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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아수라는 그렇게 말하고는 내게 손을 까닥거리며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나는 아수라를 따라서 뒤편의 연회장으로 갔고, 많은 귀신들이 멀뚱히 앉아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아수라는 내게 힐끔 눈짓을 하더니 말했다.
“백웅…. 지금부터 음식을 먹어라!”
“……?!”
“여기 있는 거 먹을 수 있는 만큼 전부 다!”
먹으라고? 대뜸 무슨 소리야!
나는 바로 반박하고 싶었지만 순간적으로 아수라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만귀전의 음식을 먹으면 음신지력을 얻게 된다!!’
예전에 연회에 초대받았을때 약간의 음식을 먹고나서 상당한 음신지력을 얻은 적이 있었다. 나는 그 사실을 떠올리며 아수라에게 말했다.
“…음신지력을 강화해서 힘으로 저 방패를 밀라는 말이냐?”
“그렇다. 내가 볼 때는 이게 최선이다.”
“아니, 다른 방법을 써도 되지 않을까. 예를 들자면 광선이라던가….”
그러자 아수라가 슬쩍 옥좌에 앉은 전욱 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글쎄. 위대하신 전욱께서 광선의 존재를 모르진 않겠지. 허나 너무나 자신만만하시군….”
아수라의 말대로였다. 나 또한 전욱의 상태를 살폈는데, 분명히 신의 초월적인 감각으로 우리의 대화를 다 듣고 있을 텐데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것은 아수라의 말대로 전욱은 이미 내가 광선의 권능을 쓸 수 있다는 정도는 알고 있다는 의미이리라.
그리고 그 반응은 또한 - 광선만으로는 이 시련을 헤쳐나가기 힘들거란 사실을 뜻한다. 아수라는 그 찰나에 전욱의 반응에서 그 가능성을 감지해낸 것이다.
나는 우려하며 아수라에게 말했다.
“하, 하지만 여기의 음식을 먹으면 늙어버린다고!!”
그렇다. 내가 아수라의 제안이 효율적이란 걸 알고 있으면서도 곧장 시도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이유는 바로 노화(老化)!
‘과거 만귀전의 음식과 술을 배가 약간 채워질 정도만 먹었는데도 20년이나 늙었었다. 아수라의 말대로 배가 터질 정도로 처먹게 되면 아마….’
최소한 수백여 년의 노화가 단숨에 닥쳐올 게 뻔하다!
애초에 과거에 내가 맘대로 음식을 먹으려 할 때 제지했던 게 바로 열이었던 것이다. 내가 순식간에 늙어죽어 버리면 전욱의 사도로서 명을 수행할 수 없다는 이유였었다. 그런 제반사정을 알고 있기에 아수라 말대로 마구 처먹는 건 함부로 시도할 수 없는 작전이다.
늙어죽으면 시련이고 뭐고 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러자 아수라가 나를 지그시 보더니 말했다.
“너라면 괜찮다! 안 그렇냐?”
“뭐?”
“너니까 괜찮다는 거다.”
“…….”
그 순간, 나는 아수라의 말뜻을 깨달았다.
‘살아남을 방법이 있는 게 아냐. 죽으라는 말이다.’
나는 전생자니까 늙어죽으면 그만이라는 뜻!
죽어도 재시작이 가능하니까 음신지력을 가득 처먹어서 몸 안에 쟁여놓는 게 효율적인 방법이라는 뜻인가!
‘이 새끼…!! 지 목숨 아니라고!’
나는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지만 동시에 매우 아수라다운 조언이라는 걸 깨달았다. 오로지 힘을 추구하는 아수라 입장에서는 음신지력 상승할 기회가 널려있는 이 상황을 놓치는 게 엄청난 손해로 느껴지는 것이리라.
어떻게 하지?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전욱에게 외쳤다.
“전욱이시여!! 다 들으셨을 테지만 일단 밥 좀 먹고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호오….]
“배가 많이 고픕니다!!”
이렇게 된 이상 도전해 주지!
예전에 못 먹었던 만귀전 음식을 마음껏 먹어 주마!
그러자 전욱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좋다…. 연회란 본디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이지. 마음대로 먹어도 좋다.]
“그럼 잘 먹겠습니다!!”
나는 재빨리 내 상 위의 젓가락에 손을 뻗었다. 그리고 젓가락을 움직여서 소면처럼 보이는 음식과 물고기 구이를 조금 집어먹었다. 동시에 향긋한 내음을 음미하며 채소반찬을 몇 점 집은 후 양념에 찍어서 천천히 음미했다.
‘와, 이거 맛있네.’
예전에도 생각했던 거지만 만귀전의 요리는 정말 맛있구나! 예전에 이 맛에 취해서 정신없이 먹으려 했던 걸 생각하면 가히 천하제일의 맛이라 할 수 있었다.
‘대웅제국 황제가 되어서 먹었던 연회음식보다 더 맛있다. 과연 인간세상의 음식과는 비교가 안 되는구나.’
내가 붉은 살점을 회처럼 썰어놓은 음식에 젓가락을 향하고 있을 때 옆쪽에서 와구와구 먹는 소리가 들렸다.
“…….”
오 척은 될법한 커다란 고깃덩어리의 뼈를 한 손에 잡고 우적우적 먹고 있던 아수라가 말했다.
“우움, 뭘 보냐, 빨리 먹어.”
“야. 너도 먹었다가 잘못되면 어떡할려고.”
“난 마왕이다…. 너희 인간같은 노화는 적용되지 않고 대신에 내 마력과 충돌해서 몸 안이 터질 수 있을 뿐이지.”
“아니 근데 왜 먹어?!”
“이 음식들은 음신지력이 가득한 천하일품. 그 충돌만 잘 넘기면 더 강해질 수 있을테니까…. 움, 맛있군, 빨리 먹자.”
“…….”
우걱우걱
아수라는 숫제 먹는다기 보다는 입안에 꾸역꾸역 밀어넣는 수준이었다. 나는 기가 막힌 눈으로 아수라를 쳐다보다가 나도 열심히 먹기 시작했다.
‘쳇. 하긴 인생에 요즘 낙이 없었는데 먹는 재미라도 느끼면 좋겠군.’
전생하고 나서 제대로 음식을 즐긴 적이 없었기에 먹는동안 느끼는 행복감이 더 각별한 듯 싶었다. 나는 이윽고 내 상 위에 있던 대부분의 음식을 먹었고, 그 양은 예전에 먹었던 양의 세 배는 되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배가 부르지 않아서 외쳤다.
“한그릇 더!!”
그러자 전욱이 힐끔 열을 쳐다보았고, 열은 부리나케 순간이동을 해서 내 옆으로 오며 고개를 숙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설마 정말로 먹기 시작할 줄은 몰라서 귀빈의 그릇이 비도록 내버려두었군요.]
퍼엉
열이 손뼉을 치자 기이한 소리와 함께 다 먹은 상이 치워지고 새롭게 상이 차려졌는데 호화찬란한 음식이 가득했다.
[계속 채워드릴테니 마음껏 드십시오.]
“좋소!!”
우걱우걱
디리링 -
나와 아수라는 계속 먹었고 어느 새 악사들이 열심히 곡을 연주하면서 주변에 앉아있던 귀신들도 열심히 먹기 시작했다. 나는 이미 스무그릇 이상의 음식을 비운 상태였고, 이 정도 양이면 속세에서는 성인 다섯 명이 먹을 정도의 음식이었다. 하지만 나는 묘하게 배가 아직도 고프다는 걸 느끼자 몇 그릇을 더 먹어서 상을 깔끔히 비웠다.
퍼엉
또 상이 나오자 나는 열심히 젓가락을 놀려서 먹기 시작했다. 갈수록 산해진미가 나오니 이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하루종일이라도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바로 그 때 이변이 일어났다.
“크학!!”
퍼버벙
“허억!! 아수라!”
아수라의 상반신에서 큰 폭발이 일어나며 열심히 먹고 있던 아수라가 튕겨져서 나동그라졌다. 그의 머리통에서 강렬한 폭음과 연기가 일어나고 있었기에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잠시 후 아수라는 쓰러진 채 인간형에서 본체로 되돌아가며 몸을 꿈틀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크아아악…. 아아악…. 이, 이렇게나 농밀한 기운이….]
“야!! 괜찮냐?!”
[흐아아악.]
저 비명소리를 들으면 절대 괜찮지 않다. 폭음의 충격보다는 그의 내부에서 벌레가 갉아먹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고, 무림인으로 치면 심한 내상을 입은 것과 다름없어 보였다.
‘주화입마?!’
내가 눈을 크게 뜨고 젓가락을 멈추자 그때까지 느긋하게 식사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전욱이 입을 열었다.
[자업자득이지. 창힐이 내려준 신의 육체로 키워놓은 반쪽짜리여…. 어찌 순수한 음신지력을 무궁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생각했는가. 네깟 놈에게 그렇게 편리한 기회가 주어지리라 생각했느냐?]
명백한 조롱의 목소리.
전욱은 이미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전욱이시여!! 아수라를 살려주십시오!”
[본좌는 딱히 해치려 한 적 없다. 그저 놈은 마(魔)로써 역량이 부족한 대가를 치르고 있을 뿐. 정녕 제 분수를 알고 자기 상차림 음식만 먹었다면 저리 되진 않았겠지.]
“뭣….”
[수십 겹으로 쌓인 음신지력은 내부에서 폭발적으로 첩첩(疊疊)되어 놈의 마력을 파쇄 시키는 중이다. 음식에 들어있다 하여 음신지력의 잠재력을 얕보았군.]
전욱은 옥좌에 턱을 괴며 나를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보다 네놈은 정녕 흥미롭구나. 마왕조차 진탕시켜 죽이는 양의 음신지력을 받아들였는데 여태 미동도 하지 않느냐? 크크크크….]
“…….”
그러고보니 나는 아직 멀쩡했다. 주화입마는 커녕 아직도 배가 덜 불러서 전이나 찌개를 시켜먹을까 생각하던 중이었다.
‘왜 늙지도 않는 거지?’
전욱의 말대로 이상한 일이라서 내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있자 전욱이 말했다.
[신경쓰지 않고 계속 먹어도 좋다. 귀빈이 아무리 먹는다 해도 연회의 주인은 음식을 제공할 의무가 있으니.]
“…제, 제길.”
계속 먹을 수 있겠냐고!
아수라가 음신지력 먹다가 뒈지게 생겼는데!
나는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외쳤다.
“약속해 주십시오! 지금 당장 저 시련을 돌파한다면 아수라의 목숨을 구해주시기로!”
아수라의 말대로 전생자인 내 목숨은 효율을 위해 내다버릴 수 있는 소모재다. 하지만 내 목숨과 달리 일단 동료가 되었다면 결코 아수라가 눈앞에서 죽게 내버려둘 수는 없다.
[자신 있는 건가?]
“전 두 말 하지 않겠습니다!”
[좋다. 약속하지….]
파밧
나는 즉시 멸혼보를 써서 기판 앞으로 뛰쳐나갔다. 아수라가 언제 죽을지 모르니 어떻게든 빠른 시간 내에 이 시련을 해결해야 한다.
‘일단 제일 가능성 높은 걸…!!’
나는 제일 먼저 생각했던 방법을 시도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눈을 감으며 내부에 존재하는 사대륜(四大輪)을 떠올렸고, 그 륜 중에서 물을 상징하는 륜을 향해 의지를 내뻗었다.
치링
깃발처럼 생긴 신기(神器)가 내 손에 소환됨과 동시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약속대로 나 바루나는 널 도와주겠다, 백웅!!]
물의 사대신기 바루나!
얼마 전에 수기를 공양한 대가로 그의 조력을 얻을 수 있게끔 되었으니 지금으로서는 바루나의 도움을 받는 게 최선이다. 사실 전욱의 눈 앞에서 사대신기를 꺼내고싶진 않았으나 지금은 이것저것 가릴 때가 아닌 것 같았다.
‘여태껏 제멋대로였던 전욱이 시도 한 번을 3수(壽)로 칠지도 몰라. 수를 낭비해선 안 돼.’
나는 마음속으로 바루나에게 말을 걸었다.
‘바루나여! 눈 앞의 저 방패를 장외(場外)로 내보내야 합니다. 할 수 있겠습니까?’
[내보내기만 하면 되나?]
‘네.’
[좋아. 그렇다면 소용돌이로 처리하겠다.]
소용돌이?
슈슈슈슉
깃발 끝에 커다란 수구(水球)가 맺히기 시작했다. 수구는 사람 머리통만한 크기로 부풀어 오르더니 잠시 후 퐁 하는 소리와 함께 날아가서 귀신들이 뭉쳐있는 방패에 부딪혔다. 그러나 귀신의 방패는 밀려나지 않았고 그저 수구가 터지면서 한바탕 물보라가 쏟아져서 귀신의 방패를 적실 뿐이었다.
‘실패인가?’
하지만 잠시 후, 물에 잔뜩 젖어있던 귀신의 방패는 마치 주위에 보이지 않는 부력(浮力)이 존재하는 것처럼 둥실하고 허공에 떠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무형의 소용돌이가 만들어져서 급격하게 방패를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쐐쇄쇄쇅
한참동안 뱅글뱅글 돌며 소용돌이의 중심으로 빨려들던 귀신의 방패는 한참 후 소용돌이 밑으로 가라앉아버렸고, 잠시 후 멀리 떨어진 곳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쿠궁!
[끼이이이.]
[우오오오오.]
허공에서 떨어진 방패가 육중한 소리를 내면서 부숴졌고, 방패를 이루며 군집해 있던 귀신들이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해냈다!!’
나는 단숨에 전욱이 내놓은 과제를 손쉽게 성공시키자 뛸듯이 기뻤지만 다음 순간 바루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전에 약속했던 대로 네 마력을 신기 사용량에 비례해서 삭제하겠다!]
어?
그 말이 끝나는 순간, 나는 갑자기 구토가 치밀어오르는 걸 느꼈다.
“우웨에에에엑.”
나는 그 자리에 꿇어앉아서 잔뜩 토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구토와 함께 입구멍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음식의 토사물이 아니라 시꺼먼 영기(靈氣)의 덩어리였다. 그 거무칙칙한 빛깔은 아무리 봐도 불길하기 짝이 없었고, 나는 구토를 할 때마다 내장을 함께 토하는 듯한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쿠워억
머, 멈추지를 않아.
“우웨에엑.”
내가 계속 토를 하고 있자 어느새인가 측근인 려와 열을 데리고 근처로 온 전욱이 물끄러미 내 구토장면을 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어찌된 일이지? 섭취한 음신지력과 알 수 없는 마력이 융합되어 있구나.]
옆에 있던 열이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속하의 견해로는 저 마력은 백웅의 내면에 본디 쌓여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음신지력과 이이제이(以夷制夷)를 이루다가 몸이 버티지 못하고 섞어서 내보내는 듯 하옵니다.]
[과연 그렇겠구나. 그런데 그 정도의 마력을 갖고있는데도 여태 인간의 성질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그것은… 실로 말도 안 되는 일이옵니다만….]
[크크크크. 아주 재밌구나.]
광소를 터뜨리던 전욱이 말했다.
[열. 가서 약속대로 아수라의 음신지력을 뽑아내어 살려줘라.]
[존명!]
파밧
열이 순간이동을 해서 사라지자 전욱은 계속 구토를 하는 나를 내려보고 있다가 말했다.
[방금 전 사용했던 그 정체모를 신기는 무엇인가?]
“우웨에에엑.”
[…….]
하지만 나는 대답할 겨를도 없이 계속 토하고 있었다. 아까까지 먹었던 걸 죄다 게워내는 느낌에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어느 새 내가 토해낸 덩어리가 바닥에 줄줄 흐를 정도가 되자 옆에 있던 려가 노한 듯 자신의 불꽃의 채찍을 들었다.
[감히 전욱 님 앞에서 이 무슨 불경이냐!]
그러자 슥 하고 전욱이 려를 손짓으로 제지했다. 려가 멈칫하자 전욱이 말했다.
[본디 백웅 네가 내기에 이겼으니 네 염(念)을 하나 들어줘야겠지. 하지만 지금 너는 본좌에게 크나큰 불경을 범했으니 이는 죽을 죄다. 그러므로 네 불경죄를 용서해주는 대신 내기의 대가는 모두 치른 걸로 하겠다.]
나는 전욱의 억지를 듣자 계속 토하고 있던 와중에도 눈을 부릅떴다.
“씨발 그게 무슨 억지… 우웩.”
미치겠네!! 내장을 토하는 기분이네!
내가 환장할 것 같아서 손발을 덜덜 떨고 있자 전욱의 청천벽력같은 한 마디가 들려왔다.
[괴로워 보이는군. 본좌는 자비로우니 너를 내 사도로 삼아서 그 고통에서 구해주겠노라.]
“……?!”
위이잉
전욱의 손가락이 내게 향하는 순간, 나는 갑자기 나와 전욱 사이에 보이지 않는 끈이 존재하는 게 보였다. 지금까지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게 갑자기 보인 느낌이었다. 그리고 끈이 서서히 구현화되면서 이어졌고, 나는 끈이 모두 이어지는 순간 내부에서 또 한 번의 폭발이 터져나오는 걸 느꼈다.
쿠콰쾅
“갸아아악.”
나는 볼품없는 비명을 지르며 전신에서 시꺼먼 기류가 잔뜩 흘러나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흘러나옴과 동시에 그게 계속해서 몸 안에 있던 음신지력과 섞여서 마치 진흙처럼 몸 밖으로 뚝뚝 떨어지는 불쾌함이 느껴졌다.
무언가 심상치 않다.
그런 느낌을 느낀 건 나만이 아닌지 어느 새 려가 전욱의 앞을 가로막으며 호위하는 태세를 취했고, 전욱 또한 눈빛이 달라지는 듯 했다.
‘끄으윽….’
구토는 끝났지만 볼품없을 정도로 바닥을 치는 기력과 체력 때문에 내가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그러나 그와는 별개로 나는 내 안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며 생명력을 얻기 시작했음을 깨달았다. 그 실체는 아직 파악할 수 없지만 뭔가가 시작되는 것만큼은 느껴졌다.
그리고 잠시 후 전욱이 방금 전까지와는 사뭇 다른 어조로 말했다.
[나와 이미 사도의 인과율을 잇는 자가 바로 너였구나. 지금껏 인과율의 역풍을 우려하여 살피지 않았건만 설마 그게 너였다니….]
“…….”
[너무 위험한 놈이군. 무슨 꿍꿍이를 품고 있느냐.]
상당한 적의(敵意)가 느껴진다. 나는 상황이 방금 전까지와는 완전히 달라졌다는 걸 육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나는 대답할 기력도 남지 않은 기분이었고, 지금 어떻게 해야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전욱의 이어진 명령에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려. 저 놈의 껍데기를 벗겨라.]
[존명.]
다 틀린건가?
쐐액 하는 소리와 함께 려의 불꽃 채찍이 내게로 날아오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불꽃채찍의 궤도와 속도는 내 감각으로 인지는 할 수 있었지만 어느 순간 시간을 관통해서 내 몸을 가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투신 축융답게 [작은 굴레]를 사용한 공격이기에 지금 내 힘으로는 려의 채찍을 도저히 피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지금껏 무예를 익혀온 가락 덕분일까, 려의 채찍 끝이 노리는 게 바로 내 가슴 한가운데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아마도 려의 성격상 내 가슴을 일격에 관통시키고 들어올려서 패대기를 치려는 것이리라.
‘제길!’
이번 생에 설마 잔혹하게 고문당하다가 죽게 될 줄은 몰랐는데!
내가 속으로 욕을 내뱉고 있을 때였다.
치지징!!
갑자기 내 몸 안에서 꿈틀거리던 시커먼 기운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내 몸을 둘러쌌고, 그 기운이 마치 갑주(甲胄)처럼 단단하게 내 피와 살을 옥죄는 게 느껴졌다.
[오오오…. 무시무시할 정도로 적층된 마력 때문에 반쯤 포기하고 있었건만… 마침내 힘의 윤곽을 드러내는데 성공했나니…!!]
콰칭!!
다음 순간, 갑주의 기운과 함께 내 한쪽 팔이 채찍앞으로 내밀어지자 채찍의 끝은 순식간에 내 팔을 감았다. 인과관계를 무시하는 [작은 굴레]의 공격이라서 내 팔을 절단하고 연이어서 가슴마저 꿰뚫을 게 분명했지만, 뜻밖에도 채찍은 촥 하는 소리를 내며 내 팔에 뱀처럼 감겼다.
[으음.]
려가 당황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팽팽하게 당겨지는 느낌과 함께 려의 채찍을 내가 팔로 감아서 당기는 형상이 되었다. 채찍은 내 팔을 절단하지 못한 것이다.
촤좌좍
[그걸 막다니 한 가락 하는구나. 허나 내 채찍은 저주를 실은 화염의 정수(精髓)이니 막은 걸 후회하게 되리라!!]
후왁!!
려는 눈에 불을 켜면서 자신의 권능을 써서 채찍에 화염을 잔뜩 실어서 발출시켰다. 본디 이 공격이면 팔부신중의 본체조차 중상을 입을 것이기에 나는 이번에야말로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몸을 에워싸고 있는 갑옷의 목소리가 다시금 울려퍼졌다.
[천조(天照)의 권능이 그 가시를 꺾으매 음신(陰神)의 권능이 나의 주인을 보호하리라!!]
우우웅
검은 갑옷의 내부에서 새하얀 태양빛이 흘러나오더니 려의 화염에 실려 있는 가공할 권능의 예봉(銳鋒)을 꺾었다. 그리고 한 차례 힘이 꺾인 화염채찍은 이윽고 태음(太陰)의 힘을 지닌 어둠의 파장에 밀려서 형편없이 뒤로 튕겨가고 말았다.
투웅!
[…아니!!]
자신의 공격을 가볍게 무효화당한 게 충격인 듯 려가 크게 놀라는 기색이었다. [작은 굴레]를 이용한 공격과 화염의 권능이 모두 먹혀버릴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게 분명하리라.
하지만 나는 그런 려를 신경 쓰지 못하고 내 내면에 있는 목소리에 집중했다. 왜냐하면 이제야 제정신이 돌아오면서 이 목소리의 정체를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설마….
“너, 너냐…?”
[그렇소.]
내 눈앞에 시꺼먼 음신(陰神)이 정령처럼 모습을 드러내었다. 인간아이 크기의 시꺼먼 흑암의 영체(靈體). 그 모습은 내가 일찍이 알고 있던 내 부하이며, 내가 직접 이름을 지어준 존재였다.
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칠흑의 음신의 머리 뒤에는 마치 태양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빛의 후광이 떠올라 있었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모습을 드러낸 음신은 전방을 향해 거대한 음신지력을 뿜어내며 포효했다.
[나, 흑웅(黑熊). 이름을 지어준 주인을 위해 모든 힘을 사용한다는 맹서(盟誓)를 지키러 왔소!!]