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4====================
사신지혼(四神之魂)
나는 이 싸움에 승산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 곳은 만귀전이며, 삼황오제 중에서도 호전적이고 강력하기로 이름 높은 전욱이 인과율의 제약조차 받지 않는다. 축융과는 격이 다른 전욱을 상대로 어찌 이길 수 있겠는가.
당연히 그 다음으로 생각난 건 ‘죽음’이라는 두 글자였다. 보통 인간이라면 이 글자가 절망을 안겨주겠지만 적어도 내게는 아니다. 죽음 그 자체를 무기로 사용해서 새로운 굴레를 돌릴 수 있으니 때로는 빠른 포기가 답이 되는 것이다.
‘승산없는 싸움으로 동료를 괴롭게 하느니 차라리 이번 생은 포기하겠어. 어차피 이번 생은 아직 초반이야.’
나는 그렇게 생각한 후 흑웅에게 마음 속으로 말을 걸었다.
‘흑웅. 내게 몸의 주도권을 줘. 내가 하겠어.’
그러나 흑웅은 내 말에 단호하게 대꾸했다.
[자살은 용납할 수 없소, 주인.]
‘…….’
몸을 되찾자마자 자살을 시도하려 했는데 눈치가 얼마나 빠른 거냐.
[벌써 포기할 때도 아니오. 나를 믿어 주시오.]
‘제길. 전욱한테 잘못 걸리면 자살조차 할 기회가 없어져. 도리어 네 힘을 믿고 자살할 정도 틈은 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러자 흑웅이 약간 생뚱맞은 말을 했다.
[주인. 28회차 전생 이후 가진 힘을 다 써본 적 있소? 주인이 갖고 있는 모든 잠재력을 다 발휘해서 싸운 적이 있냔 말이오.]
‘뭐?’
[없다면 잘 봐 주시오. 이건 굉장히 중요한 싸움이 될 것이오.]
쿠르르….
흑웅이 소환해낸 음신지력의 갑옷에 일어나던 균열이 멈추었다. 전욱의 힘에 짓눌리긴 했지만 최소한의 기골을 가지고 버텨냈다는 뜻이었다. 동시에 흑웅이 창을 더욱 강하게 잡고 투기(鬪氣)를 방출하기 시작하자 나는 더 이상 흑웅에게 말을 걸 수 없었다.
극한의 초집중 상태!
신검합일(身劍合一)에 필요한 집중력을 가볍게 뛰어넘는 그 상태에 말을 거는 건 파멸하라고 등을 떠미는 행위나 다름없다. 나는 별 수 없이 흑웅의 전투를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떻게 하겠다는 거냐….’
상대는 전욱이다. 바로 그 전욱이다. 비록 황제 공손헌원이라는 어마어마한 거물과 맞상대하느라 그의 격이 다소 퇴색된 것처럼 느껴졌었지만, 그건 500년 후에 말도 안 될 정도로 권능의 평균적인 수준이 올라갔기에 생겨난 착각이다. 현 시점에서 전욱은 단연 전 우주에서 손꼽힐만한 [옛 지배자]의 일좌였으며 그를 초월하는 자는 외신을 제외하고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전생 초기에 이기려고 시도하는 것조차 어불성설인 위대한 존재다.
그걸 흑웅이 모를 리가 없다. 흑웅 자체가 전욱의 음신지력이 정령화되면서 탄생한 존재이기에 도리어 나보다 전욱의 힘을 잘 알고 있으리라. 그런데도 이 무모한 도전에 집착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흑웅이 자신의 창과 무게중심을 아래로 낮추며 뇌신류 창술의 기본자세 중 하나인 조(造)를 취했다. 저 자세 자체는 초식이라 할 수 없었으며 단지 기수식의 여러 가지 형태 중 하나일 뿐이었다. 어떻게 초식이 출발하는지 정하는 형태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조에서 그 어떠한 목적성도 읽어낼 수 없는 게 정상이었지만 나는 그 순간 기묘한 감각에 움찔했다.
파생(派生).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창이 꿈틀거리고, 흑웅과 창신동체(槍身同體)가 되어 무수한 미래의 나뭇가지가 떨쳐지는 것과 같다. 흑웅이 앞으로 펼쳐낼 수도 있는 무수한 초식의 가짓수가 일순간 반투명한 형상이 되어 내 눈에 비쳐보였다.
그리고 눈 깜빡할 사이에 그 형상은 내 시야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방금 전 보았던 그 파생의 형상이 내 착각인가 했지만 착각이라기엔 너무나 선명한 광경이었다. 절대지경에 오르고 나서도 느끼지 못했던 기이한 현상에 나는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아주 긴 침묵 -
그 침묵을 끊어낸 것은 바로 암흑의 거신 전욱의 일 권(一拳)이었다.
슈웅
전욱의 주먹질은 딱히 초식이나 기(氣)를 담지 않았으며 물리법칙에 따르는 파공음이나 빛의 효과도 없었다. 그저 일월(日月)이 천지를 운행하듯 느리면서도 자연스럽게 날아오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나는 절대지경의 감각으로 그 권의 궤도를 알면서도 도저히 피하지 못하리라는 절박한 감정에 휩싸였다.
‘축융의 공격과는 뭔가 달라!’
축융처럼 [작은 굴레]를 조작하는 공격이라 생각한다면, 흑웅은 굴레를 조작하는 권능에 저항력이 있으니 당연히 버틸 수도 있다. 그러나 무인으로서의 직감은 지금 전욱의 일격은 축융과 다르다는 걸 끊임없이 외치고 있었다.
이미 투갑의 방어력이 의미가 없다. 채찍공격처럼 팔을 들어서 막으려 하다가는 팔 째로 분쇄당하며 일격에 죽을 게 뻔했다.
[…역시 무(武)로는 안 되겠군.]
그 순간, 집중력을 잔뜩 발휘하고 있던 흑웅이 뭔가를 중얼거렸다.
[권능을 쓸 수밖에.]
그러더니 투구 사이에서 시꺼먼 안광을 발출하며 권능을 발휘했다.
성라회천(星羅回天)
그와 동시에 무시무시한 기세로 신력이 소모되는 게 느껴졌다. 권능이 발현되는 대가로 흑웅이 신력을 무진장하게 소모하는 것이다. 동시에 흑웅의 몸에 알 수 없는 기운이 덧씌워지기 시작했다.
재귀발현(再歸發現)
대운중첩(大運重疊)
갑작스럽게 흑웅의 몸이 터져버리는 것 같았다. 무언가 하려고 하던 흑웅은 결국 막강한 전욱의 일 권을 막지도 피하지도 못하고 죽은 것 같았다. 나는 흑웅에게 몸의 통제권을 준 채로 지켜보고 있었으므로 나 또한 영락없이 단숨에 죽는 거라고 생각했다.
‘으…. 차라리 잘 됐어. 30번째 생은 좀 더 잘… 응?’
하지만 조금 시간이 지났지만 황금이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 대신에 내 시야에는 내 양 손의 수갑(手甲)이 머리 위로 올려져서 앞으로 내밀어져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수갑은 경이적인 힘을 발휘하며 거신의 주먹을 밀어내고 있었다.
뿌드드득!!
전욱의 일 권을 양 팔을 뻗어서 정면에서 막아낸 것인가?!
‘아무리 흑웅이라도 그게 돼?!’
믿기지 않는 잠재력에 내가 경악하고 있을 때 내 입에서 알 수 없는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성라회천(星羅回天) 이연(二連).]
재귀발현(再歸發現)
필중가호(必中加護)
재귀발현(再歸發現)
적궁백시(赤弓白矢)
키리링!!
그와 동시에 흑웅의 몸 주위에 적궁백시가 소환되어서 무형의 화살을 장전하기 시작했다. 마치 하늘에 저절로 떠 있는 듯한 그 적궁백시를 본 전욱이 말했다.
[제곡의 부하…. 신 사냥꾼의 활인가?]
[어디 받아 보시오.]
[그러지.]
퓨퓨퓽!!
적궁백시의 첫 발이 파공음을 내며 전욱의 명치로 날아갔다. 전욱은 그 백시에 필중의 가호가 붙어서 피하지 못함을 아는지 그냥 팔뚝을 내밀어서 화살을 막았다. 그렇게 순식간에 일곱 발의 화살까지가 날아와서 박혔지만 전욱의 육체는 붕괴되기는 커녕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적궁백시가 저렇게 무력해보일 줄이야.’
다른 신격과는 다르다. 전욱은 이미 몸 주위에 무형의 방어막을 쳐놓고 피해 자체를 차단하고 있는 듯 했다. 저렇게 해서는 설령 예 본인이 와서 쏜다고 하더라도 마지막 9발 째 외에는 피해를 줄 수 없으리라.
그걸 전욱 본인도 아는지 비웃듯 말했다.
[기껏 투신 나부랭이의 권능을 빌려와서 어쩌겠다는 말이냐?]
[…마지막 한 발이오.]
쿠콰콰쾅!!
적궁백시의 마지막 아홉 발째, 수만 배의 위력이 응축된 화살이 날아가서 전욱의 팔을 강하게 때렸다. 그러나 전욱은 그 순간 자신의 몸에 철갑을 소환해서 가볍게 막았고, 그저 퉁 하고 밀려나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내가 그 모습을 보고 정신이 아찔해질 때였다.
파지직
뇌신류(雷神流)
투창술(投槍術)
관천일뢰(貫天一雷)의 태세!
흑웅이 재차 암창을 만들어서 허공에 투척했다. 그 투창술은 영락없이 내가 썼던 뇌신류의 투창술이었으며 필살의 기세를 담고 있었으나, 상대가 상대이니 만큼 무력한 이쑤시개처럼 보였다.
[크크. 더 이상은 수가 없느냐?]
그러자 전욱은 우습다는 듯 그 창을 잡아서 부수려는 듯 손을 내밀었는데, 그 순간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지이잉!!
푸콱
[……!!]
천하의 전욱조차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그것은 날아간 암창이 전욱의 방어를 완전히 무시하고 마치 투과하듯이 그의 명치에 날아가서 꽂힌 것이었다. 전욱은 잠시동안 믿기지 않는 듯 자신의 명치를 바라보더니 표정이 크게 일그러졌다.
[낙수가 바위를 뚫는 법.]
흑웅이 탓 하고 땅에 착지하며 말했다.
[전욱이여! 필중(必中)과 대운(大運)의 조합은 당신이라도 피할 수 없소.]
[그래서? 이깟 이쑤시개를 본좌에게 꽂아서 뭘 하겠단 거냐?]
[말해두지. 이것도 안 통하면 내겐 더 이상 방법이 없소. 현재 역량으로는 그 어떤 전략으로도 오제를 쓰러뜨릴 잠재력은 없소.]
그렇게 말한 흑웅은 천천히 손을 앞으로 뻗었다.
[하지만 이걸 멀쩡히 받아낼 리는 없을 것이오.]
성라회천(星羅回天)
재귀발현(再歸發現)
타신편(打神鞭) 소환권(召喚權)
우웅
갑자기 흑웅의 손짓이 향하는 곳에 반투명한 보패 타신편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천계 태공망의 신급보패인 타신편이 소환명령에 따라 나타난 것이다! 자신의 명치에 꽂힌 암창과 동일한 좌표에 소환된 타신편을 확인한 전욱이 당황한 듯 외쳤다.
[이건 신급보패….]
[발동(發動).]
쿠구구구구구
다음 순간, 신성(神聖)의 폭발이 일어나며 전욱의 상반신에서 새하얀 광염(光炎)이 퍼져 나왔다. 타신편이 전욱의 신력에 반응하면서 일어난 현상이었고 폭발이 확장되자 전욱은 마치 빛의 구슬을 삼킨 것처럼 비틀거리며 제 몸을 가누지 못했다.
[크으으으…!!]
당장이라도 타신편이 몸을 파괴하려는 걸 억지로 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흑웅이 중얼거렸다.
[주인. 이게 내 최선이었소.]
나는 멍하니 그 싸움을 관전하고 있다가 질문했다.
‘…성라회천의 권능은 뭐지?’
[짐작하고 있겠지만 주인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과거의 축복을 불러와서 재귀발현시키는 것이오. 재귀발현하는 데는 주인이 전생하면서 모아온 무지막지한 양의 신력이 소모되오.]
‘……!!’
[이게 가능한 것은 신력을 이용해서 내가 임의로 인과율을 다시 잇는 작업을 하기 때문이오.]
개사기잖아!!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대단하군…!! 조금만 더 강해지면 삼황오제도 쉽게 이길 수 있겠어!’
[그렇지 않소. 본래의 축복보다 열화(劣化)하여 발현하기에 조합을 잘 짜지 않으면 신력만 무모하게 소모될 뿐. 절반 정도의 위력이라고 생각하오.]
‘절반이라….’
원래 축복의 절반의 위력이라도 조합을 짜기에 따라서는 굉장한 결과를 보일 수 있다. 지금 눈앞에 그 결과물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나는 성라회천의 대단함에 놀라면서도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말했다.
‘잠깐…. 설마 전욱이 죽지 않았다는 거냐?’
[그렇소.]
‘왜?’
[타신편은 원래 저렇게 발동하는 보패가 아니니까…. 저항력이 발동하고 있으니, 전욱은 방심하다가 옆구리에 단도가 스친 정도인 것이오.]
흑웅은 내 말에 대꾸하면서도 또 다시 권능을 시전했다.
[작은 굴레] 회복!
갑자기 넝마가 되어있던 내 몸뚱이는 원상복구가 되었고 흑웅이 재차 갑옷을 소환하여 장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끝까지 저항해야겠지. 저 자가 체력을 회복하기 전에.]
타닷!
그리고는 흑웅이 크게 도약을 하며 창섬(槍殲)을 내뿜어서 전욱의 미간을 찔렀고, 전욱은 피하지도 않고 도리어 박치기를 했다.
[감히 이놈이!!]
흑웅의 예측대로 전욱은 지금 잠시 허를 찔렸을 뿐 전혀 큰 타격을 받은 게 아닌 것이다.
꽝!!
박치기에 흑웅의 창이 산산이 부숴지면서 갑옷이 몽땅 부숴졌다. 그 와중에도 내게는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 걸로 봐서 흑웅이 나 대신에 고통을 분담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이미 절망적일 정도의 격차를 눈으로 확인했기에 흑웅에게 외쳤다.
‘흑웅! 그만해! 더는 방법이 없어!’
슈슉
어느 새 전욱의 은빛 창이 저절로 움직이며 전욱의 손에 잡히는 게 보였다. 저 창을 든 걸 보면 이제 진심으로 우릴 죽일 생각이 분명했다.
더 이상은 무리야.
당장 자살해야 해!
그러나 흑웅은 비틀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갑옷이 다 깨졌는데도 포기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슬슬 때가 되었군.]
뭔가 각오한 듯 중얼거린 그는 끝까지 암창을 소환해서 자세를 잡으며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흑웅은 신력이 많이 소모되어서 더 이상 성라회천을 쓸 수 없는 듯 했다.
흑웅이 일어서자마자 전욱에게 말했다.
[전욱이여. 당신은 나를 단숨에 죽일 수 없소.]
[그 알량한 대운의 가호 때문인가? 그 휘발성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본좌는 알고 있다.]
[말을 받아주시는 걸 보면 생각보다 분노하지는 않으셨구려.]
[…….]
이어진 흑웅의 말이 너무나 뜻밖이라서 나는 당황했다.
[투항하여 부하가 될 테니 살려 주시오.]
…엥?
[소환취소.]
파앗
그리고 다음 순간 흑웅이 손가락을 까닥하자 소환된 타신편이 소멸되었고 타신편의 신성파괴 또한 함께 없어져 버렸다. 저항할 수단을 스스로 버린 것이다. 간신히 전욱을 붙들어매고 있었는데 저렇게 나오다니?!
잠시 후 전욱의 반응 또한 내 예상을 벗어난 것이었다.
전욱은 껄껄 웃기 시작했다.
[크흐… 크하하하하!! 네놈에게 또 하나의 수가 남아있었음을 알고 있다. 그런데 굳이 고개를 숙이는 건 본좌에게 자신의 힘을 증명하기 위함이었더냐?]
또 하나의 수?
내가 어리둥절해하고 있자 흑웅은 그저 고개를 숙여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전욱께서 진심으로 죽이려 했다면 이런 잔재주를 피울 기회도 없었음을 알고 있소. 본인이 가진 재주를 보기 위해 독수를 자제하셨던 아량은 과연 군주다웠소. 그 아량을 독랄하게 갚고자 하면 무사라 할 수 없는 소인배에 불과하니, 여기서 패배를 인정하겠소.]
[크크크…. 목숨을 당당하게도 구걸하는구나.]
[나 하나만의 목숨이라면 결코 투항하지 않았을 터. 투항하는 조건이 있소.]
그러자 전욱이 눈에 이채를 띄었다.
[조건이라면?]
[나의 주인 백웅을 사도로 임명하되 당신의 이름을 걸고 절대적으로 보호해주어야 하오.]
[…….]
전욱은 뭔가를 생각하는 듯 했다. 그러더니 말했다.
[잔꾀를 부리는군. 딱 봐도 네 힘의 소모가 심해 보이는데 네 공백을 본좌의 자비로 메울 생각이냐?]
[이건 나의 최선이오.]
[좋다. 나 전욱의 이름을 걸고 내 사도가 될 백웅을 끝까지 지켜줄 것을 맹세하겠다. 너희만한 부하를 얻는다면 감수할 만 하지.]
[감사하오. 그리고 또 하나, 대운중첩의 반동을 막아주시오.]
[뻔뻔한 놈이군. 그렇게 해 주지.]
[감사하오….]
후웅
잠시 후, 내 몸에 덧씌워진 흑색 갑주가 풀리면서 내 몸의 통제권이 원래대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나는 내 의식세계 안으로 흑웅이 들어온 것을 느끼며 흑웅에게 말을 걸었다.
‘흑웅! 숨겨진 또 하나의 수가 뭐야?’
[대라멸진을 쓰거나 아니면 방금 전 상황에서 억지로 태극도를 써서 상태를 심화시키거나 할 수 있었소.]
‘아! 사대신기를 쓸 수도 있었겠구나.’
[그건 못 쓰오.]
‘응?’
[주인이여. 아직도 모르겠소?]
흑웅이 의식세계에서 팔짱을 끼며 말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사실 주인도 다 할 수 있는 것. 나는 주인의 잠재력을 최대한으로 끌어내서 싸웠을 뿐이오. 오로지 성라회천만이 정령으로서의 고유권능일 뿐, 나머지는 모두 주인이 소유한 잠재력….]
‘……!!’
[단지 사대신기만은 인정받은 주인만이 쓸 수 있소.]
그, 그런 건가.
내가 방금 전 상황을 이해하자 흑웅의 모습이 점차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흑웅은 점차 사라지면서 말했다.
[…주인. 그럼 잠깐 자러 가겠소…. 짧은 시간에 힘을 너무 많이 썼소….]
‘어?! 잠깐만!’
[언령을 수련하면 머지않아 다시 볼 수 있을 것이오. 이건 긴 수면기가 아니오…. 다만… 마(魔)의 유혹에 너무 빠지지 마시오….]
‘마의 유혹?’
[이름을… 새기는 건… 위험하오…. 내가 나타나지 못했던 건 마력의 적층 때문….]
쉬익
다음 순간 흑웅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흑웅!!!”
내가 흑웅의 이름을 외쳐 부르자 앞에 있던 전욱이 말했다.
[가만히 있어라.]
“네?”
전욱의 거대한 손이 내 머리 위에 얹어졌다. 내가 뻣뻣하게 굳어 있자 알 수 없는 무형의 기운이 전욱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고, 전욱은 불쾌한 듯 손을 털더니 말했다.
[이로써 대운중첩의 반동은 무효화시켰다.]
“아….”
흑웅이 부탁한 게 그거였구나!
대운중첩의 반동이 이어지면 나는 무조건 죽으니까!
‘그게 성라회천의 문제점이군.’
대운중첩 같은 강력한 축복을 불러와서 쓸 수 있지만 그 반동을 무마할 방법이 없으면 갈수록 액운만 쌓일 뿐이라는 건가. 그렇다면 앞으로 흑웅의 힘을 쓸 수 있더라도 전략을 신중하게 결정해야 할 것 같다.
내가 고민하고 있을 때 전욱이 말했다.
[방금 전 소호금천과도 합의했다. 너는 이제 나와 놈의 공동사도이다.]
“그, 그래도 됩니까?”
[우리가 납득했다면 상관없지.]
그렇게 대꾸한 전욱이 말을 이었다.
[그럼 본좌의 사도로써 첫 임무를 내리겠다. 이건 네놈에게 더 절실한 임무겠지.]
“그게 무엇입니까?”
이어진 전욱의 말에 나는 드디어 이번 전생에서 가장 큰 한 발을 내디뎠다는 걸 직감할 수가 있었다.
[제갈사는 얼마 전부터 본좌의 명을 받아 흉신(凶神)을 조사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지금 놈은 서방에서 부활한 나인교(羅湮敎)와 싸우고 있는 듯하니 제갈사를 도우러 가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