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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내 말에 제갈사는 생각보다 순순히 긍정했다.
“맞다. 와 있다. 내 예측으로는 지금쯤 최상층에 있을 거다.”
나는 그 말에 이를 악물고는 말했다.
“내가 그 놈과 만나려 할까봐 죽이려고 한 거냐? 죽음으로 놈을 회피하게 하려고?”
“그런 것도 있지.”
“제기랄!! 내가 그 새끼한테 언제까지 죽어지낼 거 같아! 이제 나는 절대지경이야! 그리고 나한테는 사대신기도 있고 흑웅도 있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한번 싸워서 그 놈을 조져놔야 도리어 나중에 편해지는 거 아니냐!”
내 외침에 제갈사는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또한 일리 있는 소리다. 나도 그런 생각을 한 적 있었지.”
“그런데 왜 나를 억지로 도망치게 하는거냐, 제갈사!”
“왜냐하면 놈은 종결자(終決者)일 가능성이 너무 높으니까.”
“종결자?”
내가 반문하자 제갈사가 천천히 말했다.
“일단 네가 외신조차 멸하려는 전생여정의 기본전제는 네 전생이 절대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어떠한 신도 네가 죽어서 전생하는 걸 막지 못해. 황제 공손헌원조차도 사실상 그건 못한다고 인증해버린 셈이 되고 말았지. 그게 가능했다면 항아를 조종하는 번거로운 책략을 쓸 필요도 없었을 테니.”
“…….”
“하지만 그 동영의 무사는 백웅 너의 [특이점]일 가능성이 가장 높은 놈이다. 특이점은 가장 강한 숙적이기 때문에 특이점인 게 아냐. 가장 치명적인 독을 품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특이점이라 하는 거지. 그러면 네게 있어서 가장 치명적인 상황은 뭘까?”
나는 제갈사의 말을 알아듣고는 중얼거렸다.
“놈이 나를 죽이면 전생이 끝나버릴 수도 있다는 말인가?”
“그래. 네가 책사라면 그런 최강의 암살자 앞에 주군을 데려다 놓겠나? 나는 이 막장스러운 전개 속에서 최선의 판단을 한 것뿐이다. 흉신에 동영무사, 두 개나 되는 최악의 위험요소가 몰려있는 곳에서 알량한 정보를 얻자고 모험을 할 순 없지.”
“…으음. 하지만….”
나는 불편한 얼굴으로 말했다.
“이대로 그 동영무사 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놈이 제멋대로 모습을 드러내면 피해다니기만 한다는 건… 언제까지 이래야할지 모른다는 거잖아.”
“그렇기도 하지.”
“어떻게 해야한다는 소리냐?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해지면 동영무사를 무찌르러 가면 된다는 말이냐.”
“아니. 네가 강하고 약하고와는 관계없어. 안 그래도 그 얘기는 한 번쯤 해둬야 했으니 잘 들어라. 정말 중요한 얘기니까.”
촤라락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정리하면서 앞으로 해야할 일을 찾아보는 거다.”
제갈사는 끝이 부러진 골도를 자신의 몸 속으로 다시 쑤셔넣으며 말을 이었다.
“백웅. 최초에 선지자가 특이점을 유예할 방법이 뭐라고 했는지 기억 나나?”
“잊어버릴 리가 있나. 법문의 조각을 제물로 바쳐서 특이점을 유예할 수 있다고 했었잖아.”
“그러고나서 너는 외우주로 가서 사대신기를 가져왔지. 사대신기를 가져온 이유는?”
어?! 뭐였지?!
갑자기 변형된 질문이 나오니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어…. 그게….”
“역시 오래되니까 헷갈리나보군. 왜 가져왔냐면 사대신기와 법문의 인과율이 이어져있기 때문이었다. 사대신기를 찾아야 법문을 찾을 수 있다는 게 선지자의 설명이었지.”
“아 맞다….”
“그리고 네 28번째 삶에서 그 사실은 증명이 되었다. 어떻게 증명이 되었나?”
“음…. 뭐지….”
“너는 본의아니게 대륙황제가 되고 해신과 싸우고 삼황오제의 전투에 휘말려 500년 후로 가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남은 동료들이 남극에 존재하는 법문의 존재를 찾아내었다. 그리고 본디 정상적으로는 얻을 수 없을 법문을, 천마 사공린의 몸에 흡수되는 형식으로 기적적으로 획득하는 데 성공했었다.”
제갈사가 차분히 말을 이었다.
“그냥 기억으로만 보면 사건의 나열에 불과하지만 사실 저건 극히 희소한 확률로 이뤄진 불가능에 가까운 업적이다. 28번째 생에서 내가 남극의 법문에 대한 정보를 찾아낼 확률, 폭왕 카르바도크와 시몬 마구스를 상잔시킬 확률, 천마가 각성할 확률, 그리고 천마를 배후에서 조종하던 공손헌원이 다른 마음 먹지 않고 얌전히 네가 복귀할 때까지 법문조각을 유지해줄 확률…. 이 모든 희소한 확률의 중첩이란 결국 - 선지자의 말대로 [사대신기를 얻어야만 법문을 얻을 수 있다]는 인과율을 증명했던 것이다.”
“……!!”
“그렇지 않나? 결국 네가 전욱에게 사대신기 바즈라를 제공했으며 또한 사대신기 바유를 썼던 게 근본원인에 가까웠으니. 그리고 네가 바유를 써서 미래로 날아가지 않았다면 도리어 남극행이 이뤄지기 전에 돌연사하거나 황제가 너를 경계해서 함부로 천마를 각성시키지 않을 확률도 있었다…. 네가 대웅제국에 없는 게 도리어 도움이 되었을 수도 있다.”
“으음.”
“황제 공손헌원은 아마 사대신기로 인해 촉발된 법문의 탐색이라고 하는 인과율의 흐름을 읽긴 했을 거다. 그러나 자신에게 불리할 게 없었기에 건드리지 않고 얌전히 따라줬던 거고.”
“그, 그랬구나….”
이렇게 설명을 들으니 28번째 전생에서 있었던 일과 [특이점]에 대한 관계가 일목요연하게 이해가 되는 듯 했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제갈사에게 말했다.
“아무튼 그래서?”
“앞으로도 네가 사대신기를 유지하고 그들과의 협력을 발전시킬수록 남은 법문조각 또한 저절로 네게 끌려오듯이 정보가 알려진다는 소리지. 따지고 보면 인과율에 의존하는 기다림일 뿐이니 굳이 네게 얘기를 안했을 뿐이다. 지금껏 6개 중 2개의 법문조각의 행방과 얻는 방법을 얻어내었으니 전생횟수에 비하면 성과는 좋은 편이다.”
“뭐? 30번 가까이 죽었는데 성과가 좋다니….”
“평범하게 동료 없이 너 혼자 삽질하면서 전세계를 돌아다녔다면 30번이 아니라 300번으로도 2개 찾아내긴 힘들었겠지. 넌 지금 굉장히 잘 하고 있다.”
“…….”
“이런 식으로 몇 번만 더 사대신기를 가진 채 전생하다보면 6개의 법문조각을 다 모을 수 있단 소리야. 마치 자석처럼 사대신기가 법문조각을 끌어다 줄 테니까. 다만….”
제갈사가 잠시 동굴 바깥쪽을 쳐다보더니 말을 이었다.
“법문조각을 이용해서 특이점을 몰아낼 시기를 여태껏 가늠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건 무슨 소리야?”
“백웅. 백련교에 존재하는 천암의 제단의 법문조각은 사실 네가 전생하자마자 손에 넣을 수도 있는 법문조각이지. 그러면 특이점 걱정을 하면서도 어째서 그 1개의 조각을 제물로 바쳐서 특이점을 유예하지 않았던 거냐.”
“어… 1개니까…?”
“그래. 바로 갯수가 여태껏 문제였다.”
그는 악마의 얼굴이었지만 다소 골치아프다는 기색이 역력한 표정이 드러나 있었다.
“하필이면 특이점이 강화까지 되어버리는 바람에 애초부터 1개의 법문조각을 제물로 바치는 걸로는 얘깃거리가 안 되었던 거다. 특이점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마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법문을 찾았던 건데, 아무리 법문이 대단해도 6개 중 1개뿐이라면 무의미하지. 그래서 책사들의 입장에서는 최소한 3개, 혹은 4개를 모아야 할 거라고 예상했던 것이다. 다소 안이한 자세일지도 모르지만 법문을 제물로 바치는 대의식을 여러 번 하지 못할 가능성도 높았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군….”
“하지만 생각 이상으로 동영무사의 호전성이 높다. 놈이 언제 네 전생 시작점까지 다가올지 모르는 상태이니 이젠 여유가 없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 방금 전에 너보고 두 번째 책략을 진언했던 것이고.”
나는 그 말에 두 번째 책략이 무엇인지를 기억해 냈다.
“사대신기를 난사해서 마력을 무로 만들라고.”
“그렇다. 이렇게 된 이상 네가 해야 할 건 한시라도 빨리 사대신기 정령들과의 친화도를 올려서, 그들과의 업연(業緣)을 강화시키는 것이다. 당연히 그들을 자주 쓰고 친해질수록 법문을 찾기는 쉬워질 거다.”
“이해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동영무사와 직접 맞부딪히는 것보다는 그보다 더 빨리 법문을 찾아내는 게 지금의 내 과제였던 거군.”
“이제 알아들었군. 그걸 위해서라면 지금 동영무사를 피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승산이 생길 때까지 무작정 놈과 충돌하는 건 너무 위험해. 놈이 접근하기 전에 또 하나의 법문조각을 찾아내는 게 옳은 흐름이다.”
그렇게 말한 제갈사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까지 현재 상황을 헷갈려할 줄 알았다면 그냥 생 초반에 다 설명해줄 걸 그랬군.”
“…….”
쳇…. 하도 정신이 없어서 그런 거 들을 정신이 없었다고!
내가 내심 억울해하고 있을 때였다.
쿠구구궁
갑자기 바깥에서 거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치 천둥소리인 것 같으면서도 기괴한 비명소리 같기도 했고, 동물의 신음처럼 들리기도 했다. 무척이나 큰 소리였기에 나와 제갈사가 거의 동시에 동굴 바깥을 쳐다보자, 밖에서 급히 아수라가 뛰어 들어오며 외쳤다.
“이봐!! 지금 큰일났어!”
“아수라, 무슨 일이야?”
“빌어먹을… 거짓말하는 거 아니니까 잘 들어.”
이어진 아수라의 말에 나는 눈을 부릅떴다.
“제곡이 그 동영무사와 싸우기 시작했다고!”
“……!!”
“세계수의 천공에 그 전투가 비치고 있다.”
뭐?!
내가 그 자리에 굳어있자 제갈사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생각보다 더 막나가는 새끼였군. 제곡이 백웅을 숨긴 거라고 짐작이라도 한 건가.”
“아, 아니 아무리 그래도 제곡한테 싸움을….”
“전욱한테도 칼을 겨눴는데 제곡에게는 못 할까. 이기는 건 별개의 문제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 제갈사가 말을 이었다.
“차라리 잘 됐다. 동영무사가 저 짓을 하고 있을 때 자살하거나 여기를 탈출하면 된다.”
“…….”
타닷
“백웅!!”
미안, 제갈사.
그 싸움은 나도 보고 싶어.
나는 홀리듯이 동굴 밖으로 뛰쳐나갔고, 거기에는 이미 나인주교 토벌대 전원이 절벽위에 서서 검은 구름과 번개 사이로 비치는 전투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것은 단지 인영의 윤곽만이 보이는 게 아니라, 마치 실제로 눈앞에 있는 것처럼 거울 위에서 비쳐 보이는 듯한 느낌이라 선명하기까지 했다.
츠아아앗
동영무사가 자신의 장도(長刀)를 크게 호선으로 그으면서 자세를 잡았고 그런 동영무사의 맞은편에는 마치 백색의 거인처럼 화한 제곡이 마주 서 있었다. 제곡의 등 뒤에는 새하얀 날개가 달려있었는데, 의외로 예전에 현신했을 때와는 달리 몸 크기가 딱 1장 정도로 그저 몸집이 거대한 인간 수준의 크기였다.
저것이 삼황오제 제곡인 것이다.
‘몸 크기를 맞춰준 건가?’
동영무사는 이미 수차례나 제곡에게 공격을 감행했던 모양인지 거대한 세계수의 정상에는 수많은 참흔(斬痕)이 남아 있는 게 비쳐 보였다. 제곡은 팔짱을 낀 채 가만히 있다가 말했다.
[필멸의 무사여. 네가 여기에 당도함은 나를 쓰러뜨려 수저마신궁(水底魔神宮)의 해방을 막으려 함이냐? 흉신이 부활하여 세계를 지배하는 걸 막을 셈인가?]
멀리서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는 소리.
아마 동영무사의 목소리도 똑같이 들리리라.
[…….]
[나를 쓰러뜨리는 것만으론 불가능하다. 흉신의 마장(魔將)들 또한 버티고 있으니, 나를 쓰러뜨리고 만신창이가 되어서는 결코 마장들의 손에서 버티지 못하겠지…. 어리석은 자여.]
키리리링!!
다음 순간, 마치 번개가 우는 듯한 소리와 함께 시퍼런 참선(斬線)이 제곡의 목을 베었다! 말 그대로 뇌신지혼에 못지않은 속도의 참격이었는데, 나는 그 일격을 보자마자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다.
‘아냐. 저건… 그 때… 십이율주의 윤회포 근처에서 내 수요를 동강냈던 그 일격이야!!’
직접 상대해본 무인만이 알 수 있는 경험적인 지식!
이름은 알 수 없지만 저 무예는 내가 몸으로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동시에 나는 저 무예의 본질이 뇌신지혼 같은 [속도]가 결코 아니라는 걸 즉시 깨달을 수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 생각을 하면서 동시에 말도 안 된다는 걸 알아차리고 말았다.
속도로 벤 게 아니면 대체 뭘로 베었다는 거야?
[후후….]
본디 목이 베였다면 인간의 싸움은 그걸로 끝인 법이지만 - 제곡은 달랐다. 목이 날아간 상태에서 얼굴이 둥실 떠서 그저 멈춰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제곡의 목이 시공 속에 녹아들듯이 사라져 버리고, 베여버린 제곡의 몸뚱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원상복구가 되어 있었다.
[아주 재밌군…. 한 번 맞아줘 봤는데 설마 대신(大神)인 내게 잠시 동안 죽음을 느끼게 할 줄이야.]
[…….]
동영무사는 그게 안 먹힐 줄은 몰랐다는 듯 주춤거리고 있었다. 천하에 두려운 게 없는 놈 같았지만 방금 전 제곡에게 가한 것은 필살의 일격이 분명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제곡이 눈에서 혈광을 뿜어내며 중얼거렸다.
[왜 그러나…. 그대라면 마왕조차 벨 수 있는 실력인데 덤비지 않느냐?]
동영무사가 중단세만 잡은 채 침묵하고 있었다.
제곡이 여태껏 전력을 다하지 않고 있으며 그저 조롱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인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천공에 비치는 화면 너머에서 동영무사가 처음으로 자세를 바꾸는 게 보였다.
동영무사의 읊조림이 울려 펴진다.
[초생(初生).]
그것은 발도세(拔刀勢)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