몇 줄 가르쳐 주마.”
“……!! 감사합니다.”
나는 며칠 동안 금천재와 금만재, 연종휘 셋에게 내가 알고 있는 무공을 최선을 다해 가르쳐 주었다. 물론 전자의 두 명은 완전히 문외한이었기에 호흡법 전수가 대부분이었고 연종휘는 초절정의 경지에 발을 들인 뛰어난 후기지수였기에 그에게는 대뜸 흑백련을 주기로 했다.
“이것은?”
“흑련과 백련을 동시에 섭취하면 내공이 크게 증진될 것이다.”
쿠우우우!!
내 말대로 흑백련을 먹고 내공이 크게 늘어난 연종휘가 깜짝 놀란 듯 했다. 그는 경악한 듯 입술을 덜덜 떨었다.
“헉. 설마 그 계곡에서 캤던 수십 송이의 연꽃이 전부 영약이었단 말입니까?”
“그래. 먹을 만 하지?”
“…….”
“이제 네 내공은 대문파의 장로를 훨씬 상회할 거다. 약간의 깨달음과 무공을 얻으면 무림 최상위 고수들과도 손을 겨뤄볼 정도로 발전할 수 있겠지.”
“도대체 촌장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천하의 백련교주라 해도 촌장님보다 강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백련교주라….”
나는 그리운 듯 허공을 바라보며 읊조렸다.
“내가 예전에 백련교주를 부하로 들인 적도 있었던 것 같군….”
“…….”
“아니 진짠데….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야.”
암만 그래도 이런 뻥은 못 믿겠다는 눈이잖아!
“으음. 대… 단하십니다.”
“진짜라고.”
나는 투덜대면서도 일단은 연종휘에게 무공을 가르쳤다. 무난하게 굴공천축검을 가르쳐 주면서 팔선신공을 하나하나 펼치면서 소개해 주었고, 개중 그의 궁술에 결합할 게 있을지 배워보게 하기로 한 것이다. 또한 금천재와 금만재에게도 흑백련을 하나씩 먹여서 큰 내공을 얻게끔 했다.
그렇게 약 5일 정도가 지났을까? 마을에 거대한 마차무리가 들어오기 시작했고 그 마차를 인솔하는 자들 두 명이 내게 찾아왔다.
“소을촌장님. 저는 화산파 밑 목공마을의 일두(一頭) 지설환입니다요. 매화표국에서 선금을 받고 16인의 목공을 이끌고 왔습니다요.”
“소을촌장님. 저는 매화표국의 부국주(副局主)입니다. 오늘부터 식량을 비롯한 물자를 계속 운반하도록 하겠습니다.”
“잘 부탁하네.”
따당 따당
목공들이 매화표국에서 운송된 각종 목재와 재료를 이용해서 산을 깎은 큰 부지에서 집을 짓기 시작했다. 나는 옆에서 그걸 쳐다보다가 목공일두 지설환에게 말을 걸었다.
“언제쯤 다 짓겠나?”
“늦으면 보름 정도…. 보통 집을 제대로 지을 때는 열흘은 잡습니다요.”
지설환의 말대로였다. 집은 딱 열흘 하고도 이틀 정도가 더 걸려서 모두 완공되었고 무려 오십여 개나 되는 가옥이 새로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나는 집이 다 지어지자 목공들과 표국사람들을 돌려보내고는 목갑에 있던 포로들을 꺼내었다.
“허억.”
“여긴 어디….”
나는 그들 중 황연 대장군에게 다가가 포권하며 말했다.
“황연 대장군. 당분간은 여기서 머물러 주십시오.”
“흠…. 그대는 도대체 누구인가?”
“소을촌의 촌장인 백웅입니다.”
“…….”
멍한 표정을 짓던 황연 대장군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허허헛!! 그대는 마치 인간세상에 유희(遊嬉)를 나온 신룡(神龍)과 같은 존재로군. 어찌되었건 이만한 호의라니 감사히 받도록 하겠네.”
나는 사람들을 시켜서 포로들을 씻기고 각자의 집에 살도록 배정해 주었다. 집을 넉넉하게 지어 오십 개나 되었기에 그들은 별다른 불만 없이 들어가서 살기 시작한 듯 했다.
‘어차피 대뢰옥에 있던 강호인들도 무공이 폐쇄당해서 별달리 갈 데가 없으니….’
그런데 그들이 배정되는 과정에서 금만재가 입을 헤벌레 벌리면서 어딘가에 시선이 고정되어 있자 나는 어리둥절해서 그 시선이 향하는 곳을 보았다.
‘아미파의 현화신녀인가?’
구출시기가 빨랐기에 금의위에게 범해지지 않은 듯한 그녀는 강호에서도 이름난 아름다운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아무래도 금만재는 현화신녀를 보자 그 미색에 마음이 동한 모양이었다. 나는 기가 막혀서 금만재의 뒤통수를 때리며 말했다.
“이놈아! 포로들에게 손을 대면 진짜 찢어죽여버린다.”
금만재는 찔끔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누가 손을 댄댔소? 하지만 저쪽이 내게 반하는 건 어쩔 수 없을 것이오.”
“…….”
와…. 이 녀석…. 현화신녀를 무시하는 건가?
그것보다 원래부터 이런 성격이었구만….
나는 금만재라는 인간을 새삼 깨닫고는 고개를 저으며 생각했다.
절대 이 놈은 그 놈이 아니야….
그리고 포로들의 거취가 어느 정도 정해지자 나는 황연 대장군에게 가서 일대일로 비밀스럽게 대화를 나눴다.
“황연 대장군. 죄송합니다만 저는 황궁에 대적해서 싸우거나 혁명을 일으킬 생각은 없습니다. 인간이하의 취급을 하는 대뢰옥에서는 구해드렸습니다만 황 장군을 도울 수 없음입니다.”
“허허…. 이해가 가지 않는군. 그대의 힘은 이미 황조와 십만대군을 단신으로 멸할 정도일진대 이런 시골의 촌장으로 만족한다는 것인가?”
“…황제 같은 건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부탁일세. 지금 황궁은 어둠의 힘에 물들어 있네. 그들을 막지 않는다면 대명제국의 무수한 민초들이 고통받게 될 것이야.”
“그건 제가 알아서 해결하도록 하겠습니다.”
“뭣이?”
“황궁의 어둠이나 세상의 평화 같은 건 제가 이루겠다고 약속해 드리죠. 대신에 황 장군께서는 여생을 이곳에서 조용히 보내주시기로 납득해 주셨으면 합니다.”
“…….”
“처우에는 절대 부족함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황연이 처음으로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잠시 후 호탕하게 웃었다.
“뿌헐헐…. 농담인줄 알았는데 너무나 진심이군. 그대는 진짜 신이었단 말인가?”
“신을 언젠가 없앨 생각은 있죠.”
“허허…. 그대같은 자가 약속을 한다면 꼭 지키겠지. 나는 그 약속을 믿도록 하겠네. 소을촌의 한 촌민이 되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나는 황연을 설득하고 나와서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래.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한 번은 거쳐가야 할 일이라면 빨랑 해치우는 게 낫겠군!”
어영부영하다가 내 촌장의 삶에 영향이 오면 곤란해!
사소한 걸 지키기 위해서는 전력을 다해야 하는 거라고!
나는 황연과의 대화 도중에 생긴 결심을 실천하기로 마음먹었다.
“연종휘. 한동안 마을에 외적이 침입하면 네가 쫓아내라.”
“네.”
나는 연종휘에게 경계를 시키고는 곧장 날듯이 어디론가 뛰어갔다. 나는 한참을 뛰듯이 날아가다가 숲속에 천암비서를 묻어놓고는 마을 내부로 진입했고, 내부로 진입하자마자 익숙한 목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다.
“넌 누구인가?”
“천우진.”
“날 아는가?”
나는 환술결계 내부에서 모습을 드러낸 환신 천우진을 보았다. 내가 찾아온 곳은 바로 망량선사의 마을이었고, 나는 천우진에게 말했다.
“망량선사를 만나러 왔다. 으으음….”
그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나는 비틀거리며 커다란 수면욕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게 망량선사가 부르는 징조라는 걸 알고 있는 나는 그 수면욕을 거절하지 않고 순응했지만 동시에 조금 두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내 힘으로 망량선사의 수면에 저항할 수 없다는 걸까.
꿈의 오솔길이 펼쳐졌다.
나는 오솔길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흑묘, 망량선사를 보며 말했다.
“망량선사. 나는 전생자 백웅이다.”
[…….]
“나는 당신에게 부탁을 하러 왔어.”
[어떤 부탁을 하러 왔지?]
“그건….”
이윽고 내가 ‘부탁’을 말하자, 망량선사는 그 자리에 다소곳이 앉은 채 눈을 깜박이는 듯 했다. 망량선사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어지간히도 풍파에 시달린 듯한 전생자로구나. 확실히 네 생각대로라면 운명의 파도에 휩쓸려 사소한 삶이 망가지는 걸 피할 수 있을 터, 그러나 그 이상의 거국적인 가능성에서는 눈을 돌리는 행위가 될 것이다.]
“…….”
[전생자로서는 손해를 본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
망량선사가 무표정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좀 더 전력을 다해 파고들면 지금까지 이상의 성과를 이룰 수도 있을 터인데 정말 그걸로 만족하는가?]
망량선사의 말은 내가 평소에 찔려하던 핵심을 찌르고 있었다.
과연 이렇게 가는 게 맞는가?
하지만 나는 이내 당당하게 대답했다.
“운명의 큰 파도에 휩쓸리기 전에 이쪽에서 선수를 친다! 그 결심은 달라지지 않았어!”
[호오….]
“어차피 충분한 힘도 없는 상태에서 큰 파도에 올라타려고 용을 써 봐야 이래저래 이용만 당할 뿐이야!! 나는 그런 건 이제 질렸으니까 이번 생만이라도 마음 편하게 살고싶은 거라고!!”
내가 버럭 소리를 치자 망량선사는 침묵했다. 그러더니 천천히 말했다.
[좋다…. 각오를 확인했다. 그럼 네 부탁의 대가로 수요를 공양받겠다.]
“수요 정도면 싸지.”
우우웅
수요가 빛에 휩싸여서 망량선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 망량선사의 모습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으며 그 아련한 별무리 같은 뒤편에서 무언가 거대한 것이 지평선에서부터 모습을 드러내는 게 보였다.
고고고고고
마치 인간과 팔초어를 합친 듯한, 그러나 한없이 두렵기 짝이 없는 거대한 존재 - 인간이 쳐다보기만 해도 미쳐버린다는 그 괴기의 절정이자 현 지상 최강의 절대마(絶對魔)가 지평선에서 융기하는 게 보였다.
‘왔구나.’
그 장엄하고 두려운 광경에서 나는 두려움을 가볍게 이겨내고 결심을 더욱 굳혔다.
잠시 후 그 거대한 무언가가 내게 말을 거는 게 느껴졌다.
[내 초대장을 거절했으면서 이렇게 귀찮은 방식으로 불러내는 이유가 무엇인가, 전생자.]
나는 그 존재의 말에 주먹을 꽉 쥐며 크게 외쳤다.
“네가 준 초대장을 갖고 네 본거지에서 얘기하는 건 싫었으니까! 그리고 앞으로도 그런 식으로는 절대 네 앞에 가지 않을 것이다!”
[…그런가…. 후후….]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
나는 그 존재에게 삿대질을 하며 외쳤다.
“어차피 난 이번 생에 죽어도 네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을 거다! 그러니까 이번 생은 너도 포기해! 이 세상에 드리워진 모든 네 영향력을 포기하라고!! 적어도 이번만큼은 확실히 쉬려고 마음먹었으니까!”
[…….]
나는 목에 핏줄이 생길 정도로 악을 썼다.
“어둠의 음모라든지 세상파멸이라든지 질렸어! 그딴 일이 벌어지면 죄다 네놈 때문인 걸로 생각할 거다! 실제로도 그렇잖아? 난 그 말을 하러 너를 부른 거다!”
[…호오…. 제멋대로구나…. 내가 그리 할 것 같은가?]
“그렇게 하게 될 거다.”
드디어 시작되었다.
나는 이 설득에 이번 평온한 생의 모든 운명이 담겨있다고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다.
“흉신(凶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