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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푸른 불꽃이 바람에 날려가는 듯 했다. 경건한 흐름이 저 삿갓 무사의 어깨 끝에서 손가락을 타고 칼날 끝으로 흘러내리는 동안 은빛 구슬같은 기운이 칼날끝에 맺혀서 더욱 커지는 게 눈에 보였다. 아주 짧은 순간 나타난 변화였지만 절대지경에 이른 내 감각은 그 찰나의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의념(意念)인가?’
확신할 수가 없다. 천공에 비치는 영상만으로는 그저 시각적인 효과가 비칠 뿐이고 직접 저 기운의 실체를 알기 위해서는 눈 앞에서 대적하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나는 그 순간 내가 왜 이런 고민을 했는지를 고민했다.
당연히 절대지경 이상의 고수라면 저런 초월적인 현상을 구현화할 때 의념을 쓰지 않는가.
나는 왜 의념으로 이뤄진 현상이라는 걸 의심한 거지?
내가 찰나지간의 망념(妄念)에 휩싸여 잠시 집중력이 흐트러진 사이, 쐐액 하는 소리와 함께 삿갓 무사의 칼날이 전방으로 휘둘러지는 게 보였다.
전형적인 발도(拔刀).
발도세에서 발도가 뿜어져 나옴은 무예인으로서 전혀 이상할 일이 없는 일이었지만 도리어 그 평범함에 맥이 빠졌다고 하는 편이 옳으리라. 사실 발도술의 귀재나 명인들을 살면서 꽤 많이 보아왔기에 삿갓 무사의 발도술이 그리 특별할 것도 없는 탓이었다. 애초에 발도술 자체가 대단한 필살기라기 보다는 빠른 선공(先攻)을 얻기 위한 기술 중 하나에 불과하기도 했다.
‘빠르지도… 위력적이지도… 정밀하지도… 기운을 담지도 않았다.’
차라리 십이율 문주들의 검술이 낫다고 생각할 정도로 지극히 평범한 일기(一技).
저 정도는 나도 할 수 있겠군 -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이었다.
사악
아주 은밀하고 조그마한 소리가 귓전을 간지른다. 책의 종잇장을 넘기는 듯한 얇은 소리가 소나무잎처럼 흩날렸다.
동시에 갑자기 제곡의 백색 몸뚱이 한가운데에 아주 은은하고 가느다란 호선(弧線)이 그려져 있었다. 어째서, 왜 그게 생겨났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제곡이 그 호선을 향해 시선을 향하듯 힐끔 쳐다본 순간 일이 벌어졌다.
푸콰콰콱
[……!!]
제곡의 몸이 크게 휘청하면서 그 호선에서 꿀렁거리며 백혈(白血)이 흘러나왔다. 나는 그래봤자 제곡이 방금 전 목이 베였을 때처럼 [작은 굴레]를 조작해서 원래대로 돌아올거라 생각하며 무감각하게 관전했지만 이윽고 뭔가가 이상하다는 게 느껴졌다.
[…놈… 이놈… 감히….]
비틀거리는 제곡의 신형은 평정을 찾지 못하고 마치 주취한 걸인처럼 흔들리고만 있었다. 나는 저게 제곡 나름대로의 농락법인가 싶어서 의아해 했지만, 내 옆에서 관전하고 있던 아수라가 경악한 듯 입을 벌린 채 중얼거리는 게 들렸다.
“저… 저건 연기가 아니다!”
“뭐?!”
나는 물론이고 옆에서 같이 보고 있던 토벌대 대부분이 깜짝 놀라서 아수라를 보았다. 아수라는 경악때문에 전율한 듯 상반신을 부들부들 떨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중상(重傷)이다!! 저 백혈은 신성(神聖)이 파괴된 게 틀림없다!”
그리고 아수라의 말이 끝나는 순간, 제곡의 몸이 갑자기 거대화하며 크기가 십여 장에 이르는 백색의 거인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우우우!!
변신을 끝낸 제곡은 한쪽 팔을 곧장 삿갓 무사에게 내뻗었고, 손바닥 한가운데에서 시뻘건 눈이 빛나는 게 보였다.
[너를 보겠다.]
삿갓 무사는 그 공격을 막아내려는 듯 또다시 발도자세를 취하려 했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어있었는지 그가 손에 칼을 잡기 전 삿갓 무사의 전신은 멈춰져 버렸고 제곡의 적안(赤眼)이 흉맹한 빛을 내뿜으며 강렬해지기 시작했다.
‘저 기술은…!!’
과거 창힐과 팔부신중 앞에 나타난 제곡이 일격에 팔부신중들을 제압할 때 썼던 기술! 제곡의 적안이 [보는] 대상은 그 어떠한 능력도 쓰지 못하며 그대로 멈춰버리는 게 틀림없었고, 마왕들조차 속수무책으로 당한 바가 있었다.
쩌저적….
삿갓 무사의 전신에 적안의 잔영(殘影)이 떠오르며 뒤덮이는 것 같았다. 더 이상은 반항조차 할 수 없게 된 게 분명했다. 그리고 일격에 삿갓 무사를 제압한 제곡이 말했다.
[네놈은 대체 무엇이냐? 무엇이길래 [작은 굴레]로 회복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냐? 그 검기(劍技)는 무어란 말이냐!!]
그 호통이 떨어지는 순간 삿갓 무사의 전신이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그걸 본 아수라가 중얼거렸다.
“…끝장이군. 삼황오제 제곡이 자신의 [눈]을 이용해서 놈의 심령과 영혼을 제압하려 드는구나.”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지?”
내 반문에 아수라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너는 좋은 거지. 여기 가만히 앉아서 저 삿갓 놈의 정체를 알 수 있잖나.”
“아!”
본의 아니게 어부지리를 얻은 건가?
내가 내심 기뻐서 천공에 비치는 영상을 계속 주시하고 있을 때 상황이 조금 이상하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키기기긱….
마치 철덩어리가 긁히는 듯한 기분나쁜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 자리에 멈춰버린 삿갓무사의 전신에서 시뻘건 눈동자들이 가득 솟아오르면서 흉흉한 적색 기운을 내뿜었으나 제곡이 만족스럽지 않은 듯한 소리를 내었다.
[무엇이… 본제(本帝)의 권능으로 네깟놈의 심령을 헤집을 수 없단 말이냐…?]
삿갓 무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저 자신의 몸을 꿈틀거리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제곡의 적안에 상반신이 파먹혀서 끔찍한 부상과 함께 고통을 느끼는 듯 손발을 벌벌 떠는 게 보였다.
그리고.
쩌억!!
다시 한 번 제곡의 목이 날아갔다. 동시에 삿갓 무사의 한쪽 팔이 피안개가 되어서 사라져 버렸고 그는 영영 외팔이가 되는 것으로 보였다. 나는 그 광경을 보는 순간 경악해서 주먹을 불끈 쥐었으나 잠시 후 제곡의 몸이 원상복구되는 게 보였다.
[발악이 심한 놈이군. 아까 그 일격은 우연이었나?]
그렇게 중얼거리는 제곡은 이번에는 아예 대놓고 다가가서는 자신의 거대한 손가락으로 삿갓무사의 머리 위에 얹는 듯 했다. 제곡은 단숨에 개미처럼 삿갓무사를 눌러죽일 수 있는 상태에서 마치 위협을 하듯 중얼거렸다.
[네 실력을 인정해주마. 이대로 패배를 인정하고 내 부하가 된다면 너를 나 다음가는 절대자로 임명하여 영겁의 권세를 누리게 해주지….]
[…….]
[그러니 네 진짜 이름과 정체를 말하라.]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어찌된 일인지, 삿갓무사가 삿갓 뒤에서 비웃음을 흘리고 있다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너 따위의?
마치 환청과 같은 소리였다. 실제로 그런 소리는 들린 적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왠지 저 삿갓무사의 마음의 소리가 느껴졌다. 그리고 그 마음의 소리가 이명(耳鳴)처럼 잦아들 때 삿갓 무사가 이번에는 나머지 한쪽 팔을 휘둘러 제곡을 베는 게 보였다.
츠아앗
이번에야말로 제곡은 진정으로 분노한 듯, 순식간에 자신의 몸을 [작은 굴레]로 되돌리며 포효했다.
[이제 되었다! 영혼째 집어삼켜주마!!]
제곡의 손이 꽉 하고 쥐어쥐는 순간 거대한 권능이 허공에서 터져나오는 게 보였다. 수백 개나 되는 적안이 공간째로 삿갓 무사를 먹어치우면서 그는 순식간에 소멸되었고, 삿갓 무사의 남은 핏덩이와 살점이 허공에 피안개의 형태로 흩뿌려졌다. 누가 보아도 살아날 가망이 없었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삿갓 무사가 소멸되어버린 것이다.
‘…역시 삿갓 놈도 아직 삼황오제는 이기지 못하는 건가?’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크아, 아아아아악!!]
제곡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는 게 들려왔다. 그리고 자신의 전신에 자잘한 상처가 생겨나며 백혈(白血)이 마치 채찍을 수백 대는 맞은 것 마냥 흘러내리기 시작했고, 제곡의 순백의 신체(神體)가 찢겨져 상처가 벌어지는 게 보였다.
찌직! 찌직!!
그 자리에 선 채 발광하는 제곡이 알 수 없는 광기의 포효를 내지르는 게 들렸다.
[영혼이, 영혼이 아니라고!! 네놈은 대체 무어냐!! 내게 무슨 독(毒)을 풀었느냐!!]
…뭐?!
[크흐, 흐하하하하!! 흉신이여…. 그대의 힘을 빌리겠다!]
제곡이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제곡이 허공에 손을 뻗는 순간, 세계수의 최정상에 펼쳐져 있던 암천(暗天)에서 거성(巨星)들이 신묘한 빛을 뿜는 게 눈에 보였다. 나는 마치 달처럼 거대한 그 거성들이 형형색색의 빛을 제곡에게 향하는 것을 볼 수 있었고, 제곡은 서서히 빛무리에 휘말리며 사라지기 시작했다.
슈욱….
제곡의 모습은 약 일 각 후 완전히 소멸되어 흔적도 남지 않았다. 일련의 과정을 숨도 쉬지 못하고 쳐다보던 모든 일행이 할 말을 잃고 있을 때, 제갈사의 차가운 목소리가 정신을 일깨웠다.
“제곡이 황도십이궁(黃道十二宮)의 권능을 받아 회복기에 들어갔다. 방금 전 치명타를 입은 것 같지만 아마도 머지않아 회복하겠군.”
“제갈사!! 황도십이궁이라니?”
쿠르르릉….
내가 반문할 때 갑자기 세계수 전체에서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명백히 뭔가 무너지려는 징조였으므로 다들 놀랐고, 나는 급히 방주를 불러들이며 외쳤다.
“전부 방주에 타!”
토벌대 전원이 방주에 올라타자 나는 통제실으로 재빨리 향했다. 그리고는 명령했다.
“방주여! 틈새를 찾아서 이 세계수의 차원을 벗어나라!”
[불가능합니다.]
“왜?! 뭔가 결계가 쳐져있는….”
그리고 이어진 방주의 목소리는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위대한 분께서 사용자의 죽음을 바라고 있습니다. 본 이성계 함은 사용자 백웅의 죽음을 위해 최선을 다해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
아니?!
“야 전국옥새!! 너 무슨 소리야?!”
지금 이 함을 조종하고 있는 건 인공지능과 동화한 전국옥새의 정령이었다. 그 녀석이 난데없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할 리가 없는 것이다.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소리에 멍해있자 제갈사가 크큭 하고 웃으며 말했다.
“과연… 방주가 타락한 세계수에 내려앉은 그 짧은 시간에 흉신이 마력으로 이 함을 장악해버린 거군. 이정도 출력으로는 신의 권능에 저항할 수 없다는 정보를 얻은 셈인가.”
“제기랄!!”
기우뚱 하고 방주가 크게 기우는 게 느껴졌다. 동시에 방주의 인공지능이 마치 갈라지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위대한… 부름… 죽어… 죽어라…. 봉인실 개방….]
콰과과광
콰광
방주의 어딘가가 터지며 화염이 확하고 치솟는 게 느껴졌다. 자폭하는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전면의 화면에서 환영같은 걸 볼 수 있었다.
전국옥새의 정령이 보이지 않는 어둠의 촉수에 잠식되어 있다.
그리고 그 촉수를 뒤에서 뻗어낸 끝도 없는 어둠….
그 어둠의 배후에 존재하는 [누군가]의 존재가 보였다.
“크윽….”
나는 뜻밖의 배신에도 어쩔수없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 이 상황은 보나마나 배후의 존재가 직접 권능을 사용해서 전국옥새의 정령을 조종하는 게 틀림없었다. 정령 정도의 격으로는 그 존재를 거스를 수 없으리라.
추측대로라면 그 존재는 아마 황제가 없는 지금 최강의 [옛 지배자] 중 하나니까.
하지만 그렇다 해도 배신은 배신이었기에 내가 멍하니 있을 때 제갈사가 유들유들한 목소리로 말했다.
“백웅. 이 정도 위기는 사실 지금 네 역량이라면 살아나갈 수 있다. 이건 네게 제공하는 사소한 심술처럼 느껴지는군. 살테면 살고 아니면 말아라는 것 같아.”
“…좋아. 흑웅이 잠들어 있지만 어떻게든 신력으로 해볼께.”
“아니. 할 필요 없다. 기회를 줬으니 그냥 이 삶을 탈출하면 돼.”
“뭐?”
탈출은 탈출인데 뭐라고?
뜻밖의 말에 내가 제갈사를 돌아보자 제갈사는 악마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큭큭큭…. 어차피 죽을 힘을 다해 탈출해봐야 최상층에 있을 마장은 지금 우리 토벌대의 힘으론 못 이겨. 괜히 붙잡혀서 준비없이 흉신을 대면하기만 하겠지. 지금 가장 현명한 선택은 정해져 있다.”
“…….”
“백웅. 삿갓무사가 제곡에게 잡아먹힌 지금이 기회다. 너 스스로 선택할테냐 아니면 내가 부탁이라도 해 줄까?”
제갈사의 말 뜻은 명약관화하다. 나는 그 사실을 깨닫고는 멈칫했는데 다음 순간, 내 전신이 꽁꽁 묶이면서 전혀 움직일 수 없음을 깨달았다.
‘염력?!’
제갈사가 한 건가!
“큭. 잠깐…. 아직 아닌 것 같아!”
쉽게 이 삶을 포기할 수 없어!
그래도 한 번 최정상이 어떻게 생겼나 구경을 해봐야지!
“아니, 늦었어. 더 이상은 책사의 판단으로 거부하지.”
“뭣….”
“희망없는 판을 억지로 끌고가다가 판 전체를 엎을 순 없다.”
나는 제갈사가 이렇게 단호한 거부를 할 줄은 몰랐기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뿌드득
“커헉….”
제갈사의 기괴한 악마의 눈이 보랏빛의 영기를 뿜어내자 순식간에 염력의 압박이 몇 배나 강해지는 걸 느꼈다. 내가 절대지경이 아니었다면 옛날에 전신이 오징어처럼 변해서 핏덩어리가 되었으리라.
‘여, 염력이 뭐 이리 강해….’
예전엔 실감하지 못했지만 영지주의의 악마가 된 제갈사의 염력은 정말 대단하다. 나는 강력한 염력의 중마가 된 제갈사의 기습에 당하자 급히 절대지경의 의념천주를 끌어올리며 기합으로 염력을 풀려고 했다.
“하압!!”
그러나 생각외로 더 강력한 제갈사의 염력 때문에 나는 전력을 다했음에도 속박을 절반 정도밖에 풀 수가 없었다. 그 사이에 제갈사는 자신의 몸에서 꺼낸 골도를 휘둘러서 내 명치에 박아버렸다.
푸콱
“커… 억….”
나는 끔찍한 고통을 느끼면서 눈앞이 빠르게 흐릿해지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내게 제갈사가 속삭이듯이 말했다.
“흑웅이 힘을 다 써서 잠든 게 다행이군. 쉽게 죽일 수 있어서 다행이야.”
“컥….”
“느껴지나? 내 염력을 칼끝으로 넣어서 네 육체와 정신을 회생불가능으로 만들고 있어. 이젠 흑웅을 깨워서 [작은 굴레]라도 돌리지 않는 한 무리야.”
“제… 제갈사…. 정말 이게… 최선….”
“…크큭….”
제갈사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나의 주군이여. 이번 생에 내가 책사로써 전생자의 승리에 주역이 되지 못한다는 건 생각보다 비참한 기분이라고….”
“…….”
“아수라. 백웅을 죽이려는 날 막을 수 있었을텐데 안 막는군?”
눈앞이 흐릿해진 와중에도 아수라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이번 생에 방만했던 나 자신에 대한 벌이다. 마왕의 오기때문에 바뀔 수 없었던 나 자신은 차라리 같이 죽는 게 낫겠지. 나는 백웅의 삶을 이어나가게 할 자격이 없다.”
“호오.”
“내 자만심 또한 백웅의 실패에 책임이 있으니까….”
냉정한 아수라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하지만 다음 생에 꼭 찾아와 다오, 백웅. 난 변할 테니까.”
“…….”
나는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깨달았다.
‘그렇구나.’
이번 생 내내 휘둘리고 어려웠던 상황 - 그 상황은 새로운 인연이 이어지면서 앞으로 내가 더욱 각오해야 한다는 걸 의미했던 것이다. 그걸 깨달은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갈사… 미안하다….”
내가 빠르게 죽는다는 결단을 내리지 못하면 주변 사람들이 더 고통받는다.
제갈사가 그걸 빠르게 눈치채고 나 대신에 빨리 재시작할 발판을 마련해준 것이다. 그러나 그건 결코 책사로써 마음편한 걱정은 아니었으리라. 하물며 이렇게 패배가 연속되어 몰린 상황에서는.
시야가 완전히 어두워지며 제갈사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큭큭…. 잘 가라, 우둔한 나의 주군.”
그것이 나의 29번째 죽음이었다.
너구리인형을 안고 있는 여자아이의 모습이 눈 앞에 보였다.
마치 예전에 항아와 둘이 앉아있었던 그 기이한 [매듭] 속의 공간처럼 느껴졌다.
아무것도 없이 의자에 앉은 채 단 둘이 마주보고 있는 정적 -
[서(書)의 부름이 들려?]
여자아이가 서서히 자신의 손에 들려있던 시꺼먼 책을 덮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어둠 속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하찮게 죽는 건 이제 작작했으면 좋겠어.]
아주 짤막한 꿈의 끄트머리가 스쳐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