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검신-1245화 (1,242/1,615)

1245====================

사신지혼(四神之魂)

나는 전투가 끝난 후 아수라와 만날 수 있었다. 아수라는 정신을 잃은 상태였지만 열 덕분에 급한 고비는 넘긴 듯 했고, 내가 연회장에서 아수라를 넘겨받자 전욱이 옥좌에 앉아서 말했다.

[본좌의 명을 알아들었는가?]

나는 아수라의 목숨이 위태롭지 않은 걸 다시 한 번 확인하고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사실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어째서 제갈사가 이 만귀전에 왔었고 흉신을 조사하게 되었는지를. 저는 그 동안 암천향의 함정에 빠져서 현세의 활동에 공백이 있었기에 전후사정을 모릅니다.”

[그렇게 까다로운 경과는 아니다. 그저 제갈사가 스스로 본좌에게 흉신의 수상한 움직임을 보고하고, 본좌의 눈이 되어 움직일 것을 부탁하러 찾아왔을 뿐.]

“스스로 말입니까?”

[그렇다.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았지만 본좌가 놈의 잔머리를 신경 쓸 필요는 없었지. 흉신이 수상한 것도 사실이니 약간의 권능을 심어주어 부하로 삼은 후 내보냈다.]

“…….”

[그런데 최근들어 놈이 서방에 출현한 나인교(羅湮敎)라는 단체와 싸우다가 고전하는 모양이더군. 이계(異界)에서 싸우는 중이다.]

그렇게 말한 전욱이 내게 손가락을 향하며 말했다.

[그러니 네가 제갈사를 도우러 가라.]

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무언가 유도 당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제갈사는 일부러 전욱을 찾아온 거야. 흉신을 조사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정말로 그것뿐인가?’

복잡한 이유가 기저에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제갈사 정도면 내가 이런 식으로 복귀할 가능성 또한 당연히 염두에 두었을 텐데, 만귀전처럼 위험이 넘치는 장소를 나를 유도한 이유가 무엇인가? 나는 의혹을 멈추지 못하고 말했다.

“제 방주에 흡수된 전국옥새의 정령은 제갈사가 이 만귀전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 또한 만귀전에 감히 찾아오는 무리를 했습니다만, 어째서 그런 건지….”

[후후후….]

전욱이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러자 전욱의 곁에 시립해 있던 려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감히 주군께 시시콜콜한 것을 다 여쭐 생각이냐? 당연히 제갈사를 만귀전이 후원하고 있기 때문에 생긴 일이 아니더냐.]

나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응? 무슨 말이오?”

[그 전국옥새의 검색으로 정말로 뭐든지 찾아낼 수 있다면 소호금천의 일개보패 따위가 아니라 천지의 균형을 무너뜨릴 정도가 되어야겠지. 허나 그 전국옥새의 영력에는 한계가 있으니, 우리 만귀전에서 직접 그 행적을 숨기고 보호한다면 그 자의 구체적인 행적은 알 수 없으리라.]

“……!!”

[도리어 마지막에 찾아간 장소의 행적을 읽은 게 대단하다고 해야겠지.]

나는 그제서야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있었다.

‘전욱의 밀명(密命)! 더군다나 흉신을 조사하는 막중한 임무이기에 그 행적이 들통 나면 제갈사뿐만 아니라 만귀전까지 위험해지기 때문에…. 제갈사의 행방을 검색하기 힘들었던 거구나!’

달리 말하자면 삼황오제쯤 되는 존재들이 일부러 힘을 써서 누군가의 행방을 숨기려 들면 전국옥새로 구체적 행적을 밝히기는 힘들어진다.

전국옥새에 이런 맹점이 있었을 줄이야!

내가 상황을 이해한 표정을 짓자 전욱이 딱 하는 소리와 함께 손가락을 마주쳤다.

[그런고로 그 이계의 위치도 본좌가 알고 있지.]

우웅

어디론가로 향하는 차원문이 열렸다. 당연히 저기는 나인교 세력과 제갈사가 싸우고 있는 전장(戰場)일 것이리라. 나는 그 차원문을 물끄러미 보며 말했다.

“전욱이시여. 열이나 려를 보내지 않으시는 건 어째서입니까? 아무리 나인교 세력이 강해도 그들에게 비할 바는….”

[확전(擴戰)시키고 싶지 않음이다. 흉신이 배후에 있는 건 거의 확실하지만 내 직속부하를 보내면 흉신을 크게 자극시킬 뿐이겠지. 아직 삼황오제의 중의(衆義)가 모이지 않은 상태에서 그건 피하고 싶어서 부외자인 제갈사라는 말을 움직였었다. 흉신이 먼저 손을 쓰지 않는데도 내 부하를 먼저 움직이면 인과율의 손해가 크기도 하고.]

“…….”

전욱이 씨익 웃었다.

[허나 너는 지금 상황에서 최고의 말이다. 본좌와 소호의 사도이긴 하나, 너는 어쨌든 인간이며 인과율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흉신이 나설만한 명분을 크게 주지 않으면서도 네 실력은 내 직속부하에 못지않은 것이다.]

듣고보니 전욱은 처음부터 날 죽일 생각은 별로 없었던 모양이었다. 저렇게까지 써먹기 편한 상대가 제발로 굴러들어왔다면 죽이는 게 너무나 손해이지 않겠는가. 아마도 흑웅은 그런 전욱의 심리를 읽고 있었기에 최대한 힘을 인정만 받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걸 나보다 먼저 깨달았던 것이리라.

“그렇습니까…. 아, 그리고 또 하나… 제갈사와 함께 서문혜라는 여인이 함께 오지 않았습니까?”

[그래. 분명 거신족의 후예를 데리고 있더군.]

“……!!”

[그 거신족은 제갈사와 함께 나인교와 싸우는 중이다.]

역시…!!

‘서문혜가 제갈사와 함께 행동하는 거였어!’

내가 다행이라는 생각에 손을 불끈 쥐자 전욱의 옆에 있던 열이 다소 불편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는 기색이 노골적이었다.

[…….]

내가 전욱에게 심한 무례를 저지르고 있다 생각하는 눈빛이었다. 나는 열의 성격이 깐깐한 원칙주의자임을 알고 있었기에 내심 찔끔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군.’

더 이상 캐물어도 전욱에게 불쾌감을 줄 뿐이리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예를 갖춰 꿇어앉았다.

“필히 명을 수행하겠나이다.”

[좋아…. 제갈사와 협력해서 나인교를 섬멸하라. 다만 명심할 것은 흉신의 직속부하가 있을 경우 싸우지 말고 피한 후 본좌에게 보고하라.]

“네? 어째서입니까.”

전욱이 껄껄 웃었다.

[크흐흐…. 싸우고 싶어서 몸이 달아있나 보구나. 아주 좋은 태도다.]

“…….”

진짜 이유를 몰라서 물어본 거였지만 전욱은 내 질문을 일종의 호전성으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내가 침묵하자 전욱이 말했다.

[방금 전의 네 힘이 최대한의 잠재력일 뿐 지금의 네 힘은 크게 약해져 있음을 알고 있노라. 그 상태에서 흉신의 직속부하를 상대하는 건 너무 위험한 일이지. 놈들 중에는 본좌조차 쉽게 상대할 수 없는 강자가 존재할 수 있으니 만용을 부리지 마라.]

“알겠습니다.”

나는 왠지 그 ‘강자’가 어떤 놈인지 알 것 같았다. 전생하면서 딱 한 번 보았던 존재가 있었던 것이다.

‘그 놈은 축융보다 더한 놈이야.’

확실히 그 놈이 출현한다면 지금의 나로서는 도저히 상대가 불가능하다. 제발 나타나지 않기만을 빌 수밖에 없다.

‘가자!’

나는 이윽고 열에게 부탁해서 오거천문 밖에 있던 방주를 끌고 와서 탑승했고, 방주의 선단 앞부분이 미끌어지듯 차원문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잠시 후 차원이 일그러지는 느낌과 함께 방주가 어딘가로 이동하는 게 느껴졌다.

파앗!!

내가 나타난 곳은 말 그대로 현실세계가 아닌 환상의 세계같았다. 환상이라고는 해도 마치 악몽(惡夢)같은 장소였고, 시꺼먼 어둠 속에서 중력의 법칙을 제멋대로 거스르는 무한의 거리와 조각품이 널려 있었다. 그리고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거리의 한켠에서는 스멀거리며 촉수들이 나무처럼 생장해서 커다랗게 자라나고 있는 중이었다.

꿀렁꿀렁

바닥에는 피로 만들어진 종양덩어리 같은 게 마치 고깃덩어리처럼 늘어 붙어서 맥동하는 게 보였다. 나는 이런 기괴한 풍경을 본 게 처음은 아니었지만 노골적으로 인간의 정신을 파괴하는 듯한 광경에 인상이 찌푸려졌다.

‘완전히 마(魔)에 침식당한 세계로군….’

신기하게도 나는 이 풍경이 인간에게 있어서는 한 식경만 있어도 정신에 광기를 불러일으키는 악몽이란 걸 인식은 하고 있으되, 나 자신은 아무런 타격을 입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우주적인 광기가 애초에 내게는 침범하지 못한다는 게 여실히 느껴지고 있었다.

“흐음….”

흑웅이 발현한 여파인 걸까? 지금까지는 다소 애매모호하게 지나가던 내 정신방어능력이 보다 섬세하게 느껴졌다. 뭔가 감각이 좀 더 예민해지면 이 정신방어능력을 적극적으로 바꿀 수도 있을 것 같다.

“으으. 어찌된 거냐.”

“일어났냐.”

내가 방주의 제어실에서 전방의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 아수라가 의식을 차리고 일어났다. 나는 아수라에게 방금 전 있었던 일을 알려주었고, 아수라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흑웅이 그렇게 강하다고…? 기억을 좀 보여다오!”

나는 아수라의 요청에 흑요석으로 흑웅의 전투장면을 보여주었고, 아수라는 그 싸움을 머릿속으로 한참동안 곱씹는 듯 했다. 그러더니 말했다.

“아마테라스와 전욱의 권능을 함께 쓸 수 있군. 그리고 뭔가 알 수 없는 특별한 권능이 하나 더 부여되어 있는데 저건 뭐지…? 어쨌든 축융과 비등한 역량이며 방심한 축융을 일격에 쓰러뜨릴 정도로 강한 거군.”

“싸움에 미친 놈아. 해설 참 고맙군. 근데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냐.”

나는 통제실의 화면에 시선을 고정시키며 말했다.

“적들이 나타났어.”

츠즈즈즈

악몽의 거리 위에 촉수로 이루어진 괴물들이 차마 묘사하기 조차 끔찍한 형태를 띄며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지상의 요괴들조차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이형(異形)을 띄고 있었기에 보는 것만으로도 토가 나올 것만 같았다. 더 문제는 그 숫자가 최소한 수백에서 수천에 이르고 있었기에 압도적인 물량이 예상되었다.

아수라가 힐끔 괴물무리를 보더니 말했다.

“직접 나가서 싸우는 건 힘 낭비겠군. 이 차원 전체가 누군가에게 지배당하고 있다.”

“차원이 지배당하고 있다고?”

“그렇다. 내 경험상 이런 경우 저 놈들을 다 없앤다 하더라도 무한히 재생성될 뿐이야.”

“흐음. 그럼 어떻게 하면 되지?”

“일단 방주를 이용해서 놈들을 쓸어버린 후 제갈사를 빠르게 찾아서 합류하는 게 제일이지.”

결국 하는 일은 같은 거군. 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방주에게 명령을 내렸다.

“심연제거기를 작동해서 쓸어버려라.”

[심연제거기 발동.]

푸화하학

다음 순간, 방주의 포문에서 은빛의 거미줄 같은 게 가득 뿜어져 나와서 괴물들을 에워쌌다. 그리고 거미줄에 휩싸인 이형의 괴물들은 움직이지 못한 채 버둥거리기 시작했는데 나는 예전 해신족과의 싸움과는 다른 걸 알아챘다.

“해신족은 그물에 당하면 녹던데 저것들은 녹지 않는군?”

[적성체의 혼돈 보유량이 크기 때문에 제압 이상의 피해를 줄 수 없습니다. 용해피해를 줄 수 있는 혼돈종족의 최대랭크는 B입니다.]

“…….”

[적성종족 위험도 랭크 S로 판정. 심연제거기의 제압을 오래 유지할 수 없습니다. 300초 이후 행동제어가 풀립니다.]

저 괴물들이 혼돈의 격에 있어서는 해신족보다 월등히 높다는 거군.

과연 순수한 혼돈의 이계에 거주하는 놈들답다.

‘그럼 심연제거기가 아니라 광함포를 뻥뻥 쏴대도 무의미하겠군. 순수한 혼돈의 공방력이 엄청 높을 게 뻔해.’

나는 아수라의 말대로 여기서 섬멸전을 하면 동력낭비만 한다는 걸 깨닫고는 방주에게 명령했다.

“이 자리를 전속력으로 탈출한다!! 그리고 제갈사를 찾아가!”

[초고속 기동 개시. 제갈사 탐색 중….]

파아아아

방주가 빠르게 날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방주가 날아가는 동안에도 중력을 무시한 악몽의 거리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실시간으로 건축되면서 그 영역을 넓히고 있었고, 마치 총천연색 혼돈 속에서 빛도 소리도 제멋대로 왜곡되는 게 느껴졌다.

끼이이이

알 수 없는 혼돈의 음률이 들려온다. 그 음률을 내 옆에서 듣고 있던 아수라가 인상을 찌푸렸다.

“고위존재가 출현했다. 이건 마법공격이야.”

“공격? 마법?”

“참나, 네 녀석은 아예 인식도 못하나.”

기가 막히다는 듯 중얼거린 아수라가 화면으로 시선을 향했다.

“저 뒤에 날아오는 놈인가 보군.”

삐잉 하는 소리와 함께 통제실의 화면에 방주를 뒤따라서 날아오는 웬 촉수달린 괴물이 보였다. 그 괴물은 마치 서양의 술법사처럼 망토를 두르고 있었고 한 손에는 지팡이를 든 채 엄청난 속도로 비행하고 있었다. 지팡이에서 은은한 혼돈의 영기가 흐르는 걸 보면 저 지팡이를 써서 우리를 마법으로 공격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촉수괴물 마법사?’

나는 곧장 방주에게 명령을 내렸다.

“저 놈을 공격해라!”

촤아앗

심연제거기의 은빛 그물이 날아가서 촉수괴물 마법사를 강타했다. 그러나 마법사의 몸 주위에 반투명하게 떠오른 회색의 방어막이 은빛 그물을 그대로 흡수해버렸고, 마법사는 도리어 지팡이를 휘둘러서 허공에서 거대한 악마의 손을 소환했다.

꽈광!!

악마의 손이 방주를 때리자 방주 전체가 크게 흔들렸고 기계음 보고가 이어졌다.

[적성체의 마법공격을 받아 이성계함의 좌현 방어막이 68.2퍼센트 파손.]

“아, 제기랄!!”

나는 곤혹스러워서 욕지기를 내뱉었다. 딱 봐도 상대방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엄청 쎄!’

겁도 없이 방주에 혈혈단기로 날아와서 심연제거기를 자체방어막으로 무시해버리고 주문한방으로 방주에 큰 피해를 주다니! 인간계에서 보았던 인간마법사들 따위는 비교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물론 방금 전에 전욱이나 축융과 상대해본 덕에 두려움까진 느껴지지 않았으나 최소한 대라신선급 강자라는 건 틀림없었다. 술법능력으로 볼 때 팔선 수준을 충분히 뛰어넘는다. 방주에 가만히 앉아서 상대할 수 있는 놈은 절대 아니었다.

아수라가 화면에 나타난 마법사의 모습을 유심히 보다가 말했다.

“…저거, 내가 알기로 저런 종족은 세상에 딱 하나 뿐이다.”

“설마.”

“그 설마다.”

아수라는 팔짱을 끼며 말했다.

“우화(羽化)를 끝낸 흉신의 종족이다. 나도 살면서 먼 발치에서 딱 한번밖에 못 본 희귀종족인데….”

흉신의 종족!

그건 분명히 내가 알기로 대뢰옥에 있던 인간들이 강제로 흉신의 축복을 받아서 우화한 결과물이 아니었던가? 나는 이런 데서 성체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기에 당황스러웠지만 아수라에게 말했다.

“아수라. 어떡하지? 이대로 계속 도망치는 게 나을까.”

“아니. 저 놈의 공격력을 볼 때 방주가 오래는 못 버틴다. 배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지금 나가서 싸우는 수밖에 없겠군.”

그렇게 중얼거린 아수라가 본체로 변신하더니 말했다.

[내가 저 놈을 해치우는 동안에 제갈사의 위치를 찾아둬라.]

“알았어.”

아수라는 제갈사의 위치를 탐색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 싸우러 나가려는 것이다. 나는 배를 조종해야 하기 때문에 함께 나갈 수 없었다.

파앗

이윽고 아수라가 순간이동으로 흉신의 종족 마법사 앞에 나타났다. 아수라는 나타나자마자 곧바로 전력을 다해서 공격했다.

[뒈져라!]

적멸무극!

방금 전에 호된 꼴을 당했기 때문일까? 아수라의 행동에는 전투를 즐긴다는 여유보다는 빠릿빠릿한 실전감이 감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가 펼쳐내는 적멸무극의 육륜(六輪)은 더욱 강맹하게 회전하는 걸로 보였다.

쿠콰콰콱

“좋았어!!”

혹시나 저 흉신의 종족 마법사가 적멸무극을 막아낼까봐 조마조마했었지만 다행히도 그 정도의 마법사는 아니었던 듯, 놈의 몸뚱이는 허무하게 적멸무극에 찢겨져 나갔다. 육편이 비산하자 아수라가 자신감이 생긴 듯 포효를 터뜨렸다.

[크하하하!! 팔부신중 아수라를 당해낼 수 있을 것 같으냐.]

그 때였다.

츄르르륵

갑작스럽게 눈앞의 모든 것이 물감처럼 흐릿해진다!! 나는 일순간 그 왜곡감을 느꼈지만 인식할 정도의 능력이 되지 않았기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알 수 없었고, 이윽고 눈앞에서는 엉뚱한 장면이 펼쳐져 있었다.

언제 몸이 산산조각났냐는 듯 흉신의 종족 마법사가 원래대로 되돌아와 있었고 놈이 후려친 지팡이가 아수라의 검면을 때렸다. 아수라는 엄청난 반사신경과 의념으로 그 지팡이 공격을 받아내었는데 폭음이 울려퍼졌다.

콰과광

“……?!”

아니 죽은 놈이 대체 왜?!

관전하던 내가 당황해하자 아수라가 크게 외쳤다.

[이 놈…. 상당히 거물이구나! [작은 굴레]를 움직이다니.]

나는 그 외침에서 상황을 알 수 있었다.

저 마법사는 놀랍게도 [작은 굴레]를 이용해서 시간을 역행하고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저 정도면 방금 전에 판단했던 강함보다 최소한 두 배는 강한 것이었기에 나는 눈을 부릅떴다.

‘아니…. 이제 이 세계에 갓 들어왔는데 뭐 저렇게 쎈 놈이….’

투웅

지팡이와 검이 마주쳤다가 떨어졌다. 아수라와 일 합을 나눈 그 마법사는 흉신의 종족 특유의 기괴한 촉수를 일렁이면서 자줏빛의 안광을 빛내며 말했다.

[팔부신중이 뭔지 모르겠군. 그게 뭐지?]

[뭐라고!]

[정체모를 마왕이여. 너는 어디의 명령을 받고 이 성지(聖地)에 침입했느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그 반응에서 마법사가 진짜로 팔부신중이 뭔지 몰라서 물어봤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 이 새끼….]

저만한 고위종족이 팔부신중을 모르다니?!

마법사는 황당해하는 아수라에게 지팡이를 겨누며 말했다.

[누구든 상관없다. 위대한 주인님의 계획에 방해되는 놈은 나, 신관(神官) 아르타룬이 동료들과 힘을 합쳐서 해치우겠다.]

[동료?]

[오라, 신관들이여!]

슈슈슉

슈슈슉

다음 순간, 신관 아르타룬의 주변에 원형으로 약 십여 명의 괴물들이 소환되었다. 그 괴물들은 아르타룬을 포함하여 총 12명이었고, 저마다 모습이 다 달랐지만 딱 하나 공통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지팡이와 망토를 장비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내가 그들의 대치를 지켜보고 있을 때 전국옥새가 외쳤다.

[제갈사의 위치 탐색완료. 위치를 표시합니다.]

삐잉

화면에 점으로 제갈사의 위치가 지도에 표시되자, 나는 이 이계의 전면구조가 얼마나 기괴한지를 알 수 있었다.

‘저건… 나무?’

마치 신단수(神檀樹)를 연상시키는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나무가 뻗어 있었고 제갈사의 위치는 그 초거대목에서 중층부인 걸로 보였다.

이상하다.

산맥 정도로 큰 나무라면 진작에 보였어야 했는데 지금 눈앞에 보이는 건 총천연색 혼돈과 기괴한 무한의 거리 뿐! 그렇다면 도대체 저 나무와 제갈사는 어디에 있다는 말이지?

“서문혜는?”

삐잉

“…….”

이어진 서문혜의 위치표시에 나는 약간 안색이 창백해졌다. 왜냐하면 서문혜의 위치는 초거대목의 최상층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당연하겠지만 적의 본거지에서도 최상층이라는 건 서문혜의 목숨이 그만큼 위험하다는 것!

“빌어먹을…!!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갈 수 있겠냐?”

[불가능합니다.]

“뭐?”

[적성체가 마법으로 본함의 기동력을 봉쇄했습니다. 마력제어를 풀지 않으면 본함은 이동할 수 없습니다.]

“…제기랄….”

지금 아수라를 에워싼 신관이라는 놈들이 마법을 부려서 이 방주를 못 움직이게 한 거구나!

‘이런 경우 술자를 쓰러뜨려야만 풀리게 되어있는데….’

예감이 정말 좋지가 않다.

지금 내가 밖으로 나가서 아수라와 2대 12로 싸운다면 과연 저 놈들을 이길 수 있을까? 왜인지 모르지만 저 12마리는 정말 위험한 놈들이라는 느낌이 든다.

싸우는 것밖에 방법이 없지만 이 싸움의 승산은 매우 적다는 직감.

어떻게 해야 이 직감을 벗어날 수 있는 걸까.

‘제길….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괴물들이야…. 어디서 저런 것들이….’

나는 내심 한탄했지만 지금은 어쨌든 간에 말로 어떻게든 해볼 수밖에 없다.

힘이 딸리면 말빨로 해결할 수밖에!

“나를 밖으로 내보내줘!”

파앗

나는 방주 바깥으로 나와서 아수라 곁으로 갔다. 아수라는 사방을 경계하고 있었는데 왠지 표정이 상당히 어두워보였다. 그러더니 아수라가 말했다.

[백웅. 예감이 좋지 않다….]

“…….”

나도 그래. 왠지 이 새끼들한테 잘못 걸리면 큰일 난다는 생각이….

하지만 나는 겁을 집어먹기보다는 심호흡을 크게 한 후, 아까 아르타룬이라고 하던 신관에게 말을 걸었다.

“어이, 아르타룬!!”

[너는 또 누구냐.]

“나는 사실….”

나는 팔을 걷어붙이고 사도의 각인을 보여주려다가 멈칫했다.

‘…왠지 사도라고 해도 쫄지 않을 놈들 같은데.’

삼황오제의 위광이 안 통할 것 같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자 공연히 사도라는 걸 밝힐 필요는 없다고 여겼고, 소매를 다시 내리면서 말을 이었다.

“…백웅이다.”

[…….]

“그러니까… 어….”

으윽…. 이럴 때 하필 긴장한 건가. 얼어서 말이 안 나온다….

“…….”

나는 그 순간 엄청나게 후회했다.

‘백웅이면 뭐!! 저 놈들이 바로 공격할 텐데 대체 무슨 생각이냐 이 바보같은 놈아!!’

나는 나 자신을 질책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악몽의 이계에서 날아다니는 놈들이 내 이름을 어떻게 알겠는가! 안 그래도 아수라와의 접전으로 적대적 성향이 극한에 달한 놈들이 바로 다음 순간 습격해 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이제 끝장인가!

하지만 잠시 후 뜻밖의 상황이 벌어졌다.

신관 아르타룬이라 하던 놈은 자신의 턱에 달린 촉수를 부들부들 떨더니 말했다.

[뭐… 뭐라고…. 그대가 백웅…? 정말인가?]

“그, 그래. 정말이다.”

[믿을 수 없다…. 전혀 전달받은 바가 없다….]

웅성웅성

심지어는 아르타룬 옆에 있던 다른 신관들도 서로를 보면서 웅성거리는 기색이었다. 신관 아르타룬은 뭔가를 고민하다가 자신의 흉측한 이족의 손을 내밀며 말했다.

[정말 백웅이라면 ‘초대장’을 갖고 있겠지…. 보여주시오.]

묘하게 말투가 달라진 것 같지만 나는 어리둥절하면서도 그게 뭔지를 단숨에 알아차렸다.

‘초대장이라면 그거지…?’

나는 목갑에서 푸른 보석을 꺼내서 보여주었다. 그 보석을 본 신관 아르타룬은 촉수를 부들부들 떨더니 갑자기 무릎을 꿇는 자세를 취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신관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오오오!! 정말 찾아오실 줄이야….]

“엉?”

[성지에 찾아와주셔서 감사하옵니다!]

신관 아르타룬이 천천히 고개를 들며 말했다.

[위대한 주인님께서 귀하를 기다리십니다. 안내해 드리겠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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