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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검신-1247화 (1,244/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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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제곡이 나타났다고?

“자…. 잠깐만 기다려 봐…. 심호흡 좀.”

“…….”

나는 그 말에 손을 내저으며 의자에 앉아서 길게 호흡을 골랐다.

‘아니…. 아까부터 너무 혼란스러워….’

나는 이젠 놀라거나 경악하기보다는 머리가 복잡해져서 비틀거렸다. 당연히 삼황오제 중 제곡이 이런 변방의 이계에 출현했다고 하면 경악해야 맞겠지만, 그럴만한 심적 여유도 없을 정도로 지쳐있었기 때문이었다.

언제부터였지?

이번 생이 시작하고서부터였나? 아니면 지난 28번째 생의 종막 때부터?

알 수 없는 운명의 흐름에 마구 쥐어서 흔들리는 불쾌한 느낌에 처음에는 공포감을 느꼈지만 이제는 염증이 날 지경이다. 처음에는 황제 공손헌원이 봉인되면서 생기는 엄청난 혼란이니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납득하려 했지만 갈수록 심력이 고갈되어서 지쳐만 가고 있었다.

한계가 다가오고 있다. 나는 눈을 감은 채 한동안 가만히 눕듯이 앉아 있다가 말했다.

“아수라. 지금 제곡이 공격해온다면 어쩔 거냐?”

아수라는 어느 새 인간형으로 돌아왔는지 인간의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연히 끝까지 싸워봐야지.”

“무슨 수를 써도 진다는 거 알고 있잖아. 내 이전 생의 기억에서 너는 [옛 지배자] 비류에게 잔인한 꼴을 당했었는데, 똑같은 상황이 벌어질 거다.”

“나도 안다. 하지만 난 그래도 싸울 것이다.”

“…….”

아수라의 당당한 말에 내가 잠시 할 말을 잃자 아수라가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이제서야 조금 반성하고 있다. 그냥 네 기억을 기억으로만 보았을 때는 나 자신의 아집을 놓지 못하고 있었는데…. 초강자들을 만나서 싸우다가 깨져보니 이제 정신이 드는군.”

“싸우는 게 반성하는 거란 말인가? 결과적으로 똑같은 행동일 뿐인 것 같은데.”

“달라. 이젠 오만을 버리고 무(武)에만 집중해서 싸워보고 싶다. 이젠 과거의 생에 나 자신이 했던 선택을 믿기로 하겠어.”

“지금까진 못 믿었냐.”

“너 같으면 바로 믿겠나? 이 강력한 마력과 육체, 권능을 하나도 쓰지 않고 오로지 무예에만 의존한다는 건 내 전력의 7할 이상을 봉인하는 거나 마찬가진데.”

“…….”

“흑요석의 기억전송은 만능이 아냐. 마음을 바꿀 계기는 필요했다.”

그렇게 말한 아수라가 정말로 무언가를 내려놓은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알고 있다. 지금 쉴 새 없이 휘둘리는 상황 때문에 염증나는 거지?”

“…그래.”

나는 내 마음을 꿰뚫는 듯한 아수라의 말에 한숨을 쉬며 말했다.

“지긋지긋해. 나는 조금 쉴 시간이 필요했는데, 마력이 폭주하는 바람에 그럴 여유도 생기지 않는군….”

“간단한 문제군…. 그럼 쉬어라.”

“쉬라고?”

아수라가 어깨를 으쓱하는 게 느껴졌다.

“어차피 황제가 봉인된 덕분에 네 미래를 읽어서 조종할 놈도 사라진 판국 아니냐? 지금까진 황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쫓겨왔다 하더라도 이젠 네 멋대로 좀 해봐도 좋을 거 아닌가.”

“내 마음대로….”

“앞으로 한두 번의 삶은 어쩔 수 없이 쫓기듯이 열심히 한다 하더라도 어느정도 맥락이 파악되고 나면 널럴하게 진행해도 괜찮을 거라고 본다. 전생자라는 건 까놓고 말해서 이 세상을 온라인게임처럼 플레이해도 괜찮은 유일무이한 존재라고 할 수 있지.”

“이봐. 이 세상은 게임이 아냐.”

아수라가 진심을 담아서 중얼거리는 게 들렸다.

“나는 게임이면 좋겠군. 목숨과 고통을 아끼지 않고 원하는 만큼 질릴 때까지 싸울 수 있으니까….”

나는 아수라의 조언에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하…. 누가 전생에 게임광 아니었달까봐. 책사들이라면 너 같은 조언은 절대 안 해줬을 거다.”

“당연하지 않나? 세상을 구할 수 있는 전생자가 너 뿐인데 편하게 놀고먹으라고 하겠는가? 대가리가 똑똑한 놈들일수록 능력이 넘쳐서 의무감도 함께 팽배해지기 마련이지.”

“흠.”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네가 궁극적으로 세상을 구하든 말든 알 바 아니다, 백웅. 내가 모르는 곳에서 세상이 구원받는다 한들 아무런 감흥도 없어.”

…그렇겠지.

아무리 중립적이라곤 해도 아수라 또한 창힐의 부하이자 마왕인 팔부신중이니까.

도리어 원래라면 내 앞을 가로막아야 정상인 놈이다.

아수라가 서서히 투기를 끌어올리며 낄낄대는 말투로 말했다.

“앞으로도 계속 전생하면서 나한테 싸워서 성장할만한 전장(戰場)을 만들어주기만 하면 돼. 너는 네 멋대로 해라.”

“좋아. 조금 기분이 풀리는군.”

나는 아수라와의 대화로 조금이나마 마음속 응어리가 해결되는 걸 느꼈다. 이런 건 책사들과 대화할 때는 느끼지 못했던, 다소 불량스러운 해방감에 가까웠다. 이게 꼭 옳은 건 아니겠지만 어쨌든 지금 내게는 약간의 정신적 여유가 되돌아온 것 같았다.

나는 냉정을 찾은 후 말했다.

“제갈사의 위치좌표로 향해라.”

[이성계함, 이동 개시.]

우웅

방주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래의 거대한 철선(鐵船)이 서서히 구름을 헤치면서 어둠의 초거대수(超巨大樹)를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방주로 하늘을 나는데도 아직까지 정상이 보일 생각이 들지 않으니 정말 높은 나무인 건 확실했다.

‘흠…. 아직도 시력이 회복되지 않는군.’

예전보다 눈알에 찾아오는 격통은 덜해졌지만 그래도 눈이 하나도 안 보이는 건 좋지 않다. 나는 화면으로 상황을 확인할 수 없다는 게 매우 큰 약점이라는 걸 느끼며 말했다.

“시력을 빨리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은 없나?”

[사용자의 시력에 이상을 감지했습니다. 나노머신 치료를 시작하시겠습니까?]

“…나노머신? 아, 그거….”

분명 내 기억으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척 작은 기계가 사람의 몸을 치료하는 기술이었다. 나는 우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해 봐.”

[나노머신 치료를 시작합니다.]

촤아악!!

갑자기 분무기 같은 게 내 눈에 뿌려지더니 눈의 따가움이 한층 심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가려움을 참은 채 한참동안 이를 악물고 있자, 화면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신경 연결에 이상이 없음을 확인. 하지만 백내장 현상을 발견했습니다. 나노머신으로 복구를 개시합니다.]

그렇게 한동안 눈을 감고 있자, 나는 서서히 눈이 떠지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흐릿하게나마 주변의 풍경이 보이는 걸 깨닫고는 놀랐다.

‘치료가 되긴 되는군….’

나는 어느 정도 눈이 보이게 되었을 때 재차 목소리가 들려오는 걸 알아챘다.

[목표 제갈사의 좌표에 도착했습니다.]

우우웅….

방주가 나무 중턱에 있는 조그마한 터에 내려앉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터의 앞에는 뜻밖의 인물이 서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 자의 신형을 보자마자 경악해서 외쳤다.

“응?! 대체 왜?!”

왜 여기 있는 거야?!

이번 생엔 만나러 간 적도 없는데?!

나는 당혹스러웠지만 어쨌든 내게 있어서 적대자라고 하긴 힘든 인물이었기에 일단 아수라와 함께 방주에서 내렸다. 그리고 방주에서 내리자마자 조심스럽게 그에게 말했다.

“가… 강호에 존성대명이 높은 위대한 무림지존이자 성교(聖敎)의 지엄이신 분을 뵙….”

일단 강호의 예절을 다해서 인사해 볼까?

그러자 상대가 피식 웃는 듯 하며 육합전성으로 말했다.

[관두어라. 피차 이런 악몽 같은 이세계까지 와 놓고 어찌 무림의 법도와 항렬을 적용할 수 있는가? 집채만한 촉수들이 수천 마리씩 날뛰는 이 성지에서는 도리어 낯부끄러운 이야기군….]

“…….”

금색 수실이 새겨진 자색 장포.

그리고 머리에 쓴 관(冠)과 무면탈.

수십 번이나 만나왔었기에 나는 이미 상대의 정체를 파악하고 있었고 상대도 마찬가지인 듯 했다.

[그리고 제갈사에게 이야기는 다 들었다. 그대야말로 진정으로 이 세계의 환란을 해결할 수 있는 영웅이며, 진실로 백련교의 오의(悟義)를 전수받은 인물이란 걸.]

아니 방금 당신이 한 말이 더 낯부끄럽다고!!

나는 내심 투덜거리면서 말했다.

“흠, 그럼 내 사정도 다 알겠군. 만나서 반갑소. 나는 백웅이고 이쪽은 아수라요.”

[아수라… 팔부신중에서 최강을 다투며 천축의 무림지존 파순인 그 자인가….]

상대가 눈에서 이채를 띄더니 내게 포권을 했다.

[그대는 이미 알고 있겠지만 다시 한 번 인사하지. 백련교의 교주인 독고운천이다.]

그렇다.

제갈사의 거처에서 나타난 것은 바로 백련교주 독고운천!

본디 신강의 백련교에서 조용히 무공수련이나 하고 있을 인물이 난데없이 이런 외딴 이계에 나타난 것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내 기억을 받아서 동료가 되었다면 몰라도 이번 생엔 아무런 접점도 없었는데 어찌 이런 일이?

나는 얼떨떨한 목소리로 말했다.

“교주가 어찌 여기 와있는지 모르겠소. 상황을 설명해주실 수 있소?”

[간단한 얘기다. 제갈사가 나인교(螺湮敎)와 맞서 싸우는데 백련교 또한 동참했으며 그가 서방에서 나인교의 주교(主敎)들을 토벌하는데 동행했을 뿐. 물론 그가 내게 백웅 그대의 이야기를 해준 것, 그리고 신뢰할 수 있는 증거를 들이민 게 컸지….]

“……!!”

제갈사가 내가 없는 동안에 이미 백련교와 손을 잡았던 거구나!

내가 약간 상황 돌아가는 걸 눈치채고 눈을 크게 뜨자 백련교주의 말이 이어졌다.

[제갈사의 말로는 아직 태아수준이나 다름없는 주교라서 제일 약할 때라고 했지만 그래도 정말로 강하더군. 선발대가 무척 고전하고 있었지만 어디선가 차원이동으로 나타난 제갈사 덕에 간신히 나인주교를 토벌하는 데는 성공했었다.]

“…흠. 그렇소?”

나는 대충 일의 얼개를 알 수 있었다. 아마 제갈사가 인간세력을 먼저 나인주교 토벌에 선발대로 보내놓고 자기는 전욱의 부하가 되는 모험을 시도했던 것이리라. 그리고 전욱에게 권능을 받은 후 오거천문에서 곧장 주교를 없애러 차원문을 열고 나타난 것이리라.

[그러나 마무리가 안 좋았지. 놈이 죽어가면서 만들어낸 거대한 차원문 때문에 토벌대가 다 같이 여기로 빨려 들어왔다.]

“차원문에 빨려 들어왔다고? 그러면 이 거대한 암흑의 나무는 무엇이오.”

[제갈사는 이게 태고적에 봉인된 원시우주(原始宇宙)의 유물이자 잘못 성장한 세계수(世界樹)라고 했다. 본디 더 성장했어야 하지만 혼돈이 너무 강해서 스스로 갇혀버린 죽은 나무라고 하더군….]

“…….”

[우리 토벌대는 이 세계수의 중단에서 농성하며 나갈 방법을 찾는 중이었다.]

역시…. 신단수와 비슷하게 생겼다 싶었는데 이 암흑거목 또한 세계수였군.

나는 교주의 설명을 듣다가 말했다.

“설명 감사하오. 서문혜와는 어쩌다가 떨어지게 된 것이오?”

[서문혜는 제갈사의 명으로 이 세계수의 상층부를 정탐하던 중 연락이 끊어졌다. 그런 질문을 하는 걸 보니 혹시 그녀의 위치를 아는가?]

“…으음…. 일단 제갈사와 만나게 해 주시오. 그와 얘기를 해야 하오.”

[따라오라.]

저벅 저벅

나와 아수라는 백련교주를 따라 세계수 중턱에 있는 매우 큰 동굴로 들어갔다. 그리고 동굴 안에 꽤나 익숙한 얼굴들이 보이는 걸 알 수 있었다.

‘용비천, 독고준, 한백령!!’

호법사자들이 다 와 있구나!

하긴 나인주교 정도면 다 와서 싸울 만 하다. 그리고 그들 외에도 백련교 원로원의 고수들이 십여 명 정도 보였다. 그 이상의 인간은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내 눈에 뜻밖의 얼굴이 또 보였다.

‘엥?’

나는 그를 발견하자 어이가 없어서 황당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무…무사시?!”

동영 최강의 고수이자 절대지경의 검객인 미야모토 무사시가 아무렇지도 않게 일행에 섞여서 군불을 쬐고 있다! 백련교주에 이어 또다시 등장한 뜻밖의 인물이었기에 내가 황당해하자 미야모토 무사시가 슬쩍 내 쪽을 보더니 말했다.

“강자들이군…. 간만에 몸을 좀 풀어 볼까.”

저벅

미야모토 무사시가 일어서서 이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살벌한 의념을 펼치는 걸 보면 보나마나 싸우려는 게 분명했다.

아니 이 새끼야!

뭐 했다고 얼굴 맞대자마자 칼싸움 하자는 거냐고!

내가 황당해서 멍하니 서 있자 아수라가 천천히 검을 들어서 내 앞을 가로막듯 나섰다.

“……!!”

아수라를 마주친 무사시가 움찔하고 보법을 멈추었고, 아수라 또한 새하얗게 웃으면서 말했다.

“아주 환영한다. 나야말로 몸을 풀려고 했었는데.”

“…….”

“들어와라.”

치링 -

아수라와 무사시가 일 장 거리를 두고 절대지경의 의념을 맞부딪혔다. 둘 다 둘째라가면 서러울 싸움광들이었지만, 어째 무사시 쪽이 아수라보다 훨씬 움츠러드는 게 눈에 보였다.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기에 쓴웃음을 지었다.

‘애초에 아수라의 무예경지가 무사시보다 높고…. 지금 아수라는 연전연패 때문에 독기를 품고 있다. 아무리 귀면상인 무사시가 싸움광이라 해도 독기품은 아수라의 기세에는 상대가 안 돼.’

즉, 아수라는 지금 아무나 걸리면 조져버리겠다고 눈이 벌게져 있는 상태!

평소라면 아무리 아수라라도 적멸무극을 쓰지 않는 한 무사시가 단숨에 당하지는 않겠지만 마치 예리한 칼날처럼 벼르고 있는 아수라를 상대로는 그마저도 장담할 수가 없다. 무사시는 본능적인 역량과 기세 차이를 느꼈는지 주춤거리며 한 걸음을 뒤로 물리는 기색이었다.

나는 말릴까말까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대치를 말린 것은 백련교주였다.

[그만.]

백련교주의 심천무량이 퍼져 나오자 두 명의 고수들은 기세를 멈추었다. 백련교주가 나직이 말을 이었다.

[우리는 이 세계에서 결코 강자나 포식자가 아니며 미물에 가깝다. 힘을 합쳐도 살아남기 힘들 판에 알량한 무공으로 다투다니 그보다 어리석은 일은 없다.]

“…….”

“흥….”

지극히 옳은 말이었기에 아수라도 무사시도 자신들의 검을 거두며 물러섰다. 상황이 정리되자 백련교주가 나를 동굴의 안쪽으로 인도하며 말했다.

[제갈사는 보다시피 이런 상태다.]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제갈사의 상태를 보자 나는 침음성을 흘렸다.

“제갈사….”

반투명한 원구 안에 들어가 있는 제갈사는 마치 마(魔)와 인간이 뒤섞인 듯한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마인(魔人)이라고 표현해야 적합할 듯한 그 모습은 내가 예전에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영지주의의 악마!

마왕 시몬 마구스에 의해 중마(衆魔)로 전생(轉生)하여 최강의 염마술(念魔術)을 쓸 수 있는 상태. 그 말은 이미 제갈사가 인간의 형질을 버렸으며 다른 종족이 되어버렸다는 걸 의미했다. 당연히 제갈사는 인간시절보다 몇십 배 이상 강해졌으며 가공할 염력을 쓸 수 있게 되었겠지만 절대 인간으로 되돌아갈 순 없으리라.

나는 눈을 감고 있는 제갈사를 보며 말했다.

“지금 의식이 없는 거요?”

[마지막 전투에서 마력을 너무 많이 소모해서 하루에 한 시진도 제대로 깨어있질 못하네. 제갈사와 얘기하려면 기다리는 게 좋네.]

“…당연히 기다려야지.”

나는 그 자리에 앉아서 제갈사가 눈을 뜰 때까지 기다렸다. 약 일곱 시진이 지나자, 제갈사가 원구에서 서서히 눈을 떴고 나는 제갈사에게 말을 걸었다.

“제갈사. 괜찮냐?”

그러자 제갈사가 히죽 웃으며 모습은 마인인데도 인간의 성대로 대답했다.

“크큭…. 안 늦게 잘 찾아왔군. 일 년은 뻗어있을 줄 알았는데 빨리 일어났나보군.”

“제갈사. 흑요석을 받을 수 있겠나?”

“이리 다오. 지금이라면 괜찮다.”

우웅

제갈사는 흑요석을 받아서 기억전송을 받아들였다. 그러더니 말했다.

“예전보다 굉장히 순해졌다 싶었는데 이유가 있었군. 사대신기가 마력을 삭제한 덕이었어. 내 회복에는 도리어 별로지만.”

“제갈사. 지금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 거냐? 어쩌다가 일 년 석 달 동안에 네가 백련교와 무사시를 데리고 서방 나인교를 토벌하게 된 거지? 그리고 인간세계에서 왜 혈겁을 일으킨 거고 서문혜는 지금 대체….”

“서두르지 마라. 다 설명해 줄 테니.”

제갈사가 손을 들어 내 질문을 제지한 후 천천히 말했다.

“백웅. 네가 제일 먼저 알아둬야 할 것은, 이곳이 어디냐는 것이다.”

“여기는 죽은 세계수의 유적이라면서? 백련교주가 그렇게 설명해 줬어.”

“나도 처음에 왔을 때는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가사상태에서 몸을 회복하며 이 나무의 정신계에 접속하게 되었고 그 와중에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지.”

“그게 뭔데.”

제갈사가 다소 흉측해진 마인의 모습으로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여기는… 너도 이미 짐작하고 있겠지만 흉신(凶神)의 성지(聖地)라는 거다.”

“…….”

“성지니까 어지간한 [옛 지배자]도 상대할만한 고위신관들이 떼로 몰려다니는 거겠지.”

제갈사의 말대로 나도 조금은 짐작하고 있었다.

흉신!!

그 가공할 존재가 신관이라는 놈들의 뒤에 존재하고 있다는 걸. 하지만 직접 언급하지 않았기에 함부로 확신하려 들지 않았을 뿐이다. 신관놈들 또한 흉신의 부하이기 때문에 그렇게 강했던 게 틀림없다.

나는 침착하게 제갈사의 말에 대답했다.

“성지라는 건 이 세계수가 흉신에게 있어서 중요한 장소라는 걸 말하는 거냐?”

“중요한 정도가 아니지. 이미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판이 짜여지는 장소가 되어버렸다. 나인교 주교가 우리를 여기로 보내버린 것도 우연이 아니었지.”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판이라고?”

“그래…. 판… 이 성지는 천지의 균형을 바꿀 장소다.”

이어진 제갈사의 말에 나는 또 다시 세상의 운명이 위태로워졌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흉신은 지금 이 죽어버린 세계수를 제물로 자신이 부활할 시간을 단축시키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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